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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세기의 연애소설 '춘향전'은 실화다?

세기의 연애소설 '춘향전'은 실화다. - 태고의 멋과 지조 높은 선비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 봉화 계서당(溪西堂)
 

1, 오지(奧地) 중의 오지 경북 봉화(奉化)
 
(1) 기개(氣槪) 높은 선비의 숨결과 원시 자연이 살아 숨쉬는, 정자(亭子)·열목어·춘양목·청량산의 고장
 
전체 면적이 1201㎢인 봉화군은 백두대간 주맥인 태백산과 소백산 중앙에 위치한 영남의 최북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크기가 서울의 두 배에 이르지만 인구는 고작 3만4000여명 밖에 안되어 인구 밀도가 전국 최하위이기에 그 만큼 자연환경이 잘 보전돼 있다. 백두대간 주맥이 지나 가는 길목이기에 하늘을 가르는 울울창창한 춘양목과 열목어가 서식하는 맑은 계곡은 태고의 숨결을 느끼게 하지만, 전체 면적의 83%가 임야이고 이 가운데 30% 가량이 금강송이라고 불리는 소위 춘양목 산지로 수달과 반딧불이가 곳곳에 서식하고 있으며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이기도 하다. 이같은 청정 봉화는 수려한 풍광 탓에 전국에서 정자가 가장 많다. 때문에 은은한 묵향(墨香)과 지조높은 선비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다. 마을마다 고색 창연한 정자와 향교, 서원, 비각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전통의 향기를 전하고 여기에 더불어 조선시대 5대 사고 가운데 하나인 태백산 사고지(史庫址)가 있고, 김생·최치원·공민왕과 노국공주·퇴계 이황 등의 체취가 배어 있다. 여기에 춘항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가 하면 수많은 의병과 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봉화에는 곧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이 들어설 예정으로 섣부른 개발 보다는 잘 보전해온 자연자원을 활용, 세계적인 산간휴양도시로 거듭날 ‘푸른 꿈’에 부풀어 있다.

봉화읍내 전경. 영남의 최북단에 위치한 봉화군은 면적이 서울의 두 배에 이르지만 인구는 3만4000여명으로, 인구 밀도가 전국 최하위다. 그런 만큼 자연 환경이 잘 보전돼 있다. | 봉화군 제공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권역을 관통하는 도로를 계속 따라 가다 보면 낙동강 상류 이나리천을 끼고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만나게 된다. 바로 봉화의 남쪽 관문으로 산세가 수려해 작은 금강산으로도 불리는 청량산이다. 봉화 명호면과 재산면에 위치해 있으며 산세가 안동 도산면과 예안면까지 뻗어 있다. 가장 높은 장인봉(해발 870m)을 비롯하여 12개의 봉우리가 한 폭의 수묵화 처럼 펼쳐져 있기에 조선시대에 금강산·지리산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산행기를 낳은, ‘규모는 작으나 선경(仙境)의 명산’이라고 주세붕이 극찬한 산이다. 퇴계 이황도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서는 선비노릇을 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청량산을 아꼈다. 12개의 빼어난 바위 봉우리가 절경을 이뤄 주왕산·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도 불리며 1982년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으로 산내에는

청량산 전경. 12개의 빼어난 바위 봉우리가 절경을 이뤄 작은 금강산으로 불린다. 퇴계 이황 선생과 최치원, 김생 등 선현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는, 봉화를 대표하는 명산이다. | 봉화군 제공

과거 20여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청량사 유리보전과 응진전만이 남아 있다. 퇴계 이황이 공부한 곳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와 김생이 글공부하던 김생굴,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 홍건적의 난을 피해 한 때 이 곳에 머문 공민왕을 모신 사당인 공민왕당, 청량산성 등 수많은 역사문화 유적이 있는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량사다.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는 고찰로 바위 봉우리 아래 가파른 비탈에 터를 잡았다. 중심전각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은 이곳으로 피난왔었던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졌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가을 밤이면 산사음악회가 열려 전국에서 수천명의 인파가 몰린다. 선학봉(해발 826m)과 자란봉(해발 806m)의 해발 800m 지점에는 국내에서 가장 높고 긴 출렁다리가 설치돼 있는데, 양 봉우리를 잇는 ‘하늘다리’로, 길이가 90m, 높이가 70m에 이른다. 강 건너 집단시설지구에는 청량산의 자연생태와 역사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청량산박물관과 농경문화전시관이 있다.

청량사 산사음악회 모습. 청량사에서는 해마다 가을 밤에 산사음악회가 열려 전국에서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 든다. | 봉화군 제공

봉화에는 해발 1000m 이상의 고봉이 10여 개에 이르고 계곡은 더 없이 맑다. 석포면 쪽에 있는 청옥산(해발 1276.5m)은 기이한 모양의 바위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침엽수림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봉화~태백간 국도변에 위치한 청옥산자연휴양림은 소나무·잣나무·낙엽송 등이 울창해 산림욕을 하기에 더 없이 좋다. 청옥산 아래 백천계곡은 물이 맑고 수온이 낮은 청정수역으로, 빙하기 어족인 열목어가 산다. 한여름에도 물이 차가워 천연기념물 제74호 열목어 서식지로 지정된 곳으로 오염되지 않은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이기도 하다.

봉화의 진산으로 불리우는 문수산(해발 1205.6m)은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서벽리, 봉성면 우곡리에 걸쳐 있다. 문수보살과 관련된 다양한 설화가 전해져 문수산이라 불리는 이 산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축서사가 있고, 오전약수·두내약수·다덕약수 등 봉화를 대표하는 3대 청정약수가 주변에 있다. 춘양에서 자라는 금강송을 말하는 춘양목은 춘양면 서벽리 일대에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데,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라는데다 재질도 단단해 에로부터 궁궐을 지을 때 사용돼왔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제(日帝)가 이 소나무를 운반할 목적으로 오지인 이곳 춘양면에 기차역을 세우면서 춘양목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졌다.

여기에 더하여, 춘양면의 옥석산(해발 1242m)과 구룡산(해발 1345.7m), 물야면의 선달산(1236m), 봉화읍의 석천계곡, 소천면의 고선계곡, 법전면의 사미정계곡 등 봉화 곳곳에는 때묻지 않은 원시의 자연이 살아 쉼쉬고 있다.

청옥산 아래 백천계곡. 물이 맑고 차가워 세계적인 희귀종인 열목어가 서식하는 청정계곡이다. | 봉화군 제공

(2) 다양한 문화유산의 보고 - ‘남원은 춘향, 봉화는 이몽룡’, 영남 선비의 고고함에
반한 호남 처녀
봉화는 수려한 경관과 함께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바, 그 첫째가 봉화읍 유곡리(酉谷里)의 닭실마을로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충재 권벌 선생(1478~1548)이 벼슬에서 물러나 자리잡은 곳으로 안동 권씨의 본향이이다.
닭실마을 전경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金鷄抱卵形)으로 풍수상 길지(吉地)로 꼽히며, 영남 선비의 고고함이 배어있는 마을인데, 주변 송림과 계곡이 아름답고 충재 선생이 지은 청암정과 선생의 아들 권동보가 석천계곡의 암반 위에 지은 아름다운 석천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안동 권씨 집성촌인 이 곳의 ‘한과’는 ‘500년 내림 손맛’으로 지금도 권씨 집안 며느리들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는 바, 전국에서 으뜸가는 명품 한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바로 ‘닭실 유과(油菓)’다. 이곳 외에 물야면에는 ‘이도령’의 체취가 물씬 배어 있기도 하다. 조선조 3대 소설 중의 하나인 연애소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李夢龍)의 실제 모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1595~1664) 선생의 생가이자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조선 중기 경북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를 보여주는 창녕성씨(昌寧成氏) 계서공파(溪西公派) 종택(宗宅)인 계서당(溪西堂,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71호)이 물야면 가평리에 있기 때문이다. 계서당에는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 높았던 성이성 선생을 기리는 사당과 임금이 내린 어사화 등이 있으며 500여m 가량 떨어진 곳에는 남원부사를 지낸 부친 성안의(成安義, 1561~1629)를 기리는 부용당 사당이 있다.
 
물야면에 있는 계서당.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성이성의 생가다. | 봉화군 제공

태백산 아래 춘양에서 북쪽으로 8㎞ 가량 떨어진 각화산 중턱에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세운 각화사가 있다. 절 뒤쪽 산비탈을 올라가다 보면 태백산 사고(史庫) 터가 나온다. 조선 후기 5대 사고 가운데 하나로 조선 선조 39년(1606년)에 건립돼 1913년까지 300여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이다. 이 곳에 보관되어오던 조선왕조실록은 848책으로,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로 이장됐다가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고 건물은 해방 전후에 소실됐다.

각화산에 있던 태백산 사고의 옛 모습.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해방 전후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 봉화군 제공

(3)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와 아름다운 절, 그리고 독립운동의 산실 바래미마을 
절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문수산 능선의 축서사(물야면 개단리)는 신라시대(문무왕 13년)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 보다 3년 앞서 창건했다.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붙타 현재는 대웅전과 요사채만 남았는데, 대웅전에 봉안된 ‘석불좌상 부광배’는 석조 비로자나불상에 목조 광배가 배치되어 있으며 보물 제995호다. 물야면 북지리의 나즈막한 산 밑에 자리잡은 지림사도 신라시대 고찰로, 한때 승려가 500명이 넘는 대사찰이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암벽에 조성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국보 제201호다.
 
문수산 능선에 있는 축서사.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 보다 3년 앞서 창건했다. 대웅전에 봉안된 ‘석불좌상부광배’는 보물 제995호다. | 봉화군 제공

춘양면 의양리의 한수정은 충재 권벌 선생의 2대손인 권래가 세운 정자로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뜻에서 한수정(寒水亭)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봉화에는 이처럼 현존하는 정자가 101개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해 선비들이 중앙정치에서 물러나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기 좋았기 때문인 듯 하다.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전통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다.

이 마을 남호구택은 일제 강점기 때 명망높은 부호인 남호 김래식 선생이 살던 집이다. 남호 선생은 전 재산을 저당 잡히고 대부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했다. 이웃한 만회고택은 3·1운동 직후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겨울철이면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는 승부역. 태백준령 협곡에 위치해 소박한 산골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 봉화군 제공

 
(4) 한국에서 가장 외진 땅
 
모두에게 잊힌 땅인 절대 오지, 봉화가 일반인에게 다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영화 ‘워낭소리’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와 함께 자란 기성세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무대가 바로 이곳 상운면 하눌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산골짝 마을. 그나마 읍 소재지에는 4, 5층짜리 건물이 몇 동 있지만, 읍을 제외한 지역은 밋밋하다. 그 덕에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정자가 가장 많아 확인된 것만 101곳, 사라진 정자까지 포함하면 170 곳을 훌쩍 넘긴다고 한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하더니, 오지라는 점 덕분에 지금 시대에 오히려 각광받고 있다. 
     오전약수터에 있는 보부상 조각상.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 태백과 거기서 굽이쳐 나온 소백의 틈, 이른바 양백 사이(兩白之間: 정감록에서 十勝地라 부름)에 자리한 데다 태백산과 청량산, 소백산으로 둘러싸여 세숫대야의 물처럼 고요히 담겨 있는 땅. 분지인 만큼 개마고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춥고 눈까지 많다. 그래서 기차역조차 '봄볕이 간절하다'고 해서 춘양역(春陽驛)으로 불린다. 또한 이곳에서 자라는 금강 소나무의 이름마저 춘양목(春陽木)인 것이다.
동해안 울진의 해산물과 영남 내륙의 농산물이 오고 가는 땅, 봉화는 아득한 옛날, 보부상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었다.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등짐을 지고 고갯길을 집 삼아 다니던 사람들, 울진에서 해산물을 잔뜩 지고 멀리 안동 벌로 오가는 고된 여로를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피곤한 보부상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 오전약수터다. 이들이 '쑥대밭에서 잠시 졸다 꿈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약수터 입구에는 보부상 조각상이 서 있긴하지만, 미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길 없는 조각상은 다소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탄산수인 오전약수는 탄산음료의 독특한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4) 한국에서 가장 외진 땅
 
모두에게 잊힌 땅인 절대 오지, 봉화가 일반인에게 다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영화 ‘워낭소리’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와 함께 자란 기성세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무대가 바로 이곳 상운면 하눌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산골짝 마을. 그나마 읍 소재지에는 4, 5층짜리 건물이 몇 동 있지만, 읍을 제외한 지역은 밋밋하다. 그 덕에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정자가 가장 많아 확인된 것만 101곳, 사라진 정자까지 포함하면 170 곳을 훌쩍 넘긴다고 한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하더니, 오지라는 점 덕분에 지금 시대에 오히려 각광받고 있다. 
     오전약수터에 있는 보부상 조각상.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 태백과 거기서 굽이쳐 나온 소백의 틈, 이른바 양백 사이(兩白之間: 정감록에서 十勝地라 부름)에 자리한 데다 태백산과 청량산, 소백산으로 둘러싸여 세숫대야의 물처럼 고요히 담겨 있는 땅. 분지인 만큼 개마고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춥고 눈까지 많다. 그래서 기차역조차 '봄볕이 간절하다'고 해서 춘양역(春陽驛)으로 불린다. 또한 이곳에서 자라는 금강 소나무의 이름마저 춘양목(春陽木)인 것이다.
동해안 울진의 해산물과 영남 내륙의 농산물이 오고 가는 땅, 봉화는 아득한 옛날, 보부상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었다.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등짐을 지고 고갯길을 집 삼아 다니던 사람들, 울진에서 해산물을 잔뜩 지고 멀리 안동 벌로 오가는 고된 여로를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피곤한 보부상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 오전약수터다. 이들이 '쑥대밭에서 잠시 졸다 꿈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약수터 입구에는 보부상 조각상이 서 있긴하지만, 미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길 없는 조각상은 다소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탄산수인 오전약수는 탄산음료의 독특한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5) 태백준령 산간 협곡에 위치한 승부역과 워낭소리·솔향기에 깃든 느린 삶, 백두대간 산림휴양도시 푸른 꿈

봉화에서도 석포면 승부리는 태백준령 산간 협곡에 있는 마을이기에 오지중의 오지로 꼽히는 곳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차가 다니지 못해 주민들이 12㎞ 가량 떨어진 면 소재지까지 걸어다녀야 했다. 지금도 차량 교행이 안돼 초보 운전자들은 식은 땀을 흘리는 이 오지마을에 겨울철이면 관광객들이 몰린다. 얼마전부터 서울역을 출발, 국내 최고지에 있는 태백 추전역 등을 도는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철 관광객들은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라는 승부역에 내려 역 앞 강변에서 썰매를 타거나 장터에서 시래기국밥과 손두부 등을 먹으면서 추위를 녹이고 소박한 산골의 정취를 만끽한다.

상운면 하눌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찰영했던 곳으로 주인공 최 할아버지의 집 근처에는 소와 달구지를 탄 할아버지의 조형물이 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부지런한 노인과 수십년간 주인에게 순종하고 살았던 늙은 일소의 이야기가 마을 여기저기에 배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어린 시절 이련한 추억의 한자락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또 봉화에는 ‘외씨버선길’이 지난다. 외씨버선길은 청송 주왕산에서 강원도 영월 관풍헌까지 170㎞에 이르는 도보 여행길로 국내에서 오지로 꼽히는 경북 청송·영양·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이 뜻을 모아 다듬었다. 봉화 춘양면 코스는 사과꽃 향기, 솔 향기 따라 편안하게 걷는 길이다. 논밭, 사과나무밭, 옛 모습 그대로의 흙벽집들이 이어지는 정겨운 길이다.
 
관광객과 주민들이 한여름 밤에 봉화읍 내성천에서 은어를 잡고 있다. 봉화에서는 해마다 여름 휴가철이면 ‘봉화은어축제’가 열린다. | 봉화군 제공

봉화에는 사람을 숨쉬게 하는 ‘느린 삶’이 있고, 자연은 잘 보전돼 있다. 우리나라 외진 곳에 있어서 번잡하지 않다. 도회생활에 지친 도시민들이 발길 닿는대로 걸으며 평상심을 찾기 좋은 곳이다. 현재 봉화에는 한반도의 핵심축인 백두대간에 서식하고 있는 식물종을 체계적으로 보존·연구, 자원화 하고 생태 교육 및 체험 시설 등으로 활용하기 위한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이 조성되고 있다. 춘양면 서벽리 문수산과 옥석산 일대 5179㏊(중점시설지구 206㏊, 생태탐방지구 4973㏊)에 백두대간의 상징 동물인 호랑이가 서식할 수 있는 ‘호랑이숲’과 고산식물원·백두대간생태숲·종자저장시설·연구동 등을 조성하는데, ‘호랑이숲’에는 울타리를 치고 실제로 호랑이가 살도록 한다고 한다.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은 산림청이 2515억원을 들여 2011년 12월 공사에 들어가 2014~2015년쯤 완공할 예정이다. 그동안 봉화군에는 단일 국책사업 하나 없었다가 잘 보전해온 자연자산이 대규모 국책사업을 이끌어낸 것이다. 지금 봉화는 ‘산림생태휴양 메카’로 거듭날 꿈에 부풀어 있다.
 
 
2, 소설 '춘향전(春香傳)'의 실존 인물 계서 성이성(成以性)의 고택
계서당(溪西堂)
 
 
백두대간의 주맥이 지나가는 길목이기에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물야면은 오지 중의 오지이자 헌걸찬 백두대간의 주릉을 닮아 기개 높았던 영남사림들의 본향이기도 한데, 바로 이곳에 조선조 3대 소설 중의 하나인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의 생가가 있다. 지금까지 작자 미상 소설로만 알려진 춘향전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남자 주인공 이몽룡(성이성)의 지인인 조경남이 각색된 실화소설이다. 다소 의외의 뚱딴지 같으면서도 약간 뜨악한 주장이긴 하지만, 소설 춘향전을 읽으면서 누구나 실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던 생각이 맞아 떨어져 근래 그에 합당한 증거가 발견되었기 떄문이다. 그 실재가 바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오지로, 오지 중의 오지라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계서당길 24)에 있는 소설 춘향전의 남자주인공 이몽룡의 고향집인 계서당(溪西堂: 국가지정 주요민속문화재 제171호))으로  ‘숨겨진 봉화의 보물’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곳이다.
이곳은 춘향전의 남주인공인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1613년(광해군 5년) 건립해 후학 양성에 힘쓴 곳이다. 이는 그간 발견된 여러 정황상 성이성은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여겨진다. 경북 영주에서 고려 말 두문동으로 숨어 들어 갔던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성만용의 7대손인 부(父)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1607 ~ 1611)와 모(母) 예안 김씨[경상우도 관찰사 백암(栢巖) 김륵의 종손녀로 김계선의 딸] 사이에서 출생해 1627년(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승정원 부정자, 1635년(인조 13년) 정언, 부수찬, 부교리, 1636년(인조 14년) 지평, 1637년(인조 15년) 헌납,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을 거친 후 이어 네 차례 암행어사를 맡았고 사후에 부제학으로 추증된 조선조 총 215명의 청백리 중 한 명으로 녹선(영의정 되기 보다 훨씬 명예롭고 더 힘듬)된 분이다. 그는 1637년 헌납이 되었을 때 당대 세도가인 윤방, 김류, 심기원, 김자점 등이 나라를 그릇되게 이끌고 충성스럽지 않다고 그죄를 논했을 정도로 직간을 알삼았기에 주위의 시기를 받아서 승진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진주, 강계 등 네 고을 수령을 역임시 주위의 칭송을 들었는데, 특히 진주 부사 재임시에는 어사 민정중이 선정을 베푼다고 보고하여 표리(表裏, 옷감)를 받았고, 강계 고을을 다스릴 때는 삼세(蔘稅)를 면제해 주어 1660년 평양감사 임의백이 '관서활불(關西活佛: 살아 있는 부처)'로 칭송했을 정도로 백성들을 위했기에  그가 다녀간 합천, 영양, 창원, 진주에 청백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총 4차례 어사(43세 때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암행어사, 45세 때 호남암행어사, 53세 때 호남암행어사)가 되어 암행하면서 탐관오리들을 단죄했다.
 
이같은 사실은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의 끈질긴 추적 끝에 창녕성씨 가문의 사위였던 고(故) 이휘교(영남대 중문과)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3권짜리 교와문고  전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므로서 밝혀진 사실이고, 이를 바탕으로 KBS TV는 ‘역사 스페셜’을 통해 “이몽룡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봉화 땅을 밟는 외지인에게 계서당은 의외의 놀라움을 안긴다. 요즘 말로 치면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대목이기 떄문이다.
관련사료들과 안내판 및 팸플릿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아버지 성안의(1607 ~ 1611)가 4년간 남원부사로 재직할 당시 10대(12살 때 부터 16살 때까지)의 성이성은 남원 땅에서 과거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한루를 구경하던 중 기생 딸 춘향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요즈음 말로 첫 눈에 필이 꽂힌 것이다. 이후 아버지가 한양으로 부임하자 아버지를 따라가야만 했었던 성이성은 춘향과 결별하게 되었고 후일 그는 과거에 급제했다(33세 때). 그 사이 춘향이는 관기의 신분상 수절(守節)이 불가능하였기에 정절을 지키다가 옥사했다. 이후 그는 두 차례 호남으로 암행했는데 인조 25년 정해년(1637) 11월 5일 부터 12월 10일 까지 두번쨰 호남을 암행했을 때인 12월 1일 순천에서 남원으로 올라 올 때 남원부사 송흥주가 마중나왔으며 진사 조경남의 집에 머물렸다고 한다. 그 때 그는 광한루를 찾았고 이 때 늙은 기생(老妓) 여진(女眞)과 늙은 서리(老吏) 강경남(姜敬南)이 그를 맞이 하였는데, 이후 주위를 물리고 눈내리는 밤 이들과 광한루 난간에 앉아서 소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지었던 시를 자신의 저서인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에 님긴다. 그 내용이 그의 8대 후손 종진(鐘辰)이 1863년(철종 14년)에 펴낸 '계서일고(溪西逸稿)' 중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에 나오는 바, 그 내용은  “눈이 온 산야에 내려 대나무 숲조차 하얀, 눈 내리는 겨울 밤 광한루에 올라 어릴적  소년시절의 옛 생각을 회상하니 밤늦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雪色萬野 竹林階白 乃思少年事 深夜不能寢)”고 기술했다. 이 때의 '소년시절의 일'이란 춘향이와의 사랑이였으리라. 또한 호남암행시의 암행어사 출두사건은 그의 4대 손(孫)인 교와(僑窩) 성섭(成涉, 1718 ~ 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 교와문고 3권)'에 자세히 실려 있다. 전란 후 힘든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석천현감이 생일을 맞이하여 이웃한 12고을 현감들을 초빙하여 음주가무를 즐길 때 걸인 차림의 선비가 지나가다가 음식을 청했고, 운봉현감이 시를 지으면 밥을 주겠다고 하자 즉석에서 일필휘지로 갈긴 시(詩)가 바로 춘향전 하이라이트에 등장하는 암행어사 출두를 알리는  저 유명한 시(詩)인 바,
 
"금잔에 담긴 맛있는 저 술은 천 사람의 피고(金樽美酒千人血)
옥 쟁판에 담긴 기름진 저 술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玉盤佳肴萬姓膏)
촛농 흘러내릴 때 백성들의 눈물 흘러 내리고(燭淚落時民淚落)
노랫소리 높이 울리는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歌聲高處怨聲高)" 다. 
 
그런데, 성섭의 '필언산어'에는 춘향전과는 달리
 
"잔에 담긴 맛있는 저 술은 천 사람의 피고(樽美酒千人血)
쟁판에 담긴 기름진 저 술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盤佳肴萬姓膏)"라고 되어 있어 비록 '金樽美酒'가 아니라 '樽美酒'로, '玉盤佳肴'가 아니라 '盤上佳肴'로 되어 있지만, 그 본 뜻은 대동소이한 고로 누군가 춘향전을 지을 때 성이성이 지은 시에서 한자씩을 바꾸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이 시(詩)의 원전은 산서 조경남이 지은 '속잡록'에 나온다. 속잡록에는 위와 똑같은 시가 광해군 때 명나라 사신으로 온 명장(明將)  조도사(趙都司)가 광해군의 난정을 꾸짓는 시인 '광해군 난정기시(光海君亂政譏詩)'가 실려 있는 바, 그 내용인즉슨
 
"맑고 맛있는 저 술은 천 사람의 피고(淸香美酒千人血)
잘게 썰은 기름진 저 술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細切佳肴萬姓膏)
촛농 흘러내릴 때 백성들의 눈물 흘러 내리고(燭淚落時民淚落)
노랫소리 높이 울리는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歌聲高處怨聲高)" 라고 나와 있으니
 
위의 춘향전에 나오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것을 근거로 유추해 볼 때, 춘향전은 성이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성이성이 제2차 호남 암행시에 묵어갈 정도로 친분관계가 있었던 산서 조경남이 지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경남은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하면서 주희의 고루한 유학(性理學)에 중독된 당시의 사회분위기상 혹 있을지도 모를 후화(後禍)를 피하기 위하여 이름과 성을 모두 바꾸었다고 추측된다. 즉 성몽룡(成夢龍)이 아닌 이몽룡(李夢龍)으로. 왜냐하면, 주희의 성리학상 그 당시 양반가에서 기생과 얽히는일은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니였기 때문이리라. 그 대신 그는 여자 주인공의 성을 남원부사를 지낸 양반가문인 성이성 가문의 창녕 성씨(昌寧 成氏)를 따와서 반성(班姓)인 '성(成)'씨로 안배했으니 이 또한 절묘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관기 월매의 딸 춘향이의 이름이 '성춘향(成春香)'이 되었던 것이리라.
 
이같은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무명의 춘향전 작자( 무명의 작가가 아니라 성이성과 절친했던 진사 조경남이겠지만 그 당시 사회분위기 상 이름을 숨겼다고 생각된다)는 성이성(成以性)의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이몽룡(李夢龍)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켰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낯선 이들은 안내 입간판이 전하는 러브 스토리에 고개를 끄떡이며 저마다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성이성의 사람됨과 관련하여 재미 있는 일화가 전한다. 이성이 자라는 것을 옆에서 보아왔던 백부 진사공은 " 장차 이 아이가 우리집을 크게 일으킬 것"이라고 했고, 12살 때 남원으로 부임하려가는 아버지를 따라 갈 때 우복 정경세를 찾았는데, 그 때 우복이 이르기를 " 자식이 이와 같으니 그대는 평생토록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의 예언대로 이후 성이성은 김굉필(金宏弼), 이연경(李延慶)의 학통(學統)을 이은 강복성(康福誠)의 문인(文人)으로 창녕성씨 계서공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창녕사람인 그가 봉화에 정착하게 된 연유는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를 피하여 부친 성안의가 식솔들을 창녕에서 처가(喪妻後 再娶)가 있는 영천군(榮川郡, 현 榮州市) 이산면으로 피신시켰던 탓에 그 후부터 이산면에 살게 되었던 것을 연고로 하여 성이성의 다섯 아들 중 맏아들이 충재 권벌의 후손인 석계(石溪) 권석충(權碩忠, 1606 ~ 1634)의 딸과 혼인하였기에 며느리 친정에서 닭실과 가까운 가두들(가평리)에 계서당 건립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이곳에 정착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고 전한다. 이같은 연유로 그가 처음 살았던 계사당 초옥과 그의 무덤은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계서당 사랑채.
 
3, 먹거리와 숙박
 
 (1) 먹거리
 
봉화와 춘양은 오지 중의 오지라서 내놓을 먹을거리가 변변치 않은 곳인데, 춘양목으로 불리는 잘생긴 소나무가 지천이다보니 솔잎조차 풍성해서 딱 세 가지 유명한 게 있다. 바로 송이, 약한우, 그리고 솔잎 돼지갈비다.
 봉화는 국내 제일의 송이산지다. 해서 맛있는 송이요리집들이 즐비하다. 여기에 약초를 먹여서 키운 약한우(藥韓牛)도 유명세에 한 몫을 한다. 참고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맛집으로는 송이요리 전문집인 '솔봉이 식당(010 -4717 - 6080, 054 - 673 - 1090, 송이돌솥밥, 한우, 은어구이)'과 '용두식당(054 - 673 - 3144, 송이요리전문점)' 등이 있고 약초를 먹여서 키운 약한우(藥韓牛) 요리집으로는 '은하약한우회관[054 - 673 - 1303, 소고기 전골, 양념불고기(1인분 10,000원)전문]'이 있으며, 솔잎 위에 갈비를 얹어두고 불을 지펴 구워내는 솔잎 돼지갈비 전문점들은 봉성에 가면 돼지갈비촌이 형성되어 있다. 솔잎 돼지갈비는 솔향이 고기 깊숙이 스며들어 송이 맛까지 나는데, 서울 강남에 있는 '봉성 솔잎갈비'의 본고장이 바로 봉성면 봉성마을이다. 빈한했던 시절, 이른 봄날 '송구'라 해서 물오른 소나무 가지의 단물까지 빨아먹던 장년 세대들에게 향수라는 맛까지 더해져 찾는 이가 많다고 식당 주인은 말한다. 그래서 옛 추억을 곱씹어 보고자 하는 장년 세대들은 한 번쯤 시식해 보기를 권한다. 조그만 시골 마을 봉성에 가면 돼지갈비촌이 형성되어 있으며, 어느집이나 맛은 대동소이하니 어느집을 찾아도 된다. '숯불식육식당(054 - 672 - 9130)', '삼봉참숯갈비식당(054 - 672 - 9783)', '오시오숯불갈비(054 - 672 - 9012)' 등.
 
(2) 숙박
 
숙박은 계서당에서 반가체험용 민박을 받는다. 요즈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귀중한 체험학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봉화 시내에 여관들이 있으니 이곳을 이용할 수도 있다.
 
4, 찾아 가는 길
 
(1) 가는 길
‘봉화 산골’. 봉화에는 늘 ‘산골’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 만큼 오지로 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접근성이 많이 좋아졌다. 중앙고속도로 영주 풍기IC에서 빠져 봉화로 가면 된다. 서울에서 3시간, 대구에서 2시간, 부산에서 3시간30분 가량 걸린다. 버스는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6차례, 대구 북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루 24차례 운행된다. 영주와 울진, 강원도 태백에서도 버스가 오간다.

(2) 정보 문의 및 연락처
봉화관광안내: 054-679-6114 
청량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54-679-6321
청옥산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054--672-1051
오전약수관광지 관리사무소: 054-672-6442
봉화군청 문화체육관광과: 054-679-6311/6603
청량사: 054-672-1446
봉화목재문화체험장 054-679-6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