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시대 구덕운동장
동래고등학교 정문앞
자료출처:
재경백양마라톤회 김상복님
http://cafe.daum.net/baekyangma/325u/5
* 부산항일학생의거-노다이사건에 대하여 "부산지역학생운동사"-강대민.저 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부산항일학생의거(노다이 사건)
2006.07.11
재경백양마라톤회
본 자료는 2003.09.09 국학자료원에서 발행한 강대민.저 『부산지역학생운동사』에서 부산항일학생의거(노다이 사건) 편을 원본대로 옮긴 것임 |
<저자가 참고한 문헌>
□ 부산시사편찬위원회「부산시사」제1권 Page 1034-1038
: 1976 태화출판사 김의환「부산근대 교육사」
□ 부산학생 항일의거 기념논집 편찬위원회
: 1992 계림출판사「부산학생 항일의거의재조명」
일제는 1940년 11월23일 부산, 마산, 진주 인근지역의 학생들을 모집 하여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21일 학생들을 동군(부산제2상, 부산중학교(일본인중학교),부산제1상(일본인중학교))과 서군(동래중학교, 마산중학교(일본인 학교), 진주농업학교)으로 편성하여 동군은 구포에서 서군은 진영역에서 각각 하차하여 양군 모두 김해 방면 특히 한림정에서 조우전을 벌리는 모의 전투훈련을 했다
그러나 일제는 훈련과정에서 보급품 부분에서 조선 학생들에 대해 편파적 민족차별을 함으로서 조선학생들로 하여금 이미 불만을 품게 했다
사실 제1회 경남 전력증강국방대회는 조선인 학교인 동래중학교이 우승을 했다
이에 경남전역의 일본인 학교 군사교관들은 당황하여 제2회 대회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인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하여 계획을 꾸몄다
그 예로서 40년 여름의 소위 근로봉사 작업(각 학교마다 매 여름 방학중 1주일씩 근로 동원하는 것)시 어느 날 작업 후 늦게 숙사에 들어와 저녁밥이 점심때의 식은 밥이었기에 학생들이 여기에 항의했다
이에 당시 교감이었던 요시카와는 학생들의 문제 제기를 일축하고 그날 밤에 고역을 맡게 하여 등산로를 우회 행군시켜 일본인 학생들보다 체력을 더 소모케 했다
그 이유는 이 훈련이 끝나는 다음날이 바로 제2회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처름 일제는 제2회 대회에서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자행했다
어쨌든 이틀 동안의 야영 훈련을 마친 동군과 서군은 11월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전력증강국방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참가한 학교는 진주중학, 마산중학, 동래중학, 부산중학(일본인 학교), 부산제2상, 부산제1상(일본인 학교), 진주농고, 울산농고 등의 5학년제 중학과 여학교로는 동래고녀, 부산항고녀, 부산고녀(일본인 학교), 삼도고녀(일본인학교) 등이었으며 3년제 을종학교는 김해농고, 밀양농잠, 마산상업, 통영수고, 입정상업, 초량상업 등 이었다
이상의 학교들이 참가하여 시합하기로 한 경기종목은 다음과 같다
〈표 20〉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경기종목 내용
경기종목 |
경기내용 |
100 미터 |
개인이 총을 가지고 달리기 |
400 미터 릴레이 |
4 명이 한 조가 되어 총을 바톤으로 하여 달리기 |
80 미터 장애물 |
총을 들고 한 사람씩 한 장애물을 뛰어 넘는 것 |
넓이뛰기 |
5 명이 한 조가 되어 무장하여 넓이 뛰기를 하는 것 총점수로써 우열을 가림. 이때 총구멍이 땅에 닿으면 무효임. 이유는 총구멍이 흙이나 모래가 들어가면 총을 쏠 수 없다는 것 |
높이뛰기 |
5 명이 한 조로 무장한 상태에서 총만 가지지 않 고 높이뛰기를 하되 대검이 빠지면 무효 |
턱걸이 |
5 명이 한 조가 되어 철봉에 턱걸이 하는 것 총은 가지지 않음 |
수류탄 던지기 |
5 명이 한 조가 되어 수류탄을 멀리 던지는 것 |
토낭운반 |
모래를 넣은 가마니를 짊으지고 달리는 것 5 명이 한 조가 되고 가마니 중량은 8관(30kg) |
비상소급 |
바지만 입고 누워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빨리 일 어나 달리면서 옷을 입고 각반을 무장하여 달리기 |
담가운반 |
5 명이 한 조로 1인은 환자가 되어 담가에 실리고 넷이 들고 달리기 |
중량물 들기 |
6 관(22.5kg)짜리 역기를 많이 들어 올리는 회수 경쟁 |
씨름 |
5 명이 한 조로 구성 |
견인경주 |
큰 나무 널판 위에 모래 가마니 세 개를 싣고 5 명이 한 조가 되어 긴 줄을 잡고 끌어 당기기 |
줄당기기 |
20 명이 한 조가 되어 긴 줄 당기기 |
무장행군 |
20 명이 무장하여 한 손에 긴 줄 하나를 잡고 2,000 미터 마라톤 하기 |
출전:동래고등학교동창회 「동래고등학교 100년사」2002. 212pp
하지만 일제는 대회과정은 물론이고 대회의 시작부터 계속해서 조선학생에 대해 부당한 처우와 판정을 내렸다
전년도 제1회 대회에서 우승한 동래중학교가 당연히 우승기를 가지고 입장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을 맨 먼저 입장시키고 그다음 마산중학, 세 번째로 동래중학을 입장시켰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일단 본 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동래중학에 대한 편파적 경기운영은 대회 동안 계속되었다
경기가 시작하자 달리기 등의 개인 종목을 먼저하고 단체 경기로 옮겨갔다
그런데 우승팀이었던 동래중학교가 점차 두각을 나타내 선두를 달리기 시작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인 심판관은 노골적으로 동래중학이 1등만 하면 반칙이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턱걸이에서 동래중학 선수 한 학생이 20여 회나 했는데도 불구하고 심판관이 딴 학교 선수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구실 아래 힘이 빠진 동래중 선수에게 다시 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재 경기에 임하게 되었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또 넓이뛰기 경기에서는 제일 많이 뛴 동래중 선수로 하여금 줄을 밟았다고 하여 실격시키는 등 갖은 편법을 동원하여 성적을 불리하게 했다 동래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히 경기에 임하여 담가운반 경기에서는 동래중이 1등, 부산중이 3등을 했고 중량물 들기에서는 진주농고 선수가 105번을 들어 1등을, 동래중의 박근준 선수는 95번을 들어 2등을 차지했다
이밖에 씨름경기에서는 부산제1상 주장과 동래중 주장 표재철(유도초단)이 대결하여 2등을 차지했다
이 같은 승전에 따라 동래중과 부산중과의 점수 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졌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인 심판관은 더욱 악락한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곧 행군경주에서 지방 학교인 2조의 시간을 잘못 재었다고 하면서 1조부터 다시 하도록 했다
그때 동래중 선수들은 재 시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수영장 쪽에 숨어 재 시합에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동래중 배속장교의 열화같은 독촉에 하는 수 없이 재 시합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교롭게도 경기 도중 동래중 선수가 넘어짐으로서 결국 부산중과 동래중과의 점수 차는 줄어들게 되었다
심판관들은 여기에 더욱 고무되어 노골적 부정을 감행했다
아예 오후에는 점수판에 점수도 기입하지 않았으며 각 학교의 총점수도 발표하지 않고 단지 범법만 일삼으면서 얼버무렸다
그렇지만 동래중 학생들은 점수를 계산했다
줄당기기에서는 동래중이 이겼는데도 패했다고 발표하여 동래중 학생을 흥분시켰다
일본인 심판관의 이러한 부정행위가 있을 때마다 동래중 영어 교사 김영근은 본부석에 달려가 항의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무슨 종목이든 동래중이 이기고 부산중이 지면 트집을 잡아 재 시합을 시키든지 아니면 복장이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점수를 감점하는 등 대회 규칙에도 없는 야비한 수단을 예사로 사용했다
그 한 예로 동래중의 총 점수 끝이 0.5로 끝났는데 당시 대회 경기 종목점수는 모두 1점, 3점, 5점, 10점, 20점등으로 끝 점수가 0.5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래중의 점수가 이렇게 된 데는 복장이 나쁘다, 단추가 안 잠겼다, 각반이 틀렸다는 등 트집을 잡아 억지로 일본인 심판관이 점수를 깍아 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따라서 마지막 종목 1개 분대 장거리 구보행군에서 동래중이 우승하거나 만일에 실격하더라도 총점에서 0.5점 차로 부산중을 제압하고 당당히 우승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만의 채점 집계가 아니라 참가한 도내 전교사들은 물론 전학생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장거리 구보 최종경기에서 동래중이 당당히 1위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모의에 의해 심판관들은 심판장 노다이의 지령에 따라 복장검사에 있어 심판관들이 자기 손으로 단추 혹은 각반을 건드려 풀어놓는 등 형용할 수 없는 야비한 수단으로 트집을 잡고 복장미비란 구실을 달아 실격을 선언하고 2위였던 당시 일본인 학교 부산중을 1위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동래중 학생들은 또 다시 항의 했으나 역시 일축 당했다
이때부터 동래중 학생들은 분통을 참지 못해 우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실격되더라도 총점에서 동래중의 우승이 틀림없는 사실이었기에 심판의 결정을 수용했다
그러나 폐회식이 거행되기 직전 총점결과가 부산중이 1위라는 말이 들리게 되자 김영근 교사로 하여금 심판장에게 집계의 착오를 지적하고 동래중학의 우승을 인정하여야만 된다고 항의했다
여기에 노다이는 “심판의 판정은 신성하고 절대 불가하므로 판정을 따르라” 고 하며 김 교사의 항의를 일축했다
이에 참고 참던 울분이 폭발하여 함성을 울리면 반항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폐회식에 들어가 식순에 따라 노다이가 부산중학을 우승을 선언하려 하려고 했다
그 부당함을 항의할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폐회식은 점점 더 험악해 지는 가운데 진행되어 일본국가를 합창할 때였다
일제에 대한 평소에 숨어있던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장내를 흐르는 일본국가에 맞추어 동래중 학생들은 욕설이 된 가사로 응수 했다
흔히 철없는 아이들이 하는 욕설이 일본국가의 곡조에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렸는지 모른다
분함과 초조감과 슬픔으로 교차된 억제할 수 없는 정열의 화염은 참고 또 참아온 민족의 울부짖음이 되어 저물어 가는 구덕산 기슭은 울음바다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같은 피를 이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도 동족의 이러한 억울함을 방관하지 않고 동래중 학생들과 밀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폐회선언이 되자 동래중학생들과 부산제2상학생들은 “일본놈을 때려라 죽여라 노다이를 죽여라”등 폭언과 함께 소지했던 총기로 일본인 학생을 물론 일본인 교사들을 마구 구타하시 시작하여 어두운 공설운동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경관들이 칼을 빼들고 제지하니 닥치는 대로 칼을 뺏어 부셔 버리고 차안이 뇌사상태가 되었다
한편 동래중의 한패는 재빨리 입구를 막고 주범 노다이를 찾았으나 운동장 뒷담을 뛰어 넘어 도망했다
흥분한 동래중학생들은 심판을 맡았던 일본인 배속 장교를 찾아가서 부정을 항의하고 일본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카요 일본인 교사가 노다이를 두둔하다가 폭행을 당하였고 사태가 점점 험악했다
이때 부산제2상이 합류하여 모오라라는 부산제2상 교사가 두들겨 맞고 동래중학생에게 밟히었다
이에 3학년 김재한, 강우중, 4학년 김영진 등이 검거되었다
사태가 점점 심상치 않은 것을 예감한 동래중 김영근과 허현 교사는 학생들을 집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동래중 일본인 교사들은 모두 잠적했다
또 타교의 일본인 교사들은 자기학교 학생들이 동래중의 움직임에 합류할까 두려워 학생들을 데리고 빠져나가느라고 바쁜 걸음을 쳤다
동래중학생들도 간신히 줄을 지어 겨우 운동장 문을 나가니 이때가 오후 7시 무렵이었다
동래중학생들은 운동장 밖에 나가 정렬하여 총을 맨 학생을 앞세우고 행진해 나갔다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김영근, 허현, 교사만이 목이 메어지도록 고함을 지르면서 학생들을 인솔했다
부산제2상도 행동을 같이 했다
보수동으로 내려오면서 우리 민요와 황성옛터 등을 불렀다
보수동을 지나면서 일본인 집이 많아지자 항일구호는 더욱 고조되었다
마침 이 날은 일본인의 축제일이라 집집마다 등불을 밝게 켜 놓은 것을 부숴 버리기도 하고 “일본인은 물러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겁을 집어먹고 집안으로 도망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때 학생들의 행렬과 동행하고 있던 김영근, 허현 두 교사는 “부산제2상과 줄을 분리하라”고 외쳤으나 학생들은 막무가내였다
한편 운동장 폐회식 때부터 형사와 헌병은 학생들의 뒤를 따르면서 행동을 감시했다
보수동 네거리에 와서 부산제2상은 대청동 쪽으로 내려가고 동래중은 부평동 쪽으로 내려갔다
남선전기(현 한국전력 부산지사) 아래 쪽 네거리에서 학생들을 일단 정지시키고 서부 부산지방의 학생들을 귀가시키던 김영근은 “지금까지는 제군들의 행동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지마는 이제부터는 제군들이 하는 행동은 나는 책임질 수 없다
여기서 서부 부산지역학생들은 귀가하고 동래에 갈 학생들은 전차를 타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서부 부산지역학생들 중에 하급생은 돌아가고 총을 가지고 동래에 갈 일부가 전차를 타기 위해 남아 있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전차를 타기 어렵다고 생각한 하급생들과 4, 5학년의 대부분 학생들은 부평동을 지나 현재의 광복동 거리로 나와 창선동 파출소 부근에서 동래행 전차를 기다렸다
동행하던 김영근은 빨리 동래에 돌아 갈 것을 종용했다
이때 학생들속에서 “노다이 집으로 가자”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때 부산제2상 학생은 대청동으로 내려갔으므로 보이지 않고 전차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또 이동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중앙동을 지나 옛 부산일보사 뒤까지 왔다
부산제2상 학생들은 먼저 대청동을 내려와서 동래중학생과 합류했다
이때 총을 가진 학생들과 일부 하급생은 골목실을 빠져나가서 동래 가는 전차를 탔고 주력부대인 4,5학년 영주동 근처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영주동쪽으로 가는 산길을 걸어갔다
이때 추유복이 구 부산일보사 뒤 「다와라 재목점」 모퉁이에서 영주동 길을 인도해 주었다
김영근, 허현 교사는 길을 막고 있었고 남장수는 붙들려 곧 바로 집으로 갔다
길을 막던 두 교사의 마음은 제자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스승으로서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쨌든 모여든 200여명의 학생들은 영주터널 오른쪽에 위치한 노다이 집에 8시경에 도착하여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이렇게 하여 학생들이 돌아갈 10시 무렵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 지령을 내려 귀가하는 학생들을 그날 밤 대거 연행했다
당일 귀가 도중에 검거된 학생들은 지금의 중부산서(당시 남부산서), 동부산서(당시 북구산서), 영도서 등 각 서의 유치장은 물론 심지어 경남도청의 무덕천까지 초만원이었다
이튼날에는 양 교에 형사들이 배치되어 학업은 고사하고 학교는 취조장으로 변했고 매일 수십명씩 양교 학생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학생들은 손가락에 막대끼우기, 코에 고추가루 넣기, 비행기 태우기 등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 당시 일경에 검거된 학생수는 약 200백명에 달하여 주모자로 지목된 양 교학생 15명은 송청, 투옥되었다
양 교 학생중 주동자로 지목되어 구속, 송청된 15명 학생은 다음과 같다
〈표21〉부산항일학생의거로 구속 송청된 동래중, 부산제2상 명단
성명 |
출신교 |
학년 |
1 심 형량 |
김인규 |
동래중학 |
5 |
징역 10월 |
김영조 |
동래중학 |
5 |
징역 10월 |
김명수 |
동래중학 |
5 |
징역 8월 |
이달희 |
동래중학 |
5 |
징역 10월 |
이도윤 |
동래중학 |
5 |
징역 8월 |
이장원 |
동래중학 |
5 |
징역 8월 |
정두열 |
동래중학 |
5 |
징역 8월 |
추유복 |
동래중학 |
5 |
징역 10월 |
김재한 |
동래중학 |
3 |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 |
홍병희 |
부산제2상 |
5 |
징역 10월 |
이병도 |
부산제2상 |
5 |
징역 8월 |
이인희 |
부산제2상 |
5 |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 |
김선갑 |
부산제2상 |
4 |
징역 10월 |
이세기 |
부산제2상 |
4 |
징역 8월 |
김종배 |
부산제2상 |
3 |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 |
출전:동래고등학교 동창회, 『동래고등학교 100년사』2002.p208
이 선고에서 당시 법률이 18세를 형사적 성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위의 김재한, 이인희, 김종배 등 3명은 미성년자로서 감형되었다
징역 8~10월 형을 받은 12명은 대구형무소로 압송되었는데 모두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으면서 제2심을 받던 중 추유복은 유복자 처지라는 사실이 참작되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나머지 11명 모두는 2심에서 8개월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 중 김인규를 제외한 나머지 10명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법정투쟁을 하더라도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상고를 포기했다
김인규 역시 서울고등법원에 상고 했으나 기각되어 결국 11인 모두는 8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김선갑과 김명수 두 사람은 옥중생활의 휴유증으로 출옥 후 2주만에 순국했다. 이를 통해서 당시 일제의 부산항일학생의거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 교는 일제 관헌의 압력에 못 이겨 자체적인 학생처벌을 감행 했는데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들 중 부산제2상과 동래중의 학생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22〉부산제2상, 동래중 퇴학 정학 명단
|
동래중 |
계 |
부산제2상 |
계 |
퇴학 |
김인규(5) 김영조(5) 김명수(5) 이달희(5) 이도윤(5) 안장원(5) 정두열(5) 추유복(5) 김재한(5) |
9명 |
홍병희(5) 이병도(5) 이인의(5) 김선갑(4) 박정세(4) 김유근(4) 이세기(4) 어태영(4) 박자환(4) 김성윤(4) 김종배(3) 이추수(3) |
12명 |
정학 |
이종영(5) 이조율(5) 김일동(5) 김진곤(5) 박상원(5) 김창환(5) 김영기(5) 장종기(5) 조영식(5) 성도호(5) 문주오(5) 문태환(5) 안병철(5) 송덕수(5) 양원택(4) 백기호(4) 이종전(4) 손태준(4) 이문규(4) 김영찬(4) 김은두(4) 김세영(4) 김준배(4) 김기준(4) 김영진(4) 박순홍(4) 문인갑(4) 성한경(4) 정종대(4) 남기명(4) 최명률(4) 이진형(4) 임규호(4) 양장(5) |
34명 |
김무영(5) 정상권(5) 배기옥(5) 나병연(5) 이선학(5) 장중한(5) 김기호(4) 김종순(4) 최이택(3) 윤희산(3) |
10명 |
견책 |
|
|
민병표(5) 김종희(5) 박중홍(5) 좌달하(5) 김진문(5) 이정희(4) 양재항(4) 김기완(4) 박규태(4) 배차순(4) |
10명 |
출전: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사』1권 1989 pp1038~1040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의 전시체제하에서 전개된 최후의 대규모 학생투쟁으로 이 사건은 발생당시 일제의 보도통제로 말미암아 타지방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만약 보도만 될 수 있었더라면 광주학생운동 보다도 더한 파급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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