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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가보고 싶었던 곳...

지난 14일 지인이 다녀왔던 곳으로

친구 딸 결혼식으로 동행을 못해 아쉬웠다.

어디 신문인가에도 게재가 되었던 곳인데 넘 경치가 장관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이 떠나가는 가을... 만추에 그렇게 멋있는 단풍을 보지 못하여

가고 싶었지만...

그 옛날 언제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한번은 다녀온 것으로 안다.

참 그동안 많이 가꾸어 놓아 더 아름답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 궁궐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인께서 정리해 놓은 내용을 여기에 함 옮겨 놓아본다.

 

 

1.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 - 71번지에 있는 창덕궁은 1405년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 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세운 조선 왕조 제2의 왕궁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건축으로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後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정원으로 손 꼽히며,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고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별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구실을 함으로써 270여 년 동안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하였으며,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이 궁궐은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경계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쪽에 있는 궁궐'이란 뜻에서 동궐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이 궁이 창건됨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또 남쪽에는 왕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위치하여 조선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균형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대칭으로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지만,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이같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구성은 경희궁,덕수궁 등 다른 궁궐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조 3대 왕인 태종()이 즉위한 후 두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그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기에 경복궁은 그 터(形勢)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1404년(태종 4년)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殿), 편전인 선정전(殿),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43만 4877㎡) 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이 궁궐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년)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년)에 중건이  끝났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제는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폐허로 변한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造苑)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후원에 있었던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160여 종의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술한 바와같이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
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잘 보존되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기에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그 동안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또 해방 이후에도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조선 후기에 그려진 《동궐도》를 참조하여 1991년부터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1997년 12월 6일 종묘와 더불어 서울 시내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1906년에 촬영한 창덕궁

 

창덕궁의 건축물(번호순서임)

창덕궁 내부의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 일원,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루던 인정전 일원, 왕의 집무실인 선정전 일원, 편전인 희정당, 침전인 대조전 일원, 동궁인 성정각 일원, 왕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인 궐내각사,  왕실의 제례장소인 구 선원전 일원, 헌종과 경빈의 애환이 서린 낙선재, 후원인 부용지와 주합루, 숙종의 손길이 머문 애련지와 의두합, 조선 후기 접견실인 연경당, 다양한 정자가 모여 있는 존덕정 일원, 다양한 각도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옥류천 일원, 역대 왕들의 어진이 있는 신 선원전 일원 등 총 15권역으로 구분된다.

2.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의 야경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처음 세워진 2층 루각으로,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원년(160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1963년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이미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종묘 서쪽으로 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돈화문 역시 궁궐의 서쪽에 치우쳐 세웠으며, 아랫층은 출입용으로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윗층은 감시전망용으로 사용되었다. 신하들은 돈화문이 아니라 금호문(金虎門)으로 드나들었다. 처음 돈화문에서 종로까지는 관청가가 조성되었다.

(1) 금천교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 입구와 인정전 사이에 흐르는 해자 즉 인공 개울에 놓인 돌다리이다.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졌다. 이 다리는 왕과 백성을 구분짓는 표식으로 신하가 왕을 만나려 갈 때는 이 금천교 아래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정갈하게 씻고 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2) 금호문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 서쪽 출입문으로 궁을 드나드는 신하들의 출입문이다. 모든 신하들은 궁 출입시 돈화문이 아닌 이 문으로 출입해야만 한다.  또한 이곳은 1926년 금호문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하다

3.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루던 곳, 인정전(仁政殿)

 
인정전 내부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루던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구조이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1418년(태종 18) 창덕궁 공사로 내시에서 1품 벼슬에까지 오른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광해 1) 중건하였으나, 1803년(순조 3)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앞마당은 조정(朝廷)이라 불리며,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정에 잔디를 깔았으나, 지금은 다시 박석으로 덮여있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인정전 추녀 끝의 잡상(어처구니)

 

통상 궁궐의 내림마루나 귀마루의 끝에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잡상이 올라 가는데 궁궐의 격에 따라서 올라 가는 숫자가 다르다. 통상 황제가 사는 황궁에는 11마리가, 세자전에는 9마리가, 그 외에는 7마리가 올라 간다. 하지만, 한국의 궁궐에는 이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현재 경회루에만 11마리가 올려져 있고, 주궁(主宮)이라고 할 수 있는 경복궁 근정전에는 9마리가, 창덕궁 인정전에는 7마리가 올라가 있다. 또 어떤 곳에는 3마리만 올라가 있는 곳도 있다. 어처구니는 내림마루나 귀마루 끝으로 부터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천산갑, 삼살보살, 나토두 순이다.

4, 왕의 집무실로 쓰인 선정전((宣政殿)

선정전(宣政殿)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정전과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임란과 인조 반정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했다.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지붕에 값비싼 청기와를 올려 이곳이 임금의 집무실임을 상징하고 있다. 보물 814호이다.

어차고

어차고(御車庫)는 대조전 앞에서 조금 먼 뜰에 있으며, 고종 황제 순종 황제의 옛 차를 보관하여 어차고라고 한다. 현재 어차는 궁중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5.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희정당(熙政堂)

보물 제815호인 희정당(熙政堂)은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였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였으나 1496년(연산군 2년)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복구하였으나, 인조 반정 때 또다시 불타 1647년(인조 25년)에 다시 지었다. 1833년(순조 33년)에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타서 이듬해에 재건하였으나 1917년에 또 불에 탔다. 지금의 건물은 1888년(고종 25년)에 지은 경복궁의 강녕전을 1920년에 옮겨다 개조한 것이다.

희정당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이고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다. 가운데 3칸을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좌우에 여러 칸의 작은 방을 만들었으며 그 방 뒤쪽에 골방과 목욕탕 등을 설치하여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6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大造殿)

 
대조전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수 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된 비극의 현장이다. 조선 시대의 왕 인조과 효종, 순종을 비롯하여 성종이 승하한곳이고, 순조의 세자로 나중에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보물 816호이다. 태종 5년(1405년) 에 지었는데, 임진왜란과 그 후에도 화재로 여러 번 다시 짓기도 하였다. 1917년 또다시 화재가 났는데,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 다시 이곳에 재건하여 '대조전'이라는 현판을 걸어 오늘날 까지 자리 잡고 있다. 내부는 대체로 서양식으로 침전이고 침대 등이 있다. '크게 만든다'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용종(龍種)을 크게 만들어라고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용마루가 없다.

즉 용을 나타내는 왕이 용종을 생산하는 곳이니 용위에 또 용이 있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7. 세자의 일상이 살아 숨쉬는 동궁인 성정각(誠正閣)과 왕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

 

낙선재로 넘어가기 전에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있다. 세자의 교육장인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 등의 편액이 걸려 있는 성정각,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된 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 승화루(承華樓)가 있고,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안에 세운 관청인 궐내각사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內閣: 규정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제(大酉齊) 등이 있다.

 

8. 헌종이 존경하는 할머니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집, 낙선재(樂善齋) 

 

낙선재(樂善齋)는 헌종 13년(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이 일대에는 숙종, 정조, 헌종 때에 지어진 소박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조 제24대 와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齊)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사랑하지만 할머니 땜에 왕비로간택하지 못했던 경빈을 위해서 그녀의 처소로 지은 집이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妃)를 위한 집으로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낙선재는 검소한 헌종의 면모를 따라서 단청을 하지 않고 소박하게 지었다. 낙선재 현판은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의 글씨고,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翁樹崑)의 글씨다. 낙선재의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사망했다.

 

 

 
낙선재

 
부용지와 부용정 일대
 
 
 
부용지와 부용정

 

9.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나중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 되었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크고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纜池), 옥류천(玉流川)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鷹峰)으로 이어진다. 서쪽 깊숙한 숲 속에 조성한 서원(西苑)은 대보단이나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이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지는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체험정원이다. 또한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는데,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는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또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 및 과거시험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던 곳이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앞을 비워 두고 뒷편에 만들었는데, 창덕궁도 그 예를 따라 궁궐 뒷편에 정원을 만들고 '후원'이라고 불렀다. 궁궐 안에 있다 하여 '내원(內苑)',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어서 '금원(禁苑)'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후원을 관리하던 관청의 이름을 따서 '상림원(上林苑)'이라고도 했다. 구한말에 궁 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비원(秘苑)'을 두었는데 1908년부터 이 명칭이 기록에 등장한다. 비원이란 명칭이 일반인들에게 익숙해진 것은 금원이었던 이곳을 일제가 의도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서부터일 것이다.

 

(1)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 부용정(芙蓉亭)과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연못과 연못 남쪽의 정자를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이라 하며, 부용정 맞은편에는 주합루(宙合樓)일원의 왕실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의 2층 건물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이 있다.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인 주합루 오른쪽에 있는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연꽃모양으로 생긴 부용정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형상이고, 행사가 치려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 보고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모두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으로 부용지 물을 붉게 물들이는 붉게 타오르는 늦가을 단풍색과 더불어 마치 선경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기법 중의 하나인 생울타리인 취병(翠屛)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의주합루는 정조 즉위년(1776년)에 지어진 2층 누각으로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하늘의 별인 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이 '어수문(魚水門)'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큰 문 하나와 좌우로 작은 문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한데, 큰 문은 왕이, 작은 문은 신하의 출입문이다.

 

(2) 애련지(愛蓮池) 애련정(愛蓮亭)과 불로문(不老門)

 

1629년(숙종 18년)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어졌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핏빛처럼 붉게 불타는 단풍으로 환상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하는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란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정자는 애련정이 되었다. 숙종은 "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倚斗閤)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午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4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는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불로장생을 바라기는 매양 한 가지인 모양이다. 불로문은 한 개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석문으로 조선 시대 왕들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연경당 앞에 세워진 문이다. ㄷ 자 모양의 단순한 돌문으로 맨 위에 불로문(不老門)이라 쓰여 있다. 불로문의 기둥에 쇠가 걸렸던 흔적으로 보아 본래는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을 지나가 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알려진다. 동궐도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

애련정(愛蓮亭)은 숙종 18년(1692년)에 지어졌다.

(3) 연경당(延慶堂)

 

연경당(延慶堂)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년)에 창덕궁 후원에 지어진 집으로, 왕궁이 아닌 사대부가의 주택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총 120여 칸의 집으로 단청을 하지 않았고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일반 사대부가와는 달리 내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하지만, 일반 민가가 최대 99칸으로 제한된 데 반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레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 집을 만든 효명세자가 이 집을 왕건강화책으로 이용했던점에서 보듯이 이 집구조상 창건 당시 연경당은 연희 공간으로 창건되었을거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4) 정조의 자신감 존덕정(尊德亭)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졌으며 네모나거나 둥근 5개의 작은 연못이 연이어 있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하나의 곡선형 연못으로 바뀌어 '반도지(半島池)'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貶愚사),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의 정자들이 날아갈듯이 자리잡고 있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로 천정 중앙에 그려진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은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존덕정 안 북쪽 지붕 아래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 쓰인 나무판이 걸려 있다. 정조가 재위 22년(1798년)에 '萬川明月主人翁(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의 주인공)'이란 호(號)를 스스로 지어 부르고, 그 서문을 새겨 존덕정에 걸어 놓은 것이다. 그 요지는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하다.'라는 것으로 신하들에게 강력하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평생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고달품이 느껴진다.

 

(5)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옥류천(玉流川)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이라 한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내고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인공으로 만든 작은 폭포로 떨어지게 하여 옥류천이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때로는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유상곡수연은 353년 중국 동진 소흥(紹興: 현 샤오싱) 지방의 난정(蘭亭)에 당대 명필 왕희지(王羲之, 307 ~ 395)를 비롯한 명사 41명이 모여 난정 밑에 굽이치는 물길을 만든 후

그 물길을 따라 흐르도록 술잔을 띄어 보내면, 자기 앞에 온 술잔을 받아들고 시를 지어 발표했다. 다음 잔이 올 떄까지 발표하지 못하면 벌주로 석 잔 술을 더 마셔야 했는데, 여기서 나온 시를 모은 것이 저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며 그 때부터 상류층의 유희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詩)는 이 일대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이곳에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소규모의 적은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아주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倚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이 중 특히 농산정은 정조가 아주 좋아하여 이곳에서 제숙(齊宿)을 하면서 화성 행차 준비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화성은 정조가 은퇴 후에 어머니와 함꼐 살 행궁(行宮)으로 아버지 사도세자 묘에서 가까운 곳에 건설한 도시였다.

 

(6)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곳, 신(新) 선원전(璿源殿)

 

임진왜란 당시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던 곳을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대보단을 철거하고 새로운 선원전을 지어 구 선원전에 있던 어진들을 옮겨 왔다. 이처럼 후원 깊숙한 곳으로 선원전을 이전한 까닭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 왕실의 상징성을 악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태조 이성계부터 고종까지 11명의 어진들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실수로 불타 없어졌다.

 

(7) 천연기념물 제 194호인 750년 된 향나무

 

역대 왕들을 위한 제례공간인 선원전 앞에는 하늘을 향해 용틀임을 하는듯한 거대한 향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수령이 750년으로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이 향나무는 아마도 선원전의 제례의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용틀임하는듯한 모습과 또 그 앞에 궁궐을 향해서 뻗어나와 이제는 고사된 나목(裸木)으로 마치 원숭이가 궁궐을 향해서 울부짓는듯한 모습의 고사목이 퍽이나 이채롭고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