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병인양요와 쇄국강화》
고종 3년(1866) 초에 선포된 천주교금지령에 의한 대박해사건은 다만 우리 역사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세계종교사상(世界宗敎史上)에 있어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의 학살을 감행한 것이었다. 불란서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체포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12만명의 교도가 체포되고 그 중 8천여명의 교도가 학살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정부는 이 놀랄만한 살육을 감행하면서도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3명의 선교사 리델(Ridel) • 깔레(Calais) • 페롱(Feron)을 체포하기 위하여 5월 1일자로 새로운 명령을 내려 국내 요로는 물론 국경과 해안선까지 엄중한 감시망을 펴도록 하면서 수사를 계속토록 하였다.
그러나 체포망을 교묘하게 피한 리델은 열성신자 11명과 함께 작은 나룻배를 타고 고종 3년 7월 4일(음(陰) 5월 23일)에 충청도 당리포(塘里浦)를 출발하여 3일 후에는 지부(芝**)에 도착하였다. 이 때 불란서아시아함대사령관 로오즈(Pierre Gustave Roze)는 천진(天津)에 있었으므로 리델은 곧 그곳으로 찾아가서 그를 방문하고 불란서선교사 9명의 학살에 관한 진상과 천주교도의 처참한 수난상황을 상세히 보고 하였던 것이다.[註4] 그 보고에 놀란 것은 비단 로오즈 제독 뿐만 아니라 당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재청(在淸)서양인의 거의 모두가 경악과 동시에 격분과 울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와 특별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청국정부 역시도 그 소식을 전해듣자 심한 충격을 금치 못하는 한편, 앞으로의 불란서가 당연히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강경한 대한무력공세(對韓武力攻勢)를 대단히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로오즈제독은 과연 청국이 예상했던 그대로 리델선교사의 종용에 따라 무력으로 조선을 응징하기 위하여 '조선원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사행동을 일으키기에 앞서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위세를 대표하여 청국에 파견되어 있던 주청불란서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와 협의하였는데 그도 역시 자기 나라의 선교사가 학살된데에 대하여 대노하고 먼저 청국의 공친왕(恭親王)에게 항의함과 동시에 보복행위로서의 '조선원정'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래서 로오즈제독은 우선 위력정찰(威力偵察)을 하기 위하여 병인년(丙寅年) 음(陰) 8월 10일에 군함 프리모오그(Primaugue), 포함(砲艦) 다리디프(Taridif) 및 데룰레드(Deroulede)호 등 3척을 이끌고 지부(芝**)를 출항하여 강화도로 향하였다. 로오즈제독이 이끄는 이 정찰함대는 8월 12일(음 9월 20일)에 충청도 신창현(新昌懸) 내항(內港) 앞바다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지로사공(指路沙工) 김학이(金學伊) 등을 안내역으로 수용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음 21일에 이르자 로오즈제독은 데룰레드호에 리델선교사와 지로사공을 승함(乘艦)케 하여 내항에서 한강하류지방까지의 수로를 측량케 하고 이것이 완료된 다음 23일에는 기함(旗艦) 프리모오그호가 정박중인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 앞바다에서 합류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양선의 침략행위를 항의하기 위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조병노와 영종첨사(永宗僉使) 심영규는 함께 기함 프리모오그호를 찾아 로오즈제독을 면담코자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註5] 로오즈제독은 그러한 우리 관료들의 동향에 전혀 개의치 않고 초지일관 그 임무를 수행코자 23일에는 합류지점인 물치도에서 한강을 거슬러 한성까지 정찰을 하도록 데룰레드호와 타리디프호를 각각 나누어 파견하였다. 양함(兩艦)은 리델과 지로사공을 각각 승함케 하고 물치도를 출발한 후 염하(鹽河)를 거쳐 손돌목(손돌항(孫乭項))의 급조(急潮)를 돌파함으로써 한강본류에 진입하였다. 이 사이에 지형 조사와 수심측량을 하는 등 군사상 필요한 답사를 계속하였는데, 그날은 황해도 개풍군 유천리 앞바다에서 가박(假泊)하였다. 양함은 예정대로 다음 24일에도 소강(遡江)을 계속하다가 해가 진 후에 경기도 양천현 염창항(項, 현 김포) 앞바다에서 가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천현령(縣令) 윤수연(尹守淵)은 그 이양선을 방문하고 경위를 따짐과 함께 곧 퇴거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이때 면담에 나섰던 리델선교사의 대답인 즉, '조선의 산천을 관광하고자 내항한 것이지 추호도 상해를 입힐 의사는 없다'라고 그들의 군사상 필요한 정찰임무의 수행과는 거리가 먼 극히 기만적인 설명을 하면서 식량공급의 요청을 하였으므로 현령은 부득히 이를 지급해 주었다. 이러한 물질적혜택을 입어 가면서까지 침략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양함은 26일 염창항을 출랍하여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양화진(楊花津)을 거쳐 고양군 서강(西江)의 전면까지 소강한 후, 일몰과 동시에 그곳에서 가박하였다. 양함에 승함한 침략군은 다음날 이른 아침에 드디어 지부(芝**)출발 당초의 숙망(宿望)이던 왕도 한성시가의 일부, 특히 북한산일대에 연연(****)히 뻗어 있는 대성벽(大城壁)을 먼곳에서나마 관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불란서원정함대'가 왕도 서울에 임박했다는 경보에 접한 정부 당국은 물론이거니와 장안의 시민들까지도 크게 경악함과 동시에 긴장된 상태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그러한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한 배려를 하면서 즉각 군사적인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즉, 대원군은 모든 장상(將相)을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으로 소집하여 긴급군사대책회의를 개최하고 전술과 전략을 토의케 하는 한편,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로 하여금 경인 연안의 경비를 엄중히 하도록 명(命)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날로 표하군(標下軍)과 훈국보병군(訓局步兵軍)을 이끌고 현지로 긴급히 출동하였다. 이 군사대책회의에서 주로 심의된 내용은 특히 왕궁호위 및 서남쪽의 성문파수(把守)를 엄중히 할 것과 유언비어의 방지 및 무뢰한의 범분창절(犯分槍**)을 금칙(禁飭)토록 좌우포도청에 엄달(嚴達)할 것 등이었다. 이 밖에도 의용군의 모집과 사기선양 및 무기정비에 관한 문제를 각각 거론하여 그 대책이 강구되는 등 회의장의 분위기마저 시종 긴장감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정부에서 중대한 국사가 거론되고 있는 사이에 리델선교사는 정박중인 데룰레드호에서 하함(下艦) 상륙하여 천주교도로부터 교옥(敎獄) 후의 교도의 동향과 민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즉, 그는 평양에서 외국선 1척의 격침과 많은 교도가 여전히 탄압을 받고 있다는 막연한 정보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입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로오즈제독은 교도를 통한 현황 파악은 무리하다고 생각하고 단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울 정찰의 목적이 달성됨에 의하여 불란서함대의 위력이 과시되었다고 자위하면서 10월 1일 전함대를 이끌고 물치도를 떠나 지부에로 향하였다.
이러한 불란서함대의 침략행위는 당시의 유행어였던 '선교사의 그늘에는 반드시 군함이 따르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여실히 입증해 주는 결과가 되었다. 그 때문에 우국정신에 불타는 의용군의 수가 날로 증가하여, 그 중 무용이 뛰어난 자들이 계속 요지에 배치되는 등 기민한 동작이 전개됨으로써 민중의 적개심은 절정에 달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왕도 서울에 이르기까지의 제1성문인 양화진(楊花津)의 방비체제는 거의 완벽한 상태로 갖추어져 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상하를 막론하고 거국일치로 이루어진 그 엄중한 국방체제에는 곧 있을 제2회의 '불란서원정함대'에게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안겨줄 수 있는 막강한 것으로 정비되었던 것이다.
로오즈제독은 예정대로 지부(芝**)에 귀환하여 정찰보고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분석검토한 결과, 한강수로는 함대항행(航行)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연안정비가 견고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함대가 왕도 서울에 접근하는 작전을 피하고, 강화부를 점령한 후에 한강하류를 봉쇄하는 전술 • 전략을 채택키로 하였다. 로오즈제독은 이러한 전법에 의하여 서울에 이르는 항로를 차단하면, 멀리 삼남(三南) 및 양서(兩西)지방에서 서울로 전송되는 조세미와 양곡은 자연히 정지당하게 되므로 조선정부는 부득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관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봉쇄작전에는 상당한 병력이 필요하므로 그는 서둘러 아시아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불란서의 전 해군력을 지부로 집중케하였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작전을 짠 로오즈제독은 10월 11일 순양(巡洋)전함 게리에르(Guerriere)호에 장기(將旗)를 달고 프리모오그 • 라플라스(Laplace) • 타리디프 • 러브르돈(Lebrethon) • 데룰레드 • 킨샹(Kienchan)호 등 군함 7척으로 편성된 원정함대를 이끌고 지부로 출발하여 13일에는 부평 앞바다의 물치도와 호도(虎島)사이에 닻을 내렸다.[註8] 그런데 그 원정함대에는 일본 횡빈(橫濱)에 주둔중인 해병 1개지대(支隊)가 급거 승함(乘艦)합류하였으므로 총 병력은 1,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영해불법침입에 격분한 영종첨사 심영규는 곧 현지에 중군(中軍) 김종화(金鍾華)를 파견하여 경위를 따지는 한편, 즉각 퇴거를 명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말았다. 로오즈제독은 10월 14일(음 9월 6일) 기함과 2척의 전함을 물치도에 둔 채 장기(將旗)를 데룰레드호에 옮겨 달고 킨샹호 등의 포함과 초함(哨艦)만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도중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날 갑관진(甲串津)에 쉽사리 상륙한 후 우선 진해부근의 고지를 점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침략행위에 놀란 강화부 유수(留守) 이인기는 경력(經歷) 김재헌(金在獻)을 로오즈제독에게 파견하여 그들의 침략을 규탄코자 하였으나 뜻대로 이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김재헌은 리델선교사 및 조선인 사공들만 회견하고 거듭 퇴거를 촉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명령을 외면한 채 "불란서선교사 9명이 학살되었으므로 그것을 문죄하기 위하여 방한하였다."는 취지로 답변한 후 오히려 태연한 태도로 식량품의 공급을 강청(强請)하였다.
한편 불란서침략군이 갑관진에 상륙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정부는 급히 방어에 관한 대책을 강구한 바 있었는데, 그것은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를 기보연해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로, 그리고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는 기보연해순무사중군(畿輔沿海巡撫使中軍)으로, 또한 김성근과 안기영(安驥泳)은 각각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융중군(總戎中軍) 이원희 • 순무좌선봉(巡撫左先鋒) 정지현 • 순무우선봉(巡撫右先鋒) 김선필 • 순무초관(巡撫哨官) 한성근 •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 • 총융사(總戎使) 신관호(신헌(申櫶)) 등 용장들을 발탁하여 창덕궁 각문과 양화진(楊花津) • 통진(通津) • 한성진(漢城津) • 부평 • 제물포 등의 요소와 문수(文殊) • 정족(鼎足) 양(兩)산성을 수비에 배치하였다.
이 사이에 불란서 침략군은 강화부를 점령했을 뿐, 다른 대규모의 작전행동을 취하지 않다가 10월 17일(음 9월 9일)에 이르자 다시 정찰대 60명을 보내어 통진부(通津府)를 습격하였다. 이때 부사 이공렴(李公濂)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도주하였으므로 침략군은 유유히 공금 6 • 7백냥을 노획한 후, 민가를 소각하는 등의 난동을 부리면서 가축과 의복 외에도 많은 민재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한편 정부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서울 강화간의 병력을 증가하는 데에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있었던 것은 각도의 감사(監司) • 장신(將臣) • 수령(守令) 등에 명하여 훌륭한 포수를 모집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종군이래 도처에서 선전탈투(善戰奪鬪)하여 침략군을 격퇴하는데 있어 많은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10월 19일 기보연해순무사중군(畿輔沿海巡撫使中軍) 이용희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통진부에 입성하였다. 그는 먼저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정찰케 하였으나 불란서군은 이미 그곳에서 철퇴(撤退)한 후였기 때문에 아무런 교전도 없이 통진부와 염하우안일대(鹽河右岸一帶)를 탈환, 수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을 탈환함으로써 다소 여유를 가졌던 그는 별무사(別武士) 지홍관(池弘寬)을 로오즈제독에게 파견하여
「성을 범(犯)하고 민인(民人)을 살육하며 재물을 약탈하는 등 인륜에 전혀 거역하는 만행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일이요, 반드시 천벌이 가해질 것이다.」
라고 엄중한 항의를 하게 하였다.
로오즈제독은 강화부를 점령한 후, 우리 관헌(官憲)의 내착(來着)을 기다려 교섭을 시작할 생각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 지홍관의 전유(傳諭)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행동을 시종 규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협상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주지하면서도 그에게 회격(回檄)을 수교하고 선교사 살해에 대한 응징을 하려는 것이 원정의 이유임을 밝힌 다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파견하여 자기와 상의하고 조약을 체결케 하라는 2개 조건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로오즈제독의 이러한 회격은 국왕을 비롯한 정부관료는 물론이거니와 일반민중에까지 크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따라서 국왕은 10월 24일, 출정장사들에게 교서를 내려 배외상무(排外尙武)의 기개를 높히게 하는 한편 어전회의에서도 군신상하가 서로 일치하여 외적방어에 총궐기 하자고 독려하였다. 전선에서는 이에 보답하다시피 26일 문수산성의 전투에서 수장(守將) 순무초관(巡撫哨官) 한성근이 지휘하는 부대가 적군 120명중 20여명을 살상함에 의하여 군병의 사기를 크게 앙양시켰는데, 이것은 거족적인 항쟁심에서 분기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승에 앞서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에서 각 도에 문서를 보내 유능한 포수를 선발하여 올라온 사람들이 이미 통진의 중군영(中軍營)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엽부(獵夫)였으며 저격이 대단히 능숙했으므로 일반초모병의 공세보다도 더 많은 기대를 걸 수가 있었다.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는 이들을 동원하여 정족산성을 수비케 하였다. 이러한 병력이동에 관한 정보는 즉각 조선인 교도로부터 리델선교사에게 전달되었는데, 그것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게 적어도 8백여명의 엽호군(獵虎軍)과 그밖에도 많은 저격포수가 염하(鹽河)를 건너 전등사(傳燈寺)에 잠입하였다고 보고되었던 것이다.
로오즈제독은 리델선교사의 보고에 접하자 전등사를 공격하기로 결심한 다음 11월 7일(음 10월 2일) 해군대령 올리비어(Ollivier)를 지휘관으로 하는 수(水) • 해병(海兵) 160명을 파견하였다. 이 침략군은 7일 이른 아침 리델선교사의 향도(嚮導)로 강화읍을 출발하여 정오전에 정족산성 동문으로부터 침입하려고 공격을 시작했으나 즉시 우리 수비군의 맹렬한 응사(應射)를 받게 되어 순식간에 32명의 사상자를 냄과 함께 전군이 궤난(潰亂) 상태에 빠졌다. 부득이 올리비어대령은 패잔병을 수습한 후 우리 군대의 추격을 피해가면서 간신히 갑관진으로 패퇴하였다. 이 일전이 결국 조선의 대승으로 돌아가게 되자 불란서 침략군은 사기가 떨어져 조선정부에 대한 응징은 커녕 전면퇴각의 기미마저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로오즈제독은 이 패배를 계기로 하여 전략상 극히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였다. 즉, 그는 불란서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이래 약 1개월동안 경강(京江)의 요충지를 점거하고 한강구(漢江口)를 봉쇄하는 등 맹위를 떨치면서, 심지어는 상륙지 민간인에게 까지도 갖은 모욕과 만행을 다하였음에도, 전혀 예상과는 달리 조선정부의 굴복이란 것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조선정부는 시시각각으로 병력을 증가하여 이젠 본격적인 염하의 도하작전을 폄으로써 강화부에서 고립하는 불란서군에게 대공세를 취할 여력이 있다는 것도 주지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엽호군의 정예는 종전에 강화부와 통진부를 수비했던 병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도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를 더욱 우려케 한 것은 조선병력의 증가 뿐만 아니라 강화부에서 하는 일 없이 소일을 하는 경우 닥쳐오는 동기(冬期)에는 염하 • 한강본류가 빙결하여 외부와의 교통이 단절되어 고립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족산성의 패전을 계기로 사기저하한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강화부에서 총퇴각하기로 결심하였다. 로오즈제독의 이러한 방침에 따라 침략군은 11월 10일(陽) 강녕전(康寧殿)을 위시하여 강화성내의 모든 관아(官衙)에 방화하고 미리 약탈해 두었던 다량의 서적과 금은괴 • 보물 등의 문화재 및 군기 • 군수물자를 본함으로 운반하여 적재하고는 당일 갑관진에서 4척의 포함에 분승하여 팔미도(八尾島) 외곽으로 퇴거하였다.
이때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는 별군관(別軍官) 이기조에 명하여 패주하는 적군에게 덕포진에서 포격을 가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았을 뿐 아무런 손해도 주지 못하였다. 그는 11월 18일자로 한강구 봉쇄의 해제를 선언함과 동시에 기함과 킨샹호를 이끌고 일본 횡빈(橫濱) 항으로 향하면서 나머지 제함은 상해와 지부에로 분리하여 가도록 명하였다.
이 회전(會戰)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부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 회전은 온 겨레가 상하일치 단결하여 호전적(好戰的)인 불란서 침략군의 야욕을 좌절시키고 조국과 민족을 서구외적으로부터 방어한 최초의 거시적인 전쟁이었다.
이 불란서함대의 침략은 봉건적 분위기 속에서 헤매고 있던 우리 조선사회에 미증유의 영향을 주었다. 즉, 양반지배계급에게는 큰 공포감을 느끼게 하였으나 일반민중에게는 외래침략세력에 대한민족적정신을 크게 환기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지배계층은 이와 같은 민중의 애국적 열성과 적개심을 이미 무너져 가고 있던 자기들의 정권유지에 교묘하게 이용하려고 하였다. 주로 의거(義擧)에 나선 민중과 병사들의 열렬한 애국적항쟁에 의한 그 전승을 대원군일파는 자기들 개개인의 영웅적활동의 성과인 것처럼 자인(自認)하는 과대망상에 빠졌던 것이다. 즉, 그들은 막심한 경비와 고귀한 인명의 피해를 입어 가면서까지 쟁취한 귀중한 그 전승을 단순히 자기들이 채택한 배외정책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과인 것처럼 자부하고 외적침략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마저 빚어 내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정부가 국민에게 고취한 쇄국사상의 표어인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이란 것을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하여튼 우리 봉건정부는 전후처리에 있어 의기양양하였다. 그것은 비단 대내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상에 있어서도 반영하려 했다. 즉 그것은 청국정부에 통보한 전승의 과시(誇示)와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전승을 통보함과 함께 양이(洋夷)에 대처할 자위호국책(自衛護國策)을 강구하라고 격려하는 등 위세당당한 면을 보였다. 당시의 국제정세 동향과 국내정치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대원군은 국제정세의 조류, 즉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을 전혀 무시하고, 봉건국가 조선이 선진제국과 교류없이 고립하면서도 항상 자립번영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쇄국사상이 바로 그의 굳은 정치적 신념이었으며, 또한 대외정책의 근본이념으로서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불란서함대의 그러한 개국요구가 수락될 리 만무하였다. 다시 말해 '병인양요'는 대원군정권을 빛내는 대외정책 중에서도 가장 전시효과를 나타내는 전승의 하나로 장식되는 것이었다.
강화답사 자료집 3...병인양요
고교대선배님의 글 가져옴.
'지인의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 조약 (0) | 2013.09.24 |
---|---|
신미양요 (0) | 2013.09.24 |
강화도의 역사 (0) | 2013.09.20 |
'가까이 다가온 자유민주 통일과 과제'를 출판한 저를 소개한 '월간조선' 10월호 (0) | 2013.09.17 |
늙는 것은 신체적 노화가 아니라 비활동성 때문이다. (0) | 2013.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