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3대 고대 족벌세력
1. 후지와라(藤原)씨
- 나라시대 부터 왕실의 외척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
2. 다이라 혹은 헤이(平)씨 계통
- 헤이안시대 말기 다이라 키요모리(平清盛) :무사로서 최초 태정대신
- 가마쿠라 2차 막부 싯켄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
3. 미나모토 혹은 겐(源)씨 계통
- 미나모토 요리토모(源頼朝) 가마쿠라 1차 막부 쇼군
-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무로마치 막부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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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시대>
(1) 카마쿠라 바쿠후 쇼군 1192-1333 (142년간)
[편집] 역대 쇼군
대수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일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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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 1192년 | 1199년 |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자. | |
2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頼家) | 1202년 | 1203년 |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아들. | |
3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朝) | 1203년 | 1219년 |
미나모토 요리이에의 동생. 막부의 초대 싯켄(執権)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등장 | |
4 | 후지와라 요리쓰네(藤原頼経) | 1226년 | 1244년 | 후지와라씨 출신의 쇼군. | |
5 | 후지와라 요리쓰구(藤原頼嗣) | 1244년 | 1252년 |
후지와라씨 출신의 쇼군. | |
6 |
무네카타 친왕(宗尊親王) | 1252년 | 1266년 | 황족 쇼군. | |
7 | 고레야스 친왕(惟康親王) | 1266년 | 1289년 | 황족 쇼군. | |
8 | 히사아키 친왕(久明親王) | 1289년 | 1308년 | 황족 쇼군. | |
9 | 모리쿠니 친왕(守邦親王) | 1308년 | 1333년 | 황족 쇼군. |
[편집] 역대 싯켄
대수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쇼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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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 | 1203년 | 1205년 |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싯켄(執権). | |
2 |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 | 1205년 | 1224년 | 호조 도키마사의 아들. | |
3 | 호조 야스토키(北条泰時) | 1224년 | 1242년 | 호조 요시토키의 아들. | |
4 | 호조 쓰네토키(北条経時) | 1242년 | 1246년 | 호조 야스토키의 손자. | |
5 |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 | 1246년 | 1256년 | 호조 쓰네토키의 동생. | |
6 | 호조 나가토키(北条長時) | 1256년 | 1264년 | ||
7 | 호조 마사무라(北条政村) | 1264년 | 1268년 | ||
8 |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 | 1268년 | 1284년 | ||
9 | 호조 사다도키(北条貞時) | 1284년 | 1301년 | ||
10 | 호조 모로도키(北条師時) | 1301년 | 1311년 | ||
11 | 호조 무네노부(北条宗宣) | 1311년 | 1312년 | ||
12 | 호조 히로도키(北条煕時) | 1312년 | 1315년 | ||
13 | 호조 모토도키(北条基時) | 1315년 | 1316년 | ||
14 | 호조 다카도키(北条高時) | 1316년 | 1326년 | ||
15 | 호조 사다아키(北条貞顕) | 1326년 | 1326년 | ||
16 | 호조 모리도키(北条守時) | 1326년 | 1333년 |
(2) 교토[京都] 무로마치 시대 : 1336년~1573년(240년간)
☞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아시카가(무로마치) 바쿠후 쇼군
01 아시카가 타카우지 足利尊氏 1338~1358
02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足利義詮 1358~1367
03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 1368~1394
04 아시카가 요시모치 足利義持 1394~1423
05 아시카가 요시카즈 足利義量 1423~1425
06 아시카가 요시노리 足利義敎 1429~1441
07 아시카가 요시카쓰 足利義勝 1442~1443
08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義政 1449~1473
09 아시카가 요시히사 足利義尙 1473~1489
10 아시카가 요시타네 足利義稙 1490~1493
11 아시카가 요시즈미 足利義澄 1494~1508
12 아시카가 요시타네(두번째) 1508~1521
13 아시카가 요시하루 足利義晴 1521~1546
14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義輝 1546~1565
15 아시카가 요시히데 足利義榮 1568
16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義昭 1568~1573
(3)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1573년~1603년(30년간)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의 정권을 잡았던 시대. 쇼쿠호시대[織豊時代]라고도 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가 아즈치성[安土城]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년의 거처지가 교토[京都] 모모야마[桃山]의 후시미성[伏見城]이었으므로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
30년간의 시대였지만 일본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였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켜 한국을 침범한 시기이기도 하다.
전국시대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중앙으로 진출하여 아시카가의 쇼군[將軍]을 축출하고,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4) 에도시대[江戶(=:현 도쿄)時代(강호시대)] : 1603년~1867년(264년간)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도쿠가와 바쿠후 쇼군
01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1603~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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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 경영
□ 16세기 일본사의 세 영웅
ㅇ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49세 자결,
↕ 3년차 : 직전신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 62세 사망,
↕ 6년차 : 풍신수길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 74세 사망
덕천가강
일본에 통일된 근세 봉건제 사회를 확립한 무사요, 정치가
일본이 근대화하기 이전 일본의 국가적 향배를 좌우한 3대 인물
ㅇ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은 그들 3대 인물과 일본의 16세기 근세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
ㅇ 세 영웅의 행적
오다 노부나가 등 세 인물은 일본에 천황이 통치하는 고대 전제군주시대가 끝나고 전국 각지에서 무사들이 힘을 배경으로 할거하는 중세 봉건형 막부(幕府)시대 곧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열린 뒤 사무라이끼리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전국 통일 정권을 잡음
- 먼저 막부 정권을 장악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권력의 절정에서 측근의 반란으로 암살 당했고 노부나가 밑에서 군인으로 일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4세인 1590년 전국을 통일해 정권을 잡았다.
-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에 걸쳐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는 16세기 말 일본에 중앙집권적 봉건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영웅
-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 정권의 새로운 총수 도쿠가와 가문이 통치한 에도(江戶) 시대는 60세인 1603년이래 1867년까지 260여년간 지속되며 일본 근세사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대
- 에도 시대는 1853년 일본에 페리 제독의 흑선이 들어와 일본을 개항시키고 도쿠가와 막부에 종언이 찍히면서 막을 내림
- 이후 일본은 천황을 내세운 다른 사무라이들이 나서서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새 정부를 세운 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선언함으로써 근대국가로의 길을 걷게 됨
□ 세 영웅의 리더십
ㅇ 노부나가는 일본 중세 이후의 낡은 가치관을 타파하고 구체제의 파괴에 필요한 전략과 리더십을 선택
ㅇ 히데요시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갖춘 사회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리더십
ㅇ 도쿠가와는 두 선배가 한 일을 완성시켜 오랫동안 유지하고 관리
ㅇ 일본의 최고경영자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후계자 유형 1위로 선택
ㅇ 일반 국민은 오다 노부나가를 최고경영자 유형 1위로 선택한다.
창업자가 일군 기업을 넘겨 안정적으로 이끌 인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적합하지만
어려운 시대에 조직과 구성원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끌어갈 지도자로는 오다 노부나가가 적격
□ 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
ㅇ 오다 노부나가의 리더십 특성은 경쟁자와 부하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카리스마와 실행력 그리고 결단력
ㅇ 오늘날처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에서 경영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바로 오다 노부나가가 보여 준 것처럼 리더의 독자성을 중시하는 카리스마적 결단력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리더십이야말로 현대 기업의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전형이라는 이야기다.
ㅇ '카리스마(Charisma)’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추종자들이 지도자가 갖추고 있다고 믿는 경외스런 속성이나 마력과도 같은 힘 또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인격 특성을 가리킨다. 근거가 합리적이지 못하지만 현실에서 이따금 분명히 존재하고, 조직의 지도자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인격 특성이다.
ㅇ 노부나가는 단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카리스마에 기반을 둔 비합리적 비전통적 지도자가 아닌, 합리적 전통적 지도자가 갖춰야 마땅한 시류(時流)를 보는 안목과 정책 집행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의 시대에서 얻기 어려운 인식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할 정도로 탁월한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 시대에 앞선 사고(통찰력, 정보활용력)
ㅇ 경제 부흥이 국가의 패권을 장악하는 동력이자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열쇠라는 점을 인식할 정도였고, 정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는 점을 간파할 정도로 앞선 사고를 함
ㅇ 오다 노부나가의 강력한 리더십은 그같은 천부적 재능에 기반을 둠 그런 기반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 정치는 나를 위해 실행된다. 내가 주권자다. 이제부터 나는 천하의 주권자가 되기 위한 싸움을 벌여 나가겠다”는 식으로 자신감을 피력할 수 있었다
ㅇ 스스로 자기 리더십에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믿는 자신감을 발휘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의 진정한 힘이며 그런 그의 확고한 소신과 결단력 때문에 부하들도 그를 믿고 따랐다는 해석
ㅇ 현대 사회에서도 조직을 장악하고 강력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단순한 업무능력 외에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보수집력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인격과 지도력 등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리더십에 카리스마가 생성
ㅇ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시대에 그런 의미의 리더십을 발휘해 '부하들의 성공 욕구를 자극하고 활용'했으며 '부하들로 하여금 직접 생각하고 조사하고 실행하게’했던 점에서 그를 현대 기업의 완벽한 최고경영자 감으로 묘사
▶ 인재 활용술
ㅇ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에게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노부나가의 부하들은 확실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해주는 상사를 원했고, 바로 노부나가가 그런 지도자였음
- 노부나가에게는 원하는 것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는 실천력
- 배짱이 넘치고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자를 중용
- 짚신을 삼던 농민 출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그런 노부나가의 능력 위주 리더십 아래서 빛을 보아 출세
ㅇ 카리스마를 앞세운 리더십으로 노부나가가 부하들에게 요구사항
-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 용감하고 과감한 행동, 자기 영토를 다스리는 정치적 능력, 금전을 모으는 능력, 모략이나 건설토목 공사 혹은 무기제조나 정보수집 같은 실무 능력을 나열했음
- 이런 능력들에 덧붙여 노부나가는 특히 유연한 발상과 신속한 정보제공 능력을 강조
ㅇ 노부나가가 부하들에게 유연한 발상을 주문한 것은 그의 성장 배경과 관련
-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무사 건 농민, 승려 건 누구나 특정 지역에 자리 잡고 토지에 매여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유랑자들이 유난히 많은 일본 중부지역 오와리라는 곳에서 났기 때문에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유랑자들로부터 유연한 사고를 깨우칠 수 있었고 성장해 정책을 전개하는 데 반영
- 노부나가가 주목한 유랑자들의 정신은 끈질긴 생명력, 탁월한 정보수집력, 유연한 발상, 인정에 좌우되지 않는 합리적 정신, 결단력, 실행력, 상승 지향 같은 것들
- 이들 유랑자들이 보여 준 특성이 노부나가는 나중에 전투를 벌이면서 계속 거점을 바꾸는데 활용. 거점을 바꾸는 일은 다른 적장들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어서 노부나가로서는 전투에 유리
ㅇ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제공 능력은 특히 노부나가가 리더십의 근원으로 삼은 덕목
- 노부나가는 정확하고 빠른 정보 없이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영웅적 특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한 장수
- 오케하자마 전투를 앞두고 노부나가는 적군의 세력이 너무 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는 중신들의 건의를 듣고 있었다. 한편으로 부하인 유능한 호족 야나다 마사쓰나를 통해 적의 심장부를 기습적으로 칠 수 있는 정보를 얻었다. 정보 내용은 적군의 본진 행군 경로와 휴식 장소, 기상 상황 등이 주된 것이었고 대체로 앞일에 대한 예측일 뿐이었지만 노부나가는 과감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중부지방 패권을 쥐는 계기를 마련했다.
- 전투가 끝난 직후 노부나가는 논공행상을 하면서 제1의 수훈을 적군 장수의 목을 벤 부하보다 적군 동태 정보를 제공한 부하 야나다 마사쓰나에게 돌림으로써 정보를 중시하는 방침을 보여 줌
ㅇ 오다 노부나가의 리더십과 대비시켜 현대 기업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할 무능한 상사의 특성
- 가까운 미래에 어떤 사태가 전개될 것인지 전망을 할 줄 모른다.
- 명령을 내릴 때, 단호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 현장 업무를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이론적으로만 발언한다.
- 조직이 위기에 빠졌을 때, 당황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 상황을 악화시킨다.
- 배신자를 너그럽게 봐주고 돌아오면 기꺼이 받아 준다.
- 함부로 행동하는 부하를 꾸짖지 않고 방치한다.
- 조직이나 자신, 부하의 상승을 지향하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 구성원들의 융화만 중시할 뿐 엄한 통솔력을 갖추지 못했다.
- 조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그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 업무 외에 사회나 정치 전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고 시야가 좁다.
□ 도쿠가와의 신뢰경영
ㅇ 도쿠가와 경영철학의 첫 번째 덕목은 '신뢰'였으며 도쿠가와에게는 '신뢰'가 자기 이미지 통합 전략과 같았음. 도쿠가와는 처음 노부나가의 군대와 싸워 패한 뒤 노부나가와 동맹을맺었다. 당대의 실력자 노부나가와 아직 세가 미약했던 도쿠가와 사이에는 실은 실력에 의한 주종간 갈등이 있었다.
ㅇ 도쿠가와의 충성도를 시험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도쿠가와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기까지 해야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노부나가와 도쿠가와의 동맹은 일본 전국시대의 미담이 됐다.
▶ 도쿠가와 '인간경영' 네 가지 원칙
1. 머리와 몸을 분리하는 분단 정책
정책을 만드는 머리 부분은 슨푸에 두고, 실행을 하는 몸과 손, 발은 에도에 두는 식이었다.이 이원체제는 2대 장군 히데타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노부나가가 '공포'를 이용한 관리를 했다면,
히데요시는 현자의 윤리나 도덕에 중점을 두고 부하들을 격려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유지와 관리가 필요한 시기에 일본 천하를 이끄는 장군이 된 도쿠가와가 택한 전략은 분단정책이었다.
2. '꽃과 열매를 동시에 주지 않는다'는 원칙 : 견제와 균형
도쿠가와는 남에게서 신뢰를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중시해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다이묘(大名: 일본 중세말∼근세초 지방에 할거하던 봉건영주, 쇼궁의 휘하에서 지방 세력으로 존재했다)에게는 급여를 적게주고 돈을 많이 받는자에게는 요직 곧 권력을 주지 않았다.
뒤에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과정에서도 전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다양한 인재들로 구성된 집단을 만들어 아들을 견제토록 했다. 어느 한 사람이나 조직에 절대 권한을 주지 않고 늘 이원체제를 유지
3. 늘 민심 동향을 파악하고 여론을 듣는 쪽으로 정책을 편다는 원칙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조직관리를 위해 어떻게 후계구도를 짜야 하는지 고민한 도쿠가와로서는 히데타다가 참모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점을 평가해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었다.
4. '상인의 검소한 생활과 계산능력, 재능을 본받자'는 원칙
무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경제감각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종이 한 장도 아꼈고 매사에 생산성과 효율을 강조했다.
▶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경영
도쿠가와 경영철학의 두 번째 덕목은 '인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각각 하이쿠라는 일본 특유의 단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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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라고 했고,
(鳴かぬなら 殺してしまえ ホトトギス)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鳴かぬなら 泣かして見せようホトトギス)
도쿠가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鳴かぬなら 泣かまで待とう ホトトギ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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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노부나가는 다혈질에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다. 울지 않는 새는 필요 없으니 죽여 마땅하다고 보는 냉철한 인간형이다.
ㅇ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지만 사람을 끄는 힘과 뛰어난 지혜로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게 되고 노부나가가 죽자 전국통일을 이룬 인물, 자신감에 넘치며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다고 불릴 만큼 지혜롭다.
ㅇ 인내심이 강한 도쿠가와는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로 서두르면 안 된다."고 말했다
□ 현대사회의 시사점
ㅇ 오다 노부나가는 중세 이후 일본의 낡은 가치관을 타파했고,히데요시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진 일본을 건설했다. 도쿠가와는 두 사람이 이룩한 일을 완성시켜 이를 유지시키는 터전을 마련했다.
ㅇ 리더의 제1덕목은 “도덕성”
도쿠가와는 경영자와 정치가들로부터 가장 인기가 높다.
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중시하고
여론에 항상 귀 기울이는 자세로 정권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
ㅇ 절제와 균형의 리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방법은 모든 면에서 머리와 몸을 분리하고, 꽃과 열매를 동시에 주지 않는다는 전략, 여론의 흐름을 파악하고 세상의 이치를 따른다는 것이고, 상인의 검소한 생활, 계산 능력, 재능을 본받을 것을 권한다.
ㅇ 정보수집,활용을 통한 통찰력
구체제를 파괴하고 새 시대를 세워야 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독단적 결정을 중시했고 의견을 수렴하는 회의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 배경에는 유랑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최고로 우수한 정보망을 구축하였으며, 정보가 전국난세(戰國亂世)를 평정하는 데 중요한 무기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
ㅇ 지식의 공유 및 구체화
오다 노부나가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것을 조총을 실전에서 '구체화'시켰다는 점.
처음 일본에 조총이 소개됐을 때만 해도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서는 사용시기의 제한이 많았고 또 한 번 발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실전에서 한, 두 자루의 총을 사용했을 때 조총의 위력을 인식하지 못함.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다음, 수천 정의 총을 만들어, 수천 명의 병사에게 무장시켰다. 이렇게 형성된 조총부대는 당시의 전쟁모습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
여기서 지식혁명 성공의 지름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화'를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의 예처럼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조직의 구성원이 갖고 있는 경험적이고 암묵적 지식까지도 조직원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지식으로 '구체화'시키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ㅇ 창조적 파괴를 위한 과감한 결단력, 실행력
오다 노부나가는 “이미 갖춰진 체계를 유지하는 것과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며 도전이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긴박한 상황에서 의견을 조율한 시간 따위는 없다. 최대한 빨리 최선의 전술을 고안하고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
저자 :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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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키시치도 (五畿七道)
일본의 옛 구니
기나이
도카이도
도산도
호쿠리쿠도
주코구 북부
주코쿠 남부
(세코쿠)
(큐슈)
홋카이도
기나이
주코구 북부
주코쿠 남부
(세코쿠)
(큐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49세 자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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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출생 | 덴분 3년 5월 12일(1534년 6월 23일) |
사망 | 덴쇼 10년 6월 2일(1582년 6월 21일) |
별명 | 아명 : 깃보시 별명 : 사부로(통칭), 제육천마왕, 멍청이[1], 적귀 |
계명 | 總見院殿贈大相國一品泰嚴尊儀 |
묘소 | 교토 부 교토 시 나카교 구 혼노지 교토 부 교토 시 기타 구 다이토쿠지 교토 부 교토 시 우쿄 구 묘신지 등 |
관위 | 가즈사노스케, 오와리노카미, 종오위하 탄정소충, 정사위하 탄정대필, 종삼위 참의, 종삼위 우근위대장, 정삼위 권대납언, 종이위 내대신, 종이위 우대신, 정이위, 추증 종일위 태정대신, 정일위 |
주군 | 오다 노부토모→시바 요시카네→아시카가 요시아키 |
씨족 | 오다 씨(織田氏) |
부모 | 아버지 : 오다 노부히데 어머니 : 도타 고젠 |
형제 | 오다 노부히로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카네 오다 노부하루 오다 노부토키 오다 노부오키 오다 히데타카 오다 히데나리 오다 노부테루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토시 오이누노카타 (사지 노부카타의 아내→호소카와 노부요시의 아내) 오이치노카타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시바타 가쓰이에의 아내) |
아내 | 정실 : 노히메 (사이토 도산의 딸) 측실 : 기쓰노 (이코마 이에무네의 딸) 측실 : 교운인 (다카하타 겐주로의 딸) |
자녀 | 오다 노부타다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타카 하시바 히데카쓰 오다 가쓰나가 오다 노부히데 오다 노부타카 오다 노부요시 오다 노부사다 오다 노부요시 오다 나가쓰구 오다 노부마사 도쿠히메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아내) 후유히메 (가모 우지사토의 아내) 히데코 (쓰쓰이 사다쓰구의 아내) 에이히메 (마에다 도시나가의 아내) 호온인 (니와 나가시게의 아내) 산노마루 도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니조 아키사네의 아내) 오후리 (미즈노 다다타네의 아내→사지 가즈나리의 계실) 쓰루 (나카가와 히데마사의 아내) 딸 (마데노코우지 아쓰후사의 아내) 딸 (도쿠다이지 사네히사의 아내) 양녀 도야마 후진 (다케다 가쓰요리의 아내) 양녀 (니조 아키자네의 아내) 양녀 오다 노부히로의 딸 (니와 나가히데의 아내) |
오다 노부나가(일본어:
그의 행적 및 업적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더불어 일본의 중세기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최대의 다이묘라고는 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편집] 개요
본성은 자칭 후지와라 씨(藤原氏)지만, 실제는 인베 씨(忌部氏)일 수도 있다.
가계는 오와리 슈고 시바 가문(尾張守護・斯波氏)의 사관인 오다 가문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계는 오와리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 노카미 가계(織田大和守家)의 분가 가운데 기요스 산부교(清洲三奉行) 중 하나인 단쇼추 가문(弾正忠家)이다. .
그리고 오와리 슈고다이 가문에는
- 기요스(城)오다 가문(清洲織田家):오다 야마토노카미 가계(織田 大和 守家)
- 이와쿠라(城)오다 가문(岩倉織田家):오다 이세노카미 가계가있다.
가문의 입김은 이와쿠라 오다 가문이 제일 강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은 상기 서술대로 오와리 슈고다이/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기요스 오다 가문)을 모시는 단쇼추 오다 가문이다.
덧붙여 기요스 산부교 가문은
- 이나바노카미 오다 가문(因幡守家),
- 도자에몬 오다 가문(藤左衛門家),
- 단쇼추 오다 가문(弾正忠家)이 있다
후루와타리 성(古渡城) 성주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차남 또는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복형이 둘이라는 설이 있다.[2] 노부나가는 적장자로 키워져 유아일 때 나고야 성(那古屋城) 성주로 부임하였다.
덴분 20년 (1551년) 18세에 급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받지만, 동생 오다 노부카쓰(織田信勝; 오다 노부유키(織田信行)를 말함)와 가독 다툼이 발생한다. 이에 동생 노부카쓰를 죽이고 가문내 혼란을 잠재운다. 이후, 적대세력을 차례차례 굴복시켜 오와리 국을 통일한다.
에이로쿠 3년(1560년) 27세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격파하였으며, 에이로쿠 10년(1567년) 34세에
미노의 사이토 가문을 제압하여 미노 국을 차지하였다.
그 다음해인 35세 에이로쿠 11년(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쇼군으로 봉하기 위해 상경전을 개시하여
오미 남부의 롯카구 가문과 교토의 미요시 가문을 제압했다. 그리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앉힌다. 하지만, 점차 쇼군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겐키 4년(1573년) 40세에 마침내 쇼군을 추방하였다.
다케다(武田) 가문, 아사쿠라 가문, 엔랴쿠지(延曆寺),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등으로 이루어진 반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지만, 겐키 원년(1570년) 37세에 아네가와 강 전투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뒤이어 겐키 2년(1571년) 38세에 엔랴쿠지를 불태워 후한을 없앴다.
후한을 없앤 후 덴쇼 원년(1573년) 40세에 아사쿠라 가문과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켰다. 덴쇼 3년(1575년) 42세에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 대승하였다.
이후 덴쇼 10년(1582년) 49세에 숙적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같은 해 음력 6월 2일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 혼노지(本能寺)에서 49세로 자결하였다.
기존의 권위와 세력을 무력으로 배제하였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정책에 있어서도 낙시낙좌(楽市楽座; 상업진흥), 검지(検地; 토지조사) 등을 단행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 자신 스스로 제 육천마왕이라고 칭했다》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편집] 생애
[편집] 소년시절
오와리 국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 태어난 곳은 쇼바타 성(勝幡城) 또는 나고야 성이라고 한다. 아명은 깃보시(吉法師)였다.
어머니 도타 고젠(土田御前)이 노부히데의 정실이었기 때문에 적장자로 키워져 2세 때 나고야 성주로 부임하였다. 유소년기부터 기교한 행동을 많이 하여 주위로부터 '오와리의 큰멍청이(尾張の大うつけ)'라고 불리었다. 일본에 전해진 조총에도 관심을 가진 삽화 등도 알려져 있다. 또, 신분에 관계없이 농민들과도 어울렸다.
아직 세자였을 무렵 표면적으로 가신으로 입장을 지키고 있었지만, 잠재적으로는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던 주군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기요스 성 밑을 방화하는 등, 아버지 노부히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젊은 시절부터 대담한 행동을 보였다.
또, 이마가와(今川)측 인질로 호송중 가신의 배신으로 오다 가문으로 보내진 마쓰다이라 다케치요(松平竹千代;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고, 후일 두 사람은 견고한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덴분 15년(1546년) 13세에 후루와타루 성에서 성인식을 하고 오다 가즈사노스케(上総介) 노부나가로 칭했다. 덴분 17년(1548년) 15세에 노부나가의 교육을 담당했던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의 조력으로 아버지 노부히데와 적대관계에 있는
미노 국의 센고쿠 다이묘 사이토 도산(斎藤道三)과 화친을 성립시키고, 그 조건으로 도산의 딸 기쵸(帰蝶; 후에 노히메(濃姫))와 노부나가는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덴분 18년(1549년) 16세에 이설로는 덴분 22년(1553년) 20세에 노부나가와 도산은 쇼토쿠지(正徳寺)에서 회담을 했고, 이때 도산은 멍청이라고 불리는 노부나가의 기량을 간파했다는 일화가 있다.
덴분 20년(1551년) 18세에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했지만, 장례에서 제단에 향을 던졌다고 한다.[4] 덴분 22년(1553년) 20세에 노부나가의 교육을 담담했던 히라테 마사히데가 자결한다. 노부나가는 이를 한탄해 세이슈지(政秀寺)를 건립하여 그의 혼령을 위로한다.
[편집] 가족다툼에서 오와리 통일
당시, 오와리는 슈고 다이묘 시바 가문이 쇠하고,
오와리 4개 군의 슈고다이인 오와리 야마토노카미 (기요스)가문의 당주로 기요스 성 성주 오다 노부토모(織田信友)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그 노부토모를 모시는 산부교 가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뛰어난 지용으로 오와리 중서부의 지배권을 확대해 갔다.
노부히데 사후, 노부나가가 뒤를 잇지만, 主家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토모는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쓰(織田信勝)를 지지해 노부나가를 모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노부토모에 의해 실권을 빼앗긴 오와리 슈고 시바가문의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는 사전에 이 계획을 노부나가에 밀고 하였다.
이에 격노한 오다 노부토모는 시바 요시무네의 적장자 시바 요시카네(斯波義銀)가 군사를 이끌고 물고기 사냥을 하러간 틈을 타 요시무네를 살해하였다.
이 때문에, 시바 요시카네는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하였고, 노부나가는 주군 시바 요시무네를 죽인 반역자 오다 노부토모를 숙부 오다 노부미쓰(織田信光)와 함께 토벌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와리 4개 군의 슈고다이 오다 야마토노카미(기요스) 가문은 멸문되었다.
노부나가는 본거지를 나고야 성에서 기요스 성으로 옮겼다. 명실상부한 오다 가문의 필두가 되었다.
고지 2년(1556년) 음력 4월, 23세에 장인 사이토 도산이 아들 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龍)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때 노부나가도 도산을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지만, 때를 놓쳤다고 한다.
이러는 중, 오다 가문의 중신중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하야시 미치토모(林通具),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등은 노부나가의 기량을 의심하여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쓰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에 노부나가를 지지하는 모리 요시나리(森可成), 사쿠마 모리시게(佐久間盛重),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등과 대립하였다.
장인 사이토 도산의 죽음을 호기로 동생 노부카쓰 파는 같은 해 음력 8월 24일 거병하였지만, 이노우(稲生)에서 노부나가에게 패하였다(이노우 전투). 그 후, 노부나가는 노부카쓰가 농성 중인 스에모리 성(末盛城)을 포위 공격했지만, 어머니 도타 고젠의 중개로 그간의 일을 덮어 두었다. 고지 3년(1557년) 24세에 노부카쓰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였고, 그것을 안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에게 밀고하였다. 노부나가는 병을 핑계로 동생 노부카쓰를 문병하게 하여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다.[5]
게다가, 노부나가는 이누야마 성(犬山城) 성주 오다 노부키요(織田信清)와 협력해
옛 주가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기요스 오다 가문)의 숙적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오다 노부카타(織田信賢)를 우키노(浮野)에서 격파하였다(우키노 전투).
그뒤, 노부카타를 추방하였다.
또, 새로이 오와리 슈고로 옹립된 시바 요시카네가 노부나가 토벌을 획책하자,
노부나가는 시바 요시카네를 추방하였다.
[편집] 오케하자마 전투 : 스루가 국/ 도토미 국 이마가와 요시모토 축출
오와리 국을 통일한 다음해인 에이로쿠 3년(1560년) 음력 5월 27세에 스루가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로 침공해 온다.
도토미,
미카와를 지배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세는
2만에서 4만에 이를 정도로 대군이었다.
이에 대해 오다 군은 총병력 5천에 불과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군은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을 선봉으로 해 오다 가문의 성채를 차례차례 점령해 갔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침착했고, 깊은 밤에 노와 가부키의 원형인 고와카마이(幸若舞)의 《아쓰모리(敦盛)》를 춘 후, 갑옷을 입고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에서 참배했다. 그 후, 젠쇼지(善照寺) 성채에서 약 4천의 군을 정비한 후, 적의 본군을 강습해 적장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배었다. 음력 5월 19일에 일어난 이 전투를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한다.
총대장의 죽음을 안 이마가와 군은 본국인 스루가로 철퇴하였다.
오케하자마 전투 후,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은 쇠퇴하였고,
이마가와 가문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그 후, 모토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개명하였다.
,기요스 동맹 :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당시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를 경계하였고
미노를 공략하기 위해 사이토(斎藤, 재등) 가문과 교전하였기 때문에 양자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런 까닭에 에이로쿠 5년(1562년) 29세에 양자간의 기요스 동맹이 맺어졌다.
[편집] 미노 공략
사이토 도산이 죽은 후, 미노 사이토 가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오케하자마 전투를 전후해 양자간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4년(1561년 28세에 ) 사이토 요시타쓰가 급사해 적장자 사이토 다쓰오키(斎藤龍興)가 뒤를 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이토 가문 가신단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문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한다.
에이로쿠 7년(1564년, 31세)
오미 북부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와 동맹을 맺어 사이토 가문의 견제를 강화하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동생 오이치(お市)를 아자이 가문으로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한편, 에이로쿠 8년(1565년 32세) 노부나가는
이세로 눈을 돌려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具教) 등 이세의 여러 호족과 전투를 벌인다. 이때 활약한 이가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였고, 그는 뒷날 노부나가의 중신중 한 명이 되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33세) 미노의 여러 성을 손에 넣었고, 더욱이 서미노 3인방(西美濃三人衆)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34세) 미노국의 사이토 다쓰오키를
미노 국을 손에 넣었다. 이 시기 이노쿠치(井ノ口)란 지명을 기후(岐阜)로 개명하였다. 또,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직인으로 사용하였고, 표면적으로 천하통일의 야망을 드러냈다.[6]
[편집] 상경전
기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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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중앙에서는 에이로쿠 8년(1565년 32세) 교토를 중심으로 기나이에서 권세를 자랑하는 미요시 가문의 유력자 미요시 나가야스(三好長逸), 미요시 마사야스(三好政康), 이와나리 도모미치(岩成友通)의 미요시 3인방(三好三人衆)과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와 반목하였고, 요시테루는 암살되었다(에이로쿠의 변).
이후, 미요시 3인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제14대 쇼군으로 요시테루의 사촌동생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를 옹립해 막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암살도 꾸몄지만,
요시아키는 막신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와다 고레마사(和田惟政)의 도움으로 교토를 탈출해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미요시 가문 토벌에는 호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로쿠 11년(1568년 35세) 음력 7월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미요시 가문 토벌 요청을 하는 한편,
미노 국(기후(岐阜)과 국경을 접해있는
가이의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에게는
자신의 양녀를 신겐의 4남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와 결혼시켜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양녀 도야마후진(遠山夫人)은 다케다 노부카쓰(武田信勝)를 낳은 직후 조세(早世)했기 때문에, 자신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와 신겐의 6녀 마쓰히메(松姫)와의 혼약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주위의 세력과 동맹을 맺어 국내외로 기반을 닦았다.
음력 9월, 노부나가는 쇼군을 옹립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상경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 요시하루義治) 부자는 오다 군의 맹공을 받고 간논지 성(観音寺城)이 낙성되어이후 롯카쿠 요시카타, 요시하루 부자는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때, 롯카쿠 가문의 종가 롯카쿠 요시히데, 요시사토는 노부나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전하자, 미요시 요시쓰구(三好義継)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실력을 눈치채고 종속하였다.
그 외의 미요시 3인방은
아와로 도주하였다.
유일하게 저항하던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도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이렇게하여 중앙정치를 장악했던 미요시 정권은 겨우 6개월만에 무너졌다.
대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15대 쇼군으로 옹립한 노부나가의 오다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로부터 부쇼군(副将軍)의 지위를 권유받지만, 사절하였다고 한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36세) 음력 1월, 노부나가가 이끄는 오다 군 주력이 미노로 돌아간 틈을 타, 미요시 3인방과 사이토 다쓰오키 등의 미노 낭인무리가 공모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있는 어소 로쿠조 혼코쿠지(六条本圀寺)를 공격한다(혼코쿠지의 변).
그러나, 노부나가는 호설이 내리는 중 겨우 2일만에 도착하는 신속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도착 전에 아자이 나가마사, 이케다 가쓰마사의 원군과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분전으로 미요시, 사이토 군은 패퇴하였다.
음력 1월 10일 미요시 군과 공동으로 궐기한 다카쓰키 성(高槻城) 성주 이리에 하루카게(入江春景)를 공격해 하루카게의 항복을 받았지만, 노부나가는 두 번의 이반은 허락하지 않고 처형하였다.
셋쓰 슈고 이케타 가쓰마사를 필두로 이타미(伊丹) 가문과 고레마사 삼인으로 셋쓰 국을 통치하게 했다.
같은 날 노부나가는 사카이(현재 오사카부 사카이)의 복속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사카이 상인들은 미요시 3인방과 결탁해 노부나가에 대항하지만, 미요시 3인방이 노부나가에 패하자 복속하였다.
이세도 어느 정도 진전되어 에이로쿠 11년(1568년 35세)
간베 도모모리(神戸具盛)의 항복을 받고, 3남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간베 가문의 양자로 보냈다.
이세 국(간베 도모모리/기타바타케 도모노리)
다음해인 에이로쿠 12년(1569년 36세) 이세 고쿠시(国司)인 기타바타케 도모노리의 항복을 받고,
차남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기타바타케 가문의 양자로 보냈다.
그후, 도모노리는 유폐되었고, 기타바타케 일족은 살해되었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는 기나이에서 세력을 확대해갔다.
기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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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
에이로쿠 12년(1569년 36세)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무로마치 16대 쇼군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덴추온오키테(殿中御掟) 9개 조의 규정서, 후에 7개 조를 추가해 반포하고, 이것을 쇼군 요시아키가 인정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대립이 표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겐키 원년(1570년 37세) 음력 4월, 노부나가는 거듭된 상경 명령을 무시하는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토벌하기 위해 아자이 가문과의 맹약을 반고하고, 동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에치젠 원정길에 오른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아사쿠라 가문의 여러 성을 차례차례 함락해 가지만, 가네가사키로 진군중,
오미 북부의 동맹자 아자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반해 노부나가를 궁지에 몰았다.
하지만, 후위를 맡은 이케다 가쓰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분전으로 무사히 교토로 돌아갈 수 있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귀환할 때 따르는 자는 겨우 10 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고, 요시아키는 타도 노부나가가 적힌 어내서(御内書)를 여러 영주에게 보냈다.
이에
오미 북부의 아자이 나가마사,
가이의 다케다 신겐,
셋쓰에서 거병한 미요시 3인방에 더하여
엔랴쿠지,
가와치 오사카 동부 이시야마 혼간지등 사원세력도 호응해 노부나가 포위망을 결성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 37세) 음력 6월
오미 국 아네가와 강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격돌한다(아네가와 강 전투). 이 전투에서 아자이측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磯野員昌)의 분전으로 고전하지만, 도쿠가와측의 도움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겐키 원년(1570년 37세) 음력 8월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 등도 있어 고전한다.
게다가 노부나가 본대가 셋쓰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자이, 아사쿠라, 엔랴쿠지 등의 연합군 3만이
오미 사카모토로 처들어 온다.
오다 군도 대항했지만, 중신 모리 요시나리와 동생 오다 노부하루(織田信治)가 전사했다. 음력 9월 23일 급히 본대를 셋쓰에서 오미로 귀환했다. 황급히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은 히에이 산(比叡山)으로 자리를 옮겨 대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오미 국 시가에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대치하였다(시가의 진(志賀の陣)).
그러나, 그 간 혼간지의 수장 겐뇨(顕如)의 명을 받은
오다 령의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오키(織田信興)와 중신 사카이 마사히사는 전사하였다.
궁지에 빠진 노부나가는 조정에 압력을 넣어 칙명 받아 음력 12월 13일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의 화친하였다.
이때, 오쿠보 다다타카(大久保忠教)가 저술한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천하는 아사쿠라님이 가지시고, 저는 두 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겐키 2년(1571년 38세) 음력 9월 노부나가는 몇 번이고 퇴피, 중립을 권고한 후, 저항을 계속한 엔랴쿠지를 불태웠다. 이것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에 협력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한다.
겐키 3년(1572년) 음력 7월 노부나가는 적장자 기묘마루(奇妙丸; 후일 오다 노부타다)를 첫 출진시킨다. 이 무렵, 오다 군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소소한 전투를 반복하지만, 전황은 노부나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음력 8월 아사쿠라 군의 무장 마에바 요시쓰구(前波吉継), 도미타 나가시게(富田長繁) 등이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음력 10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출병요청에 호응해
다케다 군 총병력은 3만이
미노 동부를 비롯하여
도쿠가와 령의
도토미로 쳐들어왔다.
미노 동부에서는 다케다 군의 무장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가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공격했다.
노부나가의 숙모인 이와무라 성주 오쓰야노카타(おつやの方)는 적장 노부토모의 결혼 전술에 말려 노부토모와 결혼해 항복하고,
양자로 있던 노부나가의 5남 보마루(坊丸; 후일 오다 가쓰나가(織田勝長)는 인질로 가이로 보내졌다.
미노 동부 대부분이 다케다 가문의 손에 떨어졌다.
또, 도쿠가와 령에 있어서도 도쿠가와 군은 히도코토자카 전투(一言坂の戦い)에서 패하였으며, 더욱이 음력 12월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대패하였고, 원군으로 가있던 가신 히라테 히로히데(平手汎秀)는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있기 전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히라테 히로히데로 구성된 3천의 원군을 보냈었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겐키 4년(1573년 40세) 다케다 군은
미카와로 쳐들어갔고, 음력 2월 노다 성(野田城)을 공략한다.
게다가 다케다 신겐의 상경전에 호응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협력해 거병한다. 동서로 적에 둘러싸인 노부나가는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음력 4월 5일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으로부터 칙령을 받아 요시아키와 화친하였다.
음력 4월 12일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여 다케다 군은
[편집] 포위망의 붕괴
다케다 신겐 사후, 노부나가는 전력을 가다듬어 음력 7월 반기를 든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니조 성(二条城)과 마키시마 성(槇島城)을 공격하여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하였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음력 7월 28일 연호를 겐키에서 덴쇼로 할 것을 조정에 아뢰었다.
덴쇼 원년(1573년 40세) 음력 8월 노부나가는 호소카와 후지타카에 명하여 요도 성(淀城)에 농성하고 있는 미요시 3인방 중 한사람인 이와나리 도모미치를 토벌했다.
같은 달에 노부나가는 3만의 군을 이끌고
에치젠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원정길에 올랐다.
도네자카 전투(刀根坂の戦い)에서 아사쿠라 군을 격파해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있는 이치노다니 성으로 진격한다. 이에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주변의 배신과 믿었던 사촌 아사쿠라 가게아키라(朝倉景健)의 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후에 에치젠은 혼간지 문도(門徒)의 반란 본거지
뒤이어 음력 9월
오미북부 오다니 성(小谷城)을 공략하여 함락한다.
아자이 히사마사(浅井久政), 나가마사 부자는 자결하였고, 나가마사의 어머니 오노도노(小野殿)는 사로잡아 그녀의 열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잘라낸 후 살해하였다.
나가마사에 시집가 있던 동생 오이치노카타는 성이 함락되기 전 노부나가에게 인도되었다.
음력 9월 24일 노부나가는 오와리, 미노, 이세의 군을 중심으로 3만 대군을 이끌고
오다 군은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활약으로 보름정도 동안 나가시마 주변의 적성을 차례차례 함락하였지만, 저항도 격렬하여 음력 10월 25일 장기전을 우려한 노부나가는 철퇴하였다. 철퇴중 적군에 추격도 있어 오다 군은 고전하였고, 부장 하야시 미치마사(林通政)는 전사하였다.
음력 11월
가와치의 미요시 요시쓰구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조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를 총대장으로 군을 가와치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의 실력을 두려워한 요시쓰구의 가신들은 배신하였고, 요시쓰구는 음력 11월 16일 자결하였다. 음력 12월 26일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도 다몬 산성(多聞山城)을 양도하는 것으로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편집] 나가시마 일향종
덴쇼 2년(1574년 41세) 음력 1월 오다 령이 되었던 에치젠에서 지역의 무사들과 혼간지 문도(門徒)의 반란이 일어나 슈고다이인 마에바 요시쓰구를 죽이고 에치젠을 장악한다. 더욱이 이에 호응한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동부에서 공격해왔다.
에치젠 혼간지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
노부나가는 아들 노부타다와 함께 출진하여 맞서보지만,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노 동부의 아케치 성(明知城)을 비롯 주변의 지성 18성을 함락하였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군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노 기후로 철퇴하였다.
음력 3월 노부나가는 상경하여 종3위 산기(参議)에 서임되었다.[7]
음력 7월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해 병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나가시마 일향종 문도의 공격도 집요해 이복형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를 비롯 다수의 무장이 전사하였다. 하지만, 음력 8월 병량이 고갈되었고, 오다 군의 맹공으로 오토리이 성(大鳥居城)이 함락되어 일향종 문도 천여 명이 죽었다. 점차 전황은 오다 측에 유리하게 가져갔다.
음력 9월 29일 병량 부족을 느낀 나가시마 성의 문도는 항복하고, 배로 오사카 방면으로 퇴거 하겠다는 뜻을 노부나가에게 보여 이를 승낙하였다. 그러나 형제를 잃은 노부나가는 문도들의 퇴거도 늦고 해, 문도들의 배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문도 측은 격분하였고, 일부는 오다 군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히데나리(織田秀成)를 죽인다.
더욱이 노부나가는 나가에 성(中江城), 야나가시마 성(屋長島城)에서 농성하고 있는 나가시마 문도에 대해서는 성을 포위공격하여 문도 2만여 명을 죽였다. 이 전투로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문도의 반란을 잠재우는 데 성공하였다.
[편집] 나가시노 전투 및 에치젠 평정
덴쇼 3년(1575년 42세) 음력 4월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 신겐 사후,
다케다 가를 배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貞昌)를 토벌하기 위해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미카와 국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거성 나가시노 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군도 선전하였기 때문에 다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 함락이 지체되었다.
음력 5월 12일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후를 출발해 음력 5월 17일 미카와의 노다에서 도쿠가와 군 8천과 합류하였다. 3만 8천으로 증가한 오다, 도쿠가와 군은 음력 5월 18일 시타라가하라(設楽原)에 진을 쳤다. 음력 5월 21일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 군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다케다 군에 완승하였다(나가시노 전투).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나가시노 합전(長篠の合戦) 포함)은 덴쇼3년 5월 21일(1575년 6월 29일 42세)미카와노쿠니 나가시노 성(현재 아이치 현 신시로 시 나가시노)를 둘러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케다 가쓰요리군 1만 5000명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결전지가 시타라가 하라(設楽ヶ原)및 아루미 하라(有海原)(『藩翰譜』,『信長公記』)였기 때문에 나가시노 시타라가 하라 전투라고 기록된 경우도 있다.
당시 최신 병기였던 철포를 3000자루를 준비 신(新)전법인 3단 발사를 실행한 오다군에게 당시 최강이라 불렸던 다케다 기마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섬멸되었다는 게 통설이지만, 여러 논점에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
[편집] 합전의 경과
[편집] 개전까지
1573년 8월, 다케다 가신단이였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후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다케다 신겐이 죽었을 때, 아버지 사다요시의 과감한 결단에 의해 일족, 부하를 데리고 도쿠가와 쪽으로 배신한다.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에서 손에 넣은지 얼마 안된 나가시노 성에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를 배치하였고(즉 대(対) 다케다의 전선에 두었다.)2년 후인 1575년 4월 42세, 다케다 가쓰요리는 1만 5000명이라는 대군을 끌고 나가시노 성을 포위한다.
[편집] 나가시노 성 농성전
다케다의 대군에 비해 나가시노 성에는 500명이라는 적은 병력밖에 없었지만, 200자루의 철포나 대철포를 준비해두었고 격렬한 저항으로 다케다군을 힘들게 하였다. 하지만, 군량미가 떨어진 시점에서 수일 이내에 원군이 오지 않으면 낙성은 불가피하다는 상황에 몰렸고,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가신 도리이 스네에몬이 몰래 탈출하여 오카자키 성의 이에야스에게 군대를 요청한다.
그에 앞서 이에야스는 오다가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노부나가는 5월 13일에는 이미 3만의 군세를 이끌고 기후를 출발하여 오카자키 성에 도착하였다.
원군이 오는 것을 전해들은 당일, 도리이는 나가시노 성으로 향하였지만, 다케다 군에게 붙잡혀 버린다. 다케다 쪽에선 성에 있는 병사의 사기를 꺾기 위해 ‘원군은 오지 않는다.’라고 전하면 살려준다고 제안하였고, 도리이는 승낙한다. 하지만, 도리이는 직전에 약속을 깨고 ‘원군은 수일 이내에 온다.’라고 전하여 성 안의 사기를 높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라는 일화가 남아있다.
[편집] 노부나가 군단의 도착
노부나가 군 3만과 이에야스 군 8000은, 나가시노 성 바로 앞의 시타라가 하라에 도착하였다.
시타라가 하라는 들판(原,하라)이라고는 해도 강을 따라서 구릉지가 몇 개나 이어지는 장소였기 때문에, 상대 진영의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노부나가는 이곳을 전지(戦地)로 선정하여, 렌고 강을 수로로 판단하고 방어진의 구축에 힘쓴다. 이것은 강을 사이에 둔 대지 양쪽의 경사면을 깍아내 인공적인 급사면으로 하여 3중의 토루(土塁)에 마방책을 배치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야전(野戦)축성이었다. 즉, 노부나가 측은 철포대를 주력으로 하여, 수비하면서 다케다의 기마대를 쫓아 사격하는 전술을 세웠다.
한편 노부나가가 도착했다는 정보를 들은 다케다 진영에서는 즉시 군의가 열렸다. 다케다 신겐 시대때 부터의 중진들, 특히 다케다 사천왕이라 불리는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등은 노부나가 스스로 출진한 것을 알고 철수하자고 진언하였지만, 다케다 가쓰요리는 결전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나가시노 성 견제에 3000정도를 두고, 나머지 1만 2000을 시타라가 하라로 향했다. 이것으로 인해, 신겐 때부터 있었던 오래 된 중신들은 패전을 예감하여, 죽을 각오로 일동이 모여 술을 마시며 결별하였다고 한다.
[편집] 도비가스 산 공방전
5월 20일 밤, 사카이 다다쓰구가 이끄는 히가시 미카와무리 외, 오다군 가나모리 나가치카등의 요리키(与力), 철포 500자루를 가진 합 약 3000명이라 하는 연합군의 대부대(『信長公記』에 의하면 약 4000명)가, 은밀히 도요 강을 도하, 나가시노 성 부근에 남아있는 다케다군 쪽으로, 능선을 타고 남측에서 후방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다음날 새벽녘에는 나가시노 성 포위의 중요한 곳인 도비가스 산 성채를 후방에서 강습하였다.
도비가스 산 성채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 감시하기 위해 쌓은 성채로 본성과 4개의 성채라는 구성이었지만, 기습의 성공에 의해 모두 함락된다. 이로 인해,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나가시노 성 구원이라는 제 1목적을 달성하였다. 더욱더 농성하고 있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군을 더한 사카이 기습대는 추격의 손을 늦추지 않고, 아루미 마을에 주류중인 다케다군까지도 소탕하여, 시타라가 하라로 전진한 다케다 본대의 퇴로를 위협하는데에도 성공했다.
이 도비가스 산 공방전에 의해 다케다 쪽은, 주요 장수인 가와쿠보 노부자네를 시작으로, 사에구사 모리토모, 고미 사다나리, 와다 나리시게, 나와 무네야스, 이이 야시우에몬등 유명한 무장이 사망하였다. 다케다의 패잔병은 본대로 합류하기위해 도요 강을 건너 퇴각하였으나 사카이 기습대의 맹추격을 받았고, 나가시노 성의 서해안, 아루미 마을에서도 고사카 마사즈미가 죽었다. 이처럼 사카이 부대의 일방적인 전개였지만, 이에 앞서 너무 깊이 들어간 도쿠가와 쪽의 후코즈 마쓰다이라 고레다다만은, 퇴각하는 오야마다 마사유키에게 반격당해 사망하였다.
무릇, 이 작전은 20일 밤에 합동군 의논 중에 나온 사카이 다다쓰구에 의한 발안이었지만, 노부나가에게 일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 회의를 끝내고 곧바로 노부나가는 사카이를 몰래 불러내어, 작전의 결행을 명했다. 다케다 군의 첩보를 염려하여, 회의에서는 전혀 채용하지 않았다. 라는 것이 이유라고 한다.
[편집] 시타라가하라 결전
5월 21일 이른 아침, 도비가스 산 공방전의 대세가 정해졌다고 생각할 즈음, 퇴로를 위협당할 것을 두려워한 다케다군이 움직여 합전이 개시되었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 3만 8000과 다케다군 1만 2000의 전투는 낮 즈음 까지 계속되었다.(약 8시간)결과는 오다, 도쿠가와군의 승리였지만, 60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한편 다케다군은 1만 2000명의 희생자(도비가스 산 공방전도 포함한다.)를 내었지만, 오다, 도쿠가와군의 전사자가 이름도 없는 아시가루(足軽) 졸병(특히 오다군은 대부분이 졸병)이었던 것에 비해, 다케다군의 전사자는 다케다 사천왕인 야마가타, 나이토, 바바를 시작으로 하라 마사타네, 하라 모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 사나다 마사테루, 쓰치야 마사쓰구, 쓰치야 나오노리, 안나카 가게시게, 모치즈키 노부나가, 요네자와 시게쓰구등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피해는 막대했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간신히 수백명의 하타모토에게 보호받으며, 다카토 성으로 후퇴.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과 화친을 맺고, 우에스기의 부대 1만과 이를 이끄는 고사카 마사노부와 합류 후,
오다, 도쿠가와 쪽의 3000자루라는 양의 철포, 더욱 더 철포대를 3개로 나누어, 철포의 탄을 채우는 데에 허비하는 시간을 없애는 3단 발사 전법으로 최강이라 불리는 다케다 기마대를 패배시켰다는 것이 유명한 통설이지만, 3000자루라는 양과 3단 발사 전법에 대해서는 역사상의 문제가 많아 부정하는 학자가 많다. 단지,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의 철포대 투입과 기마대를 막기 위한 마방책이 활약한 것은 사실이다.
[편집] 영향
이 전투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고민거리였던 다케다가를 패배시킨 것에 성공한 오다가는 세력을 확대하였고, 또 하나의 고민거리였던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다.
도쿠가와가는
미카와를 완전히 장악하여 후타마타 성, 다카텐진 성을 되찾는데에 성공한다.
많은 우수한 병사를 잃은 다케다가는, 다케다 가쓰요리 아래로 재편성을 강화시키지만 이것에 실패, 또한 우에스기가나 호조가와의 외교실패로 인해, 이후, 급속히 쇠퇴하여 1582년 멸망에 이른다.
미카와 국의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이 전공에 의해 노부나가가 하사하여 ‘信昌(노부마사)’로 개명하였고,(원래 그런 약속이 있었지만)이에야스의 장녀 가메히메를 얻어 정실로 맞이한다. 더욱 더 그 중신을 포함하여 영지 지배 등을 자식과 자손들에게 이르기까지 보장한다는 필적을 받아, 사다마사를 조상으로 하는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는 메이지 시대까지 번창하게 된다. 또한, 처형된 도리이 스네에몬은 후세에 가신으로 이름을 남겨, 그 자손은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편집] 참전 무장
[편집]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
- 도비가스 산 공방전
-
- 오다군
- 가나모리 나가치카
- 도쿠가와군
- 사카이 다다쓰구,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마쓰다이라 고레타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마쓰다이라 기요무네, 혼다 히로타카, 오쿠다이라 사다요시, 스가누마 사다미쓰, 사이고 이에카즈, 곤도 히데모치, 시타라 사다미치
- 나가시노 성 농성전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마쓰다이라 가게타다
[편집] 다케다군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1천여 정의 조총을 사용해 일제사격을 하였다. 소위 삼단격(三段撃ち)이라는 전법에 대한 학설은 의문시되는 것이 대세이다. 이후,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노부나가로부터 이름 한 자를 받아 노부마사(信昌)로 개명하였고, 이에야스의 장녀 가메히메를 처로 맞이하였다.
전년
슈고다이 마에바 요시쓰구를 죽이는 데 협력한 도미타 나게가시 등의 지역 무사들도 죄를 물어 처분하고 에치젠을 혼간지 문도들이 장악했었다. 그후, 덴쇼 3년(1575년) 음력 1월 혼간지 수장 겐뇨의 명으로 슈고다이로써 파견된 시모쓰마 라이쇼(下間頼照)가 악정을 폈기 때문이었다. 이를 호기로 본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가 끝난 직후 음력 8월 에치젠으로 군사를 돌렸다.
혼간지 문도들도 저항하지만, 불만을 품은 일부 문도들이 노부나가에 협력하여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모쓰마 라이쇼,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를 비롯 1만 2천여명의 에치젠 국,
가가 국의 혼간지 문도가 토벌되었다.
이렇게 하여, 에치젠은 다시금 오다 가문의 영지로 되었고, 노부나가는 에치젠 8개군을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주었다. 이때 노부나가는 가쓰이에에게 북국[8]경영의 규정서를 주었다고 한다.
[편집]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
덴쇼 3년(1575년 42세) 음력 11월 4일 노부나가는 곤다이나곤(権大納言)으로, 동월 7일에는 우콘에노다이쇼(右近衛大将)로 서임되었다.
음력 11월 28일 노부나가는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에 오다 가문의 가독을 양도 하고
미노 국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실권은 노부나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덴쇼 4년(1576년 43세) 음력 1월 노부나가는 비와 호(琵琶湖) 호반에 아즈치 성(安土城)의 축성을 지휘, 감독하였다. 덴쇼 7년(1579년 46세) 5층7계의 천수가 완성되어 성의 공사가 완료되었다. 천수 내부에는 후키누키 양식[9]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어느 예수회의 선교사는 “이 같은 호화로운 성은 유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경탄한 편지를 모국에 보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기후 성을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에게 양도하고, 완성된 아즈치 성에 살았다.
노부나가는 이곳을 거점으로 천하통일에 매진하였다.
덴쇼 4년(1576년 43세) 음력 1월, 노부나가에게 우의를 표했던
단바 국의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秀治)가 반기를 들었다.
더욱이 이시야마 혼간지도 재차 거병하는 등, 다시금 반노부나가의 움직임이 확산되어 갔다.
음력 4월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반 나오마사(塙直政)를 총대장으로 3만 대군을 이시야마 혼간지의 거점인 오사카로 파견하였지만, 아시하라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부장 반 나오마사를 비롯 1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가와치 오사카 동부 이시야마 혼간지
오다 군은 수세에 몰려 덴노지(天王寺) 성채에서 농성하였다.
노부나가는 음력 5월 5일 와카에 성(若江城)에서 동원령을 내려 모인 3천여 명을 이끌고 음력 5월 7일 이른 아침, 덴노지 성채를 포위하고 있는 이시야마 혼간지 문도 1만5천여 명에게 공격을 가하였다(덴노지 성채 전투). 노부나가 자신도 부상을 입는 등 격전이었지만, 성채에 있던 오다 군도 협공을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후, 오다 군은 이시야마 혼간지를 포위하여 병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음력 7월 13일 이시야마 혼간지의 원군인 주고쿠의 모리 수군에게 오다 수군은 패배하였고, 이시야마 혼간지는 주고쿠의 모리 가문으로부터 병량과 탄약을 보충받았다(제1차 기즈 강하구 전투).
이 무렵,
에치고 국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도 관계가 악화되었고, 덴쇼 4년(1576년 43세) 겐신은 이시야마 혼간지와 화친하며 노부나가와의 동맹관계를 파기하였다.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을 맹주로
가와치 오사카 동부이시야마 혼간지,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
기슈(기이)의 사이카 마고이치 무리등이 동조하여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다.
덴쇼 5년(1577년 44세) 음력 2월 기슈 사이카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지만,
주고쿠의 모리 수군의 원조와
노토 침공으로
음력 3월 형식적으로
기슈(기이)의 사이카 무리의 수령 사이카 마고이치(鈴木孫一)와 화친하고 기이에서 철퇴하였다.
한편,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의 공격을 견디고 있던
노토의 나나오 성의 친노부나가 파는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3만 대군을 선봉부대로, 자신이 이끄는 본대 1만 8천을 후위부대로 출진하였다. 그러나, 음력 9월 15일 나나오 성은 함락되었고, 음력 9월 23일 선봉부대인 시바타 군은 데토리 강 전투에서 참패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노부나가는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과의 충돌을 피해
아즈치성(安土城)으로 귀환하였다.
노부나가가 궁지에 몰린 것으로 본
히사히데의 모반을 알아차린 노부나가는
가가 국에서 철병하여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한 군을
시기 산성(信貴山城)으로 급파해 음력 10월 진압하였다(시기 산성 전투).
동월 노부나가에게 저항했던
단바 가메야마 산성(亀山城)의 나이토 사다마사(内藤定政)가 병사하자, 즉각 가메야마 산성, 모미이 성(籾井城), 사사야마 산성(笹山城) 등의 단바의 여러 성을 공략하였다.
덴쇼 6년(1578년 45세) 음력 3월 13일
에치고 국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하였고,
겐신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가문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 틈을 노려 오다 군은 우에스기 령의 노토, 가가를 공략하였다.
겐신의 죽음에 따라 노부나가 포위망은 붕괴되었다.
[편집] 오다 가문의 군단
- 호쿠리쿠 방면 -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
- 나카센 방면 - 오다 노부타다 군단 (다키가와 가즈마스 군단)
- 기나이 방면 - 아케치 미쓰히데 군단
- 기나이
- 주고쿠 방면 - 하시바 히데요시 =토요토미 히데요시 군단
- 시코쿠 방면 - 니와 나가히데, 오다 노부타카 군단 (1582년 결성)
- 혼간지 방면 - 사쿠마 노부모리 군단
- 도카이도 방어 - 도쿠가와 이에야스 (단, 도쿠가와 가문과는 동맹관계)
- 도카이도
덴쇼기에 들어서면서 노부나가는 다방면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다. 수하 장수에게 다이묘급의 영지를 주어 주변을 공략하였다. 연구자 중에는 이들 신설 다이묘를 군단 또는 방면군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일반 서적에도 꽤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러한 명칭이 없었다.
우에스기 겐신 사후, 뒤를 이은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 대해 시바타 가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등으로
다케다 가쓰요리에 대해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 다키가와 가즈마스, 모리 나가요시 등으로
단바의 하타노 히데하루에 대해서는 아케치 미쓰히데,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으로,
주고쿠 아키 국의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는 하시바 히데요시=토요토미 히데요시 등으로,
셋쓰의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해서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오다 군은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문과의 전투에서
엣추를 공략하였다.
덴쇼 6년(1578년 45세) 음력 3월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주코쿠의 모리 가문과 결탁해 모반을 일어킨다.
동년 음력 7월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를 필두로 한 아마고 가문 부흥군의 고즈키 성(上月城)이 주코쿠의 모리 가문에 함락되어 아군을 잃었다.
동년 음력 10월
가와치 오사카 동부 이시야마 혼간지와 결탁, 노부나가에 대항하였다.
한편,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와 동조했던 셋쓰 동부의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 다카야마 시게토모(高山重友)는 오다 군의 공격과 협박에 의해 항복하였다.
동년 음력 11월 6일 제2차 기즈 강하구 전투에서 주코쿠의 모리 수군이 대패하였고,
가와치의 이시야마 혼간지와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를 도울 수 없었다.
덴쇼 7년(1579년 46세) 여름
동년 음력 9월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는 처와 자식을 남겨둔 채 아리오카 성(有岡城)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아리오카 성은 함락되었고, 아라키 일족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동년 음력 10월
비젠 국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모리 가문을 이반해 오다 가문에 복속하자, 전황이 역전되었다.
덴쇼 8년(1580년 47세)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는 성안의 병사와 영민의 안전을 조건으로 개성하였고, 자결하였다(미키 전투).
또, 혼간지에 있어서도 동년 음력 4월 오기마치 천황의 칙령으로 유리한 조건에 화친하였다. 조건에 따라 혼간지는 오사카로부터 퇴거하였다. 이로써 하리마를 비롯 단바, 셋쓰를 평정하였고,
덴쇼 9년(1581년 48세)에는
덴쇼 7년(1579년 46세)
이가의 호족에 화가 난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독단으로 이가 국을 공격했지만, 대패하였다.
노부나가는 노부카쓰을 엄하게 질책하고, 이가 호족에 대한 적의를 품었다(제1차 덴쇼 이가의 난). 그리고, 덴쇼 9년(1581년 48세) 노부카쓰를 총대장으로 6만의 군세로 이가를 공략하여 오다 가의 영지로 삼았다(제2차 덴쇼 이가의 난).
덴쇼 7년(1579년 46세), 노부나가는 도쿠가와의 적장자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그의 어머니 쓰키야마도노(도쿠가와의 아내)에 대해 죽음을 명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사위인 노부야스에게는 12개 조 난행을 들었고, 쓰키야마도노에 대해서는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와의 내통 등을 들었다.
이에 도쿠가와 가신들 사이에는 노부나가 공순파와 반노부나가 파로 갈라져 격논이 오갔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 사람의 자결을 명하였다. 단 이에 관해서는 이설도 있다.
덴쇼 8년(1580년 47세) 음력 8월 노부나가는 후다이 가신 사쿠마 노부모리와 그의 적장자 사쿠마 노부히데(佐久間信栄)에 대해서 혼간지와의 전투에서 무사안일로 넘어갔기 때문에 추방하였다. 더욱이 하야시 히데사다,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는 옛적에 모반을 꾀했다는 것과 그의 친지들이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추방하였다.
[편집] 다케다 정벌
덴쇼 9년(1581년 48세) 음력 2월 28일 교토에서 열병식을 했다. 이때, 오기마치 천황을 초대하였고, 여러 귀족들도 참석하였다. 일종의 무력 시위였다.
동년 음력 5월
엣추를 지키고 있던 우에스기 무장 가와다 나가치카(河田長親)가 급사한 틈을 노려 오다 군은 엣추로 진군해 엣추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동년 음력 3월 23일 도쿠가와 가문도 다케다 가문의 다카덴진 성(高天神城)을 탈환하는 등 다케다 가문을 압박하였다.
또, 기슈에서도 사이카 무리의 내부분열로 노부나가를 지지하는 스즈키 마고이치와 반 노부나가 파의 도바시 히라쓰구(土橋平次) 대립이 격하되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이 국 기슈의 사이카 마고이치
동년
셋쓰의 아라키 무라시게의 잔당을 은닉해 주거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내통하고 있던 고야 산(高野山)의 문도들과 대립하였고, 게다가 노부나가의 사자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에 격노한 노부나가는 고야 산의 문도 수백 명을 체포하였고,
덴쇼 10년(1582년 49세) 음력 2월 1일
가이 다케다 가쓰요리의 매제 기소 요시마사(木曾義昌)가 신부 성의 축성에 따른 과도한 요구에 불만을 품고 노부나가 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계기로 음력 2월 3일 동원령을 노부타다에게 명하였다. 그리고, 다케다 령을 공략하였다.
가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가
히다에서,
노부타다 자신은 기소에서 다케다 령으로 진격하였다. 그 수는 10만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케다 군은 여러 호족이 노부나가에 항복하고, 더욱이 다케다 일족인 스루가 에지리 성(江尻城) 성주 아나야마 노부키미(穴山信君) 등이 주요 무장이 노부나가에 항복하였다.
다케다 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패배하였다.
음력 3월 5일 노부나가는 아즈치성을 출발하였고, 음력 3월 8일 노부타다는 고후(甲府)를 점령하였다.
음력 3월 11일 덴모쿠 산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노부카쓰(信勝) 부자는 자결하였다.
다케다 가문 멸망 후, 노부나가는 다케다 잔당 토벌을 명하였다.
다케다 령의 배분에서는
스루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시나노 북부를 모리 나가요시에게,
시나노 남부를 모리 나가히데에게 주어
호조 우지나오의 호조 세력을 저지했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에게 했던 것처럼 평화 외교를 하여, 동맹 관계를 유지하였다.
[편집] 혼노지의 변
덴쇼 10년(1582년 49세) 여름, 노부나가는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를 공략하기 위해, 3남 간베 노부타카(神戸信孝)와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의 군단을 준비시킨다.
동년 음력 5월 15일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즈치로 초대한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접대역으로 맞겼다. 미쓰히데는 15일에서 17일에 거쳐 이에야스를 격진이 대접하였다.
이에야스에 대한 접대가 한창인 무렵 하시바 히데요시=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로부터 원군을 요청받는다. “주코쿠의 모리 측에서 대군을 이끌고, 다카마쓰 성(高松城)으로 구원할 조짐이 있습니다.”라는 보고였다.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히데요시의 원군을 명하였다. 이때, 미쓰히데의 접대 내용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가 고쇼(小姓)인 모리 란마루(森蘭丸)에게 미쓰히데의 머리를 치도록 시켰다고 했다. 이 같은 속설은 에도 시대 이후 유포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음력 5월 29일 주코쿠의 모리 원정 출정에 대한 준비를 위해 상경하였고, 혼노지에서 숙식하였다. 하지만, 원군으로 보내질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이 돌연 교토로 진입하였고, 음력 6월 2일 혼노지를 급습하였다. 이때, 수하 부하들이 노부나가의 신뢰가 두터워,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가 적었기 때문에, 혼노지를 급습하기 전까지 목표가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1백 명 정도의 호위군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지만, 스스로 창을 가지고 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압도적 병력차 때문에 수세에 몰렸고, 노부나가는 처소로 돌아가 불을 질렀다. 그리곤 불속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위 아케치 히데미쓰(明智秀満)가 노부나가의 사체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노부나가와 비슷한 승려를 주변에 배치했기 때문에 누군지 모른 채 매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 외국인(흑인) 측근 야스케(弥助)는 혼노지 변에서도 마지막까지 노부나가와 동행해 싸웠다고 한다. 미쓰히데에게 잡혔지만, 풀어주었다고 한다.
2007년에 행해진 혼노지 터의 발굴조사에서 혼노지 번과 동 시기에 있던 해자 터와 대량의 기와가 발견되어, 혼노지가 성채였고, 모반에 대비했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의 학설에서는 노부나가가 이나바야마 산성에 입성하여 기후로 그 명칭을 바꿨다는 점, 그 이후로 쓰인 천하포무에서 무의 의미가 사실 중국에서는 황제의 힘을 나타낸다는 점, 아즈치 성 축성을 중국의 황제의 거처처럼 설계하였다는 점, 천하포무의 인장에 당시 황제만 사용하였다는 용의 인장을 넣었다는 점, 천황이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으나 무슨 일인지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혼노지의 변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쿠데타가 아닌 오다 노부나가의 천황에 대한 쿠데타를, 당시 공가(公家)와 연이 깊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그 의도가 발각되어 노부나가의 쿠데타를 방지하기위해 노부나가를 공격했다는 유력한 설이 등장했다.
[편집] 인물
[편집] 성격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란 시구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시구는 노부나가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히라도 번주 마쓰라 기요시의 수필 《갑자야화》에 수록된 것으로 작가 미상의 시구이다. 또, 이 시구에 계속해 《울지 않으면 새장으로 보내겠다. 두견새》란 부분도 있어, 센고쿠 시대의 무장들에 비해 에도 시대 쇼군은 그다지 기골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시구는 노부나가의 성격보다도 그의 결단력과 기계를 평가하는 시구인 것 같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아자이 히사마사, 나가마사 부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3인의 두개골에 금칠하여 연회 때 그 일을 널리 알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잔 대신으로 사용되어 가신들이 그 잔에 든 술을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후세 소설가의 각색이고, 실제 사용되지 않았다.
해골에 하쿠다미[10]를 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나타낸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인물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크며, 마른 체격으로 수염이 적다. 목소리는 꽤 큰 편이며 항상 무예를 좋아해 천하고 상스럽다. 정의롭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오만하고, 명예를 존중한다. 결단력에 재능이 많고, 전술에 치밀함이 있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고, 부하의 진언을 대부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신 이외의 다이묘 대부분을 경멸하고, 마치 자신의 부하 다루듯 말한다. 좋은 이해력과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부처 등 우상을 경시해 점은 일체 믿지 않는다. 명의상 법화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물주, 영혼 불멸, 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업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공명에 최선을 다한다. 사람과 대화할 때 둘러대는 것을 싫어한다.
세간의 평판을 중시하고, 항상 올바른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부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은 교토 귀족 등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편집] 일부 가혹한 행동
노부나가가 행한 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옛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당시 단행되었던 정책에 관해서 비난이 많다. 이 때문에 광기의 혁명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단, 이와 같은 비난에 관해서는 노부나가 사후에 오다 가를 계승한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정보조작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경계하였고, 냉대 하였지만, 그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오다 가문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를 볼때 노부나가 사후에도 영향력이 컸던 것 같다.
당시 종교 세력이 속세의 권력과 하나가 되어 종교 본연의 의의를 망각한 일과 승려들의 부패 등을 감안해 볼 때 노부나가의 불교 탄압을 좋게 보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중기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그 일이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승려의 폐단을 없앴다. 이것 또한, 천하의 공을 세운 큰 일중 하나라고 봐야한다.”라고 평했다.
자보즈(茶坊主)[11]의 일처리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고, 이에 노부나가는 격노하였다. 자보즈는 자신에 미칠 화를 두려워하여 선반에 숨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선반과 함께 자보즈를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자보즈를 벨 때 베는 맛이 좋아 사용된 칼에는 헤시키리(圧し切り)[12] 하세베(長谷部)[13]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겐키 원년(1570년 37세) 음력 5월 6일 스기타니 젠주보(杉谷善住坊)라는 조총의 명수가 노부나가를 암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덴쇼 원년(1573년) 젠주보가 잡혀 왔다. 노부나가는 젠주보를 머리만 나오게 흙에 묻어 생매장 하고 무딘 대나무 톱으로 그의 목을 썰어 고통속에 서서히 죽였다.
덴쇼 3년(1575년 42세) 음력 11월 미노 이와무라 성을 함락한 후, 개성 조건을 무시한 채 적장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오쓰야노 가타를 비롯 5 명을 나가라 강변에서 거꾸로 매달아 찔러 죽였다. 오쓰야노 가타는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였다.
덴쇼 6년(1578년 45세) 기나이의 고야 산의 문도 1383 명을 포박해 살해하였다. 이는 고야 산의 문도들이 밀정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덴쇼 6년(1578년 45세) 음력 12월 13일 아마가사키 부근에서 아라키 무라시게 일족 부녀자 122 명을 십자가에 매단 후 찔러 죽였다. 더욱이 남자 124 명, 여자 388 명을 4 동의 가옥에 몰아 넣은 후, 불을 질러 죽였다.
덴쇼 10년(1582년 49세) 음력 4월 10일 노부나가는 비와 호의 지쿠부 섬(竹生島)의 참배를 위해 아즈치 성을 출발하였다. 아즈치 성과 지쿠부 섬 사이는 좀 멀었기 때문에 당일로는 돌아가기 어려운 거리였다.
이 때문에 시녀들은 구와노미데라(桑実寺)에 참배가거나, 마을에서 장을 보나거나 하여 아즈치 성을 비웠다. 마침, 노부나가는 그날 돌아왔으며, 시녀의 외출을 안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시녀들을 참살하였다. 이때, 시녀들의 구명을 탄원한 구와노미데라의 주지도 살해하였다. 단, 구와노미데라에는 이때 살해되었다는 주지의 기록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이후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죽이지 않았다. 또, 문헌에 죄를 물어 처벌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시녀들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없다.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에 대해 행한 행동은 대부분은 당시 시대상황상 학살이라기보다 오히려 보통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센고쿠 시대를 조기에 끝을 맺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노부나가가 행한 처형 방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 여러 다이묘도 했었다.
덴쇼 5년(1577년 44세) 하시바 히데요시=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츄코쿠의 모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비젠, 미마사카, 하리마 국경 부근에서 여자, 어린아이 200 명 이상을 꼬챙이에 꽂아 죽이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지금도 이 부근은 지옥골짜기라고 불리고 있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등도 인신매매를 하는 등, 노부나가가 한 행동 역시 특별히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당시 상황과 도덕 기준을 생각해 그의 행동을 평가해야 한다.
[편집] 초상화
아이치 현 도요타 시의 조코지(長興寺)에 노부나가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 외에도 유럽의 화가가 실사한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사진을 보면 진한 눈썹에 날카로운 큰 눈, 높은 코, 다물어진 입, 긴 얼굴 윤곽과 수염 등이 특징이다. 단, 이 초상화에 관해서는 사료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아, 메이지 시대 행해진 현창사업 때 작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노부나가의 청년 무렵에는 여자로 잘못 볼 정도로 미소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키는 약 170 cm 정도[14]에 500 m 앞에서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편집] 교우관계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들과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실제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다.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쓰리(祭り)를 즐겼던 것 같다.
상경 이후 조정 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구게(公家)와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마에히사(近衛前久)와는 애당초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였다고 한다.
당시 다른 센고쿠 무장과 같이 남색을 즐겼다. 고쇼인 마에다 도시이에,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모리 란마루 등과 관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고 대신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편집] 서양문물의 관심
서양문물에 관심이 깊어, 교토에서 열린 관병식 때 벨벳으로된 외투에 서양 모자를 쓰고 참가하였다. 만년에 전장에 나갈 때면 서양식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 알레산드로 발리그니아누(Alessandro Valignano)의 노예였던 흑인에 흥미를 나타냈고, 그를 양도 받아 야스케(彌介)라고 부르며 측근으로 삼았다.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한다. 호기심이 강해 조총이 일반적이지 않을 무렵에 화승총(火縄銃)을 사용하였다. 기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상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 것 같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 성을 그린 병풍도을 선물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1585년에 도착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
[편집] 문화에서의 관심
바둑, 고와카마이를 좋아하고, 사루가쿠(猿楽)를 싫어하였다. 고와카마이의 '아쓰모리' 중
인간 오십년 돌고 도는 인간세상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이란 대목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한다.
스모(相撲)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열었다. 또, 스모 대회는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어,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名人)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坪内)라는 이름을 가진 미요시 가문의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 노부나가는 쓰보우치에게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노부나가가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쓰보우치를 처형하려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1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나온 2 번째 요리의 맛을 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수긍하고, 고용하였다.
그 후, 쓰보우치는 “애초에 2번째 요리를 내왔으면 좋았잖아.”라는 물음에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 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 요리였을 뿐이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 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후일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 내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을 해야되는 것이 가신이 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 한다면,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편집] 정책
[편집] 천하포무
- 천하포무(天下布武)를 훈독으로 읽으면 "하늘아래 무를 펼친다"(天の下、武を布く)로 읽힌다. 무력을 통해 천하를 취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년에 들어서는 무가정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상기의 서술되로 노부나가는 미노를 공략한 후에 거처를 이노구치로 옮긴후, 이노구치의 지명을 기후로 개명하였고, 이 무렵에 천하포무라는 직인을 사용하였다.
[편집] 종교정책
- 노부나가의 종교는 명목상 불교의 법화종이지만, 불교도에 대한 정책과 아즈치 성의 석벽에 사용된 석불과 묘석을 사용한 일,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등은 오다 노부나가가 유물론적 사고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오다 노부나가는 승려의 횡포를 비판하고, 기독교 선교사를 칭찬하였으며, 기독교도와 불교 신자들이 주장하는 하느님과 부처의 존재와 영혼 불멸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단, 오다 노부나가가 불교세력에 대해 엄한 정책을 폈다는 사료 대부분은 불교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예수회의 기록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노부나가가 일향종 등의 불교도를 없애버리려고 했다는 사관은 에도 시대 혼간지 교단에 의해 유포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 성 천수각내의 천정과 벽화에 불교, 도교, 유교를 제재로 한 그림을 그리거나, 정토진종과 엔랴쿠지의 종교활동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의《일본사》에 따르면, 아즈치 성내에는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범산(梵山)이라는 큰 돌을 두어 신성시하였고, 가신과 영민에게 예배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이 자기 신격화에 관해서는 조정과의 관계, 대륙 진출의 구상 등 긍정적으로 보는 학설과 부정적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또, 프로이스가 이 일을 기록한 때는 노부나가 사후의 일이고, 그 밖의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을 품은 학자도 있다.
[편집] 조정과의 관계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에 관해서는 조정과 마찰을 빗었다는 대립설과 조정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다는 융화설로 양분되어 있다. 조정의 대표인 오기마치 천황과 노부나가의 관계와 오다 정권의 성격에 결부시켜 1970년대부터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이마다니 아키라(今谷明)가 오기마치 천황을 노부나가의 최대 정적으로 본《노부나가와 천황》을 출간하였고,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 다치바나 교코(立花京子)가 실증연구를 토대로 혼노지의 변에서의 조정흑막설을 제시하는 등, 논쟁이 활발하였다.
단, 남아 있는 사료가 불완전하고, 노부나가와 조정간에서 벌어진 일을 둘러싸고, 상반된 견해로 해석할 가능성도 있다.
[편집] 상업정책
상공업자에 장을 세울 수 있는 허가서를 주었고, 불필요한 관문은 철폐해 경제와 유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과 함께 검지를 철저히 하여 영국지배를 확립하였고, 가신들을 성 밑에 주거시켜 상비군을 편성했다. 단, 기존의 시장을 모두 없애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장이 설수 있는 곳에는 장을 설수 있게 주변을 조성하였고,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는 기존의 시장을 이용했다.
[편집] 인사정책
- 인재의 능력을 중시하여 신분의 귀천없이 인재를 등용하였다.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토요토미 히데요시, 출신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다키가와 가즈마스, 낭인이던 아케치 미쓰히데 등을 등용하는 한편, 기존 가신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와 하야시 히데사다 등을 추방하였다.
- 중신으로 오다 가문 내에 입지를 굳혔지만, 활약 이상으로 이권을 주장하는 사쿠마나 하야시에 대해서, 징벌적 숙청을 단행했다. 그러나, 사쿠마 노부모리에게는 19개 조의 절함장(折檻状)을 내려 아무른 이유없이 추방한 것이 아니라, 정계를 은퇴하던지, 공을 세우든지 하는 선택권을 주었다. 이 절함장과 마에다 도시이에의 귀참을 허용한 것으로 실패를 상회하는 공적을 세우면, 받아들이겠다고 보았다고도 한다.
- 사쿠마 노부모리와 하야시 히데사다의 후다이 가신 및 안도 모리나리의 숙청에 관해서는 가신의 소령을 정리해 오다 가문의 직할령을 늘리는 목적도 있다고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유행하던 다도(茶道)로 가신단 장악의 수단으로 활용해 당시 한 지역의 가치를 가졌던 다기(茶器)를 영지와 금전 대신 상으로 내렸다. 가이 공략에 전공을 세웠던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다호(茶壺)를 원했지만, 주지 않고 단지 간토칸레이(関東管領)라는 칭호와 고즈케 국만 가증해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 선교사와 함께 온 외국인 용병을 받아들여 국적을 불문하고 자신의 병사로 활용했다.
- 인사에 있어서 엄한 일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네네에 대해 차갑게 대한 것을 알자, 히데요시를 불러 엄하게 질책하고 네네에 대해서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는 등, 인정미 넘치는 행동도 하였다. 또, 자신이 추방한 사쿠마 노부모리, 노부히데에게는 노부모리가 죽자, 노부히데의 귀참을 허락하는 등의 이면도 보였다.
- 노부나가의 측근 중 군사, 참모적 인물은 좀처럼 두지 않고, 호리 히데마사, 모리 란마루라는 명령을 대행을 위한 비서관만 등용했다. 성공한 인물 중 이와 같은 경우는 많지 않다. 노부나가 자신이 타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위 인물들은 노부나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끌려가기 일쑤였다. 단, 난세의 시대에서 과감한 계혁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덧붙여 센고쿠 시대에 소위 오늘날 군사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없고,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重治)가 군사였다는 설은 후세의 창작이다.
- 센고쿠 시대 배반과 이반은 일상다반사였음에도 관계없이, 노부나가를 배반한 자들 대부분은 노부나가가 상경할 때까지는 가신이었다. 오와리, 미노를 영국을 했을 무렵의 가신들은 거의 배신을 하지 않았다.
- 덴쇼 8년(1580년) 노부나가는 하야시 히데사다를 과거에 모반했다는 이유로 추방하지만, 같은 죄를 지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죄를 묻지 않았다. 게다가 가쓰이에에게는 에치젠 8개군 75만 석이라는 오다 가신단 수일(随一)의 영지와 필두 가로의 지위를 주었다. 또,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도 그의 실력을 평가해 두 번의 항복을 허락했다. 이와 같이 능력이 있다면, 그 죄를 묻지 않고 중용했다.
[편집] 전략
- 전략으로는 철저한 준비를 하여 상대의 힘을 무력화하고, 그 위에 상대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전투에 임했다. 오케하자마 전투로 대표되는 적은 병력으로 적의 의표를 공격하여 대군을 격파하는 책략은 그다지 쓰지 않았다. 특히 노부나가가 그 존재를 경계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과는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고 신중히 대응했다.
-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
- 신겐과 겐신도 노부나가와 단독으로 싸우지 않고, 주위와 협력하여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뒤에 서술한 것과 같이 적은 병력으로 전투를 행했으며, 시기를 놓친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등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 대량 살상을 명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상대의 항복도 허락지 않고 섬멸한 것은 사원세력과의 전투 정도다. 다케다 정벌이나, 제2차 덴쇼 이가의 난 등의 전투에서는 일부 상대의 항복을 받아 들였다. 사원세력과의 전투에서도 먼저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화친을 요구하거나, 중립을 제촉하는 등의 입장을 취했지만, 상대가 이를 거절하거나 파기하였다.
- 나가시마, 에치젠의 일향문도와의 전투 등에서 상대를 섬멸하지만, 그들의 구심점으로 있는 혼간지 겐뇨의 혼간지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화의를 맺었다. 또, 다카덴진 성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적을 위압, 조략하는 행동을 구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집] 내정
- 적 다이묘와 잇키, 부하들에게는 가멸찬 노부나가였지만, 영지인 오와리, 미노엔 선정을 베풀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도 노부나가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영민의 지지가 있어서였다. 연이어 발생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의 상공업자들도 엄정한 노부나가의 통치를 반겼다고 한다.
- 오다 군의 아시카루(足軽)가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을 희롱하는 것을 본 노부나가는 교토의 치안을 손하는 행위로 보아 스스로의 손으로 벤 삽화도 있다. 또, 혼노지의 변 후, 아케치 미쓰히데를 따르는 호족층이 적었던 점도 이를 반영한다.
- 낙시낙좌는 노부나가가 가장 먼저 행한 정책이라는 말들 하고 있지만, 실제는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사다요리(六角定頼)가 행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도 낙시낙좌를 대규모로 시책하여 비와 호 등을 중심으로 한 유통에 따른 상업 발전에 눈을 돌리는 등, 한발 앞선 내정을 펼쳤다(유통에 따른 상업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쌀)이 중시되었다).
- 공공사업에서도 손을 뻗쳐, 길을 정비해 1리[15]마다 나무를 심어 표석으로 삼았다. 이는 자군의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변의 관문도 폐지하여 주변과의 왕래를 쉽게 해 상업을 활성화하였다. 타 지역에서는 적군의 진군 속도를 고려해 그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 노부나가는 도량형의 통일에도 힘써 되에 각각의 소인과 화압을 찍어 단위를 통일하였다. 또, 질 나쁜 화폐는 못 쓰게 하고, 질 좋은 화폐를 사용하도록 선전령(選銭令)을 반포했다.
[편집] 노부나가의 성공 이유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성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16].[17]
실력위주의 인재등용, 상업장려 및 사회, 경제기반의 안정 등을 들 수 있다.
- 군 체제 확립
- 직업군인제를 적극 활용
- 직업군인제를 통한 농번/농한기에 대한 병력 손실을 감소
- 정보수집에 대한 권장
- 자신이 판단하였을 때의 중요도에 따라, 때때로 파격적인 포상을 하거나 인색한 포상을 함.
- 상업 / 기독교의 권장
[편집] 가신
오다 사천왕
필두 가신
-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18]
- 무라이 사다카쓰(村井貞勝)
교토 부교(京都奉行)[19]
사위
-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쓰쓰이 사다쓰구(筒井定次),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 마에다 도시나가(前田利長), 마쓰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 미즈노 다다타네(水野忠胤), 사지 가즈나리(佐治一成), 니조 아키자네(二条昭実), 마데노코지 아쓰후사(万里小路充房), 도쿠다이지 사네히사(徳大寺実久)
측근
고쇼[20]
구로 호로(黒母衣)[21]
-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모리 요시카쓰(毛利新助), 가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 이코마 가쓰스케(生駒勝助), 쓰다 모리쓰키(津田盛月), 하치야 요리타카(蜂屋頼隆), 나카가와 시게마사(中川重政), 히라이 규에몬(平井久右衛門) 등
아카 호로(赤母衣)
-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이노 히사키요(飯尾尚清), 후쿠토미 히데카쓰(福富秀勝), 반 나오마사(塙直政), 모리 히데요리(毛利秀頼), 노노무라 마사시게(野々村正成), 이노코 가즈토키(猪子一時), 아자이 마사사다(浅井政貞), 이토 나가히사(伊東長久),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岩室長門守), 사와키 요시유키(佐脇良之), 가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등
그 밖의 유력 중신
-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 다케이 유안(武井夕庵),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이나바 잇테쓰(稲葉一鉄),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 우지이에 나오모토(氏家直元)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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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센고쿠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출생 | 덴분 6년 2월 6일(1537년 3월 17일)[1] |
사망 | 게이초 3년 8월 18일(1598년 9월 18일) |
개명 |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요시 |
별명 | 도키치로(통칭), 사루(猿, 원숭이), 모멘 도키치(木綿藤吉), 도요 다이코(豊太閤) |
신호 | 풍국대명신(豊国大明神) |
계명 | 国泰祐松院殿霊山俊龍大居士 |
묘소 | 교토 부 교토 시 히가시야마 구 도요쿠니 신사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히가시 구 후도인 |
관위 | 지쿠젠노카미, 종오위하 좌근위소장, 종사위하 참의, 종삼위 권대납언, 정이위 내대신, 종일위 관백, 태정대신, 추증 정일위 |
주군 | 마쓰시타 유키쓰나 → 오다 노부나가 → 히데노부 |
씨족 | 본성: 다이라 (平 헤이) 씨 → 후지와라(藤原) 씨 → 도요토미( 명자: 기노시타 씨 → 하시바 씨 |
부모 |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 어머니: 오만도코로 계부: 지쿠아미 양부: 고노에 마에히사 |
형제 | 닛슈(미요시 요시후사의 아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나가 아사히히메(사지 휴가노카미의 아내) → (소에다 요시나리의 아내, 이혼)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내)[2] |
아내 | 정실: 기타노만도코로[3]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 계실: 요도도노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외 |
자녀 | 하시바 이시마쓰마루 도요토미 쓰루마쓰 도요토미 히데요리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 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어:
그는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기 이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는 이름을 사용했다.[4] 그 자신의 가신(家臣)이기도 했던 일본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그의 6촌 여동생의 아들이다.
[편집]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 국(尾張国) 아이치 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빈농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겼으며 오다 가문 안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죽자 주고쿠에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돌아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역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해 그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 후, 오사카 성(大坂城)을 쌓았으며 관백(関白),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또,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태합검지(太閤検地)와 가타나가리(刀狩)라는 정책을 펴 국내를 안정시켰지만, 조선 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과오도 범했다. 임진왜란 중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죽여 후계를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주었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히데요리의 보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필두로 한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위임하였다.
스노마타 성(墨俣城), 이시가키 산성(石垣山城)을 하룻밤에 완성했다는 이야기와, 가나가사키(金ヶ崎)에서의 퇴각에 있어 후위부대를 맡은 일, 다카마쓰 성 수공(高松城の水攻め) 등 그의 재능을 살린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고, 농민 출신에서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생애는〈센고쿠 제일의 출세가〉라는 정평이 나있다.
[편집] 생애
[편집] 출신
오와리 국 아이치 군 나카무라(현 나고야 시 나카무라 구)의 농민 출신이라고 알려진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과 어머니 나카(なか)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년에 관해서는 덴분 5년(1536년)이라고 전해져 오지만, 최근 덴분 6년(1537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 야에몬의 성씨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출생일은 음력 1월 1일이며 아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라고 하지만[5], 이는《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의 창작으로 실제 태어난 날은《천정기(天正記)》와 가신 이토 히데모리(伊藤秀盛)가 기재한 덴분 6년(1537년) 음력 2월 6일생으로 보고 있다.
널리 유포된 설로는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이 전사한 후, 어머니 나카는 지쿠아미(竹阿弥)와 재혼하였지만, 양아버지 지쿠아미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험악하여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집을 뛰쳐나와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루가 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태합소성기(太閤素性記)》에 따르면 7세 때, 아버지 야에몬과 결별하고 8세에 고메이지(光明寺)에 가 불문에 입적하지만, 곧 뛰쳐나왔고, 15세에 망부의 유산 일부를 가지고 집을 나와 방랑했다고 한다.
그러나,《태합기(太閤記)》에서는 지쿠아미를 히데요시의 실제 아버지로 보고, 기노시타(木下)라는 성(姓)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이 아니라는 의혹과 아내 네네(ねね)의 어머니쪽 성이라는 투로 적고 있다.
히데요시의 출신에 관해서는 문학박사 겸 역사학자 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는 목수나 대장장이 등의 기술자 집단 출신설을 채택하였고, 역사학자 이시이 스스무(石井進)는 행상인 설 등 비농업종사자 설을 채택했다.
또, 일본가문연구회(日本家紋研究会)의 다카자와 히토시(高澤等)는 히데요시 일족이 사용한 택사문(沢瀉紋)과 히데요시의 통칭 도키치로(藤吉郎), 또, 누나 닛슈(日秀), 아사히(朝日)의 남편의 출신 및 미즈노 가문(水野氏) 설이 있는 계부 지쿠아미 등을 포함해 히데요시 자신도 미즈노 가문 출신이지 않느냐는 설을 역사독본(歴史読本)에 투고하였지만, 현 시점에서는 의혹 대부분이 불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편집] 이마가와 가신
도토미 국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처음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로 이름을 올려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가문인 이노 가문이 지배하는 도토미 국 나가카미 군 즈다지 장원(현 하마마쓰 시 미나미 구 즈다지 정)의 즈다지 성(頭陀寺城) 성주 마쓰시다 유키쓰나(松下之綱)를 섬겨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도키치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곧 가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마쓰시다 유키쓰나는 이마가와 가문 몰락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1582년 혼노지 변이후 덴쇼 11년(1583년 47세) 히데요시에게 단바 국과 가와치 국의 1,600석을 받았다.
덴쇼 18년(1590년 54세) 에는 오다와라 정벌의 공으로 도토미 국 구노 성 1만6천석을 받는다.
[편집] 오다 가신
덴분 23년(1554년 18세)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6]로써 일한다.
기록에 보면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잔일을 도맡으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선조실록》에는 그가 노부나가에게 고용되기 전에 그의 행차 앞에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부하들이 죽이려는 것을 노부나가가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으니, "도저히 제가 가난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노부나가가 그에게 변소지기 일을 시켰더니, 그가 청소한 변소에서 냄새는커녕 티 하나도 나지 않았고, 노부나가가 자신의 신발을 만들도록 시켰더니 정성을 다해 신발을 만들어 바쳤다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하루는 노부나가가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는데, 히데요시는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해서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어, 우물이 뒤집히면서 물 위에 떠오른 금술잔을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고 이로서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 출세길이 열렸다고 한다.
《간양록》에는 또, 노부나가가 매번 종들을 시켜 시장에서 물건을 사오게 하면 항상 비싼 값을 치르면서 조금만 값이 안 맞아도 사오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도키치로(=히데요시)는 매번 싼 값으로 좋은 물건을 그때 그때 사다 바쳤으므로 노부나가는 그것을 흡족해했지만, 실은 도키치로가 매번 자기 돈으로 물건값의 반을 보탠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급기야 노부나가가 직접 북쪽을 치는데, 도키치로가 창을 잡고 돌격해 닥치는 곳마다 모두 쓰러뜨렸다고 한다.[7]
기요스 성의 성과 관련된 업무와 내방 업무 등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자주 발휘하고 솔선 수범하여 큰 성과를 보였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의 환심을 샀고, 점차 오다 가문내에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용모를 보고 노부나가가〈원숭이〉,〈대머리 쥐〉라고 부른 것 같다.
에이로쿠 4년(1561년 25세) 아사노 나가카쓰(浅野長勝)의 양녀로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의 딸 네네와 결혼한다.
미노 국 사이토 다쓰오키(斎藤龍興)와의 전투 중 스노마타 성 축성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지만,《무공야화》등을 근거로 한 이야기는 당시 사료에는 기술이 없고, 에도 시대에 창작되었다는 설이 강하다. 이 무렵 사이토 가문의 영향하의 미노로부터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重治),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正勝),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32세) 음력 9월
오미 미쓰쿠리 성(箕作城) 공략에 활약한 이야기가《신장기(信長記)》에 기록되어 있다(간논지 성 전투(観音寺城の戦い)).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제15대 쇼군에 옹립하고 교토를 평정하자,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함께 교토에서 정무를 보았다. 당시 문헌에 히데요시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단, 히데요시란 이름의 적인 기록은 1560년 3월 8일짜 24세 서장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토벌에 종군하였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오미 북부의 맹우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배신으로 가나가사키에서 급히 퇴각하게 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는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와 아케치 미쓰히데와 함께 후위부대를 맡아 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아자이ㆍ아사쿠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편집] 오다 정권 아래
오미 3개군을 하사 받아 나가하마 성주로 부임
덴쇼 원년(1573년 37세)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그의 영지였던 오미 3개군을 하사 받아 오다니 성에 입성하지만, 산성인 탓에 비와 호 호변의 이마하마(今浜)에 성을 축조하고 지명을 나가하마(長浜)로 개명해 나가하마 성주로 부임했다.
이 무렵 오다 가문 내 유력 가신 니와 나가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로부터 한 자씩을 받아 성을 하시바(羽柴)로 개명하였다. 또, 오미의 인재를 발굴하여 옛 아자이 가문의 가신들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키워냈다.
덴쇼 4년(1576년 40세)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 대치중인 호쿠리쿠 방면군단장 시바타 가쓰이에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지만, 작전을 둘러싼 마찰로 무단으로 오미 나가하마로 귀환하였다. 그 후, 시바타 가쓰이에는 우에스기 겐신에 패배하였다(데토리 강 전투)(手取川の戦い)).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곧 용서하였고,
야마토 국에서 반기를 든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토벌명을 받아 히사히데를 토벌했다(시기 산성 전투(信貴山城の戦い)).
하리마 국(播磨国)으로 진군했고,
하리마의 호족들은 히데요시 군에 굴복했다.
그들 중 고데라 가문의 가신 고데라 요시타카(小寺孝高; 후에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는 히데요시에게 히메지 성(姫路城)을 양도하였고, 히데요시는 가신으로 맞이하였다. 일부 히데요시에 반기를 표한 세력은 제1차 고즈키 성 전투(上月城の戦い)에서 멸하였다.
덴쇼 7년(1579년 43세) 고즈키 성을 둘러싸고 주고쿠의 모리 가문과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비젠 국(備前国),
미마사카 국(美作国) 다이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를 복속시켜 모리 가문에 우위에 섰지만,
셋쓰 국(摂津国)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의 모반으로 인해 주고쿠 공략은 일시중단되었다.
덴쇼 8년(1580년 44세)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든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성주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를 공격하던 도중 다케나카 시게하루와 후루타 시게노리(古田重則) 등 유력 가신을 잃었지만, 2년에 걸친 포위공격에 적들은 기아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항복하였다(미키 전투(三木合戦)
같은 해
다지마 국(但馬国) 야마나 아키히로(山名堯熙)가 농성하는 아리코 산성(有子山城을) 공략, 다지마 국을 오다 가문 세력하에 둔다.
덴쇼 9년(1581년 45세)
이나바(因幡) 야마나 가문의 가신단이 야마나 도요쿠니(山名豊国)를 추방하고 모리 가문의 깃카와 쓰네이에(吉川経家)를 맞이하여 돗토리 성(鳥取城)에서 반기를 들었다. 히데요시는 돗토리 주변의 병량을 매석해 돗토리 성을 병량고에 시달리게 하여 성을 함락한다(돗토리 성 전투(鳥取城の戦い)).
그 후에도 주고쿠 지방 일대를 세력하에 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이와야 성(岩屋城)을 공략해
아와지 국(淡路国)을 세력하에 두었다.
덴쇼 10년(1582년 46세)
빗추(備中国)를 공략에 있어서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가 지키는 다카마쓰 성(高松城)을 수공으로 공략할 때, 모리 데루모토,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의 모리 가문의 대군이 맞이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편집] 혼노지의 변에서 기요스 회의
덴쇼 10년(1582년 46세) 음력 6월 2일 주군인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살해된다(혼노지의 변).
빗추 다카마쓰 성 공략 중이던 히데요시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졌는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혼노사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바깥으로 새어나갈 것을 염려해, 소식을 갖고 온 사자를 직접 베어죽이고 성 공격을 더욱 급히 하면서, 바깥에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성을 공격하는 한편으로, 모리 데루모토의 책사 안고쿠지(安國寺)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를 군막으로 불러들여, "이 성의 함락은 조석간에 있소. 허나 난 수만 명의 목숨이 모조리 어륙(魚肉)이 되는 꼴은 차마 못 보겠구려. 성주께서 스스로 할복하신다면, 내 마땅히 군사를 파하고 화친을 하겠소." 하였다.
안고쿠지는 이를 다카마쓰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에게 고했고, 무네하루는 곧 한 척의 배를 타고 나와서 강에서 할복하였다.(《간양록》) 그 직후 히데요시는 곧바로 모리 데루모토와 강화를 맺고 교토로 회군한다(주고쿠 오가에시(中国大返し)).
히데요시의 출현에 당황한 아케치 미쓰히데는 음력 6월 13일
셋쓰(攝津)의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와 전투를 벌였지만,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와 니와 나가히데, 더욱이 미쓰히데 예하의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淸秀)와 다카야마 우곤(高山右近)까지 히데요시 군에 가세하자, 미쓰히데는 패하여 토착민의 손에 살해된다(야마자키 싸움).
미쓰히데를 죽인 뒤 히데요시는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성으로 들어가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아내어, 그 머리를 갖고 산사(山寺)로 올라가 스무 하루 동안 재(齋)를 드렸다고 한다.(《간양록》)
이때 온 나라에 주군이 없어 군중들의 마음이 온통 걱정스럽고 불안했는데, 히데요시만이 태연스럽게 행동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여러 대신들이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간양록》은 증언한다. 그 후, 히데요시는 미쓰히데 잔당을 토벌해 교토를 장악했다.
음력 6월 27일,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분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기요스 성(淸洲城)에서 회의가 열린다(기요스 회의. 이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노부나가의 3남 간베 노부타카(神戶信孝,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천거했지만, 미쓰히데 토벌로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입김과 이케다 쓰네오키ㆍ니와 나가히데의 지지도 있어
히데요시가 천거한 적손 산보시(三法師,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로 결정되었다. 어린 산보시의 후견인으로서 간베 노부타카를 내세운 히데요시의 타협안에 시바타 가쓰이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노부나가의 영지는 그의 2남 노부카쓰(信雄)에게
오와리,
3남 노부타카에게
미노,
조카 노부카네(信包)가
단고,
다카야마 우곤ㆍ나카가와 기요히데는 본령 안도가 주어졌다.
니와 나가히데는
오미 시가ㆍ다카시마의 15만 석이 가증되었으며,
이케다 쓰네오키는
셋쓰의 아마가자키(尼崎)ㆍ오사카의 15만 석이 더해졌으며,
호리 히데마사(堀秀政)는 오미 사와야마(佐和山)를 받았다.
시바타 가쓰이에도 히데요시의 영지인 오미 나가하마 12만 석을 받게 된다.
히데요시 자신은 미쓰히데의 옛 영지였던
단바ㆍ
야마시로ㆍ
가와치의 28만 석이 더해졌다.
영지상으로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이었던 가쓰이에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었다.
[편집]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대립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원인은 히데요시가 야마자키에 호지 성(宝寺城)을 축성하였고, 더욱이
사적으로 오다 가문의 여러 다이묘들과 교분을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덴쇼 10년(1582년 46세) 음력 10월 가쓰이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와 3남 오다 노부타카와 함께 히데요시에 대한 탄핵장을 여러 다이묘에 뿌렸다.
이에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15일 양자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 노부나가의 4남)를 상주로 해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를 치려 위기를 빠져나갔다.
음력 12월 에치젠의 가쓰이에가 눈에 갇혀 움직이지 못한 것을 호기로 히데요시는 음력 12월 9일 이케다 쓰네오키 및 여러 다이묘를 규합하여 5만의 군을 이끌고 야마자키 호지 성을 출발해 11일 호리 히데마사의 사와야마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 시바타 가쓰토요(柴田勝豊)가 지키는 나가하마 성을 포위한다.
원래 가쓰토요는 가쓰이에와 같은 양자인 시바타 가쓰마사(柴田勝政)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조략에 응하여 항복하였다.
16일
미노로 출진해 이나바 잇테쓰(稲葉一鉄)를 항복시키고, 2남 오다 노부카쓰의 원군에 힘입어 3남 오다 노부타카의 가신 사이토 도시아키(斉藤利堯)가 지키는 가지키 성(加治木城)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하여 고립된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는 산보시를 히데요시에 넘겼고, 생모 사카 씨(坂氏)와 딸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는다.
덴쇼 11년(1583년 47세) 음력 1월 반 히데요시 파 중 한 명인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히데요시 측의
이세 미네 성(伊勢峰城)과 세키 성(関城), 이세 가메야마 성(伊勢亀山城)을 공략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음력 2월 10일 이세 북부로 군을 파견하였다.
12일 가즈마스의 거성 구와나 성(桑名城)을 공략하지만, 견고한 수비앞에 12 km 뒤로 후퇴하였다. 또, 히데요시가 조직한 별동대를 나가시마 성(長島城)과 나카이 성(中井城)에 파견했지만, 이마저도 맹열한 저항앞에 무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세 가메야마 성은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와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야마우치 가쓰토요(山内一豊)의 공세앞에 음력 3월 3일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이세 전선에서는 점차 히데요시가 우위에 서게 된다.
음력 2월 28일
호쿠리쿠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선봉으로 출진했고, 음력 3월 9일에는 시바타 가쓰이에 자신이 이끄는 3만의 대군이
오미로 출발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이세 전선은 가모 우지사토에 맡기고
오미로 돌아와 11일 시바타 군과 대치하였다.
4월 13일 히데요시에 항복한 시바타 가쓰토요의 가신 야마지 마사쿠니(山路正国)가 가쓰이에 측으로 이탈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더해 3남 오다 노부타카가 기후에서 다시 거병해
이나바 잇테쓰를 공격하는 등, 시바타 가쓰이에 측이 우위에 놓이게 된다.
20일 이른 아침, 가쓰이에의 중신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는
히데요시가
미노로 출병한 틈을 노려 오이와 산(大岩山)과 이와사키 산(岩崎山)의 성채를 공격해 함락하였다. 그 후에도 모리마사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명을 어긴채 함락한 성채에서 있었기 때문에 21일 신속히 회군한 히데요시의 반격을 받았고, 더욱이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신도 있어 시바타 가쓰이에는 대패해 군을
24일 가쓰이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선봉으로 한 히데요시 군에 기타노쇼 성이 공격당하자, 정실 오이치노 가타(お市の方)와 함께 자결하였다.
그리고,
가가(加賀国)와
에치젠은 이 전투에서 협력한 니와 나가히데에게 주었다. 음력 5월 2일(날짜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음.),
미노를 공략해 오다 노부나가의 3남 오다 노부타카를 자결로 몰았고,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반 히데요시 진영을 멸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립
덴쇼 12년(1584년 48세)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연하의 예를 하러 오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계기로 히데요시에 반발하며 대립하였다. 음력 3월 6일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히데요시와의 전쟁을 말리는 중신 아자이 나가토키(浅井長時), 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 쓰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를 모살해 사실상 히데요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때,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카쓰에 가담했으며, 이에 더해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기이(紀伊) 사카이 무리(雑賀党)도 반 히데요시를 기치로 결기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세키 모리노부(関盛信),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오다 노부카네 등 이세의 여러 장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거취가 불분명한 미노의 이케다 쓰네오키를 오와리와 미카와를 주어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음력 3월 13일 쓰네오키는 이누야마 성(犬山城)을 지키고 있던 오다 노부카쓰(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와리 국)의 가신 나카야마 가쓰타다(中山雄忠)를 공략했으며,
이세에 있어서도 미네 성을 함락하는 등, 공세를 펴갔다.
그러나, 이에야스, 노부카쓰 연합군도 곧 반격하여 하구로(羽黒)에 포진한 모리 나가요시(森長可)를 격파했다(하구로 전투(羽黒の戦い)). 그런 후, 고마키(小牧)에서 진을 펴, 히데요시와 대치했다.
히데요시는 사이카 무리에 묶겨 오사카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지만, 21일 오사카를 출발해 27일 이누야마 성에 입성했다. 히데요시 군도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양 군은 장기대치 계속하여 전선은 교착되었다. 이 때, 하시바 군 10만,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3만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앞선 전투에 패해 설욕을 다짐하는 모리 나가요시와 이케다 쓰네오키가 히데요시의 조카 미요시 히데쓰구(三好秀次; 후에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옹립해 음력 4월 6일 미카와 기습을 단행한다. 그러나, 음력 4월 9일 이를 간파한 도쿠가와 군의 역습을 받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케다 쓰네오키, 모토스케(元助) 부자와 모리 나가요시 등은 전사했다(나가쿠테 전투(長久手の戦い)).
이렇게 하여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교착되어 갔다. 이에 히데요시는 가가노이 시게모치(加賀井重望)가 지키고 있는 가가노이 성(加賀井城) 등,
오다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 측 조카 노부카네(信包)가
이가 와
이세 북부를 공략해 갔다.
음력 11월 11일 오다 노부카쓰(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와리 국)는 사실상 히데요시에 굴복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상의 없이 무단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대의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미카와로부터 철퇴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후의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전후, 히데요시는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관되었다.
사실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였으나 오다 노부카쓰의 배신으로 인하여 이에야스가 대의 명분에서 밀리면서 전쟁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덴쇼 14년(1586년 50세) 히데요시는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副田吉成)에게 시집을 가서 유부녀가 된 여동생 아사히(朝日)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이에야스에 시집 보냈으며, 더욱이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를 인질로 이에야스에게 보내 이에야스의 입경을 재촉하였다.
이에야스도 이에 승복해 상경하였고,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했다.
[편집] 도요토미 정권
덴쇼 11년(1583년 47세)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 성을 축조한다. 분고 국(豊後国) 다이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그 화려함에 놀라〈삼국무쌍의 성이다.〉라고 칭했다. 그러나 성의 일부분에 방어상 문제가 있어 히데요시 자신도 그 점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후에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가 방어가 취약한 남쪽에 사나다마루(真田丸)라고 불리는 성채를 쌓아 방어를 강화해 도쿠가와 측을 괴롭혔다.).
덴쇼 12년(1584년 48세) 조정에서 쇼군 임관을 권했지만, 이를 거부했다는 설이 있다.
덴쇼 13년(1585년 49세) 음력 3월 10일 히데요시는 정2위 내대신(内大臣)에 위계 임관되었다.
그리고, 21일
기이 공략에 나서 사이카 무리와 전투를 벌인다. 최종적으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에 명하여 사이카 무리의 수령 스즈키 시게오키(鈴木重意)를 모살하여 기슈(紀州)를 평정하였다(기슈 정벌).
또, 시코쿠(四国)의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해서는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를 총대장에 임명해 출진시겼다. 이 전투에서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의 모리 군도 가세하여 음력 7월 25일 시코쿠를 평정했다. 모토치카에게는
음력 7월 11일 예전부터 관백직을 둘러싼 내분이 다시금 불거지자, 히데요시는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조카가 되어 관백직에 올랐고, 덴쇼 14년(1586년 50세) 음력 9월 9일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음력 12월 25일 태정대신에 올라 정권을 확립했다(도요토미 정권).
이에 더해, 히데요시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양자가 되어 도요토미 막부를 열려고 했지만, 요시아키가 거절해 관백직에 올랐다는 속설이 있다. 이는 후세의 창작이다.
엣추 국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에 대해서는 음력 8월 직접 군을 이끌고 도야마로 진군했지만, 거의 전투없이 음력 8월 25일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에 항복하였다. 오다 노부카쓰의 조력도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고 엣추 국 니카와 군(新川郡)을 주었다.
이리하여 기이, 시코쿠, 엣추를 세력하에 두었다.
[편집] 규슈 평정
사이카이도(큐슈) 시마즈 요시히사
규슈(九州)에 있어서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세를 떨치고 있었고, 시마즈 가문에 압박에 오토모 소린은 히데요시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지만, 요시히사를 이를 거부하여 규슈에 군을 보낸다.
덴쇼 14년(1586년 50세)
분고 국 헤쓰기 강(戸次川; 현 오노 강(大野川))에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군감으로 해, 조소카베 모토치카, 노부치카(信親) 부자,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로 구성된 혼성군으로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이끄는 시마즈 군과 싸워보지만, 센고쿠 히데히사의 실책에 의해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전사했다.
덴쇼 15년(1587년 51세) 히데요시 스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규슈를 공략한다. 이에 시마즈 군은 압도되어 시마즈 가문은 항복했다(규슈 정벌). 이렇게 하여 서일본 전역은 히데요시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전후, 하카타(博多)에서 히데요시는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반포했지만, 사실상 기독교인은 묵인되었다. 덴쇼 16년(1588년 52세) 가타나가리를 실시했다.
[편집]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평정
덴쇼 17년(1589년 53세) 측실 요도 도노(淀殿)사이에서 쓰루마쓰(鶴松)가 태어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같은 해 고호조 가문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猪俣邦憲)가 사나다 가문의 가신 스즈키 시게노리(鈴木重則)가 지키고 있던 나구루미 성(名胡桃城)을 탈취한 일을 계기로 덴쇼 18년(1590년 54세) 히데요시는 고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간토(関東)로 군을 돌려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했다.
《태합기》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무쓰, 데와의 여러 다이묘에게 오다와라 공격에 동참할 것을 명하지만,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뒤늦게 동참한다. 히데요시는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를〈꿈틀데는 벌레〉로 평했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대기, 천위, 모든 사람에 미치지 않고 평했고, 격이 다름을 보였다. 다테 마사무네가 보기 좋게 귀향하자, 여러 무장들은 호랑이를 풀어주면 위험하다고 진언했지만, “반항하면 토벌하면 그만”이라고 말했고, 여러 무장들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오다와라 성은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함락하지 못한 견성이였지만, 계절적 이유로 철병해야하는 여타 군과 달리 히데요시 군에 의해 오다와라 성은 3개월의 농성 후, 개성하였다.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호조 우지테루(北条氏照)는 할복을 명 받았고,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는 고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되었다(오다와라 정벌).
[편집] 일본 통일
최후의 적 고호조 가문을 굴복시켜 일본을 통일했다.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국시대를 마감시겼다.
그러나, 다테 마사무네와 같이 군사력으로 제압하지 않은 다이묘가 많이 있었고, 이들 다이묘의 군사력은 온전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유력 다이묘의 처우문제가 도요토미 정권의 과제였다.
덴쇼 19년(1591년 55세) 후계자로 지명했던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조카 히데쓰구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태합(太閤)으로 불렸다. 또, 다도인 센 리큐(千利休)에 할복을 명했다. 이에 센 리큐의 제자 후루타 오리베(古田重然),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의 탄원도 있었지만, 무위에 그쳤고, 센 리큐의 목은 이치조모도리 다리(一条戻橋)에 효수되었다. 센 리큐가 할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도호쿠 지방의 난부(南部) 가문
이 해, 도호쿠 지방의 난부(南部) 가문 일족, 구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가 후계 다툼을 계기로 난을 일으킨다. 히데요시는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가모 우지사토,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로 구성된 군을 도호쿠에 파견하였다.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도 이에 동참하여 군은 6만으로 늘어났다. 구노헤 마사자네, 사네치카(実親) 형제는 항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항복하였다. 그 후, 구노헤 가문은 모두 참수되었고, 멸문되어 난은 종결되었다.
[편집] 임진·정유왜란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라고도 하는 임진·정유왜란은 분로쿠 원년(1592년 56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하에 일본이 명의 정복과 조선의 복속을 목표로 16만의 군으로 한반도 남부에 침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한성,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의 원군, 그리고 이순신 의 조선수군으로 인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분로쿠 2년(1593년 57세)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된다.
[편집] 임진왜란의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8][9]
- 유력 다이묘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공명심과 영웅 심리에서 기인했다는 설.
- 뒤늦게 얻은 아들 쓰루마쓰가 죽은 비통함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 해외무역 장악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 계획에 영향을 받아, 통일 이후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야욕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는 설. 그래서 강화조건에 명나라 후비를 일본에 바치라는 것과 조선 8도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1, 4, 5의 이유가 혼합되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편집] 임진왜란에 반대한 다이묘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조선으로 군사를 내는 것에 반대 하였으나,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진을 강행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풍토병과 황무지 개간 및 지배 지역의 치안 문제 등, 갖은 변명을 둘러대며 기어이 불참하였고, 자신의 군대를 온전히 보존시켰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만은 임진왜란의 출전을 강요할 수 없었던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과 맞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편집]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의 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찌기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종교간의 문제(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리스도교,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성격적 문제(고니시 유키나가는 온건파, 가토 기요마사는 급진파)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앙숙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둘을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 이유인 즉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게 하여 최대한 빨리 조선을 점령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조선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들은 장기전에 돌입해야했다. 이순신은 남해의 재해권을 확보하면서 일본에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에 군수물자 공급을 차단시켰고, 이것은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 와 평양성에 주둔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쪽으로 서둘러 후퇴하는 큰 이유였다.
[편집]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한편, 분로쿠 2년(1593년 57세) 측실 요도 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자, 히데쓰구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심각한 상황에 빠진다. 2년 후인 분로쿠 4년(1595년 59세) 관백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악정과 난행을 이유로 폐적시키고, 고야 산으로 추방했다. 후에 모반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할복시킨다.
이 사건으로 인해 히데쓰구의 보좌역인 마에노 나가야스 등 유력 가신이 연좌되어 죽거나 유배되었다. 또, 히데쓰구 일가도 처형되었다. 히데쓰구의 난행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아들 히데요리의 방해꾼이 될 가능이 있는 히데쓰구를 처분했다는 견해와 이 일로 인해 도요토미 다이묘의 결속이 저해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편집] 정유재란
- 이 부분의 본문은 정유재란입니다.
분로쿠 5년(1596년 60세) 계속되어 왔던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어, 게이초 2년(1597년 61세) 14만의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칠천량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 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점령을 꾀한다. 이 후,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8도 중에 남부의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과 혼례시킬 것 등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강화가 결렬되었다. 문제는 중간에서 외교를 담당하던 심유경(沈惟敬)이 명나라에 거짓으로 보고를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분노가 극대화되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편집] 죽음
게이초 3년(1598년 62세)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사인은 위암,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2세였다. 그날 안으로 히데요시는 아미다 산에 매장되었다.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병력의 사기 문제 때문에 조선에 출병되어 있는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였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고 만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 장본인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서 조선에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였음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1615년 도쿠가와의 공격을 받아 어머니 요도도노와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편집] 임진왜란의 종료와 그 결과
이 후, 조선의 일본군은 철군하였고,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을 통해 도공을 납치 및 활자를 포함 많은 문화재의 약탈로 도자 문화나 인쇄기술의 발전을 꾀한 반면, 전쟁기간 동안에 일어난 문치파와 무단파간의 갈등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로 도요토미 정권은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정권의 에도 시대가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에도시대가 도래한 것과 병자호란이 겹쳐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급격하게 호전되기도 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황폐화 되어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했고 이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 광해군 집권기에는 명과 후금 중에 조선에 유리한 외교정책을 펴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조율했으나, 명의 은혜를 저버리면 안된다는 명분하에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인조반정 때문에 외교를 조율할 광해군이 없어진 조선은 후금과의 갈등이 극대화되었고, 때마침 명나라마저 멸망하여 곧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명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후금이 대두되어 왕조가 교체되었다. 한편 일본에 에도시대가 도래한 것과 이로 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적극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편집] 인물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정보다는 전쟁에 어울리는 리더라는 견해가 있다.[10]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장기적으로 부하들을 응집시키는 데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그 특유의 전투 지휘관 기질을 발휘하는 쪽으로 정치노선을 변경했고, 이를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11]
하지만 내정과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타나가리나 태합검지를 통해 병농분리와 노동력의 생산력 향상에 힘썼으며, 이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의 정책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일본을 찾아온 조선의 사신에게 회답 서신을 만들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을 분명히 적게 했다고 한다. 휘하 가신들이 "일단 좋은 말로 회답 서신을 만들어 보내고 나서 갑자기 쳐들어가야 합니다."라고 간하자 히데요시는 "그러면 자고 있는 사람의 목을 치는 것과 뭐가 달라? 지금 솔직하게 써서 보내고, 그래서 상대방이 미리 준비하게 해준 다음에 승부를 내야지."라고 대답하며 듣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사람으로 사쓰마를 오가면서 약 장사를 하던 허의후(許宜後)가 일본의 사정을 상세하게 적어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려다, 이웃에 사는 명나라 사람에게 고발당했다. 잡아들인 허의후를 좌우에서 모두 삶아 죽이자고 했지만, 히데요시는 "저 놈은 명나라 사람이야. 제 조국인 명나라를 위해 적국인 우리의 일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나는 남이 생각지도 않는 틈을 노리는 건 싫어. 명나라가 미리 준비하게 하면 좀 어떤가? 그리고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다 초야(草野)에서 일어났어. 명나라에, 난 원래는 천한 사람이었소 하고 알리는 것도 해로운 일은 아니야." 하고서, 거꾸로 허의후를 밀고한 사람에게 "네놈도 명나라 사람이면서 같은 명나라 사람을 밀고하다니, 너야말로 추악한 놈이야!"라 욕했다. 그리고 허의후는 끝내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편집] 로마 가톨릭 교회 전래
도요토미 시대는 일본 로마 가톨릭 교회를 묵인한 시대이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로마 가톨릭 교회 선교사들은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중남미와 아시아에서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였다. 예수회 설립자중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일본은 선교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다이묘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이를 묵인[12]했고, 도요토미도 서양의 문물 전래 통로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을 묵인했다. 하지만 그의 묵인 정책은 서구 열강을 견제하기 위한 강경 정책으로 바뀌어 26명의 순교자들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이유는 종교를 앞세운 서양의 식민정책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였다.[13] 기리시탄에 대한 도요토미의 박해정책은 도쿠가와 정권, 즉 에도 막부 시대에도 이어진다.
[편집] 신체적 특징
그는 체격이 왜소하며 추남인 데다가 손가락이 6개인 다지증이였다고 한다.[14] 다지증에 관련된 유일한 기록은 선교사 프로이스의 '일본사'뿐이다.
[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기한 배우들
- 정진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MBC 드라마
- 다케나카 나오토 - 《히데요시》NHK 대하드라마
- 이효정 - 2005년 (불멸의 이순신) KBS 드라마
- 오쿠다 에이지 - 2009년 (폭렬닌자 고에몬) 영화
- 사사노 타가시 - 2010년 《천지인》NHK 대하드라마
[편집] 함께 읽기
[편집] 바깥 링크
[숨기기] 도요토미 정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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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쓰구 · 도요토미 히데요리 | ||
도요토미 가문 | ||
다이묘 | ||
정책 | ||
전쟁 | ||
직할령 |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무가 정권 · 도요토미 씨(하시바 씨 · 기노시타 씨) |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 74세 사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 |
본명 | 마쓰다이라 다케치요(초기) 마쓰다이라 모토노부(1556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1557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15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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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 1603년 2월 12일 ~ 1605년 4월 16일 (1616년까지 오고쇼로서 정치에 참여) |
별명 | 너구리 영감[1] |
출생일 | 1543년 1월 31일 |
출생지 | 일본 미카와 국 오카자키 |
사망일 | 1616년 6월 1일 |
사망지 | 일본 스루가 국 슨푸(시즈오카 시) |
매장지 | 스루가 국 구능산 동조궁 →시모쓰케 국 닛코 동조궁 |
배우자 | 쓰키야마도노 아사히히메[2] 이하 18명의 측실 |
자녀 | 11남 5녀 |
부친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모친 | 오다이노 가타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
이전 쇼군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다음 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
가문 | 도쿠가와 씨 |
막부 | 에도 막부 |
시호 | 도쇼다이곤겐 |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
62세에 1605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오고쇼의 직위로서 슨푸에 머무르며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묻혔으며, 도쇼다이곤겐(일본어: 東照大権現)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편집] 생애
[편집] 어린 시절
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와레키(和暦) 덴분 11년 12월 26일)
미카와 국 오카자키 성에서 태어났다.[3][4][5] 아명은 마쓰다이라 다케치요(松平竹千代)로, 아버지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이며 어머니는 가리야 성의 성주인 미즈노 다다마사(水野忠政)의 딸 오다이노 가타(於大の方)이다.[4][5]
이에야스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살 차이였고, 이에야스가 태어났을 때에는 각각 열일곱 살과 열다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6]
당시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는 히로타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清康)가 살해당한 모리야마의 변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4][6]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씨가 지배하던 미카와 국 동부는 이마가와 씨가 지배하고 있었고[6],
서부는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히데(=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가 계속 노리던 상황이었다.[4][6]
이에야스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오다이와 생이별을 한다. 1544년 오다이의 아버지 미즈노 다다마사가 사망한 후 뒤를 이은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오다 씨와 친밀 정책을 유지하면서[5][7] 가신의 탄핵으로 아버지 히로타다가 오다이를 친정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5] [7]
1548년(5살)에는 히로타다의 숙부인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던 사카이 다다히사 등 중신들과 손잡고 히로타다를 오카자키 성에서 몰아내려는 모반을 일으켰고[5][8] 오다 씨가 미카와 국을 더욱 빈번하게 침략하기 시작하였다.[9]
히로타다는 내우외환을 진압하기 위해 이마가와 씨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고[8][9],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당시 여섯 살의 이에야스를 슨푸(駿府)에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였다.[8][9]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오다 노부히데는 아쓰미 반도에 위치한 다하라 성주이자 이에야스의 의붓 외할아버지[주 1]인 도다 야스미쓰(戸田康光)를 이용하여 오와리 국 아쓰타(熱田)로 납치하였으며[4], 그 대가로 1,000간몬[주 2]을 주었다.[8][10][11]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아 히로타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강경한 태도로 이를 거절하였다.
강경한 태도를 들은 이마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씨에 지원을 약속하였고[10], 노부히데도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고 아쓰타 신궁에 있던 이에야스를 나고야(名古屋) 반쇼지(万松寺)에 가두었다.[10][11]
이후 이에야스는
오와리 국 나고야에서 2년 동안 인질 생활을 했는데, 오다 씨의 대접은 의외로 관대했다고 한다.[12]
한편 미카와 국에서는 아버지 히로타다가 1549 (6살때)년 가신에 의해 살해당하고[4][12][13], 마쓰다이라 씨가 오다 씨와 손잡을 것을 우려한 이마가와 씨가 대관을 보내 마쓰다이라 씨와 그 가신들의 영지를 전부 몰수하고, 가신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 스루가로 보내는 일이 발생하였다.[12][13]
또한 이마가와 씨는 같은 해 참모인 다이겐 셋사이의 헌책에 따라 안쇼 성을 공략하여 성주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주 3]와 이에야스를 교환하였지만, 이에야스를 오카자키가 아닌
스루가 국(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슨푸로 호송하였다.[12][13][14]
이에야스는 슨푸의 다카쇼(鷹匠) 부근에서 8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서 생활하였다.[13] 그 동안 그는 오다이의 어머니로 비구니가 된 겐오니(源応尼)에게 양육되었으며[13], 셋사이를 스승으로 섬기며 6년 간 학문과 병법을 배웠다. [15]
[편집] 센고쿠 시대
1556년, 15세가 된 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림과 동시에 관례의 후견인이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은 마쓰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松平次郎三郎元信)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16][17] 이를 계기로 이에야스는 법요식(法要式)의 명분으로
미카와 국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미카와 국은 이마가와 씨가 보낸 성주 대리와 장병들에 의해 가혹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다.[17][18]
또한 이에야스의 가신과 장병들은 이마가와 씨의 전투에서 최전방에 강제로 나섬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등 홀대를 받고 있었다.[18]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의 감시 하에 오카자키 성에서 미카와 무사들과의 대면을 가졌고[16][17], 이를 계기로 히로타다의 옛 부하였던 도리이 다다요시는 유사 시에 사용하라며 자택에 숨겨둔 쌀과 엽전 다발을 이에야스에게 주었다.[16]
16세가 된 이에야스의 결혼 상대는 이마가와 씨의 가신 중 한 명인 세키구치 지카나가의 딸로, 요시모토의 조카이기도 했던 쓰루히메(후의 쓰키야마도노)였다. [19][20] 이 결혼은 혼인 관계를 통해 이에야스가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기 위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계획이었다.[19]
이에야스의 생애 첫 출전은 결혼한 이듬해였던 1558년 2월 5일에 있었다.[19] 그의 임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측으로 넘어간 스즈키 시게타쓰(鈴木重辰)가 다스리고 있던 미카와 국 서부의 데라베 성을 공략하는 것이었다.[19]
이에야스는 방화 작전으로 데라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20][21], 히로세 성·고로모 성·이호 성에서도 같은 방화 전법으로 오다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21], 오다카 전투에서는 밤을 틈타 군량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22]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칼을 내리고, 야마나카의 땅을 봉토로 주었다. 또한 승전의 공으로서 이에야스는 개명을 요청하여, 자신의 할아버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 모토야스로 이름을 바꾸었다.[19][23]
1560년 17세, 이에야스의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도취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5,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씨의 본거지인 기요스 성을 포위하였으나, 곧 오케하자마 산으로 옮기는 빈틈을 보였고, 결국 기습을 당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투 중 모리 요시카쓰에게 죽음을 당했다.[4][22][24]
한편 이마가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군 중 가장 뒤늦게 적지를 탈출했지만, 노부나가의 추격을 받지는 않았다.[25] 그리고 오카자키에 들어온 후에도 성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다이주 사(大樹寺)에 머물러있다가[25], 5월 23일 오카자키 성의 조다이였던 미우라 고즈케노스케가 슨푸로 돌아간 후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함으로서 인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25]
그 후 몇년 간 이에야스는 독립을 선언하지 않으면서 신중을 기하며, 이마가와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와리 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다 씨의 관심이 소홀했던 미카와 국 서부의 오다 씨 성채들을 자주 공격하였다.[26]
이처럼 이에야스는 혼다 다다카쓰, 이사카와 가즈마사, 고리키 기요나가,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앞세워 마쓰다이라 씨의 확장에 몰두하다가, 1561년(18세)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였다.[27]
한편 노부나가는
미노 국의 사이토 요시다쓰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즈노 노부모토에게 이에야스 측과의 교섭을 의뢰했고[26], 미즈노의 중재 하에 이에야스(19세)는 1562년 기요스 성에서 비밀리에 오다 노부나가와(28세) 기요스 동맹을 결성하였다.[28]
기요스 동맹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27]
이에야스가 오다 씨와 비밀 동맹을 결성한 것을 알아챈 이미가와 씨의 계승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에야스를 소환하려 했으나, 이에야스가 병을 핑계로 오려 하지 않자 분노하여 미카와 중신들의 처자를 기둥에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이라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는 이마가와 씨의 중요한 일족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자식들은 죽이지 못했다.[28]
그러자 이에야스는 마쓰이 다다쓰구 등에게 명해 니시고리 성을 공격해 이마가와의 측근으로 요시모토의 처남이었던 우도노 나가테루의 두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 우도노를 슨푸에 잡혀 있는 이에야스의 가족과 교환하였다.[28][29]
그리고 이듬해 이에야스는 장남의 이름을 노부나가의 이름에서 딴 노부야스라 칭하고,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정략 약혼을 했으며[29], 7월에는 모토야스라는 이름을 이에야스(家康)로 바꾸어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였다.[29][30]
한편 조구 사, 쇼만 사, 혼쇼 사 등 3대 사찰을 중심으로 미카와의 일향종이 벼의 징수 문제로 잇키를 일으켰다.[31] 이에야스는 사사키(佐崎)에 있는 조구 사에서 사사키 성주 스가누마 사다아키에게 비축을 위한 군량미를 징수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스가누마는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수확이 이루어지던 조구 사에서 억지로 벼를 징수해 갔고, 이에 조구 사에서는 혼쇼 사와 쇼만 사에 격문을 보내 반란을 일으켰다.[31]
이에야스는 일향종의 잇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 때문에 이에야스의 가신 중 사카이 다다나오, 기라 요시아키, 아라카와 요시히로, 하치야 한노조 등, 일향종을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 적으로 돌아서 잇키에 가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31][32]
이 때 이에야스는 조총탄을 두 발이나 맞았으나 갑옷 덕분에 가까쓰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33][34] 잇키는 1563년 2월 이에야스(20세)가 주동자 시쓰다 사쿠주로를 죽이고, 주동자를 추방한 다음 가담한 가신들을 용서함으로서 끝났는데, 이후 이에야스는 미카와 국 내의 일향종 사원을 전부 부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33][34]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후 마침내 이마가와 씨의 본거지를 치기로 했다.
이에야스는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명하여, 미카와 국 동부에 있는 이마가와 씨의 최대 거점인 요시다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도록 했다.[36] 그 직후에는 혼다 히로타카가 다하라 성을 점령하며 미카와 국 동부에서 이마가와 씨를 완전히 몰아내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36] 이와 동시에 이에야스는 이시다 이에나리와 사카이 다다쓰구를 가로(家老)로 임명함과 동시에 각각 미카와 국의 서부와 동부의 지배를 맡겼다.[36]
또한 혼다 시게쓰구, 고리키 기요나가, 아마노 야스카게를 부교(奉行)로 임명하였다.[36] 통치 체제를 정비한 후 이에야스는 다시 이마가와 씨의 영지인
도토미 국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토미 공략은
스루가 국- 이마가와 우지자네 간의 복잡한 동맹 관계로 인하여 주춤하였다.[37]
그 동안 이에야스는 1566년 칙허에 따라 성씨를 세이와 겐지 계통의 도쿠가와로 바꾸었다.[37][38] 이듬해 정월에는 종5품 미카와노카미 관직을 받았다.[37] 또한 다케다 신겐의 동맹 파기를 이용해, 이에야스는 신겐과 이마가와 씨의 영지를 두고 오이 강을 경계로 분할한다는 이른바 가와기리의 약정을 맺어 동맹을 결성하였다.[35][37]
다케다 신겐은 협정에 따라 1568년 12월 슨푸 성을 점령하고, 엔슈(遠州)를 공격하고 이에야스는 이듬해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신겐의 배신에 따라 본성을 오카자키에서 히쿠마로 옮겨, 하마마쓰 성이라 명명하였다.[4][39][40]
또한 가케가와 성까지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추적하여 그를 처가가 있는
이즈 국으로 낙향시켜 사실상 이마가와 씨를 멸망시키며 도토미와 미카와의 전역을 확보한다.[41]
한편 1568년 이에야스(25세)의 동맹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 국에서 가장 인접한
야마토 국을 획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입성해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40][42]
1570년(27세) 노부나가가
오미 국을 공격할 때 이에야스도 참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43]
노부나가는 같은 해 6월에 다시 오미와 에치젠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를 틈탄 다케다 신겐의 교토 침공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다시 진군, 아자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와의 아네가와 전투,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와 나가시노 전투를 거치며 입지를 크게 넓혀갔다.[44][45][46]
비록 이 과정에서 쓰키야마도노와 아들 노부야스를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47][48]
이에야스는 1580년(37세)
다케다 씨 간의 동맹 관계 파기를 이용하여
1582년(39세),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할복하는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면서[50][51] 같이 초청받았던 이에야스가 서둘러 미카와 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51][52]
이가 국 닌자 출신인 핫토리 한조와 교토의 대상인인 자야 시로지로의 도움을 받았다.[51][52]
자야 시로지로는 이에야스에게 혼노지의 변을 처음으로 알렸고, 핫토리는 고카(甲賀)의 다라오 등 다른 닌자들과 힘을 합쳐 이에야스를
오다 사후 이에야스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5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수를 쳐 오사카 부근의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를 죽이자 단념하고 철수하였다.[53]
대신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국 일대를 점령하자,
1582년(39세)
오다, 도쿠가와, 호조가 동시에
가이 국을 공격하여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54]
그리고 같은 해 이에야스는
미카와 등 세 개의 구니를 장악했다.[4][53][54][55]
한편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죽인 후 기요스에서 오다 가문의 적손인 산포시(三法師)를 앞세우며 사실상 오다의 세력을 계승하였다.[56]
산포시의 계승에 불만을 품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히데요시가 오다 씨의 계승 경쟁자였던 오다 노부타카를 몰아내자 이에 반기를 들어 히데요시와 시즈가타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57] 시바타가 시즈가타케에서 전사하자,
이에야스는 반 히데요시 세력을 형성하며 히데요시에 불만이 많았던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손잡았다.[53][57]
[편집] 히데요시와의 대립
시즈가타케 전투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을 통해 그에게 정4품 하계 좌근위권중장(左近衛權中將) 벼슬을 제수했는데, 이는 종5품 하계였던 히데요시보다 더 높은 직위였고, 노부카쓰와는 같은 직위였다.[57]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했고, 히데요시가 종3품인 참의(參議)로 이에야스를 천거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57]
그러자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유능한 세 중신에 대한 모략을 퍼뜨려, 노부카쓰가 중신들을 죽이게 하였으며, 이어서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노부카쓰 진영을 동요하게 하였다.[57]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1584년 3월(41세)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스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57][58]
이에야스는 출전에 앞서
도사 국(시코쿠
의 조소카베 모토치카),
엣추 국의 삿사 나리마사 (佐々成政) 등과 동맹을 맺어
히데요시의 배후를 교란하게 하도록 미리 약속을 해두었고,
히데요시도 이에 맞서
시코쿠의 센고쿠 히데히사,
모리, 조소카베, 삿사와 맞서게 하는 등 철저하게 대비하였다.[59]
이에야스는 같은 시기
미노 국 오가키(大垣)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사위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와 더불어 이누야마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58][59] 고마키 산에 진을 친 후 하구로에서 모리 나가요시 군대를 격파하였다.[58][59]
그러자 히데요시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마키 산 북쪽의 가쿠덴(楽田)에 진을 치고,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쓰의 연합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하였다.[58][59][60]
같은 해 4월 9일 이에야스의 선제 기습으로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의 선봉대가 궤멸당하자[58] 다시 전투는 장기 지구전으로 바뀌었고, 11월에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쓰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가 계속 싸울 명분이 사라지자[60][61] 차남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강화를 맺었다.[61]
그리고 강화 이후의 냉전 과정에서 전부터 히데요시와의 우호 관계를 건의해 오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설득을 받아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하면서[62]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63]와의 정략 결혼을 거쳐 1586년 히데요시에게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하였다.[60][64]
신종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시코쿠와 규슈를 정벌하는 동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를 하마마쓰에서
슨푸로 옮겼다.[65]
이에 앞서 1585년 42세 이에야스는 슨푸에 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었다.[65] 1590년, 시코쿠와 규슈를 완전히 평정한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의 야망을 완수하기 위해, 간핫슈(関八州)[주 4]·오우(奥羽)[주 5]를 공격하기에 앞서 이에야스와 함께
간토지방 고호조 가문 오다와라(小田原)의 고호조(後北條)에게 신종을 요구하였다.[66]
그러나 호조는 히데요시에게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고 군비를 증강하며, 히데요시의 가신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점령하는 등 계속 히데요시를 자극하였다.[67] 그러자 히데요시는 2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다와라로 출격하였으며, 이에야스는 2만 8,0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며 가장 먼저 오다와라로 진격하였다.[66][67] 호조는 오다와라 성 안에서 계속 농성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주변의 보급로와 연락망을 봉쇄하는 고사작전을 통해 호조를 압박하였다[68]
또 호조가 히데요시의 군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던 중에 "아무리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을 일컫는 오다와라 평정(일본어: 小田原評定 오다와라효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66][69]
마침내 7월 5일,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켜 간토를 손에 넣고, 오우의 아이즈(会津)까지 점령해 오우 지역의 다이묘를 복종시켜, 100여년의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였다.[60][70]
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오다와라 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선약했던 대로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伊豆)를 내렸다.[68][71]
그리하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의 결과를 받아들인 이에야스는, 오다와라나 가마쿠라가 아닌, 간토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던 호조의 일개 출장소 에도(江戸)로 명절인 핫사쿠(八朔)였던 1590년 8월 1일 입성하였다.[60][68][71][72] 에도로 입성하면서 이에야스는 불안감을 느끼던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겠다며 에도 성에 입성할 때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히토에(単衣)를 입게 하였다.[72] 또한 입성 닷새 후 주민 모두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하였다.[72]
입성 이후, 이에야스는 녹봉 배치를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 우선 아직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최측근인 도쿠가와 사천왕에게 외곽 지역의 10만여석[주 6] 이상의 땅을 주었고, 그 내부에도 미카와 시절부터 가신으로 일해 온 후다이 다이묘를 배치하여 이중 방어선을 구축하였다.[72][73] 또한 호조와 다케다의 유신(遺臣), 지역 토호들에게는 무리한 압력을 피하고 일정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주었다.[74]
또한 자신의 직할지 1백여만석에는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의 유신들에게 다이칸(代官)이란 지방관직을 주어 행정을 관리하도록 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74] 그리고 이 다이칸들을 지휘하는 다이칸카시라(代官頭)에는 이나 다다쓰구, 오쿠보 나가야스 등의 기술·행정 전문가들이 등용되었다.[74]
이러한 효율적 제도와 다른 지역과 산으로 격리된 간토의 지리적 특성이 맞물려 간토를 지배하던 이에야스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나중에 "이에야스는 후퇴하여 제국을 건설했다"는 속담이나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60][73][75]
에도 건설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다른 지방의 다이묘들 중간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76]
1590년 47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오슈(무쓰)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간의 화해를 주선하여 성공시켰고, 다테와 충돌하던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가 다테가 오슈 각지의 토호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이에야스는 다테에게 서신을 보내 토호들을 진압하도록 하기도 하였다.[76]
그 밖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징계에서도 그들을 변호하여 신망을 얻었다.[76]
[편집] 임진왜란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 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완수하기 앞서[77][78],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며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히젠 국에 새로 축조해 놓은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할 것을 명령하고 나고야 성을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에야스(49세)도 동원령을 받아 1592년 병력을 이끌고 나고야 성으로 출진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출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78][79]
이에야스가 일본에 계속 머무르는 동안 두 차례 출병했던 일본군은 후반으로 갈 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섰던 다이묘들은 엄청난 비용과 군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79]
이 와중에 이에야스는 일본 내부의 세력 판도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장선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무장 다이묘 출신의 무공파와 일본군의 점령지에서 행정사무를 맡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행정관 출신의 문관파로 나뉘자, 무공파의 편을 들며 인망을 모으고 있었다.[79]
1598년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할 다섯 다이로와 다섯 부교를 뽑아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였는데,
이에야스(55세)는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와 더불어 다섯 다이로로 뽑혔고,
집행 기관인 다섯 부교에는 문관파인 이시다 미쓰나리, 아사노 나가마사, 마에다 겐이, 나쓰카 마사이에, 마시타 나가모리가 뽑혔다.[79]
또한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는 각각 후시미에서의 정사 담당과 오사카에서의 히데요리 보좌라는 중대한 임무가 더 맡겨졌다.[78]
[편집] 권력 쟁탈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 | 이슬처럼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질 나의 육신이여, 나니와(難波)는 꿈이었던가. | ” |
— 도요토미 히데요시[80] |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다섯 다이로들에게 늦게 얻은 유일한 혈육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80]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다이묘들 간의 혼인 관계 맺기를 금지했던 것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입지를 넓혀갔다.[80]
그러자 같은 다이로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를 비롯한 나머지 다이로들과 부교들이 이에야스를 비난하면서 도요토미 가의 가신들은 이에야스를 따르는 무리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게 되었지만[80] 도시이에가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와 화해함으로써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80]
그러나 1599년(56세) 문광파 이시다 미쓰나리(石田光成)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오던 도시이에가 세상을 떠나자, 이시다 미츠나리는 호소카와 다다오키에 집에 침입하여 호소가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를 죽게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한 무공파가 미쓰나리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으로 도망쳐 온 미쓰나리를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81]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 성에 도착하는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직을 일시적으로 파직시켰다.
한편,
아이즈(후쿠시마 현)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카쓰가 새로운 성을 쌓고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82] 이듬해인 1600년 57세 이에야스는 가케카쓰에게 진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가케카쓰의 가로인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에 대해 "각 구니의 풍습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박하였고[82] 이에야스는 즉각 각 다이묘들에게 아이즈 정벌을 명했다.[82]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들을 이끌고
긴키를 출발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이시다 미쓰나리는 반 도쿠가와 파를 결집시키기 위해 사이고쿠(九州지방) 다이묘들에게 격문을 돌려 거병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 대장으로 하여 우키타 히데이에,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오타니 요시쓰구 등 8만 4천여명의 병력이 결집하였다.[83]
이렇게 결성된 서군(西軍)은 곧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후시미 성을 함락시키고 미노 국으로 진출하여, 8월 11일 오가키 성을 점령하였다.[83]
한편 서군이 오가키를 점령하기 전인 7월 24일
시모쓰케 국 오야마(小山)에서 이미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병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동군(東君)을 결성하고, 9월 14일에 오가키 성 북쪽의 가쓰야마에 본진을 구축하였다.[83]
또한 동군의 본대가 도카이도(東海道)를 거치는 동안 이에야스는 자신의 3남인 히데타다에게 3만 8천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카센도를 거쳐 오도록 하였으나 히데타다의 군대는 중간에
시나노 국 우에다(上田)의 사나다 마사유키와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여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84]
한편 동군이 9월 14일에 진을 구축하자, 서군은 오가키 성을 빠져나와 서쪽의 세키가 하라로 이동하였다. 이는 동군을 세키가하라의 비좁은 분지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85]
서군은 세키가하라에서 반월 형태의 진을 치고 동쪽에서 일렬종대로 진격해오는 동군을 일방적으로 포위해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에야스는 서군쪽의 지휘체계가 이에야스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동군과는 달리 통합되지 못하고 서군쪽 지휘관들이 모두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러한 다이묘들 중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깃카와 히로이에 등 서군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배반 또는 내통을 약속받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에야스에게 적극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군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85]
다음 날인 9월 15일 동군은 배신을 약속한 서군 다이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서군을 궤멸시켰으며,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부키야마로 도주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시마즈 군은 동군의 중앙을 정면 돌파해
이렇게 하여 일본 열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툰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동군이 압승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서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이에야스에게 저항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등은 모두 체포되어 10월 1일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참수되었다.[87] 이외 서군에 가담했던 모든 다이묘들은 가차없이 가이에키(改易)[주 7] 또는 감봉(減封)을 당하였다.
하지만 예외로 시마즈 씨는 이에야스에게 동군을 정면 돌파해 퇴각한 것이 눈에 띄어,
또한 사타케 씨 등 형세를 관망하던 이들도 덴포를 당하였으며,
히데요리도
이즈미 국 등 세 개 구니 65만석으로 감봉되어 일개 다이묘로 강등되었다.[87]
대신 이에야스는 이들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동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거나 동군에 협조한 서군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들을 도자마 다이묘로 임명하고 1만석 이하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하타모토들도 다이묘 대열에 합류시켰다. 또한 같은 도쿠가와·마쓰다이라 씨의 일족으로 다이묘가 된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와 사후 처리를 통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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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센고쿠 시대의 일부) | |||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도 (에도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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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동군(東軍) | 서군(西軍) | ||
지휘관 |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
모리 데루모토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 ||
병력 | |||
88,888(여러설이 있음)[1] | 81,890(여러설이 있음)[1] | ||
피해 규모 | |||
정확히 알 수 없음 | 정확히 알 수 없음 |
세키가하라 전투(일본어: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노 다타카이[*])는 1600년 음력 9월 15일(10월 21일)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일어난 유명한 전투이다.
전투의 본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파의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단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되어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과 연관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사실상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의 센고쿠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측을 동군, 이시다 측을 서군이라, 일반적으로 부르는데 이 명칭은 후세에 붙여졌다. 정작 폭풍의 핵심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은 이 전투를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고, 도요토미의 신하였던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파벌과의 전투 양상을 보였다. 여기서 서군의 총대장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아니라 사실은 모리 데루모토였음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렇다 해도 서군에서 모리 데루모토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사실상 서군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집결된 파벌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편집] 배경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는 정권 성립에 군사적으로 기여하며 임진왜란에도 참여한 무장 세력인 ‘무단파’(武斷派)와 행정·경제·병참·군사·종교 등 전투 외적인 분야에서 활약했던 ‘이료파’(吏僚派)[2] 사이의 대립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형제 때문에 표면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1591년에 히데나가가 죽고, 임진왜란의 출병과 퇴각으로 말미암아 양쪽 파벌의 대립이 더 깊어졌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고다이로(五大老) 및 5부교(五奉行) 제도를 만들어 여러 다이묘에게 친자식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키고 1598년 8월에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이때부터 양쪽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즉, 다섯 다이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금지된 다이묘 간의 결혼과 영토 분배를 통해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이것을 또 다른 다이묘인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가 엄중하게 경고했다.
한때 후시미(도쿠가와 측)와 오사카(마에다 측) 사이에서 이 갈등은 일촉즉발의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다행히 마지막에 서로 서약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충돌은 피했지만, 이때부터 무단파 다이묘나 인척인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빠른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든 주요 다이묘
-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와 나가마사(長政) 부자
-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와 다다오키(忠興) 부자
-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와 요시나가(幸長) 부자
-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一豊)
- 아리마 노리요리(有馬則頼)와 도요우지(豊氏) 부자
- 쿄고쿠 다카츠구(京極高次)와 다카토모(高知) 형제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 신조 나오요리(新庄直頼)
-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 등.
- 마에다 관저에 모여든 주요 다이묘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 마시다 나가모리(増田長盛)
- 나쓰카 마사이에(長束正家)
-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등.
다음해 윤달 3월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무단파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가토 요시아키라, 아사노 요시나가 등 7명[3]이 관료파의 우두머리격인 오봉행의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였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중개로 사건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봉행직을 해임당하고 근거지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했다[4]. 미쓰나리의 실각과 다른 오대로들이 자신의 영지로 귀환함에 따라 이에야스의 대항 세력은 사라졌고,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에서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정무(政務)를 맡아 지휘했다.
[편집] 전투 이전 주요 다이묘들의 고쿠다카
(○는 전투에 참가한 자, ●는 전투중 배신한 자의 표시이다.)
동군 | 다이묘 | 고쿠다카 (단위: 만 석) |
서군 | 다이묘 | 고쿠다카 (단위: 만 석) | |
---|---|---|---|---|---|---|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255 | ○ | 이시다 미츠나리 | 19.4 | |
마에다 도시나가 | 83 | 우에스기 가게카쓰 | 120 | |||
다테 마사무네 | 58 | ○ | 우키타 히데이에 | 57 | ||
가토 기요마사 | 24.5 | ○ | 시마즈 요시히로 | 56 | ||
○ | 후쿠시마 마사노리 | 20 | ●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35.7 | |
○ | 호소카와 다다오키 | 18 | 모리 데루모토 | 120.5 | ||
○ | 아사노 요시나가 | 16 | ○ | 고니시 유키나가 | 20 | |
○ | 이케다 데루마사 | 15.2 | 마시다 나가모리 | 20 | ||
○ | 구로다 나가마사 | 18 | ● | 오가와 스게타다 | 7 | |
○ | 가토 요시아키라 | 10 | ○ | 오타니 요시쓰구 | 5 | |
○ | 다나카 요시마사 | 10 | ● | 와키자카 야스하루 | 3.3 | |
○ | 도도 다카토라 | 8 | ○ | 안코쿠지 에케이 | 6 | |
모가미 요시아키 | 24 | 사타케 요시노부 | 54.4 | |||
○ | 야마우치 가쓰토요 | 6.9 | 오다 히데노부 | 13.5 | ||
하치스카 요시시게 | 17.7 | ○ | 조소카베 모리치카 | 22 | ||
○ | 혼다 타다카츠 | 10 | ● | 구즈키 모토쓰나 | 1 | |
○ | 데라자와 히로타카 | 8 | ● | 아카자 나오야스 | 2 | |
○ | 이고마 가쓰마사 | 15 | ● | 깃카와 히로이에 | 14.2 | |
○ | 이이 나오마사 | 12 | 나츠카 마사이에 | 5 | ||
○ | 마츠다이라 다다요시 | 10 | ○ | 모리 히데모토 | 20 | |
○ | 츠츠이 사다츠구 | 20 | ○ | 도다 가츠시게 | 1 |
[편집] 발단
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가(前田利長)가 주모자로 지목된 이에야스 암살 계획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용의자로서 5부교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히지가타 가쓰히사(土方雄久)에게 칩거(蟄居)를 명령했다. 그리고 마에다 도시나가에 대해 모반 혐의를 씌우고 정벌 계획을 세운다. 이에 도시나가는 친모인 호슈인(芳春院)을 인질로 내놓으면서 복종 의사를 표명했고, 가까스로 마에다 가문의 지위는 보전되었다.
1600년(게이초 5년)에 이르자,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문의 옛 가신 후지다 노부요시(藤田信吉)의 출분(出奔)[5]을 계기로
아이츠(후쿠시마 현)(会津)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해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하였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는 이에야스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결국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여 도요토미 측 다이묘가 다수 참가한 도요토미 군은 우에스기 정벌을 개시하였다.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5부교의 한 명이었던 마시다 나가모리(増田長盛),
모리 씨의 사신승려이며,
아키 국의 다이로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하여 서군을 조직하고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거병하였다. 인질 중에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였던 호소카와 가라샤는 이시다 측의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신의 창에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에 남겨둔 신하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보고를 시모쓰케노쿠니(下野国) 오야마(小山)에 이르러 접하고는 즉시 행군을 중지하고 따르던 다이묘들에게 이후의 동향을 물었다. 우에스기 토벌은 중지되어 사나다 마사유키와 다마루 다다마사등의 다이묘는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이에야스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군을 되돌려 서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정벌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거병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기나이에서 모습을 감추면 미쓰나리를 유인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따른다면, 도리이 모토타다는 이에야스 측이 미쓰나리를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편집] 진행 과정
7월 1일 우키다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정식을 치르고, 이 장소에 기타노 만도코로(北政所)는 측근 히가시도노노 쓰보네(東殿局)[6]를 대신 참석하게 했다. 7월 11일 미쓰나리는 동군에 가담할 예정이던 친구 오타니 요시쓰구에게 ‘이에야스 타도’를 밝히고 신의 진영에 끌어들였다.
이 점 때문에 히데이에가 먼저 궐기하고, 미쓰나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거병을 결정했다는 측이 최근의 연구에서 매우 유력시되었다. 유력한 미쓰나리파 무장인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어째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적은 편지가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끌려서 궐기했기에 전투 준비가 졸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사타케 요시노부,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 등 미쓰나리와 친밀한 무장들이 서군에 참가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시노부는 아버지 요시시게의 반대에 부딪혀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고, 다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인정받았을 때 미쓰나리가 많은 도움을 받은 큰 빚이 있었지만 주위 모두가 동군 측에 있다 보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 측에 섰다. 대신 다메노부는 전투 후 미쓰나리의 아들 시게나리와 사에요시를 보호했다. 또 고다이인의 양녀가 된 미쓰나리의 3녀 다쓰히메(辰姫)는 후에 다메노부의 아들이자 2대 번주였던 쓰가루 노부히라(津軽信牧)에게 시집가서 훗날 3대 번주가 되는 맏아들 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를 낳았다.
7월 12일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서 미쓰나리는 요시쓰구, 마시다 나가모리, 안고쿠지 에케이와 비밀 회동을 모리 데루모토을 서군 총대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아이치가와(愛知川)에서 동군에 참가 예정이던 여러 장수를 저지하기 위해 관소(関所)[7]를 설치했기에, 조소카베 모리치카,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 등이 움직일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서군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7일 결국 미쓰나리는 거병을 선언하고 다음날 이에야스의 가신인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던 후시미 성에 진격했다. 항복 권고를 거절한 모토타다는 7월 19일부터 시작된 공성전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맹공에 맞서 분전하였으나 결국 8월 1일 성을 잃고 말았다(후시미 성 전투).
그 후
이세노쿠니(伊勢国)의 아노쓰 성(安濃津城), 마쓰자카 성(松坂城) 등을 공략해 8월 안에 모두 함락시켰다.
미쓰나리 자신은
미노 방면을 견제하기 위해 8월 10일 사와야마 성에서 서군의 거점인 오가키 성(大垣城)으로 들어갔다.
한편 동군은 에도에서 머물던 이에야스을 제외하고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데루마사가 선봉에 선 동군은 8월 22일 고우다(河田)[8]에서 기소가와(木曽川)를 건너 고메노무라(米野村) 부근에서 서군과 격돌, 이를 격파하고 진군을 계속해 다음날 오다 히데노부가 성주로 있던 기후 성을 함락했다.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여러 무장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사자로 삼아 도요토미 측 다이묘의 저항을 막고, 서군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려 하였다.
기후 성이 함락되었음을 안 이에야스는 중대한 결심으로 약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사카 방면을 목표로 진군했다.
이에야스의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약 3만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전진했으나, 도중에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던 우에다 성을 공략했다가 발목을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결전 전날인 9월 14일, 아카사카(赤坂)의 오카야마(岡山)에 본진을 세웠다.
미쓰나리는 가신인 시마 기요오키(島清興)의 진언에 따라 아카사카 부근을 흐르던 구이세가와(杭瀬川)에 병사를 내보내 동군의 일부를 유인해 이들을 격파했다(구이세가와 전투).
9월 14일 밤, 이시다 미쓰나리는 아카사카를 빠져나와 나카센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려는 이에야스의 모습을 보고 세키가하라로 진격했다.
[편집] 전투 진행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 104,000명, 서군 82,000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가하라의 분지에 집결했다고 한다.[9]
메이지 시대 군사고문으로 일본을 찾았던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세키가하라에서의 양군의 포진을 접하고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그만큼 서군 측은 미쓰나리가 있던 사사오 산(笹尾山), 우키타 히데이에가 있던 덴만 산(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있던 마쓰오 산(松尾山),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포진한 난구 산(南宮山)을 연결하는 전선으로 동군을 감싸 안은 학익진(鶴翼の陣)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형적 이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동군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서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동군 역시 이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장담했는데 그것은 서군쪽의 다이묘들간의 불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동군측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분명 정상적인 군대간의 전투였다면 동군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였으나 서군의 조직력은 이미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된 상태였다. 물론 이 점을 염려한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명망이 없는 이시다 미쓰나리 대신 명망이 있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옹립하여 보완책을 강구했으나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세키가하라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안개가 생겨 근처 아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의 약속을 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곧바로 개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편집] 전투 개시
짙은 안개 속에 양군은 2시간 정도 대치가 계속되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힐 때쯤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소부대와 이이 나오마사가 박차고 나갔다.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을 맡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급히 그들을 저지하고 이유를 묻자, “정찰”이라고 말하면서 후쿠시마 부대 전방으로 나아갔다. 다다요시의 소부대는 돌연 서군의 주력인 우키타 부대를 향해 발포하고, 여기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 열리었다.
이 공격에 대해 우키타 부대는 즉시 응사했고, 세키가하라는 순식간에 격전의 장소로 변했다. 후쿠시마 부대 6,000명과 우키타 부대 17,000명은 치고받으면서 양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 5,4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부대 5,100명 등은 일제히 미쓰나리를 향해 공격에 나섰다. 미쓰나리 부대도 휘하의 시마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의 분전으로 공격해온 적을 격퇴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에게 배신을 약속받은 데다가 서군의 다이묘들간에 불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서군의 다이묘 중 불화의 중심이 되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 패배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뒤로 물리지 않고 그냥 싸우도록 내버려 둔 것이였다.
미쓰나리는 전투를 시작한 후 2시간을 경과할 때쯤 아직 참전하지 않은 무장들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노로시(狼煙; 말하자면 봉화)를 올렸다. 거기에 시마즈 부대에 응원 요청의 사자를 보냈다. 서군의 총병력 중 전투를 벌이던 병력은 겨우 35,000명에 불과했기에 전투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여기서 마쓰오 산(松尾山)의 고바야카와 부대와 난구 산의 모리 부대가 동군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한다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바야카와 부대 등이 임진왜란 당시 보여준 무능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서군의 승리는 확정적이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강으로 몰아넣은 일본군(이 전투 당시 일본군의 지휘관은 가토 기요마사를 제외한 모두가 서군)이였으나 권율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는 응원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모리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길이 막혀 참전할 수 없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소유의 영지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에야스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편집]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
정오가 지나자, 이에야스는 배반을 약속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초조해한 끝에 마쓰오 산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친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격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성격상의 결함 등을 저울질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독촉을 받고 뜻을 결정하여 마쓰오 산을 내려갔다. 결국 히데아키는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친분을 무시해버리고 만다.
고바야카와 부대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 우익을 공격하였다. 요시쓰구는 히데아키의 배반을 예측하여 온존하게 남아 있던 500명의 직속부대로 맞서 싸워 15,600명의 고바야카와 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켰다. 이때 고바야카와 군 무장인 마쓰노 시게모토(松野重元)는 “방패 속의 반역은 무사로써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 부대를 이끌고 방관했다. 이것이 고바야카와군의 후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도도 다카토라 등의 모반책에 따라 그때까지 관망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게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구쓰키 모토쓰나 등의 서군 여러 부대도 고바야가와 군에 호응하여 동군으로 돌아섰다.
사실 동군으로 돌아서기 이전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사실 와키자카 야쓰하루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행주산성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를 똑바로 지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인 끝에 대패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는 와키자카 야쓰하루로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수준의 무능함이면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였다.
예측하지 않았던 4부대의 배신으로 치열한 난전이 순식간에 동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변하게 되었다. 서군은 유리한 학익진을 형성하였고 동군을 골짜기에 가둬놓았지만, 학익의 날개 부분에 해당하던 상당수의 무장이 배신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되어 전투는 서군 내에서의 내분과 동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었고, 거기에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데루모토 등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서군 측 다이묘들이 따로 놀면서 엉뚱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편집] 서군의 패배
서군의 자멸 속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는 곧장 이에야스 본진을 통과하면서 철수하는 이른바 “전진철수”[10]을 개시했다. 이 행동에 후쿠시마 부대는 그대로 그들을 보내주었으나, 이들을 쫓았던 부대 중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는 저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고, 혼다 다다카쓰는 타던 말이 총에 맞아 낙마했다.
시마즈 부대는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와 아다 모리아쓰(阿多盛惇)[11]의 희생으로 약 80기 전후의 소수만이 살아남아 철수에 성공했다. 모리아쓰는 요시히로가 히데요시에게 선물 받았던 진바오리(陣羽織)[12]를 몸에 걸치고, 요시히로 대신 “효고두[13], 무운이 다하여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하면서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서군 부대는 괴멸하여 패주했다.
[편집] 지역별 파급 효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도 동군, 서군을 각각 지지하던 다이묘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었다.
[편집] 도호쿠(東北)
우에스기 정벌에 관해선 호리 히데하루(堀秀治)의 참언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으나, 근년에 들어 히데하루가 서군 측에 가담하려는 의사를 표시한 편지 등이 발견되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거병으로 인해 회군할 때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를 주력으로 남기고, 우에스기 영지와 맞닿아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와 그 주변에 히데하루,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감시를 명령했다.
이때 바다가 욕심나던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것을 호기로 보고 우에스기 영지에 대해 마사무네와 모의하여 침공하려고 기도했으나 이를 알아챈 우에스기가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로부터 선제 공격을 받았다. 9월 9일 요네자와 성(米沢城) 방면에서 모가미 영지을 압박해 들어간 나오에 가네쓰구 군은 수일 만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거성 야마가타 성(山形城)을 고립시켰다.
오슈(무쓰) 국 다테 마사무네는 동군에 가담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전투에 승리한 후에는 마사무네의 옛 영지 7군(郡)을 더해 100만 석의 영지를 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다테 군은 우에스기 영지인 시로이시 성(白石城)을 공격해 점령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빠른 침공에 놀라 마사무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테 가문 내에서는 “우에스기 군과 모가미 군을 서로 싸우게 한 뒤 피로해진 우에스기 군을 공격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고, 그 다음엔 야마가타도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다.”라고 중신 가타쿠라 가게쓰나가 진언하였으나, 모가미가 괴멸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위협을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었기에(일설에는 야마가타 성에 살던 모친을 마사무네가 걱정했다는 말도 있다)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를 총대장 대리로 내세워 9월 17일 원군을 보냈다. 마사무네의 원군이 가세하고, 가네쓰구 군이 사케노베 히데쓰나(鮭延秀綱)의 용맹에 눌려 시무라 미쓰야스(志村光安)가 소수 병력으로 수비하던 하세도 성(長谷堂城)을 공략하지 못하자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나, 9월 2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소식이 양군 진영에 전해지자, 흐름은 일거에 모가미 군에게 기울었다.
가네쓰구는 즉시 철수를 명령했고, 자신은 후군을 맡아 철수는 개시했다. 한편 모가미 요시아키는 곧바로 추격을 명령하고 직접 맹공에 나섰다. 이 추격전은 대혼전이 벌어져, 요시아키는 투구에 총탄을 맞을 정도로 크게 고전하였으나, 모가미 요시야스 등의 군세가 달려와 어려움을 벗어났다. 가네쓰구 군은 10월 4일 요네자와 성으로 귀환했다. 이 전투를 하세도 성 전투라고 부른다.
[편집]호쿠리쿠(北陸)
마에다 도시나가는 우에스기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7월 26일 가네자와(金沢)를 출발해 8월에 야마구치 무네나가(山口宗永)가 지키던 다이쇼지 성(大聖寺城)을 포위하고 3일 만에 함락시키고 아오키 가즈노리(青木一矩)의 기타노쇼 성(北ノ庄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오타니 요시쓰구의 대군이 후방에서 다가온다.”라는 헛소문(요시쓰구 자신이 흘려보냈다는 얘기가 있다)을 듣고 놀라서 급히 가네자와로 회군하였다.
도시나가는 도중 군대를 둘로 나눠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가 지키던 고마쓰 성(小松城)에 별동대를 보냈다. 8월 9일 나가시게는 농성군을 이끌고 별동대를 기습해 별동대를 격파하고 뒤이어 도시나가의 본대도 기습을 가해 도시나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교착상태에 빠진 나가시게는 서로 화친을 맺고, 고마쓰 성을 다음날 도시나가에게 넘겨주었다. 겨우 가네자와에 돌아온 도시나가는 급히 군을 재정비하고 9월 12일에 다시 가네자와를 출발했으나, 결국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때 다이쇼지 성 공격에 참가했던 동생 마에다 도시마사는 거성인 나나오 성(七尾城)에서 농성하며 움직이지 않고, 동군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도시마사는 계속 서군에 참가할 것을 주장했기에 결과적으로 전투 후 영지를 몰수당하는 불행한 일을 당한다.
[편집] 기나이(畿內)
단고 다나베 성에는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가 아들 다다오키가 출진한 뒤 병사 500명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서군 측에 가담한 후쿠치야마 성(福知山城) 성주 오노키 시게카쓰(小野木重勝)를 총대장으로 한 고이데 히데마사(小出秀政), 요시마사(吉政) 부자, 아카마쓰 히로히데(赤松広秀) 등이 15,000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다나베 성을 포위했다. 양쪽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서군 측 여러 무장 중에는 유사이에게 와카(和歌)를 배웠던 다니 모리토모(谷衛友)란 자도 있어, 격렬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황은 서서히 유사이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유사이는 비전의 “古今伝授”의 증서를 제자인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친왕(八条宮 智仁親王)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하고, 증서 일체를 하치조노미야에 헌상했다. 이 일이 하치조미야에서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귀에 들어가자 유사이의 상실을 두려워한 고요제이 천왕은 마에다 겐이를 통해 서군 측에 성을 넘겨주라는 칙명을 보냈다. 그러나 서군 측에는 그런 의사는 없었고, 또한 유사이도 성을 넘겨주는 것을 거절했다.
9월 12일쯤에 이르러 고요제이 천황은 나카노인 미치카쓰(中院通勝),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広), 산조니시 사네키(三条西実枝)등 세 명을 칙사로서 다나베 성으로 보내 유사이에게 화의에 응하도록 설득해 9월 18일 오노키에게 성을 넘겨주고 퇴거했다.
그러나 유사이 퇴거 직후, 시게카쓰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소식을 전해 듣자, 시게카쓰는 후쿠치야마 성으로 돌아갔으나, 순식간에 승리의 여세를 몰아 달려온 타다오키와 배반한 다니 등의 군대에 포위당해 시게카쓰는 목숨을 탄원했으나 11월 18일 자결하고 말았다.
[편집] 시코쿠(四國)
이요(伊予)에서도 동군에 가담한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의 마쓰마에 성(松前城)을 모리 군이 공격을 가했다.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 무라카미 모토요시(村上元吉) 등 이요에 인연을 가지고 있던 모리 가신들은 옛 영지 회복을 목표로 히라오카 나오후사(平岡直房), 소네 타카후사(曽根高房) 등이 미쓰하마(三津浜)에 상륙해 진지를 구축했다.
마쓰마에 성에 항복을 요구했다가 가토가의 수비대장인 쓰구다 가쓰나리(佃十成)의 야습을 받고, 무라카미 모토요시, 소네 타카후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모리 측이 불리함이 계속돼 세키가하라의 서군 측 패배를 접하고 모리 군은 후퇴했다.
[편집]규슈(九州)
규슈에서는 구로다 조스이,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등이 본국에 머물고 있었고, 기요마사와 나오시게는 당초 중립을 지켰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동군에 가담한 조스이뿐이었다. 조스이는 나카츠 성(中津城)에 모아둔 금과 병량을 아끼지 않고 풀어서 이것을 미끼로 모은 낭인을 중심으로 약 3,500여 명의 군대를 만들었다.
한편 서군 측에서는 동서 대결의 상황을 지켜보지 않고 데루모토의 지원을 받아 분고(豊後) 탈환을 노리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있었다. 9월 9일 요시무네는 추방된 이래 오랜만에 분고의 땅을 밟고, 오토모 옛 신하들을 모아 이시오키하라(石垣原)[14]에서 조스이 군과 대치했다.
9월 13일 양군이 격돌하여 격전을 벌여 요시무네 군의 용장이 전사하는 등 패색이 짙자 9월 15일 요시무네는 출가하여 모리 타베에(母里太兵衛)의 진지에 출두하여 조스이 군에 항복했다. 조스이 군에 가담하기 위해 구마모토 성을 나온 기요마사는 조스이 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서군 측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를 침공했다.
조스이 군은 이후에도 북규슈 여러 성을 함락하고, 세키가하라에서 귀환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지키던 야나가와 성(柳川城)을 기요마사, 나오시게와 더불어 포위하여 무네시게를 항복시켰다.
조스이 연합군은 마지막으로 시마즈 가 공격을 계획하고, 유키나가의 영지에 남아있던 수비대장이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요시히사는 이에 응하여 군대를 파견하는 등 규슈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으나, 시마즈 공격 직전 이에야스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와 시마즈 공격은 중지되었다.
[편집] 기타 지역
- 간토(關東)
사타케 요시노부는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의 “동군에 가담해야 한다.”라는 의견과 자신과 미쓰나리의 친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어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휘하의 다가야 시게쓰네(多賀谷重経)와 작인 세력 야마가와 도모노부(山川朝信), 소마 요시타네(相馬義胤)는 가게카쓰와 손을 잡고 있었다.
- 이세(伊勢)
세키가하라에서 진출하여 북상하던 모리 군은 도중에 있던 아노쓰 성 등 이세의 여러 성을 공격했다. 아노쓰 성의 도미다 노부타카(富田信高)는 항복하여 출가하고, 마쓰사카 성의 후루다 시게카쓰는 화친을 맺어 시간을 끌었다.
[편집] 전후 처리 및 논공행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에서 승리 후 서군 측 다이묘의 처벌 및 동군 측 다이묘의 포상을 하였다.
[편집] 서군
- 전투 후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는 옛 친구였던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부대에 체포되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9월 19일에, 안코쿠지 에케이는 9월 23일에 각각 체포되었다.
- 이들은 이후 오사카, 사카이로 끌려다니다가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고쿠다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제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여버렸다.
-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사쓰마로 도망쳤다가 1603년 말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이에야스에게 끌고갔다. 다다쓰네와 아내의 친가인 마에다 도시나가가 구명 탄원하여 죽음은 면했으나, 스루가 구능산에서 유폐된 후, 하치조시마(八丈島)에 유배되었다. 그는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치세 때까지 살았고, 그의 자손은 마에다가의 지원을 받아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을 지켰다.
- 나쓰가 마사이에는 거성 오우미 미즈구치 성으로 도망쳤으나, 동군의 이케다 데루마사 부대의 추격을 받자 10월 3일 자결했다.
- 오타니 요시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공격을 받던 중 포위당해 자결했다.
- 시마즈 요시히로의 처벌은 여러 방면의 회유 끝에 1602년 4월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행동은 당주가 인정한 것으로 나쁘지 않다.”라며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에 대해 영지를 인정해주고, 가문을 시마즈 다다쓰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죄를 용서했다.
- 모리씨에 대해서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의 총대장으로 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에, 깃카와 히로이에의 영지 안전의 약속은 파기되었고, 모리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는 대신 히로이에에게는 스오와 나가토의 2개 구니가 영지로 내려졌다. 이에 놀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영지를 모리 가문의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히로이에의 간청은 수락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영지를 삭감당한 것이 되어,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본가를 팔았다는 비난을 받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되었다.
-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마에다 도시나가를 통쾌하게 격파했던 니와 나가시게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나중에 무네시게와 시게나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계획에 따라 다이묘로 복귀하고, 무네시게는 옛 영지까지 돌려받게 되었다. 특히 무네시게의 경우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무훈을 세우게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섰던 과거를 완벽하게 상쇄했다.
-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사죄했지만, 오해와 가신의 참언이 원인이 되어 형 쓰노 치카타다(津野親忠)를 살해하여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서 영지를 몰수당했다.
-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아이즈(会津) 120만 석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영지였던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 사타케 요시노부도 히타치(常陸) 미토(水戸) 54만 석에서 데와(出羽) 아키다(秋田) 18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돌아섰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지쿠젠(筑前) 나지마(名島) 36만 석에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57만 석으로 증감하여 옮겼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1602년에 겨우 21살의 젊은 나이로 미쳐서 죽었고, 후사가 없어 가문은 단절되었다.
-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하여 돌아섰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쓰키 모토쓰나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았으나, 오가와 스게타다와 아카자 나오야스는 영지를 물수당하고, 히데아키, 야스하루, 모토쓰나 이외의 배신한 자들에 대해선 이에야스는 엄중히 처단하였다.
- 스게타다는 배신한 과거가 많았고, 거기에 아들이 미쓰나리와 친했던 일 때문이었고, 나오야스는 “총성에 놀라서 배신했다.”라고 말한 이유가 원인이었다.
- 스게타다는 전투 후 다음해에 죽고, 나오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를 섬기다가 1606년 엣추(越中)에서 익사했다.
- 소 요시토시의 경우는 비록 서군에 가담했고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점이 있었으나 소 요시토시는 평소에 임진왜란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소 요시토시 스스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마리아와 이혼한 데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과 동시에 순종을 선언했으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에서 소 요시토시는 그 해당되는 번이 쓰시마 후추 번인 관계로 조선과의 외교적 문제때문에 소 요시토시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해서 소 요시토시에 대한 상벌은 생략하고 그대로 쓰시마 후추 번주의 직위를 유지하고 고쿠다카의 삭감도 없었다. 그 댓가로 소 요시토시는 1607년까지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을 써서 조선과 일본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사쓰마 번(薩摩藩)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 번(長州藩)의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250년 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 타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편집] 동군
동군의 여러 다이묘는 대폭 증감이 있었다.
-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단고 미야쓰 18만 석에서 부젠 오구라 40만 석
- 다나카 요시마사는 미카와 오카자키 10만 석에서 치쿠고 야나가와 32만 5천 석
- 구로다 나가마사는 부젠 나카쓰 18만 석에서 치쿠젠 나지마 53만 석
- 가토 요시아키라는 이요 마쓰마에 10만 석에서 같은 마쓰야마 20만 석
- 도도 다카토라는 이요 사카시마 8만 석에서 같은 이마하루 20만 석
- 데자와 히로타카는 히젠(肥前) 가라쓰(唐津) 8만 3천 석에서 12만 3천 석
- 야마우치 가쓰토요는 도오토미 가쓰가와 7만 석에서 도사 우라토 24만 석
-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 기요스 20만 석에서 아키-빙고 히로시마 49만 8천 석
- 이코마 가쓰마사는 사누키 다카마쓰 6만 5천 석에서 17만 1천 석
- 이케다 데루마사는 미카와 요시다 15만 2천 석에서 하리마 히메지 52만 석
- 아사노 요시나가는 가이 부츄 22만 석에서 기이 와카야마 37만 6천 석
- 가토 기요마사는 히고 구마모토 19만 5천 석에서 51만 5천 석, 단 이 경우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고쿠다카 24만석을 모두 몰수해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증감시킨 것을 포함했다.
- 모가미 요시아키는 데와 야마가타 24만 석을 57만 석
- 다테 마사무네는 무츠 이와테야마 57만 석을 62만 석
다만 여기서 보더라도 도요토미 측과 인연이 있던 다이묘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영토를 늘려주는 대신 서쪽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 쓰가루 다메노부는 동군 측에 가담하기는 하였으나, 그 맏아들 노부타케가 오사카 성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봉사했고, 전쟁 후에는 노부타케와 함께 온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을 보호해주는 등 양측에 모두 발을 대는 듯한 모습을 보인 탓인지 별다른 포상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다메노부와 셋째 아들 노부히라가 군영에 참여한 것에 대하여 고즈케노쿠니의 2천 석 영지가 약간의 은상으로 내려졌다.
- 이에야스 자신의 직할령에 대해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는 250만 석인 것을 400만 석으로 대폭으로 늘려 전국에서 제일 많은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것은 도쿠가와 자신의 절대권력의 크기를 과시하여 다른 다이묘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도쿠가와는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최하 4~6배 이상의 고쿠다카를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은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15]
- 도요토미씨의 영토에 대해선 히데요시 시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했다. 도요토미씨의 재정을 지탱하던 사카이와 나가사키의 교역항 등도 도쿠가와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완전히 도쿠가와씨와 도요토미씨의 입장은 역전되고 말았다.
[편집] 세키가하라 전투에 관련된 논점
서군의 대장 격이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밖에 장수들이 오가키 성에 머물지 않고 세키가하라로 전진한 것은 “오가키 성을 무시한 채, 사와야마 성을 함락한 뒤 오사카로 나가겠다.”라는 소문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소문은 이에야스가 퍼트렸으며, 이 소문에 미쓰나리가 걸렸다는 설이 보편적이지만, 의문점이 많다.
혹시라도 이에야스가 위의 말처럼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본다면 부대의 통솔이 가장 취약한 행군 중 적의 습격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이에야스가 유리한 상황에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또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출진을 여러 번 요구했었다. 이것은 결속력이 부족한 서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향한다면 미쓰나리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오사카 부근에서 이에야스의 배후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부근 하천의 범람으로 여러 번 수해를 입었던 오가키 성을 이에야스가 수공으로 공격하면 서군의 수뇌와 세키가하라 부근에 포진한 모리, 고바야카와 등과의 연락이 끊어지는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은 세키가하라, 마쓰오 산에 설치된 축성 공사가 새로운 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미쓰나리의 전략을 아래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 세키가하라 서쪽의 마쓰오 산-사사오 산(笹尾山) 라인에 야전 축성을 실시해 동군의 진격을 저지한다.
- 마쓰오 산의 성채에는 서군 주력인 모리 데루모토 이하 3만을 배치한다.
- 동군이 오사카로 향하기 위해 오가키 성을 무시하고 세키가하라로 진격한다면 오가키 성의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난구 산의 모리가 동군을 추격해 1번 라인의 군과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한다.
- 동군이 오가키 성을 공격한다면 1번 라인에서 포진하던 오타니 요시쓰구, 모리 히데모토가 오가키 성을 공격하는 동군의 배후를 쳐 오가키 성의 군과 협공한다.
결국 이 전략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서군은 동군을 협공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서쪽의 마쓰오 산-사사오 산 라인의 중요한 곳인 마쓰오 산 성채에는 거취가 불분명한 고바야카와 군이 서군의 조반(城番)[16]을 절반이나 몰아낸 형태로 주둔한 일,
또 오가키 성이 수공에 취약하기 때문에 수공을 당한다면 이미 성이 공격당하여 4번에서와 같이 오타니, 모리 군이 배후를 칠 수 없어, 이 전략은 깨지고 만다. 그 때문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 잠행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는 것이 이 설의 요지이다.
[편집]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일본의 사항을 알려주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의 교생(校生)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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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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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쇼군 재임
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으며, 후시미 성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선지(宣旨)[88][주 8]를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다.[89] 이에야스는 무로마치 막부 이래 여러 권력자들이 교토에 본거지를 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개창하였다.[89]
그 후 이에야스는 1604년부터 에도 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에도 성의 증축을 위해 이에야스는 도도 다카토라를 등용하여 설계를 맡겼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도자마 다이묘 28개 가문에 공사를 돕도록 명령하였다.[90]
따라서 공사를 돕도록 명령받은 도자마 다이묘들은 1,000석 당 한 사람의 인부를 제공해야만 했다.[주 9] 또한 간토 평야에는 축성에 알맞은 석재가 없었기 때문에 이즈 반도에서 채석한 석재를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도자마 다이묘들이 10만석 당 100명이 들 수 있는 석재를 120개 준비하도록 하는 식으로 충당하였다.[90]
이처럼 공사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막대한 비용 지출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3대 쇼군인 이에미쓰가 집권하던 시기인 1636년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90] 이러한 부역 부담을 통해 이에야스는 다이묘를 손쉽게 통제하였으며, 에도 성은 260년 간 도쿠가와 쇼군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하였다.[91]
[편집] 양위 이후
1605년 62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고자 쇼군 직위를 3남 히데타다에게 계승하게 한다.[주 10][92][93]
그리고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을 보내 히데타다가 교토에 상경하였을 때 히데요리도 인사를 하도록 요구하였다.[93] 하지만 히데요리가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자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보내 양해를 구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93]
이에야스는 1607년 64세 슨푸 성으로 들어가 명목 상으로는 은거하였지만 곧 스스로를 오고쇼(일본어: 大御所)라고 지칭하면서 에도의 히데타다와 함께 2중 정치를 이끌었다.[92][93] 이에야스는 사망할 때까지 슨푸에서 9년 간 각양 각층의 측근들을 만나며 조언을 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통치 기구들을 만들어냈다.[92][93]
미카와 시절부터 이에야스에게 종사하던 원로들은 한 사람도 예외로 하지 않고 모두 은퇴해야만 했고, 대신 혼다 마사즈미, 나루세 마사나리 등과 같은 젊은 신참 다이묘와 행정 전문가, 곤치인 스덴, 하야시 라잔 같은 승려와 유학자, 자야 시로지로, 이나 다다쓰구 같은 경제 전문가와 거상(巨商), 윌리엄 애덤스 같은 외국인 등이 오고쇼 정치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93]
이에야스는 슨푸 성도 에도 성처럼 대대적인 증축을 개시하고 거리를 정비해 슨푸 성은 칠중오층의 천수각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성으로 재탄생하였고, 조카마치 또한 정치, 경제, 외교의 중심지로서 대성하였다.[92][94]
한편 이에야스는 비록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전개하였다.[95] 기독교를 금지한 명령 곧 금교령은 이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후반에 히데요시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이에야스 대에 이르러서도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계속 찾아왔다.[95]
처음에 이에야스는 이들을 지배 체제로 편입해 해외 무역의 확대를 도모코자 전교 활동을 묵인하였지만[95][96] 일부다처제의 부인이나 할복에 대한 금지,야훼이외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한 기독교의 특성에 따른 다신교인 신토와의 대립 등은 막부를 긴장하게 하였으며[96], 결국 오카모토 다이하치의 뇌물 사건 이후 도요토미 씨의 잔당 쪽에 기독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95][96]
새 금교령은 69세 1612년 3월 에도, 오사카, 교토에 발표되었고, 이듬해 12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95] 금교령 발표 이후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의 신도가 되도록 하였으며,[97] 기독교를 믿고 있던 이들에게도 신토나 불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한 다카야마 우콘을 비롯한 열네 명의 신자가 마카오와 필리핀 등지로 추방되었다.[95]
이어서 73세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무역 지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의 데지마 일대로만 한정하였다.[96]또, 이에야스의 조정에 대한 압력도 계속되었다.[98]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교토에 쇼시다이(所司代)를 설치하여 조정 및 공가의 동향을 감시하였다.[97] 그러다 1607년 64세 이노쿠마 노리토시의 추문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해결을 조정이 막부에 의뢰한 것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이노쿠마를 참수형에 처한 후 1613년 70세 공가중법도를 제정하여 공가에 대한 간섭권을 확립하였다.[98]
그리고 2년 뒤에는 72세에는 더욱 엄격한 규정인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하여, 조정과 공가의 군사·정치적 권한까지 빼앗았다.[97][98]
이에야스는 슨푸에 머무르면서 무장 이외에도 여러 가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외교 및 무역의 고문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99][100] 1600년 57세 네덜란드의 리후데 호가 규슈의 분고에 표류하였을 때, 이에야스는 리후데 호의 선원이었던 얀 요스틴, 윌리엄 애덤스 등을 에도로 초청하여, 외교·무역 고문으로 삼고[100][101] 네덜란드, 영국과의 무역을 추진하였다.[100]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은 1609년 (66세)과 1613년(70세)에 차례대로 일본에 내항하여, 이에야스의 허가를 받은 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였다.[100][101] 또한 스페인과의 교역에도 열의를 보여 1609년 가즈사 국에 표류한 루손의 전 총독 돈 로드리고를 교토의 상인 다나카 쇼스케에게 소개하여 무역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101]
한편으로 주변국과의 외교 정책도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래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1607년(64세)까지 조선과 포로를 교환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 통신사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102]
1609년(66세)에는 기유약조가 체결되어 삼포왜란 이래 폐지되었던 왜관이 동래에 다시 설치되어 무역이 정상화되었다.[102] 명나라와는 정식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히라도와 나가사키에서의 사무역 정도만이 성행하였으며[102] 타이완, 필리핀, 시암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사무역이 종종 이루어졌다.[102]
다만 같은 해, 사쓰마 국의 시마즈 이에히사가 류큐 왕국 (오키나와)을 침략하여 류큐 왕국을 막부의 속국으로 만들었다.[102]
[편집] 오고쇼 시절의 가신들
- 오쿠보 나가야스-악사(일본어: 猿楽師 사루가쿠시[*]) 출신으로 횡혈식 채굴법과 수은 방류를 통한 제련법 등을 알림. 금은 부교로 음명되어 이와미 은광, 사도 금광, 이즈 금광의 채굴을 맡기도 하였다.[99]
- 곤치인 스덴-승려.
- 덴카이 쇼닌-승려.
- 하야시 라잔-유학자.
- 자야 시로지로-혼노지의 변 당시 이에야스를 도움.
- 고토 쇼자부로-대상인.
- 윌리엄 애덤스(일본어: 三浦安針 미우라 안진[*])-영국인.
- 얀 요스텐(일본어: 耶楊子 야요스[*])-네덜란드인.[99]
[편집] 오사카 전투와 도요토미 씨 멸문
- 이 부분의 본문은 오사카 전투입니다.
오고쇼로 있던 이에야스는 여전히 도쿠가와 씨에 위협적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측의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오사카 성에 남겨둔 막대한 도요토미 씨의 재산을 최대한 소모시키려는 계략을 세웠다.[103]
우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도요토미 씨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긴키 지역의 신사, 사찰의 수리와 새로운 신사, 사찰의 조영을 건의하였다.[103]
히데요리는 이를 수락하여 긴키 일원의 신사와 사찰의 수리 복구와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그 결과 상당한 자금이 소모되었다.[103] 특히 교토 히가시야마의 호코 사(方広寺) 대불전의 수리 복구 비용에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103]
1614년 4월 (71세)호코지 대불전의 수리가 완성되자 히데요리의 가신인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이에야스에게 완성 소식을 알리고 첫 공양의 거행을 알렸지만, 이에야스는 대불전의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시하였다.[103]
법종 명문의 일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
국가는 편안하고, 군주와 신하는 풍요롭고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하길 기원합니다. |
” |
이에야스는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덴의 말을 바탕으로 이 명문의 내용이 도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며, 이에야스 (家康)의 이름 사이에 안(安)이라는 글자를 넣어 갈라놓은 것이 이에야스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104][105][주 11]
1614년 10월 (71세)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출진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자신은 총지휘관이 되어 오사카 성 부근의 덴노지에 진을 치고 히데요리를 포위하였다.[106]
같이 출전한 히데타다는 오사카 성을 총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지구전을 통해 히데요리를 굴복시키려 했던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06] 그 때문에 11월 19일 이에야스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의 외성 공격으로 첫 공격이 시작되긴 했으나, 11월 26일에 이마후쿠와 시기노에서 크게 충돌한 것 이외에는 작은 충돌이나 기습전만 반복되다가 12월에서야 두 차례의 교섭 끝에 강화가 성립되었다.[106]
대신 이에야스는 혼마루만을 남기고 오사카 성의 바깥 쪽 해자를 매립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107] 하지만 이에야스는 공사를 맡은 혼다 마사노부·마사즈미 부자에게 안쪽 해자와 망루도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고, 히데요리의 사신이 항의를 위해 찾아올 때마다 혼다 부자는 여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면서 해자를 모두 매립하였다.[107]
그 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야마토 국이나 이세 국의 다이묘 자리로 옮겨가도록 명령하여 히데요리를 자극하여, 히데요리 측이 1615년 4월 72세 교토에 방화를 한 것을 빌미로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108] 병력과 물자 면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 비해 월등히 유리하였으나, 초반에 사나다 유키무라의 분전으로 고전하였다.사나다 유키무라가 죽기를 각오 하고 이에야스 본진까지 오자 이에야스는 나는 죽었다 할복하겠다 라고 말했다.[108]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가 전사하자 이에야스는 성내의 내관인 다이도코로가시라 등과 내통하고, 손녀인 센히메를 풀어주도록 압박하였다.[108]
결국 5월 8일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도노가 자살함으로서 도요토미 씨는 대가 끊기고 말았으며[108] 이에야스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였던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편집] 최후
1616년 정월 73세, 슨푸 근교로 매 사냥을 나갔던 이에야스는 측근으로부터 도미 튀김을 먹은 후 그날 밤 복통을 일으키며 중태에 빠졌는데[109], 시의 (侍醫) 가타야마 소테쓰의 재빠른 조치로 회복되었지만, 이후 3개월 간 이에야스의 건강 상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결국 4월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109][110]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위암, 매독, 각기병 등이 제시되고 있다.[109][111][112]
그의 유훈은 《동조궁신군어유훈》(일본어: 東照宮神君御遺訓 도쇼구신쿤고이쿤[*])에 쓰여져 닛코 동조궁에 모셔져 있다.[113]
“ |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항상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은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걱정하라. 인내는 무사장구 (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그 피해는 너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너 자신을 탓할 뿐 남을 탓하지 말라. 미치지 못함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주 12][113] | ” |
이외에 이에야스는 죽음을 앞두고 혼다 마사즈미, 곤치인 스덴, 덴카이 쇼닌을 불러, 사체를 스루가 국 구노잔(久能山)에서 장사지낸 후 장례는 에도의 조조 사에서 지내고, 위패는 미카와 국의 다이주지에 봉안하고 시모쓰케 국의 닛코(日光)에 작은 사당을 지어 죽은 지 1주일 후 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114]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죽은 날 밤 이들은 이에야스의 유해를 비밀리에 구노잔으로 옮겨 장사지낸 후, 이에야스를 신격화하기 위해 불교의 산왕일실신도에 따라 곤겐(権現)이라는 호칭을 주었다.[114] 죽은 후 1주기가 되던 날에는 유해를 닛코로 옮겼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이라는 신호가 부여되었다.[114][115]
[편집] 인물과 평가
이에야스는 마쓰라의 센류에 제시된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인내의 귀재"로 평가받는다.[118][119]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며, 계속 복종을 강요당해왔다. [118]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며, 임진왜란 도중에도 영지만 지키며 신중히 대처하였다고 평가받는다.[119]
때문에 이에야스의 삶은 일본에서 여러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118]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118] 반면 에도 시대 서민들 사이에서는 천하 통일의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여[120] 상반되는 평가를 가지고 있다.[121]
이에야스는 62세에 11남인 도쿠가와 요리후사 (미토 도쿠가와 가의 시조)를 낳았고 70세에 임질에 걸렸을 정도로 많은 자식을 남겼는데[122] 이후 이에야스의 다른 자식들이 고산케를 창가하면서 이에야스의 직계 자손이 끊어진 이후에도 고산케에서 번갈아 쇼군직을 계승하여 대가 끊기지 않았다.[122]
이에야스는 11남 5녀를 슬하에 두었다. 아래는 이에야스의 자식들이다.
-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 자결
- 차남 유키 히데야스 - 유키 하루토모의 양자가 됨
-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 - 제2대 쇼군
- 4남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 5남 다케다 노부요시 - 다케다 노부카쓰의 대를 이었으나 요절
-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 7남 마쓰다이라 마쓰치요
- 8남 히라이와 센치요 - 히라이와 지카요시의 양자가 됨
-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 - 고산케 (오와리 도쿠가와 씨) 창가
-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 - 고산케 (기슈 도쿠가와 씨) 창가
-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 - 고산케 (미토 도쿠가와 씨) 창가
- 장녀 도쿠가와 가메히메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아내
- 차녀 도쿠가와 도쿠히메 - 호조 우지나오 → 이케다 데루마사의 아내
- 3녀 도쿠가와 후리히메 - 가모 히데유키 → 아사노 나가아키라의 아내
- 4녀 도쿠가와 마쓰히메
- 5녀 도쿠가와 이치히메
[편집] 일화
- 슨푸 인질 생활 시절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하라미이시 몬도 (孕石主水)는 자신의 저택 정원에서 매로 사냥하는 이에야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미카와의 꼬마 녀석"이라며 모욕을 주었다. 나중에 하라미이시가 다케다 신겐의 수하로 들어가, 다케다 씨의 성병 (城兵)으로 복무할 때 이에야스에게 포로로 잡히자 이에야스는 그에게 "그대는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기 싫을 것이다"라며 할복하도록 하였다. 반면, 슨푸 시절에 이에야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가신 출신의 다른 포로는 풀어주고 큰 상을 내렸다.[123]
- 이에야스가 이끌던 미카와 국의 무사들은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24]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후 각지의 다이묘들을 불러 주연을 열면서 자신의 진귀한 골동품들을 자랑하였을 때 다른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이에야스는 "미카와의 벽지에서 자라 아무 골동품도 가진 게 없지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한 5백명의 가신들이 저의 보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124]
- 정적인 이시다 미쓰나리를 시험해보기 위해 그가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의 추격으로부터 도망쳐왔을 때 안전하게 이시다 미쓰나리를 보호해주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하도록 조치한 반면 이시다 미쓰나리를 오봉행에서 파직시켰다. 은혜와 형벌을 동시에 내린 셈인데 이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서는 최선책이였다. 일단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 이시다 미쓰나리라는 개인의 역량을 평가해볼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는 살려준 은혜는 무시하고 오봉행에서 파직시킨 원한을 선택했다.
- 군사적 식견과 정치적 식견이 대단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할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명령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습하도록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역기습으로 차단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자신과 내통하게 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부터 자신의 사람이 되라는 권유를 계속했다. 이미 사전에 이렇게 물밑작업을 해 놓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절대적으로 불리한 지형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전투를 치르게 내버려 뒀으며 결국 전술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서군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주게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를 대승으로 장식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력은 대단한 수준이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차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맞상대하길 꺼려할 정도였다.
- 처음 맞상대를 해봤다가 크게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옹립하고 있던 오다 노부카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항복시킨 후 그것도 모자라 소에다 요시나리에게 시집간 자신의 이복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내서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간신히 복속시킬 정도였다.
전 임 - |
제1대 에도 막부의 쇼군 1603년 ~ 1605년 |
후 임 도쿠가와 히데타다 |
에도 막부의 쇼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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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 에도 막부 - 에도 시대 - 에도 성 - 도쿠가와 씨 - 세이이타이쇼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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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는 재임년도이다. |
[보이기]
도요토미 정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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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쓰구 · 도요토미 히데요리 | ||
도요토미 가문 | ||
다이묘 | ||
정책 | ||
전쟁 | ||
직할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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