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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종희(黃宗羲) 저(著) 명 이 대 방 록 (明 夷 待 訪 錄) 중에서

 

황종희(黃宗羲) 저(著) 

명 이 대 방 록 (明 夷 待 訪 錄)  중에서
  

 
 황종희 선생은 1610년(明 萬曆 38년)에 태어나 1695년(淸의 康熙 34년) 86세를 일기로 선종한 근세(近世) 중국의 정치가 입니다. 선생의 저서를 1971년 저의 스승이신 전 서강대 교수 전해종(全海宗) 선생께서 역(譯)하였는데 이 책의 내용을 다시 살펴 보니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당시에도 황종희 선생의 정치적인 안목이 이렇게 놀라운 수준인가 하여 저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 했습니다. 현대를 사는 위정자들이나 법조인들이 일독하여 마음에 새길 내용이라 여겨 집니다. 원군(原君)의 원(原)은 근본을 추구 한다는 뜻이라 합니다.(註:2006년 7월 4일 김찬수 옮김) 


제일. 원군(第一 原君 - 君主論)


 인간의 역사가 시작한 처음에는 사람은 각기 자기 중심이었고, 사람은 각기 이기적 이었다. 천하에 공공의 이익이 있어도 이것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고, 천하에 공공의 해가 있어도 이것을 없애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 나와서 자기 한사람의 이익을 이익으로 삼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고, 자기 한사람의 해를 해로 생각하지 않고 천하로 하여 그 해를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노고는 반드시 천하의 사람들의 노고의 천 갑절 만갑절이 되었을 것이다.
무릇 천갑절 만갑절의 노고를 하면서도 자기가 그 이해를 받지 않는다면, 필연코 천하 사람들의 인정으로는 그런 지위에 놓일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옛 군주로서 그 지위를 면하여 받으려 하지 않았으니 허유(許由)나 무광(務光)이 그렇다. 그 지위를 받았으나 선양으로 다른 사람에게 물려 주고 떠난 것은 요(堯)와 순(舜)이 그렇다. 처음에는 받으려 하지 않았으나,받은 후에 물러나지 못한 것은 우(禹)가 그렇다. 어찌 옛날 사람이라고 다를바 있겠는가. 안일(安逸)을 좋아하고 노고를 싫어 하는 것은 또한 예나 제나 상정인것 같다. 후세의 군주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천하의 이해의 권한은 다 자기의 수중에 있으며, 내가 천하의 이익을 모두 차지하고, 천하의 해는 모두 남에게 돌린 다고 하여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감히 자기 중심으로 행세하거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대사(大私)를 천하의 대공(大公) 이라고 꾸민다. 처음에는 부끄러워 하다가, 얼마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 하고, 천하를 막대한 재산이라 보고, 그것을 자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이어 받도록 한다.

한고조(漢高祖)가 '내가 이루어 놓은 재산(천하를 차지한 것을 뜻 함)은 중형(仲兄)이 이룬것과 어느것이 더 많은가' 고 한것은, 그 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무의식 중에 넘쳐서 입밖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가 주인이라면 군주가 객 이어서, 무릇 군주가 일생동안 경영한 것은 천하를 위하여서였다.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가 객이 되어 무릇 천하가 어디든지 안녕을 얻지 못하는 것은 군주 때문이다.

그리하여 군주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천하의 사람들의 간(肝)이나 뇌(腦)를 마구 무찌르고 독(毒)들게 하며, 천하의 자녀를 이산시켜서 자기 한사람 재산을 늘리고도 한번도 처참하다고 느끼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자손을 위하여 창업하는 것' 이라고 한다.
군주가 이미 천하를 얻은 후에는 천하 사람들의 골수를 두들겨 쪼개고 천하의 자녀를 이산시켜서 자기 한사람의 음락(淫樂)에 바치고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은 내 재산에서 나온 이익' 이라고 한다. 그러니 천하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은 군주 뿐이다. 만일 군주가 없다면, 사람들은 각기 자기 중심이 될 수 있고, 각기

자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오호라, 어찌 군주를 둔 까 닭이 본래 이와 같았을 것인가. 옛날의 천하의 사람은 그 군주를 친애로써 만들어 아버지에 비기 고, 하늘에 견주었는데 참으로 지난 일은 아니었다.이제 천하의 사람은 그 군주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원수와 같이 생각하며 독부(獨夫 - 紂王을 일컬음) 라고 부르는데 진실로 당연 한 일이다.

그러나 후세의 군주가 과연 이 재산을 보유하여 영원히 전한다고 하여도 그 재산을 사유 한다는것은 의심할 수 없다. 이미 천하를 재산이라고 생각하니 사람들이 재산을 얻으려고 생각은 어느 누가 군주와 같지 않겠는가. 끈으로 단단히 묶어 놓고, 자물쇠로 꼭 잠궈 놓아도 천하에 그것을 얻으려는 무리가 많은데 대하여 한사람의 지력(智力)이 이겨 낼 수가 없으니, 멀면 몇대사이에 가까우면 자신의 당대에 피나는 파멸이 그 자손에게 나타난다.

옛 사람이 대대로 제왕의 가문에 태어나지 않기를 원하고, 명(明)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그 공주에게 한 말에도 '네가 왜 우리 가문에 태어 났는가'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비통하지 않는가.
창업시를 회상한다면 그 천하를 얻으려 하는 마음이 없어져 산산 조각이 나지 않는자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군주로서의 직분이 분명하면 요(堯)의 당(唐)나라, 순(舜) 우(虞)나라 때 처럼 사람들은 선양할 수가 있었다.

허유나 무광이 속세를 떠났던 것이 아니다. 군주로서의 직분이 분명치 않으면 시정(市井)의 사람들이 다 탐낼 수 있다. 허유나 무광 같은 사람은 후세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아 그 이름을 들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의 직분을 분명히 하기 어려우나, 잠간의 음락과 무궁 한 비애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제이. 원신 (第二 原臣 - 臣下論)

 어떤 사람이 있어서 무형(無形) 즉 태도에 나타나기 전에 보고, 무성(無聲) 즉 말하기 전에 듣고서 군주를 섬긴다면,그 사람을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자기 몸을 죽여서 그 군주를 섬긴다면,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태도에 나타나기 전에 보고 말하기 전에 듣는 것은 아버지를 섬기는 태도에서 근본하는 것이다. 자기 몸을 죽이는 것은 무사(無私)의 극치이다.

그래도 아직도 신하라고 하기에 부족하다면, 신도(臣道)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저 넓은 천하는 한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관리를 두어 나누어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가서 벼슬을 하는것은 천하를 위한 것이며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만민을 위한 것이고 일성(一姓)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의 견지에서 보는 것이므로 그 도에 어긋나면, 비록 군주가 태도나 말로써 우리에게 강요 하더라도 감히 따를 수 가 없다.

더우기나 태도에도 나타나지 않고 말도 없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 도(道)에 어긋나면 비록 그 조정에 몸을 담고 있더라도 감히 받아드릴 수 없다. 더우기나 내몸까지 죽일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는 않으며 군주의 일신일성(一身一姓)의 견지에서 보면, 군주가 태도나 말로써 나타내지 않는 욕심이 있을 때에 우리가 이를 따라서 보고 듣고 한다면 이것은 환관(宦官)이나 궁녀(宮女)의 마음이다. 군주가 자기를 위하여 죽고 자기를 위하여 망할 때에 우리가 그를 따라서 죽고 망하고 한다면 그것은 사총(私寵)을 받는 자가 하는 짓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으로 마땅한 일인가, 마땅치 못한 일인가 하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신하로 있는 자가 이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생각 하기를 신하는 군주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군주는 우리에게 천하를 나누어 주어 이를 다스리게 하고 우리에게 백성을 주고 이를 기르게 한다고 하여, 천하 인민을 마치 군주의 주머니 속의 사유물 같이 본다.

지금 이 나라의 사방이 피폐 혼란하고 민생이 초췌하여 우리 군주를 위태롭게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다스리고 이를 기르는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적어도 국가의 존망에 관계가 없으면 나라의 사방이 피폐 혼란과 민심의 초췌는 비록 성실한 신하가 있어도 또한 쓸 데 없는 티끌 만 한 걱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저 옛날의 신하는 후자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또한 전자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생각컨대 천하의 치란(治亂)은 일성(一姓)의 흥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만민의 우락(憂樂)에 관한 문제다. 따라서 걸주(桀紂)가 망한 것은 난세가 되는 까닭이었다. 진시황제나 몽고(蒙古)가 일어난 일어난 것은 곧 난세가 되는 까닭이었다.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의 흥망은 치란과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신하가 된 자로서 백성의 수화(水火)의 노고를 경시 한다면 비록 능히 군주를 도와서 흥하게 하고 군주를 따라서 망할 수는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신의 도리에 있어서 본래 어긋 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대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대목(大木)을 끄는것과도 같다. 앞에 있는 사람이 '어여'하고 부르면 뒤 사람이 '차'라고 부른다. 군주와 신하는 같은 나무를 끄는 사람이다.

만일 손으로 바를 잡고, 발로 땅을 디디지 않고, 나무를 끄는자의 앞에서 그저 지꺼리고 웃으며, 뒤에서 나무를 끄는 자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 한다면, 나무를 끄는 일은 틀려 버린다. 아아~! 후세의 교만스러운 군주는 방종하여 천하 만민을 위하는 것을 일 삼지 않고, 그가 민간의 인물에게 구하는 것은 분주히 심부름하는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그 때문에 민간의 인물로서 군주의 부름에 응하는 자도 또한 분주히 심부름하는데 지나지 않고, 일시에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게 되면 드디어 군주의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신하를 대하는 군주의 예(禮)가 갖추어 졌는가 아닌가는 더 생각하지 도 않고, 노비(奴婢)들 사이에 오르내리면서도 당연 하다고 생각한다.

만력(萬曆) 초(初)에 신종(神宗 1572 - 1620)이 장거정(張居正 - 明末 의 정치가)을 대하였을 때에 그 예우가 약간 뛰어 났으나, 이것을 옛날의 사부(師傅)에 비하면 일백분의 일도 되지 못하였는데도, 당시의 논자들은 놀라서 장거정이 받은 예우는 인신(人臣)의 예를 결(缺)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저 장거정의 죄는 바로 사부(師傅)로서 자기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노비처럼 다루는 대로 맡겼다는 사실인데, 오히려 거꾸로 책(責)하고 있으니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이목(耳目)이 세속에서 이른바 신하라고 하는 것에 점차로 물들어 그것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주가 명목은 다르나 실질이 같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느냐.어떤 사람은 신(臣)과 자(子)는 병칭하여 신자(臣子)라고 하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부자(父子)는 기가 통하며, 아들은 아버지의 몸을 나누어 자기 몸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효자는 비록 몸이 갈라져 있어도 날마다 아버지의 기(氣)에 가까이 할 수 있어서 오래 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불효자는 몸이 갈라진 후 날마다 멀어지고 성겨져서 오래 되면 기가 서로 닮지 않게 된다. 군신의 명목은 천하라는 견지(見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천하라는 책임이 없다면 우리는 군주에 대하여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나가서 군주를 섬길 때에 천하의 일을 일 삼지 않으면 군주(君主)는 노비(奴婢)인 것이다. 천하의 일을 일 삼으면 군주의 사우(師友)인 것이다. 대저 그러한즉 신하라고 하여도 그 명목은 자주 변한다. 그러나 부자(父子)는 진실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제삼 원법 (第三 原法 - 法制論)

삼대(三代 - 伏羲, 神農, 黃帝 또는 복희, 신농, 燧人, 수인 대신에 女와 나 祝融을 포함하기도 함 )

이전에는 법이 있었는데 삼대 이후에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이제(二帝 - 堯 와 舜) 삼왕(三王 - 夏 의 禹, 殷 의 湯王, 周 의 文王 과 武王)은 천하의 사람들을 길러야 할 것을 알고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전토(田土)를 주어서 경작케 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의복이 있어야 할 것을 알고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토지를 주어서 뽕나무와 삼을 심게하고, 그들이 교육이 없어서는 안될 것을 알고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워서 교육을 일으키게 하고 그들에게 혼인의 예를 정하여 그 음란(淫亂)한 것을 막고, 그들에게 졸승의 부(卒乘의 賦) 즉, 병역의 의무를 지워서 그 문란(紊亂)을 막게 하였다. 이것이 삼대 이전의 법이다. 진실로 자기 한사람을 위하여 법을 세우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후세의 군주는 이미 천하를 얻으면 다만 그 왕조의 명(命)이 오래 계속하지 않거나 자손이 왕조를 보전하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가 전에 미리 우려하여 그 때문에 법을 만든다. 그러니 그들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가(一家)의 법이고 천하의 법이 아니다. 그런 까닭으로 진(秦)나라는 주(周)나라 때의 봉건제도를 바꾸어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세운 것은 군현제도가 자기의 사리에 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漢)나라가 자식(子息)들을 봉건(封建)함으로써 자기의 울타리가 되어 막아줄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송(宋)이 방진(方鎭 - 邊境 防備策)의 병(兵)을 폐지 한 것은 방진이 자기에게 불리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하니 그들의 법에 추호(秋毫)라도 천하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고 할수 있고, 또 이것을 가히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삼대의 법은 천하를 천하 속에 두어 두는 것이었다. 산림소택(山林沼澤)에서 나오는 이익은 반드시 다 거두려 하지 않았고, 상벌의 권한이 남에게 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귀한 것이 다 조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한 것이 다 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세에 비로소 그 법이 소략(疏略 - 꼼꼼하지 못하고 엉성함)한 것을 논의하게 되었으니 천하의 사람들은 군주의 지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래 사람의 위치가 미워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법이 소략할 수록 문란(紊亂)이 일어나지 않아서 이른바 무법의 법이었다.

후세의 법은 천하를 광주리 속에 넣어 두는 것이다. 이익을 아랫 사람에게는 남기는 것을 즐기지 않고,복은 반드시 군주에게 거두어지기를 바란다. 한사람을 채용하면 그 사람이 사리를 취할 것을 걱정하고, 또 한 사람을 쓰면 그가 사리를 취하는 것을 억제한다.

한가지 일을 하면 속을 까 보아 염려하고, 또 한가지 일을 만들어서 속는 것을 방비한다. 천하의 사람들은 다 그 광주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으니 자기도 무서워서 벌벌 떨고 날마다 그저 광주리만 걱정한다. 그러므로 그 법은 정밀하여질 수 밖에 없다.법이 정밀 하여 질수록 천하의 난(亂)은 법 속에서 일어나니 이것이 이른바 비법(非法)의 법이다. 논자(論者)는 말하기를 일대에는 일대의 법이 있으며, 자손은 조상을 본 받는 것이 효도라고 한다.

대저 비법(非法)의 법은 전왕이 그 사리사욕을 극복하지 못하여 이를 만들었고 후왕은 혹은 그 사리사욕을 극복하지 못하여 이를 파괴하는 것이다. 파괴하는 자는 본래 족히 천하를 해칠 만 한데, 이를 만드는 자도 또한 천하를 해치는 자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반드시 잘 서둘러서 여기붙고 저기 붙어서 조상 이래의 법을 지킨다는 대수롭지 않은 명성을 넓히려고 하는데 이것은 속유(俗儒)의 억설(抑說)이다.

곧 논자(論者)가 말하기를 천하의 치란(治亂)은 법의 유무에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저 고금의 변란은 진(秦)에 이르러 한번 극심하였고, 원(元)에 이르러 또 한번 국심하여 이 두차례 변란을 겪고 나서는 옛 성왕이 측은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이루어 온것이 자취도 없이 없어져 남은 것이 없다.

진실로 그 때문에 멀리 생각하고 멀리 보아서 하나하나 변란을 통관(通觀)하여 정전(井田), 봉건(封建), 학교(學校), 병역(兵役)의 옛 제도를 부흥하지 않는다면, 비록 다소의 개혁을 한다고 하여도 생민(生民)의 끝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다. 만일 논자(論者)가 다스리는 사람은 있어도 다스리는 법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다스리는 법이 있은 후에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할 것이다.

비법(非法)의 법이 천하의 사람의 수족을 묶어 놓은 후로는 비록 유능한 정치가가 있어도 이리저리 끌리고 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여 여기저기 살피는 버릇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시하는 일이 있어도 자기에 주어진 분수에 머물어 적당주의(適當主義)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계를 벗어나서 공명(功名)을 세울 수가 없다.

선왕의 법이 있다면 법을 초월한 어떤 뜻이 없을 수 없다. 법을 운용함에 있어서 그 사람이 바르면 좋은 일은 행하지 않을 까닭이 없고, 그 사람이 그릇되어 각박하게 법으로 몰아 천하의 사람을 해롭게 하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법이 있은 후에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출처 : 서강바른포럼
글쓴이 : 김찬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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