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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 좋은 글 -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

1894년 7월, 이 땅 조선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벌어졌다.

무능한 조선조정은 왕실 경비와 동학군(東學軍) 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군을 끌어들였다. 이에 발끈한 일본군이 뛰어 들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마침내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앞에 있는 풍도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와 일본 전함이 불을 뿜었다.

청군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했던 정여창(鄭汝昌) 제독이 거느린 순양함(巡洋艦) 2척, 포함(砲艦) 1척, 민간상선 1척을 가지고, 순양함 3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붙은 것이다.

그 무렵 충남 아산에는 청군 3,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경기도 평택 인근 성환 쪽에는 일본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은 아산에 주둔한 청군을 중국 본토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해상봉쇄를 시도했고, 이것이 ‘풍도해전’으로 이어졌다.

이 해전에서 청나라는 참패를 당했다. 병력 1,1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함은 모두 불탔으나, 일본측은 1명의 전사자도 없이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전투는 육지로 전개되었다.

풍도해전 사흘 후인 7월 29일, 아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과 평택쪽에서 내려온 일본군이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남의 나라에 와서 허락도 없이 싸움판을 벌인 청일전쟁을 이웃집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던 조선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산(청국군)이 무너지나, 평택(일본군)이 깨지나’라는 말은 당시 청일(淸日) 두 나라의 싸움을 구경하던 조선 백성들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이었다.

얼마나 무력감에 빠져 있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결국 일본은 청군을 추격하여 그해 9월 15일 벌어진 평양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고, 마지막엔 웨이하이에까지 쫒겨난 청군의 항복을 받아 냈다.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 제독은 이 전쟁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파기하는 등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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