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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국빈 여행기(中)

李承晩 대통령의 美國 國賓 旅行記 (中)

美 議會 연설 ② (9)

“自由 守護” = “共産 打倒” 美國의 腦에 새기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6·25전쟁 지원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 데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지휘관과 미군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찬사도 잊지 않았다.

 “여러분의 거룩한 애국 장병들은 맥아더, 딘, 워커, 아몬드, 리지웨이, 클라크, 헐, 테일러와 같은 장군들의 훌륭한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1951년에도 역시 훌륭한 밴플리트 장군이 제8군을 지휘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청년들의 군인다운 용감한 정신, 그리고 가정과 조국을 위해 싸울 테니 총을 달라는 그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밴플리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한국 청년들을 제주도ㆍ광주ㆍ논산ㆍ기타 여러 곳에 모으고, 주한 미 군사 고문단의 장교들을 보내 주야로 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 청년들은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렸습니다.오늘날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반공 군대로 알려졌습니다. 이 병력이 전체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에서 바로 대한민국 군대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병사들은 한국 육군을 강인한 ‘ROKs’라고 부릅니다. 이제 만일 미국이 이러한 육군 병력을 계속 증강시켜 주고, 공·해군력도 적절한 비율로 함께 증강시킬 수 있도록 원조해 준다면, 한국의 전쟁터에서 미국 병사들이 필요 없게 될 것임을 나는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서론을 끝낸 이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본론에 들어갔다. 나지막하던 그의 목소리는 강하고 생기가 돌았으며 그는 웅변가로 돌변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이렇게 한반도에서 대의를 위해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그 전투는 아직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폭정의 군대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선에서는 현명치 못한 휴전에 의해 포화가 잠시 중단되고 일시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적은 이 기회를 무력을 증강시키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네바 회담도 예견된 바와 같이 하등의 성과 없이 끝났으니, 이제 휴전 종결을 선언할 적당한 시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북반부는 소련이 조종하는 100만 명의 중국인 노예들에 의해서 점령·지배되고 있습니다. 적의 비행기들은 그곳에서 10분 이내에 우리 국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서울이 워싱턴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크렘린 내 음모자들의 최고 목표는 미국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련의 수소폭탄은 파괴된 우리나라 도시 위에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대도시에 먼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그 우방들이 소련의 공장들에 대해서 지금 폭탄을 투하해야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세된 소처럼 그저 서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전 세계의 자유 국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우리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길은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가 없을 때에 소망스러운 눈빛으로 평화를 기다리기만 하는 길이 아니며, 어떻게든지 소련 정부로 하여금 그 극악무도한 세계정복 노력을 포기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고 믿는 길도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말고, 세계의 세력 균형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움직여 설사 그들이 섬멸 무기를 소유하더라도 감히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고자 하는 전쟁─아시아를 위한 전쟁, 세계를 위한 전쟁, 지구상의 자유를 위한 전쟁─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에게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주고, 또 다른 2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을 충원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요청했습니다. 150만 명의 한국 청년들의 최고의 목표는 인간의 자유, 그들의 명예,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의 용감성은 전투에서 증명됐으며,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 병사들은 세계의 그 어느 군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언급한 이래 미국인 중에서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 역시 여러분에게 무장 병력 63만 명과 예비 병력을 위한 군사원조를 추가로 요청했습니다. 중공은 그들을 반대하는 150만 명을 학살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자유중국 게릴라들이 중국 본토 내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250만이라는 병력을 가지고 있으나, 군의 충성은 결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포로가 된 1만4369명의 중공군이 대만으로 가겠다고 한 반면, 중공으로 귀환을 택한 자는 불과 220명이었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중공의 경제 상태는 극도로 취약합니다. 미국 해군에 의해 중국 해안이 봉쇄된다면 중공의 교통망은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중공 정권에 대한 반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미국 해군과 공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미국 보병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중국 본토가 자유 진영의 편으로 환원된다면, 한국 및 인도차이나 전쟁은 자동적으로 승리의 귀결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력 균형이 소련에게 극히 불리하게 기울어져 소련은 감히 미국과의 전쟁 모험을 시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는 한, 자유 진영의 궁극적 승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소련 정부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 그 지상군과 공군을 투입하지 않을까요? 아마 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상군 투입은 오히려 자유진영을 위해 아주 잘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련이 수소폭탄을 대량 생산하기 전에 그 제조 중심지들을 미 공군이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세계가 지혜와 용기만 있다면 충분히 공산주의를 타도할 수 있다고 말하고 결론으로 돌입했다.

 “나는 이런 내 주장이 강경정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힘든 세계,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류 문명의 존립을 가름할 운명이 바야흐로 우리의 최고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이상과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합시다. 이러한 이상과 원칙들은 바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인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서 선양됐고, 그 후 절반의 자유, 절반의 노예 상태로는 생존할 수 없다며 연방 수호를 위한 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위대한 해방주의자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서 다시 주창됐습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반쪽짜리 공산주의, 반쪽짜리 민주주의 상태의 세계에서는 평화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자유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지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결정은 유럽ㆍ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에서의 세계 공산주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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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議會 연설 波紋 (10)

“위대한 애국자” vs “세계대전 경계” 甲論乙駁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을 했다는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영어로 작성해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연설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연설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론·본론·결론이 분명한 매우 설득력이 있는 명연설로 보인다. 그런데 근간에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저술에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이 연설을 한 다음 자신의 생애에서 최악의 연설이었다고 후회했다는 내용 일색이다. 이런 기록들은 필자의 고찰에 의하면 두 사람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는 이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교수, 둘째는 한표욱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정무공사의 기록이다.
 올리버는 그의 저술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1978)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그것은 대단한 연설이었으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내가 기자들에게 배포된 연설문 등사본에 계산한 바에 따르면 박수갈채로 연설이 33차례나 중단됐다. (중략) 연설은 매우 흥미진진했으며, 기본적으로 정당한 주장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만일 개인이 그런 연설을 했다면, 아무도 나무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의 의회에서 행할 연설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이 대통령도 인식하게 됐다. 다음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올리버 박사, 내가 의회에서 했던 연설은 일생 동안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네.” 올리버 교수는 이런 내용과 함께 이 연설이 향후 한미관계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으며, 미국의 위정자들이 이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고 그의 후계에 대해서 공공연히 언급하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책자 449∼450쪽)
 한편 한표욱 공사는 그의 저술 ‘이승만과 한미외교’(1996)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4년 7월 29일) 새벽 2시 반쯤 항규면 비서관이 나의 방을 노크해서 잠을 깼다. 이 대통령이 급히 찾는다는 것이었다. (중략) 대통령 방으로 갔더니, 첫눈에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이 라디오를 가리키며, 방금 방송에서 내일 아침 뉴욕타임스 지의 사설을 읽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가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비난한 것이다. 사설 내용은 이 대통령의 연설이 미국 사람들의 무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충동하고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자 227∼228쪽) 이승만 대통령이 과연 올리버 박사나 한 공사의 회고대로 의회연설을 일생일대의 최대 실수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올리버와 한 공사의 진술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들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에는 회의적이다.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의 회고는 의회연설이 행해진 지 24년, 42년 후에 이뤄졌다.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 공보처와 국방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대통령 각하 방미수행기’(1955),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1955), ‘Handbook of Korea’(1958ㆍ이상 공보처), ‘방미 이승만 대통령 연설집’(1954ㆍ국방부)에 실린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문은 무엇인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후회하는 연설을 정부기관에서 대통령의 재가 없이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을까?  둘째, 이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의 부정적인 사설을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한 공사의 회고도 의문이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1954년 7월 28일 오후 5시가 넘어서 끝났다. 당시의 신문 발행 시스템 아래에서 사실보도라면 몰라도 부정적인 사설이 실렸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궁금했다. 그래서 당일자 뉴욕타임스를 검색해 보았으나 문제의 사설은 찾을 수 없었다. 반면에 ‘Our Stand on Syngman Rhee(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내용의 독자투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려는 자신의 목표를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이번 이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환대를 우리의 동맹국이나 적들이 침략행위를 묵시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 틀림없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이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에 침략자 혹은 희생자가 공산주의자인지에 상관없이 침략에는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 글은 델라웨어 대학의 펠릭스 오펜하임(Felix Oppenheim) 조교수가 기고한 글로 작성일자는 7월 27일로 돼 있다. 즉, 이틀 전에 쓰인 글이 7월 29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것이다. 오펜하임은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듣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이 대통령의 7월 26일 도착 성명이든, 아니면 다른 발언을 보고 독자투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사설이 아니라, 논평란(Op-ed page:opposite the editorial pageㆍ사설은 보통 논설위원의 글이 무기명으로 실리는데 반해, 논평은 외부인사의 글이 기명으로 소개되며 둘은 대개 같은 페이지에 실림)에 소개된 오펜하임의 독자투고로 보인다.  이미 소개했듯이 이 대통령은 홍보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열정이 자칫 실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의회연설의 사례에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다양한 뉴스를 접하지 못하고, 7월 28일 밤 라디오 방송을 듣고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사설이 아니라 독자투고에 놀랐던 것이다. 한 공사의 말을 빌자면, 이 대통령이 3∼4시간의 수면을 취하고 7월 30일로 예정된 미국 외교기자클럽 연설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7월 29일 아침 9시에 워싱턴 생가를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건강이 걱정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통령ㆍ수행원ㆍ대사관 직원들이 조금만 침착하게 언론보도를 체크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믿는다. 사실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뉴욕타임스가 아니라, 7월 29일자 워싱턴포스트의 1면과 4면에 실린 장문의 기사였다. ‘이 대통령, 미국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요구(Rhee Calls for War on Reds Aided by U.S.)’라는 제목의 기사는 물론 쇼킹한 뉴스를 전했지만, 객관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어제 상하원합동회의에서 미국의 해군과 공군의 지원하에 한국과 중화민국 군대가 중공군을 공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매우 솔직한 어조로 그러한 전쟁이 ‘아마’ 소련으로 하여금 중공을 돕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이 수소폭탄으로 무장하기 전에 미 공군이 그 생산시설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세계로서는 썩 좋은 일이라고 천명했다.” “이 대통령은 연설하기 전과 하는 동안, 그리고 한 후에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시아에서의 대전쟁을 시작하자는 그의 제안에 대해 청중들은 완전히 몰입했으나, 모두의 말문을 닫고 조용함으로 일관했다. 의원들은 이 대통령에 대해 애국자이자 정치 지도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79세의 노 정치인이 23분간 무기에 호소하자는 데 대해서는 큰 경계심을 피력했다.”  “하원의장 조셉 마틴은 전쟁 제안의 대화조차 거부했으며, 알렉산더 윌리 상원의원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연설을 행한 위대한 애국자의 말을 들었다’고 논평했다. 해리 잭슨 상원의원은 ‘이 대통령의 제한적인 예방전쟁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브라이언 도른 상원의원은 ‘조만간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며 이 대통령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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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를 위한 만찬 (11)

호텔로 아이크 초청 - 貧國의 아버지는 당당했다

의회연설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저녁에는 아이젠하워 내외를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통상 국빈방문의 경우, 초청 국가의 원수가 먼저 만찬을 베풀고, 다음으로 방문국가 원수가 화답하는 만찬을 베푼다. 이 대통령의 만찬은 7월 26일 도착 당일 저녁,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베푼 국빈만찬에 대한 답례였다. 만찬회는 7월 28일 저녁 8시, 최고급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개최됐다. 백악관 인근에 위치한 이 호텔은 1925년에 최초의 영업을 시작한 후 오늘까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가장 오래 운영되고 있으며, 가장 화려한 호텔이기도 하다. 49년부터 52년까지 백악관이 개축할 때, 트루먼 대통령이 이곳에서 잠시 집무를 보기도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이 호텔은 98년 대규모 증축을 하고 이름도 르네상스 메이플라워 호텔로 바뀌었다.

참고로 이 호텔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우선 케네디 대통령(1917∼63ㆍ대통령 집무기간:1961∼63)의 여자로 알려진 쥬디스 캠벨 엑스너(1934∼99ㆍ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소개로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를 만나,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가 이 호텔에 장기간 투숙하며, 케네디 부인 재클린이 백악관을 비우면 백악관에 들어가 케네디와 정사를 벌였다.

 또한 모니카 르윈스키가 95년부터 97년까지 빌 클린턴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이 호텔에서 투숙했다. 2008년에는 뉴욕 주지사가 매춘부와 이 호텔에 투숙했다가 사임했다.

 필자는 워싱턴 근무시절,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동방의 신사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 호텔이 앞으로 이 같은 섹스 스캔들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더라면, 이곳을 만찬 장소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저녁 7시 45분,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자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부인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안내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만찬회에는 70여 명의 한미 양국 지도급 인사가 참석했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다른 각료들, 군과 관료, 의원들이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 및 우리 일행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연회장의 말 편자와 같은 U자 모양의 테이블에 70명의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다. 연회장은 거대한 양치식물과 야자수들,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다양한 색깔의 꽃들로 장식돼 있었다.

 이 대통령은 축배를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긴 연설을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미국 대통령을 아무리 누추하더라도 우리 소유의 건물인 대사관으로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절친한 친구들을 이렇게 많이 초대하기에는 건물이 너무 협소해 이곳 메이플라워 호텔에 만찬회를 마련했습니다. 이 호텔이 오늘 하룻밤은 한국대사관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선된 후 취임식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춥고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씨에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날뛰는 전쟁 중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대통령은 한국을 돕기 위해 1만 마일 이상을 날아왔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한국 국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같은 일을 해준 우리의 위대한 친구이자 위대한 대통령에게 자그마한 성의를 표시해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오늘 메이플라워 호텔을 우리 대사관으로 활용해서 조촐하지만, 그분 내외와 우리의 친한 벗들을 초대해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우리는 행복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어디를 가나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친구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분, 두 분이 오늘 밤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시고 우리를 격려해주신 데 대해 다시 감사드립니다. 잠시 워싱턴에 도착해서 내 마음속에 일어난 감회를 표현해야겠습니다. 어디에서건 미국 국민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거리에서, 그리고 우리가 어디를 가나 그들은 손을 흔들며 즉시 모여들었습니다. 이는 실로 감동적인 광경이었으며,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슴 벅찬 격려와 희망을 듬뿍 안고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 모두가 우리의 친구로구나 하는 느낌을 갖고 말입니다. 오늘 저녁, 내가 이 연회장 입구에 서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바쁘니 정말 피곤하겠다고 말을 건넸습니다. 나는 즉시 아니라고 대답했답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피곤하지 않은 법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우리 때문에 피곤하지나 않을까 우려돼 우리가 먼저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현 미국 정부의 건투와 성공을 위해, 미국의 번영을 위해, 지구상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를 위해 축배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어떻게 이루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지구상에 평화를 내려 주실 것을 기도하고 희망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장황한 연설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자, 신사숙녀 여러분,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의 건강과 성공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이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축배를 제의하면서 말했다.

 “때로는 상호 간에 의견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국민들은, 때로는 서로 간에 견해상의 차이를 보이지만 진정한 형제요, 참된 전우요, 함께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 전사들입니다.

 우리가 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논의하려는 것은 단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방법과 수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늘 예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의해 여실히 증명되듯이 우리가 목표를 잃지 않고, 모든 자유국가의 초석이 되는 기본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결국 독재는 사라지고 자유만이 존립하게 될 것입니다.”

 양국 지도자의 연설에 이어 김자경(1917∼99ㆍ소프라노 가수로 많은 성악가를 길러낸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던 한국 오페라계의 산증인)과 황재경(1906∼84ㆍ독립운동가, 목사, 미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 국악인, 만담가, 톱 연주자) 등의 연주와 전통 무용이 펼쳐져 행사의 즐거움을 더했다. 만찬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돼 밤 11시에 끝났다. 이 대통령 내외는 아이젠하워 내외와 호텔 현관까지 함께 가 전송한 후 숙소인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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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의 행보 (12)

조지 워싱턴 사적지 마운트 버논 방문

 7월 29일 아침 9시 20분, 이승만 대통령은 워싱턴 인근의 관광명소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을 찾았다. 워싱턴DC에서 남쪽으로 24㎞ 거리에 위치한 이곳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살던 저택과 농장, 그리고 그가 묻힌 곳이 있다.

 포토맥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은 조지 워싱턴 유저(遺邸)는 외국 원수들이 워싱턴을 방문하면 의례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며, 일반 관광명소로도 소문 난 곳이다.

 조지 워싱턴을 누구보다 흠모했던 이승만은 망명 시절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고, 내력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곳 관리인의 건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저택 내부를 둘러본 후, 이 대통령은 수행하는 한미 양국 관리들과 군 지휘관들을 건물 밖 잔디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옛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옆에 있는 미국 기자에게 말했다. “그때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일 것입니다. 당시 나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조국,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때였지요.” 그리고 다시 일행들에게 포토맥 강의 굽은 지점을 손으로 가리키며 과거를 회상했다. “저녁에 저곳을 지나는 배 위에 달빛이 근사하게 비추던 것을 보면서 고향생각이 절실했었답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일행을 정원으로 인도해 미리 준비된 장소에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붉은색 단풍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그곳 관광명소의 책임자에게 경고조로 말했다.

 “이 나무가 자라거든 ‘일본 단풍’이라는 푯말을 붙이지 마시오. 이 단풍은 난쟁이 같은 일본종과는 엄연히 다른 ‘한국 단풍’이라오.”

 필자는 2005년 이곳을 찾아가 이 대통령이 식수한 단풍나무가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월은, 그리고 권력은 그렇게 무상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마운트 버논이 아닌 워싱턴 시내에 이 대통령이 식수한 나무가 살아있는 것을 알고 위안을 삼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이었다.

 잠시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기로 하자. 1943년 4월 8일, 아메리칸 대학 교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4주년을 경축하는 기념행사가 열렸다. 주미외교위원부ㆍ한미협회ㆍ한미기독교친우회가 공동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300여 명이 참석했다. 물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주관한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당시 아메리칸 대학의 총장 폴 더글러스(Paul F. Douglass. 1905∼1988:이승만 대통령과 절친했던 인물로 1952∼56년 이 대통령의 고문으로도 활동)도 한미협회의 회원으로 참석했다. 행사 후 이 대통령은 제주도에서 가져온 벚꽃나무를 식수하고, 대한의 자유와 독립을 염원했다.

 1893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현재 1만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특히 국제관계학부가 유명하다. 바로 이 국제관계학부의 정원에 대한민국의 자유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벚나무 바닥에는 이 대통령의 식수를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아무튼 이날 마운트 버논에서의 공식 일정은 이 대통령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예전 망명시절 쓸쓸히 찾았던 이곳을 이제 대규모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시 찾았으며, 더구나 저택 입구에서 많은 미국인이 환영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특히 그곳을 떠나기 전에 어느 여인이 일곱 살 된 자신의 조카와 사진 한 장을 더 찍자고 우기는 바람에 공식 일정이 지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녀의 요구에 응했고, 한마디 말을 건넸다. “내게도 사진 한 장 부쳐 주세요.”

 알링턴 국립묘지 참배

 마운트 버논에서 출발한 이 대통령은 미국의 영웅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 알링턴 국립묘지로 향했다. 대통령이 도착하자, 21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이 대통령은 묘지 사령관의 안내로 준비한 화환을 무명용사 비석 앞에 놓고 잠시 묵념을 했다. 무명용사 묘에는 제1ㆍ2차 세계대전에서 산화한 무명용사뿐만 아니라, 6·25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용사의 묘표도 세워져 있었다.

 이 대통령은 이 국립묘지에 한국산 단풍나무 한 그루를 친히 식수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초 알링턴 국립묘지 방문을 영원히 기념하고, 6·25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산화한 영혼을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링컨 기념관 방문

 이어 이 대통령은 “링컨은 미국의 남북통합을 주창하고 싸워서 이뤄낸 인물이며, 이것이야말로 분단된 우리나라에 대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라면서, 예정에 없던 링컨 기념관 방문을 지시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기념관으로 올라가면서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한국의 비극을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남북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듯이, 다음과 같은 그의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이 소멸되지 않도록 다짐합니다’라는 연설이 오늘의 남북한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산 침략이 분쇄돼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념관에 들어선 이 대통령은 링컨의 대형 대리석 석조상 앞에서 2분 간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이어 출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그를 쳐다보던 관광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어느 여인은 눈가의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신께서 당신의 나라에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대통령은 발길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디를 가든 이 대통령은 주변에 있는 미국 시민들과 어울렸으며, 아마추어 사진사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고, 어린이들에게 자필 서명을 해 주었다. 이런 그의 행동 때문에 미국정부 경호관들은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 스타 신문사 방문

 유적지들 방문을 마치고, 예정대로 영빈관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대통령은 운전사에게 차를 시내 중심부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11번가와 펜실베이니아 거리 쪽으로 가도록 해요.” 워싱턴 스타 신문사를 찾아가 발행인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서양식의 의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이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자동차 행렬은 스타 빌딩 앞에 멈췄다. 대통령 일행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의 용적이 허용하는 한 빼곡하게 끼워 타고 6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워싱턴 스타의 사무엘 카프먼 회장 사무실로 불쑥 들어섰다. 그러나 카프먼 회장은 출타 중이자, 맥켈웨이 편집인의 사무실로 들어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깜짝 놀라는 편집인에게 이 대통령은 6·25전쟁 기간 중에 이브닝 스타 신문이 한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맥켈웨이 편집인은 뜻밖의 방문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 대통령의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망명 시절 사귄 야구 구단주 클라크 그리피스(Clark Griffithㆍ1869∼1955. 워싱턴 세네터스의 피처ㆍ매니저ㆍ34년간 구단주)의 자택을 예고 없이 찾은 것이다. 마침 그리피스가 없어 그의 부인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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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정상회담-아이젠하워와 不和 (13)

성명서 草案의 “韓-日 우호관계” 문구 보고 激怒한 老 大統領

 워싱턴과 인근의 사적지, 워싱턴 스타 신문,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야구왕이자 구단주인 그리피스 자택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즉 1954년 7월 29일 오후, 백악관에서 제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세계 정상외교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아이젠하워였고, 이유는 한미관계가 아닌 한일관계 때문이었다.

 지난 월요일(2011년 8월 1일), 일본 자민당 소속 중의원 2명, 참의원 1명 등 3명이 울릉도 방문을 강행하려다 김포공항에서 입국이 금지되고, 9시간 농성 끝에 되돌아가는 희대의 정치쇼가 벌어졌다. 이들은 독도문제를 이슈화하려는 천인공노할 노림수를 숨기지 않고, 이런 간악한 쇼를 벌였다. 우리가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정치쇼의 배후에 일본 정부와 국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57년 전으로 다시 돌리고자 한다. 우리나라, 아니 동서고금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만큼 일본을 잘 알고, 철저하게 항일ㆍ반일 운동을 했던 인물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 시절은 물론, 미국 망명에서 귀국한 후, 그리고 집권시절 반일의 선두에 섰다. 그의 반일은 반공보다 더 우선이었다.

 오늘 얘기는 그의 반일 사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2차 한미정상회담에 얽힌 비화다. 이 일화는 이 대통령 방미 당시 주미한국대사관의 정무공사 한표욱 씨의 회고록 ‘이승만과 한미관계외교’(1996)에 등장한다. 당시 그는 회담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참석자였던 양유찬 대사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이므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참고로 당시 공보처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회담을 전후해 한미 양국 대통령 사이에 불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한 가지 지적해 둘 것은 한씨는 회담일시를 1954년 7월 30일 오전 10시라고 적고 있으나, 회담이 개최된 일시는 7월 29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후에 공동성명이 발표되는 것이 보통이다. 제2차 한미정상회담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가 됐다. 문제는 미국 측, 구체적으로는 미 국무부가 우리 측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 대통령을 자극하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한 것이 문제였다. 즉 미국 측 성명서 초안의 제3항에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이 초안을 본 이승만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소 대한민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에 이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6·25전쟁 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너무 일본에 치중하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와 군사 원조를 강화해 아시아 자유의 확산 및 평화 구축의 보루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의 성명서 초안에 한일관계에 관한 뜻밖의 언급이 있었으며, 정상회담 1시간 전에 우리 측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는 국제관례상 문제가 있는 행위이며,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월권행위였다.

 이 대통령은 즉시 최순주 국회부의장, 손원일 국방부장관, 양유찬 대사 등 공식수행원들을 불러 모아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토로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 놓고 드디어 올가미를 씌우려는 작전을 시작한 모양인데, 이런 형편이라면 아이젠하워를 만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워낙 노발대발하는 어조였으므로 수행원 누구도 감히 입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대통령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회담 시간이 됐는 데도 백악관으로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총대를 멘 것은 손원일 국방부장관과 백두진 경제조정관이었다.

 “각하, 가셔야 합니다. 가셔서 싫은 것은 싫다고 말씀하셔야지, 가시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대통령은 결국 백악관으로 향했고, 10분 늦게 회담장에 들어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 모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유는 이 대통령이 회담장에 들어서며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일절 없고,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이젠하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제 귀국의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이 휴전협정에 의거해 파견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인 체코와 폴란드 대표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 대통령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우리 군사기밀을 정탐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이 미국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귀하의 나라 군부대 시설까지 정탐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이젠하워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동석 중인 주한유엔군사령관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사령관은 즉시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아이젠하워는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미국 측이 틀림없이 한일관계를 이슈화할 것에 대비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에 대한 카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참고로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1954년 7월 30일(미국시간으로는 제2차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된 7월 29일) 중립국 감시위원단 공산 측 대표에게 퇴거를 경고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이 대통령은 7월 31일(한국시간은 8월 1일) 워싱턴에서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 요구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휴전협정 공문화(空文化)를 선언하는 중대발표를 했다.

 이어 회담의 화두가 한일관계로 넘어가자, 이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화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옆방으로 가버렸다. 이 대통령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말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이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삭이고 들어와 한일문제는 보류하고 다른 의제로 넘어가자고 제안하자,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통쾌한 답례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일 외교기자클럽에서 중요한 오찬연설이 있는데, 준비를 위해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예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이 대통령은 이런 인물이었다. 아무리 미국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존심과 품격에 손상을 입을 수는 없다는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상대가 우리를 얕볼 때 이를 용납하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양보하게 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회담장을 나온 이 대통령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회담장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리가 없는 기자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우선 미 의회연설에서 이 대통령이 제안한 아시아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대통령은 “토론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어느 기자가 “미 의회에서 제안한 중국본토 반공전쟁에 대해 아이젠하워 등 미국 정치인 및 군사 지도자에게 실망했는지 아니면 격려를 받았는지?”라고 질문하자, 이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 나지막한 어조로 반문했다. “도대체 내가 미 의회에서 무슨 제안을 했다는 말인가?” 이 같은 질의응답은 당시 이 대통령의 심기를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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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과 조지 워싱턴 대학 (14)

“내 겨례 자유 위해 몸 던져 미국 民主 배웠다”

1954년 7월 29일 오후, 제2차 한미정상회담 중에 한일관계 문제로 양측이 대립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신사적인 태도로 일시 회의장을 비웠으며, 이에 분개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예 회의장을 나와 버리자 난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아이젠하워도 분통을 터뜨리며 회의장을 나와야 했다. 미국 측 대표도 아이젠하워를 따라 퇴장하려는데, 주미 한국대사관의 양유찬(梁裕燦·1897∼1975) 대사가 양국 정상이 자리를 비웠더라도 회의는 진행시켜야 한다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들을 가로막았다. 양측은 가까스로 회담의 파행을 수습하고 공동성명을 만드는 데 합의했다.

여기서 잠시, 양유찬 대사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 갔으며,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시절 한인교회의 학교에 다니던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다. 의과대학 졸업 후 그는 하와이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해 크게 성공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을 여러모로 도왔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주미 대사를 맡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외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이후 무려 4·19혁명 직후까지 9년 이상을 주미 대사로 근무했다. 전무후무한 장수 기록이다. 그는 탁월한 영어실력, 유머 넘치는 화술로 미 조야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미국의 각지를 돌며 강연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알렸고, 반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그의 연설문들을 모은 책자 《Korea against Communism》(1966)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 인물이었으며 자신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일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취득

7월 30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50년 전에 그가 다녔던 조지 워싱턴 대학을 다시 찾았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이 대학의 찰스 니덤(Charles W. Needham·1848∼1935) 총장의 특별 배려로 2학년에 특별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만 나이로 30을 넘긴 늦깎이 학생이었다. 더구나 그는 고종황제의 밀사로, 주미 한국공사관 직원으로, 그리고 외아들을 키우는 아비로서 학업에 전념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러나 불굴의 학구열은 그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추억과 애환이 어린 모교를 다시 찾은 이 대통령의 감회는 남달랐다.

조지 워싱턴 대학은 이날 특별 학위 수여식을 열고 그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수여식은 리스너 강당에서 개최됐다. 행사에는 대학교 이사 및 교직원 이외에 외교단, 상원·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의원, 워싱턴 DC 공무원, 대학 행정요원 및 동창회 회원, 워싱턴의 문화·시민단체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클로이드 마빈(Cloyd Marvin·1889∼1969) 총장이 李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아들, 높은 분별력과 기독교적인 품성이 결합된 진지한 인물, 지루한 기다림의 세월 속에 고통·절제된 용기·공공의 복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희생정신이 요구됐던 시기에 불굴의 인내·조용한 의지·심오한 정신적 힘을 가지고 자신과 국민들을 위해 일했던 애국자이자 지도자, 정의에 항상 민감하게 동의하는 인물, 동양적인 것을 서양적인 것으로 서양적인 것을 동양적으로 해석하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 -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님, 우리는 당신이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 방문해 준 것을 매우 반갑게 생각합니다. 우리 대학교 이사회와 교수회의를 대신해 당신께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연설을 시작했다. 이날의 역사적인 명연설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의 연설

“마빈 총장, 대학 이사회, 교직원, 학생, 신사숙녀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오늘은 내게 자랑스러운 날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더운 날, 귀중한 주중 시간에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주신 친구들에게 어떻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학위는 내가 그간 받았던 그 어느 유사한 인증서들보다 값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는 나의 모교이고, 여러분은 나를 이 위대한 모교의 값진 아들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매우 자랑스럽게 해줬습니다.

교직원 여러분, 학생 여러분, 나는 당신들을 축하합니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닌 지 50년 만에 이 대학교를 이만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일궈낸 여러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5년, 내가 처음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에 등록했을 때, 나는 컬럼비아 단과대학의 알렌 윌버(Allen Wilbur·1864∼1945) 학장을 찾아가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찾았습니다. 북서쪽 14가와 지(G)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낡은 벽돌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은 후에 허물어졌고, 오늘은 그 위치조차 거의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윌버 학장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교육자의 귀감이요, 나무랄 데 없는 기독교 신사라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윌버 학장의 강의, 그리고 그분이 연민의 정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후 줄곧 나의 삶에 있어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돼 왔습니다.

내가 당시 나의 조국에서 미국에 오게 된 것은 고등교육을 받겠다거나, 대학에서 학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나는 구 한국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하라고 파견됐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 공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여가를 내어 고등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한 교육이 내가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나름 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지 워싱턴 대학은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갖춘 워싱턴 내 유일한 학교였으며, 나의 이 대학 등록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내가 조지 워싱턴 대학에 관심을 가졌던 다른 이유는 내가 조국에 있을 때 벌써 미국 독립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을 열렬히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었고, 조지 워싱턴 대학은 내게 매우 이상적인 학교로 보였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충실히 학업에 열중했고, 미국 민주주의의 중심에서 민주 정부의 운용방식과 국민들의 자유를 어떻게 보호하느냐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는 내 평생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초석이 됐습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은 내 겨레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됐습니다.

후에 몇몇 친구와 우리 국민이 나를 국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진실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조지 워싱턴 대학을 다닌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연설을 잠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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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대학 연설 - 한-미 頂上 공동성명 (15)

“치명적 바이러스 공산주의 퇴치 미루면 재앙”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 당시 몸소 타자를 쳐서 문서를 작성하던 습관을 대통령 재임 시에도 버리지 않았었다. 미국 국빈방문 기간 중의 연설들도 마찬가지였다. 외교 고문이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자신의 저술에서 일부 연설의 초안을 잡아주었다고 하나, 이 대통령은 그것을 참고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연설문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자줏빛 망토를 걸친 채 연설하던 이 대통령은 너무도 감격스러웠던지, 연설 도중에 잠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진솔한 말들을 엮어 나갔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의 공부는 시련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수업을 받을 때, 본인의 영어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영어는 그때나 그 이후나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당시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강의실에서 영어 실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도대체 교수들은 영어를 왜 그렇게 빨리 말했는지 나는 아직도 의아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나는 조지워싱턴대학의 충실한 아들의 하나가 되고자 노력해 왔다고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위대한 대학, 우리의 대학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듯이 나도 그랬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은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두 가지 일 즉, 자유와 민족자결을 위해 투쟁해 온 사람입니다. 특히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라는 천부적인 이점을 갖지 못한 약소민족들의 자유와 민족 자결을 위해서 말입니다.

보람 있는 사회를 이루는 이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가 바로 이 순간,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습니다. 국내적·국제적 조직들이 개인적 자유의 존립과 민족주의의 전체구조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을 크렘린의 독재자들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통치되는 세계 국가의 노예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철학자나 공산주의 행동가들은 누구도 이러한 목표를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의 말을 듣거나 적시에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사람과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자포자기한 채 우리에게서 떠났습니다.

나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매우 신속히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은 조만간 압도적인 힘을 얻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일단 이를 성취하면, 그들은 문명 그 자체를 파괴시켜 버릴지도 모를 또 다른 세계 전쟁으로 이 세계를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대가는 재앙 그 자체일 것입니다. 변화는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마치 불편하기는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흔한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을 중지하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라고 여기고 퇴치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미국과 모든 자유국가의 대학은 이러한 투쟁의 선봉에 나서야 합니다. 총포나 병력의 위협으로만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폭력은 공산주의의 무시무시한 시위 행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이른바 사상적인 영역에 그릇된 가치관을 정립시키고, 검은색을 백색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사상통제를 구축합니다.

교육의 역할은 공산주의가 지성에 반하는 것임을 연구하고 폭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역할은 사상의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귀중한 가치를 파괴시키려는 책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제 교육, 그리고 교육자들은 단지 공산주의의 과도함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육은 싸울 자유가 존재하는 한 교육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닥쳐온 위험이 매우 큽니다. 공산주의는 권력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 무제한의 탐구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대학, 자유로운 학부, 자유로운 학문─이 모든 것은 소비에트의 힘이나 유혹에 굴복한 나라에서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중립일 수 없으며, 한적한 강의실에 앉아서 자유세계가 파멸의 비극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모든 자유인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무관심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매우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분이 이미 투쟁을 하고 계실 줄로 생각하며, 그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적색분자와의 투쟁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과 국가에 대해 결코 떳떳하지 못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그 위험을 아는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단결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지금은 바야흐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단결과 행동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국민들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 투쟁해 나갑시다.” 

<한미 공동성명 全文>

1954년 7월 30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이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연설을 하는 시간에 한미 양국 정부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의례적인 6개 문단으로 구성된 245단어(영문) 분량의 연설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호 관심사에 관해 유익하고도 진지한 의견교환을 했다. 이러한 협의는 우리 양국 간에 존재하는 우의를 강화시켰으며, 또한 우리의 목표가 확고함을 보다 더 명백히 보여주었다.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만일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휴전협정에 따른 정치회담이 한반도 문제에 만족할 만한 해결을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면, 대한민국과 미국은 다시 협의할 것이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 회담은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동 회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유엔감시하의 진정한 자유선거에 입각한 한반도 통일 방식을 수락하기를 일절 거부하고, 그 대신 한국 국민의 자유의 소멸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초래할 수도 있는 합의안을 계속 강요했다. 우리는 유엔헌장 및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통일ㆍ민주ㆍ독립국가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서 전진하려는 우리의 의도를 재확인했다. 제네바 회담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에 비춰 우리는 이 목표달성 노력을 계속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했다.

우리의 군사 및 경제 고문들은 양국에 관계되는 공동이익 문제에 관해서 보다 더 상세한 토의를 계속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한국 문제에 관한 우리의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긴밀하고 호혜적으로 함께 노력한다는 결의를 재천명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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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① (16)

“한반도 새로운 길 모색이 나의 미국 방문 목적”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 국가 원수들의 경우, 정상회담 이후 양국 국가 원수가 공동기자회견을 갖는 이외에 별도로 특정 미디어와 회견을 하든지,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 등과 같은 단체의 초청을 받아 수백 명의 기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30일 정오, 미국 외교기자 클럽(The Overseas Writers Club)의 초청을 받고 스타틀러 호텔에서 개최된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참고로 행사를 주최한 외교기자 클럽은 1921년 설립된 해외에서 특파원을 했던 미국 기자들의 모임이었으며, 한때 미국 외교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2002년 해체됐다.

세계 어느 나라의 국가원수보다도 국가홍보의 중요성에 대해서 선구적인 의식을 가졌던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 행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더구나 미 의회연설에 대한 미국 내 분위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탓에 이 대통령은 자신의 소회를 진솔하게 기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다.

12시 정각에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하자 원형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150여 명의 기자들이 일제히 기립해 대통령을 맞았다. 이 대통령은 헤드 테이블에 앉아 함께 앉은 기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우선 오찬을 끝낸 다음에 연설을 시작했다.

“언론인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은 예민한 지성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세계에서 그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며, 국민의 복리를 위해 자신의 힘을 행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언론의 자유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자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의사소통의 자유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를 보면,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허용치 않습니다.

신문·라디오 방송·통신사들은 언제나 적의 제1의 공격목표가 됩니다. 적은 제퍼슨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유로운 신문이 자유국가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은 권력을 장악하면 무엇보다 먼저 언론의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진실 대신 허위 사실들을 전파할 수 있으며, 그들이 항상 노리는 전체주의적인 권력을 재빨리 장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부디 진실하고 가공되지 않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파수꾼의 역할을 하지 않아서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국민들을 잘못 인도하기 쉽습니다.”

여기까지 언론인의 사명을 남달리 강조한 이 대통령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말을 돌렸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기자는 아니지만, 때때로 나의 사명이 여러분의 그것과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전달해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내가 그 정보를 적절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전달한다면, 세계는 나를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동의하고 어떤 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모두 내 마음속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바로 이틀 전에 나는 위대한 미 의회에서 연설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연설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최초의 연설 원고는 나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길었습니다. 내 친구들이 길이를 줄이면 좋겠다고 해서 마침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삭제하는 과정에서 어떤 복잡한 문제를 몇 마디 단어로 표현하려고 하니 그 배경과 설명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내 연설을 들은 몇 사람은 내가 미국에게 중공과 즉시 전쟁을 개시하도록 촉구한 것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나는 자유세계의 보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기적인 정책을 미국이 고려해 보도록 제시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뜻했던 바를 충분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허락한다면, 그제 나의 의회연설을 이 자리에서 연장해서 하고 싶습니다. 의회연설에 대한 배경과 부연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의도나 제안에 대해서 일절 오해가 없도록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 문제가 중대하므로 여러 가지로 달리 해석되거나 그릇되게 해석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자신의 뜻과는 어긋나게 미국 측에서 6·25전쟁 휴전회담을 시작하고, 자신을 회유하고자 미국 초청을 먼저 제안했다고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미국을 방문하게 된 최초의 제안들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덜레스 국무장관과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이 내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볼 겸 잠시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방미가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내심으로 미국을 방문해 옛 친구들도 만나고 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그리운 고장들을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미국 측과 결정적인 합의를 할 수 없었으며, 국내에 머물러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설명하고 최초의 초청을 사양했던 것입니다.

제네바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한반도 상황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기로에 서게 됐으며, 한미관계도 마찬가지로 기로에 서게 됐습니다. 이제 한반도 문제를 풀어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할 필요성이 대두됐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해서 나는 미국에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 지도자들과 조용히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자, 한반도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한반도 통일에 동의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야기된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문제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군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통찰력을 갖고 있는 체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군대는 큰 희생이나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하는 심각한 위험이 없이도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 군대는 이런 일을 행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 군사 당국자들이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희망했었고, 또한 미국의 협조를 종용했습니다. 이는 아직도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는 아직도 낙담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국민들의 위대한 반응은 내게 미국의 지원을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미국이 결코 공산주의의 유화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구나 하는 신념을 키워 주었습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미국 국민들의 용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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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② (17)

“美國이 도와준다면 공산주의의 불길 반드시 진화”

1954년 7월 30일 정오, 미국 외교기자클럽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우선 언론인의 사명을 강조하고, 자신의 방미 배경, 그리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한 미국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해 보니, 현 시점에서 그 어떤 군사적 행동에도 반대하는 상당한 여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우리의 제안들이 시기상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 여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 관한 특별한 권고안을 다루는 것보다, 전반적인 상황을 광범위하게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미 의회연설은 그러한 수준에 맞춰진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간직해 왔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공산주의의 정복 야욕에서 민주주의를 구하려 한다면 중국을 우선 구한다는 결정을 지금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문제는 한국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 문제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없으면, 아시아의 생명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중략)

만일 중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놓이고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공산 통치하에 들어간다면, 대한민국은 독립국가로, 통일국가로, 민주국가로 결코 계속해서 존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회연설에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미국의 정책이 중국을 먼저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우리가 행동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중국을 하위에 놓는다면 중국의 구출을 가능케 하는 통로들을 잃어버리는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나는 미국이 중국을 지금 공격하라고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제안한 것은 미국이 중국을 구하는 데 필요한 단안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즉, 미국이 중국의 해방을 항구적인 정책 과제의 일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정책을 강화하고 실천하는 데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오. 친구들이여. 공산주의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왔는지 말입니다. 전 세계가 다 알다시피 볼셰비키가 그들의 청사진을 작성한 것은 40년 전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민주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미국’의 정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복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상 우선순위 제1번이 돼 왔습니다. (중략) 그들은 그러한 목표를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왔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지난 40여 년간 밤낮없이 일해 왔습니다.

계획과 행동으로 공산주의는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반이 지금 공산 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중략) 중국 역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필사적으로 항전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중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투쟁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무기ㆍ탄약ㆍ기타 원조가 조달됐고, 얼마간 자유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한 전투는 잘 진행됐습니다. (중략)

그러나 미국인들은 중국에 내전이 중지되고 연립정부가 성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회복되지 않으면, 원조를 철회할 것이라는 시사를 함으로써 중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소련 측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우유부단한 아시아 정책을 꼬집은 이 대통령은 의회연설에 이어 또다시 신랄한 어조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환멸과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분단은 가공할 타격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민주 정부와 개인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에는 미국이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정세는 한국의 이익과는 반대로 전개됐고, 우리는 혹독한 시련에 처하게 됐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오늘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우리나라가 너무 과도하게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을 보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미국이 너무도 결단력이 없고, 너무도 기회주의적으로 시류에 따라 표류하고, 너무도 행동을 주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처에서 승승장구하며 점차 가속도를 내어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략)

언론인 여러분, 이 나라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지배를 도모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위대한 성전을 시작해서 지금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중략) 이러한 성전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라도 수행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물론 한국은 열심히 참가할 것입니다. (중략)

결국 미국과 자유세계의 확고한 정책, 진리를 알리는 성전, 막강한 힘의 정책 등과 같은 조치들은 중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용감하고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세력들을 일깨워서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자들에 대항하는 고유의 성전을 시작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미 의회의 모든 내 친구들이 이 연설을 읽어서 내가 그들과 미국 국민에게 말하고자 했던 바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때때로 내 친구들은 나를 예언자라고 말해 왔습니다. 내가 국제정치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을 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는 내가 예언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려고 하며, 특히 그 동기들, 힘의 역학관계, 그리고 우리의 적이나 잠재적인 적들이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들을 평가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내가 중국에 대한 강경하고 확고한 정책이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ㆍ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구할 수 있다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나의 이러한 평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 대한 호소로 이날 연설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이여, 나는 미국 국민이 세계 문제를 현실적으로 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만난 미국인들로부터 정말로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와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민주국가로 평화스럽게 존속하려면 아시아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듣거나 읽어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만한 거대한 힘의 저장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 국민입니다.

언론인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께서 미국 정부와 함께 위대한 힘의 원천인 미국 국민에게 호소해 주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또는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을 지원하자고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공산주의의 불길을 진화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과 자손을 위해 평화롭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신문과 방송은 이날 연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54년 7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1ㆍ2ㆍ6면 등 3면에 걸쳐 보도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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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방미와 獨島 무인등대 點燈 (18)

“우리가 하는 일…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승만 대통령과 독도에 관한 얘기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대통령은 방미 기간 중에 독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독도 등대 설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이 대통령이 마지막 기착지인 하와이에 체류하던 1954년 8월 10일 정오(하와이 시간 1954년 8월 9일 저녁 6시)에 독도 무인등대에 점등하고 세계 각국에 이를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참하게 패망한 이후에도 집요하게 영토 문제를 제기해 오고 있었으며, 독도 영유권 주장도 그중 하나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당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은 아마 우리 정부의 등대 설치가 아닌가 한다. 일본 측이 독도에 무언가 심각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1954년 7월 말이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57년 전인 1954년 7월 31일자 뉴욕 타임스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날은 이 대통령이 1주일간의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묘하게도 이날 뉴욕 타임스지는 “한국이 섬들을 점령하고 있다고 일본이 주장”이란 제목 아래 일본 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독도 관련 기사를 크게 다뤘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독도를 점령하고 작업 중이라고 일본이 주장”이란 소제목이 달린 이 기사는 단순한 사실 보도가 아니었다. 제1면과 2면에 지도와 함께 장문의 기명 기사를 실었으며, 더구나 기사를 쓴 인물은 린드세이 패롯(Lindesay Parrottㆍ1901∼1986)이었다. 패롯은 제2차 대전과 6ㆍ25전쟁 기간 중에 종군기자로 맥아더 장군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 기사를 쓸 당시에 10년째 뉴욕 타임스의 도쿄지국장으로 근무하던 베테랑 기자였다.  일본 정부의 정보에만 의존한 편파적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소식통은 7월 30일, 한국이 독도(Takeshima로 표기)를 점령했다고 말했다. 2척의 일본 순시선이 독도 인근을 순찰하던 중, 6명의 한국인이 독도의 2개 섬 중의 하나인 동도(Mishi Island로 표기)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한국인들이 흰색 셔츠에 초록색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분명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파견된 경비대였다고 밝혔다. 한국인들이 무장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커다란 텐트가 그곳에 세워진 것을 보면 그 섬에서 머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고 덧붙였다.” “그곳 표지판에 적혀 있듯이 한국인들은 적어도 7월 25일부터 그곳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 어부들이 때때로 조업을 하던 때와 같은 일시적인 체류가 아니라고 일본 측은 추론했다. 인근에 한국 선박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들은 상당 기간 지탱할 물품들을 사전에 이 섬에 실어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 뉴욕 타임스는 독도의 지리적인 위치를 소개한 다음, 일본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했다. 더욱이 기사에는 독도라는 우리 표기는 일절 보이지 않고 다케시마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학술조사, 한국영토라는 표지판 및 등대 설치, 독도 경비대 상주, 독도 접안시설 설치 등의 실효적인 조치를 취하고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해 왔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가 “이승만 라인”(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 해양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 의해 설정한 수역으로 ‘평화선’이라고도 불리며 독도를 라인 안에 포함시킴)을 발표하고, 특히 李 대통령의 방미 기간을 이용해서 독도 등대를 점등한 것은 타이밍이 절묘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효적인 지배와 함께 이제부터라도 해외 홍보, 특히 해외 주요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홍보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지만 1954년 7월 31일자 뉴욕 타임스가 독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필자의 지적을 계기로 독도가 세계 언론에 어떻게 보도돼 왔는가 하는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독도는 알파벳으로 언제부터 어떻게 표기돼 왔으며, 보도 내용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향후 독도에 관한 해외 홍보가 적극적으로 전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워싱턴을 떠나 뉴욕에 도착 뉴욕 타임스가 독도 관련 보도를 했던 7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주일간의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오전 10시 3분 비행기 편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워싱턴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李 대통령은 국내외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고별인사를 했다.  

“워싱턴을 떠나자니 다소 서글픕니다. 아마 더 이상 이곳을 방문하지 못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미국 정부와 국민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태도와 후의를 보여준 데 대해서 매우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 대통령 일행은 같은 날 오전 11시,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데이비드 남궁 뉴욕 주재 한국 총영사, 리처드 패터슨 뉴욕시 영접위원회 회장 그리고 한복을 입고 웃음을 띤 100여 명의 한인 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몇 명의 중국(자유중국)인들도 환영객 중에 끼어 있었다.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호텔 건물 정면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간단한 오찬을 마친 이 대통령은 오후 3시, 호텔에서 독도에 관한 보도에 대해 뉴욕 타임스와 단독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독도에 관한 질의나 응답은 없었다. 이어 저녁 6시부터 약 1시간 동안 맥아더 장군과 환담했다. 뉴욕에서 첫 공식행사는 저녁 8시, 남궁 뉴욕 주재 한국 총영사가 주최한 환영 리셉션이었다. 총영사관 건물에서 개최된 리셉션에는 학생ㆍ사업가 등 한인 동포 100명 이상이 모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말로 짤막한 인사말을 통해 모든 한국인이 조국의 궁극적인 통일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파운드리 감리교회에서의 특별예배 

李 대통령은 8월 1일(일요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가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특별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에는 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노울랜드 의원, 전 주한 미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등도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아주 감동적인 즉흥 연설을 했다. “한국이 자유롭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만약 우리가 100만 공산군을 북한에서 몰아내려고 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가공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순식간에 인류의 문명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수소폭탄보다도 더 위력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시아 최상의 최강의 반공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감싸는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비난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하느님만이 나를 질책하시지 않는다면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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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外戰爭 參戰勇士會 연례 총회 참석 ① (19)

“한국 땅에서 피 흘린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1일 저녁, 방미 기간 중 실내 행사로서는 가장 참석자가 많은 행사에 연사로 나서기로 예정돼 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해 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갔다가, 주말을 이용해 8월 1일, 오전에 워싱턴으로 이동해 파운드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같은 날 저녁에 다시 뉴욕 인근의 도시 필라델피아로 이동한 것이다. 80세 노인을 위한 일정으로는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이 대통령으로서는 피곤보다는 신바람이 났다.

바로 미국의 예비역 군인들의 모임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회원 수가 많은 외국전참전용사회(Veterans of Foreign Wars: VFW) 연례 총회 행사에 초청 강연을 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전참전용사회는 해외에서의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의 모임이며, 1899년 발족돼 1936년에는 미 연방법에 의해 미 정부의 공인기관으로 승격됐다.

이 조직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기부금으로 운영되지만 150만 명이라는 회원의 숫자에서 보듯이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단체다. 참고로 본부는 미주리 주의 캔자스시티에 있지만, 미 전역에 7700여 개의 지부가 있다. 외국전참전용사회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정기 총회를 개최하는데, 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에 행사가 마련됐다.

이날 행사를 위해 이 대통령이 8월 1일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에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하자, 외국전참전용사회 대표 웨인 리처드 사령관 내외를 위시해 미 전 지역 간부 및 부인들, 존 파인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및 주정부 간부들이 나와 환영해 주었다. 애국가가 연주되고 펜실베이니아 주 방위군 소속 미 제111전투단 제3대대 장병 500명을 사열한 후, 이 대통령은 특별 오토바이 호위대의 인도를 받으며 행사장인 컨벤션 홀에 입장했다.

홀에는 50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해 있었다. 1주일간 진행되는 연례 총회 행사 중 이날은 추모행사가 진행돼 박수를 치지 않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회장이 이 대통령을 ‘역사적인 인권 수호자’라고 소개하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기립해 박수갈채로 환영했다.

이 대통령은 행사장의 분위기에 한껏 고무됐으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외국에서 숨져간 미군 장병들은 물론, 살아서 그 자리에 모인 애국자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시계는 미국 동부시간으로 정확히 1954년 8월 1일 저녁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바로 자유국가의 용맹스런 전사들 가운데 선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한국 땅에서 내 조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의 군대를 시찰하러 전선을 방문합니다. 이런 시찰을 통해 나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는 장병들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고 더 나은 인간이 돼 국가의 업무로 복귀합니다.

전투 장병에게는 고상하고 성스러운 그 무엇이 느껴집니다. 이는 전투 중이든 아니면 우리를 항상 위협하는 적을 경계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삶은 고되고, 위험하며 헌신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삶은 보람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장병은 그가 정당하고 옳다고 알고 있는 대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추모행사는 힘이 정의를 만들지 않는다는 위대한 원칙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헌정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영웅이 자기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수천 마일 떨어진 한국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분들이 그곳에 간 것은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평화로운 국민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잔인한 침략자를 막고, 격퇴한 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영원한 영예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목표가 성취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한국을 방어했던 분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삶이란 언제나 먼저 살다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며,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세에 보답하는 길은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한국 땅에서 피를 흘린 여러분, 그리고 전몰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투쟁의 목적이었던 그 대의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타협의 산물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업과 희생이라는 감동적인 행위는 옳은 것과 정의가 승리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전몰자 유족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결코 갚지 못할 정도로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음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넓게 보자면, 여러분의 사랑스런 가족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대의를 위해 우리 한국인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싸울 결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오늘날 세계 정세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분과 논의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국을 구하기 위한 미국 젊은이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를 가지고 한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을 때, 나는 단파방송국으로 가서 나의 고뇌를 토로했습니다. `적들이 우리 문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미국 친구들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렵니까?' 나는 누가 들을 것인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쓸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만 마일이나 떨어진 워싱턴DC에서 미국 대통령 한 분이 각료회의를 소집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략)

미군과 유엔군이 한반도로 투입되자, 전쟁의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은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완전한 승리가 확실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유엔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한국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국인들은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6명의 한국군 대령이 소위 ‘전술적 후퇴’에 항의하기 위해서 어느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쟁은 정체 상태에 빠졌고 적과의 쓸모없는 토론에 휘말렸습니다.

밴플리트 장군과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최후의 승리를 할 힘과 가능성이 있다고 누누이 천명했으나, 우리는 북쪽으로 밀고 가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내 생각에, 우리가 제3차 세계대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핵무기가 가공할 무기이며 한순간에 모든 문명과 모든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선전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선전이 효과를 발휘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자유세계 전체가 굴복하게 된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되지도 않으리라고 봅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핵무기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죽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에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 중의 다수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촉진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버린다면, 위대한 대의를 위해서 바쳐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때, 바로 그때에만 우리는 자신들을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의 길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연설은 여기서 잠시 중단됐다. 그는 아직 미국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포문을 열지 않고, 참석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모으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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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外戰爭 參戰勇士會 연례 총회 참석 ② (20)

“교착상태 빠진 전쟁… 미국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본 연재물 제19화에서 보았듯이 연설의 서론 부분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산화한 미군 장병의 영혼과 그들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역경 속에 살아남은 참전용사, 그리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이어 그는 오늘 소개하는 본론 부분에서 보듯이 미국의 우유부단한 한반도 정책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어느 국가의 지도자도 감히 엄두도 못 낼 배짱을 갖고 미국 여론을 선동하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였다.  

최근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우리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 냉전체제가 끝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냉전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제 남북관계도 냉전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수구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것도 모자라 역사를 거꾸로 돌려 해방 후 우리의 정치 상황과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을 그들만의 궤변과 오늘의 잣대로 다시 써보려고 획책한다. 이런 그들에게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낱 권력욕에 사로잡힌 미국의 앞잡이요, 친일파의 후견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ㆍ궤변ㆍ잣대가 얼마나 역사와 현실에 동떨어진 것이며 허구적인지를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필라델피아 외국전참전용사회 연례총회 참석 연설은 그 좋은 예의 하나다.

“한반도는 민주적이고, 독립적이며, 통일 국가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공산 국가로 돼서는 안 됩니다. (중략) 그런데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든지 아니면 오해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미국이 진실로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휴전회담,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 적과의 협상 등을 생각할 때면, 미국이 자유를 보전하려는 전쟁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중략)

미국이 자유우방국가들을 대하는 태도와 소련이 자기의 노예가 된 위성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 보면 혼란스럽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소련은 위성국가에게 공산주의의 세계정복을 공언하고, 위성국가들이 그 의지와 결의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이에 비추어 자유세계의 주축인 미국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확고부동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두려움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심리적인 효과를 초래합니다.

동물조련사는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갈 때, 그가 무서워한다는 것을 사자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만약 그러면, 반드시 사자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곰과 대적하는 미국은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정책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내고,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조금 더 많이 양보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그 결과, 항상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우유부단한 정책이 나옵니다. 그러니 미국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자유세계와 그 국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국에 대해 신뢰하지 않기 시작하며, 자유 수호의 희망을 상실하기 시작합니다.

자유세계의 챔피언은 하루는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고, 다음날은 그 돈을 회수해서는 안 됩니다. 동맹국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자유국가에게 단숨에 싸울 것을 촉구해 놓고는, 얼마 후 싸우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행위는 친구와 지지자들을 크게 낙담시키는 것이니, 어떤 위험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피해야만 합니다. 미국을 위한 올바른 진로는 확고부동하고, 강하며, 용맹스러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동맹국들도 동일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고, 적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외국전참전용사회 여러분은 이러한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크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중략)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지금이나 후에나 언젠가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며,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우리에게 더 불리하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설득하는 일입니다. 만일 국민들이 반드시 적에 대항한다는 단합된 의지를 보인다면, 정부는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며칠 전에 나는 여러분의 위대한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미국은 중국 본토를 해방시키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라고 제안했습니다. 중국이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아시아를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단호하게 실행에 옮긴다면, 죽의 장막 뒤에 있는 중국 국민은 공산주의자와 어디서든 투쟁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은 꼭 한번 저지됐을 뿐이며, 그것도 한반도에서 무력에 의해서 저지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투를 중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침략의 과실을 유지하고 즉각 재침 시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곳에서 행군 중입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한 나라 한 나라씩 소련이라는 암흑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씩 상실함으로써 우리와 우리의 대의명분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람은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엇을 양보해서라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쟁보다도 더 나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구슬려서 결국에는 우리와 평화적으로 공존의 장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평화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 대가란 그들에 의한 세계정복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자유와 모든 해방의 종말입니다. 그것은 크렘린의 전체주의 지배입니다. 그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이며, 모두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 올린 문명사회 내의 모든 가치들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ㆍ자비ㆍ동정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위대한 힘을 믿는 인간 신앙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내게 그러한 운명은 죽음보다 나쁘고, 전쟁보다 나쁘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쁜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인간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저 평화만을 사랑하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미국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해 주십시오.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한 그릇된 기대 때문에 모든 것을, 심지어 개인까지도 희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위험에 대해서 말입니다.

미국이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서서 두 번씩이나 세계를 구원했던 바로 그 정신을 다시 점화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이전에 위대한 공화국의 창업과 이후 그 보전을 이끌었던 정신을 다시 점화시켜 주십시오.

대의명분이 옳고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여러분은 항상 싸웠고 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같은 대열에 서 있습니다.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압제자들에게 행동으로 대항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공산주의의 물결을 밀어내고,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맙시다. 우리의 대의명분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과 완전히 승리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전투를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