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재불입의 민족의 영산 태백산
1,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인 민족의 영산(靈山) 태백산(太白山)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 태백산(太白山)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와 강원도 태백시 문곡소도동 그리고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천평리와 접경을 이루며 동경 128º56' 북위 37º05'에 자리잡은 해발 1,567m의 명산으로 여기서 발원하는 물이 영남평야의 젖줄인 낙동강(황지)과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한강(검룡소), 삼척의 오십천을 이루니 국토의 종산(宗山)이자 반도 이남의 모든 산의 모태(母胎)가 되는 뿌리산이다.
백두(白頭)에서 길을 떠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함경남도 원산의 남쪽에 있는 황룡산(黃龍山)을 일으키고 철령에서부터 동해를 끼고 내려오면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해발 1,200m 이상의 고산거봉(高山巨峰)들을 기봉(起峰)시킨 후 두타산(頭陀山) 어름에서 방향을 틀어 동해와 헤어지면서 서남쪽으로 향한다. 동해와 헤어진 백두대간이 두타산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올린 산이 바로 우리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으로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힘껏 솟구친 후 힘을 비축하여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니 이곳이 바로 모든 힘이 응축된 대간의 척추가 된다. 해서 태백산은 북쪽에 함백산(咸白山, 1,573m), 서쪽에 장산(壯山, 1,409m), 남서쪽에 구운산(九雲山, 1,346m), 동남쪽에 청옥산(靑玉山, 1,277m), 동쪽에 연화봉(蓮花峰, 1,053m)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백두대간은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 갈래는 남쪽으로 뻗어 통고산, 일월산, 주왕산, 가지산 영취산을 거쳐 부산의 금정산에 이르니 바로 낙동정맥이고, 다른 한 갈래는백두대간의 주맥(主脈)으로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등을 지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이 태백산에 우리나라 뭇 산신 중 가장 높은 산신(山神)이 머문다고 믿었고, 또 우리나라 산들 중에서 가장 큰 정기가 서려 있다고 생각했기에 태백산 정상에다 우리 민족의 국조(國祖)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을 모신 천왕단을 모셨다. 돌로 쌓은 이 제단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아스라이 펼쳐진 수천 수만의 산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사방 몇백 리에 걸쳐 우뚝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이 이처럼 발 아래 내려다 보이니 과연 뭇 산신의 우두머리라 일컬을 만하기에 환웅천왕을 모시는 제단이 여기에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이같은 연유로 옛 사람들은 이 태백산에 사람을 살리는 가장 큰 기운이 서려 있다고 했다. 예언서'삼한산림비기'에는 " 태백산에 1만 보살이 머문다. 그 아래에는 전란으로 인한 환란, 기근, 물난리가 침범하지 못한다. 참으로 복(福)된 땅이다"라고 했고, 또다른 예언서 '감결(鑑訣)'에서도 "곡식 종자는 삼풍(三豊: 풍기, 무풍, 연풍)에서 구하고 자식을 낳으면 양백지간(兩白之間: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다 숨겨 두어라. 이 열곳 십승지(十勝地)에는 병화(兵禍)와 흉년이 못 들어온다. 중략.. 영가지간엔 화평한 기운이 흘러넘치니 영가란 태백과 소백을 말한다."라고 하면서 난리를 피할 만한 땅이라고 했다.
그래서 태백산은 오랫동안 ‘천(天)ㆍ지(地)ㆍ인(人)’, 곧 하늘과 땅과 조상을 숭배해온 고대 신앙의 성지였던 바, '삼국사기'에 139년 신라 7대 임금인 일성왕(逸聖王) 때 10월 상달을 맞아 임금이 북쪽으로 나가 ‘태백’에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태백이 바로 태백산이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이 산은 1,567m의 고봉군(高峰群)이지만 산세가 완만하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토산(土山)이기에 산세는 그리 험하지 않다. 북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고 산정 부근에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서남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태백산지는 함백산과 함께 지질구조가 복잡하며 남한 제일의 탄전(炭田)지대를 이룬다.
태백산의 일출: 강원도 영월군ㆍ태백시와 경상북도 봉화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영산이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태백산 운해 전경
태백산은 천제단이 있는 영봉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봉(1567m) 동쪽에 문수봉(1,517m), 영봉과 문수봉사이의 부쇠봉(1,546m)로 이루어져 있다. 암벽이 적고 경사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봄이면 산철쭉, 진달래의 군락지가 등산객을 맞이하고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과 차고 깨끗한 계곡물이 한여름 더위를 잊기에 충분하며 가을은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수놓으며 겨울은 흰 눈으로 뒤덮인 주목군락의 설경을 보여 주는 곳으로 남성다운 중후한 웅장함과 포용력을 지닌 육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제단(중요민속자료 228호)은 옛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으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옛 기록에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3산 5악(三山五岳)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이라 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산(靈山)으로 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전설은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그 명칭이 보이는 바, 삼국사기에 '태백산은 토함산(吐含山)·지리산(智異山)·계룡산(鷄龍山)·부악(父嶽 : 지금의 팔공산)과 함께 신라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로서 북악(北嶽)에 해당하였으며, 중사(中祠)의 제행이 행하여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백산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天祭壇)은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 로 구성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폭 7.36m, 앞뒤폭 8.26m의 타원형이며, 녹니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쌓아져 있는데 윗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다. 이러한 구도는 '하늘은 둥굴고 땽은 네모나다'는 소위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에 기인한다.
천제단: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추인 산으로, 산 정상에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하였다는 천제단이 있다. 매년 개천절이면 이곳에서 태백제를 열고 천제를 지낸다천재단 사진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상고시대 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기림왕은 춘천에서 망제(望祭)를 올렸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한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 천기(天旗)와 28수기(宿 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石壇)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꺽는 일을 금하고 있다. 천왕단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제단인 장군단은 편마암(片麻岩)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m, 둘레 20m로 타원형(楕圓形) 석단(石壇)이다. 남쪽에는 제단 위로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매년 개천절(開天節)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천왕단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原形)이 잘 보존되어 있다.
천제단이 있는 수두머리와 문수봉 사이에는 부쇠봉이 있어 이 봉우리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가 소백산맥의 시초가 된다. 옛날 신라때 이곳 산봉우리에서 남으로 뻗은 산등으로 길이 있어 경상도와 강원도를 통하는 요로(要路)였다. 고려때 그 길은 천평으로 해서 새길령으로 넘어 혈리로 소도로 통하게 새로이 개척하자 이 길은 아주 작은 소롯길로 변했고 천제를 지내러 오는 경상도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였다.
이 산봉우리는 해발 1,546미터로 그동안 우리 나라 지도에 태백산 높이로 잘못 인식되게 한 봉우리이다. 또한 이 산봉우리는 중국(中國)의 태산(泰山)과 높이가 같은 산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부쇠봉의 뜻은 확실이 알길이 없으나 근처에 차돌이 있어 부싯돌(부쇳돌)로 사용하지 않았나 의심도 되고 그 부쇠를 부소로 보아 단군의 아들 부소왕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영봉이 단군께 제사지내는 장소라면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가 그 아들봉일 것이고, 또 전하는 이야기로는 부소(扶蘇)가 구령탑을 쌓았다고 한다.
또한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낙조는 장엄하여 세속을 떠난 천상계를 연상케 하고 맑은 날 멀리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것도 태백산이 가지고있는 큰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이 밖에도 국내에서는 최고높은 곳에 위치한 한국명수중 으뜸수 용정(龍井), 용담(龍潭)이 있다.
.
부쇠봉 사진
용정 사진
태백산 망경사(望鏡寺)옆에 있는 우물인 용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샘이자 태백산에서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비추이는 곳이다. 물이 솟아 나오는 지점은 해발 1,470m정도의 고지대이고 또한 우리나라 100대 명수 중에서 가장 차고 물맛이 좋고 가장 높은 곳에서 솟은 샘이다. 샘에다 용왕각을 짓고 용신(龍神)에 제사를 올리기에 용정(龍井)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이 우물이 저 멀리 동해(東海) 용왕국(龍王國)과 통하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귀와 빰이 얼얼하게 얼어 붇는 한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오고 있었고, 또 옛날부터 이 물로 천제(天祭) 지내는 제수(祭水)로 사용하였다 한다.
태백산 동쪽 봉우리인 문수봉은 해발 1,517m이며 산봉우리가 마치 여성의 풍만한 젖가슴을 닮아서 젖봉이라고도 부르는데, 보는각도에 따라서는 문수보살의 정수리를 닮은 형태의 바위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로 문수봉이란 이름은 옛날 이 산봉우리의 바위로 문수불상을 다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이하게도 문수봉 위에는 흰자갈이 많은데, 그 자갈로 된 돌무더기를 멀리서 보면 마치 눈이 쌓여 있는 듯하다 하여 태백산의 이름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척주지'에 기록되어 있다(註1). 척주지에 나와 있기를 "태백산 가운데 가장 높고 큰 것이 문수산(文殊山)이다. 꼭대기에 크고 작은 돌무더기가 있어 바라다 보면 흰눈(白雪)이 쌓여 있는 듯하여 문수사력산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산꼭대기에 부처의 유적(문수상을 이곳에서 조성)이 있기에 태백산의 실지 이름이 이곳에서 나왔다고 하는 척주지의 기록이 다소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주(註)1: 삼척 읍지인 '삼척진주지(三陟眞珠誌)' 척주부(陟州賦)에는 태백산의 명칭에 관하여 “태백산 중에서 가장 높고 흰 산이 문수산이며, 여기에 흰 모래와 자갈이 눈 덮인 듯이 쌓여 있어 산 이름을 태백산(太白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문수봉 사진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때 자장율사가 문수봉에서 문수보살상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자장율사가 이웃한 함백산(咸白山, 1573m) 천의봉(天衣峰) 아래의 정암사(淨巖寺)에 주석(主席, 註2)하다가 입적했던 사실 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문헌으로 나와 있지 않아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이는 바, 단지, 삼국유사에 정선군 고한읍의 정암사에서 자장이 입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아마도 그 사실을 이곳에다가 확대 견강부회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주(註)2: '삼국유사'에는 자장(慈藏)이 문수(文殊)를 만나 법요(法要)를 토론한 뒤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곳에 와서 석남원(石南院)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부터 태백산에는 절이 없었다. 그 연유는 태백산은 우리 고유 민간신앙의 본거지였고 정상에 천제단이 있기에 외래종교를 거부한 민족적 자존심과 자긍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이같은 태백산에 문수상을 안치한 작은 암자가 생기게 된 것은, 병자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서 민폐가 심한 천제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고, 또 청의 간섭으로 우리의 주체사상이 잠시 좌절된 틈을 타고 요승(妖僧) 충학이란 자가 천왕당을 불지르고 그 아래에 작은 절을 세우고 봉화 땅 물야(勿也)의 문수산 공벽암의 문수상을 옮겨와 안치한 바 있었으나 그후 폐허가 되고 말았다.
문수상은 6.25사변 전까지 만경사터에 있었으나 공비토벌을 위해 작전상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문수상은 발파되어 버렸다. 부서진 문수상의 돌조각은 용정우물 윗쪽 산등에 쌓여져 있는데 태백산에서는 볼 수 없는 돌비늘이 석인 화강암 조각들이다. 이것으로 봐도 문수상은 문수봉 꼭대기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곳에서 옮겨온 것임을 입증한다 하겠다. 실제로 30여년전 정가터 아래 대왕암이란 절이 있을 때 문수봉의 돌로 불상을 조성하려다 좌대만 다듬다가 만 것이 문수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버려져 있기도 하다.
또한 옛날 통신수단으로 쓰인 봉수대 자리가 지금도 있고, 이 밖에 산성터·낙벽사·구령사 등의 절터가 있다. 단종의 묘인 장릉(莊陵)이 여기서 멀지 않은 영월에 있으므로 단종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에 들어와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註3)이 있으며, 여기에 연유하여 태백산 산정에는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 쓰인 단종비가 세워져 있다.
* 주(註)3: 태백산 자락인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는 태백산신이 된 단종의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무척 동정해왔다. 세조 3년 가을 어느 저녁 무렵, 이 마을 주민들은 영월의 관아에 일이 있어 가던 길에 누각 앞에서 흰 말을 타고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주민들이 길가에 엎드려 인사를 하고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았더니 단종은 말을 탄 채 태백산에 놀러 간다고 하였다.
영월에 도착한 마을 주민들은 그날 낮에 이미 단종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조금 전에 길에서 만난 단종이 그의 영혼이며, 죽은 단종이 태백산에 입산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 후 태백산에는 단종의 영혼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게 되었고, 지금도 무속 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태백산 정상 부근과 태백산 아래 춘양면 석벽리 등지에 단종의 비각 또는 화폭을 걸어놓고 단종의 신령을 섬긴다.
또한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토속신앙이 성하였으며, 정상을 비롯하여 계곡에 사찰과 기도처가 많았으나 1970년대에 정리가 되어 현재는 작은 사찰 4개와 정상 부근과 당골, 유일사 길목, 백단사 옆 계곡 등에 몇 개의 기도처가 남아 있다.
망경대에 태백산사(太白山祠)라 불리는 사당이 있어 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봄·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에는 제수로 소를 잡아 쓰는 것이 아니라 산 소를 산정 제당까지 몰고 가 제당 앞에 매어놓고 제사를 지낸 다음 소를 그곳에 매어둔 채 제관들이 하산하였으며, 이때 뒤를 돌아보면 불공하다 하여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註3).
그리고는 3일 뒤에 그 소를 몰아 내려오는데, 이렇게 태백산제의 제수로 쓰였던 소를 퇴우(退牛)라 불렀다. 이 습속은 조선 시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주(註)3: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산 꼭대기에는 천옥당이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강원도와 경상도에 걸친 이 산기슭의 주민들이 봄과 가을에 소를 잡아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태백산 여러 곳에 있는 토속신앙의 기도처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태백시 소도동(所道洞), 속칭 당골에 있는 산신당으로, 이 당골이라는 명칭도 신당이 있다는 데서 연유하여 생긴 것이다. 현재의 태백시민헌장비(太白市民憲章碑)가 있는 곳에서 등산로를 따라 5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당목이 아직 남아 있고, 그 옆에 사당터가 있다.
당집은 1970년대 태백산 내에 있는 토속신앙을 정화할 때 헐렸고, 지금은 가로 14m, 세로 10m 정도의 축대 위에 시멘트 벽돌 제단이 있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 늘 향이 타고 촛불이 켜져 있다.
장군바위 사진화석으로 변해 버렸다는 장군바위
당골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형상은, 태백산 소도당골의 넓적바위를 지나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개울가에 높이 50여m의 거대한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모양이 흡사 장군이 칼을 집고 서 있는 것 같다. 30여년 전 바위밑에 천지암(天地庵)이란 절이 있었으나 화전정리 때 철거되었다. 지금도 치성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장군바위는 태백산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서 있다.
옛날 태백산은 하늘로 통하는 성스런 산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파견된 장군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태백산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장군의 임무는 신성한 태백산으로 부정한 사람이나 악한 귀신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였는데, 어느때 장군이 연화산 옥녀봉의 옥녀에게 반하여 임무를 게을리하는 틈을 타고 태백산 성역(聖域)으로 못된 잡귀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하늘신(天神)인 백두천황(白頭天皇)은 대노하여 급히 돌아오던 장군과 병졸들을 뇌성벽력을 쳐서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성역으로 들어온 잡귀는 벼락을 쳐서 백산의 신령굴에 가두어 버렸으며 신령산의 신령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주목군락지태백산
태백산은 오래된 아름드리 주목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이같은 태백산 문수봉에서 자라는 주목은 총 2,805주이며 그 중 높이 11m이상되는 것만도 무려 49주나 되며 지름 1m이상되는 나무는 15주이다. 그리고 지름이 가장 큰 나무는 1.44m로서 수령은 500년이상으로 우리나라이 주목 서식지 중 가장 대단위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고, 또 태백산을 대표하는 나무로서 겨울철 설경은 장관을 이룬다. 이들 주목은 주로 고산 지대에서 자라며 높이 20m, 지름 2m에 달하기도 하는데, 살아 '천 년, 죽어 천년'이란 말답게 오랫 동안 민족의 영산을 지키는 파수꾼 역활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주목군락지 사진
주목(朱木)은 한국ㆍ일본ㆍ중국 동북부ㆍ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하면서 천년을 살아가는데, 일본산으로 원줄기가 곧게 서지 않고 밑에서 여러 개로 갈라지는 것은 눈주목(var. nana)이라고 하고, 잎이 보다 넓고 회색이 도는 것은 회솔나무(var. latifolia)라고 하며 울릉도와 북쪽에서 자란다. 원줄기가 비스듬히 자라면서 땅에 닿은 가지에서 뿌리가 내리는 것은 설악눈주목(T. caespitosa)이라고 하며 설악산 대청봉 근처에서 눈잣나무와 같이 자란다.
태백산은 1989년 5월 13일 17.44㎢의 면적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소도집단시설지구에 콘도형인 태백산 민박촌을 비롯하여 숙박시설,음식점, 야영장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석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석탄 박물관이 있고, 겨울철에는 대규모의 눈썰매장이 개장되고,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눈조각 축제인 ‘태백산눈축제'가 열린다. 금년은지난 1월 23일 부터 열렸는데, 2월1일까지 개최되는 ‘태백산눈축제 2015’에서는 세계 유명 눈조각가들과 국내 눈조각가들의 대형 눈조각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겨울축제다. 해발8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눈썰매장은 1일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장 120m의 2개면 슬로프와 30평의 휴게실을 겸비하고 있으며, 썰매를 타면서 즐기는 주위의 설경은 가히 일품이다. 태백시 소도당골(태백산도립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설규모는 슬로프 2면 14,520㎡ , 눈썰매 : 1,500대 등을 보유하고 있다. 여름에도 썰매장이 슬로프 1면 (크리스탈 겔렌더 25m x 120m) 썰매 500대로 하계(6월초~8월말) 썰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용요금은 대인 4,000원, 소인 3,000원이다.
눈썰매장 사진
태백산 등산로 날머리인 당골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광장 윗쪽에 단군성전이 있다. 1975년 국조단군봉사회가 구성되어 1978년 성전을 건립했는데 전체 대지면적 2,370㎡에 성전이 62.4㎡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전안에는 단군의 영령과 영정이 있다. 이 성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공포집으로 국조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단군제를 봉행한다.
이 건물을 짓고 여기서 단군제를 지내기 전에는 만경대의 천왕당(天王堂)에서 태백산록 경상북도 봉화군 사람과 강원도 삼척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단군제를 지냈다.
그런데 처음에는 순수한 조상신제(祖上神祭)이던 것이 주관자에 따라 점점 무속제의식(巫俗祭儀式)으로 변질되자 삼척의 일부 인사들이 따로 단군봉사회를 조직하고 성금을 모아 1978년 당골에 단군 성전을 새로 건립하고 제를 지내게 되었다.
태백산의 문화유물로는 사찰과 함께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많이 남아 있다. 사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함백산 천의봉 아래에있는 정암사(淨巖寺)이다. '삼국유사'에 자장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석남원이 바로 이곳으로, 그 경내의 수마노탑(水瑪瑙塔, 보물 제410호)은 자장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인데 통일산라 때의 전형적인 전탑양식을 따른 전탑의 하나이다. 이 탑은 벽돌 크기의 탑재를 한장한장 쌓아서 만들었는데, 흔히 보이는 석탑과는 축조방식이 달라 이와 같은 축조 방식의 탑은 전국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다.
이외에도, 봉화 쪽에는 조선시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태백산사고가 있다. 또한, 태백산록인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는 화전민촌의 너와집을 비롯한 민속 유물들이 1975년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을은 외부와의 교통이 좋지 않은 산간오지로 현대문화의 수용이 늦어 최근까지도 격리된 생활을 하였으며, 옛날의 산간 민속이나 생활용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지정 자료는 너와집 2채·물레방아·통방아·채독·나무통(김치통)·화티(화투)·살티(살피 또는 설피)·창(槍)·주루막 등이다.
(소도당골 단군성전 아래에 조성되어 있는 눈 조각)
2, 전해 오는 전설(傳說)과 설화(說話)
태백산은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기에 여러 개의 사찰과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있으며, 여기서 연유한 전설이나 민담이 남아 있다. 먼저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자장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문수가 가르켜준대로 태백산 갈반지에서 정암사를 짓고 주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남루한 옷차람의 시골 농부 차림새를 한 노거사(老居士) 한 사람이 누더기 가사를 입고 칡삼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담아들고 와서는 큰 소리러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자장의 제자들인 사미승들이 존귀한 국사의 존호를 함부로 부르는 거지 노인의 행색을 보고 놀라서 쫓아내었지만 가지를 않고 더욱 더 큰 소리로 소리치자 마침내 자장이 이를 듣고 나왔는데, 자장이 그 행색을 보고 미친 사람이 찾아와 소란을피우는 것이라 하여 내쫓으니 노거사가 말하기를, “자장이 해탈의 경지에 든 사람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아직도 그 경지에 들지 못하였구나. 내이렇게 찾아 왔거늘 아상(我相(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 나를 모르는구나!” 하고 삼태기를 땅에 내려놓으니 죽은 강아지가 사자로 변했다. 노인이 사자를 타고 환한 빛을 뿜으며 멀리사라졌다. 그가 바로 문수보살이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자장이 빛을 좇아 남쪽고개(南靈)에까지 올라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자장은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 왔고 그후 얼마 안 있어 열반에 들었다. 그래서 정암사 산문에는 높은자가 낮아지고 낮은자가 높아지리라는 애기가 떠다닌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진정(眞定)의 출가수도도 그 배경이 태백산으로 되어 있다. 진정이 졸오(卒伍)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중 당대의 고승 의상이 태백산에서 법연을 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고자 하였으나, 차마 어머니를 두고 갈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도리어 아들의 나약함을 꾸짖어 입산을 시키니, 태백산에서 의상의 제자가 되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법호를 진정이라 하였다.
태백산은 이름이 있는 산이기에 시문이 많으나 오늘 전하고 있는 것은 거의가 한문으로 된 한시문이 많고 개화 이후의 국문으로 된 시문은 거의 없다. '삼척진주지'의 척주부에는 “푸르고 푸른데 어찌 태백이라 하였던가. 그 위에 당집을 짓고 천왕이라 이름 하였네. 신라·고려 때부터 숭상하여 믿었고, 모두 무당과 박수의 도회로세. 저 동쪽을 바라보니 팽나무도 많고, 저 남쪽을 돌아보니 크고 높은 언덕도 많네(何蒼蒼兮太白 堂其上而天王 自羅麗而崇信 儘巫覡之都會 瞻彼東兮大朴 睠其南兮萃覺).”라고 하여 태백산이 신라·고려 때부터 토속신앙의 중심지였음을 말하고 있다.
고려 시대 최선(崔詵)의 예안(禮安) '용수사기 龍壽寺記'에는 “천하의 명산이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역시 고려 시대의 안축(安軸)은 태백산을 소재로 하여 “길다란 동천을 지나 자연에 들어가니, 비로소 높은 꼭대기에 오른 줄 알았노라.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낮아진 듯, 사방의 여러 산이 눈앞에 떨어졌네. 몸이 나는 구름을 따르니 학을 탔는가 의심되고, 길은 높은 비탈에 달려 하늘에 오르는 듯하구나. 비온 뒤 일만 골짜기에 물이 넘쳐 흐르는데, 구불구불한 오십천을 건널 일이 근심된다(直過長空入紫烟 始知登了在高巓 一丸白日低頭上 四面群山落眼前 身逐飛雲疑駕鶴 路懸危磴似梯天 雨餘萬壑奔流漲 愁度縈洄五十川).”라는 시를 남기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의 김시습(金時習)은 '망태백산 望太白山'이라는 시에서 “멀고 아득한 태백산을 서쪽에서 바라보니, 기암괴석이 구름 사이에 솟아 있네. 사람들은 산마루 신령님의 영험이라 말하는데, 분명코 천지의 조화로세(西望遙遙太白山 碧尖高揷聳雲間 人言嶽頂神靈異 辨得乾坤造化關).”이라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얽히고 설킨 뿌리도 많고 높이 솟은 형세 구름 사이에 들어 있네. 높은 봉우리는 온갖 흰 옥이 선듯하고 절벽에는 온갖 산울림이 들리네.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 한가롭게 새·짐승 떼지어 다니누나. 무릉도원 깊은 곳에 자리잡고 나의 속세마음 씻고자 하네(合沓盤根大 岧嶢勢入雲 危峰千玉立 絶壑萬雷聞 懮懮干戈世 閑閑鳥獸群 桃源定深處 吾欲謝塵氛).”라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김방걸(金邦杰)을 비롯하여 한말의 우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곽종석(郭鍾錫) 등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시문들이 남아 있다.
태백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금강산이나 설악산처럼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는 경승이 없어 시문에 묘사된 모습도 금강산과 같은 정취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산이 높고 주위에 높은 봉우리들이 서로 이어져 능선을 이루고 있으므로 선계(仙界)와 같은 느낌을 주어 시문에도 신선의 영상과 산정의 영이(靈異)함이 자주 도입되었다.
이는 태백산이 신라 이래로 제행이 올려지는 오래된 신앙처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군봉을 이루고 있는 탓으로 삼척의 오십천 등과 같이 태백산에서 연유한 계류가 많아 산정에 못지않게 계류에 대한 묘사가 시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단군성전 사진
이외에도, 태백산 주변 자락인·장성·황지·고한·함백·사북 등은 석탄 산지로서 탄광 때문에 생긴 도시인데, 이 일대는 매장량·생산량에 있어서 국내 제일이였고, 또 영월군 상동(上東)에는 우리 나라 제일의 중석광산이 있다. 이 지역에서 석탄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37년 일본인이 조선무연탄주식회사로부터 광업권을 양도받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도계에서 채탄 작업을 하면서부터이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종업원들의 자치제로 운영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상공부 광무국 관할로 운영되었다.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발족하여 도계·장성 두 광업소에서 채탄을 하였다.
그 뒤 석탄 수요가 급증하자 석탄 채굴이 확대되어 1960년대에 들어 황지에서 본격적인 채굴이 이루어졌다. 함백·고한·사북·예미 지역은 민영 탄광이 들어와 태백산 일대의 석탄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이들 탄광취락은 원래 작은 한촌에 불과하였으나 석탄 개발 이후 산업철도가 전철화되는 등 교통이 원활하게 되어 도시로 발달하였다. 특히, 장성과 황지는 병합되어 태백시로 승격하였다. 석탄 개발 초기에는 지표 가까운 곳에서 채탄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갱도가 깊어지고 에너지정책에서 석유에 밀려 사양길을 걷고 있다가 석유네 밀려서 끝내 폐광되고 말았다. 탄전지대의 본산인 이곳 태백에는 석탄산업 합리화에 의해 40개가 넘는 탄광등이 모두 문을 닫고 겨우 한 두 개만 남게 되자 국가기간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던 석탄의 역할과 그 역사적 사실들을 한 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전시 연출하여 역사적 교육의 학습장으로 활용하며, 아울러 우리들에게 잊혀져가는 석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고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건립한 국내 최대의 석탄 박물관이 당골 계곡 눈꽃 전시장 입구에 있어 잊혀져 가는 당시 광부들의 애환을 직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가 있기도 하다.
석탄박물관 사진
3, 숙식과 찾아 가는 길
(1) 찾아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신갈JC에서 영동고속도로 원주,강릉방향 → 만종JC에서 중앙고속도로 제천, 대구 방향 → 제천IC에서 제천 방향 → 영월 → 사북,고한 → 태백
(2) 숙식
태백시에는 524개 객실을 보유한 거대한 오투리조트가 있고, 소도동 당골 부근에 민박과 펜션이 많이 있으며, 먹거리로는 싸고 질좋아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태백한우가 유명하다( 1인분 250g에 25,000원).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택리지』
•『삼척읍지』
•『삼척진주지』
•『태백(太白)의 시문(詩文)』(강릉문화원, 2003)
•『한국지지』-총론-(건설부국립지리원, 1980)
•『태백산일대종합학술조사보고서』(한국자연보존협회, 1987)
지인의 글 동창회 홈피에서 가져옴.
'지인의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종환 주 파키스탄 대사는 4.14(화)~16(목) 카라치, 라호르, 사히왈을 방문하였습니다. (0) | 2015.04.20 |
---|---|
송종환 대사... 지구촌비전 4월호 인터뷰 사진첩에 (0) | 2015.04.08 |
동래고 개교 117주년의 역사와 현재 (0) | 2015.01.27 |
주 파키스탄 송종환 대사의 페이스북에서 '자유민주주의 통일의 대박'을 ... (0) | 2015.01.24 |
2014.12.10 ‘DIPLOMATIC EXCELLENCE AWARDS-2014’ 수상 (0) | 2015.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