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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포란형의 명당지기로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1. 호남정맥이 빚어 만든 금계포란형의 명당기운으로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종찰(僧寶宗刹)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내장산, 무등산 등을 솟구치면서 계속 남하(南下)하던 호남정맥(湖南正脈)은 전남 장흥땅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조계산(曹溪山, 887m)을 솟아올린 다음 광양의 백운산에 이르러 긴 여정을 마친다. 조계산은 기암괴석(奇岩傀石)이나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만들어 내는 절승(絶勝) 등이 없기에 화려하게 아름다운 산은 아니지만, 고요한 물과 순후(醇厚)한 산봉우리가 어우려져 꺠끗한 기운을 뿜어내어 산빛이 맑아 아름다운 생기가 넉넉하게 감도는 수려한 산이기에 명산으로 불리우며, 이 산의 깊고 그윽한 곳에 기대어 마음을 닦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이다. 이같은 연유로 서쪽 기슭에는 조계종의 삼보종찰 중 하나인 승보종찰 송광사가, 동쪽 기슭에는 태고종의 본찰인 선암사(仙巖寺)가 자리를 잡아 서로 쌍벽을 이루는 대수도장(大修道場)을 이루고 있다.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는 정식명칭이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다. 총림이란 승려들의 경전 전문교육기관인 강원(講院), 승려들의 참선 전문 교육기관인 선원(禪院), 계율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원(念佛院)을 모두 갖추어서 조계종 중앙종회의 결의하에 총림으로 지정된 곳으로, 우리나라에는 대한불교조계종 7교구본사 덕숭총림 수덕사, 대한불교조계종 12교구본사 해인총림 해인사(법보종찰),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본사 영축총림 통도사(불보종찰), 대한불교조계종 18교구본사 고불총림 백양사, 대한불교조계종 21교구본사 조계총림 송광사(승보종찰로 1969년 조계총림이 됨) 등 5대총림이 있고, 이 중에서 통도사는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모셔왔다는 석가모니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금란가사(金欄袈娑)가 봉안되어 있다 하여 불보종찰임을 자처하게 되었고, 해인사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장하고 있다 하여 법보종찰임을 내세우며, 송광사는 16국사(十六國師)가 배출되어 한국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 하여 승보종찰임을 자긍하니, 오느날 사람들이 이 셋 사찰을 불(佛), 법(法), 승(僧) 삼보종찰(三寶宗刹: 불가의 귀하고 값진 세가지 보배)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총림의 최고 어른을 방장이라고 하며, 그밑에 원주 또는 주지가 있고, 그 밑에 각 소임이 나눠지게 되어 있다.
 송광사터는 주산(主山)이 흡사 알을 품고 웅크리고 있는 닭의 모습으로 풍수상 금닭(金鷄)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소위 금계포란형의 명당에 해당한다. 여기에 연산봉(連山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은 장막을 펼쳐 세운 것처럼 송광사를 감싸고 도니 그 모습이 영락없이 둥그런 둥지 형상이다. 그래서 송광사터는 금닭이 둥그런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기에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16국사가 배출되었다.
 닭은 번식력이 아주 강한 새다. 거의 매일 알을 낳고, 한번 알을 품으면 스무 마리 정도의 새끼를 깐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새끼를 까는 날짐승은 별로 없다.그래서 금계포란형의 명당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크게 번창하고 재복을 누리며, 수도장을 지으면 많은 수행자들이 몰려들게 되고, 학교를 세우면 아주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게 되는 것이다.
 송광사는 뒷쪽 주산과 왼쪽 청룡이 웅장하며, 앞쪽의 안산(案山)도 힘차고 가지런하면서 아주 가깝지만, 오른편 백호 쪽은 시야가 훤히 트여 멀리 떨어진 산들이 눈에 들어와 시야가 넓어지면서 시원한 느낌을 주기에 지기(地氣)를 오래 가도록 한다. 특히 청룡이 높고 웅장하며, 산봉우리들이 빽빽하게 솟아올라 좋은 기운을 흩어지지 않게 물샐틈없이 갈무리해 준다. 여기에 송광사를 둘러싼 봉우리들은 하나같이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꽃봉오리처럼 볼록볼록 솟아 약동감이 넘친다. 비뚫어졌거나 험상굿게 생긴 봉우리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또한 흉하거나 거칠게 생긴 골짜기나 바위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저, 산세가 순후하고 맑으면 거기에 머물러 사는 이들의 심성 또한 온화하고 깨끗해진다. 그래서 성정(性情)이 강건한 스님들이 송광사만 들어오면 유순해진다고 한다. 이는 강한 지기(地氣)의 탓으로 강기(剛氣)가 살아나는 법보종찰 해인사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또 아늑한 산세 탓에 이곳에 들어오면 도심(道心)이 절로 일어난다고 한다.
 한데, 송광사터는 제일 가까운 완쪽 산줄기인 내청룡과 제일 가까운 오른쪽 산줄기인 내백호가 너무 약한게 흠이다. 그나마 청룡 쪽은 외청룡이 아주 튼튼하게 송광사를 감싸주기에 보완이 되지만, 백호는 내,외백호 모두가 짧으면서 힘이 약하다. 이같은 연유로 이곳에서는 좋은 기운을 받아서 크게 깨치는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중도에서 수행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즉 열심히 노력을 하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같은 흠결(欠缺)을 비보(裨補)하기 위해서는 백호 쪽에다 겨울에도 낙엽이 지지 않고 크게 자라나는 큰 상록수를 빽빽이 심으면 이 흠결을 보완할 수 있다. 이 큰 상록수가 백호가 허하여 흩어지는 기운을 많이 갈무리해 주기 때문이다.
 
2. 재를 지내려 오는 죽은 이의 영가(靈駕)조차도 씻겨 들어놓으려는 청청도량(淸淨道場)과 조계청풍(曹溪淸風)
 
  옛날에 어떤 스님이 송광사에 대덕(大德: 덕이 높은 큰 스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법을 물으러 찾아왔다. 지금처럼 조계산 입구에서부터 큰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냇물에 배추잎 한 잎이 둥실둥실 떠내려 온다. 이를 본 스님이 속으로 "에이, 헛걸음했구나. 이렇게 시물(施物: 스님들이 먹을 수 있도록 공양된 물건)을 아낄줄 모르는 절에 무슨 대덕이 있겠는가."하고 오던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위에서 어린 사미승(沙彌僧) 하나가 달음질쳐 쫓아오면서 "스님, 스님! 아래서부터 올라오셨으면 혹시 배추잎 하나 떠내려가는걸 보지 못했습니까?" 하고 소리지른다. 이에 이 스님은 돌이키려던 발걸음을 다시 돌리면서 "그러면, 그렇지!"하고 되올라갔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진다. 송광사의 청정준엄(淸淨峻嚴)한 승풍(僧風)은 이와 같았기에 조계청풍(曹溪淸風)으로까지 불린다. 배추잎 하나를 놓치고는 5리길을 달려가서라도 잡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어린 사미조차도 당연시하는 그런 곳이바로 송광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살림살이는 항상 규모있고 도량은 청정하며 대중의 행신(行身)은 개결(介潔)하여 정토를 실감케 하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산문 밖으로 멀찍이 떨어진 사하촌(寺下村: 절 아래 마을) 상가와 상가 앞의 매표소를 지나서 한참 맑은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시내를 건너는 무지개 다리 위에 청량각(淸凉閣)이란 현판이 걸린 누각이 있어 이곳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내려다 볼 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송광사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인 셈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삼림욕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내뿜는다는 편백림(扁栢林)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 울창한 숲길을 따라서 조금 더 올라가노라면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大乘禪宗曹溪山松廣寺)'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가면 곧바로 보조국사가 꽂은 향나무지팡이라는 고향수(枯香樹)가 깃대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고 그 오른쪽으로 여느 절에서는 볼 수없는 한 칸이나 됨직한 작은 집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척주각(滌珠閣), 하나는 세월각(洗月閣)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는 재를 지내러 오는 죽은 이의 영가(靈駕)를 목욕시키는 곳이라 한다. 글뜻으로 보아 구슬을 씻기는 곳이 남자 영가의 목욕소이겠고, 달을 씻기는 곳이 여자 영가의 목욕소로 추측된다. 불조(佛祖)인 고다마 싯달타가 "모두 마음의 장난(一切唯心造)으로 불구불정(不垢不淨)"이라 했거늘 어찌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재 지내러 오는 혼백조차도 씻겨 들여놓으려는  송광사 가풍의 결벽성에 숙연해지기는 커녕 다시 한 번 더 고개가 가우둥 거려지는 것은 나만의 소회가 아닐 것이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껶어지면 송광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상누각(水上樓閣)인 우화루(羽化樓)가 반기는데 송광사의 남변으로 부터 서변을 휘감아 도는 계류상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그 위에 지은 누각으로, 회랑 모양으로 길게 다리 위 전체를 덮어 천왕문으로 이어진 이 누각은 수중보로 만들어진 인공 소(沼) 위에 가로걸쳐 있어서 이곳 난간에 기대앉으면 들고나며 떨어지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보고 즐길 수 있다. 철따라 변화하는 산 모습이 이곳에 잠기고 때로는 달과 별이 잠행(潛行)해 가기도 하니 정년 이곳에 오르면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에 쓴 대로 날개 돋쳐 날아 오르는 신선(羽化而登仙)이 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옛 사람들도 이곳을 우화각이라 하였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상류쪽을 바라보면 시내를 베고 있는 누각이란 뜻을 지닌 침계루(枕溪樓)의 웅장한 이층 누각 건물이 시냇가에 솟아 있고 하류쪽을 보면 육감정(六鑑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임경당(臨鏡堂)이 시냇가에 쌓은 축대 위에 지어져 있다. 육감정이란 육근(眼耳鼻舌身意의 六根)을 고요히 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비춰 보는(鑑) 정자라는 의미일 것이고, 임경당 역시 거울 같은 물가에 임한 집이란 뜻일 것이니 아래위 물가에 지어진 이 두 채의 건물은 송광사 50여 동 건물 가운데 가장 운치있는 곳이다. 그래서 옛부터 송광사를 찾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숙소가 되기도 하고 음영휘호(吟詠揮毫)의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전각들은 1951년 무장공비 방화시에도 소실을 면하여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된다. 소조사천왕상과 사천왕상복장유물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천왕문을 지나면 우리나라 어느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십자형 대웅전 건물이 정면으로 우뚝 솟아 있고 왼쪽에는 승보전(僧寶殿), 오른쪽에는 지장전(地藏殿)이 날개처럼 벌려 서 있는데, 모두 단청빛이 새로워 근래 새로 지은 건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였고 100여 칸쯤되는 절로 30,40여 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고려 인조 떄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입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이후 50여 년 동안 버러지고 폐허화 되었던 것을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하고 용맹정진하였던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 ~ 1210)가 대수도장으로 탈바꿈 시킨 후 고려 명종 27년(1197) 그의 문인(門人) 수우(守愚)가 이곳을 안선처(安禪處)로 지목하고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충헌(崔忠獻, 1149 ~ 1219)의 비호를 받아서 장악한 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감행하여 그 해 안에 80칸의 집을 짓는 대역사를 끝냈다.
그 당시 무신난을 합리화 시켜줄 논거를 찾고 있던 최충헌에게 목우자가 주창한 "홀연히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소위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은 혜능(慧能, 638~ 713)이 주창한 남종선(南宗禪)의 입장에서 신수(神秀)가 주창한 북종선(北宗禪)을 아우르고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편견과 분열로 지리멸렬되어 가던 고려 불교의 승풍을 크게 떨쳐 일으키게 만들었던 사상이 폐부에 와 닿았던 것이다. 즉 보조국사의 이런 혁신사상은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무신난(武臣亂)을 합리화 시켜주기에 알맞는 것으로, 우선 깨치고 그 다음에 점차 닦아 나간다는 논지가 기존 질서를 무력으로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열어가고 있던 무신들에게 자기 합리화의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보조의 문도들과 무신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질서로 잉태되었던 것이 바로 송광사라고 생각된다. 그 후 이미 무신 최씨의 비호 아래 태자가 되었던 희종(熙宗)이 등극하자 태자 시절부터 보조국사를 스승으로 모시던 희종은 송광산(松廣山)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로 이름을 바꾸어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내림으로써 보조국사가 조계일문(曹溪一門)을 개창하였음을 국가적으로 공인한다. 이로부터 조계산문은 더욱 최씨 정권과 밀착되어 최우(崔瑀, ? ~ 1249) 집정 시대에는 보조국사의 법통을 이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 ~ 1235)이 산문을 지키면서 최우의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 형제를 출가시켜 그의 제자로 받아들일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다. 이후 만전은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환속한 후 최씨 정권의 3대 계승자가 되니 그가 바로 최항(崔沆, ? ~ 1257)이다. 이렇게 최씨 정권의 비호하에 급성장한 조계산문은 이후 몽고 지배시대에도 계속 왕권과 밀착하여 그 세력기반을 확장하였기에 이후 보조 법통을 이은 조계산문의 수장들이 계속 국사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 후 조선 왕조의 개국에 일조를 한 무학 왕사(無學王師, 1327 ~ 1405))와 그의 사제 고봉(高峯,11350 ~ 1428)이 분열 타락한 불교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을 강요한 조선 왕조의 정책에 힘입어 이를 다시 조계일종(曹溪一宗)으로의 통합을 유도하면서 스스로 송광사의 주지를 맡은 후 국력을 빌려서 대중창 불사를 일으켜 조계종의 근본 도량으로 송광사의 사격을 높이니 송광사는 조계종의 근본도량이자 승보종찰(僧寶宗刹)로 그 지위를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후 임진.정유왜란을 겪고 불교계가 선교(禪敎)의 분별을 버리고 서산대사 중심의 조계일종으로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조계종찰인 이 송광사는 서산대사(1520 ~ 1604)의 법제(法弟)인 부휴(浮休,1543 ~ 1615) 선사가 난후 중창을 감당한 것을 인연으로 점차 그 법손(法孫)들이 재적승(在籍僧)의 대부분을 차지해 가서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할만한 선교(禪敎) 겸전(兼全)의 일대종사(一代宗師)들이 계속 배출되어 조선왕조 후기의 불교계를 이끌어 가면서 승보종찰로서의 명예로운 전통을 잃지 않으려고 보조 청훈(普照淸訓)을 몸소 실천하여 승풍진작에 앞장서 왔기에 승보종찰의 위상을 더 날리게 되었으며, 그 후 이 전통이 현재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와 조계총림(曹溪叢林)의 불문청규(不文淸規)를 이루고 있다.
 
3, 승보의 상징 사리탑(舍利塔)과 수선사(修禪社)
 
승보종찰을 표방하는 송광사는 다른 여느 사찰과는 달리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는 바, 대웅전 바로 뒤 상단에 설법전(說法殿)과 수선사(修禪社)가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설법전이야 교종 사찰에서도 강당이 대웅전 후면에 오는 것이니 그리 특이하다고까지 말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이 역시 층단을 이루는 산지(山地) 가람에서는 대웅전을 압도하게 되어 기피하는 것이 상식이었고 더구나 수선사와 같은 수도장을 불전을 내려다 보는 자리에 짓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송광사만은 유독 승보가 위주라서 불전을 내려다 보는 곳에 이들 가람을 배치함으로서 승보의 수선 공간이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상사당(上舍堂),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의 선방과 응진전(應眞殿), 설법전, 수선사, 국사전(國師殿, 고려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창건되어 보물 1043호인 송광사 16국사 진영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현재 송광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 제56호) 진영당(眞影堂)이다. 현존하는 상사당과 하사당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담당국사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보조선사 사리탑 아래의 영천수(靈泉水)를 마시고 사흘만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하였다는 일화 때문에 삼일암(三日庵)이라고도 하는데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들어서고 부터는 조계총림의 총수인 방장의 거처가 되어서 미소실(微笑室)이라 불린다.
 
이같은 승보 우선 사상은 불교가 철저하게 중국화된 결과로 출현한 종파인 선종(禪宗)에 기인한다. 이 선종에는 중국 사회제도의 기본인 종법(宗法) 사상이 근저에 깔려 있어 조사(祖師) 숭배와 법맥상승(法脈相承)을 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선종이 그 체제를 완비하던 6조(六祖) 혜능 시대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기에 선종에서는 그 조사의 유골을 명당에 탑을 세워 봉안하는 것으로 일문(一門) 개창을 표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도 모두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구산선문 조사의 부도(浮屠: 高僧舍利塔) 자리는 명당이 아닌 곳이 없고 그 명당을 찾아 선문종찰(禪門宗刹)이 건립되었기에 송광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조계종조(曹溪宗祖)인 보조국사 사리탑이 방장의 거처인 삼일암 왼쪽 높은 언덕 위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후 16국사들의 사립탑도 산내(山內) 각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고, 그 부근에는 이를 수호하는 부도전(浮屠殿) 성격의 암자들이 지어져 있으니 광원암은 진각국사(眞覺國師), 자정암은 자정국사(慈靜國師), 청진암은 청진국사(淸眞國師), 천자암은 담당국사(澹堂國師)의 탑전(塔殿)으로 볼 수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산내 명당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고승대덕(高僧大德)이라 하더라도 사리탑 건립에 국력의 보조가 없게 되니 자연 명당을 찾아 독립적으로 부도를 세우지 못하고 마치 가족묘지나 공동묘지처럼 한 곳에 집중적으로 작은 규모의 사리탑을 밀집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생긴 것이 고봉 등 부도암(浮屠庵) 곁의 부도림(浮屠林)으로 송광사의 부도림은 대웅전 위에 건립되어 있는 보조의 사리탑과는 달리 아쉽게도 송광사 일주문 못미쳐에 건립되어 있다.
보조국사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는 동쪽 산등성이의 남쪽 높은 구역이 모두 수선구역으로, 이는 대웅전 상단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보통의 사찰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가람배치 방법이지만 수선(修禪)을 위주로 하는 승보종찰이기 때문에 중심 불전인 대웅전 상단에 승보의 수선처(修禪處)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4, 송광사의 보물들
 
1997년 준공 개관된 송광사에는 드문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는 송광사 성보박물관에는  국보 4점과 보물 135점 및 전남유형 38점, 전남기념물 1점, 천연기념물 1점, 도지정문화재 39점 등 총 6천여점의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송광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1467호와 1468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조사천왕상과 사천왕상복장유물(조선 세조 간경도감에서 복각한 것으로 전해지는 경전실물), 보물 제134호인 고려시대 경전을 감싸던 대나무로 만든 경질, 국보 제42호인 보조국사께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예불하였던 당나라 때 만든 목조불감, 보물 제1367호인 고려 충렬왕 때 원각국사가 원나라 쿠빌라이로 부터 받았다는 티벳문법지(文法旨), 국보 제43호인 1214년 고려 고종이 진각국사에게 '대선사'호를 내려준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175호인 고려시대 상아로 만든 경패, 보물 제176호인 신라말기의 금동요령이 있고, 이 외에도 부처님전 공양을 올릴때 사용하던 용기인 능견난사, 국재를 모실 때 대중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비사리구시 등이 있다.
전각으로는 고려 공민왕 18년(1369년)에 건립된 보물 제56호인 국사전, 보물 제263호인 조선 세조 7년에 지어진 승방건물인 하사당, 영조 27년(1751년)에 중창된 사방 1칸의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불전이자 대들보가 없이 공포만으로 짜여진 천장이 독특한 건물인 보물 제302호인 약사전, 정조 17년(1793년)에 중창되었으며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대회탱(보물 제1368호)과 부처의 일대기를 표현한 팔상도가 있는 보물 제303호인 영산전, 1902년 고종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된 왕실기도처로 1903년에 건립된 관음전, 연산군 10년(1504년)에 지어져 현재까지도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보물 제1367호로 지정된 석가모니 후불탱과 16나한탱이 있는 정면 3칸의 맞배집인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응진전 등이 있고, 담당국사의 탑전인 천자암에 있는 수령 800여 년으로 하늘을 향해서 용틀임하는 것같은 신기하고도 아름다우며 천연기념물 제88호인 쌍향수(雙香樹)가 있다.
 
5. 찾아 가는 길과 숙식
 
(1) 자가용 이용시: 호남고속도롤 - 남해고속도로 - 주암I.C - 보성,벌교 방향 18번 국도 - 외송방향 834번 지방도 - 송광사
(2) KTX나 대중 교통 이용시: 순천 시내에서 City Tour 이용하는게 편리. 자세한 사항은 본지 2011년 11월호 79쪽 참조.
(3) 숙식: 본지 2011년 11월 호 79쪽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가을 순천만'  참조
(4) 문의 : 조계총림 송광사 종무소 - (061) 755 - 0108, www.songgwangsa.org
              순천시 관광진흥과 - (061) 749 - 3328
 
 
 
 

 

* 승보사찰인 송광사 대웅전과 우화루 : 전형적인 금계포란형국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보조지눌이하
16 國師를 배출시킴으로써 僧寶사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