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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토스카의 희극

토스카의 희극

박무형

거실에서 책을 읽다가 잠시 TV 음악 채널을 켠다. 푸치니 오페라의 토스카 마지막 장면이 끝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슬픈 장면 같다. 관객들은 토스카의 마지막 투신장면에 그 비장한 음악과 함께 열광하고 커튼콜을 연발한다. 역시 오페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이 제격인 모양이다. 그런데 뜻밖의 이변으로 끝난 토스카의 에피소드가 얼핏 떠 올랐다. 오래전에 어느 음악 지휘자에게서 인상깊게 들었던 공연 비화다.

19세기 초의 로마, 오스트리아 점령군시대가 그 무대 배경이다.

오페라 <라 토스카>의 제3막, 로마의 <성 안젤로 성(城)> 옥상. 멀리 바티칸의 베드로 사원 지붕이 보이고,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짧은 호른 연주에 따라 막이 오르고 양치기 아이들이 양을 몰고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조금씩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화가 카바라도시는 사형을 받게 될 예정이다. 그의 친구인 정치범 탈옥수를 숨겨 주었다는 죄목이다. 병사들이 카바라도시를 데리고 나타나 간수에게 인계하자 그는 간수에게 반지를 뽑아주며 편지를 쓰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펜과 종이를 얻어 그의 애인 토스카에게 편지를 쓴다. 순간 슬픔이 복받치는 듯 종이를 던지고 캄캄한 성벽 위로 나온다.

애잔한 호른독주가 흐르는 가운데 그 유명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E luceven, le stelle…Oh!. dolci baci, o languide carezze…” 로 시작하며 흐느껴 부른다. “별은 빛나고, 대지는 향기로운데, 모랫길을 밟아오는 발자국 소리, 향기로운 그녀가 들어서며, 내 품에 안긴다. 오, 달콤한 입맞춤, 부드러운 손길로 날 떨게 하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는데…, 아, 이젠 영원히 사라진 사랑의 꿈이여, 절망 속에 나는 죽어가네, 나는 죽어가네…” 도대체 테너인 그의 성량은 어디까지 일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여유 있게 시원하고 거침없이 포효한다.

잠시 후 뜻밖에도 토스카가 사형 집행장으로 달려와 카바로도시에게 숨가쁘게 속삭인다. ‘총살형은 공포탄으로 집행될 것이니 총성이 나면 죽는시늉만 하라고, 그리고 병사들이 물러가면 자유를 향해 성 밖으로 나가자고….“

토스카는 제2막에서 카바라도시를 살리는 대가로 그녀의 몸을 요구하는 경시총감 스카르피아에게 사면장과 출국허가증까지 쓰게 했다. 그리고 질투와 욕정에 사로잡혀 덤벼드는 스카르피아를 식탁에 놓였던 칼로 여지없이 찔러 죽이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두 연인은 환희에 차서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

드디어 사형집행인이 다가왔다. 눈가리개를 씌우려 하자 그는 거절하고 벽에다 등을 대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사격수들이 일렬로 서서 일제히 사격하니 그는 쓰러진다. 이를 토스카는 잔잔한 눈길로 바라본다. 사격수들이 퇴장한 후에 카바라도시 곁으로 간 토스카는 그를 일으켜 세우려다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실제로 실탄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교활한 스카르피아에게 끝내 속았음을 비통해하며 울부짖는 순간, 병사들이 스카르피아를 먼저 살해한 그녀를 잡으려고 밑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토스카가 저기 있다! 잡아라.!” 그녀는 성채 위로 쫓겨 올라가 성 밖으로 몸을 던진다. 뛰어내린 성벽 위 허공에 핏빛이 낭자한 듯한 먼동의 햇빛이 솟구친다. <별은 빛나건만>의 아리아 음곡이 더욱 웅장하게 울려 퍼지면서 이 오페라는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는 참이었다.

청중은 일제히 일어나 극장이 떠나갈 듯 환호를 보내는데…아! 이게 왠일인가, 떨어졌던 토스카가 성벽 위로 도로 튀어 오르지 않는가!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계속 비명을 지르며 공처럼 방방 튀어 오르고 있었다. 이날 따라 무대 커튼은 쉽게 닫히질 않고…. 한동안 관객들은 놀라고 어리둥절하다가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고 그 웃음이 만장에 박장대소로 반전되었다고 한다. 토스카의 비극이 막판에 희극으로 반전된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사소한, 무대 밖 소도구 담당의 불찰에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토스카가 떨어진 자리에 푹신한 매트 대신에 텀블링을 갖다 놓았던 모양이다.

오페라는 연극과 음악이 어우르는 무대예술이요 오케스트라와 성악, 그리고 무대연출이 최상의 융합을 이끌어 내야 하는 거대한 종합예술이다. 이런 오페라가 훌륭하게 성취되어 대미를 장식하려는 즈음에 한갓 깃털 같은 흠결하나로 전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결과는 과히 충격적이다.

옛 동양의 고전 주역(周易)에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라는 구절이 있다. 강을 거의 다 건넜다는 것은 일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고 꼬리를 적신다는 것은 작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 것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함을 이르는 대목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늘그막에 이러한 <토스카의 희극>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정작 새겨 봄직한 일이다.

토스카의 희극.박무형선배님글.hwp

고교 선배님께서 쓰신 글 옮겨 놓습니다.

토스카의 희극.박무형선배님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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