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hylloxera란?
포도나무의 뿌 리에 기생하면서 포도나무를 파괴시키는 곤충을 이름. 1860년 미국에서 건너와 프랑스 포도원의 3/4을 파괴시켰으며, 그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현재까지도 이 균을 박멸시킬 치료법은 없다. 다만 이 균에 저항력이 있는 미국산 포도나무에 접목하여 이 균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이 균의 변종이 잠깐 나타나기도 했었다.
2. 프랑스인들의 불편한 진실
형태는 초파리를 닮았고, 애벌레 때는 마치 조그만 번데기 같은, 이 양자 모두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곤충인 파이록셀라는 주로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면서 그 즙을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3. 남미가 감염되지 않은 이유
일부인사들은 남미가 파이록셀라에 감염되지 않은 이유를 기후가 서늘하여 파이록셀라가 활동하는데 적합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안데스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병충해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이 타당한 근거를 가질려면 아래의 두가지 요소를 충족해야만 한다.
먼저, 남미산 포도나무들이 파이록셀라에 오염되기 훨씬 이전부터 토착적으로 남미지역에 자생하고 있을 경우이고,
두번째는 1860년대 이전부터 스페인 정복자들이 포도나무를 남미지역에 가지고 가서 심었을 경우인데,
이 양자 모두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토착적 포도나무는 어느나라나 있겠지만, 카베르네 쇼비뇽이나, 피노누아, 쉬라 등의 품종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품종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유는 이같은 포도품종들은 처음부터 이 지역에 자생했던 것이 아니라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의 점령자들이 가져가서 심었을 확률이 많으며, 그것도 한 참 후대에 심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이 남미대륙을 처음 발견진입했던 것이 1400년대에서 1500년대인데, 이 당시부터 포도주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포도주가 이 지역에 등장한 것은 잉카제국을 멸망(주1)시킨 훨씬 이후라고 보여지기에 이 지역에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유럽지역의 포도나무가 파이록셀라 감염에 의하여 황폐화된 후 그 대안으로 신대륙으로 옮겨가 심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주2).
* 註 1. 남미 지배사 :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부스(1451?-1506)가 1492년 지금의 서인도 제도 산 살바도르 섬에 와서 비로소 남미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네 번에 걸친 탐험에서 쿠바, 하이티, 자마이카, 도미니카와 중남미 일대를 발견했다. 그 후 많은 유럽사람들이 아메리카대륙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남아메리카는 이태리의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가 발견했다. 상인이자 탐험가이며 항해가인 베스푸치는 1497년부터 1504년까지 스페인 왕과 포르투갈 왕의 후원으로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의 동쪽해안을 탐험했다. 눈을 동쪽으로 일찍 돌린 포르투갈 왕의 후원을 받은 후반기 탐험에서 그는 브라질해안과 리오 데 자네이로와 라 플라타 강을 발견했으며 그 남쪽까지 항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발견으로 사람들은 그가 새로이 발견한 곳이 아시아의 일부가 아닌 이른 바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대륙”이란 발견한 사람의 의견이지, 그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주지하다시피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유럽사람들이 왜 세계를 탐험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양념 때문이다. 그들이 11세기에 들어 짐승의 고기를 주식으로 하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고기의 냄새를 없애고 맛을 내는 후추, 계피, 정향 같은 양념과 향신료였다. 그런 양념과 향신료는 주로 열대지방에서 나온다. 당시 지중해의 제노아 같은 이태리의 항구도시국가들은 열대동양에서 조금씩 들어오는 향신료를 유럽의 다른 나라에게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보았다. 게다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고 영국은 섬나라라, 향신료 값이 아주 비쌌다. 이에 화가 난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가, 브라질을 발견하고 인도네시아인 동인도에 도착했다. 그러자 스페인은 서쪽으로 가, 콜럼부스가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를 발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가 인도에 왔다고 믿었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인도와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인도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Indian)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6세기 황금을 찾아 중앙아메리카대륙을 개척하던 유럽사람들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의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드디어 스페인의 정복자이던 바스코 뉴네즈 데 발보아(1475-1519)는 인디언들과 함께, 유럽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파나마지협을 넘어가 1513년 9월말 그 바다를 발견했다. 그는 그 바다에 씻기는 모든 해안을 스페인왕의 영토로 선언했다. 그 선언대로 하면 남북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발견되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스페인의 영토가 된다. 그 때는 사람들이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주인 없는 땅을 발견하면 자기네 땅으로 하던, 이른 바, “발견하는 시대”였다.
황금을 찾던 발보아는 마젤란보다 먼저 태평양을 발견했으면서도 태평양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한 것은 콜롬부스의 아메리카대륙발견 다음으로 위대한 발견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공적이 있는 데에도 본국으로 쫓아 보낸 무능한 부하의 사악한 계교로 반역자로 몰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했다.
마젤란은 엄청난 고생을 했다. 실제 피가페타가 “우리가 먹은 비스킷은 빵이 아니라, 비스킷을 파먹은 벌레가 섞인 가루였다. 게다가 쥐 오줌으로 절어 도저히 참지 못할 지독한 냄새가 났다. 우리가 마신 물도 비슷하게 더러웠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넓은 곳을 덮은 소가죽 조각을 먹어야했다....보통 우리는 톱밥을 먹었고 쥐까지 잡아먹었다....쥐 한 마리 값이 반 두캣이었다”라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괴혈병을 극복하지 못해, “태평양을 지나는 석 달 20 일 동안에 19 명이 죽었고 25 명이 병으로 고생했다”고 그들의 고생과 죽음을 생생하게 남겼다. 그 때만 해도 괴혈병의 원인을 몰라, 항해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괴혈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을 때였다.
백인이 저지른 죄악---노예제도--포르투갈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일찍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먼저 포르투갈 사람 또는 포르투갈 왕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은 15-16세기에 걸쳐 아프리카 서해안(1441년)과 희망봉(1488년)과 인도(1498년)와 브라질(1500년)을 발견하여, 포르투갈은 영향력을 넓혔던 것이다. 당시 아프리카대륙을 발견한 포르투갈은 후추, 상아, 황금을 약탈했고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오늘날 중부 아프리카 서해안에는 후추해안,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으로 아직도 그 때의 이름이 남아있다. 상아해안은 나라가 되어 나라이름도 “상아해안”이다.
노예이야기를 좀 더 하면, 포르투갈의 일부 악한 백인들이 1444년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스페인, 영국, 프랑스, 화란사람들도 흑인을 노예로 팔았다. 두 손을 묶이고 앞뒤의 사람과 함께 목과 발목을 각각 나무틀과 족쇄로 연결돼 끌려오는 흑인들의 그림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브라질을 발견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하여 1530년부터 당시 포르투갈지배에 있던 서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을 데려다 노예로 썼다. 또한 많은 노예들은 브라질에 많았던 황금과 보석을 캐고 고르는 광부로 일했으며 담배와 커피농장에서도 일했다. 다음에는 흑인들은 카리브 해로 많이 팔려갔다. 노예로 잡힌 흑인들은 대략 반 정도가 브라질로 팔려갔으며 카리브해 지역으로도 반 정도가 갔다.
15-16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의 강국이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같은 식민지에서 엄청난 황금과 순은이 흘러 들어오면서 엄청난 부와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와 독일은 신-구교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탈리아는 터키와 전쟁하기에 바빴다. 영국의 해군력은 아직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드디어 영국이 세계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바로 드레이크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1588년에 깨뜨려 스페인의 제해권을 뺏고 영국이 세계역사에서 강자로 떠오르는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18세기 들어서, 세계최강국인 영국을 중심으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노예제도를 금지하도록 요구했다. 실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1807년을 전후해 노예를 수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영국은 노예를 썼던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1834년에 노예 75만 명을 해방했다. 프랑스와 스페인도 이어서 노예를 해방했다. 약 40만 명에서 50만 명의 흑인을 노예로 썼던 미국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노력으로 1863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브라질은 영국의 요구로 1826년 노예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영국과 약속했으나 1853년까지 노예를 수입했다. 브라질의 노예제도는 오래 계속되어 노예제도가 끝난 것은 1888년으로 근대사회에서는 마지막이다. 브라질에는 흑인이 아주 많은 것 같아도 실제는 400만-500만 명 정도로, 주로 도시에서 살면서 카니발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어, 많다는 인상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나라 라이베리아 (Liberia)는 노예로 끌려가던 흑인들이,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서 이겨, 자유를 찾아 세운 나라로 “자유”를 뜻하는 단어 “(liberty)"에서 나라이름이 나왔다!
노예제도를 일찍 반대한 영국은 자신의 해군배로 노예선을 붙잡기 시작했다. 1829년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갔던 영국 해군의 전함 “블랙 조크”호도 그런 배였다. 노예선은 대개 겉은 상선처럼 꾸몄으며 대단히 빨랐으며 선장과 선원들은 도둑놈이고 불한당이었다.
영국의 노력이 있었지만 노예수입이 끝날 때까지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3,000만 명의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들어왔다. 노예로 잡힌 흑인의 1/6은 항해 중에 죽고 나머지의 1/3은 길드는 동안에 죽었다. 노예제도는 백인이 인류사에 저지른 가장 참혹한 죄악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해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서 원주민을 도살(屠殺)한 것이다.
노예를 오래 쓴 브라질---브라질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식민지로 도망갔던 포르투갈의 왕자가 세운 나라이다. 그가 1822년 혁명을 일으켜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독립했다. 그가 황제 돔 페드로 1세가 되었으나 우루과이를 놓고 아르헨티나와 분쟁을 일으켰고 통치력이 없어 다섯 살인 아들에게 1831년 양위했다. 또 지방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나라가 뒤숭숭했으며 의회가 1840년까지 섭정하다가 열네 살인 황제 돔 페드로 2세에게 양위했다. 돔 페드로 2세가 1889년 브라질이 공화국이 될 때까지 통치했다. 브라질이 넓이 851만 km2에 인구 1억4천만 명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이다.
포르투갈이 식민지이던 브라질을 개발하느라 많은 아프리카 흑인을 데려다 노예로 썼다는 것을 위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브라질이 독립한 뒤에도 경제를 지탱하던 담배와 커피를 재배하고 금광을 채광하는 데에 많은 노예를 동원했다. 지금 있는 흑인들은 그 노예들의 후손이다.
“리오 데 자네이로”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2년 1월 1일 발견했다. 그가 리오 데 자네이로를 큰 강의 하구(河口)로 생각해 “1월의 강”이라는 뜻으로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는 그 곳은 만(灣)으로, 리오 데 자네이로 시는, 로스 안젤레스 같은 큰 도시와 함께, 강이 없는 세계에 있는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리오 데 자네이로는 1565년에 건설된 도시로 나폴리와 시드니와 함께 세계 3 대 아름다운 항구의 하나로 1822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다. 실제 리오 데 자네이로는 만의 안쪽에 발달한 섬과 연갈색 해안과 푸른 하늘과 연두색-초록색 바다가 조화되어 정말 아름답다. 리오 데 자네이로에 솟아있는 산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었다. 예수가 두 팔을 벌린 상이 서있는 코르코바도(Corcovado) 언덕도 화강암으로 된 높이 710 m인 산이다.
악명이 높았던 영국의 해적----15세기만 해도 세계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위치를 측정하는 장치가 불완전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새로 발견한 영토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각 개척할 수 있도록 지구를 둘로 나누는 토르데시아스(Tordesillas) 조약을 맺게 했다. 이 조약에서 브라질을 넣어 남아메리카의 동쪽을 지나는 서경 46°에서 브라질-아프리카-인도-아시아의 우리나라의 동해를 지나가는 동경 134°까지는 포르투갈 몫으로, 나머지 지역은 스페인 몫으로 정했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이 일찍 일본에 와 조총을 전파해, 일본이 임진왜란에 조총을 썼다.
그러자 그 조약에서 배제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그 결정에 반발해, 알게 모르게 해적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해 황금과 보석과 향신료를 얻기보다는 그런 것을 싣고 오는 배를 공격하는 게 쉬웠을 것이다. 해적들은 보물선도 공격했지만 항구도시를 습격해 악명이 아주 높았다. 또 해적들이 새로운 섬이나 땅을 발견해 자국의 영토로 선언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화란이 자기네 나라와 먼 곳에 식민지가 많았고 그들이 발견했던 섬이 많았던 것은 바로 해적들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지금 역사에 남은 유명한 발견자나 항해가에는 해적출신이 많다.
당시 해적이 없던 나라, 예컨대 칠레 같은 나라의 학생들은 영국선장은 나쁜 사람이라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떤 칠레할머니는 영국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과 한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자 “내 평생에 영국사람과 같은 방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것이냐”라고 이야기했다. 그 칠레할머니는 어렸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영국 놈!”소리만 듣고도 귀중품을 싸들고 산 속으로 도망갔던 적이 두 번씩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16-18세기에 발호한 영국해적들의 악한 소행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오래 전 한 영국해적은 성모 마리아 상을 훔쳐 갔다가, 다음 해 성 요셉상도 가지러 와, “이 여자가 남편이 없어 불쌍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오래 전에 있었으나 칠레사람들이 1835년경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해적들의 만행은 유명했다.
피사로는 개를 가져오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시 일부 정복자들은 개를 가지고 와 원주민들을 공격했다. 사람이 사나운 개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정복자이지만 너무 잔인했다. 다음에는 선교사가 성경을 내어놓고 기독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지금은 다 잊히고 잊었지만,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기도를 매일 드리는 인간이, 종교를 빙자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고 포악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섬뜩하다.
당시 잉카족들의 무기는 돌이나 구리로 만든 도끼와 방망이로, 스페인군의 무기보다 훨씬 약했다. 또한 잉카족은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를 발명하지 못해, 왕을 가마에 태우고 다녔다. 잉카족들은 안데스산맥의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다시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나 1572년 영원히 사라졌다. 잉카족이 스페인군대에게 멸망당하면서 현재 페루 국민의 1/3이 스페인-원주민의 혼혈, 이른 바, 메스티조(mestizo)이며 천주교국가가 되었다.
잉카 족이 피사로에게 1531년에 정복당했지만 그 전에는 콜롬비아에서 칠레까지 안데스산맥의 능선을 따라 16,000 km의 도로를 건설해 곡물과 섬유 그리고 양털과 보석과 금은세공품을 날랐다. 그 도로가 로마사람이 건설했던 도로보다 더 좋다. 칠레중부지방인 탐비요스가 잉카제국의 남쪽 경계선에 가까운 곳으로 근처에는 잉카 족이 건설했던 포장도로를 볼 수 있다. 탐비요스에서는 1980년대에 잉카 초소 세 곳을 발굴했다.
쿠스코나 마추 픽추의 석조건물들은 면도날도 들어갈 틈이 없다. 잉카 족들은 바위에 구멍을 뚫고 나무를 박은 뒤 물을 부어 바위를 깨뜨렸다. 바로 나무가 물을 먹고 늘어나는 현상을 이용했던 것이다. 또 바위 위에 모래를 놓고 그 위에 바위를 놓아 매끈하게 갈았다고 한다. 모래는 대개 아주 딴딴한 광물들의 알갱이이므로 바위를 간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작은 바위는 수 톤이지만 큰 바위는 수십 톤이 넘는다. 그렇게 큰 바위를 어떻게 가져다 쌓아올렸는지는 정말이지 신기할 뿐이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수 천 년 전 흑요석으로 만든 돌칼로 두개골을 절개해 뇌수술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수술을 하려고 절개한 뼈가 치유된 것으로 보아, 수술 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의술이 그렇게 발달했어도 그들이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문명이 발달하는 데에 이해하지 못할 역설이다. 그들은 왕을 가마에 태우고 메고 다녔고 걸어 다녔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그 때는 말이 남아메리카에 없었다.
스페인군은 쿠스코를 정복한 뒤, 잉카족들로 하여금, 잉카신전들의 윗부분을 헐어내고 성당들을 짓게 했다. 잉카족들은 목숨이 아까워 그렇게 했겠지만, 그 설움과 고통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2001년 12월 우리를 안내했던 쿠스코에서 태어났고 자라난 페루여자 안내인이 그런 말을 하면서,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여자의 눈과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조상들이 수 백 년 전에 당했던 설움과 비통함을 지금까지 잊지 못했던 것이다.
잉카 왕은 아일랜드 사람?---마추픽추는 신비한 곳이다. 아래서는 보이지 않고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외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비밀도시이다. 물도 산에서 흘러 내려오며 주민을 먹여 살릴만한 식물도 재배할 수 있다. 실제 와이누 픽추(Huaynu Picchu)봉은 꼭대기까지 계단모양으로 밭이 있다. 물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좁은 길도 건설되었다. 마추픽추가 발견되었다 하드라도 바깥에서 공격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인골을 연구한 결과는 자못 흥미롭다. 인골에서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1: 10으로 여자가 절대로 많았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마추픽추가 누스타스(Nustas), 곧 “태양 처녀(Virgins of the Sun)”들을 보호하던 곳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태양 처녀란 처녀들 가운데서 “뽑힌 여자”들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거나 옷감을 짜거나 궁녀의 구실을 했던 여자들로 쿠스코에만 3천 명이나 있었다. 스페인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 처녀들을 마추픽추로 보내어 보호했다는 뜻이다. 마추픽추에서 잉카왕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 가는 길도 있으며 쿠스코 이전의 수도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잉카족, 곧 페루원주민들은 동양인의 얼굴에 붉은 피부에 빳빳하고 검은 머리카락에 몸이 퉁퉁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그들이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를 지나 남아메리카에 정착한 인디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잉카족의 전설을 따르면 잉카족은 최초의 잉카인 망코 카팍(Manco Capac)의 후손들이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에 수염이 난 사람으로 서기 4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세 동생과 그들의 부인과 함께 티티카카 호수에 나타났다고 한다. 망코 카팍은 그들의 아이를 가르치라고 하느님이 보냈다고 사람들에게 선언했고 그것이 잉카제국의 시작이다.
잉카족은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라 아일랜드 선교사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피사로가 잉카왕 아타후알파와 그의 가족을 잡은 다음 쓴 글을 보면 “그들은 스페인사람보다 피부가 더 하얗다”는 글귀가 있다. 또 금세기 초에 북서아르헨티나에서 스코틀랜드 고지사람인 게일(Gael)인이나 아일랜드계 켈트족이 쓰는 순순한 언어를 쓰는 인디언들이 발견되었다. 그 인디언 가운데는 아일랜드계 켈트족처럼 푸른 눈과 붉은 수염이 난 사람들이 있었다. 또 나스카 미라 가운데는 붉은 머리칼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잉카족이 거대한 석조건물들을 지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들은 단지 발견만 해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만약 후자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그 거대한 석조건물들은 누가 지었을까? 혹시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 고립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이 원주민들에게 쫓겨 안으로 달아나 그들만의 왕국을 지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들이 쿠스코를 부근에서 떠돌던 인디언들에게 넘겨주고 난공불락의 도시를 지었을까?
거대한 거인들이 쉽게 건물들을 지었으나 인디언들에게 쫓겨 북쪽 멕시코로 갔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그들은 북아메리카 남서쪽까지 올라갔다가 아파치족에게 동화되었다고 한다. 아파치족의 전설에서는 그들이 지은 거대한 석조건물과 계단식 밭이 나온다. 아파치족의 일부는 멕시코로 들어가 아스텍 문명을 건설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 슈족에게도 거대한 석조건물을 지었던 번개새(thunderbird)에 관한 전설이 있다. 아마도 남아메리카에서 올라간 부족의 이야기가 그 전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번개새는 다 알다시피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설에 나오는 거대한 새로 천둥, 번개, 비의 신이다.
리마는 “왕들의 도시”---페루(Peru)라는 이름은 페루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피사로와 그의 부하 열세 사람이 비루(Viru)라는 강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멸망시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런데 불만을 품은 친구와 그 부하들을 동생이 죽이면서 비극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피사로는 친구의 부하들에게 1541년 6(7?)월 26일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가 죽는 순간의 장면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피로 땅바닥에 십자가를 그리고 십자가에 입을 맞추면서 “예수님”하고 울부짖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조금 다르다. 그가 공격당해 쓰러지자, 천주교신자가 하듯이, 십자가를 그리듯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하느님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공격자가 “지옥에서! 지옥에서나 용서를 빌어라!”라고 소리치면서 물이 가득 담긴 큰 물병으로 머리 위를 내려쳐 그의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피사로 자신도 죽을 때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자신이 죄가 많다는 것을 알았는가?
리마는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할 당시의 본부가 있었던 도시로 “왕들의 도시”라고 불렸다. 바로 프란시스 피사로가 리마를 1535년에 건설하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는 대통령 격인 왕은 스페인에 있었고 리마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부통령 격인 부왕(副王)이 얼마 동안 있었다. 리마는 남아메리카에서는 가장 역사가 길고 문화가 발달한 도시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페루의 정권이 혁명으로 자주 바뀌면서 페루는 지금은 낙후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리마에는 잉카의 황금박물관 같은 박물관들과 훌륭한 성당들이 많아 과거의 영화를 보여준다.
남아메리카가 독립하기 전 페루의 수도인 리마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서해안 개척을 지휘하는 중심지가 되면서 페루가 상당히 늦게 독립했다. 그것도 페루국민의 노력보다는 외부에서 도와주었다. 곧 아르헨티나 산 마르틴(San Martin)장군과 콜롬비아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 장군이 지휘하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연합군이 협력했다. 영국인도 개입했다. 예컨대 영국 해군출신인 코크라네 경이 지휘한 칠레함대가 산 마르틴 장군이 지휘한 군인들을 페루로 수송했다. 페루가 독립한 1825년 첫 해를 볼리바르가 통치했으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 페루에는 권력암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볼리비아(Bolivia)는 볼리바르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아르헨티나는 2차 세계대전 전 만해도 상당한 부국이었다. 그러나 대전 후에 빨리 변하는 국제추세에 부응하지 못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농업국으로 남아있어 이제는 남아메리카에서도 첫째 자리를 놓쳤을 뿐더러 가장 형편 없는 나라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에서 가까운 남아메리카 동쪽에 있어 유럽사람들이 일찍 왔다.
“은(銀)”이라는 뜻의 라 플라타 강과 아르헨티나---라 플라타 강은 진흙이 섞여서 누렇게 보이며 파라냐 강과 우루과이 강이 만나서 흘러내리는 강으로 하구에서는 폭이 200 km 가까워 강보다는 바다라는 생각이 든다. 넓이는 경상남도의 세 배 정도인 35,000 km2이다.
라 플라타 강을 발견한 스페인의 항해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1516년 강의 입구에 와서 처음에는 그 곳이 바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맛이 짜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거대한 하구라고 생각하고 더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동료들은 상륙했다가 배에서 빤히 보는 가운데 원주민들에게 잡혀 먹혔다고 한다.
스페인사람이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 상륙한 것은 1537년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공기가 좋다”는 뜻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맑은 공기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건설하면서 인디언들과 충돌했다. 그 때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말이 들어오기 전에는, 주요한 무기의 하나로 활을 썼다. 이런 사실을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건설될 때였던 1541년에 있었던 께란디스(Querandis)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전투장면을 그린 쉬미델의 그림들을 보아 알 수 있다. 위의 싸움에서 스페인사람들이 쫓겨갔고 건설초기에 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파괴되었다. 스페인사람들은 1580년에 다시 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건설했다.
스페인사람들이 말을 가지고 오면서 인디언들은 말을 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는 명중률이 떨어지는 활을 쓰지 않고 주로 추조와 볼라를 쓰기 시작했다. 추조(chuzo)는 창이며 볼라(bola)는 주먹 크기의 돌 두 세 개를 쇠가죽 끈으로 묶은 것으로 목표에 던지면 감겨서 목표물이 쓰러진다. 이 무기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퓨마, 말, 소, 타조를 잡는다. 남아메리카에는 두 종류의 타조가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일대 팜파스지방에 있는 타조가 더 크다. 반면 다음에 이야기할 파타고니아에 있는 다윈 타조가 좀 작다.
“라 플라타 (La Plata)”는 스페인어로, 흔히 생각하듯이, “백금”이 아니고 “은(銀)”이라는 뜻이다. “아르헨티나(Argentina)”도 라틴어로 “하얗고 반짝거리는”, 즉 “은”이라는 뜻의 아르젠툼(argentum)에서 나왔다. 1526년부터 1529년까지 파라냐 강과 파라과이 강을 발견한 탐험가 카보트가 아르헨티나에 은이 많다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면서, “라 플라타”와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은은 금에 못지 않은 귀금속이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은값이 떨어졌다. 일종의 은값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지하자원개발보다는 목축업과 농업이 발달한 나라이다.
아콩카과 산---아르헨티나가 1816년 스페인한테서 독립한 뒤에도 한 동안 불안했다. 그러나 일단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사람이 19세기 초반에 나왔다. 그가 후안 마누엘 로사스(Juan Manuel Rosas)장군이다. 그가 179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부유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 가우초처럼 살았다. 그가 인디언을 몰아내는 데 공이 커, 1835년부터 1852년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총독이자 아르헨티나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1852년에 축출돼 영국에서 망명하면서 1877년 생을 마쳤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가 아르헨티나를 통일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결국 독재자가 되어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지원을 받는 폭동으로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가 쫓겨난 다음에도 혼란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17,000 명에서 20,000 명 정도의 인디언이 있다. 그 가운데 15,000 명 정도가 아르헨티나의 북서지역인 볼리비아 국경부근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담배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살아간다. 한때 용맹하기로 이름났던 파타고니아 인디언들은 약 1,500 명에서 2,000 명 정도가 남아 파타고니아에 있는 보호구역에서 산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현재 남아메리카에 있는 말들은 스페인사람들이 가져 온 말이 늘어난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그 가운데서도 북아메리카에 있었던 말이 사라진 이유가 사람이 멸종시켰거나 환경변화로 생각된다. 남아메리카의 말도 비슷하게 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의 연구로는 사람이 없앴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보통 안데스산맥의 최고봉인 아콩카과(Aconcagua) 봉이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아르헨티나 영토에 있다. 아콩카과 산이 눈이 쌓이지 않으면 6,959 m이며 눈이 쌓이면 7,021 m라고 한다. 아콩카과 산이 남반구에서 또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편 침보라조(Chimborazo)가 에콰도르 안데스산맥에 있는 높은 산으로 높이가 6,310 m이다. 침보라조가 상당히 높은 산으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정복하는 초기에 본거지가 있었던 에콰도르에 있어, 박물학자들이 많이 탐험해 유명해졌다. 예컨대 독일 박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가 1799년부터 1804년까지 남아메리카를 탐험하면서 에콰도르와 침보라조를 답사했다.
“파타고니아 (Patagonia)”라는 이름이 스페인 개척자들이 그 지방 원주민을 파타고네스 (Patagones)라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파타고니아원주민들이 두꺼운 동물가죽으로 된 폰초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날리며 얼굴에 색깔을 칠해, 마젤란이 16세기 당시 유명했던 소설(Amadis de Gaula)에 나오는 개의 머리를 한 괴물인 파타곤을 연상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당시에는 “파타고니아, 저주받은 땅”이라는 말은 속담 같았다고 한다.
한편 다른 주장을 따르면 원주민들이 키도 컸지만 발도 커,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으로 “파타고니아”가 유래했다고도 한다 “파타(pata)”가 “발”이라는 뜻의 스페인 말이다. 원주민을 처음 만난 유럽사람들이 원주민들의 발이 아주 크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 그렇게 불렀다고도 생각된다.
한편 파타고니아의 포트 산 훌리앙(San Julian) 포구가 마젤란이 1520년 그에게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관 두 명, 루이스 데 멘도사와 가스파르 께사다를 처형했던 곳이다. 그가 두 명을 목을 잘라 죽인 후 머리를 말뚝에 꽂아 해안에 박아두었다. 마젤란이 태평양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몬테 크리스토 산봉우리에 십자가를 세웠다.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를 일주했던 영국의 항해가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도 58 년 후 포트 산 훌리앙에서 그의 부하가운데 토마스 도티의 목을 잘랐다. 마젤란탐험대를 보면, 유럽의 선원들이 그 부근에 와서는 항해에 싫증도 내고 잘 모르는 곳을 간다는 사실을 무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메리카 카우보이 가우초---아르헨티나, 우루과이나, 브라질의 시골에 가면 가우초(gaucho)를 볼 수 있다. 남아메리카 카우보이인 가우초는 유럽인, 주로 스페인사람과 남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혼혈족을 말한다. 마떼를 즐겨 마시는 가우초는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시골에서 동물만 다루며 가난하게 사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마떼(mate)란 파라과이 차라고도 말하며 커피나 차 같은 자극제이며 서양감탕나무 계통인 상록수의 어린잎을 주로 해서 만든다. 마떼가 이 어린잎을 말려서 마떼라 부르는 그릇 속에 담고 더운물을 부어 금속으로 만든 빨대로 마신다. 맛이 아주 씁쓸하며 카페인성분이 아주 많고 한 번 맛을 들이면 떼기 힘들다고 한다. 마떼가 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스페인사람들이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남아메리카를 개척하러 갈 때 남자인 군인들만 가면서 원주민과 혼혈족을 많이 만들었다(반면 영국사람들이나 프랑스사람들이 북아메리카를 개척하러 갈 때 부인과 함께, 곧 가족이 가 혼혈족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가우초는 주로 쇠고기만 구워먹으면서 나름대로 쇠고기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기만 굽지 않고 등심에 가죽을 붙여 굽는 것이다. “가죽을 붙여 구은 쇠고기(asado con cuero)"가 고기만 굽는 쇠고기보다 훨씬 맛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에는 그런 음식만 파는 전문점이 있다.
가우초들은 주로 말을 타고 생활하며 칠리파라는 특수한 옷을 입는다. 칠리파란 가우초들이 허리에 묶어서 바지 위에 걸치는 짧은 5각형 옷으로, 가우초의 바지를 보호하고 편하게 한다. 천막을 만드는 아주 질긴 천이나 가죽으로 칠리파를 만들며 색깔로는 갈색이 많다.
낙후한 파라과이---우리가 잘 아는 이과수폭포는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세 나라의 국경에 있다.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의 가운데에 있어 바다가 없는 나라이며 군인이 독재를 하는 나라이다. 그럴만한 전통과 역사가 있다. 파라과이에서는 19세기 초부터 군인들이 득세해왔다. 예컨대 “지존(至尊)”이라 부르는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프란시아부터 그런 잘 못된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파라과이가 1811년 스페인한테서 독립을 선포한 뒤 파라과이를 통치한 군사평의원회의 회원이었다. 1814년 3년 임기의 독재자가 되었다가 1816년 영구히 집권했으며 1840년에 죽었다. 아르헨티나와 국경이 닿아 있는 파라과이가 당시만 해도 벌써 사회나 정치나 경제가 아르헨티나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낙후했다. 프란시아가 죽은 뒤에는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즈가 개방정책을 취한 독재체제를 1862년까지 취했다. 이후 프란시스코 솔라스 로페즈가 영토를 확장할 야심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세 나라를 상대로 1864년부터 1869년까지 전쟁을 했다. 그 결과 1864년 130만 명의 인구가 1870년에는 남자 28,000 명에 22만 명으로 격감했다. 이 결과 국민 거의 전체가 천주교를 믿는 이 나라가 인구를 늘이기 위하여 일부다처제도를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친 브라질 파와 친 아르헨티나 파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런 험한 역사를 가진 파라과이가 지금도, 브라질을 빼고는 모두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 중앙-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민주주의가 그렇게 발달하지 못하고 경제가 낙후한 나라에 속한다.
우루과이는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심장 모양의 작은 나라이다. 인구 370만 명에 수도인 몬테 비데오에 200 만 명 정도가 산다. 우루과이의 공식국호는 우루과이 강 동쪽 공화국이다. 우루과이의 옛 이름인 반다 오리엔탈이 우루과이 강의 동쪽을 말한다.
몬테 비데오---지금의 우루과이지역의 사람들이 당시 19세기 초의 세계의 흐름에 따라 독립하려고 하자 스페인은 1811년부터 5 년 간에 걸친 전쟁에서 우루과이 독립의 영웅인 호세 아르티가스(1764-1850)를 물리쳤다. 또 포르투갈은 1817년 스페인한테서 현재 우루과이가 차지한 땅을 뺏어 당시 포르투갈 영토였던 브라질에 편입시켰다. 이어서 포르투갈과 그의 식민지에서 1822년에 독립했던 브라질이 그 지역을 점령하자 후안 라바제야가 독립운동을 계속해, 1825년에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물론 브라질은 독립운동을 막았으며 한편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도와주었다. 이 과정에서 브라질제국과 아르헨티나공화국은 전쟁을 했으며 1825년 아르헨티나가 이겨서 그 틈에 우루과이가 1828년 8월 25일에 독립했다. 그러나 우루과이자체는 3 년을 당겨 1825년에 독립했다고 말한다. 우루과이는 독립이 되면서 북쪽의 땅을 많이 잃어버려 국토는 반 이하로 줄었다. 우루과이는 1830년 공화국이 되었다. 이런 사연으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친하다. 한편 우루과이를 정복한 백인은 인디언을 모두 죽였다. 이 결과 현재 우루과이에는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손이나 혼혈이 거의 없다. 현재 우루과이 사람 가운데는 스페인 사람들의 이런 야만스러운 행위를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브라질은 지금도 가끔 우루과이의 영토를 넘본다고 한다. 바로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도시 때문이다. 이 도시가 라 플라타 강을 건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북동쪽 50 km, 몬테 비데오의 서북서쪽 130 km에 있다. 포르투갈인이 1690년에 건설한 도시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자주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유서 깊은 유적이 있어 지금도 좋은 관광지이다.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 비데오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가 재미있다. 즉 “몬테 비데오(Monte Video)"는 포르투갈 말로 “산이 보인다”는 뜻이다. 16세기에 활동한 포르투갈의 개척자들이 평지인 라 플라타 강 연안을 따라 오다가 오늘날의 몬테 비데오 지역 왼쪽에 있는 상당히 높은 산을 발견하고, “나는 산을 보았다”는 뜻의 의미로 “몬테 비데아우”라고 한 말이 몬테 비데오로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포르투갈 뱃사람이 처음으로 그 곳에 와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este)에서 서쪽(oeste)까지 산 (Monte) 이 여섯 (vi는 라틴어로 6을 뜻함)개 있었다”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즉 그들은 넓은 평지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여섯 개를 찾았던 것이다. 산보다는 작은 언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가장 높은 산도 135 m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우루과이 전체도 평지가 대부분으로 가장 높은 산이 북쪽지역 가운데에 있는 높이 420 m의 산이다. 동부지역 가운데에 있는 299 m의 산도 높은 편에 속한다. 서울의 남산이 232 m, 관악산이 632 m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우루과이에는 높은 산이 정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루과이에는 이렇게 평지가 많아 양과 소가 많다. 양이 6천만 마리에 소가 800만 마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1830년대엔 우루과이에 신사가 없어?---1830년대에는 우루과이에 신사가 없었다고 한다. 신사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으로 실력과 재산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로 사업으로 부유해진 사람들과 공부를 많이 한 법률가와 학자와 큰 땅을 가진 농장의 주인들이나 국가에 큰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사가 영국 장미전쟁(1455-1485년)으로 귀족의 수가 줄어들자 새로이 생겨나 그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한 계급 줸트리(Gentry)이다. 당시 신사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개인이 노력해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경받는 신분이었다. 잉글랜드에는 신사가 있었으나 우루과이는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사라고 할 만한 계층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레가 폭 100-400 km, 평균 폭 180 km에 현재 길이 4,270 km로, 잘 알다시피,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긴 나라이다. 1830년대는 북쪽과 남쪽이 칠레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긴 나라임에는 틀림없었다. 남쪽은 1840년대에 칠레 땅이 되었고 북쪽은 칠레가 1879-83년에 걸친 볼리비아와 페루 연합군과 싸운 태평양전쟁에서 이겨 칠레 땅이 되었다.
백인이 정복하지 못한 원주민---칠레 역시, 브라질을 제외한, 중앙-남아메리카 전체처럼 스페인사람들이 개척했다. 개척자 디에고 데 알마그로(1475-1538)가 1536년 원주민과 싸우면서 개척을 시작해, 페드로 데 발디비아(1498?-1554)가 1541년에 산티아고를 건설했으며 1544년에는 발파라이소를 건설했다. 그가 이어서 1550년에는 콘셉시온, 1552년에는 발디비아시를 건설한 칠레의 영웅이다. 그의 이름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칠레는 스페인한테서 1818년 9월 18일 독립했다.
멘도사(Mendoza)가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한 주이자 도시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힘이 못 미쳐 실제는 독립된 나라나 마찬가지여서 멘도사 공화국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멘도사가 원래는 칠레 땅이었으나 스페인정부가 1776년 리오 데 플라타 부왕(副王)에게 넘겨주었다. 아르헨티나를 독립시킨 산 마르틴 장군과 칠레를 독립시킨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장군이 멘도사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점을 이용해, 스페인을 몰아내려고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1776(78?)-1842)가 칠레를 독립시킨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라는 이름은 칠레 곳곳에서 볼 수 있어 산티아고 시내를 남북으로 나누는 큰길도 오히긴스 거리이다.
칠레(Chile)라는 이름이 영어 단어의 “고추” 또는 “고추요리”를 뜻하는 “칠리(chili)”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런 설명이 아마 칠레의 국토모양이 고추처럼 길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칠레가 그 지역에 흔했던 지빠귀계통의 칠리 새 울음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명이 더 정확하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된다. “칠리”라는 이름이 스페인사람들이 칠레에 오기 훨씬 전부터 그곳을 불렀던 이름이다. 칠레는 높고 험한 안데스산맥의 서쪽의 좁은 땅이어서, 당시 크고 평지가 많았던 아르헨티나에서 보면, 유형지 비슷했다.
칠레 땅에 있는 아라우카니안 족이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가운데 백인에게 힘으로 정복되지 않은 유일한 원주민이다. 칠레정부가 1887년에서야 조약을 맺어 겨우 땅과 부족을 칠레로 편입시켰다. 현재 순수한 아라우카니안 족이 5만 명 정도가 있으며 같은 계통으로 약 20만 명이 있다. 이들이 칠레의 9지역, 곧 산티아고에 남쪽으로 600 km 정도 떨어진 떼무코(Temuco)를 중심으로 한 칠레의 중부지역인 온대지방에서 모여서 산다. 칠레에서는 흔히 마푸체(Mapuche) 족이라고도 부른다.
아르투로 프랏(Arturo Prat)은 우리가 칠레에서 흔히 보고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그는 칠레해군의 영웅이자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다. 바로 칠레가 1838-39년과 1879-83년에 걸쳐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군과 싸울 때, 그가 페루전함에 자살공격을 감행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 때 뺏은 북쪽지역에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 가운데 하나인 아따까마사막이 있다. 아따까마사막은 사하라사막보다 더 건조해, 마치 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한다. 이 아따까마사막에 질산염과 구리가 많이 부존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 있는 추키카마타(Chuquicamata)광산이 세계에서 제일로 큰 노천구리광산의 하나이다. 칠레가 현재 세계최대의 구리광석을 생산하는 나라이자 수출하는 나라이다. 또 그 덕분에 “칠레초석”을 실어내던 항구인 이끼께(Iquique)가 칠레의 땅이 되었다. 이끼께는 산티아고에서 1,843 km 떨어졌으며 남위 20°12‘에 있다. 현재는 이끼께의 300 km 북쪽인 아리까(Arica) 북쪽까지 칠레의 영토이다.
질산염의 주성분은 질산나트륨이다. 백색에 조개껍데기처럼 깨어지고 유리 같은 광택을 내고 물에 잘 녹는 광물이다. 질산나트륨이 이른 바, “칠레초석”으로 1865년부터 유럽으로 엄청난 양이 수출되어 칠레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독일화학자 프릿츠 하버(1868-1934)가 공중질소 고정법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발명하면서 수요가 갑자기 줄었다. 처음에는 칠레초석을 화약원료로 쓰지 못했으나 후에는 화약원료가 되었다.
칠레의 기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북쪽 끝(남위 17°)부터 산티아고의 북쪽 300 km 정도까지인 남위 31°까지는 아타카마(Atacama) 사막과 안데스산맥 고산지대이다. 아타카마 사막이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 남쪽부터 콘셉시온 시가 있는 남위 37°까지는 지중해성 기후로 상당히 건조하다. 남위 37°부터 케이프 혼까지는 삼림지대로 겨울에 눈이 내린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많은 이민들이 칠레로 몰려들었다. 스페인계는 처음부터 많았고 독일, 아일랜드, 영국, 유고슬라비아, 프랑스계가 많이 모여들었다. 스페인계가 절대 많아 국민의 80% 정도를 차지하며 워낙 섞여 계파 사이에 갈등은 없다. 아시아계는 소수이며 그 중에서도 중국계는 칠레의 북쪽에 많다. 우리나라 교민은 1,700 명 정도라고 하며 주로 산티아고에서 개인사업으로 생활한다.
산티아고와 산타 루시아 공원---칠레는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이 1973년 9월에 무너지고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섰다. 지금은 피노체트마저 물러난 지 오래이다. 그래도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 피노체트 정권이 부패하지 않아, 지금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칠레국민의 상위 5%만 부유해 불만이 있으나 그래도 2/3가 중산층으로 살만 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중산층이 아주 적어 사회가 불안하다. 반면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으면서 경제는 나아졌지만 인권은 후퇴해 그를 지지하지 않는 지식인들도 있다. 칠레는 주로 구리나 목재 같은 원료와 수산물을 수출하고 제조업이 낙후해 공산품들은 상당히 비싸다. 칠레는 재료가 비싸고 인건비가 싸, 돈을 가진 사람이 살기에 좋아 하층민들의 불만은 상당하다.
현재 인구가 600만 명 정도인 산티아고 시내의 한 가운데에는 “루시아 성녀(Santa Lucia)”를 뜻하는 언덕인 산타 루시아가 있으며 공원이 되었다. 찰스 다윈이 비글호로 세계를 일주할 때인 1834년 8월, 산티아고에 와 산타 루시아 언덕을 올라간 적이 있었다. 산타 루시아 언덕에는 그가 올라왔다는 것을 기록한 글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다윈 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대 학생들이 포옹하는 장면들은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을 것이다. 산티아고(Santiago)가, 산 자고(San Jago)와 마찬가지로, 야곱(Jacob) 성인을 뜻한다.
산티아고는 분지에 건설돼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아 공기오염이 심하다. 그런 현상이 겨울에 더 심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차량 10 대 가운데 최고 4 대를 운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운행을 하지 못하는 차량 번호를 일일이 그 전날 뉴스시간에 공지한다. 여름은 그래도 나아 그런 일은 없지만 공기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칠레의 치안이 안전하지만 산티아고 시내도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배가 고프다고 손을 내미는 젊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외국인이므로 표적이 되기 쉬울 것이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19세기 초에 독립하면서, 장교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제대로 된 교육기관이 없으면서, 그래도 배웠고 힘이 있었던 계층이 장교계층으로 생각된다. 실제 장교들은 남아메리카 사회의 귀족이자 신사이자 양반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나 쉽게 장교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장교가 되려면 추천서가 필요하다. 곧 집안이 좋아야 한다. 칠레에서는 출생이 불확실하면 장교가 될 수 없다. 칠레의 육군장교는 군복이 독일장교와 비슷하고 해군장교는 영국해군장교와 비슷하고 공군장교는 미국공군장교와 비슷하다.
산티아고의 외항인 발파라이소의 위도가 남위 33°정도이다.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낙원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이는 발파라이소 북쪽 300 km 정도부터는 상당히 건조한 곳이며 산티아고도 건조하지만 발파라이소에는 숲도 있고 경치가 좋아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발파라이소가 오늘날 칠레 최대의 항구로 인구가 100만 정도이다.
길이가 8,850 km가 되어 산맥가운데 가장 큰 안데스산맥이 천연의 장벽도 되며 아르헨티나와 국경도 된다. 남아메리카의 북쪽에서는 대단히 높아서 6,000 m가 넘으나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낮아진다. 즉 남위 25°와 35°사이에서는 2,000 m 정도가 되며 그 남쪽은 1,000 m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그 부근의 지리를 아는 사람은 넘어갈 만한 길이 있다. 지금도 그 남쪽에서는 겨울에도 자동차로 안데스산맥을 넘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중부지방의 칠로에(Chiloe)섬이 “칠레의 일부”라는 뜻이며 산 카를로스가 오늘날 안쿠드이다. 칠로에 섬에는 서풍이 심하고 비가 많이 와 지금도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 칠레가 스페인한테서 독립하려는 운동을 할 때, 칠로에 섬이 왕당파의 마지막 보루로 1826년이 되어서야 왕당파가 모두 쫓겨났다. 칠로에 섬이 인류를 먹여 살리는 4 대 식품 가운데 하나인 감자의 원산지이다. 지금도 칠로에 섬에서 나는 좋은 감자는 모두 미국으로 수출된다.
칠로에 섬의 약간 북쪽 현재 호수가 많은 지방부터 띠에라 델 푸에고 섬 끝까지 약 1,500 km에 이르는 남아메리카 서해안 남부해안지방이 얼음에 깎인, 이른 바, 빙식지형이다. 마지막 빙하시대에는 얼음에 덮였던 곳으로, 현재는 얼음에 깎인 특징이 있는 지역으로 섬과 호수가 아주 많고 피오르드가 많아 해안선이 아주 복잡하고 경치가 좋다. 칠레는 2030년까지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려고 한다. 만약 뜻대로 된다면 세계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이다.
칠레에는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한 분이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889-1957)이고 다른 한 분이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73)이다. 붉은 칠레 돈 5,000 페소 짜리에 있는 여자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다. 20대 시절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 여자를 무척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남자가 자살했다고 한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그 충격으로 일생을 미혼으로 지내며 시를 써 1945년에 라틴 아메리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산티아고 부근에는 그 여자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생활했던 집?)가 있다. 시인이며 공산주의자였던 네루다는 197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칠레는 잘 알다시피 활화산과 지진이 많은 나라이다. 높이 2,652 m인 오소르노 화산이 완전한 원추형으로 위가 언제나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다. 모양이 아주 좋아 칠레를 대표하는 화산가운데 하나이다. 그 근처에 있는 코르코바도 화산의 높이가 2,300 m이다. 비야리까 화산이 발디비아의 동북동쪽으로 120 km 떨어지고 높이 2,847 m이다.
칠레에 로빈슨 크루소의 배경이 된 섬이 있다면 놀랄 것이다. 바로 칠레 산티아고의 서쪽인 동태평양에 있는 후안 페르난데스 군도가 그 섬이다. 이 군도에서 가장 큰 로빈슨 크루소 섬이 해양모험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발상지이다. 처벌을 하려고 그 섬에 강제로 내려진 선원이 고생하면서 살다가 구조된 실화가 그 소설의 배경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같은 스페인의 후손이고 천주교국가이다. 그러나 사이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비글해협 동쪽 입구에 있는 무인도인 레녹스. 픽톤, 누에바 섬, 세 개를 놓고 전쟁 일보 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바로 1978년 칠레 피노체트정부와 아르헨티나 비델라 정부 사이에 있었던 긴장이다. 당시 산티아고와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등화관제를 하면서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교황청이 중재를 해 화해해, 모두 칠레영토가 되었다. 그 후로 두 나라는 적국이 되었다. 지금도 국경이 문제가 되는 곳이 있다. 안데스산맥이 워낙 험해, 올라가지는 못하고 분수령을 국경으로 하기로 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에도 전쟁을 할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전쟁을 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기념해 무기를 녹여서 만든 커다란 예수상(Cristo Redentor)을, 산티아고 약간 북쪽의 칠레-아르헨티나 국경인 안데스산맥 능선에 건설했다.
칠레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점심시간이며 이 시간에 대부분의 개인 가게는 문을 닫는다. 또 달러를 바꿀 수 있는 환전상은 개인사업으로, 환전상마다 환율이 다르다.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내려 맨 처음 만나는 환전상은 바깥에 있는 환전상보다 비싸, 불리하다.
서울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페루 수도인 리마를 경유하는 길이 있다. 다음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이 있다. 전자는 매일 비행기가 있는 반면, 리마를 경유하므로, 걸리는 시간이 13 시간 30 분 정도이다. 반면 후자는 일주일에 세 번,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비행기가 있다. 그러나 경유하는 곳이 없어 시간이 훨씬 덜 들어, 10 시간이 조금 넘는다. 대한항공은, 잘 알다시피, 서울에서 오클랜드로 매일 날아간다.
슬픈 사연이 있어---푼타 아레나스에서 보이는 바다가 바로 마젤란해협이다. 마젤란해협에는 스페인이 이 지역을 개척했던 역사가 남아있다. 바로 그들이 마젤란해협에 만들었던 동네 “포트 패민”이다. 스페인 이름이 “푸에르토 델 암브레(Puerto del Hambre)”인 “포트 패민(Port Famine)”에는 대단히 고생했고 슬픈 사연이 있다. 1580년 에스페란사호로 마젤란해협까지 왔던 스페인 사람 페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는 마젤란해협 서쪽 입구의 큰 섬인 데솔레이션 섬에서 원주민 남자 두 사람을 붙잡아 각각 후안과 프란시스코라 이름을 붙여서 스페인의 필립 왕에게 데려갔다. 그는 대양을 제압하려는 전략에서 마젤란해협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필립 왕에게 마젤란 해협을 장악하기 위하여 요새들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스페인은 그 당시 나타나던 영국해적에게 대항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584년 3월 그는 마젤란해협의 북쪽해안 두 곳에 사람을 살게 했다. 첫째가 마젤란해협의 동쪽 입구로 들어와 첫 번째로 좁아지는 북쪽해안의 돌출지역인 오늘날 케이프 버진 근처로, 여기에 “농브레 데 헤수스(Nombre de Jesus)”를 세웠다. 두 번째가 오늘날 푼타 아레나스 남쪽 약 60 km 되는 곳으로 “킹 돈 펠리페(King Don Felipe)”였다. 두 곳 다 자연환경이 거칠었고 원주민의 공격으로 사람은 살기 힘든 곳이었다. 1586년부터 1589년에 걸쳐 역사상 세 번째로 세계를 일주했던 영국 항해가 토마스 캐번디시는 킹 돈 펠리페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 가운데 자기발로 배에 올라탔던 한 사람을 구조했다. 그는 그 곳을 “사람이 굶어 죽는 포구”라는 뜻으로 “포트 패민"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칠레정부가 세워놓은 표지판만이 그곳을 지킨다. 뻬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가 1530년 경 스페인에서 태어나 1589년 이후에 죽은 항해가이자 탐험가이다.
마젤란해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은, 대서양쪽에서 들어와 마젤란해협을 따라 북서쪽으로 나가는 길과 마그달레나 해협을 지나 나가는 길이 있다. 마그달레나 해협이 대서양쪽에서 들어와 남쪽으로 내려가던 마젤란해협이 북서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에 남북으로 발달된 작은 해협이다. 이 해협이 서쪽의 콕번해협으로 연결되어 태평양으로 나가게 된다.
마젤란(1480?-1521)이 세계를 일주할 때인 1520년 11월 28일 마젤란해협을 빠져 나와 그 다음해 3월 6일 괌섬에 도착했다. 그는 98 일 동안에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그 넓은 바다가 하도 평온해, “태평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가 바다가 유난히 험한 남위 50도와 40도에서도 평온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때는 바다가 예외로 평온했다고 생각된다.
푼타 아레나스---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는 영어로 Sandy Point이며 칠레정부가 마젤란해협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1848년 12월 16일 건설한 도시이다. 그러나 칠레정부는 원래는 푼타 아레나스 시가 건설된 남쪽 60 km에 요새 푸에르테 불네스(Fuerte Bulnes)를 건설했다가 이 자리로 옮겨 푼타 아레나스를 건설했다. 푼타 아레나스는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마젤란해협을 지나가던 모든 배가 쉬어갔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후 많이 줄어들었으나 최근에는 남극 때문에 점점 북적거린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는 인구가 12만 명 정도라고 하며 건물과 자동차가 조금씩 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푼타 아레나스가 수도에서는 2,000 km 이상 떨어진 오지로, 정부에서는 주민을 위하여 면세구역(zona franca)를 인정한다. 면세구역에서 구매한 물건은 이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면세구역은 북쪽에도 있다.
아메리카가 다 그렇지만 칠레, 또 푼타 아레나스도 이민으로 건설된 곳이다. 푼타 아레나스를 건설한 이민 가운데는 크로아티아-유고슬라비아 이민의 힘이 크다. 푼타 아레나스를 지나는 큰길가에 서있는 기념물이 그 사실을 말한다.
푼타 아레나스시에는 명물이 몇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공원묘지이다. 실제 잘 다듬은 정원수들을 보노라면 그 묘지는 묘지가 아니라 공원이라는 기분이 든다. 원래 이 공원묘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여기에서 살았던 토호의 땅이었다. 토호의 부인이 유언을 남겨 공원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유언에 따라 그 여자가 정문으로 들어간 마지막 사람이다. 그 공원에는 청동으로 된 원주민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게 빌면 뱃길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생겨, 그 동상 앞에는 언제나 꽃이 놓여있다.
칠레국영 관광공사에 소속된 호텔인 까보 데 호르노스 호텔 앞 마젤란 광장에 있는 마젤란 동상은 이 곳을 한 마디로 표현한 동상이다. 마젤란 동상 아래쪽에 잇는 인디언 동상의 오른발 발가락은 안전항해를 비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녹청색이 벗겨져 노랗게 되었다.
푼타 아레나스에는 몇 개의 박물관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마젤란 박물관, 살레시오 박물관, 마젤란대학교의 추억박물관이 주요하다. 세 곳 모두 나름대로 특징이 있어 부근의 역사를 알고 자연을 보려면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이다. 마젤란 박물관은 글자 그대로 마젤란해협을 발견한 다음부터 이 곳에서 일어났던 사람의 활동을 주로 전시한다. 한 때 여기에서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노벨 문학상 상장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라틴문자로 쓰여졌다고 생각되나 1945년 11월 15일 수상이 결정되고 12월 10일에 시상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1895년에 개관된 살레시오 박물관은 다른 것도 많지만 이 주변의 자연환경에 관한 전시물이 많다. 과거에는 너무 좁아 새 같은 동물표본들을 다 전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시 카메라가 몇 대나 번쩍거리는 박물관이 되었다. 추억박물관은 이 곳을 개발하면서 사용했던 옛날 기관과 차량들이 볼 만하다. 푼타 아레나스 남쪽 바닷가에는 푼타 아레나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위에서 말한, 유적지가 두 곳 있다. 모두 이 거친 자연 속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흔적이고 노력이 보이는 곳이다.
또한 푼타 아레나스 시는 모든 등산인이 마지막으로 등정하고 싶어한다는 또레스 델 빠이네(Torres del Paine) 봉이 있는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다. 그 곳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시대의 대자연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공원은 유네스코가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빠이네까지 거리가 400 km이므로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보아야 한다. 준비만 잘 하면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잘 수도 있다. 그러나 퓨마 같은 맹수가 있고 길을 잃을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안전사항으로는 첫째, 반드시 숙소에 행선지를 남기고 둘째, 비상옷과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셋째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빠이네로 가는 길에 있는 밀로돈 동굴(Cueva del Milodon)은 19세기말에, 약 1만 년 전에 멸종한 땅늘보의 가죽과 배설물이 발견된 곳이다. 땅늘보는 나무늘보 같은 빈치류로 나무 위 아닌 땅위에서 살았다. 또 푼타 아레나스 근처에는 마젤란펭귄의 군서지가 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 땅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아르헨티나 비자가 필요하다. 버스는 자면서 가는 편안한 버스로 경치가 아주 좋아, 칠레사람은 거의 없고 관광객만 있다고 한다. 3 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바다 건너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땅이 띠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섬이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이 “불의 땅(Land of Fire)”이라는 뜻으로 마젤란해협의 남쪽에 있는 큰 섬이다. 원래는 1520년 11월 마젤란이 마젤란해협 동쪽 입구로 들어올 때, 원주민들이 연기로 신호를 하는 것을 보고 “연기의 땅 (띠에라 델 우모 Tierra del Humo)”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마젤란이 죽은 후, 세계를 일주한 부하들이 스페인 왕 찰스 5세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왕이 “불을 피우지 않고는 연기가 날리 없다”면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한편 마젤란이 “불의 땅”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주장도 있다. 넓이가 남한의 반 정도이며 협만과 수로가 많은 황량한 섬이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동쪽이 아르헨티나 영토이고 서쪽이 칠레 영토이다. 마젤란은 그 섬을 남극대륙의 북쪽끝으로 생각해, 섬(isla)이 아닌 땅(tierra)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르 매르 해협-스테이튼 섬-드레이크 해협-케이프 산 디에고----르 매르(Le Maire) 해협이 띠에라 델 푸에고 섬과 그 동쪽의 스테이튼(Staten) 섬 사이의 해협이다. 르 매르 해협과 스테이튼 섬은 1616년 1월 24일 네덜랜드 사람인 자크 르 매르와 윌렘 슈텐(Willem Schouten)이 “유니티(Unity)”호로 발견했다. “르 매르 해협”이라는 이름은 안트워프에서 큰 사업을 하면서 탐험을 조직했던 이삭 르 매르(Isaac Le Maire)를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때 “유니티”호에는 르 매르의 두 아들, 자크와 다니엘이 타고 있었다. 따라서 자크 르 매르가 그 해협을 발견했다고도 말한다. 스테이튼 섬은 그들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안데스산맥이 끝나는 스테이튼 섬의 최고지점은 높이가 1,120 m로 상당히 높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등뼈인 안데스산맥을 따라 내려가 육지가 끝나고 그 남쪽에 커다란 섬이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이다. 남아메리카 대륙 본토와 이 섬 사이의 해협이 바로 마젤란해협이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동쪽 끝이 바로 남아메리카 대륙끝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끝은 마치 쇠뿔같이 날카롭게 생겼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오른쪽, 즉 동쪽으로 상당히 큰 섬이 또 하나 있다. 그러나 보통 작은 지도에는 이 섬이 나오지 않는다. 이 섬이 바로 스테이튼(Staten) 섬이며 띠에라 델 푸에고 섬과 이 섬 사이의 해협이 르 매르 해협이다. 케이프 산 디에고가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남동쪽 끝에 있는 갑이다.
굿 석세스(Good Success) 만이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케이프 산 디에고 남쪽에 있으며 르 매르 해협으로 열려있는 작은 만이다. 스페인의 노달 형제가 1619년 1월부터 3월 11일까지 띠에라 델 푸에고 섬 둘레를 처음으로 일주 항해하면서 굿 석세스 만을 발견했으며 그들이 그 때 아우쉬 인디언과 처음 만났다.
드레이크해협은 남아메리카와 남극반도 사이의 바다로, 대서양에서 르 매르 해협을 지나 드레이크 해협으로 들어간다. 드레이크 해협은영국 모험가이며 항해가였던 프란시스 드레이크(1540(1543?)-96) 경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그는 1578년 9월 마젤란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왔다가 폭풍에 밀려 남쪽으로 밀려갔다. 그 때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에, 과거에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큰 바다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드레이크 해협은 이렇게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 전까지는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이 “남극(南極)”이라고 알고 있었다! 드레이크 경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 때 사람으로, 1577년부터 1580년에 걸쳐 골든 하인드호로 지구를 두 번째로 일주했으며, 살아서는 처음으로 세계를 일주했다. 그가 영국을 침공하려고 스페인의 카디즈에 모여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1587년에 기습해서 큰 타격을 입혔다. 다음해 영불해협에 집결했던 무적함대를 다시 공격해 스페인의 해군력을 궤멸시켜, 영국이 바다를 장악해 세계최강의 국가로 발전하게 한 장본인이다.
비참했던 띠에라 델 푸에고 섬 원주민---띠에라 델 푸에고 섬은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여행기인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를 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이 원주민에게 큰 충격을 받았던 곳이다. 다윈이 이곳에 왔던 1830년대에는 띠에라 델 푸에고 섬에는 네 부족이 있었다. 알라칼루프 족, 아우쉬 족, 오나 족과 야흐간 족이다. 아우쉬 족과 오나 족이 내륙에 살면서 걸어 다니면서 활로 사냥을 주로 했으며 알라칼루프 족과 야흐간 족이 해안에서 주로 카누를 타고 다니면서 바다생물을 사냥했다. 알라칼루프 족이 마젤란해협에서도 서쪽해안지방에서 살았고, 원주민 가운데서도 비참한 생활을 했던 부족이 야흐간 족이다. 네 부족을 합해서 약 8,000 명에서 1만 명에 이르렀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원주민들이 야오-야오라고 부르는 버섯을 먹었다. 이 버섯이 백인들 사이에서는 인디언의 빵 또는 다윈 균류로 알려졌다. 인디언들에게 가장 필요한 늦가을과 겨울에 황색이나 주황색인 살구모양의 둥근 포자낭이 이 버섯에서 만들어진다. 늦봄에 포자낭에 구멍이 생기면서 포자가 흩어지고 땅에 떨어져 쪼그라지면서 검게 변한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에는 다른 종류의 사이타리아 버섯류가 있으며 이 버섯이 나뭇가지를 따라 일렬로 갈색의 작은 배처럼 생장한다. 이 다윈 균류에는 1 목, 1 과, 1 속에 10 종이 넘는 종류가 있으며 모두 남반구 너도밤나무에 기생한다. 균류의 균사체가 나무에 기생하기 시작하면 나무가 이에 대항하면서 속이 아주 복잡한 큰 옹이가 생긴다. 균류를 크게 곰팡이와 버섯류로 나누며 다윈 균류가 버섯류이다. 이 버섯류가 특별한 맛이 없고 들큼하지만 정말 배가 고플 때에는 먹을 만 하다고 한다. 어리고 연할 때 먹기에 제일 좋으나 일년 내내 여러 종이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너도밤나무의 껍질을 벗긴 후 흘러나오는 수액도 마실 만하며 인디언들과 개척초기의 백인들이 마셨다. 이 외에도 가시가 나는 작은 나무에 열리는 깔라파테라는 열매도 먹을 만하다. 특별한 맛은 없고 들큼할 뿐이다. 칠레사람들은 가끔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 원주민이 식인종이라는 주장도 있고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비글호 항해기”를 읽어보면 원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고기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람이 먹을 것이 없을 때 사람고기로라도 연명한다는 것이 문명인에게는 혐오스러울지 몰라도 인간 자체로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원주민 사이에서는 도저히 치료하지 못할 병에 걸린 경우라거나 불구자는 목을 졸라 안락사를 시킨 경우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이든 여인들이 언제나 희생된 것은 아니며 그들이 카누를 잘 다루거나 경험이 많아, 오히려 둘째 부인이나 셋째 부인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백인이 오기 전의 원주민생활을 보여주는 프레 콜롬비아노 박물관(Museo Pre-Colombiano)에서 발간한 책을 보면,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원주민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제사를 지냈다. 그들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몸을 하얀 색으로 화장하고 머리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관을 쓴 몇 명의 남자가 둥글게 어깨동무를 했다. 또 탈을 쓴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원주민의 하나인 오나 족에게는 아름답고 슬픈 전설들도 있으며 그 전설에는 나무, 바위, 땅속 깊은 곳, 하늘의 영혼, 이끼귀신, 인간의 유령, 눈과 바람을 만드는 하얀 귀신같은 영혼이나 귀신들도 등장한다. 전설이나 미신이나 춤이 거의 모든 민족에 공통된 것이라면, 띠에라 델 푸에고 섬 원주민이라고 해서 그런 전설이나 미신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를 덧붙이면 우리나라에서는 두 개의 출판사가 “비글호 항해기”를 발간했다. 그러나 범양사가 1991년에 발간한 항해기는 다윈이 쓴 “비글호 항해기”가 아니다. 그 책은 캠브리지 대학교 의과대학교수를 퇴임한 다윈의 증손자인 리차드 다윈 케인즈가 편집한 책(The Beagle Record)으로 “비글호 기록”정도로 번역됨직하다. 내용은 다윈의 항해기, 다윈의 일기, 함장의 항해기, 편지와 다른 것들을 묶은 것이다. 원본은 아주 양이 많은 데 뽑아서 번역했다. 그러나 전파과학사가 1993년에 발간한 “비글호 항해기”는 1860년에 발간된 다윈의 항해기 3 판을 완전히 번역한 원전 완역본이다. 다윈이 쓴 “비글호 항해기”를 보면 다윈이 어떤 사람인지, 왜 영국이 지금도 선진국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포켓판은 웬만한 미국서점의 Science 코너에서 살 수 있으며 US$ 10이 안 된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교양으로 반드시 읽어야 할,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여행기이다.
*註 2. : 보다 더 조사해 봐야할 사항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미의 포도나무 식재는 유럽인들이 그들의 황폐화된 포도나무를 대신할 새로운 땅을 찾아 대체재배지로 찾았던 땅으로 보인다. 따라서 파이록셀라를 피해갈 수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고, 이미 이 곤충에 면역이 이루어진 포도나무를 이식해서 재배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포도나무의 뿌 리에 기생하면서 포도나무를 파괴시키는 곤충을 이름. 1860년 미국에서 건너와 프랑스 포도원의 3/4을 파괴시켰으며, 그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현재까지도 이 균을 박멸시킬 치료법은 없다. 다만 이 균에 저항력이 있는 미국산 포도나무에 접목하여 이 균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이 균의 변종이 잠깐 나타나기도 했었다.
2. 프랑스인들의 불편한 진실
형태는 초파리를 닮았고, 애벌레 때는 마치 조그만 번데기 같은, 이 양자 모두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곤충인 파이록셀라는 주로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면서 그 즙을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3. 남미가 감염되지 않은 이유
일부인사들은 남미가 파이록셀라에 감염되지 않은 이유를 기후가 서늘하여 파이록셀라가 활동하는데 적합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안데스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병충해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이 타당한 근거를 가질려면 아래의 두가지 요소를 충족해야만 한다.
먼저, 남미산 포도나무들이 파이록셀라에 오염되기 훨씬 이전부터 토착적으로 남미지역에 자생하고 있을 경우이고,
두번째는 1860년대 이전부터 스페인 정복자들이 포도나무를 남미지역에 가지고 가서 심었을 경우인데,
이 양자 모두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토착적 포도나무는 어느나라나 있겠지만, 카베르네 쇼비뇽이나, 피노누아, 쉬라 등의 품종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품종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유는 이같은 포도품종들은 처음부터 이 지역에 자생했던 것이 아니라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의 점령자들이 가져가서 심었을 확률이 많으며, 그것도 한 참 후대에 심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이 남미대륙을 처음 발견진입했던 것이 1400년대에서 1500년대인데, 이 당시부터 포도주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포도주가 이 지역에 등장한 것은 잉카제국을 멸망(주1)시킨 훨씬 이후라고 보여지기에 이 지역에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유럽지역의 포도나무가 파이록셀라 감염에 의하여 황폐화된 후 그 대안으로 신대륙으로 옮겨가 심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주2).
* 註 1. 남미 지배사 :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부스(1451?-1506)가 1492년 지금의 서인도 제도 산 살바도르 섬에 와서 비로소 남미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네 번에 걸친 탐험에서 쿠바, 하이티, 자마이카, 도미니카와 중남미 일대를 발견했다. 그 후 많은 유럽사람들이 아메리카대륙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남아메리카는 이태리의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가 발견했다. 상인이자 탐험가이며 항해가인 베스푸치는 1497년부터 1504년까지 스페인 왕과 포르투갈 왕의 후원으로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의 동쪽해안을 탐험했다. 눈을 동쪽으로 일찍 돌린 포르투갈 왕의 후원을 받은 후반기 탐험에서 그는 브라질해안과 리오 데 자네이로와 라 플라타 강을 발견했으며 그 남쪽까지 항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발견으로 사람들은 그가 새로이 발견한 곳이 아시아의 일부가 아닌 이른 바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대륙”이란 발견한 사람의 의견이지, 그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주지하다시피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유럽사람들이 왜 세계를 탐험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양념 때문이다. 그들이 11세기에 들어 짐승의 고기를 주식으로 하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고기의 냄새를 없애고 맛을 내는 후추, 계피, 정향 같은 양념과 향신료였다. 그런 양념과 향신료는 주로 열대지방에서 나온다. 당시 지중해의 제노아 같은 이태리의 항구도시국가들은 열대동양에서 조금씩 들어오는 향신료를 유럽의 다른 나라에게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보았다. 게다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고 영국은 섬나라라, 향신료 값이 아주 비쌌다. 이에 화가 난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가, 브라질을 발견하고 인도네시아인 동인도에 도착했다. 그러자 스페인은 서쪽으로 가, 콜럼부스가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를 발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가 인도에 왔다고 믿었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인도와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인도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Indian)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6세기 황금을 찾아 중앙아메리카대륙을 개척하던 유럽사람들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의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드디어 스페인의 정복자이던 바스코 뉴네즈 데 발보아(1475-1519)는 인디언들과 함께, 유럽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파나마지협을 넘어가 1513년 9월말 그 바다를 발견했다. 그는 그 바다에 씻기는 모든 해안을 스페인왕의 영토로 선언했다. 그 선언대로 하면 남북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발견되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스페인의 영토가 된다. 그 때는 사람들이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주인 없는 땅을 발견하면 자기네 땅으로 하던, 이른 바, “발견하는 시대”였다.
황금을 찾던 발보아는 마젤란보다 먼저 태평양을 발견했으면서도 태평양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한 것은 콜롬부스의 아메리카대륙발견 다음으로 위대한 발견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공적이 있는 데에도 본국으로 쫓아 보낸 무능한 부하의 사악한 계교로 반역자로 몰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했다.
마젤란은 엄청난 고생을 했다. 실제 피가페타가 “우리가 먹은 비스킷은 빵이 아니라, 비스킷을 파먹은 벌레가 섞인 가루였다. 게다가 쥐 오줌으로 절어 도저히 참지 못할 지독한 냄새가 났다. 우리가 마신 물도 비슷하게 더러웠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넓은 곳을 덮은 소가죽 조각을 먹어야했다....보통 우리는 톱밥을 먹었고 쥐까지 잡아먹었다....쥐 한 마리 값이 반 두캣이었다”라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괴혈병을 극복하지 못해, “태평양을 지나는 석 달 20 일 동안에 19 명이 죽었고 25 명이 병으로 고생했다”고 그들의 고생과 죽음을 생생하게 남겼다. 그 때만 해도 괴혈병의 원인을 몰라, 항해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괴혈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을 때였다.
백인이 저지른 죄악---노예제도--포르투갈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일찍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먼저 포르투갈 사람 또는 포르투갈 왕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은 15-16세기에 걸쳐 아프리카 서해안(1441년)과 희망봉(1488년)과 인도(1498년)와 브라질(1500년)을 발견하여, 포르투갈은 영향력을 넓혔던 것이다. 당시 아프리카대륙을 발견한 포르투갈은 후추, 상아, 황금을 약탈했고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오늘날 중부 아프리카 서해안에는 후추해안,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으로 아직도 그 때의 이름이 남아있다. 상아해안은 나라가 되어 나라이름도 “상아해안”이다.
노예이야기를 좀 더 하면, 포르투갈의 일부 악한 백인들이 1444년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스페인, 영국, 프랑스, 화란사람들도 흑인을 노예로 팔았다. 두 손을 묶이고 앞뒤의 사람과 함께 목과 발목을 각각 나무틀과 족쇄로 연결돼 끌려오는 흑인들의 그림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브라질을 발견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하여 1530년부터 당시 포르투갈지배에 있던 서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을 데려다 노예로 썼다. 또한 많은 노예들은 브라질에 많았던 황금과 보석을 캐고 고르는 광부로 일했으며 담배와 커피농장에서도 일했다. 다음에는 흑인들은 카리브 해로 많이 팔려갔다. 노예로 잡힌 흑인들은 대략 반 정도가 브라질로 팔려갔으며 카리브해 지역으로도 반 정도가 갔다.
15-16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의 강국이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같은 식민지에서 엄청난 황금과 순은이 흘러 들어오면서 엄청난 부와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와 독일은 신-구교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탈리아는 터키와 전쟁하기에 바빴다. 영국의 해군력은 아직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드디어 영국이 세계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바로 드레이크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1588년에 깨뜨려 스페인의 제해권을 뺏고 영국이 세계역사에서 강자로 떠오르는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18세기 들어서, 세계최강국인 영국을 중심으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노예제도를 금지하도록 요구했다. 실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1807년을 전후해 노예를 수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영국은 노예를 썼던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1834년에 노예 75만 명을 해방했다. 프랑스와 스페인도 이어서 노예를 해방했다. 약 40만 명에서 50만 명의 흑인을 노예로 썼던 미국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노력으로 1863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브라질은 영국의 요구로 1826년 노예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영국과 약속했으나 1853년까지 노예를 수입했다. 브라질의 노예제도는 오래 계속되어 노예제도가 끝난 것은 1888년으로 근대사회에서는 마지막이다. 브라질에는 흑인이 아주 많은 것 같아도 실제는 400만-500만 명 정도로, 주로 도시에서 살면서 카니발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어, 많다는 인상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나라 라이베리아 (Liberia)는 노예로 끌려가던 흑인들이,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서 이겨, 자유를 찾아 세운 나라로 “자유”를 뜻하는 단어 “(liberty)"에서 나라이름이 나왔다!
노예제도를 일찍 반대한 영국은 자신의 해군배로 노예선을 붙잡기 시작했다. 1829년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갔던 영국 해군의 전함 “블랙 조크”호도 그런 배였다. 노예선은 대개 겉은 상선처럼 꾸몄으며 대단히 빨랐으며 선장과 선원들은 도둑놈이고 불한당이었다.
영국의 노력이 있었지만 노예수입이 끝날 때까지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3,000만 명의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들어왔다. 노예로 잡힌 흑인의 1/6은 항해 중에 죽고 나머지의 1/3은 길드는 동안에 죽었다. 노예제도는 백인이 인류사에 저지른 가장 참혹한 죄악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해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서 원주민을 도살(屠殺)한 것이다.
노예를 오래 쓴 브라질---브라질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식민지로 도망갔던 포르투갈의 왕자가 세운 나라이다. 그가 1822년 혁명을 일으켜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독립했다. 그가 황제 돔 페드로 1세가 되었으나 우루과이를 놓고 아르헨티나와 분쟁을 일으켰고 통치력이 없어 다섯 살인 아들에게 1831년 양위했다. 또 지방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나라가 뒤숭숭했으며 의회가 1840년까지 섭정하다가 열네 살인 황제 돔 페드로 2세에게 양위했다. 돔 페드로 2세가 1889년 브라질이 공화국이 될 때까지 통치했다. 브라질이 넓이 851만 km2에 인구 1억4천만 명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이다.
포르투갈이 식민지이던 브라질을 개발하느라 많은 아프리카 흑인을 데려다 노예로 썼다는 것을 위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브라질이 독립한 뒤에도 경제를 지탱하던 담배와 커피를 재배하고 금광을 채광하는 데에 많은 노예를 동원했다. 지금 있는 흑인들은 그 노예들의 후손이다.
“리오 데 자네이로”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2년 1월 1일 발견했다. 그가 리오 데 자네이로를 큰 강의 하구(河口)로 생각해 “1월의 강”이라는 뜻으로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는 그 곳은 만(灣)으로, 리오 데 자네이로 시는, 로스 안젤레스 같은 큰 도시와 함께, 강이 없는 세계에 있는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리오 데 자네이로는 1565년에 건설된 도시로 나폴리와 시드니와 함께 세계 3 대 아름다운 항구의 하나로 1822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다. 실제 리오 데 자네이로는 만의 안쪽에 발달한 섬과 연갈색 해안과 푸른 하늘과 연두색-초록색 바다가 조화되어 정말 아름답다. 리오 데 자네이로에 솟아있는 산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었다. 예수가 두 팔을 벌린 상이 서있는 코르코바도(Corcovado) 언덕도 화강암으로 된 높이 710 m인 산이다.
악명이 높았던 영국의 해적----15세기만 해도 세계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위치를 측정하는 장치가 불완전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새로 발견한 영토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각 개척할 수 있도록 지구를 둘로 나누는 토르데시아스(Tordesillas) 조약을 맺게 했다. 이 조약에서 브라질을 넣어 남아메리카의 동쪽을 지나는 서경 46°에서 브라질-아프리카-인도-아시아의 우리나라의 동해를 지나가는 동경 134°까지는 포르투갈 몫으로, 나머지 지역은 스페인 몫으로 정했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이 일찍 일본에 와 조총을 전파해, 일본이 임진왜란에 조총을 썼다.
그러자 그 조약에서 배제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그 결정에 반발해, 알게 모르게 해적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해 황금과 보석과 향신료를 얻기보다는 그런 것을 싣고 오는 배를 공격하는 게 쉬웠을 것이다. 해적들은 보물선도 공격했지만 항구도시를 습격해 악명이 아주 높았다. 또 해적들이 새로운 섬이나 땅을 발견해 자국의 영토로 선언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화란이 자기네 나라와 먼 곳에 식민지가 많았고 그들이 발견했던 섬이 많았던 것은 바로 해적들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지금 역사에 남은 유명한 발견자나 항해가에는 해적출신이 많다.
당시 해적이 없던 나라, 예컨대 칠레 같은 나라의 학생들은 영국선장은 나쁜 사람이라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떤 칠레할머니는 영국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과 한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자 “내 평생에 영국사람과 같은 방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것이냐”라고 이야기했다. 그 칠레할머니는 어렸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영국 놈!”소리만 듣고도 귀중품을 싸들고 산 속으로 도망갔던 적이 두 번씩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16-18세기에 발호한 영국해적들의 악한 소행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오래 전 한 영국해적은 성모 마리아 상을 훔쳐 갔다가, 다음 해 성 요셉상도 가지러 와, “이 여자가 남편이 없어 불쌍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오래 전에 있었으나 칠레사람들이 1835년경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해적들의 만행은 유명했다.
피사로는 개를 가져오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시 일부 정복자들은 개를 가지고 와 원주민들을 공격했다. 사람이 사나운 개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정복자이지만 너무 잔인했다. 다음에는 선교사가 성경을 내어놓고 기독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지금은 다 잊히고 잊었지만,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기도를 매일 드리는 인간이, 종교를 빙자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고 포악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섬뜩하다.
당시 잉카족들의 무기는 돌이나 구리로 만든 도끼와 방망이로, 스페인군의 무기보다 훨씬 약했다. 또한 잉카족은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를 발명하지 못해, 왕을 가마에 태우고 다녔다. 잉카족들은 안데스산맥의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다시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나 1572년 영원히 사라졌다. 잉카족이 스페인군대에게 멸망당하면서 현재 페루 국민의 1/3이 스페인-원주민의 혼혈, 이른 바, 메스티조(mestizo)이며 천주교국가가 되었다.
잉카 족이 피사로에게 1531년에 정복당했지만 그 전에는 콜롬비아에서 칠레까지 안데스산맥의 능선을 따라 16,000 km의 도로를 건설해 곡물과 섬유 그리고 양털과 보석과 금은세공품을 날랐다. 그 도로가 로마사람이 건설했던 도로보다 더 좋다. 칠레중부지방인 탐비요스가 잉카제국의 남쪽 경계선에 가까운 곳으로 근처에는 잉카 족이 건설했던 포장도로를 볼 수 있다. 탐비요스에서는 1980년대에 잉카 초소 세 곳을 발굴했다.
쿠스코나 마추 픽추의 석조건물들은 면도날도 들어갈 틈이 없다. 잉카 족들은 바위에 구멍을 뚫고 나무를 박은 뒤 물을 부어 바위를 깨뜨렸다. 바로 나무가 물을 먹고 늘어나는 현상을 이용했던 것이다. 또 바위 위에 모래를 놓고 그 위에 바위를 놓아 매끈하게 갈았다고 한다. 모래는 대개 아주 딴딴한 광물들의 알갱이이므로 바위를 간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작은 바위는 수 톤이지만 큰 바위는 수십 톤이 넘는다. 그렇게 큰 바위를 어떻게 가져다 쌓아올렸는지는 정말이지 신기할 뿐이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수 천 년 전 흑요석으로 만든 돌칼로 두개골을 절개해 뇌수술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수술을 하려고 절개한 뼈가 치유된 것으로 보아, 수술 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의술이 그렇게 발달했어도 그들이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문명이 발달하는 데에 이해하지 못할 역설이다. 그들은 왕을 가마에 태우고 메고 다녔고 걸어 다녔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그 때는 말이 남아메리카에 없었다.
스페인군은 쿠스코를 정복한 뒤, 잉카족들로 하여금, 잉카신전들의 윗부분을 헐어내고 성당들을 짓게 했다. 잉카족들은 목숨이 아까워 그렇게 했겠지만, 그 설움과 고통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2001년 12월 우리를 안내했던 쿠스코에서 태어났고 자라난 페루여자 안내인이 그런 말을 하면서,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여자의 눈과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조상들이 수 백 년 전에 당했던 설움과 비통함을 지금까지 잊지 못했던 것이다.
잉카 왕은 아일랜드 사람?---마추픽추는 신비한 곳이다. 아래서는 보이지 않고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외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비밀도시이다. 물도 산에서 흘러 내려오며 주민을 먹여 살릴만한 식물도 재배할 수 있다. 실제 와이누 픽추(Huaynu Picchu)봉은 꼭대기까지 계단모양으로 밭이 있다. 물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좁은 길도 건설되었다. 마추픽추가 발견되었다 하드라도 바깥에서 공격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인골을 연구한 결과는 자못 흥미롭다. 인골에서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1: 10으로 여자가 절대로 많았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마추픽추가 누스타스(Nustas), 곧 “태양 처녀(Virgins of the Sun)”들을 보호하던 곳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태양 처녀란 처녀들 가운데서 “뽑힌 여자”들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거나 옷감을 짜거나 궁녀의 구실을 했던 여자들로 쿠스코에만 3천 명이나 있었다. 스페인군대가 가까이 오자 그 처녀들을 마추픽추로 보내어 보호했다는 뜻이다. 마추픽추에서 잉카왕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 가는 길도 있으며 쿠스코 이전의 수도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잉카족, 곧 페루원주민들은 동양인의 얼굴에 붉은 피부에 빳빳하고 검은 머리카락에 몸이 퉁퉁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그들이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를 지나 남아메리카에 정착한 인디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잉카족의 전설을 따르면 잉카족은 최초의 잉카인 망코 카팍(Manco Capac)의 후손들이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에 수염이 난 사람으로 서기 4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세 동생과 그들의 부인과 함께 티티카카 호수에 나타났다고 한다. 망코 카팍은 그들의 아이를 가르치라고 하느님이 보냈다고 사람들에게 선언했고 그것이 잉카제국의 시작이다.
잉카족은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라 아일랜드 선교사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피사로가 잉카왕 아타후알파와 그의 가족을 잡은 다음 쓴 글을 보면 “그들은 스페인사람보다 피부가 더 하얗다”는 글귀가 있다. 또 금세기 초에 북서아르헨티나에서 스코틀랜드 고지사람인 게일(Gael)인이나 아일랜드계 켈트족이 쓰는 순순한 언어를 쓰는 인디언들이 발견되었다. 그 인디언 가운데는 아일랜드계 켈트족처럼 푸른 눈과 붉은 수염이 난 사람들이 있었다. 또 나스카 미라 가운데는 붉은 머리칼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잉카족이 거대한 석조건물들을 지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들은 단지 발견만 해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만약 후자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그 거대한 석조건물들은 누가 지었을까? 혹시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 고립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이 원주민들에게 쫓겨 안으로 달아나 그들만의 왕국을 지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들이 쿠스코를 부근에서 떠돌던 인디언들에게 넘겨주고 난공불락의 도시를 지었을까?
거대한 거인들이 쉽게 건물들을 지었으나 인디언들에게 쫓겨 북쪽 멕시코로 갔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그들은 북아메리카 남서쪽까지 올라갔다가 아파치족에게 동화되었다고 한다. 아파치족의 전설에서는 그들이 지은 거대한 석조건물과 계단식 밭이 나온다. 아파치족의 일부는 멕시코로 들어가 아스텍 문명을 건설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 슈족에게도 거대한 석조건물을 지었던 번개새(thunderbird)에 관한 전설이 있다. 아마도 남아메리카에서 올라간 부족의 이야기가 그 전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번개새는 다 알다시피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설에 나오는 거대한 새로 천둥, 번개, 비의 신이다.
리마는 “왕들의 도시”---페루(Peru)라는 이름은 페루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피사로와 그의 부하 열세 사람이 비루(Viru)라는 강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멸망시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런데 불만을 품은 친구와 그 부하들을 동생이 죽이면서 비극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피사로는 친구의 부하들에게 1541년 6(7?)월 26일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가 죽는 순간의 장면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피로 땅바닥에 십자가를 그리고 십자가에 입을 맞추면서 “예수님”하고 울부짖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조금 다르다. 그가 공격당해 쓰러지자, 천주교신자가 하듯이, 십자가를 그리듯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하느님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공격자가 “지옥에서! 지옥에서나 용서를 빌어라!”라고 소리치면서 물이 가득 담긴 큰 물병으로 머리 위를 내려쳐 그의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피사로 자신도 죽을 때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자신이 죄가 많다는 것을 알았는가?
리마는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할 당시의 본부가 있었던 도시로 “왕들의 도시”라고 불렸다. 바로 프란시스 피사로가 리마를 1535년에 건설하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는 대통령 격인 왕은 스페인에 있었고 리마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부통령 격인 부왕(副王)이 얼마 동안 있었다. 리마는 남아메리카에서는 가장 역사가 길고 문화가 발달한 도시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페루의 정권이 혁명으로 자주 바뀌면서 페루는 지금은 낙후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리마에는 잉카의 황금박물관 같은 박물관들과 훌륭한 성당들이 많아 과거의 영화를 보여준다.
남아메리카가 독립하기 전 페루의 수도인 리마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서해안 개척을 지휘하는 중심지가 되면서 페루가 상당히 늦게 독립했다. 그것도 페루국민의 노력보다는 외부에서 도와주었다. 곧 아르헨티나 산 마르틴(San Martin)장군과 콜롬비아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 장군이 지휘하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연합군이 협력했다. 영국인도 개입했다. 예컨대 영국 해군출신인 코크라네 경이 지휘한 칠레함대가 산 마르틴 장군이 지휘한 군인들을 페루로 수송했다. 페루가 독립한 1825년 첫 해를 볼리바르가 통치했으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 페루에는 권력암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볼리비아(Bolivia)는 볼리바르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아르헨티나는 2차 세계대전 전 만해도 상당한 부국이었다. 그러나 대전 후에 빨리 변하는 국제추세에 부응하지 못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농업국으로 남아있어 이제는 남아메리카에서도 첫째 자리를 놓쳤을 뿐더러 가장 형편 없는 나라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에서 가까운 남아메리카 동쪽에 있어 유럽사람들이 일찍 왔다.
“은(銀)”이라는 뜻의 라 플라타 강과 아르헨티나---라 플라타 강은 진흙이 섞여서 누렇게 보이며 파라냐 강과 우루과이 강이 만나서 흘러내리는 강으로 하구에서는 폭이 200 km 가까워 강보다는 바다라는 생각이 든다. 넓이는 경상남도의 세 배 정도인 35,000 km2이다.
라 플라타 강을 발견한 스페인의 항해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1516년 강의 입구에 와서 처음에는 그 곳이 바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맛이 짜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거대한 하구라고 생각하고 더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동료들은 상륙했다가 배에서 빤히 보는 가운데 원주민들에게 잡혀 먹혔다고 한다.
스페인사람이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 상륙한 것은 1537년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공기가 좋다”는 뜻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맑은 공기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건설하면서 인디언들과 충돌했다. 그 때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말이 들어오기 전에는, 주요한 무기의 하나로 활을 썼다. 이런 사실을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건설될 때였던 1541년에 있었던 께란디스(Querandis)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전투장면을 그린 쉬미델의 그림들을 보아 알 수 있다. 위의 싸움에서 스페인사람들이 쫓겨갔고 건설초기에 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파괴되었다. 스페인사람들은 1580년에 다시 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건설했다.
스페인사람들이 말을 가지고 오면서 인디언들은 말을 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는 명중률이 떨어지는 활을 쓰지 않고 주로 추조와 볼라를 쓰기 시작했다. 추조(chuzo)는 창이며 볼라(bola)는 주먹 크기의 돌 두 세 개를 쇠가죽 끈으로 묶은 것으로 목표에 던지면 감겨서 목표물이 쓰러진다. 이 무기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퓨마, 말, 소, 타조를 잡는다. 남아메리카에는 두 종류의 타조가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일대 팜파스지방에 있는 타조가 더 크다. 반면 다음에 이야기할 파타고니아에 있는 다윈 타조가 좀 작다.
“라 플라타 (La Plata)”는 스페인어로, 흔히 생각하듯이, “백금”이 아니고 “은(銀)”이라는 뜻이다. “아르헨티나(Argentina)”도 라틴어로 “하얗고 반짝거리는”, 즉 “은”이라는 뜻의 아르젠툼(argentum)에서 나왔다. 1526년부터 1529년까지 파라냐 강과 파라과이 강을 발견한 탐험가 카보트가 아르헨티나에 은이 많다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면서, “라 플라타”와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은은 금에 못지 않은 귀금속이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은값이 떨어졌다. 일종의 은값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지하자원개발보다는 목축업과 농업이 발달한 나라이다.
아콩카과 산---아르헨티나가 1816년 스페인한테서 독립한 뒤에도 한 동안 불안했다. 그러나 일단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사람이 19세기 초반에 나왔다. 그가 후안 마누엘 로사스(Juan Manuel Rosas)장군이다. 그가 179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부유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 가우초처럼 살았다. 그가 인디언을 몰아내는 데 공이 커, 1835년부터 1852년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총독이자 아르헨티나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1852년에 축출돼 영국에서 망명하면서 1877년 생을 마쳤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가 아르헨티나를 통일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결국 독재자가 되어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지원을 받는 폭동으로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가 쫓겨난 다음에도 혼란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17,000 명에서 20,000 명 정도의 인디언이 있다. 그 가운데 15,000 명 정도가 아르헨티나의 북서지역인 볼리비아 국경부근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담배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살아간다. 한때 용맹하기로 이름났던 파타고니아 인디언들은 약 1,500 명에서 2,000 명 정도가 남아 파타고니아에 있는 보호구역에서 산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현재 남아메리카에 있는 말들은 스페인사람들이 가져 온 말이 늘어난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그 가운데서도 북아메리카에 있었던 말이 사라진 이유가 사람이 멸종시켰거나 환경변화로 생각된다. 남아메리카의 말도 비슷하게 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의 연구로는 사람이 없앴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보통 안데스산맥의 최고봉인 아콩카과(Aconcagua) 봉이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아르헨티나 영토에 있다. 아콩카과 산이 눈이 쌓이지 않으면 6,959 m이며 눈이 쌓이면 7,021 m라고 한다. 아콩카과 산이 남반구에서 또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편 침보라조(Chimborazo)가 에콰도르 안데스산맥에 있는 높은 산으로 높이가 6,310 m이다. 침보라조가 상당히 높은 산으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정복하는 초기에 본거지가 있었던 에콰도르에 있어, 박물학자들이 많이 탐험해 유명해졌다. 예컨대 독일 박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가 1799년부터 1804년까지 남아메리카를 탐험하면서 에콰도르와 침보라조를 답사했다.
“파타고니아 (Patagonia)”라는 이름이 스페인 개척자들이 그 지방 원주민을 파타고네스 (Patagones)라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파타고니아원주민들이 두꺼운 동물가죽으로 된 폰초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날리며 얼굴에 색깔을 칠해, 마젤란이 16세기 당시 유명했던 소설(Amadis de Gaula)에 나오는 개의 머리를 한 괴물인 파타곤을 연상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당시에는 “파타고니아, 저주받은 땅”이라는 말은 속담 같았다고 한다.
한편 다른 주장을 따르면 원주민들이 키도 컸지만 발도 커,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으로 “파타고니아”가 유래했다고도 한다 “파타(pata)”가 “발”이라는 뜻의 스페인 말이다. 원주민을 처음 만난 유럽사람들이 원주민들의 발이 아주 크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 그렇게 불렀다고도 생각된다.
한편 파타고니아의 포트 산 훌리앙(San Julian) 포구가 마젤란이 1520년 그에게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관 두 명, 루이스 데 멘도사와 가스파르 께사다를 처형했던 곳이다. 그가 두 명을 목을 잘라 죽인 후 머리를 말뚝에 꽂아 해안에 박아두었다. 마젤란이 태평양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몬테 크리스토 산봉우리에 십자가를 세웠다.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를 일주했던 영국의 항해가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도 58 년 후 포트 산 훌리앙에서 그의 부하가운데 토마스 도티의 목을 잘랐다. 마젤란탐험대를 보면, 유럽의 선원들이 그 부근에 와서는 항해에 싫증도 내고 잘 모르는 곳을 간다는 사실을 무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메리카 카우보이 가우초---아르헨티나, 우루과이나, 브라질의 시골에 가면 가우초(gaucho)를 볼 수 있다. 남아메리카 카우보이인 가우초는 유럽인, 주로 스페인사람과 남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혼혈족을 말한다. 마떼를 즐겨 마시는 가우초는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시골에서 동물만 다루며 가난하게 사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마떼(mate)란 파라과이 차라고도 말하며 커피나 차 같은 자극제이며 서양감탕나무 계통인 상록수의 어린잎을 주로 해서 만든다. 마떼가 이 어린잎을 말려서 마떼라 부르는 그릇 속에 담고 더운물을 부어 금속으로 만든 빨대로 마신다. 맛이 아주 씁쓸하며 카페인성분이 아주 많고 한 번 맛을 들이면 떼기 힘들다고 한다. 마떼가 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스페인사람들이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남아메리카를 개척하러 갈 때 남자인 군인들만 가면서 원주민과 혼혈족을 많이 만들었다(반면 영국사람들이나 프랑스사람들이 북아메리카를 개척하러 갈 때 부인과 함께, 곧 가족이 가 혼혈족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가우초는 주로 쇠고기만 구워먹으면서 나름대로 쇠고기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기만 굽지 않고 등심에 가죽을 붙여 굽는 것이다. “가죽을 붙여 구은 쇠고기(asado con cuero)"가 고기만 굽는 쇠고기보다 훨씬 맛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에는 그런 음식만 파는 전문점이 있다.
가우초들은 주로 말을 타고 생활하며 칠리파라는 특수한 옷을 입는다. 칠리파란 가우초들이 허리에 묶어서 바지 위에 걸치는 짧은 5각형 옷으로, 가우초의 바지를 보호하고 편하게 한다. 천막을 만드는 아주 질긴 천이나 가죽으로 칠리파를 만들며 색깔로는 갈색이 많다.
낙후한 파라과이---우리가 잘 아는 이과수폭포는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세 나라의 국경에 있다.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의 가운데에 있어 바다가 없는 나라이며 군인이 독재를 하는 나라이다. 그럴만한 전통과 역사가 있다. 파라과이에서는 19세기 초부터 군인들이 득세해왔다. 예컨대 “지존(至尊)”이라 부르는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프란시아부터 그런 잘 못된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파라과이가 1811년 스페인한테서 독립을 선포한 뒤 파라과이를 통치한 군사평의원회의 회원이었다. 1814년 3년 임기의 독재자가 되었다가 1816년 영구히 집권했으며 1840년에 죽었다. 아르헨티나와 국경이 닿아 있는 파라과이가 당시만 해도 벌써 사회나 정치나 경제가 아르헨티나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낙후했다. 프란시아가 죽은 뒤에는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즈가 개방정책을 취한 독재체제를 1862년까지 취했다. 이후 프란시스코 솔라스 로페즈가 영토를 확장할 야심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세 나라를 상대로 1864년부터 1869년까지 전쟁을 했다. 그 결과 1864년 130만 명의 인구가 1870년에는 남자 28,000 명에 22만 명으로 격감했다. 이 결과 국민 거의 전체가 천주교를 믿는 이 나라가 인구를 늘이기 위하여 일부다처제도를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친 브라질 파와 친 아르헨티나 파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런 험한 역사를 가진 파라과이가 지금도, 브라질을 빼고는 모두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 중앙-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민주주의가 그렇게 발달하지 못하고 경제가 낙후한 나라에 속한다.
우루과이는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심장 모양의 작은 나라이다. 인구 370만 명에 수도인 몬테 비데오에 200 만 명 정도가 산다. 우루과이의 공식국호는 우루과이 강 동쪽 공화국이다. 우루과이의 옛 이름인 반다 오리엔탈이 우루과이 강의 동쪽을 말한다.
몬테 비데오---지금의 우루과이지역의 사람들이 당시 19세기 초의 세계의 흐름에 따라 독립하려고 하자 스페인은 1811년부터 5 년 간에 걸친 전쟁에서 우루과이 독립의 영웅인 호세 아르티가스(1764-1850)를 물리쳤다. 또 포르투갈은 1817년 스페인한테서 현재 우루과이가 차지한 땅을 뺏어 당시 포르투갈 영토였던 브라질에 편입시켰다. 이어서 포르투갈과 그의 식민지에서 1822년에 독립했던 브라질이 그 지역을 점령하자 후안 라바제야가 독립운동을 계속해, 1825년에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물론 브라질은 독립운동을 막았으며 한편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도와주었다. 이 과정에서 브라질제국과 아르헨티나공화국은 전쟁을 했으며 1825년 아르헨티나가 이겨서 그 틈에 우루과이가 1828년 8월 25일에 독립했다. 그러나 우루과이자체는 3 년을 당겨 1825년에 독립했다고 말한다. 우루과이는 독립이 되면서 북쪽의 땅을 많이 잃어버려 국토는 반 이하로 줄었다. 우루과이는 1830년 공화국이 되었다. 이런 사연으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친하다. 한편 우루과이를 정복한 백인은 인디언을 모두 죽였다. 이 결과 현재 우루과이에는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손이나 혼혈이 거의 없다. 현재 우루과이 사람 가운데는 스페인 사람들의 이런 야만스러운 행위를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브라질은 지금도 가끔 우루과이의 영토를 넘본다고 한다. 바로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도시 때문이다. 이 도시가 라 플라타 강을 건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북동쪽 50 km, 몬테 비데오의 서북서쪽 130 km에 있다. 포르투갈인이 1690년에 건설한 도시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자주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유서 깊은 유적이 있어 지금도 좋은 관광지이다.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 비데오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가 재미있다. 즉 “몬테 비데오(Monte Video)"는 포르투갈 말로 “산이 보인다”는 뜻이다. 16세기에 활동한 포르투갈의 개척자들이 평지인 라 플라타 강 연안을 따라 오다가 오늘날의 몬테 비데오 지역 왼쪽에 있는 상당히 높은 산을 발견하고, “나는 산을 보았다”는 뜻의 의미로 “몬테 비데아우”라고 한 말이 몬테 비데오로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포르투갈 뱃사람이 처음으로 그 곳에 와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este)에서 서쪽(oeste)까지 산 (Monte) 이 여섯 (vi는 라틴어로 6을 뜻함)개 있었다”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즉 그들은 넓은 평지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여섯 개를 찾았던 것이다. 산보다는 작은 언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가장 높은 산도 135 m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우루과이 전체도 평지가 대부분으로 가장 높은 산이 북쪽지역 가운데에 있는 높이 420 m의 산이다. 동부지역 가운데에 있는 299 m의 산도 높은 편에 속한다. 서울의 남산이 232 m, 관악산이 632 m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우루과이에는 높은 산이 정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루과이에는 이렇게 평지가 많아 양과 소가 많다. 양이 6천만 마리에 소가 800만 마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1830년대엔 우루과이에 신사가 없어?---1830년대에는 우루과이에 신사가 없었다고 한다. 신사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으로 실력과 재산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로 사업으로 부유해진 사람들과 공부를 많이 한 법률가와 학자와 큰 땅을 가진 농장의 주인들이나 국가에 큰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사가 영국 장미전쟁(1455-1485년)으로 귀족의 수가 줄어들자 새로이 생겨나 그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한 계급 줸트리(Gentry)이다. 당시 신사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개인이 노력해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경받는 신분이었다. 잉글랜드에는 신사가 있었으나 우루과이는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사라고 할 만한 계층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레가 폭 100-400 km, 평균 폭 180 km에 현재 길이 4,270 km로, 잘 알다시피,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긴 나라이다. 1830년대는 북쪽과 남쪽이 칠레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긴 나라임에는 틀림없었다. 남쪽은 1840년대에 칠레 땅이 되었고 북쪽은 칠레가 1879-83년에 걸친 볼리비아와 페루 연합군과 싸운 태평양전쟁에서 이겨 칠레 땅이 되었다.
백인이 정복하지 못한 원주민---칠레 역시, 브라질을 제외한, 중앙-남아메리카 전체처럼 스페인사람들이 개척했다. 개척자 디에고 데 알마그로(1475-1538)가 1536년 원주민과 싸우면서 개척을 시작해, 페드로 데 발디비아(1498?-1554)가 1541년에 산티아고를 건설했으며 1544년에는 발파라이소를 건설했다. 그가 이어서 1550년에는 콘셉시온, 1552년에는 발디비아시를 건설한 칠레의 영웅이다. 그의 이름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칠레는 스페인한테서 1818년 9월 18일 독립했다.
멘도사(Mendoza)가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한 주이자 도시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힘이 못 미쳐 실제는 독립된 나라나 마찬가지여서 멘도사 공화국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멘도사가 원래는 칠레 땅이었으나 스페인정부가 1776년 리오 데 플라타 부왕(副王)에게 넘겨주었다. 아르헨티나를 독립시킨 산 마르틴 장군과 칠레를 독립시킨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장군이 멘도사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점을 이용해, 스페인을 몰아내려고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1776(78?)-1842)가 칠레를 독립시킨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라는 이름은 칠레 곳곳에서 볼 수 있어 산티아고 시내를 남북으로 나누는 큰길도 오히긴스 거리이다.
칠레(Chile)라는 이름이 영어 단어의 “고추” 또는 “고추요리”를 뜻하는 “칠리(chili)”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런 설명이 아마 칠레의 국토모양이 고추처럼 길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칠레가 그 지역에 흔했던 지빠귀계통의 칠리 새 울음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명이 더 정확하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된다. “칠리”라는 이름이 스페인사람들이 칠레에 오기 훨씬 전부터 그곳을 불렀던 이름이다. 칠레는 높고 험한 안데스산맥의 서쪽의 좁은 땅이어서, 당시 크고 평지가 많았던 아르헨티나에서 보면, 유형지 비슷했다.
칠레 땅에 있는 아라우카니안 족이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가운데 백인에게 힘으로 정복되지 않은 유일한 원주민이다. 칠레정부가 1887년에서야 조약을 맺어 겨우 땅과 부족을 칠레로 편입시켰다. 현재 순수한 아라우카니안 족이 5만 명 정도가 있으며 같은 계통으로 약 20만 명이 있다. 이들이 칠레의 9지역, 곧 산티아고에 남쪽으로 600 km 정도 떨어진 떼무코(Temuco)를 중심으로 한 칠레의 중부지역인 온대지방에서 모여서 산다. 칠레에서는 흔히 마푸체(Mapuche) 족이라고도 부른다.
아르투로 프랏(Arturo Prat)은 우리가 칠레에서 흔히 보고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그는 칠레해군의 영웅이자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다. 바로 칠레가 1838-39년과 1879-83년에 걸쳐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군과 싸울 때, 그가 페루전함에 자살공격을 감행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 때 뺏은 북쪽지역에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 가운데 하나인 아따까마사막이 있다. 아따까마사막은 사하라사막보다 더 건조해, 마치 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한다. 이 아따까마사막에 질산염과 구리가 많이 부존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 있는 추키카마타(Chuquicamata)광산이 세계에서 제일로 큰 노천구리광산의 하나이다. 칠레가 현재 세계최대의 구리광석을 생산하는 나라이자 수출하는 나라이다. 또 그 덕분에 “칠레초석”을 실어내던 항구인 이끼께(Iquique)가 칠레의 땅이 되었다. 이끼께는 산티아고에서 1,843 km 떨어졌으며 남위 20°12‘에 있다. 현재는 이끼께의 300 km 북쪽인 아리까(Arica) 북쪽까지 칠레의 영토이다.
질산염의 주성분은 질산나트륨이다. 백색에 조개껍데기처럼 깨어지고 유리 같은 광택을 내고 물에 잘 녹는 광물이다. 질산나트륨이 이른 바, “칠레초석”으로 1865년부터 유럽으로 엄청난 양이 수출되어 칠레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독일화학자 프릿츠 하버(1868-1934)가 공중질소 고정법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발명하면서 수요가 갑자기 줄었다. 처음에는 칠레초석을 화약원료로 쓰지 못했으나 후에는 화약원료가 되었다.
칠레의 기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북쪽 끝(남위 17°)부터 산티아고의 북쪽 300 km 정도까지인 남위 31°까지는 아타카마(Atacama) 사막과 안데스산맥 고산지대이다. 아타카마 사막이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 남쪽부터 콘셉시온 시가 있는 남위 37°까지는 지중해성 기후로 상당히 건조하다. 남위 37°부터 케이프 혼까지는 삼림지대로 겨울에 눈이 내린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많은 이민들이 칠레로 몰려들었다. 스페인계는 처음부터 많았고 독일, 아일랜드, 영국, 유고슬라비아, 프랑스계가 많이 모여들었다. 스페인계가 절대 많아 국민의 80% 정도를 차지하며 워낙 섞여 계파 사이에 갈등은 없다. 아시아계는 소수이며 그 중에서도 중국계는 칠레의 북쪽에 많다. 우리나라 교민은 1,700 명 정도라고 하며 주로 산티아고에서 개인사업으로 생활한다.
산티아고와 산타 루시아 공원---칠레는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이 1973년 9월에 무너지고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섰다. 지금은 피노체트마저 물러난 지 오래이다. 그래도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 피노체트 정권이 부패하지 않아, 지금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칠레국민의 상위 5%만 부유해 불만이 있으나 그래도 2/3가 중산층으로 살만 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중산층이 아주 적어 사회가 불안하다. 반면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으면서 경제는 나아졌지만 인권은 후퇴해 그를 지지하지 않는 지식인들도 있다. 칠레는 주로 구리나 목재 같은 원료와 수산물을 수출하고 제조업이 낙후해 공산품들은 상당히 비싸다. 칠레는 재료가 비싸고 인건비가 싸, 돈을 가진 사람이 살기에 좋아 하층민들의 불만은 상당하다.
현재 인구가 600만 명 정도인 산티아고 시내의 한 가운데에는 “루시아 성녀(Santa Lucia)”를 뜻하는 언덕인 산타 루시아가 있으며 공원이 되었다. 찰스 다윈이 비글호로 세계를 일주할 때인 1834년 8월, 산티아고에 와 산타 루시아 언덕을 올라간 적이 있었다. 산타 루시아 언덕에는 그가 올라왔다는 것을 기록한 글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다윈 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대 학생들이 포옹하는 장면들은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을 것이다. 산티아고(Santiago)가, 산 자고(San Jago)와 마찬가지로, 야곱(Jacob) 성인을 뜻한다.
산티아고는 분지에 건설돼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아 공기오염이 심하다. 그런 현상이 겨울에 더 심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차량 10 대 가운데 최고 4 대를 운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운행을 하지 못하는 차량 번호를 일일이 그 전날 뉴스시간에 공지한다. 여름은 그래도 나아 그런 일은 없지만 공기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칠레의 치안이 안전하지만 산티아고 시내도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배가 고프다고 손을 내미는 젊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외국인이므로 표적이 되기 쉬울 것이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19세기 초에 독립하면서, 장교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제대로 된 교육기관이 없으면서, 그래도 배웠고 힘이 있었던 계층이 장교계층으로 생각된다. 실제 장교들은 남아메리카 사회의 귀족이자 신사이자 양반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나 쉽게 장교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장교가 되려면 추천서가 필요하다. 곧 집안이 좋아야 한다. 칠레에서는 출생이 불확실하면 장교가 될 수 없다. 칠레의 육군장교는 군복이 독일장교와 비슷하고 해군장교는 영국해군장교와 비슷하고 공군장교는 미국공군장교와 비슷하다.
산티아고의 외항인 발파라이소의 위도가 남위 33°정도이다.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낙원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이는 발파라이소 북쪽 300 km 정도부터는 상당히 건조한 곳이며 산티아고도 건조하지만 발파라이소에는 숲도 있고 경치가 좋아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발파라이소가 오늘날 칠레 최대의 항구로 인구가 100만 정도이다.
길이가 8,850 km가 되어 산맥가운데 가장 큰 안데스산맥이 천연의 장벽도 되며 아르헨티나와 국경도 된다. 남아메리카의 북쪽에서는 대단히 높아서 6,000 m가 넘으나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낮아진다. 즉 남위 25°와 35°사이에서는 2,000 m 정도가 되며 그 남쪽은 1,000 m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그 부근의 지리를 아는 사람은 넘어갈 만한 길이 있다. 지금도 그 남쪽에서는 겨울에도 자동차로 안데스산맥을 넘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중부지방의 칠로에(Chiloe)섬이 “칠레의 일부”라는 뜻이며 산 카를로스가 오늘날 안쿠드이다. 칠로에 섬에는 서풍이 심하고 비가 많이 와 지금도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 칠레가 스페인한테서 독립하려는 운동을 할 때, 칠로에 섬이 왕당파의 마지막 보루로 1826년이 되어서야 왕당파가 모두 쫓겨났다. 칠로에 섬이 인류를 먹여 살리는 4 대 식품 가운데 하나인 감자의 원산지이다. 지금도 칠로에 섬에서 나는 좋은 감자는 모두 미국으로 수출된다.
칠로에 섬의 약간 북쪽 현재 호수가 많은 지방부터 띠에라 델 푸에고 섬 끝까지 약 1,500 km에 이르는 남아메리카 서해안 남부해안지방이 얼음에 깎인, 이른 바, 빙식지형이다. 마지막 빙하시대에는 얼음에 덮였던 곳으로, 현재는 얼음에 깎인 특징이 있는 지역으로 섬과 호수가 아주 많고 피오르드가 많아 해안선이 아주 복잡하고 경치가 좋다. 칠레는 2030년까지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려고 한다. 만약 뜻대로 된다면 세계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이다.
칠레에는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한 분이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889-1957)이고 다른 한 분이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73)이다. 붉은 칠레 돈 5,000 페소 짜리에 있는 여자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다. 20대 시절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 여자를 무척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남자가 자살했다고 한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그 충격으로 일생을 미혼으로 지내며 시를 써 1945년에 라틴 아메리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산티아고 부근에는 그 여자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생활했던 집?)가 있다. 시인이며 공산주의자였던 네루다는 197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칠레는 잘 알다시피 활화산과 지진이 많은 나라이다. 높이 2,652 m인 오소르노 화산이 완전한 원추형으로 위가 언제나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다. 모양이 아주 좋아 칠레를 대표하는 화산가운데 하나이다. 그 근처에 있는 코르코바도 화산의 높이가 2,300 m이다. 비야리까 화산이 발디비아의 동북동쪽으로 120 km 떨어지고 높이 2,847 m이다.
칠레에 로빈슨 크루소의 배경이 된 섬이 있다면 놀랄 것이다. 바로 칠레 산티아고의 서쪽인 동태평양에 있는 후안 페르난데스 군도가 그 섬이다. 이 군도에서 가장 큰 로빈슨 크루소 섬이 해양모험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발상지이다. 처벌을 하려고 그 섬에 강제로 내려진 선원이 고생하면서 살다가 구조된 실화가 그 소설의 배경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같은 스페인의 후손이고 천주교국가이다. 그러나 사이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비글해협 동쪽 입구에 있는 무인도인 레녹스. 픽톤, 누에바 섬, 세 개를 놓고 전쟁 일보 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바로 1978년 칠레 피노체트정부와 아르헨티나 비델라 정부 사이에 있었던 긴장이다. 당시 산티아고와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등화관제를 하면서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교황청이 중재를 해 화해해, 모두 칠레영토가 되었다. 그 후로 두 나라는 적국이 되었다. 지금도 국경이 문제가 되는 곳이 있다. 안데스산맥이 워낙 험해, 올라가지는 못하고 분수령을 국경으로 하기로 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에도 전쟁을 할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전쟁을 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기념해 무기를 녹여서 만든 커다란 예수상(Cristo Redentor)을, 산티아고 약간 북쪽의 칠레-아르헨티나 국경인 안데스산맥 능선에 건설했다.
칠레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점심시간이며 이 시간에 대부분의 개인 가게는 문을 닫는다. 또 달러를 바꿀 수 있는 환전상은 개인사업으로, 환전상마다 환율이 다르다.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내려 맨 처음 만나는 환전상은 바깥에 있는 환전상보다 비싸, 불리하다.
서울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페루 수도인 리마를 경유하는 길이 있다. 다음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이 있다. 전자는 매일 비행기가 있는 반면, 리마를 경유하므로, 걸리는 시간이 13 시간 30 분 정도이다. 반면 후자는 일주일에 세 번,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비행기가 있다. 그러나 경유하는 곳이 없어 시간이 훨씬 덜 들어, 10 시간이 조금 넘는다. 대한항공은, 잘 알다시피, 서울에서 오클랜드로 매일 날아간다.
슬픈 사연이 있어---푼타 아레나스에서 보이는 바다가 바로 마젤란해협이다. 마젤란해협에는 스페인이 이 지역을 개척했던 역사가 남아있다. 바로 그들이 마젤란해협에 만들었던 동네 “포트 패민”이다. 스페인 이름이 “푸에르토 델 암브레(Puerto del Hambre)”인 “포트 패민(Port Famine)”에는 대단히 고생했고 슬픈 사연이 있다. 1580년 에스페란사호로 마젤란해협까지 왔던 스페인 사람 페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는 마젤란해협 서쪽 입구의 큰 섬인 데솔레이션 섬에서 원주민 남자 두 사람을 붙잡아 각각 후안과 프란시스코라 이름을 붙여서 스페인의 필립 왕에게 데려갔다. 그는 대양을 제압하려는 전략에서 마젤란해협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필립 왕에게 마젤란 해협을 장악하기 위하여 요새들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스페인은 그 당시 나타나던 영국해적에게 대항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584년 3월 그는 마젤란해협의 북쪽해안 두 곳에 사람을 살게 했다. 첫째가 마젤란해협의 동쪽 입구로 들어와 첫 번째로 좁아지는 북쪽해안의 돌출지역인 오늘날 케이프 버진 근처로, 여기에 “농브레 데 헤수스(Nombre de Jesus)”를 세웠다. 두 번째가 오늘날 푼타 아레나스 남쪽 약 60 km 되는 곳으로 “킹 돈 펠리페(King Don Felipe)”였다. 두 곳 다 자연환경이 거칠었고 원주민의 공격으로 사람은 살기 힘든 곳이었다. 1586년부터 1589년에 걸쳐 역사상 세 번째로 세계를 일주했던 영국 항해가 토마스 캐번디시는 킹 돈 펠리페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 가운데 자기발로 배에 올라탔던 한 사람을 구조했다. 그는 그 곳을 “사람이 굶어 죽는 포구”라는 뜻으로 “포트 패민"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칠레정부가 세워놓은 표지판만이 그곳을 지킨다. 뻬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가 1530년 경 스페인에서 태어나 1589년 이후에 죽은 항해가이자 탐험가이다.
마젤란해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은, 대서양쪽에서 들어와 마젤란해협을 따라 북서쪽으로 나가는 길과 마그달레나 해협을 지나 나가는 길이 있다. 마그달레나 해협이 대서양쪽에서 들어와 남쪽으로 내려가던 마젤란해협이 북서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에 남북으로 발달된 작은 해협이다. 이 해협이 서쪽의 콕번해협으로 연결되어 태평양으로 나가게 된다.
마젤란(1480?-1521)이 세계를 일주할 때인 1520년 11월 28일 마젤란해협을 빠져 나와 그 다음해 3월 6일 괌섬에 도착했다. 그는 98 일 동안에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그 넓은 바다가 하도 평온해, “태평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가 바다가 유난히 험한 남위 50도와 40도에서도 평온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때는 바다가 예외로 평온했다고 생각된다.
푼타 아레나스---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는 영어로 Sandy Point이며 칠레정부가 마젤란해협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1848년 12월 16일 건설한 도시이다. 그러나 칠레정부는 원래는 푼타 아레나스 시가 건설된 남쪽 60 km에 요새 푸에르테 불네스(Fuerte Bulnes)를 건설했다가 이 자리로 옮겨 푼타 아레나스를 건설했다. 푼타 아레나스는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마젤란해협을 지나가던 모든 배가 쉬어갔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후 많이 줄어들었으나 최근에는 남극 때문에 점점 북적거린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는 인구가 12만 명 정도라고 하며 건물과 자동차가 조금씩 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푼타 아레나스가 수도에서는 2,000 km 이상 떨어진 오지로, 정부에서는 주민을 위하여 면세구역(zona franca)를 인정한다. 면세구역에서 구매한 물건은 이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면세구역은 북쪽에도 있다.
아메리카가 다 그렇지만 칠레, 또 푼타 아레나스도 이민으로 건설된 곳이다. 푼타 아레나스를 건설한 이민 가운데는 크로아티아-유고슬라비아 이민의 힘이 크다. 푼타 아레나스를 지나는 큰길가에 서있는 기념물이 그 사실을 말한다.
푼타 아레나스시에는 명물이 몇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공원묘지이다. 실제 잘 다듬은 정원수들을 보노라면 그 묘지는 묘지가 아니라 공원이라는 기분이 든다. 원래 이 공원묘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여기에서 살았던 토호의 땅이었다. 토호의 부인이 유언을 남겨 공원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유언에 따라 그 여자가 정문으로 들어간 마지막 사람이다. 그 공원에는 청동으로 된 원주민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게 빌면 뱃길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생겨, 그 동상 앞에는 언제나 꽃이 놓여있다.
칠레국영 관광공사에 소속된 호텔인 까보 데 호르노스 호텔 앞 마젤란 광장에 있는 마젤란 동상은 이 곳을 한 마디로 표현한 동상이다. 마젤란 동상 아래쪽에 잇는 인디언 동상의 오른발 발가락은 안전항해를 비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녹청색이 벗겨져 노랗게 되었다.
푼타 아레나스에는 몇 개의 박물관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마젤란 박물관, 살레시오 박물관, 마젤란대학교의 추억박물관이 주요하다. 세 곳 모두 나름대로 특징이 있어 부근의 역사를 알고 자연을 보려면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이다. 마젤란 박물관은 글자 그대로 마젤란해협을 발견한 다음부터 이 곳에서 일어났던 사람의 활동을 주로 전시한다. 한 때 여기에서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노벨 문학상 상장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라틴문자로 쓰여졌다고 생각되나 1945년 11월 15일 수상이 결정되고 12월 10일에 시상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1895년에 개관된 살레시오 박물관은 다른 것도 많지만 이 주변의 자연환경에 관한 전시물이 많다. 과거에는 너무 좁아 새 같은 동물표본들을 다 전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시 카메라가 몇 대나 번쩍거리는 박물관이 되었다. 추억박물관은 이 곳을 개발하면서 사용했던 옛날 기관과 차량들이 볼 만하다. 푼타 아레나스 남쪽 바닷가에는 푼타 아레나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위에서 말한, 유적지가 두 곳 있다. 모두 이 거친 자연 속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흔적이고 노력이 보이는 곳이다.
또한 푼타 아레나스 시는 모든 등산인이 마지막으로 등정하고 싶어한다는 또레스 델 빠이네(Torres del Paine) 봉이 있는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다. 그 곳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시대의 대자연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공원은 유네스코가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빠이네까지 거리가 400 km이므로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보아야 한다. 준비만 잘 하면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잘 수도 있다. 그러나 퓨마 같은 맹수가 있고 길을 잃을 위험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안전사항으로는 첫째, 반드시 숙소에 행선지를 남기고 둘째, 비상옷과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셋째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빠이네로 가는 길에 있는 밀로돈 동굴(Cueva del Milodon)은 19세기말에, 약 1만 년 전에 멸종한 땅늘보의 가죽과 배설물이 발견된 곳이다. 땅늘보는 나무늘보 같은 빈치류로 나무 위 아닌 땅위에서 살았다. 또 푼타 아레나스 근처에는 마젤란펭귄의 군서지가 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 땅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아르헨티나 비자가 필요하다. 버스는 자면서 가는 편안한 버스로 경치가 아주 좋아, 칠레사람은 거의 없고 관광객만 있다고 한다. 3 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바다 건너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땅이 띠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섬이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이 “불의 땅(Land of Fire)”이라는 뜻으로 마젤란해협의 남쪽에 있는 큰 섬이다. 원래는 1520년 11월 마젤란이 마젤란해협 동쪽 입구로 들어올 때, 원주민들이 연기로 신호를 하는 것을 보고 “연기의 땅 (띠에라 델 우모 Tierra del Humo)”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마젤란이 죽은 후, 세계를 일주한 부하들이 스페인 왕 찰스 5세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왕이 “불을 피우지 않고는 연기가 날리 없다”면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한편 마젤란이 “불의 땅”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주장도 있다. 넓이가 남한의 반 정도이며 협만과 수로가 많은 황량한 섬이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동쪽이 아르헨티나 영토이고 서쪽이 칠레 영토이다. 마젤란은 그 섬을 남극대륙의 북쪽끝으로 생각해, 섬(isla)이 아닌 땅(tierra)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르 매르 해협-스테이튼 섬-드레이크 해협-케이프 산 디에고----르 매르(Le Maire) 해협이 띠에라 델 푸에고 섬과 그 동쪽의 스테이튼(Staten) 섬 사이의 해협이다. 르 매르 해협과 스테이튼 섬은 1616년 1월 24일 네덜랜드 사람인 자크 르 매르와 윌렘 슈텐(Willem Schouten)이 “유니티(Unity)”호로 발견했다. “르 매르 해협”이라는 이름은 안트워프에서 큰 사업을 하면서 탐험을 조직했던 이삭 르 매르(Isaac Le Maire)를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때 “유니티”호에는 르 매르의 두 아들, 자크와 다니엘이 타고 있었다. 따라서 자크 르 매르가 그 해협을 발견했다고도 말한다. 스테이튼 섬은 그들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안데스산맥이 끝나는 스테이튼 섬의 최고지점은 높이가 1,120 m로 상당히 높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등뼈인 안데스산맥을 따라 내려가 육지가 끝나고 그 남쪽에 커다란 섬이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이다. 남아메리카 대륙 본토와 이 섬 사이의 해협이 바로 마젤란해협이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동쪽 끝이 바로 남아메리카 대륙끝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끝은 마치 쇠뿔같이 날카롭게 생겼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오른쪽, 즉 동쪽으로 상당히 큰 섬이 또 하나 있다. 그러나 보통 작은 지도에는 이 섬이 나오지 않는다. 이 섬이 바로 스테이튼(Staten) 섬이며 띠에라 델 푸에고 섬과 이 섬 사이의 해협이 르 매르 해협이다. 케이프 산 디에고가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남동쪽 끝에 있는 갑이다.
굿 석세스(Good Success) 만이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케이프 산 디에고 남쪽에 있으며 르 매르 해협으로 열려있는 작은 만이다. 스페인의 노달 형제가 1619년 1월부터 3월 11일까지 띠에라 델 푸에고 섬 둘레를 처음으로 일주 항해하면서 굿 석세스 만을 발견했으며 그들이 그 때 아우쉬 인디언과 처음 만났다.
드레이크해협은 남아메리카와 남극반도 사이의 바다로, 대서양에서 르 매르 해협을 지나 드레이크 해협으로 들어간다. 드레이크 해협은영국 모험가이며 항해가였던 프란시스 드레이크(1540(1543?)-96) 경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그는 1578년 9월 마젤란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왔다가 폭풍에 밀려 남쪽으로 밀려갔다. 그 때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에, 과거에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큰 바다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드레이크 해협은 이렇게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 전까지는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이 “남극(南極)”이라고 알고 있었다! 드레이크 경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 때 사람으로, 1577년부터 1580년에 걸쳐 골든 하인드호로 지구를 두 번째로 일주했으며, 살아서는 처음으로 세계를 일주했다. 그가 영국을 침공하려고 스페인의 카디즈에 모여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1587년에 기습해서 큰 타격을 입혔다. 다음해 영불해협에 집결했던 무적함대를 다시 공격해 스페인의 해군력을 궤멸시켜, 영국이 바다를 장악해 세계최강의 국가로 발전하게 한 장본인이다.
비참했던 띠에라 델 푸에고 섬 원주민---띠에라 델 푸에고 섬은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여행기인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를 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이 원주민에게 큰 충격을 받았던 곳이다. 다윈이 이곳에 왔던 1830년대에는 띠에라 델 푸에고 섬에는 네 부족이 있었다. 알라칼루프 족, 아우쉬 족, 오나 족과 야흐간 족이다. 아우쉬 족과 오나 족이 내륙에 살면서 걸어 다니면서 활로 사냥을 주로 했으며 알라칼루프 족과 야흐간 족이 해안에서 주로 카누를 타고 다니면서 바다생물을 사냥했다. 알라칼루프 족이 마젤란해협에서도 서쪽해안지방에서 살았고, 원주민 가운데서도 비참한 생활을 했던 부족이 야흐간 족이다. 네 부족을 합해서 약 8,000 명에서 1만 명에 이르렀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원주민들이 야오-야오라고 부르는 버섯을 먹었다. 이 버섯이 백인들 사이에서는 인디언의 빵 또는 다윈 균류로 알려졌다. 인디언들에게 가장 필요한 늦가을과 겨울에 황색이나 주황색인 살구모양의 둥근 포자낭이 이 버섯에서 만들어진다. 늦봄에 포자낭에 구멍이 생기면서 포자가 흩어지고 땅에 떨어져 쪼그라지면서 검게 변한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에는 다른 종류의 사이타리아 버섯류가 있으며 이 버섯이 나뭇가지를 따라 일렬로 갈색의 작은 배처럼 생장한다. 이 다윈 균류에는 1 목, 1 과, 1 속에 10 종이 넘는 종류가 있으며 모두 남반구 너도밤나무에 기생한다. 균류의 균사체가 나무에 기생하기 시작하면 나무가 이에 대항하면서 속이 아주 복잡한 큰 옹이가 생긴다. 균류를 크게 곰팡이와 버섯류로 나누며 다윈 균류가 버섯류이다. 이 버섯류가 특별한 맛이 없고 들큼하지만 정말 배가 고플 때에는 먹을 만 하다고 한다. 어리고 연할 때 먹기에 제일 좋으나 일년 내내 여러 종이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너도밤나무의 껍질을 벗긴 후 흘러나오는 수액도 마실 만하며 인디언들과 개척초기의 백인들이 마셨다. 이 외에도 가시가 나는 작은 나무에 열리는 깔라파테라는 열매도 먹을 만하다. 특별한 맛은 없고 들큼할 뿐이다. 칠레사람들은 가끔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띠에라 델 푸에고 섬 원주민이 식인종이라는 주장도 있고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비글호 항해기”를 읽어보면 원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고기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람이 먹을 것이 없을 때 사람고기로라도 연명한다는 것이 문명인에게는 혐오스러울지 몰라도 인간 자체로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원주민 사이에서는 도저히 치료하지 못할 병에 걸린 경우라거나 불구자는 목을 졸라 안락사를 시킨 경우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이든 여인들이 언제나 희생된 것은 아니며 그들이 카누를 잘 다루거나 경험이 많아, 오히려 둘째 부인이나 셋째 부인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백인이 오기 전의 원주민생활을 보여주는 프레 콜롬비아노 박물관(Museo Pre-Colombiano)에서 발간한 책을 보면, 띠에라 델 푸에고 섬의 원주민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제사를 지냈다. 그들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몸을 하얀 색으로 화장하고 머리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관을 쓴 몇 명의 남자가 둥글게 어깨동무를 했다. 또 탈을 쓴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원주민의 하나인 오나 족에게는 아름답고 슬픈 전설들도 있으며 그 전설에는 나무, 바위, 땅속 깊은 곳, 하늘의 영혼, 이끼귀신, 인간의 유령, 눈과 바람을 만드는 하얀 귀신같은 영혼이나 귀신들도 등장한다. 전설이나 미신이나 춤이 거의 모든 민족에 공통된 것이라면, 띠에라 델 푸에고 섬 원주민이라고 해서 그런 전설이나 미신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를 덧붙이면 우리나라에서는 두 개의 출판사가 “비글호 항해기”를 발간했다. 그러나 범양사가 1991년에 발간한 항해기는 다윈이 쓴 “비글호 항해기”가 아니다. 그 책은 캠브리지 대학교 의과대학교수를 퇴임한 다윈의 증손자인 리차드 다윈 케인즈가 편집한 책(The Beagle Record)으로 “비글호 기록”정도로 번역됨직하다. 내용은 다윈의 항해기, 다윈의 일기, 함장의 항해기, 편지와 다른 것들을 묶은 것이다. 원본은 아주 양이 많은 데 뽑아서 번역했다. 그러나 전파과학사가 1993년에 발간한 “비글호 항해기”는 1860년에 발간된 다윈의 항해기 3 판을 완전히 번역한 원전 완역본이다. 다윈이 쓴 “비글호 항해기”를 보면 다윈이 어떤 사람인지, 왜 영국이 지금도 선진국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포켓판은 웬만한 미국서점의 Science 코너에서 살 수 있으며 US$ 10이 안 된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교양으로 반드시 읽어야 할,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여행기이다.
*註 2. : 보다 더 조사해 봐야할 사항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미의 포도나무 식재는 유럽인들이 그들의 황폐화된 포도나무를 대신할 새로운 땅을 찾아 대체재배지로 찾았던 땅으로 보인다. 따라서 파이록셀라를 피해갈 수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고, 이미 이 곤충에 면역이 이루어진 포도나무를 이식해서 재배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동창회 동기포럼 지인의 글 옮겨 놓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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