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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은 김유신의 출생지

진천의 삼국시대는

 

  진천 송 씨가 삼국시대에도 진천에 살았을까? 고려 때의 진천백(鎭川伯 仁)을 우리의 초조(初祖)로 삼았을 뿐, 그 이전의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진천 땅은 태고 적부터 있었고, 삼국시대부터 진천의 역사가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가 지금의 진천을 금물노군(今勿奴郡)이라 했고, 신라가 흑양군(黑壤郡)이라 고쳐서 기록했다. 백제도 한 때 이 땅을 신라에서 빼앗아 만노군(萬弩郡)이라 한 적이 있었다. 진천이 예부터 살만한 좋은 지역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나지막한 언덕들이고 들이 넓으며 예전부터 비옥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거무내’라는 토양이 좋다는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겠나.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6년인 484년에 만노군(萬弩郡)을 설치했다고 하였으니 진천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있었다. 7세기 초에는 백제 말기의 무왕(武王)이 신라의 만노 또는 흑양군을 공략하여 거기에 소속된 세 개의 현(縣)을 백제가 빼앗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얼마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에 속했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통일신라 이전에는 서로 밀치고 밀리는 바람에 국경이 그 세 나라로 쓸리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685년 신라는 신문왕 5년에 흑양군(黑壤郡)으로 개칭하였고, 도서현(都西縣)과 음성현(陰城縣)을 소속 현으로 관할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진천은 금물노, 만노, 흑양으로 이름이 변천한 것처럼 보이나 그 발음은 ‘거무내’였을 것이다.

  만노(萬弩), 수지(首知), 신지(新知)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이두나 옛날 방식이라 지금 우리가 읽는 그 글자대로는 아니다. 다른 발음이었음이 분명하나 자세히 내가 연구해 본 적은 없다. 수지(首知)는 ‘우듬지,’ 신지(新知)는 ‘새지,’ 그러니까 새로 차지한 땅이라는 말로 유추해볼 수 있겠다.

  지금의 진천읍 연곡리 만뢰산(萬賴山)에는 신라시대의 만노(萬弩) 산성이 있었다. 진천서 제일 높은 해발 612m의 이 서쪽 산에 석축을 쌓았던 유적이 있다. 진천이 서북 국경으로 신라의 요새였을 테니 아직 백제를 방어해야 했나보다. 현재의 천안시와 진천 경계에 위치한 만뢰산은 어감상 옛 이름 만노(萬奴)를 지칭하는 것 같지 않은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도 아들 김유신도 뒤에 만노산성에서 백제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이 산성에서 신라와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니 분쟁지였던 모양이다.

  진천은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595-673)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만노군 태수 김서현(萬弩郡 太守 金舒玄) 장군의 아들로. 지금의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 그 탄생지(誕生址)와 태실(胎室)이 있다고 하나 내가 가 본 적은 아직 없다.

  가락국 김무력의 아들 서현이 신라 귀족의 딸 만명(萬明)을 만나서 야합하여 임신을 하였다네. 만호 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大元神統) 류 - 신라왕실에 후궁(後宮)들을 공급하는 부류 - 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만노(萬弩)로 도망하였고, 무릇 20개월 만에 김유신을 낳았다고 전한다. 상서로운 꿈 이야기는 비범한 자로의 신화화(神話化)한 것이리라. 그런 결과로 마침내 김서현은 처가 때문에 만노군(萬弩郡) 태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진천은 고구려이기도 했고, 신라, 또 백제의 땅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아니었나. 지금은 행정구역상 충청북도에 속해 있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소속한 적도 있었으니 변화가 많았음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