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북악(北岳)
한북정맥의 지기(地氣)가 모여있는 북한산(北漢山, 836.5m)은 우리 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진산(鎭山: 뒤에서 호위해 주는 산)이자, 또한 한북정맥(漢北正脈: 백두대간에서 한강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산이기도 하다. 이같은 북한산 지기(地氣)의 응결처(凝結處)인 북악(北岳,342m)의 기맥(氣脈)이 흘러내린 선상(線上)에 대한민국의 심장부라는 청와대와 조선왕조의 심장부라는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다.
한강북쪽을 흐르는 산줄기인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이 금강산을 향해 달리다가 철령 근처 분수령(分水嶺)에서 일맥(一脈)이 출맥(出脈)하면서 동행(東行)하는 백두대간(白頭大幹)과는 달리 서남쪽으로 꺾어져 금화(金化) 오갑산(五甲山), 불정산(佛頂山), 대성산(大成山), 백운산(白雲山), 포천 운악산(雲岳山), 양주 주엽산(注葉山), 축석현(祝石峴), 불곡산(佛谷山), 도봉산(道峰山), 삼각산(三角山), 노고산(老姑山)을 솟구쳐 올린 다음 교하까지 이어진 후 서해로 들어간다. 한북정맥은 왼쪽에 북한강을 끼고 계속 남하하여 교하까지 내려올 동안 북한산을 빼놓고는 이렇다할 명산을 만들지 않으면서 헌걸찬 기상을 깊숙히 숨겨놓았다가 북한산에 이르러 그 기운을 한꺼번에 모두 토해 놓으니 그 기세(氣勢)가 참으로 대단하기에 한반도의 심장부가 되었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상 나무의 열매는 통상 원줄기가 아니라 가지 끝에 맺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맥에 서린 기운도 그 끝자락에서 크게 떨치기 때문에 대부분 산맥의 끝자락엔 큰 도회지터, 도량(道場)터, 음양택명당(陰陽宅明堂: 묘지 및 집터) 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뭇 산맥의 원줄기인 백두대간 끝자락에는 지리산이 솟아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 불리우면서 그 안에 수 많은 수도(修道)터를 품고 있고, 백두대간에서 청천강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청남정맥(淸南正脈)의 끝자락엔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황해도로 들어간 산줄기인 해서정맥(海書正脈)의 끝자락에는 구아갈 단군께서 선인(仙人)이 되셨다는 성산(聖山)인 구월산이,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로 뻗은 산줄기인 예성남임진북정맥(禮成南臨津北正脈)의 끝자락에는 송악산을 빚어 올려서 그 기슭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 한강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끝자락에는 관악산과 마리산(마니산)이 솟아 있어 관악산 북쪽엔 거대한 도회지(서울 남부지역)가, 또 남쪽 기슭엔 정부 제2종합청사가 들어섰고, 강화도 마니산에는 겨레의 조상이라는 단군성조께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만드신 참성단이 들어서 있어 단군성조의 자취가 뚜렸이 남아 있는 우리 겨레의 성지가 되었다.
백두대간에서 금강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금북정맥(錦北正脈)의 끝자락엔 예산의 가야산이 솟아 있고, 이 가야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 속에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택대명당이라는 소위 '자미원(紫微垣)'이라 알려진 음택(묘지)대명당이 깃들여 있어, 여기에 서린 정기로 세계만방을 평화롭게 잘 다스릴 세계적 영도자가 곧 나오리라고 예언하는 이들도 있다. 금북정맥의 남쪽에는 백두대간에서 금강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인 금남정맥(錦南正脈)의 끝자락에는 계룡산이 솟아 있어 옛 선지자들은 서울의 지기가 쇠약해지면 수도가 이 계룡산 밑으로 옮겨간다고 예언하기도 했던 바, 지금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더러 있기도 하다. 현재 세종시 행정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제 그 때가 되어 이들의 예언이 현실화되어가는가 보다. 이 뿐만 아니라 계룡산에서 서쪽으로 뻗어간 산줄기 끝에는 20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가 있다. 백두대간에서 호남쪽으로 뻗어간 산줄기인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끝자락에는 두륜산, 승달산, 백운산 등이 솟아 있는 바, 대흥사가 깃들어 있는 두륜산은 가뭄, 홍수, 전쟁으로 인한 재난인 소위 삼재(三災)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삼재불입(三災不入)의 복지(福地)로 조선조 후기에는 이 산자락에서 숱한 고승대덕들이 배출되어 꺼져가는 조선 불교의 법맥(法脈)을 이어가게 만들었고, 승달산 서쪽에는 승달산의 기운으로 지방항구로는 보기드물게도 큰 항구인 목포가 생겨났으며, 백운산 아래에는 거대한 철광도시인 광양시가 들어서 있다.
백두대간 끝자락인 지리산에서 낙동강 남쪽으로 뻗어 간 산줄기인 낙남정맥(洛南正脈)의 끝자락에는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김해가 있고, 백두대간에서 낙동강 동쪽으로 뻗어 내려간 거대 산줄기인 낙동정맥(洛東正脈)의 끝자락엔 금정산(金鼎山)이 솟아 그 아래에 부산(釜山)이라는 우리 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도회지를 형성토록 하고 있다. 이같이 큰 산줄기의 끝자락에는 도읍터나 대수도장, 대도회지의 기상이 서린다. 그래서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있는 북한산은 도읍터의 기상을 품고 있기에 북한산 아래 자리잡은 서울이 조선왕조 개국 이후 현재까지 620여 년간 도읍지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주산(主山) 북악(北岳)을 비껴앉은 청와대(靑瓦臺)
수도는 한 나라의 머리이자 심장부이며,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의 중요한 정책들이 모두 수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도읍터에 서린 지기는 모든 국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기에 국민의 생활, 나아가서 나라의 역사와 운명이 도읍터 지기에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도의 지기(地氣)가 좋으면 그만큼 국민들이 복되게 살고, 나쁘면 나쁜 만큼 힘들고 불행을 겪는다. 그래서 전세계의 모든 왕조들이 도읍터를 신중하게 잡게 되었고, 또 그 만큼 지대하게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일례로, 고구려의 장수왕이 진취적 기상이 강했던 넓은 만주벌판에 있는 국내성을 버리고 소극적, 폐쇄적(閉鎖的) 기운이 강한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망하는 일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읍지도 물론 아주 중요하지만, 수도(首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통치권자의 집무와 거주처다. 통치권자의 집무와 거주처는 한 나라의 머리와 심장부인 도읍지 중에서도 핵심지(核心地)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지가 아주 중요하며 국민들의 실생활과 나라의 운명에 직결되어 있다고 보겠다.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있는 북한산이 기(氣)를 응축하여 기봉(起峰)시킨 북악산(北岳山) 기슭에는 대한민국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집무 및 거주처인 청와대와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집무 및 거주처인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다.
북한산과 북한산의 한 지봉(支峰)인 북악은 기상이 매우 웅장하기에 가히 만백성을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위용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리라고 본다.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있는 북한산의 주맥(主脈)은 정상인 인수봉과 백운대(836.5m)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어 왔는데, 이 주맥을 따라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치솟아 올랐으며, 이들 봉우리들은 대부분 끝이 뽀족하고 몸통이 날렵한 새하얀 바위봉우리들로 붓이나 불꽃처럼 생겨서 멀리서 보면 마치 불이 타오르듯한 불꽃 형상(火星)을 하고 있어 푸른 하늘 및 푸르른 초록빛 나무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에 그 모습이 참 꺠끗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타원형(木星: 수려하면 賢君과 聖賢, 훌륭한 학자와 大道人, 仙人을 배출하는 바, 도읍지에 이런 봉우리가 있으면, 현인군자와 빼어난 수도인들이 많이 나와 그들이 나라의 풍속을 아름답게 가꾼다)으로 곧게 자란 나무처럼 수려하고 중후하게 생겨 마치 선비나 도인이 쓰는 굴건(모자)처럼 생긴 인수봉과 반듯하면서도 끝이 뽀족한 삼각형(紫氣星: 아주 귀한 기운으로 군자의 기상,대학자,문필가의 기상이 서려서 어진 임금과 高人達士, 깨끗한 선비들이 배출됨)으로 생긴 백운대를 제외하고는 모양새가 하나같이 비뚫어져서 수려한 기운(秀氣)이 크게 부족할뿐만 아니라 뽀족뽀족한 봉우리들이 금방이라도 쓰려질듯이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멀리서 보면 마치 미친용(狂龍)이 갈기와 비늘을 세우고 미쳐 날뛰는 듯하기에 두려움까지 주고 있다. 그래서 이 두려움과 불안감만큼 나쁜 흉한 기운을 내뿜는다. 풍수학에서는 화성의 산이 맑고 수려(반듯하고 단정하게 생긴 산을 말함)하게 생기면 학문, 문필,예능의 기운이 크게 감돌아서 이 기운을 받아 훌륭한 관리, 학자, 문인, 예술가, 총명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지만, 흉(모양이 비뚫어지거나 깨진 데가 있거나 우악스럽게 생김)하게 생기면 전쟁, 투쟁, 화재, 전염병 등의 악기(惡氣)가 서리어 흉악한 사람을 배출하면서 전쟁, 투쟁, 화재, 전염병 등의 갖가지 흉한 화를 불러온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비뚫어진 사람, 거칠고 난폭한 사람들을 배출한다고 본다.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은 생김새가 인수봉처럼 타원형에 가까운 목성(木星)으로 비록 높이는 해발 342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 높이 우뚝 치솟은 모양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매우 강한 기상을 느끼게 만드는 산이기에 왕이 머물 만한 곳이기는 하다. 한데 기세는 위풍당당하나 그 모양에 큰 문제가 있으니 바로 청와대와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북악산의 모습은 반듯하고 단정하지 못한체 마치 마음이 좀 비뚤어진 사람처럼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산의 형상은 모름지기 단정하고 반듯해야만 좋다. 그래야 좋은 기운을 뿜는다.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만큼 나쁘고 흉한 기운을 뿜어낸다. 도읍지와 통치권자의 집무처의 주산이 비뚤어진 형상이면 바른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고 고약한 지배자들이 자주 등장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된다. 설령 간혹 훌륭한 지도자가 나온다 해도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그 결과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 오느날까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보살핀 왕과 지도자가 드물다. 조선조 스물일곱 명의 왕과 해방 후 부터 현재까지 열 명의 대통령을 합한 총 37명 중에서 현군(賢君)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지극히 희소(稀小)하다. 특히 조선조에는 우매한 왕들이 많았으며, 일제 때는 왜인들이 우리 겨레를 억압했고, 해방 후에는 독재자들이 등장했기에 어질고 밝은 지도자는 열에 하나 정도였다.
여기에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북악산에는 결정적인 흠이 두 가지 더 있으니, 바로 바위들이 깨져서 북악산 위쪽에 뭉툭뭉툭한 바위들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과 이 바위들이 마치 도깨비눈 같은 형상을 한체 거대한 두눈을 부릅 뜨고 청와대와 경복궁을 내리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위는 인수봉처럼 꺠지지 않고 단정하며 매끈해야 좋은 기운을 뿜어낸다. 설혹 깨진 바위가 있더라도나무들이 그 모습을 가려주어야 흉한 기운을 뿜지 않는데, 북악은 그렇지 못하니 아주 흉한 기운이 강하게 뻗쳐나온다. 주산은 사람의 신체로 치면 머리에 해당하는 바, 머리가 깨져서 두개골이 훤히 드려나 보이는데다가 그 모습이 마치 도깨비 형상을 한체 내리누르고 있으니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이 온전할리가 없다. 그래서 이같은 지형 아래서는 정신이 바르지 않는 사람들이 배출된다. 성격이상자, 우매한 사람, 완고한 사람, 성정(性情)이 거친 사람 등이 나올 뿐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도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같은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게 된다. 조선왕조의 이성계, 이방원, 세조, 광해군, 연산군, 영조, 사도세자 등과 근세의 독재자들 및 그 하수인들이 모두 살아있는 실례(實例)에 속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면 백성들이 고달플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언서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를 지은 선지자는 오래전에 이것을 우려하여 "한산(漢山)은 금국(金局)이라서 궁궐을 반드시 동향(東向)으로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쇠약해진다. 터를 고르는 자는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동쪽은 허(虛)하고, 남쪽은 낮으니 북악산 아래 터를 잡지 마라. 검은 옷을 입은 도적(倭敵)이 동쪽에서 쳐들어올까 두렵다. (한양땅에) 도읍을 정하려는 자가 스님 말을 들으면 나라의 운수가 좀 연장되지만, 만약 정씨(鄭氏)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걸면 5대도 못가서 왕위를 뺏는 변고가 생기리라. 또 2백 년 후에는 대환란이 닥쳐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삼가 조심하라."고 하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동면(東面)하여 궁궐을 지어라고 했지만, 정작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궁궐동면설을 배척하고 "성리학(주자학)의 예법상 왕은 동면한 예가 없고 반드시 남면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한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북악산 아래다 궁궐을 지었기에 그 후의 역사는 삼한산림비기가 우려한 대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스님(無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씨(정도전)의 시비로 궁궐이 남면하자, 5대도 못 내려가 왕위찬탈의 변고(단종을 내몰고 수양이 왕위에 오름)가 일어났고, 한양 천도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검은 옷을 입은 도적(왜적)들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위태로웠으며, 우매한 왕들의 난정(亂政)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었다.
도읍지와 통치자의 집무 및 거주지의 진산과 주산이 이렇게 생겼으니 포악한 자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된다. 그래서 이 흉한 기운 때문에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부덕한 압제자들이 자주 백성을 억압했고, 권세가들이 횡포를 부렸으며, 때론 외적이 침노하여 우리 강토와 겨레를 짓밟았고, 민족의 비극이라는 6.25 동란으로 동족상잔의 비극도 맛보았으며, 현재까지도 남북이 대치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고, 또 최근에는 연평도 해전 및 천안암 폭침 같은 일어나서는 않되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같이 사악한 무리가 강성한 기세를 떨치니 참된 사람, 정인군자(正人君子), 현인군자(賢人君子)는 숨어지낼 수 밖에 없었고, 조정에는 밝은 임금, 지혜로운 신하가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백성들은 고초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욱 더 문제인 것은 지금의 청와대가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주맥의 기운을 비껴 앉았다는 점이다. 주맥을 비껴앉았기에
한북정맥이 헌걸찬 기상을 깊숙히 숨겨놓았다가 북한산에 이르러 그 기운을 한꺼번에 모두 토해 놓은 그 기세(氣勢)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청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기운까지를 모두 빼았기게 되니, 옛 조선총독부시절부터 해방 후 경무대를 거쳐서 현재의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불행을 당했다. 일본 정계의 제2인자로 차기 일본 수상 유력후보자였었던 역대 조선총독들은 조선에 부임한 후 일본수상으로 영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모두 불행을 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경무대와 청와대로 들어 갔던 역대 대통령들도 모두들 불행을 당하여 박정희, 노무현씨 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혹은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씨 같이 불명예 또는 전두환씨 처럼 영어의 몸이 되었고, 그들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비서실 등에 함께 근무했었던 그들의 수하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어의 몸이 되거나 스캔들 등으로 불명예를 안고 물려났으니 흉한 땅의 기운은 이렇게 정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나라와 국민들이 편안할려면 지금의 청와대를 반드시 옮기거나 좌향을 다시 잡아야만 한다.
3. 청와대 둘러보기
(1) 청와대(靑瓦臺)란?
청와대는 '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란 뜻'으로 대통령의 집무 및 생활 공간을 일컫는 공식 명칭이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포함하고 있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윤보선 전 대통령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는 실제 건물 뿐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수행부서 전반을 가리킨다. 이곳은 조선시대(1392~1910)왕의 정궁으로 사용된 경복궁과 인접해 있으며, 그 당시는 문과시험과 무술대회, 군사 사열 같은 각종 국가기능이 펼쳐졌던 곳이기 때문에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뒤로는 옛 왕도였던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싸 보호하고 있는 4대 주산의 하나인 북악산(342m)이 우뚝 서 있으며, 북악산을 기점으로 이들 4대 산의 능선을 따라 옛 성곽들이 축조되었고 조선조 시대의 성벽 일부는 아직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 북악산 산기슭은 왕궁과 가까울 뿐아니라 빼어난 경관 때문에 근처에 왕족들과 양반사대부들이 많이 자리잡고 살았기에 이 일대의 절경을 묘사한 시, 그림, 문학작품을 허다하게 만날 수 있다. 현재 청와대는 주변 자연환경을 세심하게 보존하고 있어서 서울에서 최고의 ‘녹색’지역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일부는 수령이 250년 이상된 높이 솟은 소나무, 떡갈나무, 감나무 등과 사슴, 희귀종 새, 다람쥐, 그 밖의 동물들이 자유롭게 땅 위를 돌아다니는 청와대는 환경의 보고로 여겨지기도 하며, 여기에 북악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대통령 관저에서 내려다 뵈는 서울 도심의 모습은 장관이다.
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이곳은 또한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했고, 총독관사를 새로 지어 7, 8, 9대 총독이 사용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획책했기 때문이다(1993년 청와대는 역사적인 고증과 풍수들의 자문을 얻어 구 본관과 총독부 청사로 썼던 건물을 헐어 경복궁의 지기와 민족정기를 되살렸다). 그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 군정사령관인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 청와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었다.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이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후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되었다.
(2) 청와대 둘러보기
청와대관람은 안내자로 부터 청와대 현황을 설명 들은 후 경찰관의 안내에따라 도보로 이동하며 관람하게 된다. 제일 먼저
첫번째로 관람하는 곳은 아름다운 '녹지원'이다. 녹지원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으며, 과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 때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에 약 3305.8㎡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약 160여 년 수령과 17m 높이를 자랑하는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최근에는 대통령과 외국 국가원수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이곳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개최했으며 대통령 내외분이 한국 올림픽 선수단 전원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기도 했다. 대통령 내외분이 여유있게 녹지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기도 하다.
청와대관람을 하면서 동영상 촬영은 금지되며 사진촬영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허락된다. 이곳 녹지원에서 사진촬영을 할 시간을 주는데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도로에서 녹지원을 배경으로 찍을 수 있다.
- 녹지원 -
녹지원 다음은 '구본관 터' 로 예전 경무대터이다.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景福宮)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 산자락은 일찍이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908년 전인 고려 숙종 9년(1104년)에는 왕실의 남경(南京) 이궁(離宮)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경복궁(景福宮) 후원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경무대, 융문당, 경농재, 벽화실, 오운각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던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알려졌던 이곳에 일제(日帝)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면면한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사령관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에는 관저를, 다음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집으로 남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부 관사 건물을 철거하도록 했고, 옛 지형 대로 복원해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의 명칭을 따라 수궁(守宮)터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철거된 총독부관사 자리에는 빈터로 경복궁 후원의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았는데, 첫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을 그대로 기억하자고 하여 이를 상징하는 표석 하나는 이 위치에 높이 그대로 남겨놓았다. 구본관 터의 뒷쪽으로 보이는 나무에 가려진 건물 하나가 바로 대통령 관저다. 구본관 터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다.
그 다음은 본관건물과 대정원이다. 제6공화국(노태우 대통령) 때 옮겨 조성한 본관은 청와대하면 떠오르는 건물이며 뉴스등에 많이 나왔던 건물이라서 이곳에 오면 누구나 비로소 '청와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 있는 사실은 이곳 이주 공사시 어느날 풀섶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암각 글자가 발견(현재 청와대 신관 뒷편에 있다하지만 알 수 없는 일임)되었는데, 이를 두고 육관 손석우씨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민심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경회루의 주춧돌 밑에 '왕궁조영 국조무궁(王宮造營國祚無窮)'이라고 조각한 옥로잔을 몰래 묻어 우연히 출토된 것처럼 연극을 꾸미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 때의 대원군의 공작품이 아니라 바위와 글자 상태로 보아 이미 천여 년 전에 도선국사가 삼각산 아래 진혈이 맺힌 곳을 알리기 위해서 묻었던 것이 발견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현재 본관의 위치가 진혈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이는 틀린 말로서 천하제일복지라는 암각 판석도 아마도 그가 일부러 묻어두었거나 아니면 그 당시 누군가가 진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묻어두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본관의 1층은 여사의 집무실이, 2층은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으며 그외 몇개의 방과 회의실등이 있다.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으로 활용되는 본관건물은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아름답다는 전형적인 팔작지붕으로 처마 끝에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며 올라가 용마루에서 한데 모이는데 유려한 곡선미가 주는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본관 양옆으로는 두개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본관 앞으로는 넓은 정원이 있는데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넓은 정원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다. 대정원에서는 각종 야외행사와 의장대 사열등이 이루어진다. 사진찰영은 정원 아래로 내려와서 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비교적 많은 촬영시간이 주어지며 정원이 넓어 관람인원도 흩어져서 사진 찍기에 좋다.
대정원에서 돌아 내려오면 영빈관이 있다. 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로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 1978년 1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 준공되었다.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기둥으로 아주 우람하고도 아름답다. 내부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또한 100명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한, 영빈관에서 나와 위족으로 가면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는 항상 개방되어있어 언제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춘추관이 있다. 춘추관은 국내외 언론사 기자 300여명이 출입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 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자료실 겸 작은 브리핑룸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 및 각종 브리핑 등을 하는 브리핑룸이 있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 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다. 이곳에는 청와대출입기자실, 기자회견장 및 브리핑룸, 춘추관장실 등이 있다. 춘추관은 사서오경의 하나인 춘추에서 따온 말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역사의 기록을 담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의 춘추관은 시정(그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으로 고려 개국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 1308년(충렬왕 34년) 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 춘추관으로 고쳤고, 그 후 1325년(충숙왕 12년)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되었다. 춘추관은 1356년(공민왕 5년) 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 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 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 춘추관으로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이였는 바, 조선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 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 1년)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폐지됬다
청와대 서남쪽에 자리잡은 칠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 궁(毓祥宮)을 비롯,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 등 7개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칠궁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8년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왔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다시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칠궁' 관람은 문화재 보존과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청와대 관람과 연계하여 실시되고 있다.
또한, 현재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는 상춘재(常春齋)가 있다. 본디 이 자리에는 원래 약 66m² 정도의 일본식 건물이 있었으며 1983년까지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군데도 없었기에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다. 이에 200년이 넘는 금강소나무를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다.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때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시절 상춘실(常春室)로 그 명칭을 개칭하여 사용하여 왔으며 1977년 12월에 철거하고 1978년 3월 천연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 72.6㎡)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 그후 전통 한식건물로 만들기 위해 1982년 11월 20일 착공하여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면적 417.96㎡의 건물을 1983년 4월 5일 완공하였다. 주 기둥에 사용된 목재는 200년 이상된 소나무(春陽木)이다.
참고로 청와대관람은 모두 예약제로만 이루어지는 바, 청와대 홈페이지(www.president.go.kr)에서 인터넷 접수 후 관람하면 된다.
동창회 홈 피에서 지인이 쓴 글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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