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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자 허망(虛妄)한 꿈을 꾸다 유배지에서 사약(死藥)을 받고 ...

왕이 되고자 허망(虛妄)한 꿈을 꾸다 유배지에서 사약(死藥)을 받고 비명횡사한 우암 송시열의 꿈밭 도명산(道明山) 화양구곡(華陽九谷)

 

 

1. 신권(臣權)이 우선인가 왕권(王權)이 우선인가?

 

조선조 450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왕과 신하들의 권력다툼의 역사였다. 조선왕조 28대 왕들 중에서 왕다운 왕질을 한 임금은 태종 이방원과 신하들에 의해서 추출되어 군(君)으로 강등된 연산군 등 고작 단 두 명뿐이였고, 그 나머지 왕들은 자기 주관대로 하지못하고 오로지 신하들에 의해서 국정이 농단되었다.

 

이같은 징조는 이성계가 사상 최초의 군사군테타로 역성혁명을 성공시켜서 고려왕조를 멸하고 조선왕조를 건국했던 건국초기부터 이미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창업한 삼봉(三峰) 정도전과 하륜 등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신하들이 통치를 하는 신권정치(臣權鄭治)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경복궁을 지을 때 왕권신수사상(王權神授思想)에 바탕을 둔 왕권정치(王權政治)를 구현시키고자 했었던 무학왕사(無學王師)가 풍수지리상 신하, 재물, 여자, 차남(次男), 군인, 도검(刀劍) 등으로 상징되는 백호맥(白虎脈)이 명예, 권력, 장자(長子)등으로 상징되는 청룡맥(靑龍脈)보다 우세한 정면을 남쪽으로 향한 남면(南面)하고 앉아 있는 현재의 경복궁의 위치 대신에 청룡맥이 백호맥보다 우세한 거대한 북한산을 청룡으로 삼고 남산을 안산으로 삼게되는 정면이 동쪽으로 향한 동면(東面)한 경복궁을 짓기를 주청하였지만, 뼛속까지 신권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희대의 이론가 삼봉 정도전이 " 중국과 한국의 역대 어느 왕조도 왕이 동면한 역사가 없다. 전통적으로 왕은 남면을 하였지 동면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면서 당대 풍수대가인 하륜 등의 동조를 받아서 현재와 같이 남면함으로써 광기(狂氣)어린 북한산과 북악을 주산으로, 힘차고 우렁찬 인왕산을 백호로, 지지부진하면서 중간에 끊어져 힘없는 낙산을 청룡으로, 불타듯이 타오르고 있는 남산과 관악산을 조안(朝案)으로 삼으므로써 경복궁 건립 당시 무학대사가 예언했듯이 이씨 왕조는 28대 450년 동안에 수 차례의 걸친 형재간의 골육상잔과 차자(次子)에 의한 왕위계승 및 왕실여자들에 의한 여권천하(女權天下)와 불타는 화기에 의한 두번의 거대한 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개국 후 28왕 450년 만에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천하는 정도전과 하륜 등이 당초 기도한대로 신하들에 의해서 통치되는 선권정치가 구현되었던 것이다.

 

'권력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원초적인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현재까지도 이어져서 수 많은 사상가, 철학자, 학자 등에 의해서 백화쟁명(百花爭鳴)식으로 다양한 사상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그 결과 이같은 논쟁을 잠재우고자 현재 민주국가에서는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고 못박고 있고, 우리 헌법에서도 제1조에 이를 명기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 헌법 第1條  제1항은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國'이다. 이어지는 제2항은 '大韓民國의 主權은 國民에게 있고, 모든 權力은 國民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어 국민이 주권자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 역사상 이같은 신권정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450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꿈을 꿨으니 정여립, 홍경래 등은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경우이고, 또 송시열의 경우는 겉으로 드러난 바는 없으나 그같은 허망(虛妄)한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바로 도명산 자락의 화양구곡이 그의 꿈밭으로 이곳을 가서 보면 그가 왕이 되고자 그토록 꿈꾸었던 허망한 꿈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2. 화양구곡을 만든 주산(主山) 괴산(槐山) 도명산(道明山, 643m)

 

홰나무(槐木)는 옛부터 벽사(劈邪)와 입신양명을 가져온다고 해서 웬만한 사대부가(士大夫家)에는 사랑채 앞에 한 그루씩을 심어 두면서 벽사와 입신양명을 기도하였고, 또 마을 앞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 등 삿된 기운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심어 두었던 나무로 이 나무들이 4 ~ 5백 년이 지나 아름들이 굵기로 자라면 신목(神木)이 되기에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목(洞神木)이 되어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는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괴산에는 이같은 홰나무들, 그것도 수령 4 ~ 500이 넘는 아름들이 홰나무들이 무수이 많이 무리지어 있기에 지명이 '홰나무가 산처럼 많다'라는 뜻의 괴산(槐山)이 되었고, 도명산 화양구곡 초입의 일곡부터 구곡까지는 무리지어 있으며, 특히 명나라 신종과 의을 모신 사당이 있는 만동묘 앞에는 수령 3 ~ 400 년된 아름들이 홰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면서 줄지어 서 있어 진풍경을 연출한다. 괴산이라는 고장 자체에 홰나무가 많다고는 하지만, 통상 마을 앞에 한 두 그루가 고작이였지 이렇게 무리지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유독 이곳, 그것도 송시열의 서재겸 제자를 가르치는 서당격인 암서재와 명나라 황제를 모신 만동묘 앞에 군집을 이루면서 무리지어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무의 수령이나 심어져 있는 장소로 보아 추측컨대, 이는 송시열의 꿈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고 보여진다.

 

 

청화산에서 서남진하면서 눌재 - 문장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마루금 남쪽 저 멀리, 흰 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바위봉우리와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산줄기가 있다. 그 봉우리 중의 하나가 충북 괴산의 도명산(643m)이고, 이 산자락들이 품고있는 계곡이 바로 화양계곡이다. 풍수의 대가인 송시열이 허망한 왕꿈을 꾸면서 만년에 은거한 화양계곡을 낳은 도명산은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도가 밝아진다'는 도명산(道明山)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높이 643m의 산으로 이곳 주위에는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보물 97), 유근영정(보물 566),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433), 각연사 통일대사비(충북유형문화재 2), 도명산 마애불(층북유형문화재 140),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지방기념물 10), 만동묘정비(지방기념물 25), 괴산 추점리의 미선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220) 등이 있으며, 또 6㎞에 이르는 천하절승인 화양구곡의 시원한 절경을 낀 계곡미가 일품으로 여름철 계곡 산행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도명산은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하는 화강암봉과 기암석벽이 빼어난 명산으로 지질학적으로는 옥천지향사대()에 딸린 동고서저의 경동지괴()로서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구성된 소백산맥 줄기이다.

도명산 9부 능선 상에 있는 옛 낙양사터의 삼존불상인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경으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30m 수직암벽에 각각 불상이 새겨졌으며 불상의 발끝에서 샘물이 솟고 있다. 뒤쪽의 비탈길을 오르면 5개의 바위가 엉긴 산정이 이 산의 정상으로 북쪽으로는 화양동계곡·군자산(: 948m)·칠보산(:778m)이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대야산(:931m), 남쪽으로는 낙영산(:746m)·주봉산(643m)·금단산, 멀리로는 속리산 서북릉의 장쾌한 능선과 문장대(1,054m)가 눈에 들어오고, 정상 주변에는 분재처럼 자란 소나무가 정취를 더해준다. 너무나 아름다운 산으로 보는 재미와 걷는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산이 바로 도명산이다.

 

3. 화양구곡(華陽九谷)

 


화양계곡(화양동계곡)은 울창한 노송 숲, 맑은 물과 너른 반석들이 어울린 별천지다. 백두대간 늘재에서 발원한 계류가 달천에 몸을 섞기 직전 빚어낸 곳이 화양계곡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모래가 많아 물놀이하기 좋다. 하지만 물장구만 치고 돌아서기에 좀 아쉽다면,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손수 고르고 이름붙인 9곡을 찾아보며 숲, 물, 바위가 어울린 그윽한 산수미를 즐겨보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맑은 물이 마치 강처럼 흐르는 기암괴석 위에 소나무들이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계곡을 '화양구곡()' 또는 '화양동 소금강'이라 하는 바, 풍수의 대가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조선 후기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은 이곳에 들어와서 스스로 '화양동주()'를 자체하면서 이곳이 그가 그토록 숭배해 마지 않았던 중국 성리학의 비조라는 주희가 은거하면서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던 중국의 무이9곡(武夷九谷)을 닮앗다 하여 이를 흉내내어 화양계곡의 경승지 아홉 곳에 9곡의 이름을 짓고 경천벽·금사담·첨성대 등의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이곳 화양동 9곡은 선유동계곡과 7km 지리에 있으며, 푸른산과 맑은물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로 여름철 혹서기 피서지로는 제격인 곳이다. 달천()의 지류인
화양천박대천()과 만나 청천면의 중앙을 남서에서 서북동쪽으로 가로지르며 좁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지리구역상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한 화양계곡은 청천면 소재지로부터 송면리 방향으로 9km지점에서 3km에 걸쳐 화양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에 산재해 있는 명승지로 넓게 펼쳐진 반석위로 맑은물이 흐르고 주변의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조 중엽인 인조∼숙종때 좌의정을 지낸 풍수대가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평소 꿈꾸던 꿈을 이루고자 산수를 사랑한다는 핑게로 은거한 곳으로 그와 관련된 유적이 많으며,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의 산자수려한 구곡이 훼손되지 않은채 잘 보존되어 있어서 1975년 속리산국립공원에 포함되었으며 청주에서 동쪽으로 32km 지점에 있어 접근성도 아주 양호하다. 이곳 화양동 9곡은 선유동계곡과 7km 지리에 있으며, 푸른산과 맑은물을 즐길 수 있는 하계관광지다.

 

 

송시열이 꿈꾸었던 이상향 화양구곡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대야산에 이르는 구간은 산세가 빼어나고 골이 깊어 쌍곡계곡, 용추계곡, 쌍용계곡, 선유동계곡, 화양계곡 등 구석구석 절경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 화양계곡은 호탕한 기운이 넘치고, 옛길을 따라 2~3시간쯤 풍경을 음미하며 걸을 수 있어 한 여름 피서지로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화양계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위에서 잠깐 언급한 우암 송시열이다. 풍수학과 성리학의 대가였던 우암은 자신을 화양동주(華陽洞主)라고 부를 정도로 화양계곡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꼈다. 화양계곡의 대표적 경승지인 화양구곡(경천벽·운영담·읍궁암·금사담·첨성대·능운대·와룡암·학소대·파천)은 정계를 떠나 이곳에 은거하던 그가 손수 고르고 이름을 지었기에 화양계곡 걷기는 9곡을 둘러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화양동 버스정류장에 내려 주차장 쪽으로 걷다 보면 1곡 경천벽(擎天壁)이 자리잡고 있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며 가파르게 솟은 기암의 형세가 마치 하늘을 떠받친 듯하여 붙은 이름이다. 주차장을 지나면 자연학습관찰로가 시작되는데,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은 허망한 꿈을 꾸던 말년의 송시열이 노구를 이끌고 산책하는 모습을 지켜봤을지 모른다.

작은 다리인 화양2교를 건너면 2곡인 운영담(雲影潭)이다. 깨끗한 물이 소를 이루어 구름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구름이 비치는 담 주변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다. 기암과 잔잔한 옥빛 물결이 일품인 곳으로 화양계곡 최고의 물놀이 장소다. MT 온 대학생들과 아이들이 신나게 물장구를 친다. 운영담을 지나면 길 양쪽으로 사람 키만 한 돌기둥 두 개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화양서원을 찾은 지체 높은 양반들 조차도 말에서 내렸던 바로 문제의 그 하마비(下馬碑)다. 조선 말기 한량으로 전국을 떠돌던 대원군 이하응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묘지기에게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이 서원도 제일 먼저 철퇴를 맞는다. 화양서원 안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만동묘가 있다. 여기서  만동묘(萬東廟) 까지는 약 30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돌의 폭을 아주 좁게, 그리고 낮게 만들어 두었기에 허리를 굽히고 반보 걸음이자 옆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게걸음을 걸으면서 올라가고 내려오도록 되어 있어 마치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는듯 하게 만들어져 있어 눈쌀을 찟푸리게 만들지만, 이것이 이 곳 화양서원의 권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축 구조로 그 당시 명나라 황제의 힘을 빌린 호가호위로 왕이 되고자 했었던 송시열의 헛된 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계단을 이렇게 만들 정도였으니 이곳의 위세와 민폐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가 있는 만동묘에서 안산(案山)인 앞산을 바라보면 임금'王'자(字)가 선명하게 보일 뿐만이 아니라 만동묘의 주산인 도명산에서 만동묘로 뻗어내려가는 주맥의 분기점인 도명산 8부 등선상에서 조산(祖山)과 주산(主山)을 보면 이 또한 임금'王'字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바, 조산, 주산, 안산이 모두 풍수학상 제왕이 태어난다는 왕후지지(王后之地)인 '임금왕자(王字)'로 이루어진 군왕지지(君王之地)이니 우암의 풍수안목이 얼마나 높은지를 가늠하고도 남을 일이고, 또 이로 미루어 보아서 우암이 이곳의 풍수적 힘을 빌려서 왕이 되고자 얼마나 큰 공덕을 들였는지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그는 화양구곡의 모든 물을 안을 수 있는 자리에 서재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당격인 암서재를 만들므로서 풍수적 힘을 빌려서 향후 유사시 필요한 재물도 모을려고 했음을 엿볼 수 있다. 풍수학상 물은 곧 바로 재물(財物)이고, 마르지 않는 거대한 물은 마르지 않는 거대한 재물이다. 전체적으로 그는 왕이 되고자 모든 안배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놓쳤으니 바로 자기를 향해서 창처럼 파고들어오는 창파수(槍破水)를 보지 못함으로서 노론의 영수로써 한 때나마 이 나라 조정을 좌지우지하였지만, 결국 이 창파수를 피하지 못함으로서 말년에 귀양가다 사약(死藥)을 받고 비명횡사로 객사(客死)할 수 밖에 없었으니 이는 그의 천추(千秋)의 한(恨)일뿐만이 아니라 바로 천려일실(千慮一失)이자 자기의 자업자득이라고 보여진다.

 

정치 건달의  소굴이 된 화양서원

 

대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만동묘를 원내에 둔 화양서원은 조선 팔도에서도 가장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다. 서인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왕이 되고자하는 헛된 꿈을 품고 은밀히 은거하던 곳에 세워진 사액서원으로 명나라 두 임금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위세는 급기야 조세격인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수탈하기까지 이르렀다. 오죽했으면 매천 황현(1855~1910)이 화양서원의 정치 건달들을 일컬어 ‘서민들의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후일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서원의 병폐를 처단하고자 내린 서원철폐령 때 제일 먼저 철폐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서원 앞 물가엔 3곡 읍궁암(泣弓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북벌을 꿈꾸던 효종이 죽자 이를 슬퍼하며 우암이 새벽마다 올라가 활처럼 웅크려 절하며 통곡하면서 울었다는 사연이 전한다. 이 또한 효종의 사망과 더불어 철저히 사대모화사상(思大慕華思想)에 물들었던 그의 끔도 사라졌기에 나타났었던 행동으로 보인다. 이곳 읍궁암과 만동묘 주변에는 민박집과 식당이 많으며, 서원철폐의 빌미가 된 화양서원을 거쳐 하마소(下馬所)와 채운사(彩雲寺) 등의 명소가 있다.

 

금빛 모래가 펼쳐져 있는 제일 수려한 제4곡 금사담(金沙潭)은 화양계곡 최고의 절경이다. 맑고 깨끗한 물과 금싸(金莎潭)라기 같은 금모래가 반짝이며 널리 펼쳐져있어 금사담이라 하며 옥빛 청수 너머 담애(潭崖)의 큼직한 암반 위에 우암의 서재 겸 제자를 가르쳤던 강의실인 암서재가 노송(老松) 사이에 깃들어 있어 운치를 한껏 돋운다. 암서재에 머물던 때가 우암에게는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와 같은 시기였을지 모른다. 왕이 되고자 그토록 안배를 하고 제자를 길렸던  우암은 불행하게도 당쟁에 휘말려 83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가는 유배길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인적 숲없는 길 따라 9곡 파천으로

 

  화양3교를 건너기 직전 바른쪽 낙영산 정상의 기암절벽인 제5곡 첨성대(瞻星臺)는 별보기 좋은 바위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장관을 이루며 높이가 100m에 이르는데, 옛 날 별을 관측하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좀 더 가면 나오는 능운대휴게소 옆 심곡에 큰 2층바위인 제6곡 능운대(陵雲臺)는 큰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뭉게구름처럼 생겼다. 이곳 마지막 매점으로 여기를 지나면 인적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물소리는 더욱 크게 울리지만 길에는 적막이 가득하다.

마치 길게 누운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거대한 흰화강암 바위덩어리인 제7곡 와룡암(臥龍巖)을 지나면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운치있게 서 있는 제8곡 학소대(鶴巢臺)다. 학소대는 도명산의 입구인 철다리에서 잘 보인다.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계곡 바로 위에 참으로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이곳 학소대부터는 인적이 뚝 끊긴다.

 

 

하지만 마지막 9곡인 파천(巴川)까지 이어진 호젓한 숲길을 빼놓을 수 없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진 숲길을 15분쯤 걸으면 새하얀 너럭바위가 깔린 파천이다.

옥빛을 담은 잔잔한 물결과 용의 비늘처럼 반질반질한 바위가 어울린 모습이 금사암 못지않은 비경이다. 너럭바위에 주저앉으면 잔잔한 수면으로 하늘이 바람이 구름이 내려와 앉는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일까.’ 불현듯 선문답같은 화두 하나가 귓가에 맴돈다.

 

산행 가이드

 

 

도명산을 오르는 산길은 화양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절경지대를 편안하게 감상하고, 화양구곡의 제8곡인 학소대 앞 다리를 건너 정상에 오른 뒤, 첨성대 아래 화양3교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거나 그 반대로 잡으면 편하다.

주차장에서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을 지나 수중보 옆의 다리를 지나면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운영담, 구곡 중 가장 아름답다는 금사담과 암서재를 차례로 지난다. 상가지구를 벗어나 만나는 화양3교 앞 이정표 있는 곳이 산행 들머리와 날머리가 된다. 이곳에 서면 뒤쪽 산자락 높은 곳에 첨성대가 보인다. 계속 계곡 옆의 너른 길을 따라 능운대, 와룡암을 지나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학소대 앞 다리를 건너면 산길이 시작되는 들머리와 날머리가 된다. 주차장에서 40분 소요. 산길은 아주 잘 나있고 이정표도 잘 들어서 있다. 한동안 편안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학소대 다리를 지나 약 1시간쯤 진행하면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경사도 비교적 급하게 이어진다. 거대한 바위 옆을 올라 철다리를 만나면 비로소 동남방향으로 시계가 트인다.

철다리에서 15분 남짓 계단길이 있는 오르막길을 진행하면 옛 낙양사 절터와 마애불상을 만난다. 절터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비교적 너른 굴이 있다. 이 곳은 예로부터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한다. 마애불 바위지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내 5개의 큰 바위가 어우러진 도명산 정상이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시원하고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하산길은 진행방향 오른쪽 철계단으로 이어진다. 바위지대로 길이 나있지만 철계단과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어 진행에 어려움은 없다. 정상을 내려서면 이내 바위사이의 구멍을 지나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짧은 사면을 내려서고, 오른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하산하는 도중 오른쪽 군데군데 조망하기 좋은 곳이 나온다. 산자락 사이 길게 드리워진 화양동계곡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계곡 상류 뒤쪽(東),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대야산이다. 목재 난간이 나타나는 지점의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는 길은 능운대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그대로 직진해서 숲길을 진행하면 화양3교 앞 너른 길에 이르고 산행을 마친다. 정상에서 1시간30분 소요.

 

1곡 경천벽에서 9곡 파천까지 약 4㎞, 1시간 20분쯤 걸린다.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는다 해도 왕복 3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차를 가져왔으면 파천에서 되돌아가야 하고, 대중교통으로 왔으면 파천을 지나 32번 도로와 만나는 학습원 버스정류장까지 15분쯤 더 걸을 수 있다. 화양계곡 입구에는 화양동오토캠핑장이 있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 여정도 훌륭하다.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 분소 (043)832-4347.

 






등산코스를 정리하면,

화양 1교 - 학소대 - 낙영사터 - 정상 - 능선 - 삼거리 - 첨성대바위 - 화양 3교 (4시간)
공림사-북쪽계곡-안부사거리-오른쪽 능선-681봉-도명산-마애불-화양계곡 학소대-화양계곡 주차장(4시간)


 

4, 도명산성(괴산 미륵산성)

 

종목 : 사적 제401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 : 1,703,023㎡
지정일 : 1997.12.16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 산8-37외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이세권외
관리자 : 괴산군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성암부락 동쪽에 있는 도명산 중턱을 둘러싼 성터로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있는 벽은 길이 700m에 높이가 약 2m이다.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과 고려 전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또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조각, 자기조각, 돌로 만든 절구, 숫돌이 발견되었는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쌓은 성으로 보인다.이 성은 4가지 공법을 사용하여 쌓은 점이 특징이다.현재는 중심성과 바깥성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성안의 정상부근 바위에 도명산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고 문터, 건물터 8곳,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인 수문터, 우물터 4곳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가는 길과 맛집

 

가는 길

 

(1) 자가용 이용시: 중부고속도로 증평 나들목으로 나와 증평~증평 읍내~592번 지방도(청안 방면)~문당~백봉~부흥 사거리(화양동 방면)~4.5km~금평삼거리(좌회전)~도원교~화양1교- 화양동주차장

 

중부고속도로 증평IC∼증평∼청천 방향 592번지방도 백봉 37번 국도 합류∼청천∼화양동 매표소

(2) 대중교통 이용시 : 청주에서 이용하는 것이 편리.

서울터미널(반포)∼청주(1일 35회). 청주∼청천 직행버스(1일 13회), 청주∼화양동 직행버스(1일 26회), 청천∼화양동 시내버스(1일 7회)

 청주시외버스터미널(가경동, 1688-4321))에서 화양계곡행 버스는 07:20 09:20 11:20 12:20 14:00 15:00 16:40 17:40. 화양계곡에서 청주행 버스는 07:00 08:50 10:40 13:00 15:20 16:40 18:10 19:30. 괴산의 대표 음식은 올갱이(다슬기의 사투리) 요리다. 화양계곡 안의 음식점보다는 청천면 근처의 신토불이가든(043-832-5376)과 괴산 시내의 기사식당(043-833-5794)의 올갱이 요리가 유명하다.

 

 

 맛집 

 

화양계곡 주변으로 상가시설이 잘 형성되어 있다.(참고 http:///goesan.chungbuk.kr)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분소(043-832-4347)





 

 


운영담


주차장을 지나 화양2교의 다리 쪽으로 흐르는 화양계곡의 물이 어찌나 풍부한 지 마치 작은 댐을 보는 듯하다.


금사담과 암서재


 

정상부근에서 바라본 봉우리들


왼쪽으로 보이는 절경의 계곡을 뒤로 한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화양3교 직전에 오른편으로 보이는 도명산 입구 이정표를 따라 도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무더위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짙은 숲 그늘 사이로 들려오는 시원한 물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와 시원한 바람 덕분에 쾌적한 기분으로 산을 오를 수 있었다.

도명산 정상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들


오른 쪽의 가장 큰 불상의 크기가 9.1m라고 하는데, 깎아지른 암벽 위에 첨단의 장비도 없었을 그 옛날,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거대한 불상을 세 개나 조각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학소대


첨성대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 화양계곡 최고의 절경인 4곡 금사담. 수려한 풍광 속에 우암 송시열의 서재인 암서재가 깃들어 있다.

 

▲ 옥빛 풍광이 일품인 2곡 운영담. 물놀이 장소로 인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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