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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쟁 시 38선이 생기게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글을

 

오늘은 6. 25 전쟁 시 38선이 생기게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글을 실어봅니다. 대부분 이에 대해 잘 모르고 미국이 실수해서 남북을 두 쪽으로 나눠놨다는 생각을 갖는데 이는 전혀 당시 상황을 모르는데서 생긴 오해랍니다.

오히려 미국 때문에 더 남쪽으로 땅을 빼앗기거나 북한에 넘어갈 위기를 넘겼다는 내용입니다. 올바른 역사를 모르고 미국을 주적이라는 주장에 빠지지 말고 감사해야할 것입니다. 역사 교과서도 바르게 바로 잡고... 

그리고 그 아래 모윤숙 시인이 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비장한 글을 실어봅니다.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국군들과 참전 용사들께 마음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38선이 생긴 역사’ 

새 역사 교과서에 꼭 넣어야 할 다수의 국민이 모르는 역사적 사실 

조화유 소설가, 출판인. 출생1942년, 경남 거창군 학력 웨스턴미시간 대학교 졸업
데뷔1970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흉일'경력 JohBook 대표

민주노총 등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인 대규모 폭력 시위 구호 중의 하나는 '친일독재 美化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였다. 그리고 김종필 前 국무총리는 한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2년 11월 미국에서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났을 때다. 나는 처음에 다소 건방진 태도를 보인 케네디 장관을 향해 "당신네 나라가 우리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분단의 아픔을 안게 한 원인을 만들었소.”라고 따졌다. 

그가 “그 원인이 무엇이오?” 라고 묻기에 이렇게 답해줬다. “38선을 누가 만들었소.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이 긋지 않았소. 왜 아무 죄 없는 한국을 반으로 갈라놓았느냐 말이오. 우리를 분단시켜 싸우게 만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로버트의 형 존 케네디(JFK)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장관에 오른 러스크는 대령 시절이던 1945년 8월 한반도 지도에 38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케 하는 초안을 만들었다. 장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한 전략적 패착이었다.'고 말했다.   
 
만일 JP가 케네디 법무장관이 아니라 러스크 국무장관을 그날 만나서 똑같은 소리를 했다면 러스크는 아마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오. 그러므로 당신은 나한테 오히려 감사해야 하오.'

일본이 항복한 날 미군 최선봉 부대는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000 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소련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때 소련군은 이미 함경도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오고 있었고 일주일 정도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었다. 

이를 우려한 미국은 소련에게 38도선까지만 내려와 북한 지역에서만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라고 제의했던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딘 러스크(Dean Rusk) 회고록 As I Saw It (내가 본대로)》124쪽에 이렇게 적혀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국무부와 국방부는 의견이 달랐다. 국무부는 중국 본토의 가능한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 날인 (미국 동부시각) 8월14일 늦은 밤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중략) National Geographic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北位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 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 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반도 북쪽에 선(線)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미국 군부의 희망대로 그때 한반도에 미군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하고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었을 것이 뻔하다. 

실제로 소련은 당시에 나치 독일로 부터 해방된 東유럽 여러 나라 전부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미국이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 한민족에 엄청난 행운이었다.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 1권 444∼445 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 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한반도에 들어간 소련군은 곧 38선을 봉쇄하고 그 선 이북의 자기네 점령지역을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 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일이 연합국에 게 1945년 5월7일 항복한 뒤, 소련은 전쟁 중 점령한 동부독일을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들을 전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1945년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점령한 서부독일과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채택하여 오늘날 경제대국들이 되었고, 역시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2위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가 1989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간신히 자유를 되찾았고, 역시 소련군이 점령했던 북한은 아직도 공산독재에 집착하는 무능한 金氏 세습정권에 의해 지구상 가장 가난하고 자유 없는 나라가 되어 있지 않은가!

38선 형성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김종필 씨도 잘 모르고 있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고 있다가 10여 년 전 러스크와 트루먼 대통령 회고록을 읽어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 때문에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비극도 발생하였고, 아직까지 우리민족이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 민족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며 순진한 학생들에게 反美감정을 불어넣고 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지난 70년간 미국은 우리를 크게 세 번 도와주었다. 첫 번째는 1945년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우리 민족을 일제의 35년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었고, 두 번째는 38선을 그어 남쪽에서나마 시장경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해준 것이고, 

세 번째는 김일성이 시작한 6·25전쟁 때 즉각 군대를 보내 김일성의 적화(赤化) 야욕을 분쇄한 것이다. 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이번에 새로 만드는 한국사 교과서에는 반드시 넣어야 한다. 몇 년 전 실시된 한 조사에서 육사 생도 34%가 미국을 主敵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나는 크게 놀랐다.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들이 해방 전후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구나 싶었다. 이번에 중고교 한국사 집필을 맡게 된 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모윤숙 

나는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품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 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더위와 가시 숲을...

이순신 같이 
나폴레온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물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괘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나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나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들러 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西伯利亞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 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 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품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모윤숙   194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문학 이외의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문학가  
출생 1909년  사망 1990년  

『문예』를 주도한 모윤숙(毛允淑, 1909~1990)은 함남 원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다. 마루도 없는 부엌 한 칸, 방 두 칸짜리 초막집 부뚜막에서 밥을 짓던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산고(産苦)를 느끼고 그 자리에서 모윤숙을 낳는다. 

모윤숙은 원산보통학교 2~3학년 때 자신의 이런 출생 일화를 소재로 「생일과 아궁이」를 비롯해 「해당화」 · 「명사십리」 ·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작문 교사를 놀라게 한다.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윤숙

발표 시기. 1950년 8월.  모윤숙이 지은 대표적인 반공(反共)시.

1951년 문성당(文星堂)에서 간행된 시집 『풍랑(風浪)』(총133면)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 총 12연 90행으로 되어 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8월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 근처 산골에서 숨어 지내던 작자가 국군의 시체를 보고 썼다고 알려져 있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작자의 낭만주의와 애국주의가 융합을 이룬 작품으로 전몰용사의 주검을 통하여 애국심을 감동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시의 구조는 유기적 연계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제1·2연과 제11·12연은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국군과 시인의 감동적 만남이라는 배경을 나타내주고, 제3∼10연은 국군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3연은 죽음을 말하고, 제4·5·6연은 떳떳하고 후회없는 자아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제5연은 이 작품의 주제가 되는 부분으로, 조국과 동포의 행복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라는 대승적(大乘的)인 자아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제7·8·9연은 뒤에 남은 동포에게 당부하는 말이며, 제10연은 결론으로 조국의 한줌 흙이 되겠다고 하였다.

4연에서 11연 까지가 작품의 본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숨을 거둔 국군의 당부가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은 그 말을 듣고 전달하는 형식이며 당대의 반공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