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정치근(시인)박찬석(작곡가)김동진(작곡가)최영섭(작곡가)
김동진(金東振, 일본식 이름:金森東振, 1913. 3. 22. ~ 2009. 7. 31)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이다. 아버지가 목사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23년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화성학, 작곡을 공부했다. 숭실중학교 밴드부에서 바리톤과 클라리넷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1년에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인 〈봄이 오면〉은 처음 본격적으로 작곡한 노래이다.
1932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숭실전문학교 2학년 때 작곡한 이은상 작시의 가곡 〈가고파〉는 한국인이 오래 애창하는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는 한국 가곡의 최고 역작이자 가곡 저변 확대에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2] 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일본에서는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협주곡〉 제1악장을 완성했다.
1939년에는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제1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때 만주작곡가협회에 가입하고 만주국 건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등 일본 제국의 만주 정책에 협조한 행적이 있다.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만주에 머무는 동안 관현악곡 〈양산가〉와 〈제례악〉, 교향시곡 〈만가〉를 비롯해 가곡 〈내마음〉, 〈수선화〉를 작곡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 패전하자 평양으로 돌아와 김원균평양음악대학의 전신인 국립음악학원 교수가 되었다. 평양에서도 관현악곡 〈신 밀양아리랑〉, 오페라 〈심청전〉을 썼으나 , 목사인 아버지가 수감되는 등 기독교 집안의 특성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하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을 틈타 대한민국으로 내려왔고,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대한민국 해군의 정훈음악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이후 숙명여자대학교 강사를 거쳐서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김동진에 따르면 이 시기에 뒷배경이 없는 월남 음악인이라는 이유로 활동에 많은 방해를 받고 좌익이라는 모함에 시달려야 했다.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화음악도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후 경희대학교로 옮겨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 기념 칸타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58),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을 위한 칸타타 〈민족의 축원〉(1967), 〈민족의 행진〉(1971), 경희대학교 축전용인 〈대학찬가〉(1969), 〈대학송가〉(1974) 등을 작곡했다. 가곡 〈목련화〉는 〈대학송가〉에 삽입된 곡으로, 본래 목련을 경희대학교 교화로 삼게 된 의미를 설명하고자 지은 작품이다.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며,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한편, 김동진의 가극 《심청전》(1977)은 평양에서 작곡했던 심정천을 개작하여 1930년대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창극을 보고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던 판소리의 현대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김동진은 이 장르에 '신창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또다른 신창악 가극 《춘향전》은 1997년에 초연되었다. (네이버 백과)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린 작곡가 김동진
2009.7.31 96세로 별세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고파’가 고인의 대표작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로 시작하는 ‘내 마음’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목련화’ ‘못 잊어’ 등 그의 작품은 이전의 가곡에 비해 규모가 크고 형식이 자유롭다. 여기에 서정적인 선율과 화성을 더해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고인이 남긴 가곡만 100편이 넘는다. 군가·동요 등을 합해 500편 이상을 작곡했다.
‘슈베르트’라는 별명을 얻도록 다작을 한 고인은 일찍 음악 교육을 받았다. 고인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목사이던 아버지의 영으로 교회 음악을 배우면서 음악의 구조와 규칙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진학, 바이올린과 피아노·작곡 교육을 받았다. 맑은 느낌의 가곡 ‘봄이 오면’은 그가 18세에 만들었으며, ‘가고파’는 불과 스무 살이던 1933년 작곡했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가곡 ‘뱃노래’ ‘파초’ 등 서정적인 작품을 계속 내놨다.
50년 6·25 전쟁 중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 뒤 서라벌예술대학과 경희대 음대에서 후학을 길렀다. 이 시기에는 ‘목련화’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심청전’ ‘춘향전’ 등 판소리를 가곡으로 만든 ‘신창악’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이때다. 84세이던 97년 오페라 ‘춘향전’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 듣고 감명받았던 판소리를 50여 년 동안 연구해 완성했다. 여든이 넘어서도 가곡은 물론 칸타타 등 대규모 합창곡으로 영역을 넓혔다.
고인의 제자인 작곡가 이안삼(66)씨는 “최근까지도 작곡을 계속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공연됐다고 하면 ‘젊은 작곡가들 무대도 부족한데 왜 자꾸 늙은이 노래를 부르느냐’고 했을 정도로 후배를 사랑했던 분”이라고 전했다. 작곡가 진규영(61·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씨는 고인을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곡 작곡가”로 꼽았다. 진씨는 “미성의 테너였기 때문에 목소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끌어내는 데 능숙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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