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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학생의거와 이승만 대통령

4·19학생의거와 이승만 대통령
                                                       
 

	이성재 건국 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이사
 헌우 이성재(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이사
                                     
                                                                                                               
   1960년 4월19일! 이날은 4·19학생의거로 국내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자 정부에서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나는 당시 수도권에 근무하는 육군 헌병초급장교의 신분으로 직접 치안확보에 나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3·15부정선거로 알려진 1960년 3월15일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날이었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제1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를 한달 앞둔 2월15일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간 민주당 조병옥 대통령 후보는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위암수술을 받은 후 선거를 치르지 못한 채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애석하게도 영면하고 말았다.
  선관위에 후보등록을 마친 대통령후보가 유고일 때 후보자 변경등록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상대 대통령후보가 없는 이승만 후보로서는 사실상 제4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3·15정 부통령 선거는 이기붕과 장면간의 부통령· 대결이 되고 말았다.
  1956년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한 바 있는 이기붕 후보는 자유당 강경파와 선거 주무장관 최인규, 치안국장 이강학 등이 합세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목표 하에 선거절차를 진행하였다.
  선거 결과 이기붕 후보는 830만표를 얻어 180만표를 얻은 장면 후보를 650만표 차이로 압도적 승리를 하였으나 학생을 선두로 한 국민의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은 부정선거의 죄과를 감당하지 못해 1960년 4월28일 부인 박마리아, 장남 이강석(육군소위), 차남 이강욱(연세대 재학)과 함께 일가족 자결의 비극적인 길을 택했다.
  이기붕의 심복으로 부정선거를 진두지휘했던 최인규 내무장관 역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국무원 사무국장 신두영(훗날 감사원장 역임)의 국무원 속기록에 의하면 3·15선거 한달이 되도록 부정선거의 진상을 알지 못하였던 연로하신 이승만 대통령은 시국이 소란한 것을 눈치 채고 4월 12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에게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라고 하문하였다.
  이때 국무위원 그 누구도 사실을 보고 드리지 않았다.
  이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의 시국대책을 듣고 “가기이방(可欺以方)이라. 나를 속이는 짓이다. 긴급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辭免)대통령직을 면직한다는 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이미4·19의거 7일전인 4월12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직 하야의 뜻을 밝혔다.
  인의 장막 속에 둘러쌓여 부정선거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대통령은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라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을 치하하고 병원으로 부상 학생을 찾아가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너희가 맞았다”며 서러워하였다.
  한국 정변의 소식을 접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위로 서한을 보냈는데 이를 받아본 이승만 대통령은 답신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학생이 있는 우리나라는 결코 장래가 촉망 된다는 회신을 장총통에게 보낸 바 있디.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 후 대통령 전용차를 마다하고 경무대를 나와 사저인 이화장(梨花莊)을 향하는 이대통령을 본 국민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직을 11년 8개월 재임하는 동안 건국대통령, 교육대통령, 경제대통령, 과학대통령, 안보대통령직을 완벽하게 수행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민족의 주권을 빼앗겨 조국을 잃었던 35년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해방 후 미군정 3년 동안 파란만장한 상황 속에서 단군 이래 최초로 국민이 주인이 되고 시장경제를 원리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1948년 8월15일 건국하였으며, 또한 건국 2년만인 1950년 6월25일 북한 괴뢰 김일성 도당의 남침을 받고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원을 받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으며, 전후(戰後)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국가의 번영에 튼튼한 초석을 놓아 오늘 1인당 2만 달러를 상회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사저 이화장에 칩거하던 85세의 노령인 이승만 박사는 험난한 정국 탓으로 건강이 악화돼 1960년 5월29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독립운동을 하던 하와이로 요양 차 떠났다.

 
  이박사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새로 맞은 아들 이인수 박사 그리고 교민들과 제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호랑이는 죽을 때는 제 굴에서 죽는다며 사랑하는 내 조국 내 동포 옆에서 생을 마치겠다”고 귀국을 서둘렀지만 당시 군사정권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7월19일 한많은 90세를 일기로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서거하였다.
  이대통령의 유해는 아들처럼 사랑한 6·25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프리트 대장이 주선한 미군 수송기편으로 아들 이인수와 밴프리트 장군이 모시고 7월 23일 김포공항에 안착하였다.
  이날 공항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가 정중히 출영(出迎)하였다.
  귀국 후 이화장에 안치된 이박사의 유해는 7월 27일 수백만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평소 이박사가 아끼고 사랑하던 전몰장병들이 묻혀있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3·15선거와 4·19의거도 벌써 52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늦었지만 이제는 이박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고쳐야 할 때가 왔다. 앞에서도 열거했지만 부정선거의 책임은 진 이기붕 일가는 자결하였으며 선거 주무장관은 사형되었다. 이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로 하야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독재자가 스스로 하야한 역사는 없었다.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시리아 사태만 보더라도 이를 입증이 된다.
  공(功)8, 과(過)2로 평가받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언제까지 독재자로 매도만 할 것인가!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은 14년 집권하였으며 중국의 모택동은 문화혁명 때 5천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독재자 살인마로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국부로 받들고 있다.
이승만 박사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없다. 4·19정신은 바로 이박사의 건국정신이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 더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제는 이 어른의 건국정신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받들어 후손에 길이 전하는 일이 우리들의 책무이다.
  건국의 아버지!
  국부 이승만 박사와 4·19의거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명복을 빌면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광화문 한복판에 건립되고 서울 중심지에 기념관을 세우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소스: 대한민국 헌병전우 중앙회 憲友 2012년 VOL.87 겨울호 P29~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