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의 표상, 황희 정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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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厖村)황희, 고불(古佛)맹사성, 강호산인(江湖散人)최만리, 농암(聾巖)이현보, 퇴계(退溪)이황, 오리(梧里)이원익, 사계(沙溪)김장생, 백사(白沙)이항복...이상 열거한 분들은 과거 조선시대 명문천하(名聞天下)의 위인들로, 이들의 공통점은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을 뒤로하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만을 위해 충성하여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후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청백리(淸白吏)’ 들이다. 개국과 함께 조선왕조는 어렵사리 세운 나라를 온건히 유지하기위해 사습(士習)을 일신하고 민풍(民風)을 교화하기 위해 《관자(管子)》에 적기(摘記)된 나라를 다스리는데 지켜야 할 네 가지 덕목인 사유(四維). 즉,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를 사대부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적극 권장하였다. 모름지기 선비는 몸에 재능을 지니고 나라를 위해 쓰이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선비는 그 뜻을 고상하게 가지고, 배움을 돈독히 하며, 예절을 밝히며, 의리를 지니고, 청렴을 긍지로 여기며,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선비가 행실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랜 역사의 가르침이다. 또한 예로부터 이르기를 ‘몸이 귀해질수록 욕심은 불어나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기세는 더욱 치솟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그 권세를 악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고 양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파렴치한들이 비일비재함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는 늘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하여 살며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고위관료들을 찾아 그가 만백성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은 군주된 입장에서 크나 큰 과제였다. 그런 연유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청백리(淸白吏) 제도’인데, 청백리 제도란, 임금이 선정(善政)을 베풀기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이다. 선발사유는 관직의 수행능력과 청렴(淸廉)ㆍ근검(勤儉)ㆍ도덕(道德)ㆍ경효(敬孝)ㆍ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상(官僚像)이다. 조선 전기의 청백리 선발절차는 의정부(議政府)ㆍ이조(吏曹),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備邊司)ㆍ이조(吏曹)가 각각 왕명에 따라 경외2품 이상 관인에게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대상으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2인씩을 추천하게 하고, 추천자를 육조판서가 심사한 뒤 국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였다. 13대 명종 때부터 살아 있는 자는 ‘염근리(廉勤吏)’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고,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는 청백리로 녹선(錄選)하였다. 14대 선조대에 이르러서 청백리의 선발절차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선발 인원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전거(典據)에 없지만 ‘많이 선발하면 그 가치가 떨어지고, 적게 선발하면 응당 선발되어야 할 인물이 누락된다.’는 논란이 제기되는 가운데 조선 전기까지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선발했었고, 조선 후기와 말기에 이르러 노론(老論)의 일당 독재 또는 외척의 세도정치 등과 관련된 조정 관리들의 기강의 문란, 탐관오리의 만연과 함께 청백리가 선발될 수 있는 여건이 미흡했다. 이런 탓으로 이 시기에는 청백리가 거의 선발되지 못했다. 조선의 500년 역사동안 선정된 청백리의 수는 총 218명이며, 청백리로 뽑힌 본인에게는 나라에서 포상으로 재물을 내리거나 관계(官階)와 관직을 올려주고, 그 후손들에게는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오늘은 이 수많은 청백리 중 으뜸의 청백리로 손꼽히는 정승 황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황희는 조선 제 4대 왕인 세종 대의 재상으로 장장 18년간이나 영의정에 재임하며 세종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평소 인품이 너무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백성들로부터 늘 존경을 받았다. 1364년 고려 말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역성혁명으로 개국된 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없다’하여 72인의 고려조 신하들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 생활을 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1394년 정계에 복귀한다.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태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나아가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그간에 거친 육조정랑ㆍ승지ㆍ육조판서 등의 역임을 통하여 국정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경험과 식견 및 태종을 뒤이은 세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18년 동안 국정을 총리 하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ㆍ감독하였다. 황희는 세종의 태평성세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이런 세종과 황희에 얽힌 재미난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 황희는 어질고 검소한 생활을 하기로 유명하였다. 정승 황희가 하도 청렴하여 관복도 한 벌로 빨아 입고 심지어 장마철에는 집에 비가 샐 지경이었다. 세종은 황희의 이런 검소함을 안쓰럽게 여기고 도와줄 방법을 고민하였다. 궁리 끝에 묘안을 생각해 낸 세종은, “내일 아침 일찍 남문을 열었을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모두 사서 황 정승에게 주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폭풍우가 종일토록 멈추지 않아 남문을 드나드는 장사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문을 닫으려 할 때쯤 한 촌로가 달걀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왕의 명대로 이 달걀을 사서 황희에게 주었다. 황희가 달걀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삶아먹으려고 하자, 달걀마다 뼈가 들어 있어서 한 알도 먹을 수가 없었다. 』 운수가 나쁜 사람은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나도 역시 일이 잘 안됨을 이르는 ‘계란유골(鷄卵有骨)’의 재미있는 유래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격인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의 기록에 의하면 황희는 남의 장단점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이른바 ‘불언장단(不言長短)’을 실천하며 살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하는데, 『 황희가 벼슬길에 오르기 전 어느 날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들판에서는 농부들이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황희는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 “두마리의 소 중에 어느 놈이 더 나은가?” 농부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내 밭갈기를 멈추고 황희에게 당도하여 귓속말로 이르기를, “이 소가 낫습니다.” “왜 귀에 대고 말하는가?” “한낱 미물이지만, 그 마음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이 소가 낫다하면 저 소는 못한 것이니 소에게 이를 듣게 하면 어찌 불평의 마음이 없겠습니까?”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비록 그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저마다 나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느 소를 일을 잘한다, 못한다 하고 흉보는 일은 분명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이후 황희는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또한 어우당(於于堂)유몽인의 저서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의 기록에는 『 황희가 아들에게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귀가하자 황 정승은 관복 차림으로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 정승이,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크게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1449년 87세에 은퇴하였다. 경기도 파주에는 황희가 은퇴 후 여생을 보냈다는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 鷗 ’ 갈매기 구 자를 써서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라는 뜻이다. 반구정은 황희 사후 폐허가 되었다가 17세기에 후손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후손들은 반구정을 중수한 뒤 미수(眉叟) 허목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는데, 그가 지은 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물러나 강호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국가나 지방공공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을 일컬어 공무원이라고 하며 영어의 표현으로는 ‘national servant’ 직역하자면 ‘국민의 종(하인)’ 이다. 또한 공무원, 국회의원 따위의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공직자라고 하는데, 1980년12월 제정ㆍ발령된 이른바 ‘공무원 윤리 헌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는 “공무원은 민족중흥(民族中興)에의 선봉자로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야 하고,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책임이 크며,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공명정대(公明正大)는 물론 창의와 성실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한다.”이다. 올바른 윤리관을 기본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직무수행상의 여러 이점으로 각종 유혹의 함정에 빠져들기 쉽기에 오늘날 수많은 종류의 직업 중 가장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추어야 하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선 개국의 당시에 비하면 오늘날 비록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청백리지만 정승 황희가 우리에게 남긴 청빈사상의 참뜻을 깊이 새겨 저마다 길이길이 후손들에게 남기도록 하자. 특히 위정자(爲政者)나 공직자(公職者)들은 더 깊이 새겨두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
출처 : hyunw49
글쓴이 : 취암 원글보기
메모 : 작금에 생각이 많이 되고 우리나라 국회의원,고위공무원들에게 귀감이 되는 글입니다. 저의 블방으로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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