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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승만,그 거대한 생애 90년(6)-루스벨트 만났지만..

 

밀사역 실패(거대한 생애 이승만90년 6)
? 루스벨트 거부로 독립청원 좌절

? 미상원의원-국무 면담때까진 "순조"
? 대프트 소개장 지닌 윤병구도 합류
? 또 다른 목적 유학엔 성공 장학생으로 조지 워싱턴대 2학년 편입


발행일 : 1995.01.24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한 날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는 워싱턴의 첫밤을 역근처 펜실베이니아가에 있는 싸구려호텔 마운트 버논에서 묵었다. 주머니에는 몇달러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WP기자도 만나

"다음날 아침 1905년 1월1일에 나는 아이오와서클에 있는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신태무씨가 공사대리로 있었는데 (중략) 홍철순과 김윤정은 서기관으로 있었다"( 청년 이승만자서전 ).

공사관 건물은 3층으로 큰 방이 9개나 있어 1층은 공관으로 쓰고 2,3층은 공관원들이 가족과 함께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묘한 것은 바로 옆에 일본공사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공사관 직원들중 일부가 일본과 연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공사대리 신태무는 이승만의 협조요청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의 대답은 "본국의 훈령이 없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김윤정은 비교적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태무가 엄비와 관계된 사실등을 이승만에게 이야기해준 것도 김윤정이었다. 김윤정은 신태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김윤정은 이승만이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명을 받고 왔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자신이 공사가 되는데 도움을 준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월초순 이승만은 아칸소주출신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동안 주한미국공사로 일한 적이 있고 민영환 한규설과도 친분이 있는 친한파 인사였다. 이날 면담에서 이승만은 도미때 트렁크에 숨겨온 민영환 한규설의 밀서를 딘스모어에게 전달했다. 딘스모어는 "존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을 주선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승만에게 협조를 약속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지를 방문, 기자를 만나 한국을 삼키려는 일본의 음모를 고발했다. 그러나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같다.

김윤정과 딘스모어의 협조약속을 받아낸 이승만은 밀사 로서의 임무수행이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자신이 미국에 온 또 하나의 목적, 즉 유학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 도착과 함께 선교사 게일박사의 소개장을 들고 장로교계통의 캐비넌트교회 루이스 t 햄린목사를 찾아갔다. 햄린목사는 서재필박사가 미국서 재혼할 때 주례를 서기도 했던 친한파 인사였다. 게일은 햄린에게 이승만을 이렇게 소개했다.

"친애하는 햄린 박사님. (중략) 그는 모국에서 여러가지의 경험을 쌓았고 가지각색의 물불의 시련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련을 통해서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입니다. (중략)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중략) 저는 그가 당신이 계시는 워싱턴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략) 그는 2,3년동안 일을 하면서 공부하고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

햄린목사는 처음 본 이승만을 유능한 현지 전도사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금전적 도움도 주고 여러가지 면에서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지 워싱턴대 총장이며 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을 맡고 있던 찰스 니드햄박사에게 이승만을 소개했다. 이승만은 앨런 위버 학장과의 면담 결과 학문에 조예가 있다는 판정을 받아 장학생으로 2학년에 편입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2월에 시작되는 봄학기에 등록을 했다. 일단 숙식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 불과 몇달러밖에 없었던 이승만이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했을까. 초창기에 김윤정과 친했다는 기록을 보면 먼저 정착해있던 그로부터 얼마간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일요일마다 각교회에서 이야기를 하곤했다"는 자서전의 구절로 보아 신앙간증과 한국사정호소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강연을 해 얼마간의 용돈을 만들어쓴 것같다. 그리고 햄린목사도 얼마 안되지만 조금씩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 물론 풍족했을리가 없다.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학에 편입학했다는 사실은 돈문제와 숙식문제 등 미국에서의 안정적 생활은 물론 밀사임무수행에 보다 열성을 다할 수 있게 보장해준 셈이었다.

이승만이 딘스모어 상원의원을 면담한지 약 한달만인 2월16일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헤이장관에게 면담시간을 잡도록 편지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일, "내일 아침 9시정각에 와서 나와 같이 국무성으로 동행합시다"는 소식이 왔다.



 헤이장관 협조다짐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20일 헤이 국무장관과 면담을 했다. 이승만이 다니던 캐비넌트교회의 신자이기도 했던 헤이는 특히 한국에 있는 미국인선교사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개항이후 한국에서 해를 입은 선교사가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우리 한국인들은 각하께서 중국을 위해 힘쓰신 것처럼 한국을 위해서도 힘써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부탁했다. 헤이는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이승만은 뛸 듯이 기뻤다. 한미상호조약의 의무이행 촉구야말로 도미목적의 최우선 과제였다. 미국무장관이 이 문제에 대해 긍정적 협조를 다짐했으니 그로서는 대성공이라 여길만 했던 것이다.

그는 즉각 면담결과를 국내의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통보했다. 당시 한국의 외교는 사실상 일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딘스모어의 도움을 빌어 미국외교루트를 이용했다. 덧붙여 김윤정의 승진부탁도 함께 보냈다.

꼭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윤정은 6월23일 3등서기관으로 승진, 신태무의 후임 대리공사를 맡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과의 사이는 원만했다.

한편 하와이에서는 한인들이 모여 5월3일 에와친목회라는 단체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7월중순 교민대회를 열고 윤병구목사를 대표로 뽑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게 한국독립을 청원키로 했다. (이승만계열의 기록이나 전기들에서는 윤병구와 이승만 두사람을 대표로 뽑았다고 돼있으나 이승만이 당시에는 하와이와 깊은 연고를 갖고있지 않았고 나이도 30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뒤늦게 합류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

이날 교민대회의 목적중에는 청원대표선출 이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하와이를 들른 윌리엄 태프트 국방장관의 환영이었다. 여기서 태프트는 한인들의 요청을 받고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러나 태프트의 방일 목적은 "일본은 필리핀을 침범하지 않고 미국은 한국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으러 가는 것이다.

한국문제를 흥정하러 가면서도 한국인 대표에게 소개장을 써준 태프트, 무슨 목적으로 일본에 가는지도 모르고 독립에 도움이 될까해서 환영대회를 열어준 한인동포들, 그런 소개장을 들고 대통령에게 청원하러 간 윤병구와 이승만 .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모르던 두 사람은 워싱턴에서 만나 필라델피아의 서재필박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청원서 문안을 마지막으로 손질했다. 내용은 역시 한미상호조약의 규정준수를 청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8월초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던 뉴욕주 오이스터 베이로 가서 옥타곤호텔에 투숙했다. 그들은 대통령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눈길을 끌어 8월4일자 뉴욕 트리뷴지에는 두 사람의 회견기사가 게재됐다. 그들은 다짜고짜 대통령 비서관들을 만나 태프트의 소개장과 청원서 사본을 들이밀고 대통령면담을 신청했다.



 김윤정 막판 발뺌

즉답이 없자 실망한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그날 저녁 "내일 오전 9시까지 오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5일 별장으로 가 응접실로 안내됐다. 간을 졸이며 앉아있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들어왔다. 당황한 그들은 인사나 자신들의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청원서만 불쑥 내밀었다.

루스벨트는 청원서를 받아들며 말했다.
"나를 찾아주니 기쁘오. 나도 당신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소.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채널을 통하기 전에는 처리하기가 어렵소. 당신네 공사를 시켜 국무부에 제출하시오. "
루스벨트는 간단히 말하고 바로 나가버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곰곰이 따져보았다면 외교적 수사를 동원한 거절 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다정한 말은 외교경험이 없는 두 사람을 아주 기쁘게 했다. 이제 공사의 협조만 얻으면 다 될 것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곧바로 뉴욕으로 나와 워싱턴행 기차를 탔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공사관으로 갔다. 이승만으로서는 그동안 친분을 쌓아두고 그의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고 스스로 믿고있는 김윤정을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윤정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도 과거 신태무와 마찬가지로 "정부훈령이 없는 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김윤정의 태도는 단호했다. 결국 공사관을 통한 밀서 전달은 실패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후 각종 증언이나 기록등을 통해 "김윤정은 자신의 공사직 유지를 위해 일본에 협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때 협조를 해주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라고 수차례 아쉬움을 표했다.

이와 관련해서 김윤정의 손자 김대희씨(56.서울시 서초구 반포동)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있다.
"조부께서는 분명 미국무부에 전달했으나 직원들이 12시에 오라 며 사실상 접수를 거절해 그렇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누차 말씀해주셨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생애와 관련해 밀사임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를 떠나 젊은 청년으로 국가적 대사를 끝까지 수행했다는 것이다. 김윤정이 협조했다고 하더라도 국권상실을 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한우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7)-워싱턴대 유학시절 

워싱턴대 유학시절(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7)
? "서양책 번역하기 위해 공부한다"
? 재학중 미 동부도시 다니며 한국 강연
? 워싱턴거리 자전거여행 등 자유만끽
? wp지에 강연기사 실려 미국데려온 7대독자 태산 디프테리아 사망 "충격"


발행일 : 1995.01.27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이승만은 1905년 2월 조지워싱턴대 윌버학장과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비록 미국의 정규교육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학문에 대한 나름의 깊이가 있다고 인정돼 2학년2학기로 편입됨과 동시에 특별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러나 그해 8월까지 첫학기는 밀사임무를 수행하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가 밀사임무의 좌절 이후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청년 이승만자서전 에 솔직하게 적혀 있다. 공사관의 비협조로 밀사수행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는 상당히 격한 어조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절망감을 표현했다.

"나는 한국사람들의 윤리상태가 얼마나 땅에 떨어진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김윤정(당시의 주미 공사)은 한국사람 중의 좋은 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한국사람이 저렇게 자기나라를 배반하고 자기 친구들을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사람들이 그처럼 짐승같은 저열한 상태에 빠져있는 한 한국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한국사람들에게 기독교교육을 베풀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한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이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그는 첫 저서 독립정신 에서도 애국심이 없는 일부 한국인들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서구적 기준으로 무조건 한국을 나쁘게만 보려한 사대주의적 근성이라는 비판이 제기될는지 모른다. 이승만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 중에는 이런 유형의 것들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화라는 척도에서 볼 때 이승만의 한국사회비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그는 개화파중에서 친일파로 전락한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한국인, 한국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와 부정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개선을 위한 비판이었을 뿐이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전념하였다. 오로지 남은 하나의 희망은 한국사람을 갱생시키는 것이고 그 길은 기독교교육이라고 나는 믿었다. 나의 인생목적은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써먹으려고 서양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교육을 통해서 서양책들을 한국말로 번역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년 이승만자서전)



 "기독교교육 전념"

번역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데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번역의 문제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역할을 번역에서 찾았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이해를 위한 올바른 접근법을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승만은 실제 옥중에 있을 때 중국인 채이경(채이경)이 쓴 중동전기본말 을 번역했고 (이 번역본은 1917년 자신이 주관한 미하와이 태평양잡지사에서 청일전기 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영어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공부는 3학년이 된 9월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그가 배운 과목은 논리학, 영어, 미국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사회학, 서양사, 고대어학 등이었다. 서양학문의 기초과목들인 셈이다.

그러나 서양학문에 대한 소양이 배재학당 시절 배운 초보적인 영어와 산술이 전부였던 그로서는 어느 하나 제대로 따라가기 쉬웠던 과목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생계문제에 대한 불안과 굶주림으로 인한 쇠약한 몸은 그로 하여금 공부에만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다.
대학시절 그의 성적을 보면 서양사만 a학점을 받았을 뿐이고 대부분은 b나 c학점이었다. 특히 동양학생에게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어와 수학은 d학점을 받았다. 그러나 유학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감안을 해주지 않던 당시 미국대학들의 풍토를 감안한다면 사실 30세가 넘은 만학도 이승만으로서는 졸업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강연은 계속 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메모를 보면 이런 강연들을 통해 번 돈이 2달러, 3달러, 많게는 30달러였다고 돼있다. 그러면 이승만은 이역만리에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강연했길래 지속적으로 강연을 할 수 있었을까.

청년시절부터 이승만을 따랐던 원로경제인 이원순의 전기는 이에 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 연설은 주로 ymca주최로 열렸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동부도시에 있는 수많은 단체들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었다. 어떤 때는 70장에서 1백장에 달하는 사진을 환등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제는 언제나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사업과 한국인의 점진적 향상에 관한 것이었다. "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미지의 나라 한국의 풍속과 기독교전파에 관한 이야기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1907년 6월13일자 워싱턴포스트 지방판 기사는 당시 이승만이 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얼마나 인기를 모았던가를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자료다.



 수백명 폭소-박수

이승만씨는 한국의 양반부인은 외출을 하지않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줄 수 없다고 말해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냈으며 그 대신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중류층부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강연회에는 수백명이 참석했으며 이 젊은 한국청년은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가 대학시절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면 과연 미국에 온지 3년도 안돼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폭소를 자아내고 박수를 받는 강연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승만은 생활이 빈궁한 가운데도 창백한 학생 이 되기보다는 미국학생 못지 않은 열성적인 대학생활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도 멋을 부릴 줄 알았다. 다시 말하자면 로맨스도 있었다. 그는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정구를 즐기고 워싱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경쾌히 달리기도 했다. 모자를 써도 비뚜로 쓰고 다녔다. "

캠퍼스의 자유를 나름대로 만끽하며 미국사회의 자유를 호흡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인을 상대로 탁월한 연설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타고난 연설능력도 크게 도움이 됐다. 이미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기전 독립협회 회원시절 만민공동회등을 통해 명연사로 이름을 날린 바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승만의 연설은 떨림이 강한 노정객의 담담한 목소리 정도이다.

그러나 청년시절 이승만의 연설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생활 시절 그의 연설에 관해서는 몇가지 증언이 전한다. 이승만의 친구이며 고문이었던 올리버박사는 "그의 목소리는 보통 이상으로 울리고 달콤하며 음정의 폭과 변화가 풍부하다. 그의 얼굴과 몸동작은 동양인답지 않게 표현력이 강했다. 연사로서 그는 생동하는 표현기술보다는 박력있는 정열이 특징적이다"고 평한 바 있다. 기교보다는 내용과 열정이 강했다는 말인데 이는 이승만의 한시에 대한 평가와도 일치한다. 이승만은 대학에 다닐 때 두 가지 슬픔을 겪는다. 하나는 그를 지원하고 밀사임무까지 맡겼던 민영환이 1905년 11월 한일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해 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국내에 믿을 만한 끈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감옥에서도 데리고 잤던 외아들 태산(일명 봉수)의 죽음이다.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때 태산은 1905년 6월경 박용만과 함께 미국으로 온 것같다.
" 나의 아들이 왔다. 박용만씨가 그를 한국으로부터 데려왔는데 나는 필라델피아의 어떤 가정에 그를 맡겨야 했다. 거기서 그는 죽고 말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청년 이승만자서전)여기서 어떤 가정이란 이승만이 대학에 다니면서 방학때면 가서 쉬곤 하던 보이드부인의 집이다. 보이드부인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지극한 관심을 보였던 선교사 조지 h 존스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가 친하게 된 사람이었다.

이승만이 처음에 아들을 데려올 생각을 했던 것은 1905년 6월까지만 해도 김윤정과 사이가 좋았고 또 김윤정의 가족들이 미국에 와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산은 그래서 처음에는 김윤정의 집에 있었다. 이때 태산의 나이는 8살 안팎이었던 것 같다.



 미국인에 아들맡겨

그러나 이승만과 김윤정이 갈등을 빚자 곧바로 워싱턴의 한 부잣집으로 태산을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자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의 보이드부인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1906 년 2월24일 밤11시 반 그는 보이드부인으로부터 태산이가 위급하다 는 전보를 받는다. 바로 역으로 갔으나 열차는 이미 없었고 다급해진 이승만은 전보로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경과를 지켜보자는 답신이 왔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던 그에게 25일 오후2시 다시 보이드부인으로부터 태산이가 위독하니 내일 3시20분까지 오라 는 전보가 왔다. 그는 그날 밤 9시30분 열차로 떠나 26일 새벽2시30분경 보이드부인집에 도착했다. 보이드부인은 이승만에게 "디프테리아로 사흘동안 누워있다가 시립병원 격리병실에 입원시켰다"고 말했다. 날이 밝자마자 이승만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태산은 이미 하루전에 죽어 화장까지 끝난 상태였다.

6대독자였던 그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그의 비망록 1906년 2월25-26일자에는 별다른 언급없이 그냥 이렇게 적혀 있다. "

2월25일 오후 7시 태산이가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었다. "
"2월26일 노드필드화장터에서 태산이의 장례를 치렀다. "<이한우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8)-하버드대 석사시절 

하버드대 석사시절(거대한생애 이승만 90년 8)
? "일본은 서구의 적 한국독립시켜 견제해야"
? 유럽외교-국제법 몰두 친일 미국인과 논쟁
? 덴버 해외동포 독립대회서 의장에 첫선출
? "암살은 국권회복 도움안된다" 장인환-전명운의사 스티븐스 암살재판 통역거절


발행일 : 1995.02.03 / 13 면 기고자 : 이한우


1907년 6월5일 조지 워싱턴대학을 졸업한 이승만은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당초의 목표대로 귀국해 기독교교육에 힘쓰는 한편 국민계몽활동을 다시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미진하다고 생각되는 서양학문을 좀 더 공부한 다음에 귀국할 것인지였다.

부친이 귀국만류

이무렵 부친은 너의 정치활동과 견해가 일본 관헌을 노하게 했기 때문에 당분간 귀국을 않는 것이 좋겠다 는 요지의 편지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당장 귀국한다고 해서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 계속 남으려해도 생계문제가 걱정이었다. 그를 지원해 준 감리교 선교부의 귀국종용도 부담스러웠다. 감리교측은 이제 이승만이 귀국해 한국선교의 모범사례 로 현지전도사로 활동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결심과정에 특별한 사건이 동기로 작용했던 것같지는 않다. 대학공부를 하고나니 서양학문이 생각보다 깊고 넓어서 좀 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이 이 무렵 상당히 초조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학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06년 12월부터 1907년 1월 사이에 그가 하버드대 관계자들과 주고받은 여러차례의 서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이승만이 하버드대측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주로 우리나라의 사정이 급박하니 바로 박사과정에 입학을 허락해준다면 2년만에 학위를 받도록 하겠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실패하고 결국은 1907년 9월 하버드대 석사과정으로 입학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도 지방신문 에스베리 파크지와 뉴욕 모닝 포스트지에는 이승만인터뷰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언론을 이용한 한국독립호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한국인은 개인으로서는 결코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열강국은 일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해서 극동에 있어서의 상업상의 권익이 방해될 것을 우려하고 한 마디도 정의에 입각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전체가 일본에 독점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런 식의 적당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

이승만이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천 애드버케이트지 a b 레너드 주필에게 그가 항의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레너드주필은 친일인사로 동양을 여행하던 중 한국을 며칠 방문하고 온 뒤 이승만이 항의편지를 보내기 얼마전 뉴욕의 오션 그로브강당에서 "일본은 지금 한국을 개혁하고 있으며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통치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연설을 했고 이를 안 이승만이 즉각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할 수 있었던 항일운동의 주요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친일성향의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항의와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인을 상대로 한 이승만의 논리는 치밀하고 일관된 것이었다. 뉴욕 모닝 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밝힌 대로 일본을 방치해 둘 경우 서방의 친구가 되기보다는 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억압하에 있는 한국을 독립시킴으로써 견제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 는 것이었다. 이같은 논리는 아주 일찍부터 갖고 있었고 죽는 그날까지 그대로 견지했던 그의 극동관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제 신학보다는 세계정세와 서구문화의 역사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어를 배워 서양책을 번역하겠다 던 대학시절의 포부는 바뀌어 서양문물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하는 쪽으로 관심이 기운 것이다. 이는 그가 대학원 시절 수강했던 과목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석사 1년에 끝내

"그가 선택한 학과에는 헌법이 채택되기 전까지의 미국역사,유트레히트평화조약부터 현재까지의 유럽역사,유럽 국가군의 팽창주의와 식민지정책에 관한 특별과목 등과 경제학 방면에 있어서는 19세기 유럽의 상업 및 산업에 관한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그는 국제법과 중재론 및 미국외교정책을 배웠다. "(이원순씨의 전기 인간 이승만 )

그러나 그의 성적은 대학때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대부분 b나 c학점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은 아닌 듯하다. 우선 석사과정을 1년만에 끝냈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당시 미국대학의 교육이 철저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성적만으로 그가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고 판단을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실제로 각종 전기나 자료를 보더라도 석사과정때 이승만은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것같다.

"동양적인 지식배경을 가진 학생으로서는 이런 학과는 거의 새로운 것이었으며 이것을 숙달하기 위해서는 밤중까지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재학중에는 연설도 중지하고 학우와의 새로운 우정도 맺지 않고 대학의 사교생활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원순씨의 전기 인간 이승만 )

1908년 1월1일 박용만,이관용등이 주동이 돼 같은 해 여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열기로 발의한 것을 보아 이 행사와 관계된 여행이었던 것같다.

애국동지대표자대회는 사분오열돼 있던 교민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회는 발의한 대로 7월11일부터 15일까지 덴버시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모두 36명으로 미국 각지역과 하와이,블라디보스토크,상하이,런던등 세계 각지에서 온 위임대표들이었다. 이 행사에서 결의한 사항들은 그 지역신문인 덴버 리퍼블리칸지에 보도됐는데 주요내용은 재외한인단체들의 통합 양서의 한문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 설립 세계정세에 관한 서적의 한국 배포 등이었다.

스탠퍼드대 데이비드 스타 조던총장이 개회사를 맡았던 이 행사에서 이승만은 박용만의 지원을 받아 의장으로 선출됐다. 여기에는 그의 과거 경력과 하버드대를 다니고 있다는 점이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폐회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현재 정치인들은 한국이 일본과 싸워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의 희망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적 특징과 민족적 특성을 연구해 본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뛰어난 데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4천년 이상 민족의 특성과 완전한 독립을 보존해왔으며 어떠한 국가도 결코 지구에서 말살되지는 않을 것이다. "

민족의 장래에 대한 낙관론은 이승만사상의 근저에 언제나 깔려 있었다. 교육과 계몽에 그처럼 집착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낙관론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절 그는 교민사회에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그 발단은 스티븐스 암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온 후 다시 학업에 몰두하던 1908년 3월23일에 일어났다. 공립협회 소속의 장인환의사와 보국회원 전명운의사가 공교롭게도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었던 친일인사 d w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역에서 사살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교포와 국내 인사들의 지지는 열화와 같았다.

재판이 시작되자 공립협회와 보국회는 힘을 모아 네이던 코글턴,존 배럿,로버트 페럴등 3명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문제는 통역이었다. 미국한인의 실상을 소상히 전달하고 있는 김원용씨의 재미한인 50년사 를 보자.

" 이때 한인중에 영어하는 사람이 귀해서 통역이 곤란하던 까닭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을 통역으로 청하였다. 이승만은 7월16일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관계로 오래 있을 수가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이것만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그의 처사가 올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친일인사를 처단한 것에 대해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승만은 어떤 생각에서 통역요청을 거절했을까. 그의 자서전의 한 구절이다.



 한인사회 불만산듯

" 그리고 그 겨울에 2명의 한국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세인트 프란시스호텔 앞에서 사살했고 바로 그 전에 한국의 애국지사 안중근이 시베리아의 하얼빈에서 일본의 거물정치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했다.
스티븐스는 어버린대학의 졸업생이었고 미국에서는 퍽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 청년 이승만자서전 )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 이승만은 잇따른 암살사건이 한국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식을 흐리게 하고 결국은 한국의 독립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다소 답답해보이면서도 지극히 서구적인 가치기준에 입각한 이승만의 이같은 사태인식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승만은 두 사람에 대한 변호통역제의를 단호히 거절한다.

여기에서 기독교인이라든가 동부에 사는 그로서 서부에 수시로 와서 통역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부차적 요인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에 암살은 그 명분이 어떠하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이런 엉거주춤한 태도에 대해 한인사회의 불만은 높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올바르다고 믿었다. 그가 오랜 정치역정에서 받게 되는 비판이나 오해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한우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9)-프린스턴대 박사과정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한국대통령 시리즈 9)
? 미 대통령된 윌슨총장과 친교
? 가족음악회 초대받는 등 사교모임 즐겨
? 나중 항일-정치활동 자산 미 인맥 구축
? 망국 소식듣고 사흘간 식음전폐 통곡 학위받고 비장한 각오 귀국길


발행일 : 1995.02.08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1908년 8월 하버드대에서 석사과정을 끝낸 이승만은 또 고민에 빠졌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는 더 남아 있을 것인가.

" 나는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나의 성격을 아는 부친은 나더러 조금만 더 있으라고 편지를 써보내왔다. 그 흥분된 시기에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결과를 불문하고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른다. "(이정식 역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승만이 귀국을 하고 싶었던 이유중에는 하버드대 시절이 너무나 힘들었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다고 해서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더 있으면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그는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 기숙하면서 신학수업을 듣는 한편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을 밟을 요량으로 우선 청강을 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이승만은 우연히 장로교 해외선교부 사무실에서 한국에 있을 때 안면이 있는 어니스트 f 홀목사를 만난다. 홀목사는 이승만이 한국에 있던 무렵 선교사로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홀 목사는 오랜 만에 만난 그에게 "요즘 무얼하며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자신의 근황과 장래목표를 얘기하자 "당신은 유니온신학교에 가서는 안되오. 프린스턴으로 오시오"라고 권고했다. 아마도 이승만은 종교사업보다는 정치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을 말했던 것같고 그 때문에 홀목사도 이런 권고를 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홀목사의 권고에 대해 "나도 뉴욕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프린스턴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신학엔 뜻없는듯

얼마후 이승만은 홀목사가 프린스턴에서 보낸 속달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기차표와 기차시간표 그리고 프린스턴역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프린스턴으로 떠났다.

홀 목사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승만이 나오자 바로 그를 데리고 프린스턴대학으로 갔다. 거기서 이승만은 프린스턴신학교장 찰스 어드맨교수와 프린스턴대 대학원장 앤드류 웨스트교수를 각각 만나고 면접을 거쳐 입학 승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프린스턴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신학교에서 신학과목 일부를 듣는 한편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전후사정을 고려해 볼 때 이승만은 신학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기숙사의 편의를 제공받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프린스턴대 시절은 유학생활 중에서 이승만에게 가장 의미있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를 이승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즐거운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여러사람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나의 그 후의 생애에 있어서도 참으로 귀중한 존재들이었다. "( 청년 이승만 자서전 )

다른 자료들을 보더라도 프린스턴시절은 이승만의 정신세계를 급속도로 심화시켰다. 경제적 부담도 거의 없었으며 수많은 친구와 교수들을 깊이 사귀게 됨으로써 그후 그가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을 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일급자원들을 대부분 얻게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로서는 홀목사와의 우연한 만남이 인생에서 몇 안되는 행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 시절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사람중에는 앞서 말한 어드맨 교장, 웨스트 원장을 비롯, 뒤에 미국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 총장과 그의 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이승만의 투옥 경험, 한국에서 기독교 교육에 힘쓰고자 하는 목표, 한국독립에 대한 열정등을 보면서 상당한 애정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재학시절 2년 동안 신학생들의 기숙사인 캘빈 클럽에서 일체 무료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드맨 교장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진 않지만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어드맨 박사는 나에게 그렇게도 친절했다. 그가 나를 위해 베풀어준 몇가지의 혜택은 내가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웨스트원장에 대한 기억도 매우 호의적이다. "웨스트 대학원장도 나에게 헌신적인 친구가 되어주어 내가 대학원 과정을 성공적으로 밟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돌보아주었다. "

그러나 이승만이 프린스턴을 다니게 됨으로써 맺은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역시 우드로 윌슨 총장과의 친교일 것이다. "윌슨 총장과 그의 가족이 나에게 그렇게 친밀한 친구들이 되어주었고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그들이 한국과 한국선교에 대해 보여준 관심이었다. 그들은 나를 격려해주었고 내가 준비하고 있던 사업에 대해 희망을 주었다. "



 강연회 추천도

이승만을 위해 윌슨이 1908년 12월15일 강연회를 열 수 있도록 써준 추천장을 보면 윌슨이 이승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이승만씨는 프린스턴대학원의 학생이며 우수한 능력과 고결한 성품으로 우리들에게 호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놀랄만큼 자기나라인 한국의 현상황과 동양의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서도 정통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세를 일반 청중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개진했습니다. 그는 애국심이 강한 청년으로 동포에 대해 열렬하고 유익한 일꾼입니다.

동양에 있어서 연구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 미국의 권익을 직접적으로 배우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나는 기꺼이 그를 추천합니다.

윌슨부인과 세 딸은 동방의 외딴 나라에서 온 이 건실하고 똑똑한 학생에게 따뜻한 애정으로 대했다. 윌슨의 가족들은 벽난로주변에서 정담을 나누거나 피아노 주위에 모여 가족음악회를 열곤 했는데 이승만은 이런 자리에도 종종 초대되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테니스도 즐겼고 기숙사 학생들의 사교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물론 다른 동료들에 비해 10살 가까이 많은 33살의 늦깎이 이방인 학생이다보니 마냥 즐겁게 같이 놀 수는 없었겠지만 비교적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리에서 이승만은 주로 한국의 민요를 불렀다고 한다.

이승만은 2년만에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데 그것을 보면 박사과정 때도 공부는 매우 열심히 한 것같다. 1908년 첫학기에는 국제법,외교론,미국사(상),1909년 봄학기에는 철학사,미국사(하)를 비롯해 국제법과 외교론을 계속 수강했다. 1909년 가을학기에는 1789년부터 1850년까지의 미국사와 국제법을 공부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도서관에서 보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논문작성에 들어간 이승만은 1910년 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1910년은 한일합방이 되던 그 해였다.



 논문 대학서 출판

이 논문은 그후 웨스트 대학원장의 배려로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도 중립무역에 관한 권위자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논문의 인세로 1달러80센트 혹은 2달러25센트 짜리 수표를 받곤 했는데 그는 이를 쓰지 않고 한동안 기념품으로 보관했다.

1910년 6월14일 윌슨총장이 정계로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참석한 졸업식에서 이승만은 윌슨으로부터 직접 박사학위를 받았다. 웨스트 원장은 그에게 가운의 후드를 걸어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 으로서보다는 이승만박사 혹은 이박사 라고 부르는 바로 그 박사 학위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첫번째 국제정치학 박사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미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졸업식날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날이 나의 준비단계를 종말짓는 날이었는데 나는 슬픈 감정을 느꼈다. 한국은 내가 나가서 일을 하여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을사조약 이후 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장래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조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또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 친구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명문대에서 박사까지 받은 이승만이 그냥 미국에 눌러 살기로 결심했다면 그의 인생경로는 어떻게 됐고 대한민국의 장래는 또 어떻게 됐을까. 실제로 학부와 석사를 마쳤을 때마다 그랬듯이 이승만도 이 문제로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가 박사를 받은 직후인 1910년 8월29일 조국은 경술국치(경술국치)를 당해 사실상 없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3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부모와 헤어져 미국으로 올 때도, 미국에 온 외아들 태산이가 디프테리아로 죽었을 때도 삼켰던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을 결심한다. 합방 나흘 뒤인 9월3일, 그는 울적하면서도 비장한 마음을 안고 고국을 향한 장도에 오른다.

 

 <이한우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10)-그의 박사학위 논문

박사학위 논문( 한국대통령 시리즈 10)
? "외교는 힘 국제법 은 없다"
? 해상의 중립교역-역사 개관 "전문가"로 인정
? 정치-역사-경제 3학과서 이례적 공동 승인
? 한국의 독립유지 방안 모색서 출발한듯 카리스마 형성 영향준 학문적 성취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 국가간 전쟁때 중립교역은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데도 과거 저술가들은 이상적인 주장만을 되풀이
? 유럽 해상열강의 반대불구 미국은 중립교역에 큰 역할


발행일 : 1995.02.10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이승만은 철학박사가 아니다. 미국에서 흔히 박사를 칭할때 붙이는 phd, 즉 doctor of philosophy에서 직역해 잘못 이해한 것이 아직도 그런 오해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법 박사 다. 그것은 그가 다룬 논문이 바로 국제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구한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소위 만국공법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유지했다는 말이 된다.

그의 학위논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과거 박사학위가 너무나 드문 시절에 미국의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고 이승만의 카리스마 형성에도 큰 영향을 준 요인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무슨 내용으로 어떤 수준의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간혹 일부 식자들이 미국등지에서 구해 읽는 정도였다.
국내학계에서도 이 논문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국제법 전공의 한국방송통신대 정인섭교수가 학문적 차원에서 현재 번역을 진행중인 정도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승만의 학위논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탈신화화의 의미를 갖는다. 이승만은 생전에도 상당히 신비화됐던 부분이 없지 않았다.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신비화된 면도 있고 (이승만 관련 전기물중 우남노선 과 같은 책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실제로 일반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을 수없이 해낸데서 그렇게 된 면도 있다. 그가 해낸 비범한 일들 중에는 1910년이라는 시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도 포함된다.

만국공법 관심 결실

신화는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탈신화화된다.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차원에서도 그의 논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논문을 소상히 알 때 그후 그가 보여준 국제정세에 대한 탁견과 정치행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석사과정,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정부론,외교론,국제법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쏟아왔다. 이 점은 그의 성적표에 나타난 수강과목들을 보더라도 쉽게 확인된다.

먼저 조지워싱턴대에서 그가 수강한 과목은 논리학,영어,미국사,프랑스어,철학,천문학,경제학,사회학,서양사,고대어학 등이었다. 하버드대 석사과정에서는 헌법이 채택되기 전까지의 미국역사,유트레히트평화조약부터 현재까지의 유럽역사,유럽 국가군의 팽창주의와 식민지정책에 관한 특별과목, 19세기 유럽의 상업 및 산업에 관한 과목등을 배웠다. 그밖에 국제법과 중재론 및 미국외교정책을 공부했다.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배운 과목은 국제법, 외교론, 미국사, 철학사등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국제정치상황을 국제법과 외교를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관심이 줄곧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논문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의 논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해상에서의 중립교역의 역사를 개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문원제 '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혹은 중립론 이다.



 영세중립론과 달라

논문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이 논문의 중립 을 영세중립론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이승만의 논문에서 중립이란 오늘날과 같은 중립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상의 중립문제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립에 관한 이론을 다룬 것도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돼야할것이다.

우선 큰 목차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1장은 1776년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 중립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프랑스,스페인,러시아,프러시아,영국등 해상무역의 강국들을 중심으로 중립교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전시나 해상봉쇄시 상선의 법률적 지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2장은 1776년부터 1793년까지의 중립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사한 문제를 취급했다. 제3장은 1793년부터 1818년까지 중립의 역사로 크게 유럽과 미국의 사례로 나누어 중립교역에 관한 각국들의 법률적 조처를 정리하고 있다. 제4장은 1818년부터 1861년까지,제5장은 1861년부터 1872년까지 중립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주제를 선정했으며 이 논문을 통해 다루려고 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그가 제6장 논문요약에서 밝히고 있는 구절이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 우리가 이제 이해하게 된 바와 같이 초창기 국제법의 역사에서는 중립이라는 개념조차 성립될 수 없었다. 중립에 관한 초보적인 형태의 개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로마제국이 점차 몰락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휴고 그로티우스를 위시해 국제법에 관한 초창기의 저술가들은 중립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들의 견해는 중립이 발전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중립에 관한 그들의 사상은 모호하고 불충분했다. "

그가 모호하고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지극히 전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상세히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한 요점은 국가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제교역의 자유가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전쟁당사국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명백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저술가들은 이와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만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승만의 현실주의는 여기서도 확인된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받고난 뒤 윌슨총장이 베푼 리셉션장에서 윌슨에게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농담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윌슨의 질문에 그는 "공부를 하고 보니 국제법이란 사실상 강대국의 논리일 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동안 그런 것을 공부하라고 했으니 등록금을 돌려줘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는 것이다.

그의 논문은 이렇게 끝맺는다.

"유럽의 주요 해상열강들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세력들의 끈질긴 옹호에 힘입어 그 이전까지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중립교역의 성립에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

우선 논문의 학문적 성취는 교역상의 중립이 법률적으로 확립돼 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논증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도 한동안 중립교역 전문가로 불렸다.

물론 논문 어디에서도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가 하필이면 당시 일본의 속국이 되어가고 있던 조국의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중립 문제를 갖고 논문을 썼는지 그 이유는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청년기부터 열강들의 외교에 의해 유린당하는 한국의 처지를 보고 분개해온 그로서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한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을 것이고 그 중 하나로 우리가 중립국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당시 중립론은 그가 미국으로 가기 전 속해 있었던 개화파 일부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그의 논문 자체는 영세중립국이나 중립에 관한 이론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단지 교역상의 중립이라는 매우 전문화된 영역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 조국에 관한 문제의식이 없이 순전히 학문적 호기심만으로 중립문제를 연구했다는 것은 이승만의 전후 생애를 보더라도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아직까지 번역안돼

그의 학위논문은 국제법에 관한 논문이긴 하지만 그 성격상 역사학,정치학,경제학도 결부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세 학과로부터 공동승인을 받은 특이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도 번역되지 않았다. 단순히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아는데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20세기 들어 한국인이 이룩한 몇 안되는 세계학문에의 기여인데도 말이다.

이 논문의 완성은 그의 생애 전체에서 본다면 실천을 위한 준비기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이만한 학문적 성취를 배경으로 갖고 있던 정치인이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얼마나 있을까.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무렵 우리 국력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큰 지도자로서 아시아나 미국 등지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그 개인의 역량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가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정부론 국제법 외교론 등은 어쩌면 정치인이 되는 소양으로서는 당시 최고의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형성된 국제적 안목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되는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한우 기자>

[출처: safelee 엔파람 논객: http://www.nparam.com/]
소스:http://blog.daum.net/donaldyu/6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