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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숙종대왕 이야기

숙종대왕 이야기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15일(신유)에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열 네 살의 나이로 1674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숙 종에게는 왕후가 셋이 있었는데, 첫 왕후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는 숙종과 동갑으로 1680년(숙종 6) 10월에 숙종이 태어난 경희궁 회상전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승하한다. 두 분 사이에는 딸 둘이 있는데, 일찍 돌아간다. 인경왕후의 아버지는 김만기[金萬基, 1633(인조 11)1687(숙종 13)]로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형이다.

이 어 계비가 된 왕후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다. 숙종과는 6살 아래다. 1701년(숙종 27) 8월에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서른 다섯의 나이로 승하한다. 두 분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그래서 숙종은 다시금 계비를 들였는데,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로, 숙종과는 무려 스물 네 살 터울이 지며, 두 분 사이에 자녀는 없다.

그 리고 숙종과 인연을 맺은 후궁으로는 가장 많이 알려진 희빈 장씨(禧嬪張氏, 1689년(숙종 15) 1월 15일에 희빈_빈(嬪)은 내명부 정1품_이 되고 5월 2일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당한 뒤, 5월 6일 숙종이 왕후로 삼겠다는 명령을 내리고 이듬해 10월 22일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된다.

 

1694년(숙종 20) 4월 12일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9월 25일 자진의 명령이 있고, 10월 8일 다시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며 10일 장례 관련 명령이 내려진다. 장씨의 정식 칭호는 조선 왕실의 족보라 할 수 있는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옥산 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되어있다. 숙종과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바로 경종(景宗) 임금과 성수(盛壽)로, 성수는 일찍 돌아간다.

[경종임금은 탄생일이 1688년(숙종 14) 10월 27일이다. 이 때 숙종의 춘추 스물아홉인데, 당시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아들을 너무 늦게 본 셈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명빈(榠嬪) 박씨(朴氏)가 있었는데, 막내 아들 연령군(延齡君) 헌(昍)을 낳는다. 그런데, 1703년(숙종 29)까지 연령군을 두 번째 왕자로 부르는 것이 특이하다(7월 15일 기사). 그 밖에 실록에 보이는 후궁으로는 안빈 이씨(安嬪李氏), 영빈 김씨(寧嬪金氏), 소의 유씨(昭儀劉氏)가 있는데, 이들과는 자녀가 없다. 이들 가운데 영빈 김씨가 숙빈 최씨와 가까운 사이였다고 전한다(영조실록80, 영조 29년(1753) 8월 6일 기사).

이 제 숙빈 최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숙빈 최씨의 정식 칭호는 선원계보기략육상궁 화경 휘덕 안순 수복 숙빈(毓祥宮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으로 되어있다. 육상궁은 영조가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위한 사당 이름[廟號]에서 유래한다. ‘화경’은 1753년(영조 29) 6월 영조가 친어머니 최씨가 돌아간 지 60년을 기리며 올린 시호고, 휘덕 1755년(영조 31) 12월에 올린 시호다.

최씨와 숙종의 첫 만남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693년(숙종 19) 4월 26일에 최씨를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 때 숙종의 춘추가 33세였다. 이듬해 6월 2일 특별히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삼고, 9월 13일에 영조 대왕을 낳는다. 그런데, 1693년 10월 6일에 소의(昭儀, 내명부 정2품) 최씨(崔氏)가 왕자를 낳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아마도 아래 선원계보기략에 보이는 영수(永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695년 6월 8일 숙의 최씨는 귀인(貴人, 내명부 종1품)이 되고, 1699년 10월 23일 단종 대왕(端宗大王)을 복위(復位)시킨 경사로 숙빈이 된다.

숙 종에게는 모두 6남 2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한대로 두 딸은 일찍 돌아간다. 그리고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는 ≪선원계보기략≫에 보이듯 세 아들이 있다. 바로 셋째 영수, 넷째 영조, 다섯째는 너무 일찍 돌아가 이름조차 없다. 그러고 보면 숙빈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셈이다.

이는 의빈 성씨와 정조 사이에 자녀가 가장 많았던 사실을 미루어볼 때, 숙빈 최씨가 숙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듯하다. 그럼에도 숙빈과 숙종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바로 영조다. 영조는 일곱 살이 되던 1699년(숙종 25) 12월 24일에 연잉군(延礽君)으로 책봉되고, 열한 살이 되던 1703년(숙종 29) 12월 15일 오늘날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를 거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21일 서종제(徐宗悌)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헤아릴 정도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4월 17일에는 숙종이 명령을 내려 연잉군을 위한 사가가 마련되어진다. 이에 대해 당시 관료들은, 연잉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이현(梨峴, 배오개, 오늘날 동대문경찰서에서 종로5가로 넘어가는 길에 있었다고 전함.)에 갑제(甲第)가 있는데, 임금은 또 왕자를 위하여 별도로 저택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조신(朝臣)들 사이에 말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우선 부득이하다는 전교를 내렸으니 중외(中外)가 남몰래 탄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여 기서 숙빈의 사가가 배오개에 아주 큰 집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녀의 고향 또한 서울임이 밝혀졌다. 뒷날의 기록이지만, 1765년(영조 41) 8월 6일 실록 기사에 따르면, 추모동(追慕洞)은 곧 인현 왕후가 탄강(誕降)한 옛터이고, 여경방(餘慶坊)은 곧 숙빈 최씨가 강생(降生)한 옛집이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경방은 오늘날 신문로 일대로 전한다.

그 리고 숙빈 최씨와 인현왕후 민씨의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려주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왕후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한 뒤 한 달쯤 지난 9월 23일 숙종은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내린다.

“대 행왕비(大行王妃, 곧 인현왕후 민씨)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 장씨는 비단 한 번도 기거(起居)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中宮殿)’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閔氏)’라고 일컬었으며, 또 말하기를, ‘민씨는 실로 요사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선당(就善堂) 서쪽에다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매양 두세 사람의 비복(婢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祈禱)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것을 참을 수가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제주(濟州)에 유배(流配)시킨 죄인 장희재(張希載)를 먼저 처형하여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도록 하라.”(1701년(숙종 27) 9월 23일)

숙 종이 인현 왕후 민씨의 승하에 희빈 장씨와 장희재가 관련이 있다면서 장희재를 먼저 처형하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사 끄트머리에 외간(外間)에서는 숙빈 최씨가 평상시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追慕)하여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알렸다고 전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곧, 숙종이 이러한 비망기를 내리게 되는 사실이 숙빈 최씨의 알림에서 비롯한다는 소문을 전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기사에는 왕후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내용도 전한다.

하 지만, 숙빈은 자기 아들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보지 못하고, 아쉽게도 1718년(숙종 44) 3월 9일에 돌아간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육상궁에 1773년(영조 49)에 영조의 화상 두 폭을 봉안하고, 또 초본(草本) 한 폭을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유원(李裕元 : 1814~88)이 남긴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육상궁 제사를 춘분ㆍ하지ㆍ추분ㆍ동지 네 차례 지낸다고 전하고 있다.

출처 : 운중풍월(雲中風月) woonjungpungwal
글쓴이 : 雲中風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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