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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출신 국가대표 김호, 최영일의 활약(퍼옴)

[오늘의 월드컵] 그 시절 한일전은 '최영일'로 통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곧 '김호vs카마모토'의 대결이었다. 카마모토 쿠니시게는 당시 일본이 자랑하는 센터포워드였고 김호는 한국 대표팀의 붙박이 스토퍼였다. 한일전에서 둘의 싸움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김호는 거친 반칙까지 불사하며 카마모토를 전담 마크했고 카마모토는 어떻게든 김호를 따돌리고 골을 터뜨리려 했다. 20여년이 지난 후인 1990년대에는 판박이 같은 '제2의 전쟁'이 발발했다. 바로 '최영일vs미우라'의 대결이다. 김호가 그랬듯 최영일은 일본의 간판 스트라이커 미우라 카즈요시를 괴롭혔다.

프로 무대서 맹활약... 1994년 월드컵 참가

최영일은 1989년 동아대 졸업 후 현대(현 울산)에 입단했다. 같은 해 고정운, 심봉섭, 노경환, 김봉길 등 소문난 공격수들이 대거 프로 무대에 진출했기 때문에 수비수인 최영일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래고 대선배이자 명스토퍼 출신 김호 당시 감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정종선과 함께 현대의 중앙 수비를 책임졌다. 사령탑이 바뀌어도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1991년 김호 감독 후임으로 현대 지휘봉을 잡은 차범근 감독 역시 최영일을 신뢰했다. 최영일은 힘 좋은 선수를 선호하는 차범근 감독의 지도 아래 91년 시즌 34경기, 92년 37경기, 93년에 35경기에 출전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스토퍼로 자리를 굳힌 최영일은 1994년 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미국 월드컵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서는 박정배와 함께 더블 스토퍼로 나서 스페인 최고의 스트라이커 훌리오 살리나스와 미나블레스 펠리페를 상대했다. 2차전인 볼리비아전에서는 후반전 중반에 미드필더 노정윤 대신 교체 투입됐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독일전에서 다시 선발 출장한 최영일은 박정배와 함께 위르겐 클린스만, 칼 하인츠 리들레 투톱을 마크했다. 전반전에 클린스만에게 2골, 리들레에게 1골을 허용한 등 세계적 스트라이커의 기세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후반전 들어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홍명보, 황선홍의 연속골로 2-3까지 추격했지만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미우라 등장, 천적 관계의 시작

90년대 들어 일본 축구는 '탈(脫)아시아'를 외치며 한국을 위협했다. J리그의 성공적인 출범과 함께 대표팀의 전력을 끌어올리며 안팎으로 경쟁력을 강화하는 시기였다. 그 선봉에 선 이가 미우라 카즈요시였다. 미우라는 만 15살 때인 1982년에 시즈오카학원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유학 1세대로 마츠바라-코리티바-산토스 등 클럽에서 활약한 후 1990년 귀국해 요미우리 클럽에 입단한 그는 일본 축구의 희망이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일본 대표 선수로 모습을 드러낸 미우라는 1991년 7월 나가사키 종합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 정기전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상대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이 하석주의 결승골로 1-0의 승리를 거뒀지만 일본의 전력은 과거와 사뭇 달랐다. 미우라와 함께 브라질 출신 귀화 선수인 라모스 루이까지 합세했고, 경기력도 급상승했다. 이후 미우라는 주요 고비마다 한국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선수로 떠올랐다.

악연은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시작됐다.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한국이 일본에 0-1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당시 한국의 골문을 조준한 선수가 미우라였다. 일본에 패한 한국은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는 듯 했으나 마지막날 이라크와 일본이 2-2 무승부를 이루면서 기적처럼 본선행 티켓을 쥘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이 미우라에게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최영일이 나타났다.

'유럽파' 미우라 잡은 최영일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선전을 하고 돌아온 한국은 그해 10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노렸다. 개최국 일본도 브라질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로베르토 팔캉을 영입해 금메달 획득에 도전했다. 당시 미우라는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이탈리아 세리에A 제노아에 입단한 상태였는데, 대회 참가를 위해 일본 대표팀에 합류했다. 숙명의 라이벌전은 예상보다 일찍 성사됐다. 대회 8강전에서 만난 것이다.

이날 한국의 비쇼베츠 감독은 전반전에 무릎 부상 중인 홍명보를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유상철을 스위퍼로 두고 최영일과 이임생 더블 스토퍼로 포진시켰다. 전반전에 이임생이 '미우라 마크맨'으로 나섰지만 30분에 선제골을 빼앗겼다. 비쇼베츠 감독은 후반 들어 미우라의 마크맨을 최영일로 바꿨다. 이 작전은 주효했다. 최영일이 미우라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족쇄를 채웠다. 후반 10분 유상철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한국은 후반 32분 황선홍이 추가골을 성공시키며 고국 팬들을 열광시켰다. 9분 후 일본 수비수 이하라에게 기습적인 중거리슛을 허용하며 다시 2-2의 스코어가 됐지만 종료 직전 황선홍이 페널티킥으로 골을 추가하며 통쾌한 3-2 역전승을 거뒀다. 그 사이 미우라는 침묵했다. 미우라를 밀착마크한 최영일이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였다.

3년 후인 1997년 5월 21일,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 친선전에서 최영일과 미우라가 다시 만났다. 유상철의 골로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던 한국은 경기 종료 2분 전 주심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미우라에게 페널티킥 골을 내주며 1-1로 비겼다. 비록 페널티킥으로 실점했지만 이날 전후반 내내 미우라를 전담 마크한 최영일은 상대를 압박하며 결정적인 찬스를 허용하지 않았다.

97년 도쿄대첩, 라이벌전의 정점

4개월 후인 9월 28일. 역시 같은 장소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한국과 일본의 1차전 경기가 벌어졌다. 예선 내내 승승장구했던 한국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일본 역시 사상 첫 본선 진출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터였다. 경기 전부터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형성된 상태였다. 일본의 간판 공격수 미우라의 발 끝에는 일본 국민들의 기대감이 걸려 있었고, 한국의 주장이었던 최영일의 어깨에는 미우라를 봉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지워져 있었다.

이날 한국은 후반 22분 야마구치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그러나 후반 39분 이민성의 동점골에 이어 42분 서정원의 연속골로 극적인 2-1 역전승을 거뒀다. 최영일은 경기 내내 미우라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활동 범위를 축소시켰다. 둘의 신경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경기를 중계한 일본 방송국의 카메라 한 대는 아예 최영일과 미우라의 움직임만 집중적으로 따라다니기도 했다. 최영일의 플레이는 차범근 감독과 팬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10월 18일에 우즈베키스탄을 5-1로 대파한 한국은 일찌감치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후 11월 1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일본과 2차전을 맞이했다. 본선행이 확정된 한국으로서는 승패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반면 일본은 한국에 패할 경우 본선 진출이 어려워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한국은 홍명보 대신 신예 수비수 장대일을 기용하는 여유를 보였지만 미우라 옆에는 변함없이 최영일을 붙여놓았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나나미에게 실점 당한 한국은 36분 로페즈에게 두 번째 골을 허용했다. 결과와 달리 한국 선수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명, 최영일 만큼은 예외였다. 최영일은 미우라에게 좀처럼 여유를 주지 않고 강하게 마크했다. 결국 후반전에는 최영일의 반칙에 화가 난 미우라가 최영일에게 욕을 하면서 도발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갈 뻔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한국을 상대로 일본이 2-0으로 이겼지만 미우라는 최영일의 마크에 시달리며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카자흐스탄과 이란을 차례로 꺾고 기어이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미우라는 이듬해 본선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돼 결국 '꿈의 무대'인 월드컵에 서지 못했다. 반면 최영일은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최영일은 멕시코(1차전), 벨기에(3차전)에는 출전하지 않았고 네덜란드전에 선발 출장해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미우라 "내게 있어 최영일은 진짜 그림자였다"

최영일은 1994년, 1998년 월드컵에 2회 연속 참가해 4경기에 출장했지만 본선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숱한 화제를 만들어낸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의 헌신적인 플레이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본선 진출을 이끈 숨은 공로자 중 한 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일 축구의 긴장 관계가 극에 달했던 시절, 상대의 창끝을 무디게 만든 주역이었다. 일본전에서는 웃음조차 띠지 않고 미우라를 완벽하게 봉쇄하며 일본 축구팬들을 비탄에 빠트렸다.

신장 1m81의 최영일은 어깨가 넓은 체형의 스토퍼였다. 체격에 비해 뛸 때의 보폭이 좁아 발재간이 좋은 공격수들과의 1대1 대결에서 쉽게 뚫리지 않았다. 몸싸움에도 강했다. 특히 손을 이용한 반칙을 잘 구사했는데 그의 반칙은 주심과 부심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교묘했다. 최영일의 지능적인 수비에 가장 크게 고전한 공격수가 바로 90년대 일본 축구의 영웅 미우라 카즈요시다.

지난 2004년 미우라가 일본 스포츠 전문지 'Number'를 통해 최영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까지 만나본 수비수 중에 최영일만큼 나에게 ‘집중’ 했던 선수는 없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나면 어느새 사각형 얼굴의 선수가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최영일과 나는 함께였다. 한국에서는 최영일을 ‘미우라의 그림자' 라고 표현 한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진짜 그림자였다."


글. 김유석(축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