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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인간이 돼지에게 세번 절한 치욕의 현장인 청량산 남한선성

1.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민족사의 중요 요충지였던 남한산성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에서 순조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제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제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지만 아직까지도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부터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기에 최근 문화유산에 대한 고한심고조와 더불어 서울 가까이에 있는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전장 8km에 이르는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성내에는 20여 개의 우물이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모암(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 혹은 양토(壤土)인바,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산지지형의 특성으로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2. 인간이 돼지에게 무릎을 꿇고 3번 절하다.

 

이같은 전략적 요충지인 남한 산성에는 우리민족의 비극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침공해 왔다.바로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평안북도 의주의 백마성에서 임경업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다. 수차례의 격전끝에 피해만 입은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주춤거린 청군은 청군은 전략을 수정하여 의주를 우회한 후 바로 한양으로 진격하는 방법을 택한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조선조정은 전쟁대책은 커녕 명분에 집착하는 부질없는 탁상공론으로 밤을 새운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청을 건국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김상용을 필두로 한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이 와중에 최종 결정권자인 무능한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전혀 아무 준비없는 전쟁을 시작하기로 하고 이를 국경수비대에 알리기로 한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과 경호경비체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 대군이 물밀듯이 한양으로 진격해 내려오는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전쟁발발 8일만에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페닉(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및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전쟁의 주모자였던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그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스스로 그 묘혈(墓穴)을 파는 자리인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그렇게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637년 1월26일, 드디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637년 1월30일 , 조선왕 인조는 항재 47일만에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인간이 돼지에게 항복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금수만도 못한 돼지'라고 무시하면서 깔보았던 바로 그 돼지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으면서 조아려야 했던 것이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국와인 인조가 평시에 그렇게도 경멸했었던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이는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진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을 잡아 가면서 이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이같은 치욕을 겪은 병자호란 후에도 인조는 아무문제없이 무탈하게도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원한서린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첫 번째는 한 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초등학생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을 물이 부족하고 협소한 남한산성으로 들어 간 일일 것이다. 이 성내는 너무 협소하고 또 우물이 20여개 밖에 없는 관계로 소수의 성내 백성은 비록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을 지라도, 대군이 주둔하고 생활하기에는 태부족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청태종이 침략해 온 병자년 겨울은 아주 혹독하게 추웠을뿐만 아니라 눈도 많이 와서 협소한 땅에서 대군이 친치고 전쟁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였기에 청태종이 단순히 포위만 하고 있어도 조선군은 1달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은 곳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0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3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남한산성을 돌아보면서 병자호란을 반추하여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인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병자호란을 통해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 및 고초를 겪었지만, 정작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심지어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373년 후 겨울 남한산성길을 걸으며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되돌아본다. 돌이켜 보건데, 꼭 13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어찌도 그리 똑같을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될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소용돌이치고 민생을 팽개친 정치권의 이전투구(泥田鬪狗)와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요즈음, 373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착잡하다.

 

3. 산성내 유적과 설화(說話)

 

산성내에는  정문인 남문과 사방으로 통하는 동문, 서문, 북문이 있고 이들을 조망할 수 있는 수어장대 및 성의 동쪽을 통제할 수 있는 동장대와 서쪽을 통제할 수 있는 서장대가 있고, 또 산성을 쉽게 조망하면서 방어할 수 있도록 쌓여진 연주봉 오성을 비롯한 외부옹성이 있다. 또한 성내에는 산성방어용 승병을 기르고 양성하였던 승번제도가 시행되었던 사찰인 장경사, 국청사 등이 있다. 또한 산성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전설과 설화가 전해 온다.

 

(1) 개원사의 불경 궤짝

 

남문 근처에는 1986년 말에 복원된 개원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은 옛날부터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번에 아주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게가 200근이 넘는 큰 놋동 4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서는 귀중한 불경 궤짝을보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신기하다.


모든 일이 모두 그러하듯이 이것도 무능한 왕인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 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다만 불경을 담는 궤짝만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궤짝 위에는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삼개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그 궤짝을 관가로 보냈다. 그리고 관가에서는 이를 다시 왕에게 올렸다.
삼개에서 보내온 궤짝과 그 사연을 들은 인조는 "사람도 하나 없는 배가 삼개에 이른 것만 해도 정말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불경 궤짝이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하고 찍은 것이라니, 이는 반드시 인연이 있어 우리 나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우리 나라에 개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는 지를 알아보도록 하라.
내가 보기에는 불경 궤짝 위에 쓰여진 글로 보아, 그 불경 궤짝을 우리 나라의 개원사에 보내 길이 보관하라는 뜻인 것 같다.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아보시오."라고 분부하였다.
이에 개원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절을 찾아보니,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인조는 그 불경 궤짝을 귀중하게 잘 싸서 남한산성의 개원사로 보냈다. 불경 궤짝은 한동안 별 탈없이 잘 보관되었다. 그런데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개원사에 불이 나게 되었다. 절의 화약고에서 불이 일어나 절 전체가 타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의 반대편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후에 다시 한 번 큰불이 나서 불길이 그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누각에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더니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불경 궤짝을 보관하던 누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는 개원사를 부처님의 덕을 보고 있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2) 효자우물

 

북문 안에 효자 우물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 있다. 이 효자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수 백년 전의 일이다. 산성 북문 안 마을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효자의 이름은 정남이라고 하는데, 정남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아버지가 하루 하루 품을 팔아 사는 가난한 살림에 갑자기 이름 모를 병에 걸려서 자리에 눕게 되자, 집에는 밥을 지을 쌀이 떨어졌다. 정남은 자신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제 겨우 열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으로서는 품을 팔수도 없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아주머니, 아버지가 병들어 그러니 밥 한 술만 주십쇼. 아버지의 병만 나으면 제가 일을 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 정남은 쪽박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다.
정남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며 동정했다. 정남이 이렇게 동냥을 해다가는 병든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아버지의 진맥을 보게 되었다.
"얘야, 네 아버지의 병에는 다른 약이 필요 없다. 그저 큼직한 잉어를 구해 다 푹 과 드리면 깨끗하게 나을 것이다." 하고 훌쩍 가버렸다.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들은 정남은 무척 기뻐하며 아버지께 이야기 한 후 잉어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혹시 생선장수라도 만나면 사정을 해서 구하리라 생각하고 생선장수가 있을 만한 곳마다 정처 없이 헤매었다.
그러나 때가 마침 겨울철이었다. 천지만물이 꽁꽁 얼어붙었고 매서운 바람만 윙윙거리며 불고 있었다.
너무 혹독한 추위, 아무리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생선장수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산기슭을 지날 때였다. 인가도 없는 그 곳에 우물하나가 있었다. 정남은 우물 옆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느님, 제발 잉어 한 마리만 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정남은 우물 옆 산기슭에 주저앉아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했다. 기도를 올린 후 다시 걷기 시작하여 우물가를 지나려니까 우물 속에 누런 금비늘이 찬란한 잉어 한 마리가 있는 것이다. 정남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잉어를 잡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잉어가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간신히 건져냈다. 뜻하지 않게 잉어를 얻은 정남은 너무나 기뻐서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하늘을 향해 감사를 올렸다.
잉어를 구해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온 정남은 솥에 넣고 정성스럽게 고았다. 다음 날 잉어 국을 맛있게 먹은 그의 아버지는 과연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러한 사실은 차츰 근처 마을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정남의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성을 칭찬했고 그런일이 있은 이후부터 그 산기슭의 우물을 '효자 우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벌봉에 깃든 정기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는 이 바위는 동장대 능선상에서 보면 꼭 벌모양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군데 군데 그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봉에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숙종조에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으며, 이 성을 봉암성(蜂巖城)이라고 했는 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벌봉 주위에 남아 있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답사해 본 결과로는 이는 낭설일뿐, 쪼개진 그 자리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4)이회의 한이 서린 매바위 전설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5) 병자호란의 영웅 임경업 장군을 낳게 한 매화나무터의 무덤
 
남한산성 서쪽 등성이에는 멀리 부봉사즐이 조응해 오고 좌청룡, 우백호가 잘 관쇄(關鎖)를 이룬 천하명당 자리에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자리로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만산이 조응해 오는듯 하다.  이 무덤에는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임경업 장군은 충주 달촌에서 태어나고 그곳에 묻혔다. 그런데 이 무덤이 주목받는 것은 임경업 장군을 태어나게 한 임씨 가문의 선조의 무덤인데다 다음과 같이 임경업 장군의 출생을 예견한 이야기까지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먼 옛날 한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총각이 광주 친척집에 식량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날이 저물어 산 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날씨는 비바람까지 몰아쳐 그 총각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산길은 한참 동안이나 헤매던 총각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멀리서 보이는 불빛을 발견한 총각은 그 불빛을 따라갔다. 그랬더니 웬 집이 하나 나타났다. 그 집의 문을 두드리니 놀랍게도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깊은 산 속 외딴 집에 처녀 혼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총각은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에 홀린 듯 처녀가 이끄는 대로 방에 들어갔고 차려주는 밥도 먹었다. 그리고 총각은 그 처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한양에서 굶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한 총각은 서둘러 광주 친척집으로 떠났다. 그러나 길을 걷는 총각의 뇌리엔 어젯밤 그 처녀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총각은 마침내 그 처녀와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다시 어제 묵었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바로 그때 온 산이 쩡쩡 울리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듣거라! 나는 이산의 산신령이다. 너는 지금 마음을 돌이키고 어서 네 갈 길이나 가거라. 어제 밤을 함께 보낸 그 처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다." 총각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총각은 잘못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어제 묵었던 집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처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집의 자취는 온데 간데 없고, 다만 한 그루의 고목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총각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산발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산발한 여인은 바로 어젯밤의 그 처녀였다.

처녀는 숨가쁘게 뛰어온 총각을 보며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다. "저는 산신령의 말대로 오백년 묵은 암구렁입니다. 세상 남자 중의 남자인 당신을 만나게 되어 이제 승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의 덕입니다. 아무쪼록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제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이 자리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를 이후에 당신의 묘 자리로 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자손 중에 나라를 구할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오게 될 것입니다." 처녀는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하늘로 올라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졌고, 그 비늘은 매화 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그 후 임총각은 죽을 때, 처녀의 말대로 무덤을 매화 나무가 있는 자리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처녀가 승천하면서 남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는데, 총각의 자손 중에서 유명한 장수가 태어난 것이다. 그 장수가 바로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큰 공을 세운 임경업 장군이다.
 
지금 그자리에 매화 나무는 없지만, 한 눈에 봐도 천하명당임을 알 수가 있으며, 그같은 연유로 현재도 그 아래에 특수전사령부가 들어서 있어서 밤낮으로 훈련하는 소리와 사격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땅의 이치는 이와같이 한치의 호리지차도없는 것이다.

 

(6) 인조의 곤룡포를 받은 서흔남

 

관리사무소 앞쪽 화단에는 묘비가 서 있다. 묘비의 위쪽은 깨어져 없어졌고, 남은 묘비마저도 마모되어서 확실한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묘비명에는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묘비는 동문 밖 검복리 병풍산 묘소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화장을 하면서 묘역이 없어짐에 따라,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서흔남의 묘비를 이쪽으로 옮긴 까닭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을 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임금의 곤룡포를 하사 받기까지 한 그를 지속적으로 가리고자 함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왔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다. 인조는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주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활약을 펼쳤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외 교통이 끊어지자,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한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걸쳐 활약을 펼친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서 하사 받은 곤룡포를 지극 정성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평생동안 분신처럼 아껴왔던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서흔남의 가족들은 그와 함께 곤룡포를 중부면 검복리 서남쪽 병풍산에 묻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서흔남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하찮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정3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후세에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서흔남고 더불어 왕의 곤룡포가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은 서흔남이 아니라 서기남(徐紀男)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기남은 천하영웅이라 그 후 원두표(元斗杓)의 비장(裨將)이 되어 산성 북문 밖 싸움에서 큰공을 세우고 청나라의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붙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인조를 업어 모시 사람이 최모(崔某)라고도 한다. 최모는 그 공으로 인하여 늘문이에 임금이 직접 하사한 땅을 받았다고 한다.

 

(7) 정조에게 벼슬을 받은 소나무

 

남한산성 동문 밖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주필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주변은 정조 3년(1779) 정조 임금이 여주에 있는 영릉에 행차하던 길에 쉬었던 자리라고 한다.
이렇게 정조 임금이 쉬어갔던 장소라고 해서 당시 광주 유수였던 김종수가 '己亥駐' (기해주필)이라고 바위에 새긴 글씨가 이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임금이 이 곳에서 쉴 때 소나무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온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조 임금이 행차를 하다가 이 곳 주필암에 앉아 쉬고 있었다. 쉬면서 주변 언덕을 천천히 살펴보던 정조 임금의 눈에 문득 언덕 위에 소나무 하나가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일산을 편친 것처럼 절묘하게 생긴 소나무였다.
정조 임금은 주변의 신하들에게 너무도 절묘하게 생긴 소나무라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저 소나무가 하도 절묘하여 과인이 정삼품의 벼슬을 내릴것 이니, 나무 기둥에다가 옥관자를 붙여주도록 하시오." 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벼슬을 받은 소나무라 해서 '대부송'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벼슬을 받아 대부송이라 불리던 소나무는 지금은 고사한 송암정의 소나무였다고 한다.

 

 

4. 찾아가는 길

 

숭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복정사거리에서 성남가는 방향으로 진행하여 남한산성 이정표를 따라가면 산성 남문이 나타난다. 또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에는 지하철 5호선 마천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나타나는 남한산성 서문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가거나 혹은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내려서 52번 버스를 타면 바로 산성관리사무소 앞에 내려 준다.산성내에는 이미 유원지가 된 관계로 맛집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바, 어느집을 이용하더라도 모두 비슷하다. 이 집들 중 백제장은 5.16 혁먕 후 박정희씨가 이용한 집으로 그의 친필이 그대로 걸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ㅡ  知   雲  先   生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