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궁예>
○ 3년[乾化(건화)] 癸酉(계유:神德王(신덕왕) 2년)에 太祖(태조)를 波珍飡(파진찬) 侍中(시중)을 삼고, 4년[乾化(건화)] 甲戌(갑술)에 [年號(연호)] 水德萬歲(수덕만세)를 고쳐 政開(정개) 원년이라 하고, 太祖(태조)로 百船將軍(백선장군)을 삼았다. 貞明(정명:後梁末帝(후양말제) 연호) 원년(神德王(신덕왕) 4년, 西紀(서기) 915)에 夫人(부인) 康氏(강씨)가, 왕이 非法(비법)을 많이 행하므로 顔色(안색)을 바르게 하고 諫(간)하니 왕이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姦通(간통)을 하니 무슨 일이냐" 하였다. 康氏(강씨)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으리요" 하였다. 왕이 "내가 神通力(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하고 무쇠방망이를 烈火(열화)에 달구어 그 陰部(음부)를 쳐서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였다. 그 후로는 의심이 많고 화를 잘내니, 여러 補佐官[보좌관:寮左(요좌)]과 장수·관리로부터 平民(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誅戮(주륙)되는 자가 자주 있으며, 斧壤[부양:平康(평강)]·鐵圓(原)(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 害毒(해독)에 견디지 못하였다.
○ 이에 앞서 商客(상객) 王昌瑾(왕창근)이 唐(당)에서 와서 鐵圓(철원) 市廛(시전)에 寓居(우거)하였다. 貞明(정명) 4년 戊寅(무인:新羅(신라) 景明王(경명왕) 2년)에, 市中(시중)에 모양이 魁偉(괴위)하고 毛髮(모발)이 모두 흰 사람 하나가 나타났는데, 옛날 衣冠(의관)을 입고 왼손에는 磁器(자기) 사발을 가지고 오른손에는 古鏡(고경)을 들고 와서 昌瑾(창근)에게 이르기를 "거울을 살 수 있는가" 하므로 昌瑾(창근)이 곧 쌀로써 바꾸었다. 그 사람은 쌀을 거리의 乞兒(걸아)들에게 나누어 주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昌瑾(창근)이 그 거울을 壁上(벽상)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며 (거기에) 가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읽어 보니, 古詩(고시)와 같은 것으로서 대략 이러한 것이다.
上帝(상제)가 아들을 辰馬[진마:辰韓(진한) 馬韓(마한)]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
巳年中(사년중)에는 두 龍(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靑木中(청목중)에 감추고,하나는 형상을 黑金東(흑금동)에 나타냈도다.
昌瑾(창근)이 처음에는 文句(문구)가 있는 줄을 몰랐다가 이것을 (자세히)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라 하고, 드디어 왕에게 告(고)하였다. 왕이 有司(유사)에게 명하여 昌瑾(창근)과 함께 그 거울 主人(주인)을 物色(물색)해 찾게 하였으나 볼 수 없었고, 오직 勃颯寺(발삽사) 佛堂(불당)에 있는 鎭星塑像(진성소상)이 그 사람과 같았다.
○ 왕이 오랫동안 異常(이상)함을 탄식하다가,
文人(문인) 宋含弘(송함홍)·白卓(백탁)·許原(허원) 등을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含弘(함홍) 등이 서로 이르기를, "上帝(상제)가 아들을 辰馬(진마)에 내려보냈다는 것은 辰韓(진한)·馬韓(마한)을 말함이요, 두 龍(용)이 나타나 하나는 靑木(청목)에 감추고 하나는 黑金(흑금)에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靑木(청목)은 소나무이니 松岳郡人(송악군인)으로서 龍(용)으로 이름한 이의 손자, 지금 波珍飡(파진찬) 侍中[시중:王建(왕건)]을 말함인가? 黑金(흑금)은 鐵(철)이니, 지금의 都邑(도읍)인 鐵圓(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主上(주상)이 처음에 여기서 일어났다가 나중에 여기서 멸망한다는 讖言(참언)이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波珍飡(파진찬) 侍中(시중)이 먼저 雞林(계림)을 얻고 후에 鴨淥江(압록강)을 거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宋含弘(송함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主上(주상)의 虐亂(학란)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들만이 젓갈[菹醢(저해)]이 될 뿐 아니라, 波珍飡(파진찬) 또한 반드시 禍(화)를 당할 것이라" 하고, 이에 말을 (適當(적당)히) 告(고)하였다. 왕은 (갈수록) 凶惡(흉악)·暴虐(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니, 신하들은 떨며 두려워하여 몸둘 바를 몰라 했다.
○ 그 해(奉封國(봉봉국) 政開(정개) 5년) 6월에 將軍(장군) 弘述(홍술)·白玉(백옥)·三能山(삼능산)·卜沙貴(복사귀)―이는 洪儒(홍유)·裴玄慶(배현경)·申崇謙(신숭겸)·卜知謙(복지겸)의 少時(소시)의 이름이다―네 사람이 비밀히 謀議(모의)하고 밤에 太祖(태조)의 私第(사제)로 가서 말하기를 "지금 主上(주상)이 刑罰(형벌)을 濫用(남용)하여 妻子(처자)를 죽이고 臣僚(신료)를 誅滅(주멸)하니, 蒼生(창생)이 塗炭(도탄)에 빠져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昏主[혼주:暗主(암주)]를 廢(폐)하고 明王(명왕)을 세우는 것은 天下(천하)의 大義(대의)입니다. 청컨대 公(공)은 湯(王)[탕(왕)]·武(王)[무(왕)]의 일을 행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太祖(태조)가 顔色(안색)을 고치며 거절하기를 "내가 忠誠(충성)과 純直(순직)으로 自許(자허)하여 왔는데, 지금 [主上(주상)이] 暴虐(포학)하다고 하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을 交替(교체)하는 것을 革命(혁명)이라 하는데, 내가 실제 薄德(박덕)으로서 어찌 감히 殷(은)·周(주)의 일을 본받을 수 있으랴"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 오지 아니하므로,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罰(벌)을 받습니다. 지금 政事(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운데, 백성들이 모두 웃사람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합니다. 지금에 있어 德聖(덕성)이 公(공)의 위에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王昌瑾(왕창근)이 얻은 鏡文(경문)이 저러한데, 어찌 칩복해 있다가 獨夫(독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까" 하였다. 夫人(부인) 柳氏(유씨)도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이에 太祖(태조)에게 이르기를 "仁(인)으로써 不仁(불인)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들으니 妾(첩)으로서도 憤心(분심)이 일어나는데, 더구나 大丈夫(대장부)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天命(천명)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며 손으로 갑옷을 들어 太祖(태조)에게 올렸다.
○ 여러 장수들이 太祖(태조)를 부축하여 호위하고 門(문) 밖으로 나오며 외치게 하기를, "王公(왕공)이 이미 義旗(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前後(전후)로 달려와 따르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며, 또 먼저 宮城門(궁성문)으로 가서 떠들며 기다리는 자가 역시 1만여 명이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미 私服(사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山林中(산림중)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아니하여 斧壤[지금 平康(평강)]民(부양민)에게 害(해)를 입었다. 弓裔(궁예)는 唐(당) 大順(대순:唐昭宗(당소종) 연호) 2년(眞聖女王(진성여왕) 5년)에 일어나 朱梁(주량) 貞明(정명) 4년(景明王(경명왕) 2년)까지 갔으니 무릇 28년 만에 滅(멸)한 것이다.
▣ 각주
☞ 鏡文(경문)의 全部(전부)는 모두 145字(자)로 高麗史(고려사) 太祖世家(태조세가)에 실려 있다. 鏡文(경문)의 내용은 高麗太祖(고려태조) 王建(왕건)의 登極(등극)과 三國統一(삼국통일)을 豫言(예언)한 圖讖詩句(도참시구)로서 造作(조작)임에는 틀림없으나, 愚見(우견)으로는 그 造作(조작)이 後世(후세)에 된 것이 아니라 당시 王建(왕건)을 推戴(추대)하려는 革命派(혁명파)에서 일반 民心(민심)을 刺戟(자극)코자 일부러 이를 造作(조작)하여 秘密裏(비밀리)에 사람을 이상한 복색으로 假裝(가장)시켜 外國商人(외국상인)인 王昌瑾(왕창근)에게 傳賣(전매)하였던 것이라고 해석한다(拙稿(졸고) 「高麗時代硏究(고려시대연구)」 8∼10面(면) 참조).
☞ 아마 古鏡(고경) 造作派(조작파)에서 그러한 塑像(소상)과 비슷한 服飾(복식)을 입혀 異人(이인)으로 假裝(가장)시켰던 모양이다.
원문
弓裔
○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 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 竊養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 不拘檢僧律, 軒輊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秘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羣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悔慢不禮, 善宗鬱悒不自安, 潛結箕萱摩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任以事, 遂分兵, 使東略地, 於是, 出宿雉岳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 皆降之,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 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狌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浿西賊寇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 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 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湌之職,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鞠爲茂草, 吾必報其讎,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畫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壽春部【今禮部】奉賓部【今禮賓省】義刑臺【今刑部】納貨府【今大府寺】調位府【今三司】內奉省【今都省】禁書省【今秘書省】南廂壇【今將作監】水壇【今水部】元鳳省【今翰林院】飛龍省【今太僕寺】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 殖貨府【掌栽植菓樹】障繕府【掌修理城隍】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甑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欲幷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湌將軍,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幘,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鬃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湌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舡將軍,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熟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鬢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光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 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勃颯寺佛堂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湌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 後搏鴨者, 波珍湌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宋含弘等相謂曰, 今, 主上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葅醢, 波珍湌亦必遭害, 迺飾辭告之, 王, 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辭[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効殷周之事乎,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讎,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况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况大丈夫乎, 今羣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 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噪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출처] 삼국유사-송함홍 (진천송씨대동종친회) |작성자 홈메니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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