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

[스크랩] 고산 윤선도 시조 모음

윤선도(尹善道)는 조선 중기의 시조 작가다. 선조 20 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이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품성이 특출하고 남달리 총명해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었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광해군 4 년 25 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아직 재야 중인 광해군 8 년 30세 대에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불의를 비난하는 이른바 병진상서(丙辰上書)를 올려 조야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상소는 임금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도리어 이이첨 등에 의하여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 이 바람에 그의 양부 유기(唯幾)는 관찰사 직에서 파직되었다. 경원에서 다시 경남 기장(機長)으로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8 년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37 세 때였다

 

이윽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되었으나 관계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조 6 년 42 세 때 별시초시(別試初試)에 급제했다. 이 때 시관이었던 장유(張維)는 고산의 책(策: 과거시험에서 정치에 관항 계책을 묻는 시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읽고 동국제일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과 麟坪大君(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42 세 때 공조좌랑(功曹佐郞) , 이듬 해 공조정랑(功曹正郞) 등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46 세 때는 병과시(丙科試)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집권파인 西人의 모함을 입어 49 세 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인조 14 년 50 세 되던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난리로 빈궁과 원손 대군은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고산은 고향의 자제와 가복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이미 적에게 함락된 뒤였다. 하릴없이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남한산성으로 갈 생각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귀향하는 길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환도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고산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배에서 내리지 않고 그 길로 탐라에 가서 다시 세상에 안 나올 결심을 했다. . 그리하여 탐라로 가는 도중 보길도(甫吉島)를 발견하고 그 뛰어난 경치가 마음에 들어 그곳을 영주지로 삼았다. 이 곳이 바로 부용동(芙蓉洞)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인조 16 년 병자호란 때 임금께 나아가 뵙지 않고 또 인조의 부름에 다르지 않았다고 해서 평안도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어 2 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영덕에서 돌아온 고산은 금쇄동에 별장을 짖고 한가롭게 지냈다. 65 세 대는 부용동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금쇄동과 부용동은 고산의 시가 생활의 2 대 무대였다

효종 3 년 66 세 때 왕의 부름을 받아 17 년 만에 서울에 올라갔다. 효종은 지난 날의 사부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동부 승지(同副承旨)를 내리고 가까이 두려고 했다. 그러나 고산은 다른 신하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노환을 핑계삼아 양주 고산에서 지냈다. 효종은 다시 예조 참의로 특진 시켰으나 조신들의 반대에 의해 귀향하여 금쇄동과 부용동을 오가면서 물려받은 부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다.

효종 8 년 71 세 때 또 부름을 받아 공조참의(功曹參議)가 되었다. 그러나 서인과의 잦은 싸움 끝에 74 세의 나이로 다시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뒤에 전라도 광야(光陽)으로 옮겨졌다가 81 세 때 풀려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84 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산은 3 번에 걸쳐 19 년의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이런 불우한 가운데서도 주옥 같은 시조를 지어 송강과 더불어 조선 시대 쌍벽의 시인이 되었다. 송강이 가사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의 제일인자였다

고산은 병진상소 때문에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집에 돌아온 고산은 유배지에서 잡곡밥만 먹다가 오랜만에 쌀밥을 보고 부인에게

이것이 무엇이오?

라고 물었다고 한다. 배소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데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고산은 그 곳에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을 지으며 나라 일을 걱정하고 부모를 그리워했다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에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슬프나 즐거우나 또는 옳다고 말하거나 그릇되었다고 꾸짖거나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열심히 닦을 뿐이다. 그 밖에 다른 일이야 근심해서 무엇하리<견회요>

남이야 어떻게 말하든지 신념대로 행동하는 작가의 강직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할 일만 할 뿐 그 다음에는 귀양을 가든 죽임을 당하든 알 바가 없는 것이다. 양심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조정의 시비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수양에 힘쓸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산이 많은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낸 것은 바로 이런 꼿꼿한 기질 때문이었다. 만년의 작품에 비긴다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이지만 이상과 정의감에 불타던 젊은 날의 고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뫼는 길고길고 물은 멀고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많고 하고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가느니

 

유배지에서 그리운 고향을 바라보니 산이 끝없이 길게길게 이어져 있고 낯선 땅의 물이 멀리로 굽이굽이 흐르고 있구나 산이 막히고 물이 가려서 갈 수가 없는데 부모님이 그리운 뜻이 많기도 많다. 그런데 나의 신세처럼 처량한 외기러기는 왜 울어 나의 마음을 구슬프게 하는가? <견회요>

유배지에서 고향에 두고 온 어버이를 그리는 정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길고길고 많고많고 하고하고 울고울고 등의 반복법의 사용은 애수와 그리움의 정을 더욱 절실히 나타내고 있다

 

인조 26 년 56 세 때 배소로부터 고향에 돌아와 금쇄동에 묻혀 살면서 산중신곡 (山中新曲) 18 수를 지었다. 이에 속하는 작품은 만흥(漫興) 조무요(朝霧謠) 하우요(夏雨謠) 일모요(日暮謠) 야심요(夜深謠) 기세탄(饑歲歎) 오우가(五友歌)  등이다

 

산수간(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鄕闇)의 듯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산수간 바위 아래에 띠풀로 이은 집을 짓고 살려고 하니 나의 뜻을 모르는 남들은 비웃고들 있다지만 나같이 어리석은 시골뜨기의 마음에는 분수에 맞는 것이라 여겨진다 <만흥>

혼란한 정계에서 물러나 산 속에 띠집을 짓고 자연과 벗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니 세속적인 사람들은 나의 참 뜻을 모르고 비웃고들 있다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다는 것이다. 티끌 세상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자연을 완상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려는 초연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조는 작가가 금쇄동에 은거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의 이면에는 현실 사회에 용납되지 않는 작가가 옛 사람들과 같이 자연 속에서 은거하려는 도피사상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어 먹은 후에

바위 끝 슬카지 노니노라

그 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러워할 줄이 이시랴

 

보리밥과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뒤에 바위 끝이나 물가에서 실컷 놀면서 지낸다 그 밖의 다른 일이야 하나도 부러워할 것이 없다 <만흥>

평범한 시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어 더 설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순수한 우리 말로 향토적인 미각까지 느끼게 한 것은 대단한 기교라고 할 수 있다. 보리밥이나 산나물 같은 거친 음식에 만족하며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고산만이 가능한 솜씨라고 하겠다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하노라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먼 산을 바라보니 참으로 좋다. 그립고 그리운 임께서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산은 말도 없고 웃지도 않지만 어떤 말 어떤 웃음보다도 나의 마음을 허무하게 하는구나<만흥>

인간과 교섭을 끓고 먼 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문득 마음 속에 박혀 오는 산의 모습 웅장함이며 태연자약함이여 세상의 무엇보다도 미덥고 반가운 모습 말 없는 말을 웃음 없는 웃음을 이심전심으로 느끼면서 황홀한 기쁨에 젖는다. 때로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친구가 찾아오면 좋으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도 가져보는 외로운 산거(山居)지만  이제는 산 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다  자연에 몰입되어 무아경(無我境)에 든 산같이 의연한 고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 오는데 들에 가랴 사립 닫고 소 먹여라

마히 매양이랴  쟁기 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비가 내리고 있는데 들에 가겠는가? 사립문을 닫고 소나 잘 먹여라. 장마가 늘 이렇게 지겠느냐? 쟁기나 연장을 잘 매만져 쓸 수 있도록 해 두어라. 쉬고 있다가 장마가 개는 날을 보아서 이랑이 긴 밭을 갈도록 하여라<하우요>

장마철에 농가에서 할 일을 가르친 것이다. 할 일 없이 놀며 시간만 보내지 말고 갠 뒤의 일을 위하여 소도 잘 먹이고 연장도 잘 손질해 두었다가 농사를 잘 짓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상의 뜻과는 달리 간신배들에 의해 혼탁해 있는 조정에 나가지 말고 광명한 세상이 되거든 정계에 나가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곧 장마비는 당쟁으로 어수선한 조정을 가리키고 사립 닫고는 은둔생활의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연장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 수양에 힘쓰는 것이고 비가 개는 날은 당쟁이 없어지고 공명해진 조정을 뜻하는 것이며 사래 긴 밭을 가는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쟁이 심한 조정에 출사하지 말고 산촌에서 은거하면서 때가 되거든 큰 뜻을 펼 준비를 하라는 뜻이 된다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구름 빛이 깨끗하다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기는 하지만 그칠 때가 많다. 그러니 깨끗하고도 그칠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오우가>

구름이 눈송이같이 희고 깨끗하지만 그대로 있지 않고 검게 되는 때가 많아 좋지 못하고 바람 소리가 나뭇가지를 스치며 들려 올 때가 맑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있으니 좋지 않다. 그런데 물은 맑으면서도 밤낮으로 흘러 그침이 없으니 그것을 좋아한다

구름과 바람에 비교하여 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물은 깨끗하고 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낮은 데로만 흘러가니 겸손의 표본이다. 또 어떤 장애에 부딪쳐도 뒤로 뛰어넘어가며 때로는 쇠도 녹이고 바위도 뚫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약한 듯하지만 강한 존재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물을 찬양했던 것이다. 이렇게 물은 맑고 그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고산은 물같이 깨끗하고 끊임없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했던 것이다

 

꽃은 므스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산 바위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곧 누렇게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원히 변치 않는 건 바위뿐인가 하노라<고산유고>

꽃과 풀의 생명이 짧은 데 대하여 바위의 영원성을 찬양한 것이다. 꽃이나 풀이 가변적이고 세속적이라 한다면 바위나 돌은 영구적이고 철학적이다. 꽃이나 풀이 부귀영화의 상징이라 한다면 바위는 초연하고 달관한 군자의 풍도다. 그리하여 동양화의 화제(화제)에는 바위가 많이 등장한다. 화선지 위에 늠연한 바위를 그려 놓고 석수도(석수도)라 하여 바라보며 좋아했고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며 즐거워 했던 것이다. 무미(무미)함 속에서 최상의 미(미)를 맛보고 적연부동(적연부동)한 가운데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돌의 미학에서 나온다고 바위를 찬양한 시인도 있었다. 그만큼 돌은 동양미의 진구와 통했던 것이다. 오는 날도 수석(수석)응 좋아하는 사람들은 돌을 찾아 강바닥을 뒤지기도 하는 것이다.

고산은 거울같이 맑은 마음으로 바위를 바라보면서 바위같이 변하지 않는 절개와 신념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다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 글로하여 아노라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추워지면 잎이 떨어지는 것인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 눈서리 속에서도 변하지 않느냐? 그것으로 미루어 깊은 땅 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쳐 있음을 알겠구나

소나무의 변함이 없는 푸름에서 변하지 않는 절개를 느끼고 그것을 찬양한 것이다. 논어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떨어지지 않음을 안다는 것이다. 곧 좋은 조건일 때는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조건이 나빠졌을 때 비로소 그 존재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평상시에는 소인과 군자의 구별이 없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소인은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하고 군자는 지조를 굽히지 않고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충신 열사라는 사람이 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의 절개를 소나무에 비겨 칭송했던 것이다

고산은 절의의 상(像)인 소나무에서 친근감을 느끼며 자신도 그런 소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 들어갔을 때마다 바른 말을 하다가 유배되거나 벼슬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고산의 일생은 외로운 소나무 같은 것이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란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켰으며 또 속은 왜 그렇게 텅 비어 있는가? 저러면서도 사계절 늘 푸르러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좋구나<오우가>

대나무는 얼핏 보면 나무 같기도 하고 또 풀 같기도 한 것이다 형태상으로 관찰한 대나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그러면서도 저렇게 곧게 솟았음은 무슨 조화인가 하고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게다가 사시에 푸르니 절개 높은 사람같이 생각되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나무도 소나무와 같이 옛 사람들의 글에 자주 오르내리며 선비들이 즐겨 벗하던 매(매) 난(란) 국(국)과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특히 대나무의 곧음은 강직한 성품이요 속이 빈 것은 허심탄회(허심탄회)한 마음이요 늘 푸른 것은 지사의 절조라 하여 찬양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광명(光明)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세상 만물을 다 비추어 주니 캄캄한 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한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밤중에 혼자 떠서 세상을 굽어보면 온갖 추악한 것이 있을 텐데도 아무 말도 없으니  그 군자다운 점이 나의 벗인가 한다<오우가>

달은 캄캄한 밤중에 혼자 떠서 암흑에 쌓인 세상을 밝혀 주는 존재가. 물리적인 암흑만이 아니라 사람의 어리석음 바르지 못한 마음 속까지도 황하게 밝혀 주는 것이다. 곧 월인천강(月印千江)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내세움이 없이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군자다운 덕성이 좋아 벗으로 삼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없는 말까지 만들어 주상모략을 일삼는 현실을 체험한 작가가 밤하늘에 높이 뜬 달에서 무언실천으로써 신의를 지키는 고매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버렸던 가얏고를 줄 얹어 놀아보니

청아(淸雅)한 옛 소리 반가이 나는 고야

이 곡조 알 이 없으니 집겨 놓아 두어라

 

버려 두었던 가야금을 꺼내 줄을 얹어서 다시 타보니 맑고 속되 않은 그윽한 옛날의 소리가 변함없이 반갑게 나는구나. 그러나 그 맑고 아름다운 곡조를 알아 줄 사람이 없으니 타서 무엇 하겠느냐?  다시 갑에 갖다 널어 두어라 <고금영>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서 옛날에 즐기던 가야금을 찾아 한 곡조 타 보았다  탈속한 가락은 옛날과 다름 없이 청아하게 드리는데 그 가락을 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이 시조에서 초 중장은 고금(古琴)을 노래한 것이지만 종장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야금의 소리가 변함이 없듯이 자신의 충성심도 달라짐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음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곧 충성심을 알아주지 않는데 대한 울분의 토로라 할 수 있다

 

집은 어이하여 되었는다 대장(대장)의 공이로다

나무는 어이 곧은다 고자줄을 좇았노라

이 집의 뜻을 알면 만수무강(만수무강)하리라

 

집은 어찌하여 지었는가? 그것은 목수의 공이다. 집을 짖는데 쓴 목재는 어떻게 해서 곧게 되었는가? 그것은 곧게 친 먹줄을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집이 이루어진 뜻을 알면 만수무강 할 것입니다<초연곡>

이 작품은 조정에서의 연회석상에서 성현의 도를 들어 임금에게 바른 정치를 권하고 만수무강을 빈 것이라고 한다. 고산은 효종의 사부였으므로 때때로 왕에게 선정을 위한 상소문을 올렸다고 하니 있음 직한 일이다

집은 나라의 정치를 뜻하고 대장의 공은 왕의 선치(선치)를 비유한 것이다. 나무는 왕의 어진 덕을 가리키고 고자줄은 성현의 법도를 뜻하는 것이다. 종장의 이 집의 이 뜻은 왕이 성현의 법도를 좇아 착한 정치를 베풀어야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의 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가지고 하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에 비유하여 왕으로 하여금 성현의 도를 따를 것을 완곡하게 권항 내용이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먹줄을 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게 하듯이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성현의 법도에 따라 곧고 바르게 행할 때 국가가 보존되고 만수무강 할 것임을 임금에게 간유(간유)한 것이다

이 노래의 시상은 서전(서전)의 설명(설명)에 있는 다음 글과 관계가 있다

"설이 임금께 복명하여 이르기를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바르고 임금이 간(간)을 좇으면 성인이 되나니 임금이 능히 성인이 되시면 신하는 명치 아니하여도 받들게 될 것이니 누가 감히 공경하여 아름다우신 임금의 명을 순종치 않겠습니까"

 

술은 어이하여 좋으니 누룩 섞을 탓이로다

국은 어이하여 좋으니 염매(鹽梅) 탈 탓이로다

이 음식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 하리라

 

술은 어떻게 빚으면 맛이 있는가? 그것은 누룩을 섞는 데 달려있다. 국은 어떻게 끓이면 맛이 좋은가? 그것은 간을 알맞게 하는 데 달려있다. 이 음식을 만드는 뜻을 알면 만수무강할 것입니다<초연곡>

술을 만드는 데는 누룩이 있어야 하고 국을 끓이는 데는 소금과 매실이 있어야 조미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술과 국은 임금의 덕을 가리키고 누룩과 염매(간) 는 어진 신하의 보필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정치를 잘 하려면 반드시 그 곁에 어진 신하들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런 사실을 잘 알면 성군이 되어 만수무강 할 것이라고 했다

"너는 짐(朕)의 뜻을 살펴 항상 교훈을 주기 바란다. 술과 단술을 빚는다면 네가 바로 누룩이며 엿기름이고 국을 끓인다면 네가 오직 소금과 매실이다. 너는 나를 여러모로 닦아서 버리지 말라 내 능히 너의 가름침대로 행할 것이다"

이 글은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이 현인 부설(傅設)응 재상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말이다. 곧 부설은 누룩이나 소금 같은 존재이니 그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즐기기도 하려니와 근심을 잊을 건가

놀기도 하려니와 길기 아니 어려우냐

어려운 근심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어찌 뒤에 올 근심을 잊을 것인가?  노는 것도 좋지만 어찌 오래 노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올 근심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즐겁게 놀 때 뒷날의 근심을 잊지 않는다면 만수무강할 것입니다<파연곡>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 말고  즐거울 때 근심을 잊지 말라(安不忘危 樂不忘憂)는 말도 있고 편안히 있을 때 위태함을 생각하고 즐겁게 살 때 근심스러운 일을 생각하라(居安思危 居樂思憂)는 말도 있다. 곧 즐거울 때 그것에 빠져 버린다든지 놀 때 그것에만 열중한다면 곧 근심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항상 뒷일을 염려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근심한다면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치를 벌리고 즐길 때에도 후일에 대한 염려를 잊지 않는다면 나라는 태평하고 임금은 만수무강할 것임을 간유한 것이다.

연락에 대한 반성과 절제를 풍간한 것이다

이 노래의 시상과 통하는 길이 시전(詩傳)에도 나오는 데 한 대목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귀뚜라미가 방에서 울어 어느덧  농사 일도 끝나려느니 지금 우리가 놀지 않는다면 세월은 용서 없이 지나가리 그러나 지나침 없고 어려움도 생각하며 즐기는 그 중에는 어지러움 없으니 좋은 이는 언제나 점잖거니

 

효종 2년 65 세의 고산은 부용동에 들어가 어옹(漁翁)의 풍류를 노래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이 노래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는 어부사를 명종 때 이현보가 어부가 9 장으로 개작한 것을  다시 고산이 후렴구만 그대로 넣어 40 수의 연시조로 재 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현보의 어부가에서 시상을 빌려 온 것이기는 하지만 후렴구만 빼고 나면 완전한 시조의 형식을 지니면서 전혀 새로운 자기 언어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는 것이 뻐꾸기가 푸른 것이 버들 숲가

이어라 두어라

어촌(漁村) 두어 집이 냇속에 나락들락

지구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사와(於思臥)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저쪽에서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그리고 저것은 푸른 버들 숲인가. 배를 저어라 배를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가렸다 보였다 한다 찌그덩 찌그덩 엇사. 말고 깊은 소에는 갖가지 물고기들이 뛰놀고 있다<춘사>

뻐꾸기와 버들 숲과 안개를 소재로 봄 경치를 그림같이 그려 놓았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아련한 뻐꾸기 소리 배는 안개 속을 헤치고 지나간다. 물 속에는 고기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멀리 마을의 집들이 보일락말락한다. 봄 날 아침 고기잡이 배가 마을을 떠나면서 되돌아보는 모습이다. 봄 경치에 몰입되어 있는 작가를 그려 볼 수 있다

 

연잎에 밥 자 두고 반찬을란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청약립(靑蒻笠)은 서 있노아 녹사의(綠蓑衣) 가져오냐

지국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사와(於思臥)

무심(無心)한 백구(白鷗)는 내 좇는가 제 좇는가

 

연 잎사귀에 밥을 까고 반찬은 장만하지 말아라  닻을 들어라 닻을 들어라  삿갓은 쓰고 있다 도롱이는 가져 왔느냐 찌그덩 찌거등 엇사  무심한 갈매기는 배의 앞과 뒤에서 날고 있으니 내가 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인가? 네가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냐.<하사>

배를 띄워서 바다로 나가는 모습이다. 밥만 싸가지고 가는 것은 고기를 잡으면 그것으로 반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부의 소박한 생활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백구가 나인지 내가 백구인지 주객일체(主客一體)이고 보니 그냥 흥겨울 뿐이다

 

기러기 떴는 밖에 못 보던 뫼 뵈나고야

이어라 이러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이라

지국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사와(於思臥)

석양(夕陽)이 바애니 천산(千山)이 금수(錦繡)로다

 

기러기가 떠 있는 저 멀리로 이제껏 보지 못하던 산이 보인다. 배를 저어라 배를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이렇게 못 보던 경치를 보는 것이다. 찌거덩 찌거덩 엇사 저녁놀이 눈부시게 비치니 단풍이 곱게 물들은 산들이 수놓은 비단 같이 곱구나

배 안에서 바라다보이는 먼 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여름에는 궂은 날도 많고 안개도 끼어서 먼 산의 경치가 분명치 않았는데 가을이 되어 하늘이 맑아지자 먼 데까지 잘 보인다. 낚시질도 좋지만 가을에는 새로운 경치를 보는 것이 더욱 흥겹다. 붉게 물든 단풍에 저녁놀이 비치니 그 아름다움은 수놓은 비단을 둘러 놓은 것 같다

 

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景物)이 달랐고야

이어라 이러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지국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사와(於思臥)

선계(仙界)ㄴ가 불게(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지난밤에 눈이 개니 경치와 물색이 달라졌구나. 배를 저어라  배를 저어라  앞에 바라다보이는 것은 유리같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바다요 뒤에 보이는 것은 하얀 눈에 덮여 마치 구슬로 이루어 놓은 것 같은 산이다. 이 아름다운 경치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속세 같지가 같구나 <동사>

겨울이 깊어 가니 고기잡이를 할 수 없지만 강촌의 설경은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다. 푸른 바다와 흰 산이 대조가 되는 곳 만물이 깨끗한 눈 속에 싸였으니 이는 곳 선경이요 정토다. 이백(李白)이 노래한 별유천지인간(別有天地人間)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고산은 효종 3년 66세 대 양주에서 정양하고 있을 때 몽천요(夢天謠) 3수를 지었다. 이것이 가장 만년의 작이다

 

상해런가 꿈이런가 백옥경(白玉京)에 올라가니

옥황(玉皇)은 반기시나 군선(群仙)이 거리나다

두어라 오호연월(五湖연月)이 내 분(分) 일시 올탓다

 

평상시인가 아니면 꿈인가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다는 백옥경에 올라가니 옥황상제는 반가워하는데 뭇 신선들이 싫어하는구나 아아,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가 내 분수에 알맞구나<몽천요>

이 작품은 고산이 효종 3년에 왕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였을 때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임금은 옛 스승을 만나 반가워하고 벼슬을 내렸으나 다른 신하들은 고산을 배척하고 헐뜯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백옥경은 대궐을 옥황은 효종 임금을 군선은 반대당인 서인을 가리킨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고산은 정계를 더나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는 것이 분수에 맞다고 생각하고 조정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보내고 그리는 정은........최장수

출처 : 愚公移山
글쓴이 : 미생지신 원글보기
메모 : 좋은 글 저의 방으로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