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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新韓國痛史

1. 한국사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하의 역사였다.

 

  삼국사기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서는 모두 다 자기부정과 자기비하의 바탕 아래 기록된 역사서다. 우리민족 최고의 正史라는

삼국사기조차도 유학에 바탕을 둔 사대주의자인 金富植이 사대주의적 유학자의 눈으로 본, 그리고 유학자의 입맛에 맞는 것들만을 기록한 역사책이기에 사대모화에 반하는 우리의 上古史는 생략한채 삼국시대 이후만을 한국의 역사라고 규정짓고 삼국시대 이후부터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시정코자 民衆과 불교적 눈으로 본 사실들을 상고시대부터 기록한 僧 一然의 '三國遺史'는 허황하다는 이유로 正史에서 배척된 채 단지 野史로만 인정되고 있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후 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의 방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월탄 박종화선생이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勝者의 기록은 햇빛을 받아서 역사가 되었고, 敗者의 이야기는 달빛을 받아서 傳說로만 남아" 구전되면서 마치 지난날의 뜬구름인양 민중에 회자되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이들 기록 또한 이긴자의 입맛에 맞게 기록되었으니 황제의 나라였던 고려를 군부 쿠데타로  뒤집고 스스로 제후국으로 國格을 낮추어 자기비하를 시킨 후 제 스스로 明을 上國으로 섬기는 屬國이 되었던 고려의 逆臣이자 민족의 반역자였던 못난 이성계가 이끌었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그에게 세뇌된 조선 유생들의 사대모화가 온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사대모화적 사고, 즉 三國史記的 思考를 벗어나지를 못한채 곳곳에 자기부정과 자기비하로 점철되었다.

 

조선조 末,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으로 日帝가 조선을 倂呑한 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자기부정과 자기비하적 한국사관, 소위 식민사관을 심는 것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기존 역사에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 훼손시키는 것이였다. 광개토대왕비 훼손과 사색당쟁의 부각이 그 실례의 일부이다. 여기에 고조선 등의 상고사를 논거가 없다는 해괴망측한 주장을 하면서 부정시킴과 동시에 일부 왜놈 사학자들이 주창했던 존재하지도 않았던 임나일본부설을 용인하고, 또 요동땅에 있었던 한사군 등을 마치 평양 인근에 있었는 양 호도하면서 후진 사학도들과 어린학생들에게 터무니없이 주입교육시켰다.

 

1905년 이후 이를 통탄히 여기면서 이같은 왜곡과 자기부정을 바로잡고자 丹齋 申采浩선생이 '조선상고사'를, 또 1915년에는 朴殷植선생이 한문으로 쓴 '韓國痛史'를 써서 우리나라가 아닌 머나먼 이국땅인 중국 땅 上海에서 출판하면서 왜곡과 훼손된 사실들을 바로 잡고자 했지만, 일제 앞잡이 식민사학자들에 의해서 부정 혹은 무시되고 따돌림 당하면서 급기야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남아야 했다.

 

해방 후, 일본으로 유학을 하거나 국내 京城帝大 등지의 소위 엘리트 코스에서 일본식 식민사관으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소위 학국사학계의 泰頭라 불리웠던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通史(1970, 을유문화사 간)를 지었던 한우근, '한국사新論"을 지었던 이기백 등이 경성제대(현 서울대)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사학계와 교육계를 주름잡으면서 자기들이 배웠던 소위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를 裁斷하면서 그 반대되는 주장들은 '근거가 없다'거나 혹은 '논리가 부족하다'는 등의 주장하에 상고사를 배척하고 왜인들이 주장했었던 사대주의에 바탕을 둔 삼국사기류의 자기부정,자기비하적인 역사교육을 전개하면서 자기들만의 아성을 쌓은 후 이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배척.퇴출, 왕따시키게 되니 자연히 이들로 부터 역사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은 자기부정적이고 자기비하적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5천년 역사에서 전설적 역사인 삼황오제시대를 논거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엄연한 사실로 주장하면서 교육시키고 있고, 심지어 한국의 상고사를 논거가 없다고 부정했었던 왜놈들 조차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놈들의 역사책인  '書記'에 달랑 몇줄 나오는 것을 가지고설랑 마치 태양신 천황의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인양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우리의 上古史는 중국책인 '漢書', '한서 魏誌東夷傳', '한서 지리지', '후한서', '史記'와 우리나라의 역사책인 '환단고기', '아방강역고', '제왕운기', '태백일사',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에 분명히 나와 있고, 또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며, 고려 때 중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아주 상세하게 나올 뿐만이 아니라 북경인근 탁록(쥬신제국의 치우천황과 중국의 황제 헌원과의 전투 장소)과 요동 및 만주벌판에서 그 흔적들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중공 당국의 끈질긴 말살시도와 훼손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당하게도 논거가 없다거나 논리가 부족하다면서 이를 부정,격하시키고 있다. 대저, 상고사를 이토록 정확하게 기록하여 남긴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보다도 그 당시에 우리나라처럼 기록으로 남길만한 문자(가람토문자)라도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남아 있었다는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지구상에서 어느나라가 이처럼 좋은 기록들을 남길 수 었었단 말인가? 상황이 이와같은데도 불구하고, 또 엄연히 유적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것은 부정 혹은 비하시켜 역사를 왜곡하거나 축소시키고 남의 것은 그대로 인정하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제정신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설도 역사다. 전설은 글자 그대로 전설일뿐, 이를 부정할려고 하지 말고 그 자체로 역사의 한페이지로 인정하면 된다. 어차피 그 누구도 그 당시에 살아보지 않았는데,  자기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史實이 '아니다', 혹은 '없다'라고 하면 안된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을 봐라.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하면서 까지 사실화, 美化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있는 사실까지도 부정할려는 그 부정적이고도 자기비하적인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모두 왜놈들이 인위적으로 만들고 세뇌시킨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일제 때 일본식 식민사관으로 교육받았던 사학자들과 그들의 문도들은 역사학계와 敎育界에서 떠나야 나라가

   바로 서고 민족정기가 되살아 날 것이다.

 

 그래서 이를 바로 잡으려면, 이같은 史觀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는 자들, 즉 왜정시대 때 식민사관으로 이같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 모두 사학계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즉 일제 때 일본식 식민사관으로 교육받았던 사학자들과 그들의 門徒들은 역사학계와 敎育界에서 떠나야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똑 바로 알려지면서 나라가 바로 서고 민족정기가 되살아 날 것이다.

 

 사물을 보는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긍정적 눈으로 보면 긍정적인 면만 보이고, 부정적인 눈으로 보면 부정적인 면만 보인다. 李朝 開國 初에 無學이 李成桂란 者에게 弄으로 했다는 말이 바로 정답이 될 수도 있겠다.

무학이 이성계에게 "대사는 살찐 돼지처럼 보인다"라고 하자, 무학이 대답하기를 "王은 부처처럼 보인다"라고 했다. 이에 無顔해진 이성계가 무학에게 말하기를 "나는 대사에게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어찌 화를 내지 않고 나를 부처라고 하시는게요?"라고 하자 무학이 말하기를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여서 그렇습니다."라고 무안을 주었다고 한다.

 

식민사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논거가 없다"거나 혹은 "논리가 부족하다"라고 우기는 植民史學者들이여,

제발 돼지가 되지 마시고 부처가 되어 사물의 眞面目 즉 사물이 가지는 양면성을 똑바로 보기를 부탁드린다.

그래서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이 한국사를 똑바로 배워 나라가 똑바로 서고 민족정기가 되살아 나기를 학수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