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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으로 변한 동화(童話)의 세계 한라산(漢拏山)

설국(雪國)으로 변한 동화(童話)의 세계 한라산(山)

 

1, 한반도의 진산(鎭山)으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산(靈山) 한라산(漢拏山)
 
국립공원 한라산은 면적 약 133㎢(제주시 57.5㎢, 북제주군 21.2㎢, 서귀포시 34.2㎢, 남제주군 20.1㎢), 동서길이 약 17km이며 한라산 정상은 해발 표고 1,947.269m로 한반도에서는 백두산(2,750m) 다음으로 높고, 북위 40° 이남 즉 남한(南韓)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1970년 3월 24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에는 어리목을 중심으로 눈꽃축제가 열린다.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중에서 제일 높은 산인 한라산은 제3기 말∼ 제4기 초에 분출한 휴화산으로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줄기는 제주도 중앙에서 동서로 뻗는다. 남쪽은 경사가 심한 반면 북쪽은 완만하고, 동서쪽은 비교적 높으면서도 평탄하다.
예로부터 부악()·원산()·진산()·선산()·두무악()·영주산()·부라산()·혈망봉()·여장군() 등 많은 이름으로 불렸고, 민간 신앙의 전설상으로는 북쪽의 금강산, 반도 남쪽의 지리산과 함께 세개의 신령스러운 산인 삼신산() 가운데 하나로 치부(置簿)되어 왔다.
 
한라산(漢拏山)이라는 이름은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인 바, 즉 한라산(漢拏山)의 한()은 천상을 흐르는 은하수()를 뜻하며, 라()는 맞당길나(引) 혹은 잡을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있는 노인성()을 볼 수 있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부악이란 산정의 깊고 넓은 분화구가 연못으로 되어 있어 마치 솥(釜)에 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바, 이 연못은 성록(鹿)인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백록담(鹿潭)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4년(세조 10년) 2월에 제주에서 흰 사슴을 헌납하였다(鹿)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고, 사방 주위가 아래로 차차 낮아져 원뿔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붙여졌던 바, 맑은 날 해남이나 진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산 전체가 완만한 원뿔로 보인다.
진산(鎭山)이란 보통 도읍의 뒤에 위치하여 그 지방을 편안하게 지켜주는 의미를 가진다. 한라산을 진산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한반도로 밀려오는 남태평양의 큰 바닷바람을 한라산이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두무악(頭無岳)이란 글자그대로 머리가 없는 산을 의미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잘못하여 활끝으로 천제()의 배꼽을 건드렸는데, 이에 화가 난 천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산정부가 던져진 곳은 지금의 산방산()이며, 뽑혀서 움푹 팬 곳은 백록담(鹿)이 되었다고 한다. 공고롭게도 백록담의 밑면 넓이와 산방산의 밑면 넓이가 똑같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주산()이란 중국 한나라 때 사마천이 지은 역사서인  ≪사기(記)≫에서 유래하는 바, 사기에 이르기를 "바다 가운데에 봉래()·방장()·영주(州) 등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불사()의 약초가 있어 신선(神仙)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했었던 진(秦)나라의 시황제(皇帝)인 진시황()은 서기 전 200년경 술사(術) 서불()에게 그 약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정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邑誌)에 의하면, 한라산을 등산하는 데는 대정현 쪽으로 험한 산길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따라 수목 사이를 헤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곧 운무가 사방을 덮어버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5월에도 눈이 남아 있어 얼음이 필요하면 산에 올라가서 가죽 부대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녹담만설(鹿)이라는 것으로 제주 10경 중의 하나이다.
한라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조정에서 해마다 산정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산제()를 지냈는데, 산제를 지내러 갔던 백성들이 동사(冬死)하기도 하였다. 이에 1469년(예종 1년) 목사 이약동()은 지금의 산천단()에 산신묘(山神廟)를 세우고 이곳에서 산제를 지내도록 하여 그 석단(石壇)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정상에는 둘레 약 3㎞, 지름 500m의 화구호인 백록담(鹿)이 있으며, 주위 사방에 흙붉은오름(岳)·사라오름(岳)·성널오름(岳)·어승생오름(岳) 등 360여 개의 측화산을 거느리고 있다.
또 해안지대에는 폭포와 주상절리 등 아름다운 화산지형이 펼쳐지고, 해발고도에 따라 아열대·온대·냉대 등 1,800여 종에 달하는 고산식물이 자생하여 식생의 변화가 뚜렷하다. 봄의 철쭉·진달래·유채,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과 운해가 절경이며, 곳곳에서 한라산의 상징인 노루를 볼 수 있고, 한라산의 명물로는 어리목, 한란, 오백나한, 관음사 등이 있다. 
1002년(고려 목종 5년)과 1007년에 분화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輿)》에 나오는데, 1455년(조선 세조 1년)과 1670년(현종 11년)에는 지진이 일어나 피해가 컸다는 기록도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의 전역을 지배하며, 동심원상의 등고선을 나타내어 순상화산()에 속한다. 한라산은 약 360개의 측화산()과 정상부의 백록담, 해안지대의 폭포와 주상절리( : 다각형 기둥모양의 금) 등의 화산지형, 난대성기후의 희귀식물 및 고도에 따른 식생대()의 변화 등 남국적()인 정서를 짙게 풍겨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추고 있기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 한라산(漢拏山)의 역사와 특징
 
(1) 지질·지형
신생대 제3기 말에서 제4기에 이르는 5기()의 화산분출로 형성되었다. 제1기 화산분출은 기저현무암과 서귀포층을 형성하여 해저 기반을 이루며, 제2기 화산분출은 표선리 현무암과 서귀포 조면암 및 중문 조면암을 형성하여 육상지형을 이룬다.
제3기 분출기는 열로분출()에서 중심분출 형태로 전환되는 시기로서, 제주 현무암·하효리 현무암·법정리 조면암 등이 분출하여 한라산 화산체()가 950m에 달하였다. 제4기 화산분출은 고산 지대에 집중되어 시흥리현무암·성판악현무암·한라산현무암 등을 형성하였다.
제5기 분출기는 백록담 화산폭발로 백록담 현무암이 분출하였고 고산 지대에는 300여 개의 분석구()가 형성되었다.
한라산 일대의 안산암()에는 철분이 풍부한 감람석()이 많고, 현무암에는 알칼리 성분이 풍부하다. 이처럼 한라산체는 알칼리감람석현무암질 마그마의 분출로 이루어져 남태평양 지역에 산재하는 화산지질과 비슷하다.
한라산의 사면은 고도와 경사에 따라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고도 200m 이하 해안저지대는 경사도 4° 이하로 완만하며, 고도 200∼600m 사면은 중산간지대이고, 600∼1, 200m의 산악지대는 경사도 10∼20°로 다소 가파르며, 1,200m 이상의 정상부는 경사도 20°이상의 고산 지대를 이룬다. 한라산의 사면에는 약 360개의 측화산이 발달하였다.
제2기 분출기에 형성된 조면암질 기생화산은 산방산·화순월라봉()·군산() 등으로 동일 구조선상에 분포하며, 수중파쇄암 기생화산은 성산봉()·두산봉()·고산봉() 등으로 해중분출지형이다.
기생화산의 60%를 차지하는 분석구는 제5기 분출기에 형성되었으며 200m 이상의 사면에 분포한다. 하천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방사상 형태를 나타내며, 기반암이 불투수층인 경우 조밀하다.
하천은 대체로 직류하며, 사면의 경사가 급하여 침식력이 크기 때문에 계곡이 깊고, 지반의 융기 및 해수면 변동과 관련하여 강정천()·창고천() 양안에는 하안단구가 발달하였다.
경사가 완만한 용암대지() 지역에는 용암동굴이 많이 분포한다. 만장굴()은 길이 1만 3268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이며, 빌레못동굴은 길이 1만 1748m로 단일동굴로서는 세계 최장()이다.
용암동굴은 대체로 직선적·수평적이며, 용암동굴선반·용암종유·새끼구조용암 등의 미지형이 발달하였고, 2, 3층의 구조를 나타낸다.
토양은 화산재·화산모래·화산력 등을 모재로 한 화산회토로서, 유기물과의 결합력이 큰 치양토()가 대부분이다. 이 토양은 유기물 함량과 염기 치환 용량은 높으나 염기의 흡착력이 약하고 배수가 양호하여 용탈이 심하기 때문에 작물 생장에 양호한 편은 아니다.
(2) 기후
한라산은 고도가 높아 여러 층의 기후대를 형성하지만, 대체적으로 중위도 난대성에 속하고 해양성이 강하며 남북의 지역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은 15.5℃이나 남 사면이 약 0.7℃ 높다. 연강수량은 북 사면이 1,440㎜, 남 사면이 1,718㎜로 우리 나라 최다
우(最多雨) 지역에 속하는데, 계절별로는 겨울철에는 북 사면이, 여름철에는 남 사면이 강수가 많다.
이처럼 해안저지에서는 아열대성기후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고도가 증가함에 따라 기온이 하강하여 고도별 기후대의 차이가 뚜렷하다.
(3) 동.식물 생태
식물상은 300여 종의 특산 및 희귀식물을 포함하여 1,800여 종의 육상식물이 한라산의 높이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한다. 식물분포 구계상 중일식물구계() 중 한일난대아계()에 속하며, 표시종()은 붉가시나무·구실잣밤나무·동백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이다.
이 구역에는 287종의 수목이 있는데 이 중에서 31%(89종)가 상록수이며, 그 중 62%는 난대성으로 해안에 가까운 계곡과 평지 및 산록지대에서 자생한다. 한라산 보존구역의 중심이 되는 한라산의 식물군집은 고도에 따른 수직적 분포대의 구분이 현저하다. 이 산은 섬에 있어 다른 산들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륙의 산들에 비하여 그 환경이 비교적 단순하다.
이 산의 식물군집은 무기적 자연환경과 지질사적 요소 및 인위적인 요소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다. 편의상 우점종()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상록활엽수림은 북쪽에서는 해안선에서 고도 600m까지, 남쪽에서는 700∼1,100m에까지 이른다. 표시종은 남오미자·참식나무·사스레피나무·굴거리나무·좀굴거리나무 등이다.
난대상록수림은 녹나무속·가마귀쪽나무속·후박나무속·벌꿀속·모밀잣밤나무속·가시나무아속·모람속·돈나무속·다정큼나무속·굴거리나무속·호랑가시나무속·보리수과·담팔수속·동백나무속·사스레피나무속·후피향나무속·산유자나무속·황칠나무속·식나무속·쥐똥나무속·마삭줄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난대성 상록활엽수의 80%는 일본과의 공통종이며, 고유종은 8%에 불과하다.
한라산 중복()의 온대림은 한반도에서와 같이 서나무·졸참나무·단풍나무·산벚나무 등으로 구성된다. 그 윗부분에는 물참나무의 순림()이 발달하였으며, 더 높은 곳의 한대림은 구상나무·고채목 등이 대표적인 종이다. 정상부에는 떡버들·털진달래·눈향나무·시로미·설앵초·담매·들꽃나무 등이 자란다.
이와 같이 한라산에는 난대·온대·한대의 식물대가 분포하는데, 그 한계선은 남쪽이 북쪽보다 높다. 이는 해류의 영향에 따른 기온·강수량·설선()의 차이 및 계절풍의 영향 등 주로 기상 조건의 차이 때문이다.
특산 식물로는 바늘엉겅퀴·한라구절초·좀민들레·한라송이풀·애기솔나물·두메대극·섬바위강대·게주황기·제주달구지풀·솔비나무·제주당귀·한라개송이·바위젓가락나물·한라꿩의다리·섬쥐송이·섬매자나무·좀갈매나무·병개암나무·시옥물참나무·가시복분자·제주조릿대 등 33종이 있다.
이 밖에도 우리 나라의 중부·북부와 일본의 고산 지대에만 분포하는 들쭉나무, 일본의 서남단부에서만 자라는 참꽃나무, 북방분자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는 담매·시로미, 난대성식물로서 우리 나라의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해녀콩·문주란·파초일엽·한란·목련·환근·비자나무·솔잎란·왕벚나무 등이 있다. 특히, 일본이 나라의 꽃으로 삼고 있는 왕벚나무의 자생지도 제주도이다.
1997년 현재 식생의 구성은 20여 개의 군집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서어나무·개서어나무 군집이 전체 면적의 53.7%를 차지하고, 물참나무·졸참나무 군집이 25.7%, 소나무 군집이 8.3%, 구상나무 군집이 4.5% 로 되어 있다.
동물상은 분포 구계상 구북구() 중 북부중국아계의 한국구()에 속한다. 제주도는 대륙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대성과 열대성이 섞여 서식한다. 예를 들면, 평지에는 아열대성의 맹꽁이와 난대성의 청개구리가 서식하며, 중복 삼림지대에는 북방산개구리가 살고 있고 산정의 백록담 연안에는 무당개구리가 있다.
북방산개구리와 무당개구리는 모두 북방분자이며, 특히 무당개구리는 중국 윈난성()의 고지와 한라산 지대가 분포상 남한계선을 형성한다.
곤충류에서도 한대성인 산굴뚝나비와 아열대성인 암붉은오색나비·남방공작나비 등이 함께 서식한다.
제주도의 동물상은 곤충류 1,602종(제주도 특산 12종 포함), 양서·파충류 17종, 조류 240종, 포유류 19종 등이다. 특산종으로는 모주둥이노린재·제주양코스커딱정벌레·제주풍뎅이·제주은주둥이벌참위영벌 등이 있다.
포유류로는 맹수는 없으나 노루가 많고 제주족제비가 서식한다. 조류로는 팔색조가 번식하고 제주딱다구리·꿩 등이 많다. 산지 동물들 가운데 멧돼지·대륙사슴은 전멸하였고 큰노루·살쾡이·원앙기러기·두루미·흑두루미·재두루미·무당개구리 등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4) 역사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동굴유적에서 긁개·첨기·홈날석기·돌날 등의 타제석기와 갈색곰·순록 등의 화석과 뼈가 발견되었고, 조천읍 북촌리유적에서 삼각형 점렬()무늬토기와 원형 점렬무늬토기가 발견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는 전역에서 발견되며, 고인돌·옹관묘·석곽묘·공렬토기() 등도 발견된다.
제주도의 삼성신화()에 의하면 고()·양()·부() 3신이 모흥혈(, 삼성혈, 사적 제134호)에서 나와 자손을 번창하게 하였으며, 그 뒤 고을나()의 15세 손이 신라에 내조()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밀려 들어와 분전하다가 항파두리()에서 패하였다.
그 뒤 원나라는 1276년(충렬왕 2년)에 몽고말 160필을 들여와 성산읍 수산평()에 방목하였고, 말 사육의 전문가인 목호()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제주도의 목장은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성종 때에 100개로 정리되었다.
이 지역은 자연경관과 식물에 관련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은 많으나 사적문화재는 빈약하다. 사찰로는 관음사()·천왕사()·산방산사() 등이 있고, 성읍()에는 향교와 성지()·현청사·돌하루방 등이 있다.
제주도민들은 11세기 초에 두 차례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 폭발로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러한 한라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화산 폭발이 있을 때마다 동굴에 숨거나 잠시 테우(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하였을지언정 그들 스스로 이곳에서의 삶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바람 많고 재난 많은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한라산이 곧 삶의 터전으로 한라산 없는 섬 생활이란 생각지도 못하였다. 더욱이 태풍과 가뭄과 풍랑은 제주민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는 재해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여건에 의해서도 끊일 줄 몰랐다. 몽고의 야만적인 지배생활이 그랬으며, 근세에는 일부 파견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이 처하였던 이러한 악조건은 오히려 이들에게 내핍과 인고의 정신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타고난 강인함과 근면성 앞에는 어떤 도전도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산()인 한라산은 척박한 땅을 주었지만, 정직하고 순박하며 의롭게 살면 마음이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삼무정신()이다.
삼무(三無)란 도둑이 없고(), 대문이 없으며(), 거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무는 정의의 정신을 일컫는 말이고, 대문무는 상호 신뢰의 정신을 의미하며, 걸무는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근면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제주도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켜져 온 미풍양속인 삼무정신, 즉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은 새마을정신의 모체가 되어 국민 모두의 정신으로 승화되는 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한라산이 준 인고의 정신은 오늘의 풍요로운 제주를 일구는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우리 나라 서남쪽의 태평양에 자리한 화산도인 제주도와 한라산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독특한 풍물을 빚어냄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관광지로 부상하였다. 한라산은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에 솟아나 삼라만상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태풍과 전쟁 및 굶주림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원나라가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 삼별초를 이끌고 온 김통정()은 항파두리전투에서 패하고 붉은오름의 싸움에서 전우들을 모두 잃자 산 위로 올라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에는 유난히도 민란이 많았다. 1168년(의종 22년)의 양수()의 난을 비롯하여 모두 20여 차례의 민란이 있었으며, 지형상 왜(倭)와 가깝게 있다보니 왜구(倭寇)의 침입도 빈번하였다.
이처럼 한라산은 영광보다는 분노를 더 많이 먹고 살았으면서도, 천지의 대주재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고 민족의 산으로서 민족과 함께 숨결을 같이 해왔다.
(5) 관광자원
제주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 중심인 한라산(1,950m)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원래는 종상화산()이었는데 심한 해식()을 받아 잔류산괴()가 되었다.
이 잔류산괴의 정상부 화구에서 플라이스토세()에 다시 분화하였는데, 이때 분출된 유동성이 강한 알칼리성 현무암질이 사방으로 흘러내려 오늘날과 같은 순상화산()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제주 전체가 한라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상에 돌출한 암벽 부분이 종상화산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제주에는 약 250개의 기생화산()이 솟아 있는데 한라산 국립공원 안에 40개 가량이 있다.
한라산의 상봉에는 지름이 약 500m인 화구가 있고, 화구의 동쪽에 수심 1∼2m의 백록담(鹿)이 있다. 한라산을 횡단하는 2개의 도로 중 제1횡단도로가 1962년에 착공하여 4년 뒤 개통되었는데,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43km의 11호 국도로 최고점은 성판악휴게소(:750m)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성널오름(:1,215m)·사라오름(岳)을 지나 한라산까지 12km 가량의 등산로가 나 있다. 성판악휴게소를 지나면 남제주군으로서 한라산의 남사면이 되므로 강수량도 많아지고 기온도 높아져서 난대성식물이 자라 귤 재배가 활발하다.
제주 북쪽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600m, 남쪽 사면에서는 700∼1,100m에 이르는 산허리까지 남오미자·붉가시나무·후박나무·사스레피나무·녹나무·굴거리나무·동백나무 등의 난대성 상록활엽수림이 무성하고, 그보다 높은 공원지대로 올라가면 서어나무·굴참나무·단풍나무·산벚나무 등의 온대 낙엽수림이 형성된다.
북사면의 1,000m, 남사면의 1,500m 이상의 고지대에는 고채목·구상나무 등의 냉대림 숲이 우거지고, 산정에는 떡버들·털진달래·설앵초 등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식물상은 특이한 지형과 더불어 남국적인 정서를 짙게 한다. 검붉은 흙과 난대림의 녹음이 잘 어울리는데 특히 제1횡단도로에는 덧나무·왕벚나무·굴거리나무·물푸레나무·서어나무·때죽나무·붉가시나무 등이 밀림을 이루어 ‘한라산의 숲터널’ ‘남국의 꿈의 드라이브웨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산천단()에서 도보로 한라산으로 곧바로 올라가는 지름길과 공원 경계선이 교차하는 해발고도 600m 지점인 한라산의 동북쪽 기슭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산인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를 지나 더 오르면 화산침식잔구()인 개미목[]에 이르는데 이곳에는 산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제주시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뛰어나다.
제2횡단도로는 한라산의 서쪽 사면을 지나 서귀포시의 중문()과 제주시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이는 국립공원의 서쪽 경계를 이루면서 공원에 이르기 전에 영실기암()으로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을 지난다. 영실기암은 한라산의 정상에 가장 가깝고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지점이므로 근년에는 한라산 상봉에 이르는 등산로 입구로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기암괴석이 많아 오백나한()이라고도 부른다. 이 오백나한은 달리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슬하에 오백명의 장사 아들을 둔 노모가 어느날 아들에게 줄 국을 끓이다 그만 실수로 국솥에 빠져 죽었는데, 이를 모르고 이 국을 맛있게 먹었던 499명의 아들들에게 외출했다 돌아온 막내가 어머니가 어딧느냐고 물으면서 찾다가 최후로 국솥을 보자 그 속에 어머니의 뼈가 있는지라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형들과 같이 할 수 없다면서 차귀도로 가서 장군바위가 되자 그제사 남은 499명의 아들들도 뉘우치면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하는데, 현재도 영실 병풍바위 주위로 바위로 변한 이들 499명의 장사들이 우람하게 서 있어서 이같은 전설을 더욱 더 실감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4km 지점에 있는 1100고지휴게소는 제2횡단도로의 최고점으로서 한국의 포장도로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기온이 해안지역보다 6℃ 가량이나 낮다. 휴게소를 지나 북쪽 사면인 제주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어승생오름[:1,169m]이 나타나는데 부근에 제주 유일의 수원지()가 축조되어 있어 제주시의 상수도로 이용되는 한편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정상 쪽으로 오르면 골머리·천왕사()·아흔아홉골(洞)·선녀폭포·어리목 등의 명소에 이르는데, 특히 어리목에서 한라산 상봉 가까이의 장구목까지는 철쭉밭이 펼쳐져 5월의 개화기에는 한라산 철쭉제()를 올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공원 안에는 사제비 동산·만세 동산·윗세오름·삼각봉(1,695m)·탐라계곡·와이(Y)계곡·옥관릉()·서부벽(西)·남북벽()·구린굴·용진굴·홍궤·등터·진궤·상궤·탑궤·평궤·석굴암 등의 명소가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는 제주의 동물상()은 곤충류가 137과 873종, 거미류와 다족류()가 27과 74종, 척추동물은 아종()까지 포함하여 양서류 8종, 파충류 8종, 조류 198종, 포유류 17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은 제주도 면적(1,820㎢)의 7.3%를 차지하는데, 공원지역 외곽에 별도로 19㎢ 가량의 공원보호구역이 설정되어 있다. 특히 제주 일원의 천연기념물로는 한란(:191호)이 있으며 1989년 이후부터 연간 25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계곡은 남측과 북측에 주로 분포하며 U자형으로 되어 있고 그 하부에는 상록수림이 발달하였다. 하천의 수원을 이루는 분수령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한대악()·볼레오름(1,392m)과 동쪽에 성판악()을 연결하는 산릉이다.
이곳에서 북류하는 한천으로는 별도천()·산지천()·한천()·도근천()·외도천() 등이 있고 남류하는 것으로는 송천()·효돈천()·연외천()·정방천()·강정천·악근내·소가래천() 등이 있다. 북측의 하천들은 비교적 직선적이며 폭포가 별로 없으나, 남측의 하천들은 유로가 곡류하고 하류에 폭포가 발달된 곳이 많다.
정방천 하류에는 정방폭포, 연외천 하류에는 천지연폭포(), 소가래천 하류에는 천제연폭포()가 발달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의 하천은 건천()이지만 호우시에는 순식간에 물이 넘쳐 교통을 차단하기도 한다.
유명한 계곡으로는 한천의 탐라계곡(), 외도천의 계곡, 도근천의 골머리계곡, 효돈천계곡, 수악계곡(), 도순천계곡() 등 6개가 있다.
성인과 내부 형태로 보아 한라산에 산재하는 용암굴은 구린굴·홍괘·상괘 등이 있을 뿐이다. 홍괘와 상괘는 그 길이가 30m 내외이며, 기타 동굴들은 길이가 5m 미만이지만 높은 지대에 분포하고 있어 방목이나 약초·종자를 채집하는 사람들 또는 사냥꾼들의 잠자리로 이용되고 있다.
구린굴은 관음사 등산로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해발 720m 지점에 있다. 이것은 폭과 높이가 2∼5m이고 길이가 380m 정도인 용암굴로서 한라산 주봉()을 향하여 다소 위로 경사져 발달하였다.
한라산에는 주봉인 부악 주변에 300여 개의 측화산이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거의가 분화구를 가지며 화구의 형태는 도원추형( : 거꾸로 된 원굴뿔모양)·구형( : 절구모양)·마제형( : 말굽모양) 등으로 각각 다르다. 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백록담인데 여기에는 화구호가 있다.
이 밖에도 화구에 연못이 있는 것으로는 사라악()·수장올(, 물장올)·논고악()·동수악()·어승생악()·토적악() 등이 있다.
한라산의 해발 1,000m 이상 지역에는 속밭·상밭·장구목·큰수레밭 등이 발달하였다. 또한 윗세오름 일대 및 삼형제봉 일대에는 작은 고원들이 많이 발달하였다.
한라산 내의 폭포는 구구곡의 선녀폭포()가 장관을 이루며, 기타 기암()과 주상절리·적설()·수빙( : 나뭇가지에 응결하여 된 얇은얼음 층)·무빙( : 안개가 나뭇가지에 엉겨 이룬 얼음층 )·설니( : 눈으로 뒤범벅이 된 진 땅)·일출·일몰·운해() 등도 유명하다.
한라산을 오르는 주요 등산로는 다섯 가지가 있다. 어리목 등산로는 어리목산장-사제비동산-만세동산-윗세오름대피소-정상이고, 성판악 등산로는 성판악휴게소-사라대피소-진달래밭대피소-정상이며, 관음사 등산로는 관음사-탐라계곡-개미목-용진각대피소-정상이고, 영실 등산로는 영실-오백나한-윗세오름대피소-정상이다.
이 밖에 돈네코 등산로는 다른 등산로에 비하여 가장 길고(12㎞) 상태가 좋지 못한 난코스로 지금은 자연 휴식년제로 통제되어 있다 

(6) 한라산의 풍수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은 내륙 지방에 대한 바람막이 구실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의 곡창지대는 한라산이 태풍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한라산이 없다면 이 지역의 벼농사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한라산은 이처럼 태풍의 길목에 우뚝 서서 내륙 지방을 지켜주는 수문장 구실까지 해오고 있다.
 
(7) 문학에 투영된 한라산
문학에 투영된 한라산의 모습은 다양하다. 흔히 신비로움과 인고()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나, 희망·평화·사랑의 상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한라산은 이미 제주도 사람들만의 산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한 민족의 산으로 정착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라산은 일찍이 금강산·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꼽힐 만큼 명산이기에 예로부터 많은 선인()들이 힘든 산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산의 신비경을 기행문 등을 통하여 스스럼 없이 찬미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더욱이 백록(白鹿)과 선인() 한라산옹(漢拏山翁)의 전설을 지닌 이 산의 신비경은 오늘날에도 시·소설 등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 중 한라산을 기술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로 김상헌()의 <남항일지(誌)>를 꼽는다. 그는 1601년 (선조 34년) 9월 한라산에 올라 산신에게 치제()를 올리면서 “병이 없고 곡식이 잘 자라며 축산이 번창하고 읍()이 편안한 것은 곧 한라산신의 덕”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름만 높을 뿐, 한라산의 기이하고 수려함에는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하여 영산으로서뿐만 아니라 장엄함에서도 백두산 다음 가는 명산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한말의 최익현()은 삶의 자세를 산행()에 비유하였는데, 1875년(고종 12년) 3월 한라산을 등반한 그는 <한라산기(記)>에서 “산은 도중에서 포기하면 그로 말미암아 뜻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좀 더 태연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인고의 정신을 한라산행에서 찾으려 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산행에 오른 15여 명 가운데 정상을 정복한 사람이 겨우 4명에 불과하였다는 기록에 비추어 한라산행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흰 사슴과 신선의 전설을 적극 뒷받침해 주는 기록도 있어 흥미롭다. 선조의 7남인 인성군()의 셋째 아들인 이건()은 <제주풍토기(記)>에서 “한라산에는 곰·호랑이·이리 등과 같은 짐승은 없고, 소나 말이 잘 자라며, 사슴이 놀라울 정도로 번식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삼복더위에도 한라산 정상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있어 해마다 여름철이면 장정들을 모아 얼음을 날라다 관가에 공물로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한라산의 매혹적인 정경을 한눈에 읽을 수 있게 한다. 이건은 1628년(인조 6년) 인성군이 광해군의 복위에 가담하였다 하여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면서 그 자신은 제주에 귀양와 8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한라산의 모습 등을 풍토기에 남겼다.
 
 이같이 한라산을 소재로 한 고전문학이란 대부분이 기행문 형태이며, 그것도 유배인들에 의한 것이 대부분으로 그들은 한결같이 한라산의 오묘함과 지리·동물 분포·풍속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유배인이었던 임관주()의 시에 나타난 한라산의 모습은 신비로움의 극치를 이룬다. 그는 1767년(영조 43년)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가게 되자 한라산에 올라 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푸른 바다는 넓고 넓어 아득한데(濶)/한라산은 그 위에 떠 있네( )/흰 사슴과 신선이 기다리는(鹿待)/이제야 그 상봉에 올랐네().”
 이외에도 현중식()의 한시 <한라산>에 나타난 한라산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서씨()는 먼 옛날 이 산그늘을 일찍 지나갔고()/오랜 세월이 되도록 흰 구름 높이 떠 홀로 한가로운데(閒)/오르고 또 올라 그 숭엄한 정상에 다다르면(頂)/지척 은하를 앉아서 어루만지겠구나().”라고 읊어 불로장생초를 캐기 위하여 한라산에 왔던 진시황의 신하 서불의 행적과 함께 산이 높고 숭고하다는 것을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같은 한라산의 모습은 현대문학, 특히 시를 통하여 잘 표출되고 있는 바,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노산 이은상의 시를 들 수 있겠다. 이은상()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던 1937년에 <한라산기도>라는 시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염원인 광복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그가 한라산에 올라 기원한 기도문의 일부를 보면, “천지의 대주재()시여/나는 지금 두 팔을 들고/당신이 내리시는 뜻을/받들려 하나이다/아끼지 마시옵소서/자비하신 말씀을……”
또한, 그는 기행문을 통하여 “아름답다. 신비하다. 저 한라산. 저 제주도. 뉘가 여기 이같은 절해운도() 속에 한덩이의 땅을 던져 해중선부()를 만드셨나.” 하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한라산은 성스럽고 자비로운 민족의 산으로 제주도민들의 애환을 함께 해왔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김광협()이 쓴 <한라산송(漢拏山頌)>에서도 한라산은 제주민의 성스러운 부성()이며 종교로서 가장 빼어난 명산으로 칭송되고 있다.
이효상()의 <한라산>에서는 한라산을 항상 백두산과 마주서서 묵묵히 이 나라를 지켜오는 자()로 표현하고, 언제나 구름 위에 서서 직접 하느님과 단둘이 속삭인다고 했다. 또한 한라산이 남한 제일의 명산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산으로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미당 서정주()는 <한라산 산신여인상()>에서 “그네 나이는 구백억세/그 자디잔 구백억개 산도화빛 이쁜 주름살속에/나는 흡수되어 딩굴어 내려가다. ”라는 말로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신석정()도 <백록담>에서 “……나도 이대로/한라산 백록담 구름에 묻혀/마소랑 꽃이랑 오래도록 살고파……” 하고 목가적 풍경에 넋을 잃기도 하였다.
제주도민들에게 있어 한라산은 정신적 지주였으며, 저절로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구심체였다.
이 밖에도 한라산을 소재로 시를 쓴 시인들로는 고은()·정지용()·김대현()·조병화()·이영걸()·양중해()·김시태()·강통원()·문충성()·한기팔() 등이 있다.
특히, 이영걸이 쓴 전 7부작(138행)의 장시()인 <한라산>은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정지용의 <백록담> 이후 가장 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소설가로는 최현식()·오성찬()·현기영()·현길언() 등이 있으나 순수하게 한라산을 소재로 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문인들은 한라산을 통하여 애향심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충실하였다. 그것은 잦았던 민란과 일제의 압정에 이어 4·3사건과 6·25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와 평화가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인들은 이 산을 ‘고향’·‘젊음’·‘순결’·‘침묵’의 산으로 칭송하였다. 이 섬의 선인들이 바람 많고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높은 긍지와 탐라인으로서의 숭고한 얼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한라산의 고고한 기상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느 작가는 한라산은 식물의 보고()로서 신의 은총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이 밖에도 한라산은 산이 높고 넓으며, 초지가 광활하고, 기상변화가 심한 산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 한라산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시인 고은의 제주 체험기인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장 깊이 있게 기술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는 “우미절대()한 산의 모습에 대해 어떤 감동도 그 아름다움에 버금하지 못한다.”고 찬탄하였다.
또, 소설가 박태순()은 기행문 <국토와 민중>에서 “한라산은 신비하면서 자상하고 푸근하면서 자랑스럽다. 때문에 제주도를 밟는 것은 감미롭게 실종 당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포근하여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시인은 한라산을 ‘이 산하()의 어버이’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제주도민의 삶의 터전이요 민족 의지의 상징인 한라산, 풍부한 식물과 4계절이 뚜렷한 자연경관을 지닌 한라산의 참모습은 앞으로도 많은 문인들에 의하여 찬미되고 사랑받을 것이다.
한라산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걸작품이다. 특히, 녹담만설·영실기암()·탐라계곡()·구구곡()·어리목계곡 등은 경승이 빼어나 문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화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현대 화가들에 의한 것으로서, 옛 사람들에 의하여 표출된 한라산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구태여 제주 미술의 근원을 찾는다면, 1702년(숙종 28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를 들 수 있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도의 역사적 사실과 한라산 등의 지리적 현상을 28폭에 수록한 원색도()로서 가장 오래된 제주도 지도이다. 더욱이 그 중 호연금서()는 바다 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당시의 한라산 모습과 제주의 정취가 잘 묘사되어 있다. 한라장촉() 또한 산악 지명 등을 소상하게 담고 있다.
 한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를 제주 미술의 근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세한도>는 직접 한라산을 소재로 한 그림은 아니지만 당시 제주의 풍물을 담은 불후의 명작으로서, 후세에 많은 예술인을 배출하는 모체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김정희는 1840년(헌종 6년)에 제주에 유배되어 대정현()을 적거지()로 삼고 9년여 동안 서화()뿐만 아니라 한시 등 문학에도 정진하여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고교동창회에서의 지인글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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