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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든든한 버팀목


국가의 든든한 버팀목.08212016.hwp


국가의 든든한 버팀목, 義人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새마을운동의 숨은 공로자이면서 우리나라의 강산을 푸르게 만든 주인공

마연옥 기자 | nojin21@hanmail.net 승인 2014.09.02 12:22:50

 

의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만, 소인배와 간신배는 국가와 민족보다 자신의 이기심인 사리사욕을 앞세운다. 우리나라는 1950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당시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세계사상 유래없는 고도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민주화도 성공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무역규모 1조 달러 세계 8위 무역대국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루기까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5.16 혁명의 주역이면서 국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던 의인이 있다. 새마을운동의 숨은 공로자이면서 우리나라의 강산을 푸르게 만든 주인공, 그가 바로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이자 대한민국헌정회 원로의원이다.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은 "지금도 나라를 생각하면 잠 못 이루는 날이 많다"고 말했다. 북한 김정은이 내려보낸 화환을 현충원에 버젓이 비치해놓는 작태, 또 국민들의 안일한 안보불감증을 생각하면 하루도 마음 편안할 날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근황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건국절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추진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대체로 사람이 태어난 날은 생일이고 학교가 개설된 날은 개교기념일인데, 대한민국에는 나라가 탄생한 날인 건국절이 없다는 것.

 

장 전 부의장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탄생과 정부수립은 우리나라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임에도 이를 소홀히 취급하다 보니 건국을 부정하게 되어 국기를 위태롭게 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다"고 하면서 "건국절 제정에 국민 모두가 참여해 1000만 명 서명운동을 힘차게 벌여 위대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며, 국회는 마땅히 앞장서서 건국절 제정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소련이 휴정협정 체결하려하자 이 대통령 강하게 반대

 

한미방위조약위해 반공포로석방을 단행, 미국 상대로 한 승부수

 

그러면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도 뛰어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이승만 대통령은 하늘이 내려준 위대한 전략가이자 지도자"라고 덧붙여 말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당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와 정면대결하면서 국익을 위해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이 이루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으킨 경제부흥도 튼튼한 안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강조했다.

 

1951년 6월 유엔주재 당시 소련대표 말리크가 돌연 정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민족의 염원은 통일”이라며 일축했다. 그럼에도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소련이 서둘러 정정협정을 체결하려하자 이 대통령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 대통령은 국군단독으로 북진통일하는 방안과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두 가지 히든카드를 빼들었다. 당시로서는 북한의 재침략을 막아 국가안보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북한에 돌려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포로송환협정을 무시한 채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중국이나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전격석방을 단행했다. 그러자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는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으며 이 대통령을 빗발치게 비난했다. 이는 이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서 추호도 흔들림 없이 미국은 물론 세계를 상대로 벌인 승부수였다.

 

결국 미국은 이 대통령의 협조 없이는 국면전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마침내 정전협정 발효가 가능해졌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상황

 

현재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은 자유수호국민운동 총재를 맡고 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극심한 충격과 허탈감을 빠진 그는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났다. 그렇게 정치현장에서 깨끗이 물러나 은둔자로 자기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의인다운 결기에서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를 놔두지 않았다. 주위의 요청에 못 이겨 2002년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2003년에는 제13대 헌정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2년 4월, 집안 일로 미국에 가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재미교포 지인인 안교명 예비역대령이 인터넷에 뜬 글을 보고 그를 만나자마자 "이러다가 대한민국 망하는 것 아닙니까"하며 몹시 걱정했다.

 

문제의 글은 전 주월공사 이대용 장군이 <월간조선>에 기고한 것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것으로서, 지금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 당시 적화통일 직전의 자유베트남보다 더한 국가안보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자유베트남의 경우 티우 대통령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고 국민의 불과 5%만이 공산당이었음에 비해 우리나라는 국가원수부터 좌경화 성향인 데다 국민의 9.7%가 친북용공 좌파이고, DJ 집권 이후 무분별한 대북지원으로 김정일 정권과 북한군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것. 게다가 우리사회 각 분야에 깊이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국민들의 국가안보의식이 심각할 정도로 흐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장 전 국회부의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늙은 한 몸 오로지 여생의 편안함을 취하고자 이 위기를 그냥 수수방관한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여정은 헛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이 구해준 항공편 탑승권을 가지고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목소리뿐 아니라 실질적인 힘도 발휘하는 강력한 반공단체를 조직해서 구국운동을 펼칠 작정이었다.

 

'7인 호국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

 

그는 귀국하자마자 흔들리는 국가정체성을 회복하고 적화위기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운동을 표방하며 동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흔쾌히 동참하기로 했다가 당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는 사람도 더러는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향력 있는 국군예비역 장성들로 구성된 '7인 호국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국의 방해로 장소를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헌정회에서 안보세미나를 한다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장 전 부의장은 주제발표 후 중간에 발언기회를 달라고 사회자인 양창식 위원에게 부탁했다. 그러면서 당시 유치송 헌정회장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사전에 얘기하지 않음으로써, 그 책임이 유 회장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2002년 4월 9일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6일에는 정치인, 학자, 종교인, 군인, 실업가 등 사회각계 인사 100인이 참여한 '자유수호국민운동' 발기인회를 구성하고 결의문을 공표했다. 다음날인 4월 27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거대한 음모의 실체!' 라는 제목의 광고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경각심을 높여주었다. '패망전야의 월남사회와 어쩌면 이리도 닮았습니까?' '김 대통령에게 남한 국민은 안중에 없습니다.' 등의 소제목도 크게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5월 27일 국회의사당 의원식당에서 마침내 '자유수호국민운동'이 정식 출범하게 된다.

 

 

백악관 만찬에 참석, 그리고 미 하원 군사분과소위원회 위원장인 웰던 의원과 만남

 

이틀 후 새벽 5시. 미국의 모 기관 관계자가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을 찾아왔다. 미국상원 인권위원회와 헤리티지재단의 초청 메시지를 전달하며 미국방문을 권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혼자는 갈 수 없으니 안보전문가인 지만원 박사와 같이 가야 한다고 전했다. 당시 지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다섯 번 고발을 당한 상태라 출국이 힘든 형편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장 전 부의장을 위시해서 지만원 박사 등 4명이 출국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니 부시 대통령을 위한 백악관 만찬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한국의 자유수호국민운동 출범을 초미의 관심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대중 정권의 친북 태도와 국가안보 해이에 촉각을 곤두세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만찬에서 많은 질문과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그때 안내역을 맡은 기관원이 "하원의 군사분과소위원회 위원장인 웰던 의원을 꼭 만나십시오. 큰 도움이 될 겁니다"고 장경순 전 부의장에게 귀띔했다. 그리고 기관원의 안내로 웰던 의원을 찾아갔다.

 

"내 나이 이미 팔십이 넘었으니,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어야만 이 일을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지금 생명의 위협을 적잖게 받고 있으니, 내 초청에 당신들이 한국에 한번 다녀가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내 뒤에 당신들이 있는 것을 알고 함부로 나를 해치지 못할 거 아니겠소."

 

그 말을 듣던 웰던 의원은 일주일 후 자기가 의원단 일행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을 순방하게 되어 있으므로 귀국길에 한국에 들르겠다고 흔쾌히 말했다. 방문 일정은 토요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했다가 월요일에 출발하니 일요일에 만나자는 것이다.

 

장경순 전 부의장은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귀국했으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호텔 여기저기 아무리 문의해도 미국하원의원들 예약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들과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모처에서 관련정보를 차단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써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에 부랴부랴 미국에 사는 딸에게 통화해 직접 웰던 위원 사무실에 전화해서 웰던 의원이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먼저 장 전 부의장을 찾도록 했다. 하지만 웰던 의원 일행이 서울에 도착하기로 된 토요일 오후가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장 전 부의장은 조바심이 나서 맥이 풀려 있는데 자정이 조금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정부쪽에 아무리 물어도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해 미국대사관 조직망을 통해 겨우 장경순 전 부의장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 5시. 웰던 의원은 DJ정부 막강한 실력자의 만찬 초대도 사양한 채 자기 일행을 데리고 장경순 전 부의장과 노재봉 전 국무총리, 정래혁 전 국회의장와 하얏트호텔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공동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상호협력방안을 진지하게 협의했으며, 웰던 일행은 다음날인 월요일 귀국길에 올랐다.

 

든든한 우방의 역할을 자임했던 미국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은 이러한 일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 12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워낙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대못’을 박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통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전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국민통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장 전 부의장은 "국방비 예산이 이스라엘은 GDP 6.8%, 미국은 감소추세에 있지만 GDP 4.6%에 이르고 있음에 비해, 우리나라는 GDP 2.6%에 불과하다"고 개탄했다.

 

이 때문에 우리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별로 곱지 않으며, 그쪽 안보전문가 그룹에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보수성향의 케이토연구소는 최근 홈페이지와 포브스를 통해 "이제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미국의 안보공약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복지의 여왕(Welfare Queen)'이라고 비유한 논평도 보이는데, 복지의 여왕이라는 말은 '정부 복지혜택을 받으며 캐딜락을 몰고 다니는 여성'에 비유하며 조롱하는 표현이다. 이는 한국이 자체방어력을 구축할 능력이 있음에도 국가안보에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7월에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할 이유가 없고, 전시작전통제권도 서둘러 넘겨줘야 한다"는 미 육사 출신 육군 정보장교의 블로그 글이 화제로 떠올랐다. 이는 그동안 든든한 우방의 역할을 자임해온 미국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국가재정여건이 좋지 않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한국에 대해 무언가 못마땅한 일종의 불신이 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는 갈수록 소원해지면서 중국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다가가는 우리의 외교행보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장경순 전 부의장은 한미관계에 있어서 많은 우려를 나타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보다 중국을 먼저 방문한 행보를 두고 나오는 반응으로 해석된다.

 

특히 장 전 부의장은 국가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 쓴소리를 했다. 그는 "대통령의 첫 번째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무게중심을 잡고 초지일관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혼란스럽고 불안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장 전 부의장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겼다"고 말했다. 당시 전교조, 시민단체 종북세력이 조직적으로 야권지원 선거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전교조로부터 세뇌되어 야당표가 많을 것이라 걱정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국민들의 여망을 잃지 않고 50대 보수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소신껏 일해야

 

박승춘 보훈처장이 2011년 취임하자마자 보훈처 안에 교육과를 신설해 안보교육을 강화해 젊은 보수층이 두꺼워지면서 여당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 장 전 부의장의 분석이다. 또 당시 야당이 우세하다는 여론이 돌자 안보위기감을 느낀 50대 이상이 89.9% 투표에 참여하면서 결국 승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 정부는 이러한 국민들의 여망을 잊지 않아야 한다거 힘주어 말했다. 소신을 가지고 50대 보수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군통수권자로써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해 우리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3년 안에 무력통일을 하겠다고 장담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제대로 대비를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젊은이들 중에 애국적 보수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상당히 고무적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특히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했다. 모든 불안요인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기대감을 내포하고 있다.

 

“산업화의 경우, 영국은 200년이 걸렸다면 미국은 180년, 일본은 100년이 걸렸으나, 하지만 우리나라는 30년 만에 산업화를 거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IMF가 닥쳤을 때 전국민이 똘똘 뭉쳐 금모으기운동 등으로 극복하는 무서운 저력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렇게 강조하며, 오늘날 전반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름의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내비쳤다. 그 비결은 바로 '새마을금고'라는 것.

 

장 전 국회부의장은 국민통합과 자유민주통일에 헌정회가 적극 나설 것을 내비쳤다. 헌정회가 나서면 10년 걸릴 것이 5년으로 단축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장담했다. 따라서 헌정회가 앞장서자고 이미 만장일치로 가결한 상태라는 것. 현재 헌정회에는 역사바로세우기위원회, 통일위원회, 국토보존위원회 등 분과위원회가 있다.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은 192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해 배재중학교를 거친 후 일본 동양대학 척식과를 졸업했다. 일제 때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고, 귀국해서 한때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육사 특별반7기로 군에 투신해 6.25 전쟁 때 김일성 고지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5.16군사혁명을 일으켜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농림부장관을 거쳐 5선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으며, 현존인물 중 세계유일의 공인10단 유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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