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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대니보이의 가을

대니보이의 가을        김선만 산문집
 
                                                                                                               2007-09-21  도서출판 푸른향기
 
 
다방면으로 박식한 상식을 가지고 전문 분야에 대해서도 간결한 문체로 부담없이 전해준다.
공학도의 딱딱한 느낌도없이 사업가로서의 위장도 없이 진솔하게 사실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철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베품이 있고,  예술이 있고, 한국인의 얼이 있고, 경제학이 있고.....
색즉시공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글이다.
 
딸의 혼숫감으로 컴퓨터를 사서 보내는 저자는 멋쟁이 아버지다.
당시로서는 (94년) 아마도 세계 최초의 혼수감이였을 것이다.
화상전화도 되지 않았을때 e-mail로 서로 연락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물이였을 것이고 앉아서 세상구경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을 것이다. 
 
저자의 고향 부산은 나에게는 제 2의 고향이다.
한국동란 중 트럭타고 몇날 며칠 걸려 다달은 곳이 부산이다.
대신동 마당 넓은 집 사랑채 한칸을 얻어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나, 동생, 삼촌...한 10명이 함께 지냈다.
뒤이어  친척이 또 피란 오면 한동안은 열 댓명씩 한방에서 버글거려야 했다.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말을 할 때는 사투리가 싸우는 것 같아 무섭고 시끄러웠지만
주인집 예쁜 언니의 말씨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동네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날더러 "서울내기 다마내기~"하며 놀려서 많이 울었던 생각도 난다.
 
이국적인 자갈치시장, 남포동 국제시장, 영도다리가 올라가는 모양, 영도섬 방파제에 어마어마한 해일,
보수동의 판자집 학교에 다다미방 교실... '어머니같은 고향을 다녀오며'가 내 피란시절을 일깨워준다.
아마도 그시절 좁다란 자갈치 시장 골목길에서 작가와 옷깃이 스쳤을지도 모르겠다.
 
'물안개 피어 오르는 갈대숲'이 저자에겐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길을 달려 출퇴근을 하면서 사업과 기술에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도 떠 올랐을 것이고
아름다운 시상과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속에서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에대한 애착심도 키웟으리라.
 
나는 새로운 책을 만나게되면 우선 머릿말과 목차를 본다.
[대니보이의 가을]을 받고서 제일 먼저 마음이 가는  내용은 여행기였다.
더구나 내가 가 본곳에대한 이야기라면 퍽이나 궁굼해진다.
내가 보고 느낀 것과 얼마나 다르고 또 공감이 되는가가 관심거리다.
또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에 대한 정보도 얻고 내 여행에 대한 추억을 들쳐보게도 되는 것이다.
 
물 한병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침을 삼키며 갈증을 풀어야 할 때가 있었다.
한번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데 아름다운 니스를 지나게 되었다.
잠시 쉬어 가기로하고 시원한 바다에 발도 담가보고 모래 사장을 걷기도 했다. 
목이 말라 간이 음료수 판매대에서 콜라를 사먹으려했지만
프랑은 없고  리라와 달라가있었지만 그 작은 규모의 판매대에서는 외화는 받지않아
단돈 2프랑이 없어 침만 삼켰던 생각이 난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극히 형식적인 결혼식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요즘들어 더욱 결혼식이 엄숙하지도 않고  하객들에 대한 예의도 갖추지 않는 경향이 있다.
15분 정도면 식은 끝나고 사진 찍고 폐백 드리느라고 하객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하객은 하객대로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식당으로 몰려간다.
 
이탈리아에서 참석한 딸의 친구 결혼식이 참 인상적이였다.
물론 성당에서 엄숙하게 식을 치른후 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하객 모두를 식당으로 안내해가서는 서너시간 이상 식사를하며 여흥을 즐겼다.
그런 자리에서 사돈 친척끼리도 인사를 나누며 친분을 갖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
 
또 모록코에 여행중 결혼 행렬을 만나 호기심에 사진을 찍었더니 초청을받고 식당에 따라간 적이 있다.
거기서도 신부 신랑 가족과 친척들이 서로 어울려 춤도추고 노래하며 친분을 갖는 광경이 아주 보기 좋았다.
 
딸을 시집보내고 호주에 남겨두고 돌아서는 아버지, 눈물 흘리는 경상도 사나이의 모습을 그려보며
덩달아 숙연해진다.
 
여행... 저자도 나만큼이 역마살이 많은가보다.
남자고 여자고 살고 있는 곳에서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항상 외지에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다.
미국으로 이민 가신 내 작은 아버지 한분은 40년을 사시면서 California의 아름다운 해변 도시
Monterey에서 한번도 다른 도시를 구경 가신적이 없다. 다른 곳에 가봐야 사시는 곳 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을테고 다니는 것이 고생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형제이지만 정 반대이신 또 다른 작은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하셔서 80평생 미국내는 물론
세계 구석구석 하늘로 땅으로 바다로 안 다니신 곳이 없고, 좋으셨던 곳은 친지들에게 알려 안내를 자청하여 
함께 가시곤 했다.
 
나도 혼자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먹고 보는 것에 서로 취향이 다르고
마음 가는 것이 다를 수가 있다. 이태리에 있을 때는 한사람은 집에 있어야 할 사정도 있었지만
번갈아 각자 움직일 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 해방감을 만끽하고 보고 먹고 쇼핑하는 것을 즐겼다.
 
"돌아온 안경" 
외국에 빠트리고 온 물건이 여러 손을 거쳐 내게로 다시 돌아왔을때 물건가치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반가움은 이루 형언 할 수 없어 친지들에게 호들갑을 떨며 몇날 며칠을 이야기하게된다.
그리고 전해준 사람들과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한번은 일본 미끼모도에 들렀을 때 작은 진주 가게에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이것 저것 대여섯가지를 골라놓고 점원이 그것들을 포장하는동안 우리는 차 대접을 받았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포장하여 예쁜쇼핑 백에 함께 넣어준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받아가지고 나왔다.
 
동경의 호텔로 밤 늦게 돌아왔을때 그 진주가게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자기들의 실수로 우리가 구입한 선물하나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날 우리가 차 시간이 바쁘다고 했더니 두 세명의 점원이 함께 서둘러 포장을 했던것이 실 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떠난후 즉시 기차역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버스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진주 값을 치룰 때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물었고 동경에서 머무를 호텔을 물었었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투숙객중 우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사실 큰 마음 먹고 산 것 들이라 잃어버렸으면 퍽이나 속이 쓰렸을텐데 지금은 그 물건을 볼 때마다
그 가게의 주인이며 점원들의 친절과 미소를 기억하며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 라스베가스.
80년대에  밤 비행기로 라스베가스 상공을 선회하며  내려다본  라스베가스를 잊을 수 없다.
끝도 없이 펼처진 사막위에 새까만 벨벳을 깔아놓고 보석을 쏟아논듯 한 아름다운 광경은 숨이 멋을 지경이었다.
거리의 조명이며 달리는 멋진 차들이 완전히 꿈나라에 온듯했다.
호텔에서는 현관에서부터 넓고 넓은 로비에 휘황찬란한 조명아래 슬럿머신이 꽉 차있는 것을 보고 놀랬고
다음날 아침 거리에 나왔을때 완전히 철시된 도시로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아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난다.
오후 한 두시가 되면서 한사람씩 행인이 늘기시작해서 너덧시가 되니까 정장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즘엔 라스베가스가 더 많이 좋아졌다고 해서 다시 한번 가보고도 싶어진다.
 
그랜캐년에서는 한낫 실낫같이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까마득히 내려다 보면서
언젠가는 나귀를 타고  내려가보리라 계획만 해 놓고 몇십년이 흘러버렸다.
새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붉은계곡에서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개미만한하게 보이던 것이  참 경이로웠는데
그중에 저자도 끼어 있었다니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였을 것이다.
 
요즘엔 우리나라 택시 기사들이 많이 친절해 졌다.
90년대 초까지만해도 그들에게서 친절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승객이 기사의 눈치를 보아야 할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 갔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기사들이 친절한지...짐도 들어주고 내려주고,  팁도 받지 않았고
골목골목 잘도 찾아가 주었다. 다만 그들의 영어 발음은 서로 알아 들을 수 없어서 나는 항상  목적지를 적어서 보여주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나이 먹은 기사들은 영어로 꽤 의사소통이 되었지만 오히려 젊은이들은  하지 못했다.
 
아주 귀에 익은 하고네와 오타와라의 지명을 보면서 참 반가웠다.
오다와라에는 워크샵때문에 두번 갈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주변지역에  관광도하고
온천에 몸도 담가보아 인상 깊은 곳이다.
그곳에 두주일씩 머물면서 로맨스카로 동경까지 다니던 생각이 엊그제 일같이 그리워진다.
 
러시아에는 가보지를 못했다.
하필이면 우리가 여행 계획을 세웠던 해에 미국 관광 버스가 습격을 받았고 그후 몇년 동안은 치안이 불안했었다.
 
6.25 전쟁이후 영양 실조와 고된 생활로 많은 젊은이들이 폐를 앓았다.
내 남편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다행히 폐를 절제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가히 짐작을한다.
10년 이상을 투명하며 섭생끝에 80이 넘은 지금에는 그의 친구들 중에서 제일 단단하니 참으로 고마울 뿐이다.
 
20대에 폐 절제 수술을 받은  77세된 내 친구 남편은 이민 간 후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 검은띠까지 땄다.
이제는 130살 까지 건강하게 살거라며 건강에 아주 자신 만만하다.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서 교민들에게 기공법까지 전수하면서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어
그곳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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