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누구인가?
맹자는 맹가(孟軻/ 372-289 BC)를 높인 후대의 존칭이다. 사기(史記)에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鄒城市)의 작은 추(鄒)나라 사람인데,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 483?-402? BC), 곧 자사(子思)의 제자로 왕도(王道)의 이치를 통달하고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갔으나 등용되지 않아서 양(梁)나라로 양혜왕(梁惠王)에게 갔는데, 그를 등용한다고 했으나 약속을 아니 지켰다. 맹자의 말이 사리와 멀어서 세상 실정에 불합(不合) 한다고 여겼던 까닭이었다. 당시 진(秦)나라는 법가적(法家的) 상앙(商鞅/ 390-338 BC)을 등용, 초(楚)와 위(衛)나라는 군사가 오기(吳起/ 440-381 BC)를 등용했으며, 제나라는 손자(孫子)와 전기(田忌) 장군을 등용하면서 온 천하가 연횡(聯橫)과 합종(合縱)에 힘쓰고 공격하며 정벌하려는 현실과는 달리 맹자는 삼대지치(三代至治)의 덕으로 왕도론 만 강조하므로 당시 제후들의 이상과는 달랐다. 그리하여 맹자는 수제자 만장(萬章) 등과 함께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을 풀이하여 공자의 취지를 펼쳐서 맹자라는 7편을 지었다.
당(唐)의 한유(韓愈/ 768-824)는 요임금의 인의(仁義)의 도를 순(舜)에게, 순은 우(禹), 우는 탕왕(湯王)에게, 탕은 문왕과 무왕과 주공(周公)에게, 그 셋은 공자(孔子)에게 전하게 되었으며, 공자는 다시 맹자에게로 전하여졌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맹자의 가르침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성악설의 순자[荀況/ 약298-약238 BC]와 전한(前漢)의 법언(法言)의 저자 양웅(揚雄/ 53 BC-18 AD)의 인의의 도를 선택했어도 정밀하지 못하여 상세할 수 없었다고 풀이했다. 한유는 맹자의 도가 가장 순수하다고 보았고, 순자와 양웅은 맹자의 성선성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악을 지녔다고 주장하므로 흠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공자의 도는 너무 크고 넓어 제자들도 다 알 수가 없었으니 자기 나름대로 가르치고 각기 제후국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그 근원이 멀어지고 말단은 더욱 갈라지게 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맹자만이 공자의 정통을 따랐으니 자사에게 배웠고, 자사는 증자한테 배웠다는 정통이므로 성인 공자의 도를 원한다면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했다. 한유는 맹자가 없었다면 다들 왼쪽으로 여미는 옷을 입고 오랑캐의 말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며 맹자의 공로는 우 임금의 공로에 못지 않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송(宋)나라 정자(程子)도 ‘맹자가 감히 성인이라고 는 말할 수 없더라도 그의 학문은 지극한 곳에 까지 도달했다’ 고 했으며 공자가 인(仁) 하나는 말했으나 맹자는 입만 열면 인의(仁義) 두 자를 말했으니 그것 만으로도 공로가 매우 크다고 했고, 또 성선설과 양기론(陽氣論)에 관한 이론은 성인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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