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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삼선생님메일음악.문학향기

아버지 이원수작가 와 큰 따님 <수수꽃다리님>의 아름다운 삶 모습

 

아동문학가 이원수작가 큰 따님의 아름다운 삶 보기

아버지 이원수작가 와 큰 따님 <수수꽃다리님>의 아름다운 삶 모습

 

[ 손녀를 위해 만들어 주던 인형들 ,  어느날 이렇게 인형 뜨기 강사가 되었습니다.]

                                                                                              

경인방송에서 런앤런 강좌 탐방 온 날.              

으랏차차 6 /17일 방송                                  

 

.

 

임산부들의 태교를 위한 중급반 수업

 

  

   

 

 

 

 

“고향의 봄 도서관”

 

 

 

 

 

 

 

이 이색적인 이름의 도서관은 창원에 있다(창원시 의창구 평산로 135번지 32) 이

도서관은 우리시대 애국가 보다 더 많이 불렀던“이원수”의 동시<고향의 봄> 을

지은 이원수 도서관 이란 말이 더 맞다...우리가 의흥중학교 시절 졸업식노래 가

미쳐 만들어 지지 않아서 이원수 의 고향의봄. 목청고운 아이들이 불렀고

우리도 졸업식 노래인양 따라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는 가고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문학은 살아서 홈페이지 도 있다..

그기에 의하면 이원수님은 1912.1.5에 경남 양산읍 북정리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서 10개월후 창원읍 중동리 100번지로 이사 해서 10년을 사시다가

1922년 에 마산오동동 으로 이사해서 마산 공립보통학교에 다니

면서 <고향의 봄> 을 지어신 것인데 이때 나이가 15세 소년..불과 열다섯..

 

그님은 태어나기는 양산에서 했어나 핏덩이? 시절10개월만 그곳에 있다가..

창원으로 이주하여 소년 시절을 창원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정신적인 고향은

창원인 셈이고 <고향의 봄> 무대 역시 창원이 였을 것이다...그러니 마산에

살면서 <고향의 봄>을 쓴 것이되고 마산에 비해서 작고초라한

시골 창원시절의 정경을 그려 낸 것이 <고향의 봄>이다.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창원..노래를 쓴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마산 보다 작고

그야말로 보잘것 없는 곳이지만 문밖 흐르는 개울과 꽃들 냇가의 수양버들,,

그런것 들이 가슴에 남아서 그리움을 일으키고..또 그때가 정말 즐거웠으리라..

마치 내가 남보기 초라한 고향 의흥 이라도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 하는것 처럼..

 

그의 창원시절은 소답리 라는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녔다고 하며 보통학교는

마산에서 다녔다..15세 소년 그것도 초등학생이 지은 <고향의 봄> 애국가 보다도

더 많이 불렀고 지금도 조금 옛 사람은 <고향의 봄>을 즐겨 부르며 나도 때로는

흥을덴다.<고향의 봄> 불러서 좋고 들어서 좋은노래..<고향의 봄> 이 노래를

부를때 마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내 고향의 향수에 젖는다..

 

 

잠시 창원으로 가 보기로 마음한다..여기(부산) 에서는 지척의거리이니..

이원수문학관홈페이지 부터 사전 답사를 해본다...답사전 사전준비 차원에서..

사전준비 없이 현지에 도착하면 답사의 열매를 거두기 힘 들기 때문이다..

새대가 좋아져서 웬만한 곳은 모두 홈페이지가 있으니 편리하다

홈페이지가 없는 곳은 인터넷을 통한 검색이라고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원수 문학관”의 홈페이지를 보니 놀랍다..그 홈페이지에 경력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에 1942년 그러니 해방전 그가 지은 친일적품“지원병을

보내며”가 있고 구 내용도 실려있다..사실 유명인사 들이란 특히 문학분야의

사람들 생가찾기를 좋아해 여러사람들의 생가를 찾거나 홈페이지를 보았지만

버젓이 내가 친일 작품을 발표 했소..하는 분은 못 보았기 때문이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들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모두가 친일행적을 은폐 또는 왜곡 아니면 합리화 하려 기를 쓰는 많은 분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친일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는 점..현기증이 날 정도가 아닌가...

그가 평생 친일작품을 쓴건 모두 다섯편..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고 반성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만일 이 사실을 숨겼다면 이원수 문학관은 찾아볼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친일작품을 쓰지 않았다면 말할수 없이 좋았을 것이나!! 이런 이원수라는

분은 15세 때에는 일본인들을 욕하는 학급신문도 내었고 한참후(1935) 년에는

반일모임인 독서회 사건으로 1년동안 투옥 되기도 했는데..그가 친일 작품을

발표 하고 만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그 후 해방이 되고 난후 그의 행적을

비쳐 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참회한 것인가를 알수 있다.

 

4.19.혁명이 일어난 동기가 된 3.15. 마산 부정선거 파동을 아무도 개탄하는

작품을 발표 하지 않은 시점에 유일하게 이를 개탄하는 작품을 내 놓았고..

박정희 군사독제 정권 때는 전태일열사의 사건을 작품화한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로서는 글 줄이나 쓰는 사람들이 몸을 사리고 있던 그 시대였고 한참지나

신변의 안전이 보장될 무렵 너도 나도 나선 것을 우리는 안다..속보인다..

 

일제말기에 저지른 친일 행적을 철저히 반성 하고..그 죄를 갑기위해 지난세월의

몇배나 되는 동안 아니 그의 한평생을 겨레의 장레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내놓아..

갚아간 것이다. 그의 집안은 보잘것 없는? 목수 집안이며 그나마 그가 초등학교

4학년(14세) 때 그의 부친이 사망하고 살림이 풍비박산이 났고 가난의 굴래가 덧

시워젔다.

 

모친은 땔감 구하는 나무꾼으로 전락하고 그의 누이들은 공사장 노동을 하다가 끝네는

기생이 되고..그 기생을 하던 누이가 반일 사상가의 후실이 되어 그를 마산 상업고등

학교 입학시켜 수학하게 하고 학비를 데었고..졸업후 금융조합 서기로 1년..다음을

감옥생활 1년 감옥에서 나와 편지를 주고 받아 인연을 쌓은 “최순애” 와 결혼을 한다..

 

“최순애 그는 누구인가? 이 여성은 13세에 <오빠생각>을 쓴 여류 문학가 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아동문학가 부부가 탄생했다'고들 이야기 한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최순애”는 부잣집 여식이다..최순애가 가난한 이원수와 결혼한 것은 우리만의

정서 순정탓일 거다..기생집과 노동판으로 전전하며 학비를 데던 이원수의

누이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기는 했으나 그의 환경은 가난의 연속이였고

공납금(월사금) 을 내지 못해 쫓겨나기도 했고..

그 채험이 18세 되던해 발표한 동시 <헌 모자> 이다.

 

학교 마루 구석에

헌 모자 하나

날마다 혼자 남는

헌 모자 하나

 

학교 애들 다 가고

해질녘이면

가고 없는 주인이

그리웁겠지

 

월사금이 늦어서

꾸중을 듣고

이 모자 쓰지도 않고

나간 그 동무

 

지금은 어디 가서

무얼 하는지

보름이 지나도록

아니 옵니다

 

또 월사금이 소재가 된 작품

 

'월사금이 없어서 학교 문밖에

나 혼자 섰노라니 눈물만 나네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 어머니

쫓겨온 날 보고 또 울겠구나'

 

이와 같은 일들은 우리도 겪은 일이며 그 당시는 당연시? 되었고..고학으로 노동으로

어렵게 학비 마련이란 과제가 어렵고 난해한 문제이던 그 시절 그런 시절을 산 우리가

볼때는 그 학창시절을 보낸 맺힌 추억을 살려주는 작품이 아닌가?? 이런 경험이 감성이

깊은 이원수를 만났으니 주옥같은 작품이 나오고 오늘 이를 보는 내눈에 이슬이 맺히고

가슴은 추억으로 출렁인다..

 

그런가 하면 이원수는 고생하는 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애환도 노래했다. 제목은 <찔레꽃>.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언니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따 먹는

꽃이라오

 

광산에서 돌 깨는

언니 보려고

해가 저문 산길에

나왔다가

 

찔레꽃 한 잎 두 잎

따 먹었다오

저녁 굶고 찔레꽃을

따 먹었다오

 

“이원수”그는 일제시 다섯편의 친일작품을 발표한 잘못을 저릴렀지 만..

그후(해방후) 한차례도 권력에 아부하거나 빌붙어 살지 않은 이원수..

우가 이이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나는 그를 찾아 창원에 온것이고 ‘

고향의 봄 도서관’내 이원수 문학관을 찾아간다..

오가는 길 도롯가 코스모스는 망우리지고 큰키를 바람에 흔들 흔들 한다..

 

“사진은 이원수 문학관 에 게시된 것 들을 퍼 온 것 임”

 

 

                       

 


♬ 리틀에인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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