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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핵무장 위해 핵무기 개발해야 한다"는 미국 전문가 주장에 대한 중국 언론에서 부랴부랴 터져나온 반응(퍼거슨 보고서: 한국은 1년에 416발 제작 능력 갖췄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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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핵무장 위해 핵무기 개발해야 한다"는 미국 전문가 주장에 대한 중국 언론에서 부랴부랴 터져나온 반응(퍼거슨 보고서: 한국은 1년에 416발 제작 능력 갖췄음) #한국무기 #중국 #핵무기 195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것은 잘 아시다시피 핵무기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떨어진 두 방의 원자폭탄에서 전세계 모든 국가는 엄청난 희망을 엿봤습니다. “우리가 세계 패권을 잡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원대한 꿈이었죠. 그런데 미국에 이어 소련, 영국, 프랑스의 순차적인 핵개발 성공소식에 중국이 애를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중국은 이미 1950년대 초부터 핵개발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소련에게 손을 벌렸었는데요. 마오쩌둥은 소련의 흐루쇼프에게 핵무기 개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흐루쇼프는 어렵게 어렵게 개발한 핵기술을 공유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이라면서 핵우산 제공을 제안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소련이 중국을 배신했다며 노발대발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나빠졌고 국제적으로도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영원한 동맹일 줄 알았던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져버렸고, 미국은 중국의 해상을 봉쇄해버렸을 뿐 아니라 국경분쟁으로 인도와도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이면서 동서남북 그 어디도 안전하다고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55년 9월. 미국에서 한 중국인이 급거 귀국합니다. 40대 중반의 이 남자의 이름은 '첸쉐썬', 바로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미국 MIT공대에서 석사를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차 대전 당시 칼텍의 제트추진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V2로켓 기술까지 흡수하면서 당시 세계 최고의 로켓 기술자로 꼽혔습니다. 원래 중국으로 돌아올 계획이 없었으나 당시 미국에서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 가택연금 등 핍박했었죠. 당시 미국 정보 당국에서는 그를 두고 "첸쉐썬은 5개 군단보다 위협적인 인물"이라며 귀국을 반대했으나 공산주의자 취급에 지친 그는 결국 중국으로 귀환합니다. 중국에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소장계급을 부여받은 후 국방부 제5연구원장에 취임해 중국의 ‘양탄일성(兩彈一星)’을 성공시킵니다. 여기에서 양탄(兩彈: 2개의 폭탄)이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일성(一星)은 인공위성을 의미합니다. 1964년 10월 첫 핵실험 이후 1966년 5월 강화형 핵무기, 1967년 6월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해 ‘양탄’을 이뤄냈고, 1962년 장거리 미사일 ‘둥펑 1호’를 개발하면서 ‘일성’도 성공했죠. 그렇게 양탄일성을 이룬 후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됐는데요. 원래 미국은 당시 중국의 핵개발 소식을 접하고는 이를 저지하고자 핵처리 시설을 폭격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으나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칫 중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것도 걱정, 틀어졌던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걱정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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