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인의글

350도로 휘돌아 나가는 용궁 회룡포와 낙동강 700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

350도로 휘돌아 나가는 용궁 회룡포와 낙동강 700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예천 삼강주막
 
 
1. 국내에서 유일하게 350도로 휘돌아 나가는 물돌이동 용궁(龍宮) 회룡포(回龍浦) -

  ' 한 샵 뜨면 섬이 될까? '

충효의 고장이자 물맑고 예절바른 도시로 이름난 경북 예천, 그 중에서도 용궁(龍宮)은 현재까지도 상투를 틀고 살만큼 고루한

반촌(班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소백산의 깊은 물이 흘러내려서 물맛이 달다. 그래서 이름도 단술예(醴) 샘천(泉)인 예천이다. 뿐만 아니라 마치 동해 용궁처럼 맑디 맑은 물이 풍부한 고장이라서 용궁(龍宮)이다. 그만큼 물 맛좋고 맑고 맑은 물이 풍부한 고장이다. 원래 용궁은 서라벌의 축산(竺山)이다가 고려초에 용주(龍州)가 되었고, 조선조 헌종 3년인 1012년부터 현재의 지명인 용궁이 되어 지금까지 1,000년이 한결같다. 엣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꽃피고 새우는 아름다운 땅에 금은으로 꾸민 궁궐을 이상세계로 그리며 살았으니 그곳이 바로 이고장이라하여 용궁이라 이름지었다. 산수자연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이지역은 주흘산(主吃山)과 팔공산(八公山) 및 학가산(鶴駕山) 줄기가 달리다가 멈추어 서고 그 산줄기 사이 사이로 금천과 낙동강 및 내성천이

흐르는 삼수삼강(三水三江)의 고장이다. 천지가 개벽하면서 묏부리가 솟고 강물이 길을 트고 사람의 슬기가 모여 천하만물이 걸맞는 이름을 가지니 바로 여기가 용궁의 회룡포다. 회룡포는 산수태극(山水太極)모양을 이루니 옛 문헌 '축산승람(竺山勝覽)'에서 의성도(義城島)라 부른 이곳에 그 천하비경을 바라보기에 일맞은 비룡산(飛龍山) 언덕에는 회룡포 전경(全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인 회룡대(回龍臺)가 있다.

 

회룡대에서 오솔길 따라 오르면 삼국시대와 후삼국 시대에 영웅들이 각축(角逐)하였던 용주성(龍州城: 현재의 圓山城)이 있고, 또 원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바람결에 풍경소리 울리고 독경소리 은은한 신라 천년고찰 장안사(長安寺)에서 이곳 주지였던 지도림스님과 교우를 맺었던 고려의 대문호인 백운 이규보가 이곳에 머물면서 낙동강에서 뱃놀이하고 '낙강범주(洛江泛舟)'라는 유명한 시(詩)를 남겼을 정도로 옛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 바로 회룡포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마치 용이 날아 오르는 것(飛翔)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190m의 비룡산(飛龍山)을 다시 350도로 되돌아서 흘러 나가는 한 폭의 그림같은 '육지 속의 섬 마을'이다. 맑은 물과 금빛 모래사장이 어울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숲속 등산로와 산책코스가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산 중턱에는 신라시대때(759년) 운명(雲明)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명종 때 지도림화상이, 조선 인조5년(1627년) 덕잠대사, 숙종35년(1709년) 청민대사, 영조31년(1755년) 범림대사 등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중창했던 천년고찰인 장안사가 있으며, 장안사에서 나무계단을 올라 정상에 있는 회룡대에 이르면 이 절경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또 잘 닦여진 비룡산 등산로를 따라서 40여 분 걷다보면 삼한시대 부터 치열한 격전지였던 토석혼축(土石混築)의 원산성(圓山城)이 나타나면서 남쪽으로는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하나로 합쳐지는 삼강(三江)의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깎아지른듯한 지형에 천혜의 요새로 된 이곳 원산성주변에는 많은 고분들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烽燧臺)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이 성은 백제시조 온조가 남하할 때 마한(馬韓) 최후의 보루인 이곳 원산성을 점령한 후  백제를 세웠다고도 전해지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상당기간 백제의 요새로서 삼국이 충돌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였던지 지금도 '피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 많이 오는날에는 성 아래 마을인 성저(城底)마을에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원혼(寃魂)의 소리가 들러온다고 한다. 또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남하하다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고 하나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이곳 회룡포는 2000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드라마 '가을동화'의 찰영지로 유명하며, 인근에는 용궁향교, 하마비, 무이서당, 세금내는 나무로 알려진 황목근(천연기념물), 산택지연꽃공원, 낙동강 700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삼강주막 등이 있고 회룡포 입구의 향석리에는 농촌체험과 숙박이 가능한 회룡포여울마을(舊 향석초등학교)이 있다.

회룡포에서 감아 돌아 흐르는 낙동강 상류의 기운을 받고, 이어서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흘러들어오는 낙동강과 경북 봉화의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회룡포를 거쳐서 휘감아 돌아오는 사류천(沙流川)인 내성천(乃城川) 및 문경(聞慶)에서 발원하여 들어오는 금천(錦川)의 세 강이 합쳐지는 합수처인 삼강(三江)주막에서 엣 선비들이 지나온 길을 회상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영주댐이 건설 중인데, 이 댐이 건설되면 모래 유입량이 줄어들어서 아름다운 사류천인 내성천 끝에 있는 회룡포가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절경이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다. 원래 회룡포는 내성천이 'S'자로 감아돌아드는 마을이름이고 현재의 회룡포 마을은 소성포였지만, 회룡포가 유명세를 타면서 마을 이름까지 바뀌었다.

 

산사엔 언제나 그렇듯이 늘 신들이 산다.우리 곁에 있는 만신(萬神)들이. 그가 흘려놓은 종루엔 멈춘 기억의 편린들만이 말라버린 강가의 갈댓닢처럼 흩어져 누워있다. 감아 돌아 흐르는 저 물결을 보면서 속세의 먼지들을 훌훌 떨어버리자. 이곳이 바로 그토록 찾아 헤메던 彼岸이니.... 이곳에 오르면 오래도록 편안해 질터, 그래서 이름도 장안사(長安寺)다.


2. 三江酒幕과 三江講堂

(1) 三江酒幕

 

삼강 주막은 1900년에 설립되어 현재 110년이나 된 국내에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의 주막으로 그 정취가 남다르다. 뿐만 아니라 주막옆에는 수령 500년된 홰화나무(槐木)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상주에 사는 대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배가 뒤짚히지 않는다는 속설을 믿고 주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나무를 베려 했다가 꿈 속에 흰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무를 베기전에 네가 먼저 죽을 것이다"라는 호통을 듣고는 식은 땀을 서 말이나 흘리면서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는 유서 깊은 나무까지 있다.
자고로 삼강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그래서 이 곳에서 우리나라 초대의 최고 갑부이자 재벌그룹을 이루었던 삼호방직 그룹의 정재호씨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또 삼강의 그 넓은 평야지대는 산 밖에 없는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물산이 풍부하기로 유명했다.그 옛 날 조선 시대에는 김해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던 소금배가 이곳까지 와서 소금을 내린 후 회룡포를 돌아서 안동 하회까지 운항했었던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경상도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려 갈때나 아니면 보부상들이 한양으로 갈 때 반듯이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대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은 세 곳이 있다.
바로 바람도 쉬어넘는다는 영동의 추풍령(秋風嶺)과 풍기의 죽령(竹嶺), 그리고 문경의 새재(鳥嶺)가 그곳이다.이 중에서 추풍령을 넘고 간 선비는 추풍낙엽처럼 낙방을 하게 되고 죽령을 넘어간 선비들은 죽쑤어 남주게 되지만, 세 강의 합수처(合水處)인 삼강(三江)을 건너서 새재(鳥嶺)를 넘어간 선비들은 마치 새가 날개를 달듯이 장원급제를 했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지명도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의 문경(聞慶)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들은 모두들 이곳을 건너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 장원급제자 중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초가지붕에 진흙을 바른 벽, 토끼굴 같은 좁은 부엌, 검게 그을린 아궁이며 흙벽에 칼금까지 세월의 더깨도 고스란히 복원된 삼강주막은 요새 사람들 눈에 하나 하나가 모두 구경거리고 이야기 거리다.그래서 얼마전 최고의 인기프로그램 중 하나라고 하는 강호동의 1박2일에 나오면서 부터 인근 문경, 예천, 안동, 영주는 물론이고 서울, 부산 등 경향각지로 부터 최근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 - 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전통주막으로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들에게 요기를 해주거나 숙식처를 제공하던 건물로서, 1900년 무렵 건축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본래 기능에 충실한 평면구성으로, 건축사적 희소가치와 옛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 2005년 11월 20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뱃가 할매'로 불리웠던 마지막 주모 유옥련(柳玉蓮)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방치되었으나 2007년 예천군에서 군비 1억 5천만 원을 들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현재 예천군은 삼강나루를 복원하여 나룻배를 띄우는 등 관광지로 조성하고 있다. 복원 당시 주막 주변에 보부상숙소, 사공숙소, 공동화장실 등을 함께 지었는데, 보부상숙소는 면적 40.41㎡로 방 2개와 대청, 부엌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공숙소는 면적 21.60㎡로 방 2개를 들였다. 공동화장실은 외관은 전통식으로 꾸미고, 내부는 현대식 시설을 하여 편리성을 추구하였다.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 약 500년인 홰화나무가 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해준다. 지금으로 부터 110년 전인 1900년에 이 지역을 지나가는 과객들과 보부상 등의 유숙처였었던 이 주막은 청주정씨 집성촌에서 유일한 타성받이인 유옥련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지키고있다가 90세로 타계한 후 페가가 되어 허물어져 가던 것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2007년 예천군에서 군비 1억 5000만원을 투입하여 현재와 같이 복원시켰다. 110년된 푸른색 스레이트를 얹은 낡고 초라하며 조그만 초가(草家)대신에 최근에 황토로 다시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주막의 낭만과 풍류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安東川)과 봉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회룡포를 돌아 나오는 내성천(鳥川) 및 문경에서 흘러 오는 금천(山陽川)이 만나는 세 강의 合水處로 청주鄭氏들의 世居處인 三江 가에 있기에 屋號가 없이 그대로 삼강 주막이다. 110년쯤 됐으니 그대로 근세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다.

원래 경상우도의 북부지방인 예천은 그 아랫쪽에 있는 안동과 더불어 고루한 영남사람(士林)의 본향(本鄕)으로 이 두 고장이 바로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의 중심이였던 곳이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반상을 구별짓고, 남녀유별을 외치며, 체면을 아주 중시하는 곳이다. 필자의 선친께서 살아 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이 그것을 단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 양반은 아무리 급해도 뛰지 말것이며, 아무리 비가와도 비를 피하기 위해서 빨리 걷지 말 것이고, 또 아무리 배가 고프드라도 체통을 잃지 말아야 한다. 대저, 양반은 대추 세 알이면 하루 요기로 충분하니 절대로 양반의 체통을 잃어서는 않된다. 또한 식사를 할 때는 고개를 숙여서 밥을 먹어서는 않되고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함부로 고개를 숙여서도 않된다."

이것이 이곳에서 살았던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생활철학이였으니 나머지는 안봐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좋게 말해서 선비정신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례허식의 체면치례다. 때문에 필자의 어린시절 때는 어른들과 참으로 많이 다투었다. 향촌(鄕村)의 풍습이 이와같았으니 주막은 당연히 동리 속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강가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집을 지키는 주모는 사람이 아닌 접촉해서는 않되는 불가촉천민(不可觸 賤民)으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내 기억에 아마도 주막을 지키는 주모는 인간이하로 생각되어져서 당연히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이야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오니 농촌체험마을로 바꾸겠다고들 하겠지만, 아직까지도 주민들은 풍양면 삼강리 마을이 '삼강서원'이나 '삼강강당' 대신에 술파는 '삼강주막'으로 알려지는데 크게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유고적 삶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몸에 밴 유교적 전통이 어디 하루 아침에 바뀔 수가 있겠는가?

 

주막 바로 앞 느티나무 그늘 바로 아래에 중량 50kg 정도의 들돌이 있다. 이 들돌은 옛 날 이곳 청년들의 체력단련을 하기 위하여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였던 둥근돌인데, 후일 물류가 빈번해지면서 인부들의 품삯을 정하기 위한 체력측정용으로 변질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시험삼아 들어보니 필자의 힘으론 역부족이다. 주막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500년쯤 된 느티나무에는 그 긴 세월의 그늘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다. 울어도 눈물 흐르지 않을 인고의 세월을 딛고서. 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쪽이 마루와 부엌이 달려 있는 걸 보면 사실은 전면인데, 무슨연유에선지 지금은 뒷마당이 되어버렸다.

 

初夏의 무더운 여름기운이 묻어 있는 낙동강은 거대한 한 마리 龍처럼 굽이쳐 누워있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나그네의 얼굴을 스쳐가면서 고즈넉한 방죽 길을 쓸고선 사라진다. 주막문에 써놓은 메뉴는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똑같을 터,보다시피 그 때나 지금이나 값이 싸다. 하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세 아줌마에게선 그 옛 날 주모가 선비들에게 보여 주었던 옛 날의 따뜻한 인심보다는 차가운 세속의 내음이 가득 묻어있다. 주모는 어디가고 모든게 다 셀프서비스다. 그것도 한 참을 줄서서 기다려야만 받아 갈수 있는 주안상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삿갓 쓴 시인이 되어. 늘 그곳에 머무르고 있나보다. 세월이 흘러도 낮에 흐르는 빛살들 사이로 그들의 값싼 낭만들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지나는 길손들은 누구나 3000원짜리 찌짐과 2000원짜리 두부, 진다지 시골 막걸리 한주전자에 시름과 번민을 묻는다.강가의 파란 배춧잎 사이로 잊지못할 시름들이 모두 물처럼 흘러 떠내려 간다. 도도하게 흐르는 삼강의 저 강물을 따라서....


(2) 三江書院과 三江講堂

주막을 돌아 안쪽으로 들어 가면 청주 정씨(淸州鄭氏) 집성촌인 풍양면 삼강리가 나온다. 마을에는 '단심가(丹心歌)'로 유명한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와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 이황 및 임진왜란의 영웅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삼강서원이 있고, 또 마을의 동쪽에는 오랜 세월동안 올곧은 선비들을 많이 길러 낸 삼강강당(三江講堂)이 있다. 용궁면 가야리(佳野里)에 있는 용궁가야강당(龍宮佳野講堂, 그래서 가야리 마을 명칭이 講堂이다)이 용궁(龍宮)인근의 인재배출 장소였다면, 이곳은 풍양인근의 인재배출장소였다.
조선조 선조 때 호종공신인 서원부원군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셋째아들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밑에서 사사하여 경사와 성리학에 정통했고, 특히 필법이 탁월해 초서의 대가로 존경받았던 학자로 광해8년에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벼슬에 부름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난정으로 윤리와 기강이 문란해짐을 통탄하고 이를 지적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던 대학자 淸風子 鄭允穆(1571 ~ 1629)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서 세운 사설학원이 바로 삼강강당이다. 강당 마루 위에 걸려 있는 '百世淸風(백세동안 사표가 될만한 절의라는 뜻)'이라고 쓴 편액은 한치의 막힘도없이 그침없으며 기운찬데, 이를 보고 있으면 가슴 속까지 시원하면서 맑아짐을 느낀다. 이 글씨는 선조 22년(1589년) 약관 19세의 정윤목이 부친 정탁을 따라서 중국을 갔을 때 절의를 지키기 위해서 벼슬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다가 죽은 수양의 백의숙제묘(伯吏宿齊廟)를 참배 후 돌아오면서 베껴온 것이라 한다. 일찍이 그는 국참 이찬의 담벽에 시 두 구절을 초서로 써 붙였던 적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곳에 진을 치다가 그 글씨를 보고는 경탄하며 뜰에 내려가 절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강당채와 학당챌로 구성된 삼강강당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지만, 지붕가구나 창문틀 등에서 조선 중기의 옛스러운 건축구조양식을 살펴볼수있다.

찾아 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점촌.함창 I.C에서 내려가서 문경에서 예천방향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산양면 사무소 소재지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풍양방면으로 가는 59번 지방도를 갈아타고 10분 정도 가면 새로 건설된 큰 다리인 삼강교를 건너자 마자 삼강주막과 삼강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다시 용궁읍내로 나와서 예천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면 회룡포를 표시한 안내판이 보이고 이 길을 따라서 10분쯤 들오가면 회룡포다.

 

숙박

 

천혜의 자연경관과 역사적 정취가 살아 숨쉬는 회룡포 백사장과 비룡산에는 야영과 민박이 가능하고, 삼강주막에서도 민박이 가능하다.

맛 집

삼강주막에서 묵, 두부, 배추전, 동동주 등 간단한 요기를 할 수가 있고, 예천의 유명한 참우를 맛볼려면 읍 내 참우촌(054 - 655 - 4288)을 찾아가면 되고, 또 용궁시장으로 나오면 전국에서 자가용 타고와서 먹고 간다는 그 유명한 박달순대와 오징어 불고기를 맛볼 수 있는데, 전국에 소문난 박달순대와 순대국밥 및 용궁의 특산물인 오징어불고기를 맛 볼려면 용궁읍내에 있는 단골식당(054 - 653 - 6126)이나 '박달순대(054 - 652 - 0522)'집을 찾아가면 된다. 오징어 불고기 1접시 5,000원, 박달순대 1접시 6,000원, 순대국밥 3,500원. 철로 만든 석쇠에 얹져서 참나무숯불에 구워내는 오징어 불고기는 매콤하면서도 참숯향이 잘 배어 있어서 감칠 맛이 있고, 박달순대와 순대국밥은 아주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구수하다. 특히 순대국밥은 진한 육수를 우러낸 국물이 진국이고 아주 진하면서도 구수하고 맛있다.

 

용궁의 특산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용궁양조장에서 빚은 생막걸리다. 이 곳 용궁양조장에서는 막걸리를 양조하는 전과정과 발효탱크 및 물타는 탱크 등을 구경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물타지 않은 순생막걸리원액인 진땡이(모래미)를 구입할 수도 있다(모래미 1병 3,000원). 이 막걸리원액은 1박2일 찰영차 이곳에 들렀던 강호동 일행이 마신 후 골아떨어져서 찰영을 중단해야만 했던 문제의 그 진떙이(막걸리 발효 후 거르지 않은 생막걸리)이다. 이 막걸리는 옛 농부들이 샛참 때 식사대용으로 마셨던 바로 그 진떙이로 마치 마죽처럼 걸쭉하고 달면서 입에 착달라붙는다.시중에 출하되는 막걸리는 이 진떙이에 두배의 물을 희석해서 병입한 후에 출하되고 시판된다. 그리고 석송령이 있는 석송면으로 가면 '청포묵과 흑두부(054 - 654 - 8792)'에서 묵 탕평채 등의 별미가 기다린다. 참고로 1박2일에서 이승기, MC몽, 은지원이 참기를 짜간 시장제유소는 순대국밥집이 있는 시장 안에, 그리고 강호동, 김C, 이수근이 참기를을 짜간 동부제유소(054 - 652 - 7788)는 회룡포로 내려가는 큰 길가에 있다.

'지인의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아  (0) 2010.06.21
Hu Hu.... One-Night Stand?  (0) 2010.06.19
가방끈   (0) 2010.06.16
회룡포와 삼강주막   (0) 2010.06.14
안보정책 대토론회   (0) 2010.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