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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차의 기원과 역사

 차의 기원과 역사

 

 차의 개념

 

'차'의 정의는 '산다화과(山茶花科)에 속하는 상록관엽수인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가공하여 만든 것' 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만든 마실거리의 재료이다. 즉 찻잎이나 차 가루 혹은 찻덩이로 이를 찻감이라고도 한다.
  • 찻감을 끓이거나 우려내거나 물에 타서 마실거리로 만든 찻물이다. 여기에는 맑은 탕다(湯茶)와 탁한 유다(乳茶,가루차)가 있다.
  • '차꽃', '차싹' 등의 경우에 '차'는 차나무를 뜻한다.

 ① 전통차

   전통차란 산다화과에 속하는 차나무의 어린 순이나 잎을 채취하여 찌거나 덖거나 혹은 발효시켜 건조시킨 후, 알맞게 끓이거나 우려내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녹차와 같이 산화효소를 파괴하여 발효를 억제시킨 불발효차, 홍차처럼 완전히 발효시킨 발효차, 우롱차처럼 일부만 발효시킨 반발효차(부분발효차)가 이에 속한다.

 

 ② 대용차

   차 대신 다른 재료를 이용한 음료를 말한다. 생약류(감로차,결명자차,계피차, 당귀차,박하차,대추차 등), 과실류(귤피차,레몬차,모과차,석류차 등), 곡류(곡차,녹두차,보리차,두향차,율무차 등), 줄기.엽류(감잎차,동규자차,모란차,쑥차,죽엽차,뽕잎차 등), 뿌리류(생강차,칡차 등), 기타(꽃,버섯,해조류,꿀 등)

 

 차의 명칭

 

육우의 '다경' <일지원>에,

 

   ... 그 이름은 첫째는 다(茶)요, 둘째는 가(檟)요, 셋째는 설(蔎)이요, 넷째는 명(茗)이요, 다섯째는 천(荈)이다. 주공이 말하기를 '가'는 쓴차이다. 양집극이 말하기를 촉나라 서남인들은 차를 '설'이라 하였으며, 곽홍농이 말하기를 밀찍 딴 것을'다 '라하고 늦게 딴 것을 '명'이라 하며 혹 일설에는 '천'이라고 하였다 한다. ...

 

 (도)           

  위 다섯 자는 중국에 음다풍의 체계가 서고 제다법이 발달한 수 말과 당 초인 6~7세기 경에 이르러 비로소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육우의 '다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한동안 다(茶)자가 도(荼)자와 혼용되다가 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다자가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의 차 명칭

 

 우리나라의 차 명칭에 대한 기록으로는 각종 비무ㅠㄴ, 와당, 시문, 토기 등에서 그 역사를 확인할 수 잇는데 우리 말인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는 주로 한자인 '차 다(茶)'자와 '차싹 명(茗)'자로 표기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한문인 '다'와 한글인 '차'가 함께 사용되었다.

 

 '차'와 '다'의 구별 활용법

 ① 순수한 우리말의 복합어일때는 '차'로 발음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로, 차를 마시다, 차를 끓이다, 차나무, 차 숟가락, 찻잎, 차 찌꺼기 등.

 ② 한자 복합어일때는 '다'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 예로, 다례, 다방, 다식, 다원 등.

 ③ '차'라는 말 앞의 접속사가 생략되어 한 개의 단어로 보편화된 경우에는 '차'로 쓴다. 예로, 국산차, 전통차, 설록차, 작설차, 홍차 등과 같이 재료나 지명, 환경, 생김세 등을 쫓아 그에 알맞은 말을 앞에 놓고 뒤에 '차'라는 뜻의 음을 붙여서 굳어진 말이다.

 ④ '차'와 '다'음을 함께 사용하는 특별한 경우이다. 이것은 '차'라는 뜻이 소리호ㅓㅏ되어 우리말로 굳어지면서 보편화된 말들로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뜻이나 품격이 달라지므로 주의하여 구별해 써야 한다.

  • 다례(茶禮) - 신(神)과 사람에게 차를 끓여 내는 행위
  • 차례(茶禮) - 명절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
  • 다호(茶壺) - 마른차를 넣는 단지
  • 차호(茶壺) - 중국의 다관
  • 다방(茶房) - 마시는 차나 대용차를 파는 집
  • 찻방(茶房) - 마른 차(찻감)나 다구를 보관하는 방 혹은 다실

 

 차의 유래

 

 차의 기원

 육우의 '다경'에는 중국 삼황오제 시대의 염제 신농씨가 차를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신농본초경'에 의하면 '차를 오래 마시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있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 또는 '신농이 백가지 초목을 맛보다 하루는 72가지의 독을 먹었는데 도(荼)를 얻어 해독하였다'고 전한다. '화양국지'에는 기원전 1066년 주의 무왕이 은을 정복했을때 파촉지방에서 차를 공납의 진품으로 여긴 기록이 있으며, '안자춘추;에는 춘추시대 안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이었을 때 고기와 알과 명채(茗菜)만을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의 서한시대인 기원전 59년의 노비매매문서 '동약'에 '무양에서 차를 사오다', '차를 끓이다'라고 적혀 있음으로 보아서 이미 차는 생활필수품이며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음을 알수 잇다. 그라나 민간인들에게 보편적인 음용은 당대에 이르로 시작되었고 송대에서는 쌀, 소금과 더불어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차의 전파

 중국에서 시작된 차는 승려들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함께 전해지거나 통상무역의 발전에 따라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었다. 220년경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태국에 차가 전파되었고, 7세기 경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티벳왕에게 시집가면서 음다풍습을 전한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 차가 외국으로 전해졌다.

 805년에는 일본승 사이조우가 종국에 불교를 배우러 왔다가 차 종자를 일본 자가현 고꾸다이산에 파종하였다. 유럽에는 17세기 초 동양무역을 장악했던 네덜란드를 통해 시작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독일 그리고 1630년대 중반 영국으로 유입된 후 유럽전체에 급속히 차문화가 유행하였다.

 

 우리나라 차의 유래

 

 가. 자생설

 우리나라 차나무의 자생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차나무가 생장하는 적지는 화강암지대이므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 지대인 우리나라에서 자생할 수 잇다.

 둘째, 차나무가 생겨난 이래로 새나 배, 바다의 조류, 지형변화 등으로 씨가 옮겨 계속 번식했으므로 중국가 가까운 서남 해안지방에 역사 이전부터 차나무가 자생하여 약용으로 쓰이다가 음료로 마시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 전래설

 

 ① 가야국 수로왕비 전래설

 이능화(1869~1943)가 쓴 '조선불교통사' 하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 전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의 공주 하황옥은 서기 48년 음력 5월 배를 타고 인도를 떠나서 그 해 음력 7월 27일 김해 별진포에 도착하였다. 수행원은 20여명으로 혼수품으로 금, 은, 폐물, 비단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혼수품에 차에 관한 이야기는 없지만, 가락국기 끝에 차와 과일을 갖추어서 시조 수로왕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차가 있었으며, 그 차가 인도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② 대렴공 전래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 12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차씨를 갖고 왔는데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여왕(632~647)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크게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차나무 기원에 관한 전설

 

 가. 편작에 의한 기원설

 춘추전국시대 명의인 편작 아버지의 무덤에서 차나무가 처음 돋았다는 전설. 그는 8만4천 종의 약방문을 알고 잇었으나, 비방을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고 차나무에 맡겨서 후세에 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중에서 6만2천종은 아들인 편작에게 전수하고 나머지 2만2천종은 차나무로 남겼다고 한다.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풀 초(艹)와 나무 목(木)을 합쳐서 차(茶)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나. 달마에 의한 기원설

 인도 향지국의 왕자 달마가 수마를 쫓기 위해 떼어버린 눈꺼풀이 차나무가 되었다는 설이다. 달마는 중국 소림굴에서 9년 면벽 후 선조(禪祖)가 되었는데 정진 중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수마(졸음)였다. 잠을 쫓기 위해 눈꺼풀을 떼어 뜰에 던졌는데 이튿날 아침 마당에 한그로의 나무가 돋아 그 찻잎을 따서 달여 먹고 잠을 쫓았다는 전설이다.

 

 다. 기파에 의한 전설

 불제자인 의원 기파가 딸의 무덤에 좋은 약을 뿌렸더니 차나무가 돋았다는 설이다. 기파는 고대 인도 왕사성의 명의였다. 빙파사라왕의 아들로 석가에 귀의하였다. 그는 의술을 배우고 돌아와서 부처님의 풍병과 아난의 부스럼을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기파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스무살의 딸이 죽었다. 며칠 뒤에 돌아온 기파는 딸이 앓을때 약을 못준것이 후회되어 무덤에 좋은 약을 뿌렸더니 차나무가 돋았다고 한다. 그레서 차나무를 스무살의 나무(茶)라고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 가평문화연구소
글쓴이 : 梵行거사 원글보기
메모 : 좋은 자료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