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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소박한 선비는/ 淸貧一畝宮

소박한 선비는/ 淸貧一畝宮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학자 목은(牧隱 李穡/ 1328-1396)도 염원했던 그 일묘궁(一畝宮)에 노닐 계책은 정말 어떤 삶이었을까? 조선 5백 년의 선비들이 한 결 같이 노래한 청렴결백(淸廉潔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은 곧은 절개에 타협 없는 가난의 자초(自招)이고, 영혼의 자유는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기상(氣像)이었다. 실제로 아주 옛날 말쑥하고 정기에 넘친 청유(淸儒)가 사는 집의 구체적인 모습을 한 번 보자.

소박하면서도 자유스러운 전원 생활의 꿈이 목은이 더 일찍 실행했다면 그는 제 명에 죽을 수 있고 자식까지 희생되지 않았을 테니까, 종심(從心)의 나이인 70조차 다 못 채웠던 불행한 천재였다. 차라리 소박한 그의 염원이 애초에 옳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기(禮記 儒行)에서 보여준 고대의 청빈한 선비의 집이 바로 일묘궁(一畝宮)이다. 궁(宮)이란 경복궁, 창덕궁처럼 궁궐로 지금 이해하기 쉽지만 그저 그 글자는 집이라는 말이었다. 임금이 사는 집도 궁이었는데 그때부터 감히 서민의 집을 궁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래 임금의 집만이 궁이었지만, 실상은 초라한 집도 궁이었으니, 다만 그 규모가 작을 뿐이다. 1묘(畝), 또는 1무(畝)라는 대지의 넓이는 정확히 옛 사람들의 표현대로 가로와 세로가 각각 장정의 25보(步) 혹은 그 이하의 사이즈(size)다. 대략 25m 정도 아니겠는가. 그런 너비에다 울타리나 담장 정도를 돌려 치는 집이 바로 1묘궁[一畝之宮]이다.

그러면 그 대지에 건축물은? 그 가운데 자그만 띠 집이나 초가(草家)를 짓고 그 집에는 문짝조차 사립문인데, 사립문이란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이다. 남쪽이라면 흔한 대나무를 쪼개서 엮을 수가 있고 북쪽의 추운 데선 자연으로 흔한 싸리를 엮을 수가 있다. 창문은? 유리는커녕 창호지도 없던 고대에는 빛이 들어오게 하는 창문의 기능이 쉽지가 않았으니, 옹기 깨진 주둥아리 같은 걸로 흙 벽에다 끼워 조그만 빛이 들어오게 했다. 목은의 시구(詩句)에, “십 리 깊은 청산 속에 1무 집터에 지은 작은 집(十里靑山一畝宮)에서/ 무우의 언덕으로 바람 쐰 여러 청년들(侁侁童冠舞雩風)과/ 이웃에 터 잡고 우리 도를 마음껏 논하고 싶은데(卜隣甚欲論吾道)/ 여러 해 벼슬 차지하고 녹만 받음이 부끄럽네(尸素年來愧食功).” 선비의 가난한 집이 규두옹유(圭窬甕牖), 옹기 구멍의 들창과 홀[圭] 모양의 좁고 길쭉한 쪽문의 집이니 지극히 가난한 선비의 거처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儒行)에 일렀다, “선비는 가로 세로 10보(步) 정도의 담장 안에 거주한다. 좁은 방 안에는 사방에 벽만 서 있을 뿐이다. 대를 쪼개어 엮은 사립문을 매달고, 문 옆으로 홀[圭] 모양의 쪽문을 내고 쑥대를 엮은 문을 통해서 방을 출입하며, 깨진 옹기 구멍의 들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본다[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