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兩班은 말씨부터 다르다." 196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班常을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婚事 말이 날 때는 더 더욱이나. 간혹 査頓 간에 오가며 서로 방문할 적에는 말씨를
조심하기도 하지만 그 말씨로부터 정말로 상대편이 양반 집 출신인가를 헤아려보기도
했다.
말은 인격의 집이라는 서양 표현처럼 겉으로는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어도 말씨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품이 배어나온다. 말씨란 자신의 메모리 속에 입력된 터라 좀처럼
감추기가 어렵다는 걸 우리가 안다. 평소에 욕을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도 모르게 감정에 따라 그 상말이 튀어나온다. 또한 말이란 어려서부터
그 집에서 부모나 식구들에게서 밤낮으로 들으면서 새겨지므로 그 집안의 분위기를
잴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에 그가 양반인지 아닌지를 가름할 것이다.
宗親會나 宗事에 모일 때에도 그 언사를 보면 그 집안의 예절을 점칠 수 있다. '族祖'나
'大父'라는 호칭은 그 門中에서 사용하지 않거나 들어보지 못할 경우에는 좀처럼 입에서
굴러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종친의 行列이 내
할아버님을 존경함과 똑 같이 높여야 하기 때문에 나이에 상관없이 '大父',또는 '族祖'
라고 호칭하는데 익숙해 있는 연고이다.
내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代를 지닌 사람이 어리다고 아름을 마구 부르거나, 아무개 씨
라고 한다면 이는 양반이 할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종친을 높
이는 것은 바로 내 아버지와 같은 대의 사람이 때문이다. '아저씨, 族叔'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자기 아버지를 낮추는 행위와 같다는 사실이다.
孝道와 孝悌란 내 부모, 내 형제를 공경하고 우애함인데 여기서 나아가 내 집안 大小家,
그리고 문중과 종중으로 넓혀져 종친 전체에 이르러 공경하는 태도를 아우르는 모든 행
위이다. 내 아버지를 대하듯 아버지의 항렬의 종친을 존경함이요, 내 자녀를 아끼듯 族姪
을 사랑하는 것이 효제가 된다. 그게 바로 愛族이요 崇祖로 이어지는 일이니 종친끼리
부르는 말씨가 얼마나 중요한가!
조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를 존숭하듯 내 아버지, 내 할아버님을 높이는 태도로
족조와 족숙을 존경하는 말씨를 할 때에 우리가 진정으로 양반이 될 수 있다. 대부, 아저씨,
족질, 조카라 부르지 못한다면 宗事는 왜 하는가? 종친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것이
양반의 기본 행실이요, 우리 선조들께서 몹시도 바라신 바가 아니었는가.
진정한 양반은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다같은 인권의 존경심으로 대한다. 예전에 푸줏간에
간 손님이, "이놈, 돌쇠야, 고기 한근 주거라!" "녜, 녜." 곧 뒤이어 온 이도, "이보게, 돌쇠네,
나도 한근만 주게나." '물론입죠." 선뜻 끊어 준 고기를 각각 받아 들 때 먼저 온 양반이 화가
났다. "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어찌하여 크기가 이리 차이가 나느냐?' 백정을 깔보고
막말을 한 사람의 것보다 예의가 짙은 후자의 고기부피가 표가 나게 컸기 때문이다.
"예, 예. 먼저 것은 돌쇠 '놈'이 잘라서 작구요, 이 분의 고기가 돌쇠 '네'기 잘라서 큽니다."
班常의 言辭는 그 예의와 태도에 따라 고기 근에도 차이가 났으니 우리의 일상에 양반의
말씨는 얼마나 귀중한 예절과 인생의 가치가 되겠는가. 양반은 양반의 말씨를 쓴다.
진송의 예절
진천송씨종보
2013년 봄 제77호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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