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일조각, 2013. ![]() [이주영 | 건국대 명예교수 ] |
이승만의 이해와 연구를 위한 표준서
제1장 “이승만의 정치 역정”은 90년에 걸친 이승만의 긴 생애를 학문사적인 견지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의 하나는 이승만의 이름이 1919년의 3·1운동 직후에 나타난 여러 개의 임시정부 조직에서 모두 대통령, 총리급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승만이 통합된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임된 것은 이미 구한말부터 거물급 저명인사로서 민족지도자의 반열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20대에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혁명가로서 1898년 말에는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고 1905년 8월에는 대한제국의 밀사로서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는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을 거치면서 다른 민족지도자들이 갖지 못한 최고의 학위를 얻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치를 찾아주려는 저자
그러므로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의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 임시정부 대표로 강대국들을 상대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달했을 때 이승만은 이미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장에서는 미국과 영국이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는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터뜨려 미국 정부와 영국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고 소련 정부를 분노케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즉, 한국인으로 이승만만큼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의 생애 부분 가운데서 특히 독립운동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의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이승만이 무장투쟁을 비판하고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독립운동가로 보려 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으로 생각된다. 사실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장투쟁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역사가들은 이승만에게만 무장투쟁의 기준을 적용해 독립운동가의 반열에서 빼버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승만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러서는 무장투쟁을 강조하고 그것을 위해 활동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미정보첩보국(COI)과 그 후신인 정보전략국(OSS)과 협력해 한국인 청년들을 훈련시켜 특공대로 한반도에 투입하려던 '냅코(NAPKO) 작전'과 ‘독수리 작전’은 이승만과 미 육군부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종교가 문명을 결정한다고 보는 문명비평가
제2장의 “이승만의 개혁 건국 사상”은 정치사상가로서의 이승만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승만이 사상적으로 뿌리가 없는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이론체계를 갖춘 사상가로 보고 있다. 이승만은 한국인들이 문명개화하기 위해서는 유교를 버리고 혁명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했다. 저자는 그것을 종교가 문명의 유형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문명비평가의 시각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은 상업과 무역을 강조하는 시장경제론자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의 공화제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제도로 본 자유주의 혁명가였지만, 구한말 한국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타협안으로 입헌군주제, 즉 헌법정치의 대안을 제시한 정치이론가였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자
제3장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서는 최대의 공로가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계획을 좌절시킴으로써 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대통령 선출방식을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선거로 바꾸어 놓는 ‘무혈 혁명’을 달성하고,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고, 의회정치와 선거를 지속시킴으로써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킨 것이었다. 경제와 사회 분야에 있어서의 이승만의 업적은 자유방임과 평등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해방직후의 사회주의적인 풍토를 감안하여 1946년 2월의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수정 자본주의를 헌법에 구현했다. 그러나 점차 이승만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지주제와 통제경제를 자유화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49년의 농지개혁과 1954년의 제2차 헌법 개정이었다. 그에 따라 농촌사회가 자작농의 자유로운 사회로 바뀌고 민간 기업 중심의 시장경제 정책이 채택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 분야에서도 1953년의 신형법에서 간통죄의 경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하는 쌍벌죄를 도입함으로써 남녀평등을 실현했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는 의무교육제가 도입되고 문맹퇴치 운동이 추진됨으로써 그의 재임기간에 문맹률을 78퍼센트에서 22퍼센트로 크게 낮추고, 고급 인력 양성에도 주력하여 그의 재임기간에 5천명에 가까운 정규 유학생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1만 명에 가까운 장교와 하사관을 미국에 파견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권력구조를 바꾼 영향력 있는 지도자
제4장 “제헌국회 의장 이승만과 대한민국 헌법 제정”에서 저자는 건국 과정에서 유진오가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적 골격을 결정했다는 데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이승만이 국회의장 자격으로 권력구조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에 걸친 성명과 두 번에 걸친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장 출석을 통해 영국식 내각책임제를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한 사람도 사실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이 1919년의 기미독립정신을 계승했음을 넣도록 압력을 넣음으로써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관련성을 부각시켰다. 비록 그가 마음으로 생각한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가 아닌 한성 임시정부였지만, 어쨌든 그는 1948년의 대한민국과 1919년의 3·1운동을 연계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약소국가 생존에 동맹이 필수임을 아는 지도자
제5장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는 1953년의 한·미동맹이 구한말 조선의 연미(聯美)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은 한국이 동맹국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미국을 동맹국으로 확실히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그것을 거부하자, 그는 수차례에 걸친 단독 북진, 한국군의 유엔군 탈퇴의 위협으로 미국을 협박하다가 결국은 1953년 6월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회담 자체를 깨뜨리기 위한 ‘벼랑끝 전술’까지 사용했다. 그 결과 이승만은 미·일동맹 수준의 한미동맹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강대국 미국에 의해 강요된 불평등조약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강압적 요구로 미국과 동등한 동맹국 자격을 얻게 된 평등조약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조약은 이승만의 예언대로 후손들에게 혜택이 되어 대한민국은 안보의 울타리 안에서 경제성장에 전력을 쏟아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제6장 “3·1운동 후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새나라 건국 구상”에서 저자는 서재필이 후배인 이승만을 민족의 지도자로 깍듯이 예우하는 사실들을 들어 두 사람의 관계가 경쟁이고 대립적이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카이로 선언의 탄생에 영향을 준 이승만
서평자의 입장에서 이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카이로 선언이 나오게 된 과정에서 이승만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 동안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제안한 사람은 중국의 장개석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리고 미국의 루즈벨트는 그것에 동의한 것으로만 생각되어 왔다. 그렇게 된 것은 카이로 회담에 관한 미국의 공식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연구자들이 중화민국의 자료에만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중화민국의 기록은 그 회담이 있은 지 10년만인 1953년에야 작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문헌들은 카이로에서 한국의 독립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루즈벨트 대통령이고 장개석은 오히려 그 제의에 소극적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1943년 11월 23일 밤 카이로의 루즈벨트 숙소에는 장개석 부부가 초청되어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 날 루즈벨트는 처칠에게 장개석이 한국에 대한 역사적 지위, 즉 옛날의 종주권을 확인하려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이 사실이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이다. 게다가 카이로 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적극 추진했다면 중국대표단이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해서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제시했을 것이다. 이러한 루즈벨트 주장설은 ①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 『월간조선』(2007.10), ②정일화의 『카이로 선언:한국독립의 문』(2010), ③이주영의 “한국사 교과서의 이승만 서술”, 『이승만연구의 흐름과 쟁점』(2012)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주장을 좀 더 발전시킴으로써 앞으로의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발판을 놓고 있는 것이다.
카이로에서 루즈벨트가 한국의 독립을 먼저 제의하고 해리 홉킨스가 선언문을 기초하게 된 데는 이승만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루즈벨트 주도설의 골자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1919년 이후 미국의 여론과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한국의 독립을 설득해 왔다. 이승만은 1941년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견한 그의 베스트셀러 『일본 내막기』를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에게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대통령과 국무부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계속 전달했다. 이승만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한미협회의 미국인들도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대통령과 국무부에 보냈다. 그러한 서한에 대해 백악관으로부터 세밀하게 검토되었다는 답장이 오기도 했다.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여사는 이승만 부부를 직접 불러 만나기도 했다. 이승만의 뜻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루즈벨트가 1943년 2월 23일의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잘 알고 있다고 언급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루즈벨트의 정치적 오른팔로서 카이로 선언문을 기초한 해리 홉킨스가 독실한 감리교도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승만과 해리 홉킨스의 연결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개신교 지도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그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미연방 상원 원목으로 정치인들과 깊은 교분이 있는 감리교 목사 프레데릭 해리스였다. 이승만이 해리 홉킨스와 직접 접촉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개신교 지도자들을 통해 이승만의 뜻이 해리 홉킨스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이 책은 그러한 방향으로 이승만 연구가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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