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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육사 독립운동가- 광 야

 

'광 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시구 추론:먼 옛날에 하늘을 처음 여신 환인께서 사람과 만물을 널리 살리고 비추는 홍익인간 광명이세 이념으로 처음 환국을 이 땅에 건국하실 때에 온누리까지 흘러 넘치는 생명의 기운과 말할 수 없는 경외감으로 인하여 닭들이라도 소리를 함부로 낼 수 있었겠는가?-우리역사 뿌리]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시구추론:수 많은 지각변동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역사을 안고 있는 한반도만은 세계의 중심축으로써 하늘이 단단히 붙잡고 있어 굳건히 지켜지고 유지되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시구추론:수 많은 고난의 역사속에서 마침내 다시 일제침략에 저항하여 3.1절에 태극기를 손에 들고 한반도 전역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세계에 평화민족의 위상을 드높였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시구추론:지금은 혹독한 일제치하이지만,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애국애족혼들이 차고 넘치니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오직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나의 진심어린 혼을 이 곳 북경 형무소에서 민족제단에 바치겠노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구추론:내가 지금 갇혀있는 이 곳 북경지역과 만주벌판은 민족의 당당한 자존심 고구려가 말달리던 곳이 아니던가?고구려이후 1천년이후 2008촛불항쟁의 기운을 시작으로 다시 민족의 국운은 아시아를 호령하던 광대토태왕같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출현하여 고난과 혼란의 민족사를 마감하고 그 당당하고 위대한 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과시하고 만주땅까지 회복하는 통일한국의 그 날에 그 동안의 모든 민족의 눈물과 울분을 토해 내고야 말리라!]

 

<1939년> 

 

시구추론/윤복현

 

이육사 시인의 저항시

'광야'의 시구를 추론해서 의미를 새겨 보았는데,

이육사 시인또한 단재 신채호 선생처럼

우리 민족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셨던 분임을

시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육사 시인은 북경 형무소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갇힌 친척 이병희 여사를 약혼녀라며 석방시키고

자신은 고문당한 후 순국했다.

'광야' 등 이육사의 유고품들은

이병희 여사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이병희 여사의 경우도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쳤을때

동지들의 명단이 유출되지 않고

숨기기 방안까지 들어온 경찰들을 따돌리기위해

옷을 갈아입겠다며 알몸까지 보이면서까지

일본 경찰들에게 무안을 주어 방밖으로 내 보낸 뒤에

6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발각됐으면 600명은 모두 총살당했는데,

이병희 여사는 그 위험한 순간을 지혜롭게 넘겨

600여명의 동지들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혈서로써 일본천황께 충성맹세를 했던

일본군장교출신으로써

여순반란사건직후 박헌영의 남로당 간부로 체포되어

자기 한 몸 살자고 모든 동지들의 명단을

토설하고 혼자 살아남은 박정희하고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시집 한 권으로 '현대시 100년'에 길이 남은 시인들이 많다. 김소월과 한용운과 김영랑이 그렇다. 특히 유고시집 한 권으로 길이 남은 시인들도 있으니, 이상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여기 이육사(1904~1944) 시인이 그렇다.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이 따라 다닌다. 지사(志士), 독립투사, 혁명가,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의열단 단원 등.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가 264(혹은 64), 이를 '대륙의 역사'라는 뜻의 한자 '육사(陸史)'로 바꾸었다고 한다.

 



생애와 활동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출처 : 무사의 마음으로
글쓴이 : 무사의 마음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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