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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1. 한북정맥이 솟구쳐올린 한반도의 심장부(心臟部) 한양(漢陽)의 주산(主山)

 

1. 한북정맥이 솟구쳐올린 한반도의 심장부(心臟部) 한양(漢陽)의 주산(主山)

   북한산(北漢山)과 북악(北岳)

 

한북정맥의 지기(地氣)가 모여있는 북한산(北漢山, 836.5m)은 우리 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진산(鎭山: 뒤에서 호위해 주는 산)이자, 또한 한북정맥(漢北正脈: 백두대간에서 한강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산이기도 하다. 이같은 북한산 지기(地氣)의 응결처(凝結處)인 북악(北岳,342m)의 기맥(氣脈)이 흘러내린 선상(線上)에 대한민국의 심장부라는 청와대와 조선왕조의 심장부라는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다.

 한강북쪽을 흐르는 산줄기인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이 금강산을 향해 달리다가 철령 근처 분수령(分水嶺)에서 일맥(一脈)이 출맥(出脈)하면서 동행(東行)하는 백두대간(白頭大幹)과는 달리 서남쪽으로 꺾어져 금화(金化) 오갑산(五甲山), 불정산(佛頂山), 대성산(大成山), 백운산(白雲山), 포천 운악산(雲岳山), 양주 주엽산(注葉山), 축석현(祝石峴), 불곡산(佛谷山), 도봉산(道峰山), 삼각산(三角山), 노고산(老姑山)을 솟구쳐 올린 다음 교하까지 이어진 후 서해로 들어간다. 한북정맥은 왼쪽에 북한강을 끼고 계속 남하하여 교하까지 내려올 동안 북한산을 빼놓고는 이렇다할 명산을 만들지 않으면서 헌걸찬 기상을 깊숙히 숨겨놓았다가 북한산에 이르러 그 기운을 한꺼번에 모두 토해 놓으니 그 기세(氣勢)가 참으로 대단하기에 한반도의 심장부가 되었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상  나무의 열매는 통상 원줄기가 아니라 가지 끝에 맺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맥에 서린 기운도 그 끝자락에서 크게 떨치기 때문에 대부분 산맥의 끝자락엔 큰 도회지터, 도량(道場)터, 음양택명당(陰陽宅明堂: 묘지 및 집터) 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뭇 산맥의 원줄기인 백두대간 끝자락에는 지리산이 솟아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 불리우면서 그 안에 수 많은 수도(修道)터를 품고 있고, 백두대간에서 청천강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청남정맥(淸南正脈)의 끝자락엔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황해도로 들어간 산줄기인 해서정맥(海書正脈)의 끝자락에는 구아갈 단군께서 선인(仙人)이 되셨다는 성산(聖山)인 구월산이,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로 뻗은 산줄기인 예성남임진북정맥(禮成南臨津北正脈)의 끝자락에는 송악산을 빚어 올려서 그 기슭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 한강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끝자락에는 관악산과 마리산(마니산)이 솟아 있어 관악산 북쪽엔 거대한 도회지(서울 남부지역)가, 또 남쪽 기슭엔 정부 제2종합청사가 들어섰고, 강화도 마니산에는 겨레의 조상이라는 단군성조께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만드신 참성단이 들어서 있어 단군성조의 자취가 뚜렸이 남아 있는 우리 겨레의 성지가 되었다.

백두대간에서 금강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금북정맥(錦北正脈)의 끝자락엔 예산의 가야산이 솟아 있고, 이 가야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 속에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택대명당이라는 소위 '자미원(紫微垣)'이라 알려진 음택(묘지)대명당이 깃들여 있어, 여기에 서린 정기로 세계만방을 평화롭게 잘 다스릴 세계적 영도자가 곧 나오리라고 예언하는 이들도 있다. 금북정맥의 남쪽에는 백두대간에서 금강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인 금남정맥(錦南正脈)의 끝자락에는 계룡산이 솟아 있어 옛 선지자들은 서울의 지기가 쇠약해지면 수도가 이 계룡산 밑으로 옮겨간다고 예언하기도 했던 바, 지금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더러 있기도 하다. 현재 세종시 행정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제 그 때가 되어 이들의 예언이 현실화되어가는가 보다. 이 뿐만 아니라 계룡산에서 서쪽으로 뻗어간 산줄기 끝에는 20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가 있다. 백두대간에서 호남쪽으로 뻗어간 산줄기인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끝자락에는 두륜산, 승달산, 백운산 등이 솟아 있는 바, 대흥사가 깃들어 있는 두륜산은 가뭄, 홍수, 전쟁으로 인한 재난인 소위 삼재(三災)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삼재불입(三災不入)의 복지(福地)로 조선조 후기에는 이 산자락에서 숱한 고승대덕들이 배출되어 꺼져가는 조선 불교의 법맥(法脈)을 이어가게 만들었고, 승달산 서쪽에는 승달산의 기운으로 지방항구로는 보기드물게도 큰 항구인 목포가 생겨났으며, 백운산 아래에는 거대한 철광도시인 광양시가 들어서 있다.

백두대간 끝자락인 지리산에서 낙동강 남쪽으로 뻗어 간 산줄기인 낙남정맥(洛南正脈)의 끝자락에는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김해가 있고, 백두대간에서 낙동강 동쪽으로 뻗어 내려간 거대 산줄기인 낙동정맥(洛東正脈)의 끝자락엔 금정산(金鼎山)이 솟아 그 아래에 부산(釜山)이라는 우리 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도회지를 형성토록 하고 있다. 이같이 큰 산줄기의 끝자락에는 도읍터나 대수도장, 대도회지의 기상이 서린다. 그래서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있는 북한산은 도읍터의 기상을 품고 있기에 북한산 아래 자리잡은 서울이 조선왕조 개국 이후 현재까지 620여 년간 도읍지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주산(主山) 북악(北岳)을 비껴앉은 청와대(靑瓦臺)

 

수도는 한 나라의 머리이자 심장부이며,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의 중요한 정책들이 모두 수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도읍터에 서린 지기는 모든 국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기에 국민의 생활, 나아가서 나라의 역사와 운명이 도읍터 지기에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도의 지기(地氣)가 좋으면 그만큼 국민들이 복되게 살고, 나쁘면 나쁜 만큼 힘들고 불행을 겪는다. 그래서 전세계의 모든 왕조들이 도읍터를 신중하게 잡게 되었고, 또 그 만큼 지대하게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일례로, 고구려의 장수왕이 진취적 기상이 강했던 넓은 만주벌판에 있는 국내성을 버리고 소극적, 폐쇄적(閉鎖的) 기운이 강한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망하는 일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읍지도 물론 아주 중요하지만, 수도(首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통치권자의 집무와 거주처다. 통치권자의 집무와 거주처는 한 나라의 머리와 심장부인 도읍지 중에서도 핵심지(核心地)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지가 아주 중요하며 국민들의 실생활과 나라의 운명에 직결되어 있다고 보겠다.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있는 북한산이 기(氣)를 응축하여 기봉(起峰)시킨 북악산(北岳山) 기슭에는 대한민국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집무 및 거주처인 청와대와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집무 및 거주처인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다.

북한산과 북한산의 한 지봉(支峰)인 북악은 기상이 매우 웅장하기에 가히 만백성을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위용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리라고 본다.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있는 북한산의 주맥(主脈)은 정상인 인수봉과 백운대(836.5m)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어 왔는데, 이 주맥을 따라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치솟아 올랐으며, 이들 봉우리들은 대부분 끝이 뽀족하고 몸통이 날렵한 새하얀 바위봉우리들로 붓이나 불꽃처럼 생겨서 멀리서 보면 마치 불이 타오르듯한 불꽃 형상(火星)을 하고 있어 푸른 하늘 및 푸르른 초록빛 나무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에 그 모습이 참 꺠끗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타원형(木星: 수려하면 賢君과 聖賢, 훌륭한 학자와 大道人, 仙人을 배출하는 바, 도읍지에 이런 봉우리가 있으면, 현인군자와 빼어난 수도인들이 많이 나와 그들이 나라의 풍속을 아름답게 가꾼다)으로 곧게 자란 나무처럼 수려하고 중후하게 생겨 마치 선비나 도인이 쓰는 굴건(모자)처럼 생긴 인수봉과 반듯하면서도 끝이 뽀족한 삼각형(紫氣星: 아주 귀한 기운으로 군자의 기상,대학자,문필가의 기상이 서려서 어진 임금과 高人達士, 깨끗한 선비들이 배출됨)으로 생긴 백운대를 제외하고는 모양새가 하나같이 비뚫어져서 수려한 기운(秀氣)이 크게 부족할뿐만 아니라 뽀족뽀족한 봉우리들이 금방이라도 쓰려질듯이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멀리서 보면 마치 미친용(狂龍)이 갈기와 비늘을 세우고 미쳐 날뛰는 듯하기에 두려움까지 주고 있다. 그래서 이 두려움과 불안감만큼 나쁜 흉한 기운을 내뿜는다. 풍수학에서는 화성의 산이 맑고 수려(반듯하고 단정하게 생긴 산을 말함)하게 생기면 학문, 문필,예능의 기운이 크게 감돌아서 이 기운을 받아 훌륭한 관리, 학자, 문인, 예술가, 총명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지만, 흉(모양이 비뚫어지거나 깨진 데가 있거나 우악스럽게 생김)하게 생기면 전쟁, 투쟁, 화재, 전염병 등의 악기(惡氣)가 서리어 흉악한 사람을 배출하면서 전쟁, 투쟁, 화재, 전염병 등의 갖가지 흉한 화를 불러온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비뚫어진 사람, 거칠고 난폭한 사람들을 배출한다고 본다.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은 생김새가 인수봉처럼 타원형에 가까운 목성(木星)으로 비록 높이는 해발 342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 높이 우뚝 치솟은 모양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매우 강한 기상을 느끼게 만드는 산이기에 왕이 머물 만한 곳이기는 하다. 한데 기세는 위풍당당하나 그 모양에 큰 문제가 있으니 바로 청와대와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북악산의 모습은 반듯하고 단정하지 못한체 마치 마음이 좀 비뚤어진 사람처럼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산의 형상은 모름지기 단정하고 반듯해야만 좋다. 그래야 좋은 기운을 뿜는다.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만큼 나쁘고 흉한 기운을 뿜어낸다. 도읍지와 통치권자의 집무처의 주산이 비뚤어진 형상이면 바른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고 고약한 지배자들이 자주 등장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된다. 설령 간혹 훌륭한 지도자가 나온다 해도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그 결과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후 오느날까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보살핀 왕과 지도자가 드물다. 조선조 스물일곱 명의 왕과 해방 후 부터 현재까지 열 명의 대통령을 합한 총 37명 중에서 현군(賢君)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지극히 희소(稀小)하다. 특히 조선조에는 우매한 왕들이 많았으며, 일제 때는 왜인들이 우리 겨레를 억압했고, 해방 후에는 독재자들이 등장했기에 어질고 밝은 지도자는 열에 하나 정도였다.

여기에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북악산에는 결정적인 흠이 두 가지 더 있으니, 바로 바위들이 깨져서 북악산 위쪽에 뭉툭뭉툭한 바위들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과 이 바위들이 마치 도깨비눈 같은 형상을 한체 거대한 두눈을 부릅 뜨고 청와대와 경복궁을 내리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위는 인수봉처럼 꺠지지 않고 단정하며 매끈해야 좋은 기운을 뿜어낸다. 설혹 깨진 바위가 있더라도나무들이 그 모습을 가려주어야 흉한 기운을 뿜지 않는데, 북악은 그렇지 못하니 아주 흉한 기운이 강하게 뻗쳐나온다. 주산은 사람의 신체로 치면 머리에 해당하는 바, 머리가 깨져서 두개골이 훤히 드려나 보이는데다가 그 모습이 마치 도깨비 형상을 한체 내리누르고 있으니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이 온전할리가 없다. 그래서 이같은 지형 아래서는 정신이 바르지 않는 사람들이 배출된다. 성격이상자, 우매한 사람, 완고한 사람, 성정(性情)이 거친 사람 등이 나올 뿐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도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같은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게 된다. 조선왕조의 이성계, 이방원, 세조, 광해군, 연산군, 영조, 사도세자 등과 근세의 독재자들 및 그 하수인들이 모두 살아있는 실례(實例)에 속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면 백성들이 고달플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언서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를 지은 선지자는 오래전에 이것을 우려하여 "한산(漢山)은 금국(金局)이라서 궁궐을 반드시 동향(東向)으로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쇠약해진다. 터를 고르는 자는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동쪽은 허(虛)하고, 남쪽은 낮으니 북악산 아래 터를 잡지 마라. 검은 옷을 입은 도적(倭敵)이 동쪽에서 쳐들어올까 두렵다. (한양땅에) 도읍을 정하려는 자가 스님 말을 들으면 나라의 운수가 좀 연장되지만, 만약 정씨(鄭氏)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걸면 5대도 못가서 왕위를 뺏는 변고가 생기리라. 또 2백 년 후에는 대환란이 닥쳐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삼가 조심하라."고 하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동면(東面)하여 궁궐을 지어라고 했지만, 정작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궁궐동면설을 배척하고 "성리학(주자학)의 예법상 왕은 동면한 예가 없고 반드시 남면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한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북악산 아래다 궁궐을 지었기에 그 후의 역사는 삼한산림비기가 우려한 대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스님(無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씨(정도전)의 시비로 궁궐이 남면하자, 5대도 못 내려가 왕위찬탈의 변고(단종을 내몰고 수양이 왕위에 오름)가 일어났고, 한양 천도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검은 옷을 입은 도적(왜적)들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위태로웠으며, 우매한 왕들의 난정(亂政)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었다.

도읍지와 통치자의 집무 및 거주지의 진산과 주산이 이렇게 생겼으니 포악한 자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된다. 그래서 이 흉한 기운 때문에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부덕한 압제자들이 자주 백성을 억압했고, 권세가들이 횡포를 부렸으며, 때론 외적이 침노하여 우리 강토와 겨레를 짓밟았고, 민족의 비극이라는 6.25 동란으로 동족상잔의 비극도 맛보았으며, 현재까지도 남북이 대치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고, 또 최근에는 연평도 해전 및 천안암 폭침 같은 일어나서는 않되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같이 사악한 무리가 강성한 기세를 떨치니 참된 사람, 정인군자(正人君子), 현인군자(賢人君子)는 숨어지낼 수 밖에 없었고, 조정에는 밝은 임금, 지혜로운 신하가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백성들은 고초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욱 더 문제인 것은 지금의 청와대가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주맥의 기운을 비껴 앉았다는 점이다. 주맥을 비껴앉았기에

한북정맥이 헌걸찬 기상을 깊숙히 숨겨놓았다가 북한산에 이르러 그 기운을 한꺼번에 모두 토해 놓은 그 기세(氣勢)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청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기운까지를 모두 빼았기게 되니, 옛 조선총독부시절부터 해방 후 경무대를 거쳐서 현재의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불행을 당했다. 일본 정계의 제2인자로 차기 일본 수상 유력후보자였었던 역대 조선총독들은 조선에 부임한 후 일본수상으로 영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모두 불행을 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경무대와 청와대로 들어 갔던 역대 대통령들도 모두들 불행을 당하여 박정희, 노무현씨 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혹은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씨 같이 불명예 또는 전두환씨 처럼 영어의 몸이 되었고, 그들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비서실 등에 함께 근무했었던 그들의 수하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어의 몸이 되거나 스캔들 등으로 불명예를 안고 물려났으니 흉한 땅의 기운은 이렇게 정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나라와 국민들이 편안할려면 지금의 청와대를 반드시 옮기거나 좌향을 다시 잡아야만 한다.

 

3. 청와대 둘러보기

 

(1) 청와대(靑瓦臺)란?

청와대는 '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란 뜻'으로 대통령의 집무 및 생활 공간을 일컫는 공식 명칭이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포함하고 있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윤보선 전 대통령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는 실제 건물 뿐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수행부서 전반을 가리킨다. 이곳은 조선시대(1392~1910)왕의 정궁으로 사용된 경복궁과 인접해 있으며, 그 당시는 문과시험과 무술대회, 군사 사열 같은 각종 국가기능이 펼쳐졌던 곳이기 때문에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뒤로는 옛 왕도였던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싸 보호하고 있는 4대 주산의 하나인 북악산(342m)이 우뚝 서 있으며, 북악산을 기점으로 이들 4대 산의 능선을 따라 옛 성곽들이 축조되었고 조선조 시대의 성벽 일부는 아직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 북악산 산기슭은 왕궁과 가까울 뿐아니라 빼어난 경관 때문에 근처에 왕족들과 양반사대부들이 많이 자리잡고 살았기에 이 일대의 절경을 묘사한 시, 그림, 문학작품을 허다하게 만날 수 있다. 현재 청와대는 주변 자연환경을 세심하게 보존하고 있어서 서울에서 최고의 ‘녹색’지역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일부는 수령이 250년 이상된 높이 솟은 소나무, 떡갈나무, 감나무 등과 사슴, 희귀종 새, 다람쥐, 그 밖의 동물들이 자유롭게 땅 위를 돌아다니는 청와대는 환경의 보고로 여겨지기도 하며, 여기에 북악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대통령 관저에서 내려다 뵈는 서울 도심의 모습은 장관이다.
 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이곳은 또한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했고, 총독관사를 새로 지어 7, 8, 9대 총독이 사용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획책했기 때문이다(1993년 청와대는 역사적인 고증과 풍수들의 자문을 얻어 구 본관과 총독부 청사로 썼던 건물을 헐어 경복궁의 지기와 민족정기를 되살렸다). 그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 군정사령관인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 청와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었다.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이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후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되었다.

 

(2) 청와대 둘러보기

 

청와대관람은 안내자로 부터 청와대 현황을 설명 들은 후 경찰관의 안내에따라 도보로 이동하며 관람하게 된다. 제일 먼저

첫번째로 관람하는 곳은 아름다운 '녹지원'이다. 녹지원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으며, 과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 때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에 약 3305.8㎡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약 160여 년 수령과 17m 높이를 자랑하는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최근에는 대통령과 외국 국가원수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이곳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개최했으며 대통령 내외분이 한국 올림픽 선수단 전원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기도 했다. 대통령 내외분이 여유있게 녹지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기도 하다.

청와대관람을 하면서 동영상 촬영은 금지되며 사진촬영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허락된다. 이곳 녹지원에서 사진촬영을 할 시간을 주는데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도로에서 녹지원을 배경으로 찍을 수 있다.

 

 

 

 

- 녹지원 -


녹지원 다음은 '구본관 터' 로 예전 경무대터이다.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景福宮)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 산자락은 일찍이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908년 전인 고려 숙종 9년(1104년)에는 왕실의 남경(南京) 이궁(離宮)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경복궁(景福宮) 후원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경무대, 융문당, 경농재, 벽화실, 오운각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던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알려졌던 이곳에 일제(日帝)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면면한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사령관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에는 관저를, 다음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집으로 남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부 관사 건물을 철거하도록 했고, 옛 지형 대로 복원해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의 명칭을 따라 수궁(守宮)터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철거된 총독부관사 자리에는 빈터로 경복궁 후원의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았는데, 첫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을 그대로 기억하자고 하여 이를 상징하는 표석 하나는 이 위치에 높이 그대로 남겨놓았다. 구본관 터의 뒷쪽으로 보이는 나무에 가려진 건물 하나가 바로 대통령 관저다. 구본관 터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다.

 

 



 

그 다음은 본관건물과 대정원이다. 제6공화국(노태우 대통령) 때 옮겨 조성한 본관은 청와대하면 떠오르는 건물이며 뉴스등에 많이 나왔던 건물이라서 이곳에 오면 누구나 비로소 '청와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 있는 사실은 이곳 이주 공사시 어느날 풀섶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암각 글자가 발견(현재 청와대 신관 뒷편에 있다하지만 알 수 없는 일임)되었는데, 이를 두고 육관 손석우씨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민심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경회루의 주춧돌 밑에 '왕궁조영 국조무궁(王宮造營國祚無窮)'이라고 조각한 옥로잔을  몰래 묻어 우연히 출토된 것처럼 연극을 꾸미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 때의 대원군의 공작품이 아니라 바위와 글자 상태로 보아 이미 천여 년 전에 도선국사가 삼각산 아래 진혈이 맺힌 곳을 알리기 위해서 묻었던 것이 발견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현재 본관의 위치가 진혈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이는 틀린 말로서 천하제일복지라는 암각 판석도 아마도 그가 일부러 묻어두었거나 아니면 그 당시 누군가가 진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묻어두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본관의 1층은 여사의 집무실이, 2층은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으며 그외 몇개의 방과 회의실등이 있다.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으로 활용되는 본관건물은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아름답다는 전형적인 팔작지붕으로 처마 끝에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며 올라가 용마루에서 한데 모이는데 유려한 곡선미가 주는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본관 양옆으로는 두개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본관 앞으로는 넓은 정원이 있는데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넓은 정원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다. 대정원에서는 각종 야외행사와 의장대 사열등이 이루어진다. 사진찰영은 정원 아래로 내려와서 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비교적 많은 촬영시간이 주어지며 정원이 넓어 관람인원도 흩어져서 사진 찍기에 좋다.

 

 



대정원에서 돌아 내려오면 영빈관이 있다. 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로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 1978년 1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 준공되었다.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기둥으로 아주 우람하고도 아름답다. 내부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또한 100명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영빈관 건물안에는 한쪽 벽에 대통령 내외분의 그림판이 있는데 이곳에서 직접 만나지 못한 대통령 내외분과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가 있다.

 


영빈관 관람을 끝으로 관람을 종료하고 밖으로 나오면 칠궁과 분수대가 있으며 그것으로 청와대의 모든 관람이 종료된다. 

또한, 영빈관에서 나와 위족으로 가면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는 항상 개방되어있어 언제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춘추관이 있다. 춘추관은 국내외 언론사 기자 300여명이 출입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 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자료실 겸 작은 브리핑룸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 및 각종 브리핑 등을 하는 브리핑룸이 있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 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다. 이곳에는 청와대출입기자실, 기자회견장 및 브리핑룸, 춘추관장실 등이 있다. 춘추관은 사서오경의 하나인 춘추에서 따온 말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역사의 기록을 담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의 춘추관은 시정(그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으로 고려 개국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 1308년(충렬왕 34년) 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 춘추관으로 고쳤고, 그  후 1325년(충숙왕 12년)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되었다. 춘추관은 1356년(공민왕 5년) 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 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 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 춘추관으로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이였는 바, 조선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 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 1년)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폐지됬다

 

청와대 서남쪽에 자리잡은 칠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 궁(毓祥宮)을 비롯,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 등 7개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칠궁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8년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왔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다시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칠궁' 관람은 문화재 보존과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청와대 관람과 연계하여 실시되고 있다.

 

또한, 현재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는 상춘재(常春齋)가 있다. 본디 이 자리에는 원래 약 66m² 정도의 일본식 건물이 있었으며 1983년까지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군데도 없었기에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다. 이에 200년이 넘는 금강소나무를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다.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때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시절 상춘실(常春室)로 그 명칭을 개칭하여 사용하여 왔으며 1977년 12월에 철거하고 1978년 3월 천연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 72.6㎡)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 그후 전통 한식건물로 만들기 위해 1982년 11월 20일 착공하여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면적 417.96㎡의 건물을 1983년 4월 5일 완공하였다. 주 기둥에 사용된 목재는 200년 이상된 소나무(春陽木)이다. 

 

참고로 청와대관람은 모두 예약제로만 이루어지는 바, 청와대 홈페이지(www.president.go.kr)에서 인터넷 접수 후 관람하면 된다.

 

4. 조선(朝鮮)왕조의 심장이자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

 

(1)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권을 찬탈한 고려(高麗)의

     역신(逆臣) 이성계(李成桂)와 조선개국(朝鮮開國)

 

등거리 외교를 해오던 공민왕이 죽은 후 그 아들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명나라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이 중심이 되어 명의 대()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는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 후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以小逆大 一不可),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夏月發兵 二不可), ③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벌할 염려가 있으며(擧國遠征倭乘其虛 三不可),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時方暑雨弩弓解膠 四不可), ⑤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大軍疾疫五不可)는 다섯가지 이유(소위 五不可論)를 들며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그 해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키는 군사적 쿠데타를 단행한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놀란 만고영웅(萬古英雄)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 지금의 )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 후 역성혁명으로 왕권을 찬탈한 고려와 민족의 반역자 이성계가 고려의 왕도였던 개경(현 개성)에서 한양(현 서울) 천도를 결행하고 먼저 종묘를 건립한 다음 지은 궁궐이 바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자 정궁인 경복궁이다.



 

(2)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궁궐풍수(宮闕風水)의 전형인 한양의 풍수 

 

(가) 이성계는 왜 한양으로 천도할려고 했는가?

 

이성계는 나이 58세에 개경 수창궁에서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왕조가 바뀌면 국호를 고치고 도읍을 옮기는 것이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관례이기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천도문제를 거론하여 즉위년 8월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천도문제가 이와 같이 조속히 거론된 이유는 개경은 본래 구 고려왕조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근거지였을뿐만이 아니라 반역의 군사쿠데타로 인한 이성계의 피로 얼룩진 곳이였기에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민심을 수람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를 새로이 건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천도문제는 한편으로 당시 민심을 크게 지배하고 있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나) 궁궐풍수(宮闕風水)의 전형인 한양의 풍수(風水) 

 

 

지금부터 약620년 전 태조 이성계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도읍 후보지로 무악, 한양, 도라산 등지를 구경하고 옛 수도 개경으로 돌아갔다. 좌정승 조준이 아뢰기를 " 한양 안팎의 산하형세가 좋은 것은 옛날부터 말하여 오는 터(註1)이며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균형하고 수륙의 교통이 잘되는 곳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참으로 하늘과 사람의 뜻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본디 한양은 고려의 문종. 숙종이래 남경으로서 풍수 상으로 비보의 요지로써 지목되어 왔을 뿐 아니라 고려 말 우왕, 공양왕대에는 한때 천도의 후보지로 결정된 일도 있었을 만큼 새로운 도읍지로 고려되어 오던 곳이였다.

 

그러나 한양 궁실의 건축이 추운 날씨로 인하여 한동안 중지되고 있던 사이에 왕명으로 왕실안태의 터를 찾아 양광, 경상도, 전라도 각지를 순회중이던 권중화가 태조 2년 정월에 신도의 후보지로 전라도 진동현(진산)과 양광도 공주 계룡산을 추천한 일이 있었다. 이에 이성계는 큰 관심을 보이고 계룡산을 5일 동안 실지 답사하고 산수의 형세를 심사한 결과 이곳을 신도로 삼을 결심을 하여 수도건설의 역사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당시 풍수의 대가였던 경기도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의 위치가 남쪽에 편재하여 동북서북방과 너무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풍수상으로도 계룡산의 지형이 길흉정방에 있어서 물은 길방에서 와서 흉방으로 흘러가야 길지(吉地)가 되는 법인데 계룡산의 경우는 그 반대이니 흉화를 초래하는 땅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기에 공사가 중지하게 되었다(註2). 여기에 이성계가 꾸었다는 다음의 꿈 이야기도 한 몫을 했다. 이성계가 수도를 정하고자 공주 계룡산 신도안까지 갖다가  잠깐 잠이 들어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공주는 정씨(鄭氏) 800년 땅이지 이씨(李氏)땅이 아니니 한양으로 가거라. 한양은 목자성국을 이루는 금국형이고, 이씨(李氏)는 목자합자(木子合字)이기 때문이니라. 풍수로 말하자면 합천 가야땅은 조(趙)씨 1000년지기(地基) 땅이니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한양으로 와서 한양 땅에 오얏나무를 심고 500년 이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추측컨대, 이는 아마도 한양 땅의 합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 아닐까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고려시대 이래 서운관에서 소장해오던 비록을 거의 다 하륜에게 주고 새 도읍지를 물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하륜은 신도의 후보지로 한양의 무악(현재 신촌. 연희동 일대)을 지목하여 아뢰었고, 이성계가 당시 좌시중이었던 조준으로 하여금 현지를 답사케 한 결과 하륜을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권중화, 정도전, 성석린, 남은, 하륜등 중신 등을 총 동원하여 후보지를 고르게 하는 한편 8월에는 군신을 거느리고 무악 현지를 직접 두루 살펴보았으나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무악천도론은 좌절되었다.

이성계는 귀로에 지금의 서울 땅으로 들어서 고려 남경의 구궁지를 살펴보고 산세를 관망하면서 지사 윤신달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 국내에서는 개경을 상지로 하고 이곳을 그 다음으로 치지만 개경은 서북방이 낮고 수천이 고악하므로 한양이 더 좋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만족하여 왕사 무악 자초에게 물었던 바,  " 이곳은 사면이 고수하고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으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에 쫓아서 결정함이 좋겠다."라는 신중론을 진언하자 하륜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천도를 할 바에는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였다.

이성계 일행이 개경으로 돌아온 후 조준, 김사형 등이 상소하여 한양을 신도로 확정하기를 정식으로 주청하였으므로 마침내 이성계는 결단을 내려 9월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권중화, 정도전, 심덕무, 남은, 이직 등 중신들을 한양에 보내어 종묘, 사직,궁궐 도시와 도로의 기지를 정하게 하니 이들은 지금의 경복궁과 종묘의 기지를 살펴보고 이를 제도하여 이성계에게 바쳤다.
이와같이 신도의 윤곽이 드러나자 곧이어 심덕무와 김주를 한양에 머물게하여 신도를 경영케 하는 한편 동시에 모든 신하들은 한자리에 모여 천도의 시기를 상의했는데 모두 연내가 좋겠다고 하므로 드디어 10월25일에 개경을 떠나 1394년10월28일에 한양으로 입성하였다.

한양천도와 함께 궁궐의 조성과 도성의 수축등 그 시설이 차례로 완성되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한양천도 후 4년째인 1398년 8월에 한씨 소생인 방원이 건저 문제에 불만을 품고 이숙번 등 자기의 사병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인 세자 방석과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이성계는 골륙상잔에 실망한 나머지 9월에 왕위를 새로운 세자에게 물려주니 이가 곧 정종이다.

이 사건 이후 한양에 불길한 징조가 잇달아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운관에서는 이를 이유로 글을 올려 피방하기를 주청 하였다. 이에 정종은 즉위 2년 1399년2월에 종친과 공신들을 모아 어가를 옮기는 문제에 대해 가부를 물었는데 모두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므로 3월7일에 구도에의 환도를 실행하였다.

개경환도이후 1년도 채 못되어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상왕인 태조의 윤허를 얻어 당시의 실력자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삼고 곧 이어 동년 11월에 왕위를 그에게 주었으니 이가 곧 태종이다.

태종이 즉위한 다음달에 개경의 본궐인 수창궁이 불에 탄다. 이를 계기로 다시 천도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태종 2년 7월에 왕이 하륜 등 문무대신들을 모아 한양천도의 가부를 물었더니 구도개경론, 신도한양론, 무악이도론등의 3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견이 개경에 머물자는 의견이므로 천도문제는 보류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 태상왕인 이성계가 천도 문제에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자 이방원도 이에 동조하여 무악 일대를 친히 살펴보기도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후 태종 이방원은 개경, 한양, 무악 이 세 곳을 놓고 종묘에서 군신들과 더불어 척전으로 점을 쳤다. 신도 한양이 이길일흉, 개경과 무악이 이흉일길이란 결과가 나왔으므로 왕은 한양재천도론의 최종적 결정을 내려 태종5년10월8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11일에 한양에 도착했다. 그 며칠 뒤 창덕궁에 입어함으로서 여러 해를 두고 분분했던 천도문제는 완전히 결말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울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기타 모든 분야의중심지가 되어 우리나라의 심장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서울의 풍수를 살펴보면, 고려 중엽 때부터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과 평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각광을 받았던 한양은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함께 4경의 하나였던 남경이라 불리웠고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개성지기쇠퇴설(開城地氣衰退說)과 함께 남경천도설(南京遷都說)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쿠데타로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민심을 혁신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면 도읍의 천도가 불가피하다고 보아 계룡산 신도안을 비롯하여 지금의 서울 신촌 일대인 무악(毋岳)과 한양 등을 돌아보고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야 국가 전체가 균형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양 천도를 결심하였다.  이 때의 한양은 북쪽에 북악산(면악산, 백악산)과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면산(남산), 동쪽에 낙산(동대문 근처)이 둘러 싸여 있는 터를 말한다.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음인 용은 백두산에서부터 천리를 넘게 온갖 변화를 하면서 행룡(行龍)해왔고, 양인 물 역시 남한강 북한강이 천리 밖에서부터 흘러나와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한강을 이루고 서울을 휘어 감아 주니 산수교합, 즉 음양교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서울의 내 청룡(內靑龍)은 삼청터널 위로 혜화동을 거쳐 낙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내 백호(內白虎)는 북악산 우측으로 창의문(자하문), 인왕산, 무악재로 이어지는 능선이며, 안산(案山)은 백호 능선이 이어져 북악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남산이다. 경복궁 혈지를 중심으로 북쪽은 백악산,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남산, 동쪽은 낙산이 둘러싸고 있어 내 사산(內四山)을 이루며, 또 북쪽에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 동쪽에는 외청룡인 용마산, 서쪽에는 외백호인 행주의 덕양산, 남쪽에는 서울의 조산인 관악산이 외사산(外四山)을 이루면서 겹으로 둘러싸 큰 보국(保局)을 이루고 있다.

서울은 산세뿐만 아니라 물도 수태극(水太極)의 명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계천은 서북쪽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득수하여 서울을 감싸 안아주면서 동쪽으로 흘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과 합류하여 서울 전체를 감아주어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다. 수태극은 용의 생기를 가두어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할뿐 아니라 여의도와 밤섬은 한강수의 유속을 조절하고 보국 안의 생기를 보호하는 섬으로 외수구(外水口)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서울은 풍수지리적으로 천하의 명당으로 한나라의 수도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도시 요건으로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여기에 더하여 서울을 감싸고 돌아 나가는 한강은 강의 길이로 볼 때 한반도에서 네 번째이지만 유역의 면적은 압록강 다음이며 그 유역을 포함하고 있는 땅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매우 크고,  또 국토의 중심 무대에 자리잡고 있기에 한강을 차지하고 지배한 왕조가 한반도를 통일했음을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한강이 기록에 처음 언급되는 대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온다. 온조 왕의 열 신하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기를 건의 하는 내용중 "생각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은 한수를 띠고, 동은 고악에 의지하였으며 남은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를 격하였으니 그 천험의 자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나온다.

이때 한수가 처음 언급된다. 한서지리지에 대수, 광개토왕비에 하리수(河利水)가 나온는데 이때의 한은 크다, 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크고 바르고 중요하며 신성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한수는 크고 중요한 강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도 강(江)과 하(河)는 양자강과 황하에만 쓰고 나머지는 수로 이름했으니 한수라 함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다. 한북정맥의 대원국(大垣局)인 서울도 흠은 있다. 첫째 태조산인 도봉산과 주산인 백악산이 불과 60리로 너무 가깝게 있다. 태조산의 험한 살기가 완전히 정제 순화되려면 적어도 100리는 행룡하여 혈을 결지 해야 하는데 서울은 완전히 살기를 벗지 않은 상태에서 혈을 맺었기 때문에 험한 일을 많이 당한다. 둘째로 서울은 백호와 안산에 비해 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에서 청룡은 남자와 장자 및 권위를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차자 등 지손과 재물, 무기 등을 관장하는데 조선 왕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보다는 지손들이 훨씬 잘되었으며 여인네들과 외척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 동쪽이 허하다보니 동쪽에 있는 외적의 침입에 약했다. 셋째로 황천방(黃泉方)이라고 하는 서북방(乾方)이 푹 꺼져있어 황천풍을 받아 험한 일을 많이 당하고, 서북쪽에 있는 적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다.

 

넷째로 좌향(坐向)이다. 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유학자인 정도전과 승려인 무학대사는 의견을 달리 했는데 왕은 남향을 하여야 한다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서울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동향을 하였다면 자왕향(自旺向)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길한 향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흠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도시다. 왜냐하면 보국을 이루게 하는 용과 물이 길어 천년 이상 보국을 지탱해줄 것이며, 서울의 외수(外水)인 한강수는 파구가 여의도 쪽으로 방위는 신술(辛戌)이다. 신술파(辛戌破)에 좌수도우(左水到右)하는 물과 임좌병향은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정왕향(正旺向)이다. 조선 500년이 청계천 내당수에 의한 전반기 서울의 운이었다면 앞으로의 서울은 한강 대강수 외당수에 의한 운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같은 서울의 풍수지리를 논할 때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같이 경복궁과 더불어 청와대 터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이 땅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후대에 지어낸 말일 것이라고 하였듯이 도선국사가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로 점지한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청와대 터가 정혈이 아니기에 일제 총독부터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암살, 망명, 투옥을 비롯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던 흉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대저, 혈이 주산 바로 아래에서 결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혈이란 주산에서 출발한 용이 길게는 몇 십리 짧게는 십여리 행룡하면서 많은 변화를 하여 기를 더욱 정제 순화시킨 다음 순수한 생기만 모아서 맺어야 하는데 북악산이 탐랑 목성으로 수려 단정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살기를 모두 벗지 않으면서 몸체를 드러낸 돌산이므로 그 밑에는 양택지든 음택지든 있을 수 없으며, 여기에 청와대는 산 중턱에 자리잡아 괘등혈이나 연소혈 등 괴혈이 아니면 혈을 결지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산에서 청와대를 바라보면 청와대는 북악산에서 출맥한 용이 경복궁을 향하여 가는 주룡 능선을 배역(背逆)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곳은 산맥의 올바른 정기를 받을 수 없는 곳이다. 혹자는 청와대로 내려간 능선을 용맥으로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 용맥은 주룡을 지탱해주고 보호해주기 위한 다리(支脚)에 불과하기에 국가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고 본다.

 

* 註1,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우리나라 자생풍수의 비조(鼻祖)로 불리우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는 '삼한산림비기'에 한양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등장한다. 삼한삼림비기에 언급하길 도선국사 왈 "한양의 풍수(風水)는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다. 王이 되는 사람은 長子보다 次男이 될 확률이많다. 송악(松岳,개성)은 수국(水國)인데 한양은 금국(金國)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북쪽에 삼각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용이 내리고 범이 쭈구려 앉은 형세가 있고 남쪽은 한강으로 금대를 삼았으며 멀리는 왼쪽을 대관령을 끓어 당기고 오른쪽에는 대해가 둘러서 그 형세가 동방의 제일이요, 정말 산하요새의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한양의 산수형세는 북쪽은 백악산, 동쪽은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 서쪽의 인왕산이 둘러싸고 있어 소위 이를 내사산이라 하며 그 넓이가 500만평에 이른다. 오늘날의 서울은 북쪽의 북한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행주), 동쪽의 용마산으로 더 넓은 지역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 무한한 서울의 재물(풍수에서 물은 재물로 본다)을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 註2, 무학의 신도안 천도 반대 이유: 하륜외에도 무학도 이를 반대 하였다. 게룡산 신도안을 천도 적지로 주장하며 주춧돌 공사까지 마친 정도전에게 무학은 "계룡산은 물의 흐름이 부적절하여 도읍지로서 수량확보가 어려우며, 또 천리용맥의 근본을 헤아리기 어려워 국가통치의 애로가 있다"고 주장하여 도읍지로서는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한양을 천거하였다. 반면 한양은 도읍으로서 국면이 좁고 주산이 얕다는 반대에 부딪혔으나 이성계는 무학왕사의 의견을 따랐다.

 

 

(3) 왕권(王權)에 대한 신권(臣權)의 승리 - 조선의 궁궐 남향(南向)하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결심한 뒤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종묘에 이어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이었다. 대궐은 왕권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함부로 범접 못할 왕실의 위엄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이성계는 이 일을 왕사였던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 정안대군 이방원(후일의 태종), 권종화, 하륜 등에게 맡겼다. 그러나 궁궐의 터와 좌향을 정하는 중대사를 놓고 이들의 의중은 서로 달랐다(註3).  

건국 초기, 고려의 낡은 질서와 조선의 새로운 질서가 대립할 때, 먼저, 승려이자 철저한 왕권론자인 무학은 일반적으로 동향을 원칙으로 하는 불교사찰의 영향을 받아서 동향하고 있는 고려 궁궐의 예에 따라서 새 왕조의 궁궐을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 낙산(낙타산)을 안산으로 하여 앉힘으로서 동향으로 건립되어 새로 세운 왕조가 장자계승으로 무탈하게 백성을 위하면서 천년사직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고려에 이은 불교국가가 되기를 사심 없이 원했지만,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으로 신진 세력을 대표하는 신권론자(臣權論者)인 삼봉 정도전과 하륜 등은 새 왕조의 통치철학인 유교의 기본입장을 쫓아서 제왕은 남면이 원칙이므로 궁궐 또한 동향이 아닌 남향을 해야 하므로 북악을 주산으로,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남산을 안산으로 하는 남향의 궁궐이 건립되어야만 한다는 구실로 왕권보다는 신권이 우선하기를 바랐고, 나아가서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태조의 제8남)을 세자로 밀어 추후 확고한 신권정치를 도모하고 있었기에 장자보다는 차자가 왕위를 잇는 궁터를 원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서열상만으로는 용상에 오를 가망이 희박했었던 정안대군 이방원도 당장은 장손이 흥성하기 보다는 차자가 왕권을 잡는 자리를 원했기에, 이 양자는 비록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나 이 문제만으로는 의기가 투합되어 하나가 되었다. 고려왕살처럼 불굑가 흥성하면서 절대적 왕권이 확립되기를 바랐던 승려 무학이 고른 대궐좌향은 인왕산을 주산 삼아 우람한 백악을 청룡으로, 남산을 백호로, 낙산을 안산으로 하는 유좌(정서)묘향(정동)으로 이는 장남으로 하여금 왕통을 이어가 왕실이 안정되는 강력한 왕실정치가 구현되는 자리로 현 사직단 좌측의 배화여고 자리 일대다. 그랬더라면 우람장중한 북악이 좌청룡으로 기복하며 동대문 낙산까지 굽이쳐 대군 왕손들의 기세가 등등했을 것이다.

반면, 이와는 달리 신권정치의 신봉자인 삼봉과 제왕등극을 꿈꾸었던 이방원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힘없고 유약한 낙산을 청룡으로, 우람하고 강건한 인왕산을 백호로, 남산을 안산으로 하는 북에서 남으로 정궁(正宮)을 앉히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무학은 두 사람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지만 신정정치의 또다른 주창자인 당대 풍수의 대가 하륜의 가세와 제왕남면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정도전의 의견을 뿌리치지 못한 이성계의 동조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성계의 이같은 결정에는 그가 총애하고 있는 의안대군 방석에게 양위의 뜻을 두고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해서 삼봉과 이방원이 주장한 곳에 세워진 대궐이 바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다. 그 후 무학은 한동안 이성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두 사람과도 거리를 두었다고 전한다. 왕실의 앞날이 걱정이었고 불을 보듯 뻔한 왕위계승 다툼이 눈앞에 선해 심사가 편치 않았던 것이리라.

 

* 註 3, 무학과 정도전의 좌향론쟁(坐向論爭): 무학은 조선(朝鮮)이 아침을 뜻하는 목자성국(木子成國)이므로 경복궁 방향을 동향(東向)을 주장하여 나라가 평온하고 부국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만백성이 예(禮)를 갖추고 국왕을 받드는 길은 남향이 좋다고 주장하면서 대궐의 방향은 남향(南向)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정도전은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세워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달면 남대문에 이상이 생기면 나라에 액운과 변고가 있을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성계는  고민이 많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유교를 숭상하고 공적이 많았던 개국공신 정도전의 의견을 들어 남향으로 정하길 최종 낙점하였다. 무학대사가 대궐이 남향하면 200년후에 전란이 일어나 대궐이 불탈것이라고 임금에게 건의하하자 이성계는 임금이 죽어나가는  문의 이름을 대사게 짖도록 명하였는데, 대사는 죽어극락가길 원한다면 광희문(光熙門)이라 지으라고 했다. 이성계가 죽은지 200년되던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는 대궐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가고 경복궁은 불타버린다. 지금의 경복궁은  흥선 대원군이 당백전이란 악화를 발행하여 새로 지은 후 6.25 동란 때 불탄 것을 1968년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다시 지은 것이다.

무학대사는 조선이 27대 왕으로 끝맺을 것을 알고  광희문으로 지었던 바, 즉 조선이 광무와 희제로 문닫을것을 예언하고 임금이 죽어 마지막 나가는 문(수구문: 지금의 중구 광희동에 있는  수구문은  임금이나 왕족이죽어나갔던문이다)을 光熙門이라 했으니 이는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과  순종의  연호가 광무와 희제였슴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무학은 남면한 경복궁을 보고 풍수로 조선의 마지막 왕까지 정확히 점찍었던 것이다.

 

1394년(태조 3) 경복궁의 대역사가 진행되면서 주산과 좌향을 잘못 택한 탓에 보강해야 할 곳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왔다. 이때 풍수에 밝았던 삼봉 정도전의 비보풍수(裨補風水, 註4)가 나타났는데, 그 흔적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즉 허약한 좌청룡을 보강하기 위하여 힘없이 내려 앉은 동쪽 좌청룡 끝에 흥인문을 건립한 후 산을 잇는다는 의미로 산맥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는 문자인 갈지(之)자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현 동대문)이라 이름지었고, 또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로 나가는 서쪽 문에 거추장스러우면서도 보행에 불편을 주는 열주(列柱)를 세워 서쪽에서 불어오는 살풍(殺風)을 막도록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북악을 주산으로 배치하다 보니 목멱산(현 남산)을 안산으로 하게되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화형산(火形山)인 관악산(북악산 - 경복궁 - 숭례문 - 관악산이 일직선이 되고 남산은 약간 비껴 앉음)이 조산(朝山)이 되어서 화마(火魔)를 피할 수 없게 되었기에 타오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대문에서  롯데호텔자리로 우회전 한 뒤 광교를 좌회전하여 종로쪽으로 돌아오게 옛 길을 냄으로서 화기를 피하게 했다. 또 경복궁 양 옆에 바다 속에 산다는 상상의 동물로 물기운을 몰아와서 불을 다스린다는 해태(해치)상을 세우고 궁궐 전각 모퉁이에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놀라서 도망가게 만든다는 거대한 방화용 '드므'를 설치하여 관악산에서 불어오는 강렬한 화기를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행상 불의 방위인 남쪽은 화기를 안고들어오는 방위여서 통상 자좌오향(子坐午向)에서는 오향(午向)의 문을 피하는 것이 원칙인데도 불구하고 걍복궁은 무리하게 북악을 주산으로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오향의 문을 내게 되었다. 이 후 이같은 연유로 조선 왕조는 무학의 예언대로 왕통은 왕후 적장자(嫡長子)인 대군(大君)이  왕위에 오르면 일찍 죽거나 반정이 일어나 뒤집어지곤 하여 적장자가 제대로 잇질 못하고 후궁 태생인 군(君)들이 등극하면서 왕실의 내우외환은 끊일 날이 없었고, 건국 초기 두 차례의 왕자의 난과 세 차례의 왕위 찬탈 및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대외침에 시달려야만 했었고, 종국에는 후손도 없이 27대 518년만에 망하는 비운을 겼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이 같은 불행의 연속은 경복궁을 지을 때 중국에서 주로 사용된 팔팔향진결(八十八向眞訣)이나 지리오결(地理五訣) 등의 향법풍수(向法風水, 註5))를 적용한 데서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중국은 풍수의 기본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중 기댈 수 있는 산이 없고 유장한 장강(長江)과 황하(黃河)로 인하여 해마다 물난리를 겪었기에 옛 요순시대 이래로 치수를 잘하는 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서 수나라 양제 이후 운하가 발달되었던 것인 바, 중국과 같이 산이 없어 산을 등질 수 없었던 평원지대서 우선시되었던 건 물길을 살피는 이기풍수(理氣風水)였기에 이를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는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중국 명, 청대의 황제궁인 자금성을 살펴보면, 비록 제왕남면 원칙에 따라서 궁궐을 자좌오향으로 앉히고 주산과 좌청룡·우백호를 가산(假山)으로 쌓았지만 가산으로는 진기(眞氣)가 흐르지 않는 관계로 지기가 오래갈리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註4, 한국 자생 비보풍수(裨補風水) : 우리나라 산천의 기운 중 허한 곳은 보(補)하고 넘치는 곳은 눌러준다는 우리나라에 자생한 고유 풍수로 고대 치우천왕(기원전 2707년 즉위) 때로 부터 그 기원을 찾으며 신라 말 고려 초의 도선국사가 이를 체계화시켰는 바, 그 실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강화, 고창, 화순 등지의 지석묘군(群)과 강릉 명주군왕 김주원의 능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이들 지석묘(고인돌)를 가보면 사신사(四神砂)가 뚜렷하며 산악과 평원을 구분 지은 비보풍수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이기법을 위주로 하는 중국 풍수는 고작 3000여년을 헤아리지만, 우리 고유의 자생 비보풍수는 50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에 이제 우리도 ‘중국사대주의 풍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 註5, 이기향법풍수(理氣向法風水) : 산이 적고 평원이며 장강과 황하의 범람으로 해마다 수해를 입었던 중국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또 치국의 요체이기도 했다. 때문에 장풍득수(藏風得水) 중 득수를 기본으로 발달한 것이 바로 이기향법풍수다. 

 

이 후,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왕실의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의 허한 곳곳을 또 다시 비보책으로 보강했던 바, 먼저 서북쪽(乾方)의 약한 물길을 가두기 위해 거대한 인공연못인 경회루를 조성하여 외국사신 접대 및 임금과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이용하였으며, 넓고 깊게 판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흙을 좌청룡이 약한 경복궁의 허점을 비보하기 위하여 현 민속박물관 쪽에서 약하게 내려오는 숨은 맥(隱脈)을 돋워 가룡맥(假龍脈)으로 이은 뒤 왕비 침전인 교태전 뒤에다 아미산을 조성했으며, 또 종묘 앞에도 이 같은 가산을 조성하여 야트막한 안산(案山)을 만들었다.

 

후 무슨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방원은 1417년 풍수지리를 관장하던 서운관을 없애버리고 비기도참서도 소각해 버렸는데, 이이러니칼하게도 풍수로 비보를 받으려고 획책했었던 왕조에서 비보를 해준 비기도참서를 토사구팽(兎死狗烹)격으로 소각했으니 그 끝이 좋을리가 있겠는가.

 

 그 결과, 도성 북쪽에 있다 하여 북궐로도 불린 경복궁(사적 제117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면서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그 당시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창덕궁(사적 제122호)과 별궁(別宮)으로 사용되던 창경궁(사적 제123호)도 함께 불탔으나 두 궁은 복구되었지만, 정궁인 경복궁은 재수없는 궁궐이라하여 27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다가 1867년(고종 4년) 왕권의 지엄함과 자기의 권세를 알리고자 기도했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의지로 원형보다 더욱 격식을 높여 복원되었고 이같은 무리한 경복궁 중건의 여파(註6)로 바로 망국의 길을 걸었다.

 

* 註6, 이하응의 경복궁 중건과 조선의 몰락: 이하응은 경복궁을 조성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매관매직도

          부족하여 당백전을 발행유통시키므로서 국고의 고갈로 인한 재정과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서 조선왕조는 당대(고종)에 몰락의 길을 걷기시작해서 그 아들 대인 순종 때 일본에 병탄합병(倂呑

          合倂)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런 경복궁을 좀 더 눈여겨보면 음양오행의 이치가 빠짐없이 적용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동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남방엔 광화문(光化門), 북으로는 신무문(神武門)을 세워 오행에 따른 배치를 하였다. 또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 뜰은 남성을 상징하는 철(凸)자로 튀어 나왔고 왕비가 잠을 자는 교태전 마당은 여성을 상징하는 요(凹)자 구조로 조성해 놓아 음과 양을 조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음을 상징하는 월화문(月華門)과 양을 상징하는 일화문(日華門)을 두어 음양이치에 따라 문을 배치하고 있기도 하다.

경복궁은 역사적으로 큰 변란을 겪은 굴곡의 현장이기도 하다. 어린 단종이 경회루에서 숙부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넘겨줌으로써 왕위를 찬탈당해 쫓겨나고, 시대를 앞선 개혁주의자 조광조가 중종의 친국을 받고 사약을 받았는가 하면, 연산군 때는 채홍사들이 조선팔도에서 차출해 온 300여 명의 여염집 규수들이 '흥청'이라는 이름 아래 경회루의 하루밤 버들이 되어 평생의 한(限)을 남김으로서 '흥청망청' 단어를 낳았던 곳이고, 일국의 국왕인 고종이 부랑자인 왜인 낭인들에게 두드려 맞고 왕후인 명성황후가 건청궁(乾淸宮)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에서 그들에게 시해되어 불탄 후 그 뼈와 재(灰)가 향원지와 그 옆 야산에 뿌려지는 치욕의 한을 남긴 현장이기도 하다.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궁안의 전각 4000여채를 헐어 민간에 방매하고 대궐의 존엄성을 훼손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는 정문인 광화문을 북쪽으로 이전해 버리고 근정전마저 완전히 가려 옛 모습을 인멸시켰다. 현재 경복궁은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사업이 다각적으로 진행 중이며 1968년 철근 콘크리트조로 세워졌던 광화문도 제자리를 찾아 복구되었다.

새로 복원된 청계천은 경복궁의 내득수(內得水)에 해당하며 동으로 흘러가서 외득수(外得水)인 한강수와 합류한다. 풍수적으로 내수가 우에서 좌로 기울며(右水倒左) 흐르다가 외수와 합쳐진 뒤 좌에서 우로 반전하여(左水倒右) 도성을 감싸 안는 국세는 참으로 귀한 명당길지지만, 광기(狂氣)서린 강한 북악의 기운 탓에 기가 강한 사람에게는 크게 흥복(興福)할 수 있겠으나 기가 약한 사람이 들어가 살 경우에는 오히려 이 기운은 크게 화(禍)가 되어 돌아갈 것이니 바로 이씨 왕조의 역대 왕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경복(景福, 註7)’이란 궁 이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것이다.

 

* 註7 '경복(景福)'에 관한 조선왕조실록 :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기를,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시경' 주아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의 만년을 빛나는 복을 빈다.’라는 시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을 누리시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합니다.” 하였다. ; 其景福宮曰 臣按宮闕…誦周雅旣醉以酒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請名新宮曰景福 庶見殿下及與子孫享萬年大平之業 四方臣民 亦永有所觀感焉 [태조실록 권제8, 9장 뒤쪽, 태조 4년 10월 7일(정유)]

 

 

(4) 경복궁의 각 전각들

 

조선의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은 크고 작은 건물인 전각만 390채에 대소출입문이 47개소로 규모면에서 5개의 궁궐 중 가장크다. 면적은 창덕궁이 크지만 궁궐크기는 면적을 기준으로 하지않고 전각 수와 부속시설 수자 그리고 조형물등을 기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덕궁은 일제시대 동물원을 개장하면서 주변을 포함시켜 면적이 현재에 이르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개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가) 궁성(宮城)과 문(門)

 

궁성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이른다. 경복궁의 궁성은 1398년(태조 7)에 동.남.서쪽이 조성되었으며, 이 때 궁성문인 건춘.광화.영추문도 세워졌다. 성종 때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북문인 신무문이 갖추어졌다. 궁성은 거의 네모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앞문 좌우 끝모서리에는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각루(角樓)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다.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에도 일반백성들로 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종 년간 경복궁 중건시 궁성이 새 단장을 하게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앞 부분이 헐러 나가고 또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어 쌓은 상태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경복궁의 정문으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정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나)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註8).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문은 임진왜란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에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시켰고, 6.25 동란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8년 박정희에 의해 원래의 것과는 다른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위치 또한 당시와는 다르게 복원되었으나 2007년 문화재청이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철거해체복원했다.

 

 

* 註8, 정도전의 설명: 다음은 원래 이 문을 광화문으로 이름 붙였던 정도전의 설명이다.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행하지 못하고 조작과 거짓으로 부탁하지 못할 것이며, 아뢰고 복명함이 다 이 문으로 들어와서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삼봉집 기09 경복궁, 정도전).

 

(다) 신무문(神武門)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라) 흥례문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상층간포는 도리통 어칸은 3구, 양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원래  널리 예를 편다는 뜻에서 홍례문(弘禮門)이였으나 경복궁 재건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歷)'의 '홍(弘)'자(字)를 피하고자 흥례문이라 개명하였다.  

 

(마) 영제교와 근정문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인 천록이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바) 건춘문(建春門)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동쪽은 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천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사)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

 

현존전각중 가장오래된 곳인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에 측면 5칸인 다포계 팔작 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1395(태조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정도전이 ‘왕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근정전의 이름을 지어올렸다(註9).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867년(고종4년)에 재건되었다. 근정전은 조선 시대 궁궐의 법전 가운데 유일하게 상월대와 하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복을 가져다 주는 돌짐승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瑞獸)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붕이 문양으로 장식된 청자기와로 지어져서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용 2마리를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 註9, 이름의 유래: 다음은 근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한 것만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하게 봉양하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아) 사정전(思政殿)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근정전의 뒷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삼봉집 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자) 강녕전(康寧殿)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 지붕이다. 용을 상징하는 왕의 침전이므로 용위에 또 다른 용이 없기에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다음은 정도전의 설명이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차) 교태전(交泰殿)과 아미산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령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령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아미산에는 굴뚝이 세워져 있다. 보물 제811호인 아미산(峨嵋山)의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카) 수정전(修政殿)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타) 경회루(慶會樓)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연을 베풀던 곳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들이 있다. 방지의 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자리엔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경복궁 재건시에 경회루도 중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 연산군 때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흥청망청 놀다가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곳이기도 하다.

초창기에는 태조가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다락집이었으며, 1412년에 태종이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여 지금의 경회루의 모습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현재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청동으로 제작된 두 마리의 용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 자경전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인 자경전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1867년(고종4)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지은 전각으로, 두 번에 걸친 화재로 불탄 것을 1888년(고종25)에 다시 지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국화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자경전의 굴뚝에는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는데 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14) 집경당(緝敬堂)

 

아미산 북쪽에 침전에 속하는 흥복전(興福殿) 등이 있었다. 40칸 크기의 흥복전, 51칸 반 규모의 광원당(廣元堂)을 비롯하여 10칸의 다경각(多慶閣), 28칸의 집경당(緝敬堂), 17칸의 함화당(咸和堂), 18칸의 영훈당(永熏堂)이 있었고, 집경당 북쪽에도 여러 전각들이 향원정(香遠亭)을 가운데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 그 일곽의 전각과 행각은 다 없어지고 집경당과 함화당만이 남아 있다.

 

(15) 향원정(香遠亭)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으로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으로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6) 건청궁(乾淸宮)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에 지어졌으며, 1909년이전에 철거되었다가 복원되어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보낸 50여 명의 일본낭인들에게 일국의 국왕인 고종이 두들겨 맞고 그 왕비인 명성황후의 옥호루에서 시해되어 불태워진 후 뼈와 재가 향원지에 뿌려진 치욕의 현장이다. 이들이 난입했을 때 궁내부 대신인 이경직이 팔로 막아서자 낭인들이 양 팔을 짤라서 죽였다고 한다.  이 때 민비는 시녀들 옷으로 갈아입은체 시녀들 속에 숨여 있었다고 한다. 통상 잘 생기고 잘 차려입은 여자가 왕비일거라고 생각한 낭인들이 잘 생긴 여자를 죽였지만 이내 왕비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시녀들을 불러내어 "왕비가 누구냐?" 고 물은 후 대답을 하지 않으면 찔려 죽었다. 세번째 시녀가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민비를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낭인들이 살해하였다고 전한다. 이 후 왜인들은 민비의 시체에 석유를 뿌리 후 불을 질러 태웠고, 타다 남은 뼈는 건청궁 좌측 언덕에 묻었고 재는 건청궁 앞에 있는 향원지 연못에 뿌렸다.
 
(17) 집옥재(集玉齋)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집옥재의 현판은 송대의 천하명필인 원장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붙였는데 보고 또 봐도 명필이다.

 

(18) 태원전(太元殿)

 

태원전(太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19) 자선당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 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 빈이 살았다.

 

(20) 비현각(丕顯閣)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이다.

 

(21) 잡상(雜狀)

잡상이라하면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로 만든 장식기와이다

잡상은 주술적 의미를 지니므로 홀수로 구성되며, 잡상의 형태는 마지막형상은 세지 않는다, 근정전의 잡상 숫자도 마지막 큰 모양은 세지 않아야 7개가 된다. 원래 중국에서 잡상은 황제가 있는 건물은 11개, 태자가 있는 건물은 9개, 기타는 7개 이하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회루와 근정전의 잡상 숫자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단순히 기와지붕의 크기 차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신무문

 

흥례문

.

흥례문
 

영제교

근정문

 

 
근정문

 

 

 

사정전

 

 
강녕전

 

 

수정전

경회루

 

 교태전

아미산

 

자경전(慈慶殿)

향원정(香遠亭)

 

건청궁

집옥재

태원전

자선당

비현각
 

 

 

 

근정전 잡상(7개)

자선당 잡상((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