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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기리는 사람을 통해 그 국민의 얼굴을 드러낸다?

 

국가는 기리는 사람을 통해 그 국민의 얼굴을 드러낸다. 한국과 한국인은 김구(金九)를 기린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거 때 소련과 북한 공산당 편에 서서 선거방해에 나섰고 건국 후도 대한민국을 타도하는 전선을 펼쳤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을 배척하고 북쪽 김정일을 찬미하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국민에게는 어울린다고 해야 하는가? 김정은에게 통치를 맡기겠다는 2020년대 한국인은 김일성에게 몸을 맡긴 김구와 딱 맞아떨어지니까.
한국인의 다수에게 김구 이미지는 애국자를 넘어 위인(偉人)이기도 하다. 그 근거가 백범일지다. 그런데 그 백범일지가 백범이 쓴 일지 아님을 모른다. 백범일지는 1940년대 조선 제1의 소설가라 할 이광수의 작품이다. 이광수는 전쟁 말기 국민 총력동원에 나선 조선 총독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 친일파라는 굴레가 되자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김구의 청을 받아들여 이 글을 썼다.
그래서 백범일지는 김구의 일들을 미화해 사실에서 벗어난 것이 많다. 특히 나의 소원은 김구의 소원이 아니라 이광수가 여러 글에서 조선에 대한 소망을 담은 논리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광수의 견해다. 김구의 소원이 아니라 이광수의 소원이라고 해야 정직하다.

김구를 기리고 추앙(推仰)하다니…참 한(恨)스럽다. 김구는 좋게 말해도 테러리스트다. 최근 김구 연구자 정안기는 SNS에서 상해 시절 김구는 30명도 더 되는 한국인 암살에 연결된다고 했다. 암살 이유를 일본 밀정이라고 했지만 ‘증거 없는 살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인으로선 드물게 성공한 기업인 옥관빈의 살해다. 김구 팀은 살해 후 그를 ’밀정이어서…‘ 라고 주장했지만, 밀정의 증거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김구의 상해 한인사회 헤게머니엔 큰 산(山)이라고 할 안창호를 돕고 있다는 것 말고는 옥관빈이 김구에게 찍힐 다른 이유는 안 보인다고 했다. 여러 정황을 살피면 옥관빈은 김구를 돕기엔 너무 뛰어난 한국인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뒤의 윤봉길의 홍구공원 테러를 김구가 안창호 제거에 이용한 흔적이 있다고도 할 정도니 ….
사실 김구가 임정 주석이었다는 것 빼고는 독립운동의 실적이랄 것도 안 보인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탄테러 이후 중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한국 임정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고 1년 쯤 지나 김구를 부른 일이 있다.
김구는 임정의 승인 등 중요 현안이 아니라 테러자금 100만 원을 지원해 주면 일본 조선 만주에서 일본 요인을 암살해 일본에 타격을 입히겠다고 했다. 장 총통은 구체안을 문서로 내라고 했다. 그리고 문서를 검토한 얼마 후 비서를 보냈다.
『…그런 테러는 독립운동으론 적절치 않다. 설혹 천황이나 대장(大將)을 죽여도 또 다른 천황이 나오고 대장이 나온다. 독립을 위해선, 군관을 양성하라』면서 군관학교에 한인반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래서 중국군과학교 남경분교에 한인반이 개설되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군관학교 한인반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용돈의 일부마저 김구가 임시정부 몫이라며 떼간 것이 들통나 학생폭동이 일어나 고작 1년으로 끝났다. 폭동에 가담한 학생들은 폭동을 선동했던 김원봉을 따라 모택동의 소위 팔로군으로 도망갔고….이래서 모처럼 찾아온 ‘군관 양성 광복군 창설’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김구의 암살은 해방정국에서도 이어졌다. 해방정국 3년 기간 일어난 세 요인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여운형(呂運亨) 암살에도 김구의 손길이 어른거린다. 살해 동기는 모두 김구의 대권(大權)에 방해자로 찍혔다는 것이 그 배경이다.
이승만도 암살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1946년 12월 심야 돈암장이 무장한 암살단의 습격을 받았다. 국민회 산하 독청단원 20 명이 필사적으로 막으며 경찰에 알렸다, 다행히 급보를 받고 출동하는 미군 지프의 사이렌 소리에 습격조는 도주해 이승만은 위기를 벗어났다. 이 전투에서 독청단원 현승득(玄承得)은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 테러에서 이승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달 전 있었던 암살 미수사건이 천우신조(天佑神助)가 되었다고 했다.
1946년 9월 12일 돈암장을 출발한 이승만의 승용차가 창덕궁 앞길에서 저격을 당했다. 범인은 현장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평남 강진군 출신 김광명(24세)과 김영수(19세)로 이승만을 암살하라는 조선공산당의 지시를 받아 남파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때까지 이승만은 집회에 참석할 때 국민회 청년단이 경호를 담당할 뿐 자택 경호는 없었다. 그러다 이 사건 후 국민회 청년단이 테러에 대비해 자택에도 상시 20명 이상이 상주하는 철통 경비에 나섰다.
12월의 심야 습격단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권총을 가진 소수인이 아니라 무장대가 출동한 것으로 보아 남파 무장대 아닌 남한 내 테러로 추측했다. 습격조는 돈암장도 경호원이 배치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20명을 웃돈다는 것은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이후 이승만의 일정은 철저하게 보안했다. 그 대상엔 김구 측도 포함되었다는 것은 김구 측도 경계 대상이었음을 말한다. 김구, no ⓵ 계속 2021-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