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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산사(山寺)의 숲, 연초록으로 물드다, 孔雀抱卵形 明堂에 자리잡은 孔雀山 壽陀寺

1. 홍천의 진산(鎭山) 공작산(孔雀山)

 

강원도 홍천은 산악지형의 내륙에 자리한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군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아직 이렇다할 관광자원은 개발되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아름다운 비경을 많이 품고 있어, 앞으로 개발유무에 따라 유명한 관광지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비경이 많은 이곳 홍천에서도 가장 으뜸이 아마도 공작산일 것이다. 홍천강의 상류를 쫓아 거슬러 올라가면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안품에 귀풍(貴風)스러운 산이 나타나니, 바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홍천의 진산 공작산(887.4m)다.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와 동면 노천리의 경계를 이루면서 우뚝 솟은 이 산은 풍치가 아름답고 정상 일대의 깎아세운 듯한 암벽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홍천군 일대가 일망무제로 한 눈에 들어오고, 정상에서 서남쪽 능선을 이용하면 영서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인 수타사로 향한다.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공작새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모습과 같기에 공작산이라 불리어지고 있는 이 산(하지만, 홍천읍에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의 아름다운 산세는 운무산, 수리봉, 발교산, 태학산 등이 겹겹으로 감싸돌고 홍천강으로 흘러드는 수많은 지맥의 골이 마치 부채살같이 아름답고, 봄에는 철쭉군락,여름에는 맑고 풍부한 물과 울창한 산림과 수려한 경관,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워서 울긋불긋한 단풍절경과 더불어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락을 즐길 수 있고, 겨울 눈 덮힌 산을 등반할 때면 공작산 백설의 아름다움과 수목이 펼치는 눈꽃향연을 만끽할 수 있기에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으로 선정된 산이기도 하다.

 

통상 산이 동물 모습을 닮으면 영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풍수에 밝았던 자장율사는 영취산, 사자산, 정상을 봉정(鳳頂)이라 불렀던 설악산 봉정암(鳳頂巖) 등의 산기슭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묻었다. 하지만 진신사리가 다 떨어졌을 때 그런 산이 나타났다면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작산이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한다. 홍천강 양쪽에 벌여있는 화촌면의 동부 전역을 물받이로 삼고있는 군업천을 거슬러가면서 살펴보면 산 머리가 영락없이 새 모양이다. 양 날개를 내삼포리와 응봉산 경계까지 펼치고 있는 안공작재 서쪽의 산줄기들은 소용돌이처럼 돌아가면서 홍천강으로 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이같은 공작산은 남쪽 경계를 이루는 수타계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들판을 흐르던 물이 산 속으로 들어가 비경을 연출하는 까닭이다.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 고찰 수타사로 이르는 계곡에 펼쳐진 봄철의 철쭉과 가을의 단풍은 천하절경을 자랑한다. 공작산의 등반코스는 부채살 같은 수많은 지맥의 골을 따라 산정으로 오르기에 오르는 통로가 다양하다.

 

공작산에서 부터 내려오는 덕지천은 동면 노천리에서 부터 수타사까지 약 12km에 이르는 아름다운 비경을 연출하고 있으니, 바로 수타사계곡이다.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깊은 소(沼)들로 잘 어우러져 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히 우거진 숲이 호위하고 있어 연초록으로 물드는 봄과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이 아름다운데, 특히 가을이 되면 계곡의 물과 바위, 그리고 소(沼)와 단풍이 수타사와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기에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보면 비경삼매에 빠져들기 일쑤이다.

 

2, 세조가 묵고 간 절 수타사

 

공작산의 안품 마치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의 명당에는 천년 고찰 수타사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홍천군 동면(東面) 덕치리 9번지 공작산(孔雀山) 자락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인 이 절은 서기 708년(성덕왕 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산세가 아름다워 우적산(牛寂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다고 전하지만, 원효는 686년 입적하였기에 아마도 이는 지어낸 말이 아닌가 한다. 하기사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절들이 자장, 의상, 원효 등의 삼인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수도 있을 것이다. 창건 이후 영서 지방의 명찰로 꼽히다가 1457년(세조 3)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다. 특히 깊은 산 중 오지 절인 이 절에는 보물 제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 月印釋譜》가 있어서 상당히 의아스러운데, 이는 아마도 세조가 등창 치료차 오대산 상원사로 가다가 날이 저물자 물좋고 산수좋은 이곳에서 하루밤 유숙하면서 자고간 기념으로 이곳에다 월인석보를 남기고 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절 이름이 수타사(水墮寺)로 된 유래는 이 절 뒷편으로 절 이름처럼 맑은 물이 떨어지는 소(沼)가 있는데, 조석(朝夕)으로 이를 본 스님들이 해마다 한 명씩 빠져죽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 맑음이 도를 지나쳐 자연을 그대로 되보이는 명경의 역할을 하니 그것을 따라 해탈을 하려는 스님들의 행동이 끊어지지 않았던 때문이라 한다. 


그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린 뒤 4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636년(인조 14) 공잠(工岑)이 중창을 시작하여 법당을 다시 지었고, 뒤이어 1644년 학준(學俊)이 선당(禪堂)을 지었다. 1647년에는 계철(戒哲)과 승가(僧伽)가 승당(僧堂)을 건립하였으며, 1650년(효종 1) 도전(道佺)이 정문을 건립하고 1658년 승해(勝海)·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를 건립함으로써 정형된 가람을 갖추게 되었다.


1670년(현종 11)에는 정지(正持)·정상(正尙)·천읍(天揖)이 당대의 명장인 사인(思印)비구로 하여금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1674년에는 법륜(法倫)이 천왕문인 봉황문(鳳凰門)을 세웠으며, 1676년(숙종 2)에 여담(汝湛)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 그뒤로도 1683년까지 불사가 계속되어 청련당(靑蓮堂)·향적전(香積殿)·백련당(白蓮堂)·송월당(送月堂) 등의 당우들도 차례로 중건되어 옛 모습이 재현되었다.

절집의 이름은 1811년(순조 11)에 들어서 무량한 수명을 누리라는 뜻과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는 뜻에서 지금의 명칭인 수타사(水陀寺)로 바꾸었다. 사명을 바꾸게 된 동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월사를 현 위치로 옮기고부터 절 옆 계곡의 소에 해마다 스님이 한 명씩 빠져 죽는 변이 생겼는데, 도참(圖讖)에 밝은 한 스님이 절 이름자가 ‘물 수(水)에 떨어질 타(墮)’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 후 1861년(고종 15)에 윤치(潤治)가 중수하였으며 1878년 동선당(東禪堂)을 다시 세우고 칠성각을 신축하였다. 또 1976년 심우산방(尋牛山房)을 중수하고, 이듬해 삼성각(三聖閣)을 건립하였으며 1992년에 관음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삼성각·봉황문·흥회루·심우산방·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적광전(강원유형문화재 17)은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 내부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심우산방 옆에는 강원도보호수 제166호로 지정된 수령 5백년의 주목(朱木) 한 그루가 있다. 이 주목은 1568년에 사찰 이전을 관장하던 노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라난 것이라고 하며, 나무에 스님의 얼이 깃들어 있어 귀신이나 잡귀로부터 수타사를 지킨다는 설화가 있다.
이밖에도 보물 제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와 고려 후기의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11), 홍우당부도(紅藕堂浮屠:강원문화재자료 15) 등이 있다. 얼마 전까지 사찰 안에 있었던 성황당은 관음전 신축을 위해 철거하였다. 사찰 안에 성황당이 있었던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공작산 기슭의 울창한 수림을 벗어나서, 흔히 수타사계곡으로 불리는 덕지천 상류에 이르면 넓고 깊은 소(沼)를 가로질러 화강암으로 만든 다리인 수타교(壽陀橋)가 나그네를 반기면서 일주문인양 절의 입구임를 알린다. 다리 위에서는 저 멀리 옛 수타사(水墮寺)란 사명(寺名)이 있게 만들었던 맑은 물이 마치 작은 폭포수인양 하얀포말을 일으키면서 깊은 소(沼)로 떨어지는 정경과 사찰의 정갈스러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나저막한 평지에 배산을 하고 선 절집의 풍경은 참으로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들고 나섬이 없는 평탄한 지붕의 높이가 그렇고 악산(惡山)스럽지 않는 공작산의 부드러움이 그러하며, 또 절 옆으로 휘감고 돌아 나가는 덕치천의 옥빛 맑은 물길이 더욱 더 그렇다. 그래서 수타사(壽陀寺) 보다는 수타사(水墮寺)라는 사명이 더욱 더 적격인 절이다.


 

절의 정문 격인 봉황문 앞에 서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봉황문 사이로 보이는 흥회루, 천년세월을 간직한 흥회루의 멋스러운 나무 기둥 사이로 간결미를 자랑하는 대적광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의 깊이는 혼을 쏙 빼 놓을 만큼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봉황문의 판벽이 만들어내는 폐쇄감이 통로의 개방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지세의 흐름에 따라 상승하는 흥회루와 대적광전을 한 축에 배치하여 단 한번의 시선으로도 곧장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절대 미감을 보여주는 프레임 구실을 하는 절집의 문루는 많지만, 이렇게 작은 규모의 절에서 심원하면서도 날렵한 공간감을 보여 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봉황문을 지날 때, 한 순간 빛이 차단되고, 이어서 환히 열리는 공간은, 흥회루 너머가 그야말로 대적광(大寂光), 즉 고요한 빛으로 다가오는 빛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의 세계임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흥회루는 이름 그대로 누각이 아니라 단층으로 된 맛배집이다. 문루가 아니면서 루(樓)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상징적 의미와 기능적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인바, 먼저 상징적 의미를 보자면, 고창 선운사의 만세루처럼 누각은 아니지만 사실상 누각이 있어야 할 곳에 서서 다음에 전개될 공간이 불계(佛界)임을 알리는 문루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2층으로 짓지 않은 이유는 산지 가람이지만 기울기가 가파르지 않아서 다른 전각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일 것으로 생각된다. 절집에서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능적 의미는 가운뎃마당을 구획하고,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주불전으로 나아갈 때 전개되는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식의 진입 방법을 모퉁이 진입, 즉 우각(隅角) 진입이라고 한다. 이에 더하여 실용적인 기능은 마당의 연장으로서 대규모의 법회가 있을 때 사람들을 수용하는 역할을 한다.
 
흥회루를 지나면 가운뎃마당이다. 전면으로 대적광전과 원통보전, 왼쪽으로 백연당, 오른쪽으로 심우산방이 긴네모꼴 마당을 형성하는데, 본래는 주불전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바른네모꼴이었으나 1992년에 원통보전을 새로 지으면서 모양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적광전보다 원통보전이 상대적으로 너무 커서 기형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대적광전이 좁기 때문에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통문화 공간으로서의 미학적 고려보다는 예배공간으로서 신앙적 필요가 더 컸기 때문이리라. 이해는 가지만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부조화 때문에 대적광전(도유형문화재 제17호)의 우아한 팔작지붕의 단아함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덤이다. 조선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다포집이지만 공포가 간결하고 소박하여 더 정감이 가는 이 전각의 기단석은 다듬은 돌이지만 기둥 아래의 주초는 막돌이다. 창건 이후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진 역사의 흔적이 여기에도 있다. 
 
2000년 2월 15일 보물제11 - 3호로 지정되었던 조선 중기의 거장 사인비구가 주조한 수타사대종은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주종장()인 사인()이 1670년(현종 11)에 제작한 높이 110cm의 종으로 조선 후기의 종으로는 대작()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화려하고 완숙미와 사실주의적 기풍이 돋보인다. 형태는 조선시대 종으로는 특이하게 종뉴를 따로 만들어 몸체와 연결하고 음통()을 붙였다. 그리고 종의 어깨에 있는 상대() 바로 아래에는 9개의 돌기[]가 있는 네모난 유곽() 4개가 사방에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종의 몸통[] 아래 하대()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또 현란한 꽃무늬로 표현된 당좌(:종을 치는 부분)는 문경김룡사동종(:보물 11-2)의 양식에 비견된다. 종의 몸통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을 만든 내력과 시기·발원자 등을 알 수 있다. 이 명문은 범종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학술적·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사인은 모두 8개의 종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이 종은 신라시대 종의 전통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고 구조도 짜임새가 있다. 수타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우선 크기는 비교적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보물11-1)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동종(보물11-6)은 팔괘(八卦)를 문양으로 새기고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는 것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범종으로는 안성 청룡사동종(보물11-4)과 강화 동종(보물11-8)이 있다. 그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동종과 의왕 청계사동종(보물11-7), 그리고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한 문경 김룡사동종(보물11-2)과 수타사동종(보물11-3) 등이 그가 제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고 있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3. 보기 좋은 계곡이라기보다 느끼기 좋은 곳 수타사 둘레길
 
수타사를 둘러싼 자연 경관도 수타사처럼 소박하고 단아하면서도 정감이 간다. 수타사계곡은 여름철에 물놀이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지만 계곡을 따라 흐르는 둘레길이 더 운치가 있다. 수타교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흐르는 길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충직한 호위병처럼 숲으로 드는 길을 알려 준다. 계곡으로 내려서기도 하고 기슭이 야박한 곳에서는 산을 허물지 않고 철제 다리를 놓아 계곡을 따라 오를 수도 있다. 마음 내키면 곧장 계곡으로 내려가 반석 위에 앉아 맑고 찬 물에 탁족(濯足)을 즐길 수도 있다.

 
수타사계곡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기암괴석이 즐비한 그런 계곡이 아니다. 산세에 비해서 상당히 넓고 반석으로 흐르는 물이 편안하면서 군데군데 물살이 바위를 가르고 소를 만들어 놓은 곳이 많아서 가족끼리 그냥 편안히 쉬기 좋은 그런 계곡이다. 그래서 보기에 좋은 계곡이라기보다는 몸으로 느끼기 좋은 곳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수타사계곡을 따라 걷노라니, 산수간을 노닌다는 말이 딱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눈 아래로는 편안한 계류, 눈을 들면 기분 좋게 솟구치는 산. 가을 단풍철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나무들은 물이 줄어서 바닥을 드러낸 계곡을 배경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내는 그런 곳이다.
 
수타사 계곡의 오솔길은 계곡을 즐기면서 삼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오감으로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수타사로 드는 다리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팻말이 붙어 있다. 적당한 거리는 용소까지 1,7Km. 군데군데 계곡으로 내려서기 좋은 샛길이 나온다. 물을 건너야 할 곳이 아니면 계속 계곡으로 걸을 수도 있다. 상류로 오를수록 조금씩 계곡이 좁아지지만 반석이 많아서 위험하지는 않다.  귕소는 계류가 바위를 가른 다음 세찬 기세로 흘러내리며 소를 이룬 곳이다. 반석에 누워 물소리를 들으면 한 여름의 더위도 쉬이 물러날 것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계곡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이 계곡 자락 163ha의 넓은 산림에 2006년 부터 2009년까지 4년간 약 52여억원의 사업비를 들어서 생태숲교육관, 교육체험등산로, 수변관찰로, 수생식물원, 숲속체험길, 중앙연못, 팔각정자, 사각정자 등을 조성하여 자생식물과 향토수종을 식재하고 복원한 역사문화의 생태숲을 만들었기에 더욱 더 알차고 보람있게 둘러볼 수 있다.
 
더욱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가리산(1051m) 정상에서 마주 보이는 두촌면 샘재마을에서 박순용씨(홍천군 두촌면 쫛쫛리)가 로또복권사상 1등 최고액인 407억원과 2등이 몇 주 사이에 당첨된 바 있어 명당터로 더욱 더 유명세를 타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문간방에 세살고 있었던 민아무개씨도 1억2000만원에 당첨되었으며, 집주인인 경찰관 박씨 형수가 이집짓고 신통(神通)을 얻어 일자무식(一字無識)의 무학(無學)인 시골여자가 일약 신침(神針)명의(名醫)로 소문나 인근 1군사령관이하 장졸 및 유지들을 치유해주고 거부가 되었다고 하니 명당기운의 즉시발복(卽時發福)의 실증인 지역이기도 하다.

 

4. 찾아가는 길

 

(1) 대중교통 이용시: 상봉터미널이나 동서울 터미널에서 홍천까지 직행버스 이용, 홍천에서 노천리행이나 물골행 버스를

                                타고 공작동에서 하차

 

(2) 자가용 이용시: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까지 가서 양평에서 44번 국도를 이용하여 홍천까지 간 후, 홍천에서

                            444번 지방도를 이용하여 동면을 지나 수타사입구로 가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