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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遊頭流錄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곳인 해발 1,45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법계사는 하늘 아래 첫 佛寺다. 높은 곳에 있는 사찰로는

설악산 8부 능선산의 천하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봉정암이 있기는 하지만 해발 1,244m에 불과하므로 법계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힘차게 몸을 돌려서 西行하다가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몸을 돌려서 南行을 한다. 이렇게 천리를 行龍한 백두대간이 그 마지막 힘을 다 토하여 힘차게 솟구친 산이 바로 智異天王峰

(1915.4m)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 (1950m)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다, 그 만큼 장엄하고 웅대하며 힘차다. 지리산은 산이라기

보다는 山塊라고 불러야 옳다. 3道 5郡 15面에 걸쳐 있으면서 동서로 200리요 남북으로 100리에 이르는 웅대하고도 거대한

산덩어리인 것이다. 이같은 헌걸찬 지리산 중에서도 천왕봉은 헌걸차고도 헌걸찬 巖塊로, 이곳에 서면 사방이 모두 발 아래로

보이며, 또 一望無際로 시원하게 딱 트여 있어서 거칠것이 없다. 날씨가 맑을 때는 저 멀리 대마도까지도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올랐을 때에는 비록 근래에 보기드물게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평선상에 구름이 있었던 관계로 三道 五郡이 모두 발아래에

엎드리고 있었지만, 대마도를 볼 수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곳에는 5월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흰 눈이 쌓여 있어, 여름과 봄과 가을 등 사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7 ~ 80도 경사를 치고

오르느라고 흘린 땀이 정상에 서니 시원하다 못해서 차다. 萬山을 발 아래로 거느리고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은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그 진가를 모르리라. 그렇게 맛날 수가 어디 또 있겠는가. 물론 산에는 용존산소량이 무척이나 풍부하고 높기에 어떤

음식이라도 맛나지만, 특히 이 때의 커피 한 잔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없을만큼 맛 있다. 문득 작년인가 재작년인가는 확실치

않지만 노고단(1,507m)에서 돼지령, 임걸령을 거쳐 반야봉(1,733.5m), 삼도봉(1,550m)을 지나 반선으로 내려오는 무박 2일 등산시

1,733.5m 반야봉 정상에서 雲海 속을 뚫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일출을 보면서 마셨던 맛났던 와인생각이 난다. 한 잔 마시면

꿀맛일터이지만, 어쩌라. 하지만 천왕봉 정상에서 마시는 커피도 그것 못지않게 맛 있다.

 

오늘의 들머리로 잡은 山淸郡 矢川面 中山里 初入, 地名만큼이나 개울물이 빠르고 깊으며 맑다.시천면으로 흐르는 德川江은 마치

화실처럼 빠르게 그리고 곧게 흐르는데 이 때문에 이지방 지명이 시천면이 되었다. 이 물살은 고은동계곡과 장당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합수하여 거울처럼 맑은강을 이루는데, 어찌나 맑디 맑아서 마치 거울같이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경호강이 되며 흘러서

진주를 관통하는 남강이 되고, 이 남강가에서 삼성과 LG의 두 재벌家를 잉태시킨 후 낙동강으로 합류되어 남해로 빠져 나간다.차창

밖으로 흐르는 矢川은 참으로 맑고도 깨끗하며 굳세다. 산도 힘차고 굳세어서 함부로 머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그 옆으로 흐르는 강도

산을 닮아서 맑고 깨끗하며 힘차게 흐르니 이 地氣를 받아 태어난 영남학파의 쌍두마차 중 하나인 南冥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귿세며

맑고 깨끗할뿐만 아니라 곧다. 때문에 그가 올린 乙未辭職疎(그가 단성현감 재직시 올린 사직소라해서 일명 丹城疎라 불린다)는 그의

이같은 기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절대군주인 나이 어린 明宗을 '젓비랜내 나는 어린아이'로,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를 '구중궁궐안에

갖혀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노망들린 할망구'로 표현하면서 辛辣하게 비난하고 있다. 나는 남명의 이같은 올곧은 점이 좋다.

그가 비록 평생의 벼슬살이라고는 가장 하급직인 단성현감이 고작이였지만 그의 말처럼 " 올곧아 써임새가 없기에' 평생을 지리산에

隱居하면서 德川書院에서 후학을 길러낸 그의 문향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던 퇴계보다는 남명을 높게 친다.

 

산행기점이 되는 중산리는 그 옛 날에 가봤던 그 중산리가 아니다. 이미 곳곳에 현대식건물들이 들어서서 예가 시골인지 아니면 도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국립공원매표소 앞에서 법계사에서 운행하는(사실 엄밀히 말하면 사찰에서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지입차주들이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운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니 25인승 버스를 타고 순두류에 있는 경상남도 자연학습원까지 올라 갔다. 운임은

1,000원인데 타종교단체에서 민원을 제기하여 이제는 그마저도 마음대로 못받고 승객들의 양심에 호소한다고 했다. 잘 타고 갔으면 댓가를

지불할 것이지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들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랬는지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다. 어느 종교단체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짐작가는데는 있지만서두...

 

법계사 입구라고 쓰여 있는 석비옆에는 지리산 등산객들을 구하다 희생된 구조대원들의 위령비가 있다. 이곳에서 부터 시작되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고지대에서만 자라는 山竹林과 잘 가꾸어진 리기다 소나무림을 지나면 '遊頭流錄 '에서 조식이 읊었던 '桃花 뜬 맑은 물에.....'라는

대목과 똑같은 도화꽃이 만발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가 나타난다. 이 계류 위로 가설된 두 개의 출렁다리를 건너고 한 개의 비룡폭포를

지나면 맑은 물이 제법 고여 있는 조그마한 沼와 모래사장이 나타난다. 이어서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가면 저 멀리 법계사 일주문이 마치

天界入口를 지키는 守門인양 우림하게 나타난다. 일주문을 지나 돌계단으로 잘 다듬어진 길을 올라가면 연기조사가 가져와서 봉안했다는

사리탑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적멸보궁이 나온다. 人法堂이라서 불상이 없는 보궁 내 창틈으로 보이는 삼층사리탑은 마치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모습이다. 사리탑의 모습만 논한다면 전체적인 양식으로 볼 떄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기는 신라 떄

사람이기에 이 양자가 잘 매칭이 되지를 못한다. 뭐, 매칭이 안되면 또 어떠라. 법계사가 자리잡고 있는 전체적인 국세로 볼 때 당초 이 사찰은

지금의 사리탑이 마주 보이는 來龍脈 앞에 세워진 아주 조그마한 석굴사원이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사리탑에서 바라보이는 중산리 일대의 조망은

천하일품이다. 뿐만 아니라 우람하게 서 있는 案山과 來龍入首脈도 참으로 헌걸차다.그래서 이 땅에서 피를 토하면서 道를 갈구했었던 인물들이

지나 갔으리라. 하지만, 그 강건한 산세로 말미암아 반듯이 총칼을 불러드렸을터이니 임진왜란과 을사망국 후 의병본거지가 되었고 이로 인해서

왜인들에게 두차례나 全消되는 폐해를 입었고, 또 육이오 때는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어서 국군에 의해서 전소되는 비운을 당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은 굳세고 강한 地氣 때문에  그 성정이 강건하다. 지금의 주지도 상당히 강건한 관상이다. 뿐만 아니라 공양주

보살도 그 성정이 만만찮아 보인다. 이 모두 이 땅의 기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어찌하라. 성정은 비록 강건하지만 그 만큼 그 몸 속에는

따뜻한 피도 흐를고 있으니 인정도 많으리라. 주지와 공양주 보살을 보면서 순간 그들의 일생이 활동사진처럼 눈 앞으로 흘러간다. 어찌 그리도

지기와 똑같은지 참으로 땅과 그 땅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은 불가불리의 관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삼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니 우측에서 흰옷을 입고 있는 잘 생긴 마고선인이 손짓을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산신각안에 계신다. 해서 산신각을 둘러본다.

우리민족의 기상처럼 岩塊를 뚫고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마치 金剛力士인양 굳건하게 보초를 서고 있는 잘 생긴 金剛松 옆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산신각은 지리산 만큼이나 참 특이하다. 보통은 흰수염을 늘어트릴 할아버지 山神이나 혹은 머리를 틀어 비녀를 꽂고 있는 할머니 산신이 있는데

반하여, 이곳에는 중앙에 마고선인이, 그 좌측에 흰 수염을 길게 느려트린 할아버지인 지리산신이, 우측에는 용을 타고 있는 우람하게 잘 생긴

南海龍王이 협시하고 있다. 마고선인의 아들인 지리산신은 이해가 가는데, 물도 없는 이 높디 높은 곳에 있는 용왕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해서 물었다. "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가? " "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四海를 관장하는 마고선인이 있으니 당연히 모시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듣고보니 타당하다. 이 말을 듣고 흰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선인이 빙그레 웃는다. 문득 한가지 의문을 던져 본다. 桓族들이여

그대들은 언제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것인가?

 

법계사에서 조금 오르면 왜인들이 박았둔 쇠말둑을 뽑아다가 전시해 두고 있다. 참으로 흉악하고 도 적악한 놈들이다. 우째자고 침략하고

약탈해간 것도 모자라서 아예 망하라고 穴脈이란 혈맥에는 모두 쇠말둑을 박아서 훼손시켜 놓았는지...

왜놈들은 그들 조상들이 저지른 罪業으로 인해서 조만간(2032년 경 예상) 일본 열도가 모두 해저로 가라 앉는 불행을 당할 것이고

그 때 모두 水葬되고 말것이니 이것이 바로 業報라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는 한 치도 허트려짐이 없으니 이같은 결과는 반듯이 일어날 것이다.

 

법계사 일주문을 뒤로 하고 우측으로 난 소로를 따라가서 60도 경사의 바윗길을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나타난다. 바로 마당바위다.

이 바위 위에 서면 경치가 참으로 좋다. 아래로는 저 멀리 올라왔던 중산리가, 좌측으로는 천왕봉에서 중봉(1,815m), 써리봉(1,642m)로 흘러내리는

거대한 岩群이, 우측으로는 제석봉(1,806m), 연하봉(1,667m), 삼신봉,촛대봉(1,703.7m)에서 올라오는 백두대간의 주릉이 아스라히 보인다. 죽어

나자빠진 고사목 군락들을 뒤로 하고 급경사길을 숨차게 오르면 개선장군을 환영하듯이 서 있는 凱旋門(혹은 開天門이라고도 함)이 반긴다.

참으로 우람하게 잘 생긴 바위다. 칼로 자른듯이 서 있는 이 바위는 그 모습이 참으로 可觀이다. 여기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한 참을 오르면

천왕봉 300m 아래에 天王샘이 있다. 샘이라기 보다는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맑은물로 참으로 시원하고도 맛 있다. 등산객들이 너도 나도

펫트병에 받아 간다. 조그만 펫트병이 금새 가득찰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저 바로 앞에 천왕봉이 보인다.

 

" 이제 고작 300m 밖에 안남았네" 라고 하지

가뿐 숨을 내쉬면서 내려오던 어떤 등산객 한 분이 이 말을 받아서

" 1,000m같은 300m 입니다 "라고 해서 한 바탕 웃었다.

 

여기서 천왕봉까지는 7 ~ 80m의 급경사 길이다. 군데 군데 계단과 밧줄이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글자 그대로 깔딱고개길이다.

백두대간이 그랬듯이 마지막 숨을 토하면서 치고 솟구쳐 오르면 우측이 通天門 가는 길이고, 좌측이 천왕봉 가는 길이다. 일부는 통천문으로 돌아서

오르고, 대다수는 지름 길인 천왕봉으로 바로 오른다.

 

드디어 남한 내륙에서 제일 높다는 천왕봉이다. 흘린 땀이 마르라고 시원한 바람이 휘 불고 지나간다. 바위 군데 군데 수북히 쌓여 있는 흰 눈과 고산이

주는 청량함을 묻힌 바람이 쉬원하면서 차게 느껴진다.

 

一望無際 !

 

오를 때는 힘들어도 오르고 나면 오를 때의 그 험난한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언제나 좋다. 이 맛 때문에 그 힘든 고생을 마다 않고 그 고생을

하면서 산을 오른다. 이 또한 산의 정상을 오르지 못한 이들은 모르리라.

이제 모든 것이 다 내 세상이다.

萬山과 萬邑과 萬象이 모두 다 내 발아래 무릎을 굽히면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린다.

 

저 멀리 남덕유에서 노고단을 거쳐서 힘차게 달려오는 백두대간 주릉의 헌걸찬 모습이 아스라히 보이고, 천왕봉에서 중봉과 써리봉을 기봉시키면서

유평리 밤밭골로 빠지는 지리 東麓을 형성한 대간의 마지막 모습이 힘차고, 천왕봉에서 국수봉, 구곡산(961m)을 솟구치면서 마치 구렁이처럼 굵고

느리면서 구불 구불하게 갈之字로 힘차게 달려 내려가 중산리, 동당리로, 그리고 덕천강과 만나는 지리南麓의 아름다운 모습이 황홀하게 다가온다.

 

장엄하다.

청허가 이 산에 올라본 후

" 智異壯而不秀(雪嶽秀而不壯)"라고 했었던 말이 실감난다.

 

"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들고 이제 보니
桃花 뜬 맑은 물에
山影 조차 어렸으라
아희야 武綾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 라고 읊조리면서 기껏 산 아래 계류에 발담그고 청주 한 잔 마시고 간 조식이 이 맛을 어찌 알것이며,

 

기껏해야 가마꾼들이 들어 주는 가마에 타고 입구까지 왔을뿐인 '頭流山錄"의 저자 김일손이 또한 어찌 이 맛을 알겠는가.

이 뿐이라 고작 실상사 계곡 골짜기에서 '왕이 되게 해달라'는 산제나 지내다가 지리산신이 들어주지 않자 산명을 不伏山으로

바꾸었던 成桂가 또 어찌 알겠는가?

 

 

 

 

지리산 동록 주변의 사찰들 ㅡ 대원사,단속사,엄천사,내원사,법계사   



1, 천하 명산 智異山



(1) 쫓기는 이들의 피난처로 수행자들의 산인 智異山

백두에서 길을 떠난 백두대간은 수천 수만의 봉우리들을 솟아 올리며 굽이 굽이 휘돌아 南行한 끝에 멀리 출렁이는 남해바다가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그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 하면서 남은 힘을 모두 갈무리하여 힘차게 우뚝 일어서니 한반도 남녘땅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리산 이다.높이가 해발 1915m며, 동서의 길이가 2백여 리,남북이 1백여 리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양도에 걸쳐 가로 누워 3도 5군

15면에 걸쳐 있고,능선의 평균 높이도 1300m나 되며 한라산의 3.3배로 봉우리가 1600개나 되어,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장엄하여 산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산맥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옛날에는 ` 가장 높은 뫼 `란 의미의 두류산( 두류란 높다, 혹은 머리란 뜻의 고어) 혹은 진시황의 전설에서 유래한 방장산(진시황이 불로초인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童男童女 3천명을 東海 어딘가에 있다는 三神山에 보냈는데,옛사람들은 삼신산이 영주,방장,봉래산이며, 지리산을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이라 생각했슴)이라 불리었는데,`지리`란 이름은 `두류`가 변해서 지리가 되었다는 설과 한자 뜻 그대로 `기이한 지혜`

혹은 `세속을 초월한 신비로운 세계의 지혜`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또다른 해석은 頭流山이란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의 정기가 이곳에서 마무리되면서 우뚝 솟았다는 뜻이고, 方丈山은 매우 넓어서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에 모두 걸쳐 있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예언서 < 감결 >은
" 두류산에는 1만 문수보살이 항상 머문다.그래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온화하다.속세를 벗어나 깊숙이 숨어 살고자 하는 이들이 이 산을

많이 찾으리라.훌륭한 도인, 빼어난 선비들이 무수히 들어와 道를 논하리니 훌륭하도다. 참으로 후륭하도다. " 라고 지리산을 평했다.

또한 청화산인 이중환은 그의 명저 <택리지 >에서 지리산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세상에서 금강산을 逢萊라 하고, 지리산을 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瀛洲라

하는데 이른바 三神山으로서 太乙星辰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다.계곡이 서리어 깊고 크며,땅 성질이 두툼하고 기름져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산 속에는 백 리나 되는 긴 계곡이 많은데 밖은 좁고 안쪽은 넓어서 왕왕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이 있고세금을 내지

않는 수가 있다.기후가 온난하여 산속에 대나무가 많고 또 감과 밤도 대단히 많아서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떨어진다.높은 봉우리 위에

기장과 조를 뿌려도 무성하지 않는 곳이 없다.평지의 밭에도 거의 심을 수 있으므로 산속의 村居는 僧寺와 섞이어 산다.농부와 공인들도 그리

노력을 하지 않아도 모두 풍족하다.그런 까닭으로 온 산이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富山이라 부른다." 고.

지리산의 장관을 읊은 것 중에 남명 조식이 읊은 것이 마음에 들어 여기에 소개한다.
남명은 < 유두류산록 >에서
그 옛날 취나물 밭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치밭목에서 유평리 대원사 계곡으로 내려가는 중에 있는 무지개치기폭포( 후에 이것이 음운변천하여

무재치기폭포가 됨 ㅡ 이 폭포는 물줄기가 물보라를 일으키면 능선위로 무지개가 걸린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임 )를 보고 그 경치에 감탄한 나머지

이렇게 읊었다.

"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들고 이제 보니
桃花 뜬 맑은 물에
山影 조차 어렸으라
아희야 武綾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



감결의 예언처럼 지리산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평화롭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들었다. 훌륭한 도인,빼어난 선비,나라 잃은 백성들,

탐관의 탐학에 시달리던 백성들,압제자에 항거하다 쫓겨온 사람들이 지리산의 품에 안겨 새 삶을 꾸렸다.

험악한 세상을 등지고 이 산에 묻힌 산사람들은 깊고 깊은 산중에다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거기에는 주인도 노예도 없었고,

뺴았는 자도 빼았기고 통곡하는 이도 없었다.아무도 헐벗거나 굶주리지 않았다.산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처럼 지냈다.그들은 다 같이 지리산이 낳고

보듬은 형제 자매들이였던 것이다.

(2) 광대한 精氣를 품어 한낱 王朝나 만민위에 군림하려는 자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는 山

그래서 고려조정의 반역자요 민족의 반역자인 이성계( 이 놈은 고려 조정에 반역한 것도 부족한지
왕이 되자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스스로 명의 속국을 자청했으며 정주학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아 소위 事大慕華를 주창하여 민족자존을 짓밟았슴)가

새 왕조를 세울 뜻을 품고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대천에게 祭를 올릴 떄,이 산에 온 성계가 이 산 山神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렸지만,끝내 들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桓族의 우수성을 스스로 짓밟은 자에게 환족 地氣의 凝結處인 지리산이 거부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계는 지리산 산신이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생
각하고 분노한 나머지 지리산을 不伏山, 反逆山이라 부르고, 후일 후손들에게 역적이 나오면 지리산
아래에 있는 전라도로 귀양보내도록 일렀다.
이 때의 장면을 잠깐 보자.

제를 올리기 위해 지리산에 온 反逆者 성계가 지리산 산신에게 자기가 왕이 되게 도와 달라면서 지리산에서 제사를 지냈다.제를 마치고 祭文을 불에

태울려고 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 났다. 종이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이다.보통 제를 지낸후 제지낸 제문에 불이 안 붙으면, 그 기도는 신이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때도 지리산 산신이 반도 성계의

기도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였던 것이다.
이에 성계가 분노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을 돌았는데,
그 중 특히 地氣가 강한 구월산,계룡산,지리산에 각각 상악단, 중악단, 하악단을 짓고 춘추로 향제하게 했으며,설령 왕이라고 하드라도 下馬하여

참배토록하라는 " 下馬碑 "를 세워서 보호했던바,지금도
계룡산 神元寺에 가면 중악단( 이 절은 절의 대웅전 보다도 산신각인 중악단이 더 크고 우람하다) 아래 올라 가는 입구에 하마비가 서있다.

또한 보리암이 있는 남해의 금산의 山名이 "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 주면 비단으로 산을 두루겠다"고
산신에게약속했던 이성계가 왕이 된후 정도전의 꾀로 비단 대신 산이름을 비단 錦字 錦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같이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은 압제자.지배자를 거부한다. 맑게 갠 날,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 서 보면 누구라도 그 뜻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천왕봉 꼭대기에서는 사방 수백 리에 펼쳐진 산과 들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 온다.충청,전라,경상도
삼남지방이 모두 발 아래 내려다 보이니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시야가 넓은 산은 백두산을 빼고는 다시 없다.이렇듯 광대한 정기를 품은 산이 어찌 한낱

하찮은 일개 왕조나 만민위에 군림하려는 지배자따위에게 머리를 굽히겠는가.

(3) 壯而不秀의 山

지리는 이 같이 웅건하고 장엄하다. 하지만 금강이나 설악처럼 수려하지는 않다. 그래서 서산은
지리를 답사한후 말하기를 " 지리는 웅장하기는 하지만 수려하지는 않고,설악은 수려 하지만 웅장하지 않다 ( 智異 壯而不秀요, 雪嶽 秀而不壯이다 )"고

평했다.
실제로 이 두 산을 답산해 보면 청허휴정의 이 말이 실감된다.




(4) 옛 이야기

지리산에 더도는 애기 중엔
푸른 청학이 碧松에 날아와 날개를 접고,
實相에서 자기의 참 모습으로 돌아 가며,
華嚴에서 우주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어,
七佛에서 부처로 화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청학동 전설에다 벽송사,실상사,화엄사,칠불사에 어린 산천의 기운과 뜻을 함꼐 엮어
민든 이야기이다.


2, 하늘 아래 첫 佛寺 法界寺 ㅡ 이 곳이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흥하면 이 곳이

   망한다( 법계사와 일본의 상관 관계 ).



(1) 하늘 아래 첫 佛寺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가장 높은 곳( 물론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설악산 봉정암이 있지만,이는 조그만 암자이므로 대형 사찰로는 법계사가

제일 높은 곳에 있다)인 해발 1600m의 깍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진 法界寺는 진흥왕 9년인 548년 인도에서 건너 온 연기조사께서 부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되었다.

법계사는, 앞으로는 깍아지른 절벽이요,뒤로는 천왕봉이 장승처럼 버티고 있어 雲霧가 사찰 주변을 쉴새없이 넘나들어 이른바 하늘 아래 불사라고

부른다. 때문에 법계사는 지리산에 동이 트면 가장 먼저 찬란한 햇살을 맞이하게 되어,자연석 위에 반듯이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와 닿는 아침햇살은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말하면서 장관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법계사를 세운 연기선사는 같은 해에 법계사 동북쪽에 대원사를 세웠으며,
4년 전인 진흥왕 5년(544)에는 구례 화엄사와 화개 연곡사도 세웠다.연기가
당시 지리산을 비롯한 경남 서북부 지역에 불찰을 세울 때는 신라가 가야연맹 국가의 종주국이던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을 병합하고 영토를

지리산까지 확장한 시기로,신라는 이 시기에 들어와 지리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했을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 진흥의 근거지로 매우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섬진강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하면서도 남원의 여원재 등지에서는 쉴새없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반야봉 북쪽 달궁에

황령정사란 큰 절을 세운데서도 엿볼 수 있다.

신라가 지리산에 불교를 들어 놓기에 앞서 이미 가락국이 七佛寺를 통해 불교를 전래했는데,우여곡절 끝에 불교를 수용했던 신라는 굳이 한반도

불교의 첫 전래지인 칠불사를 성역화하지 않고 나름대로 불교 문화를 지리산에 꽃피울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이로인해 우리나라 불교의

첫 전래지인 칠불사의 존재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우리나라 불교 전래역사조차 와전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이로인해 지리산은

신라시대에 접어들어 불교문화의 발상지로 자리 매김한 뒤 그 역할은 오느날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2)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흥하면 법계사가 망한다.

신라사원으로 지리산 입산 제 2호로 기록되어 있는 법계사는 불교문화에 대한 의미도 깊지만,有史이래로 한반도 수난의 역사와 더불어 영욕의

부침을 했다.즉 한반도가 일본과의 숙명적 관계를 이루면서 영욕의 오랜 역사를 보내왔듯이 법계사도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전란 때마다 수난과

부침을 겪어 왔다.

신라와 고려가 흥했던 때에는 법계사도 흥했지만,고려 말 나라가 쇠하기 시작하자 법계사도 고난을 겪는다.
법계사 최초의 수난은 고려 우왕 6년(1380) 9월에 왜구 아지발도의 방화로 크게 불타 소실된 것이다.남원의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에게 대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지리산으로 도망 가면서 불태웠던 것이다.이를 1405년 조선 태종 5년 을유년에 벽계정심선사가 중창하여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어 왔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후 중건되었는데 1908년 지리산이 항일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뒤 법계사로 후퇴,계속 항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또 다시 불타고, 1938년 무인년에 청신녀 신덕순씨에

의해서 다시 중건되었으나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또 다시

화재를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사찰은 폐허로 변하고, 단지 초라한 초옥으로 3층 석탑을 지켜오다 1981년 신유년에 조재련.조재화.조재영 불자와

신도들의 발원으로 현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옛 유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 탑인 3층 석탑(보물 제 473호)만이 남아 있다.

이 같은 연유로 우리역사의 아품과 함께 영욕을 감내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리산과 더불어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해온 법계사는 "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법계사가 망하면 일본이 흥한다"는 이야기가 지리산 자락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들도 이 절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 것처럼 보인다. 옛 기록들을 잠시 살펴보면,

< 진양지 >에 " ......법계사는 천와봉 10 리 길에 있다.절에는 석불 3좌가 있는데 기도자가 끊임 없었다.산문 서쪽 가까운
곳에 최고운이 놀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문창대다. 거기서 북쪽으로 5 리 쯤에 솟아 있는 돌봉우리를 세존봉
이라고 부른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 이륙의 유산기 >에는 " ... 천와봉에서 동쪽으로 내려 오면 천불암,법계
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는 바,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했고 서로는 천왕봉을 등져서 매
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이를 암법주 굴이라고 한다...." 고 적고 있다.

< 김일손의 속두류록 >: 1489년 4월 22일, 중산리에서 칼바위를 거쳐 천왕봉을 오르던 김일손은 그 때의 장관을 < 속두류록 >에
이렇게 적고 있다.


" ......철쭉꽃 하나를 꺽어서 머리에 꽂고 따라오는 일행에게도 말하여 꽂게 하고 갔다.가는 도중 우람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세존
암이다.사다리가 있어 올라가니 천왕봉이 10리 정도로 보였다.5리 쯤 더 가니 법계사가 나왔다.절에는 중 한 사람밖에 없고 나뭇잎이 널찍 널찍아여

비로서 자라나고 산죽은 곱게 곱게 바야흐로 피어나 니 바로 저문 봄철이다.잠깐 쉬고 곧 올라가니 돌이 있는데 배같기도 하고 문짝같기도 하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세존암은 지금의 망바위를 말하는바,이를 세존암으로 적고 있어 특이하며,천불암 터는 법계사에서 20분 가량 오르면 등산로

주변에 비박하기 적지인 길이 10여m, 높이 1.5m 가량의 굴이 나오는데,아마도 이 곳일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 굴이 암법주 굴이라고도 본다.

(3) 어사 박문수의 설화

이 곳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박문수의 탄생설화가 있다.내용인즉 " 박문수의 모친이 법계사에서 주목 껍질을 벗겨 즙을 짜서 밥을 지어 먹고 즙으로

목욕을 하면서 천일기도를 올렸는데,정성이 지극해 부처의 어머니인 문수보살이 아들 하나를 주었던바,이 얻어 키운 아들이 바로 박문수다.문수란

이름도 문수보살을 의미해서 지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4)법계사의 보물

고려 말 왜구에 의해서 불탄 뒤 조선초 벽계에 의해서 중창된후에 이절은 한 때 벽계사로 불리워 졌다.이 절 산문에 들어 가면 먼저 아주 큰 바위 위에

우뚝 선 3층 석탑이 눈에 들어 온다. 여느 다른 석탑과는 달리 거대한 자연석을 기단으로 해 그 가운데 3단의 괴임을 만들고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한

이 탑은 고려 초기 작품으로 보물 제 473호로 지정되어 있다.이 탑은 마치 인공석탑으로 보이기 보다는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자연이 빚어낸 돌탑으로

 보인다.석탑과 석탑을 받치는 바위는 이끼로 뒤덮어 마치 태초부터함께 빚어진 것처럼 보인다.바위 높이 3.6m,탑 높이2.5m의 비교적 크지 않고 간결한

탑이지만 풍기는 기운은 신비스럽고 강력하다.

또한, 이 절에는 산신각과 칠성각이 특이한바, 이는 우리 민중의 토속신앙 즉 환족 地氣의 응결처인 천왕봉을 중심으로한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의 한

흔적이리라.





3, 風水法術이 만든 수도승의 道場 內源寺



(1) 풍수법술이 낳은 천혜의 수도도량터

지금으로 부터 1300여년 전 신라 태종무열왕4년 657년 무영국사가 장단골 물줄기와 내원골 물줄기가 합쳐지는 명승지에 <덕산사>를 세우니,이 절이

현재 내원사의 전신이다.마치 어미 쥐가 수 많은 새끼 쥐를 거느리고 한가로이 음식을 먹는 형상인 명당에 자리 잡았기에 전성기에는 1000여 명의

대중들과 신도들이 상주했으며, 또 십 수개의 산내 암자를 거느리는 대찰로 수도정진도량이였지만( 현재 12 개의 절 터가 그대로 있다 ), 붐비는

신도들과 대중들 때문에 수도승들이 제대로 수도에 전념할 수 없어 문제가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주지가 사람들이 적게 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던 차에 어느날 한 노승이 찾아 온다. 주지의 고민을 들은 노승이 말하기를
" 앞에 보이는 산 봉우리 아래에까지 길을 내고 절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으면 해결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를 본 주지가 노승의 말대로 했더니,어디에선가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고, 그 후 차츰 차츰 인적이 끊어지더니만, 종국에는 신도 하나 들리지

않는 인적 드문 사찰이 되어 스님들의 수도정진이 가능해졌었다. 이후 이 절은 인적 드문 사찰로 수도에만 전념 할 수 있는 절로 정평이 나면서

수도승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현재도 사찰 정원이 동백과 목련화 등으로 잘 정돈돼어 있어 마치 대저택의 정원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금계옥류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및 탐스러운 꽃이 그 탐스러운 꽃 봉우리를 터트리는 자연의 소리뿐으로 예나 지금이나 전형적인 수도승의 도량처로 변함이

없다.

풍수학적으로 볼떄, 내원사의 주산은 새끼쥐를 거느리고 있는 어미쥐의 형국이고, 개울 건너 앞산은 이 새끼쥐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도둑 고양이

形局이다. 배고푼 도둑 고양이가 개울 앞에 있는 토실 토실하게 살찐 쥐새끼들을 잡아 먹고 싶지만, 개울이 막히고 또 길이 없어 가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던 차에 길이 생기고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천성적으로 물을 싫어 하기에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던 고양이에게는 새로 생긴 다리는 천우신조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 보다도 더

신나는 일이 였을것이다.
때문에 다리가 생기자 마자 재빨리 건너가서 우선 새끼쥐부터 한 마리씩 잡아 먹으니 새끼쥐의 숫자가 줄어들게 되고, 이에 따라 신도과 대중들의 수도

줄어 들면서 終局에는 인적조차 사라지는 절이 되어 갔던 것이며,마침내 어미쥐까지 고양이에게 잡아 먹히니 地氣가 다하여 절에 불이 나게되고 어미인

三壯士가 그렇게 불길을 잡으러 했지만 地氣가 다함에 불길이 잡히지 않아 폐사가 되었던 것이다.

어미쥐까지 잡아 먹어 배불러진 고양이가 한숨을 자는 동안 사찰도 폐허위에서 잠들다가 잠시 깨어나 道場을 일구기는 했지만, 고양이에게 눌린 쥐의

地氣탓에 그 사찰의 主持도 행여 시끄러워 잠자는 고양이가 꺨까봐 조용한 것만 좋아 하는 성격의 인사가 오게된다.그래서 현 주지 홍원종스님은 지금도

객인이 드는 것을 극히 싫어 하는 성격이라 수도처로 한가롭게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앞산 도둑 고양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날 이 절은 또 다시 閉寺가 될

것이니
땅의 地氣法則은 이같이 毫釐不差로 준엄한 것이다..

(2) 三壯士의 설화가 살아 숨쉬면서 꽃핀 곳

옛날 이곳에 將軍水가 있어 이 물을 마시고 자란 힘이 아주 센 세분의 스님이 살았다고 한다.그런데 어느날 내원사에 불이 났다.이 불을 끄려고 세명의

장사는 각각 다른 방향의 계곡에서 물통으로 물을 펴와 불길을 잡으려고 물을 쏟으면 어찌된 영문인지 물길이 엉뚱한 곳으로 쏟아져 불길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결국 세스님은 절을 버리고 흩어지면서 큰 바위를 들어 <장군수>를 덮어두고 떠났다고 한다.현재도 그 바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바, 그 당시 그 화재는 天災로 풀이되어 500여 년간 그대로 세월 속에 묻혀지내다 1959년 3월 현 주지 홍원종스님이 절 터를

정리해 중건시킨후 內院寺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보물 제1113호 삼층석탑과 제1029호 석남암수비로자나불좌상

내원사에는 두 점의 보물이 있다. 하나는 태종무열왕4년(657) 절 창건과 동시에 건립된 보물제1113호인 삼층석탑이고,
또 하나는 써리봉 아래에 있었던 석남사에서 옮겨 온 보물제1029호인 비로자나불좌상이다. 이 석불속에서 사리가 발견되어 이 석불이 신라시대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리함에는 이두문 문자가 음각된 명문이 함께 있었는데 판독해본 결과 ` 신라의 두온애당이라는 화랑이 지리산에서 심신수련중 애석하게도 목숨을

잃어 그의 부모가 자식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비로자나불을 제작 안치했으며,혜공왕 2년(766) 법승.법연 두 스님이 두온애당의 넋을 기려 제작했다`고

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지리산은 당시 불교 문화의 진원지이자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크게 활용되어 왔슴이 증명되었다.이는 전술한 법계사와 대원사 및 연곡사의

창건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다.

이 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비로자나불의 초기 자료가 되는 중요한 석불로 풍부한 입체감과 우아한 자비의 얼굴 모습을 간직한 세련된 조각 솜씨에다

이상적인 생동감 및 사실주의적 시대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석굴암 본존불상과도 대비되는 특성을 갖추고 있다.

(4) 내원사의 사명

처음 덕산사로 불리웠던 이 절은 한 때 불탄후 홍원종씨가 중건하여 內院寺로 칭하고 있지만,문화재청에서는 삼장면 내원리의 지명을 따서 內源寺로

표기 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삼층석탑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內源寺로 표기하고 있어 절의 주지가 관리하는 대웅전앞 안내판에 표기된

內院寺와 차이가 남).

이 절이 위치하고 있는 절 터의 형국과 장소로 볼떄 內院이 아니라
덕천江을 만든 源流가 되는 內源이 되므로 당연히 절이름도 內院寺가 아니라 內源寺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보며, 그래야만 깊은 내면수련

즉 마음수련의 원류가 되어 수도정진이 잘 될것이다.


4,국내 유일의 北宗禪의 대가람 斷俗寺( 聲派學을 증명시킨 절 )



5, 傳 구형왕릉과 김유신 



 正史의 기록에 따르면,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떠오르는 신라의 기운을 흠모한 나머지  밀양의 離宮臺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한후
王山 의  태왕궁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아들 金武力이 신라 조정에 출사하여 장군이 된후 각간 벼슬에 올랐고 ( 참고로 이분의 무덤이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 자락에 있는바,

천하명당이다. 그래서 김유신 같은 인물이 태어 나게 되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무력각간의 아들 서현이 양주 ( 지금의 양산과 밀양 )

도독이 되었으며,이분과 망명부인(진흥왕의 질녀)사이에 김유신이 태어난다.

정사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지리산 자락에 펴저있는 이야기는 전술한<지리산(3) - 벽계사와 유평계곡 이야기>에서 보듯이 사뭇 다른 내용인바,

유추하건대, 구형왕이 선양했던 것은 맞는 이야기겠지만, 그를 추종하던  일부 잔존세력이 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기대어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같은 야사가 생겼으리라.

산청 화계리에서 1km 남짓거리인 王山 기슭에 자리 잡은 피라미드 같은 모양을 한 돌무덤이 있고, 그옆에 < 가락국 讓 王陵 >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이 돌무덤 100 m 아래 길가에 활을 쏘던 < 射臺碑 >가 있다.또한 주위에 덕양전,가락국 시조왕 유허비,수정궁,왕대등이 지리산 기슭을 따라 흩어져 있다.

이곳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김유신이 청년시절에 이곳에 와서 증조부릉의 시릉살이를 하면서 무예를 익혔으며, 사대비는 그 때 할쏘던 자리를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전술한 바와같이 지리산이 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터였슴은 분명하니, 분명히 김유신도 이곳에 와서 수련하였을 것이고,그 때의 유적이 어딘가에는

남아 있겠지만, 그것이 이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구형왕릉의 발견동기가 약간 석연찮기 때문이다. 그동안 구형왕릉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는데, 1798년 儒生 민경원이 이곳 왕산사에

공부하려 왔다가 어느날 꿈속의 계시를 받고 왕산사의 낡은 궤짝에서 < 王山寺記 >를 찾아 냄으로서 확인되었기 떄문이다. 이에 의하면 약 1400여 년간

잠자던 구형왕을 한 유생이 어느날 갑짜기 낡은 절의 궤짝 속에서 불러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이는 설득력이 약하고 또 다소 논리의 비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史家들은 구형왕릉이라고 하지 못하고 전해들은 구형왕릉이란 뜻에서 < 傳 구형왕릉(사적 214 호) >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구형왕릉 옆에는 고령토채취장이 있어서 이곳이 양질의 고령토 산지임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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