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코모 푸치니"
- Giacomo Puccini (1858~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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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뒤를 이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바그너풍의 음악극 개념에 아름다운 이탈리아 선율과
프랑스의
인상주의적 화음을 결합시켜 매우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쳤다.
지아코모
푸치니는 1858년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친 음악 명문가였다. 10살 때부터 아버지의 제자인 안젤로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6살 때인 1874년 루카 음악원에 들어갔다. 음악원에 들어간 지 2년이 지난 1876년, 푸치니는 피사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당장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그만두고, 밀라노로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이탈리아
남자가 바람둥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말의 중심에 두 사람이 있다.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와 오페라계의
카사노바라 불리는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다.
베르디
이후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푸치니는 음악가 가문에서 자랐다. 하지만 다섯 살이 되던 무렵 세상을 떠난 아버지
로
인해 가난한 삶을 살게 된다. 정부지원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할 만큼 어려운 삶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문제
학생, 푸치니
푸치니의 인생을 바꾼 것은 열여덟
살에 관람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였다. 그 공연을 통해 오페라 작가를
꿈꾼 이후 피사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기 위해 집에서 3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을 걸어 다녔고, 피아노 연주를 통해 자금을 열심히 모았다.1880년,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진다.
밀라노 국립음악원에서 푸치니의 재능을 인정해 입학을 허락한 것이다. 모은 돈이 턱없었지만, 밀라노행을 막을 순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탈리아
정부 주도로 움베르토 1세 즉위 2년차를 기리기 위해 스무 살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푸치니는 스물한 살이었지만,
어머니가 아들의 호적을 고치는 편법을 동원하여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밀라노 국립음악원은 푸치니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최고의 교수진을 통해 푸치니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푸치니는 음악학원 최고의
문제 학생이었다. 꽃다운 여성을 보면 바로 필이 꽂혀 벌처럼 쫓아다녔다.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도 줄을 이었다.
덕분에 여복이 많았지만 여난도 끊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색을 탐하면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푸치니였지만, 어느 순간 푸치니를 사로잡은 치명적인 여인으로 인해 그의 삶엔 그림자가 드리운다.
한
여인의 저돌적인 구애
3년간 밀라노 생활을 마치고
귀향했을 때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가 리코르디 출판사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Giulio Ricordi)이고 두 번째가 애증관계를 반복한 숙명의 여인 엘비라
제미냐니[본투리, Elvira
Geminagni(Bonturi)]이다. 당시 음악계는 ‘리코르디 왕국’이라 불릴 만큼 리코르디 출판사의 위력이 막강했다. 리코르디 사장은
푸치니의 첫 오페라 〈빌리(Le Villi)〉 상연을 주선해 주면서 인연을 맺는다. 하이네의 낭만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빌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다. 이 공연 이후 리코르디와 푸치니는 전속계약을 맺게 되고, 푸치니의 입지는 당당히 자리를 잡는다.
푸치니와 엘비라
제미냐니
엘비라는 푸치니의 기대치엔 미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어떻게
푸치니가 그녀에게 평생을 끌려다녀야 했는지는 두고두고 미스터리다. 엘비라는 푸치니의 어린 시절 친구인 나르시소 제미냐니의 부인이었고, 이미 두
명의 딸을 둔 유부녀였다.식품도매업을 하고 있던 제미냐니는 음악적인 재능은 부족했지만,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던 아내를 위해 푸치니를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피아노 교습을 받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 야릇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푸치니에게선 돈만 많은 남편에게 없는
풍류와 멋이 있었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푸치니 역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엘비라가 싫진 않았다.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엘비라였다. 집요한 유혹에 푸치니도 금방
빠져들었지만, 둘 사이는 오래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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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 많고 충동적인 엘비라에게
금방 싫증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둘은 정리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었다. 임신한
남산만 한 배를 거머쥐고 엘비라가
푸치니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 일로 푸치니의 인생은 엘비라에게 완전히 묶여 버린다.두 사람은 보수적인 고향 사람들에게 ‘가문에 먹칠한
것들’, ‘가정을 깬 파렴치범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푸치니의 누나들은 차마 거리에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푸치니만이 그런 비난이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제미냐니의 보복이 두려워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1886년 가을, 푸치니는
엘비라와 함께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 숨어 지낸다. 빌라("Villa Puccini, 빌라 푸치니"(현재는
푸치니 박물관)를 짓고 30년을
살았던 지중해 호수도시(마사치우콜리(Massaciuccoli) 호수) 인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는 이들 불륜 부부 덕에
관광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호수가에 공연무대를 설치하여 매년 여름마다 푸치니 오페라
페스티발을
열고있다.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빌라 / 마사치우콜리 호수 - Giacomo Puccini - Suor Angelica (Intermez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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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3부작’(Il trittico)은 그가 말년에 작곡한
〈외투〉(Il
tabarro),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잔니
스키키〉를 말하는데, 〈수녀
안젤리카〉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해당한다. 푸치니가 오랫동안 꿈꾸어 온 신비적인 소재로 단시간에 완성했지만, 여러 가지 제약과 더불어 ‘3부작’ 중 가장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단독으로 공연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독특한 면모를 상당히 많이 지닌 작품이다.둘 사이에 안토니오(Antonio)가 태어난다. 유일한 혈육인 안토니오의 탄생은 푸치니의
인생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들을 낳자 독점욕이 강해진 엘비라가 의부증까지 생겨 푸치니를 철저하게 조종하려 한
것이다.
푸치니의
대성공과 코리나
유부녀와 바람피우고 사생아까지 낳는 바람에 푸치니는 불안한 도망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1889년 리코르디의
도움으로 신작 오페라 〈에드가(Edgar)〉를 발표한다. 도망 다니는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
아리아 ‘아듀, 아듀, 내 사랑
(Addio, addio, mio dolce amor!)’ 속에는 탄식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오페라는 실패한다. 하지만 리코르디는 푸치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곡을
의뢰한다. 그래서 나온
곡이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이다.사치와 향락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여주인공 마농과 그녀의 비도덕적 행위를 싫어하면서도 그녀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귀족 청년의 이야기가 담긴 〈마농 레스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이 성공한 1893년부터 푸치니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는 세계적인 작곡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1896년, 〈라 보엠〉이 초연되고 인세수입이 폭증하면서 푸치니의 삶도 달라진다. 푸치니와
엘비라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시작된다. 푸치니의 바람기도 다시 시작된다.
〈토스카〉의 후속작인 〈나비 부인(Madama Butterfly)〉을 쓰고 있는 동안
푸치니는 코리나라는 여성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그와 같이 살고 있던 엘비라는 이 일로 몹시 낙담해서 푸치니를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1903년, 푸치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심하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상이 너무 심해 누군가 옆에서 간호를 해 주어야만 했는데, 바로 그다음
날 엘비라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결혼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사실
혼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
이후(엘비라의 전남편의 딸 포스카: 앉아 있는 사람) 엘비라(서있는 사람)과 함께
건강을 회복한 후, 푸치니는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나비 부인〉
작곡에 박차를 가했다. 〈나비 부인〉은 1904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버전으로
3개월 후에 무대에 오른 〈나비 부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7년, 푸치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위촉을 받고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를 쓰기
시작했다.
자동차 사고 이후
1904년 수리한 차를 타고 있는 푸치니(왼쪽으로부터 엘비라, 그 옆이 도리아, 앞 쪽은 딸 포스카와 포스카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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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무렵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늘 푸치니의 여자 관계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엘비라가 푸치니와 하녀 도리아
와의 관계를 의심한 것이다. 엘비라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도리아를 욕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도리아는 음독자살을 시도
했다. 도리아는 곧바로 죽지 않고 5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죽었는데, 죽어 가면서 지르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푸치니의 집까지 들렸다고 한다. 도리아가 죽은 후 엘비라는 무고죄로 5개월 5일의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푸치니가 1만
2천 리라를 주고 도리아의 가족과 합의하면서 엘비라는 감옥행을 면할 수 있었다
푸치니와 엘비라와 아들
안토니오(빌라 푸치니에서)
이런 와중에 완성한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는 1910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
되었다. 딕 존슨 역에 당대 최고의 테너 카루소가 출연해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1919년에는 단테의 신곡에 기초한 3부작 〈외투(Il tabarro)〉,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를 선보였는데, 이 중에서
특히 〈잔니 스키키〉는 그가 비극뿐만 아니라 희극적인 인물 묘사에도 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작품이었다.
푸치니는 이곳 토레델 라고 에서 라 보엠, 나비부인, 투란토트, 토스카,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다고,한다.
말년에 푸치니는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Turandot)〉작곡에 들어갔다. 중국
고대 리듬이나 음악을 듣기
위하여 대영박물관의 자료실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때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푸치니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투란도트〉 작곡에 매달렸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1924년 11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브뤼셀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국의 병실에서 마지막까지 한결같이 그리워한 곳이 이곳 토레 델 라고
였으며 파리는 화려하고 런던
은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토레 델 라고의 집으로 가고싶다 우아한 옷을 벗고 집에서
쉬고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길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고 한다.
[출처]The Abv.All quoted by Anonymous [-20170907challea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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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ccini : Madama Butterfly - Un Bel Di Vedremo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2막 中 "어떤 개인날...")
Maria Callas, soprano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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