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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실록(104) 충선왕 1

고려왕조실록(104) 충선왕 1 - 총명한 충선왕,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다



충렬왕의 맏아들로 몽고의 제국대장 공주의 소생이기도 한 충선왕은 1275년 9월 정유일에 태어나서 3세인 1277년에 세자에 책봉 되었습니다. 이름은 장, 자는 중앙, 전 이름은 원, 몽고 이름은 익지례보화입니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을 배려함이 각별하였습니다. 그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1283년 2월 9살에 불과했던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이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려하자 갑자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유모가 까닭을 묻자 충선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리 대답했다 합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데다 농사철까지 다가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어찌 멀리 사냥을 나가신다는 건가요?”
 
측근 신하가 이를 전해 듣고는 충렬왕에게 그대로 전하였는데, 충렬왕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사냥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충렬왕이 필요 이상으로 거의 광적으로 사냥에 집착했으며 주색에 빠져 지냈다는 것은 앞서 기술한 바가 있는데, 충선왕의 어머니 제국대장 공주가 이를 몹시 가슴 아파하였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입니다. 아마도 충선왕은 어린 나이이다 보니 어머니의 편에서 아버지를 바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는 생각이 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9살의 어린 아이가 백성의 곤궁한 삶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선왕이 어릴 적부터 왕재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번은 헤어진 옷을 입고 땔나무를 지고 궁문을 들어서는 백성을 보면서 “나는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 백성들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느냐?” 라고 얘기하면서 마음 아파 한 적도 있었으며, 궁노(宮奴)가 동리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 충선왕에게 바치자 “네가 이 연을 어디서 얻어 왔냐?”하고 묻고는 “어찌 남의 물건을 빼앗느냐”하고 궁노를 크게 책망하면서 돌려주라고 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렇듯 따뜻한 마음으로 성장해 가던 충선왕은 13세에 원나라의 입조 명령을 받고 고려를 떠나 원에서 숙의하게 됩니다.
 
그 후 귀국한 뒤에도 수차례 원나라를 방문하고 온 충선왕은 1296년 원나라의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하게 되어 아버지 충렬왕에 이어 또 다시 원나라의 사위가 됩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복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인지라 고려왕이 원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원나라의 지지와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는 것을 뜻함 이었습니다. 

원에 머물던 충선왕이 어머니 제국대장 공주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고려에 돌아온 충선왕은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은 궁인 무비에 대한 분노를 좀처럼 삭힐 수 없었습니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극구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무비와 그 측근 들을 참살하거나 유배시켜 버립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저주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보복을 해 버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충선왕의 이러한 행동은 부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충렬왕 역시 모를 리가 없었겠지요. 본인이 버젓이 군왕
으로 군림하고 있는데, 세자의 신분에 불과한 아들놈이 자신의 마누라 격인 여자를 마음대로 죽여버리니 속이 편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항상 가슴앓이를 해온 제국대장 공주를 친아들인 세자가 곱게 보고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충렬왕의 입장에다가,  원나라의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까지 하였고, 원나라의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하도록 일조하여 원으로부터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는 세자인지라 설령 어찌 해버리고 보고 싶어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충렬왕은 제국대장 공주를 잃고 나니 원나라의 지원을 받기도 어려워진 상황에다, 막강한 세자에게 휘둘림까지 당하게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왕위를 지켜나가기가 버거워진 것이지요. 이에 충렬왕은 1298년 정월 아들 충선왕에게 양위를 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