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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나를 찾아 떠난 한계여행 - 당일치기로 지리산 종주하기(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이같은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당일치기로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에도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무박으로 설악산 한계령에서 대청봉을 오른 후 일출을 보고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과 비선대를 거쳐서 설악동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5월 20 저녁,

이 날은 내가 아는 친구가 주최하는 맛좋은 안동 한후 부위별과 이에 매칭되는 와인을 마시기로 한 날이지만, 어찌하라.

안동 한우야 다음에 얼마던지 다시 먹을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구할 것인가?

 

저녁 11시에 신사역에서 출발하기로 했기에 출발시간 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어서

모 와인샵에서 주최하는 스페인 강화와인인 Sherry Wine 시음회에 참석해서 강화와인에 대한 설명과 시음을 했다.

이 후 집에 가서 간단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앞좌석에 앉기 위해서 22시 18분에 신사역에 도착하여 뚜레쥬르에서

식사대용으로 삼을 단팥빵 5개를 구입했다. 약속 장소에 가니 나같은 사람들이 대여섯명 서성이고 있었다. 22시 40분이 지났건만 우리를 태우고 갈

관광버스가 도착을 하지를 않는다. 보통 떄 같으면 22시 30분이면 도착해 있어야 할 버스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22시 50분 경에 버스가 왔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는 질문에

" 인천서 20시 20분에 출발했는데 차가 막혀서 지금 왔다."고 한다.

 

아무리 차가 막혔기로 서니 그렇지, 인천서 여기까지 경인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타고 오면 1시간이면 충분하고 또 아무리 막힌다 한들 2시간이면 충분한데

2시간 반이나 걸린다는 것이 말이냐 되는 일이며, 또 차가 그렇게 막힐것 같았으면 미리 출발하여 시간을 맞출 것이지 무슨 차 막히는 핑게를 된다는 말인가?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에 한마디 할려다가 이번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냥 있었는데, 다른 분들이 뭐라고 한 마디씩들 한다.

 

한 사람이 늦어서 23시 5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그런데, 문제는 금산휴게소에서 부터 터졌다.

버스가 5월 21일 01시 40분에 금산 휴게소에 도착할 즈음 안내자 겸 운영자가 02시 정각까지 볼일을 마치시고 탑승하라고 고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떄까지 버스기사가 오지를 않는다. 정작 승객들은 예정 시간보다 이른 1시 50분쯤에 모두 탐승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기사가 오지를 않으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새벽 2시 8분

그 떄서야 기사가 요지로 잇빨을 쑤시면서 나타난다.

참다 못해서 그놈의 성질이 또 발동했다.

" 이봐, 기사 양반, 지금이 몇시요? "

" 02시 8분 아닙니까? "

" 그럼, 이 버스는 몇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거요? "

" 아, 배고프니 밥은 먹어야 할게 아니요? "

" 우리도 배고프기는 매일반이고, 또 새벽부터 산 탈려면 식사를 미리 해야 하지만, 약속시간이라서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는것 아니요.

당신처럼 그렇 것 같으면 처음부터 02시 08분까지 오라했으면 볼일을 다 보고 왔을 것 아닌가. 당신 한 사람 떄문에 여기 45명이 8분씩이나 기다려야 쓰겠소. "

이 떄 운영자가 와서 다들 주무시고 있으니 참으란다.

 

"내 이럴줄 알았지, 이 놈의 자슥이 처음부터 시간을 지키지 않더니만, 여기서도 말썽을 피우는구만."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잠을 청했는데,

후덥지근하여 잠을 잘 수가 없다.

 

뒷좌석의 손님들이 애어컨을 틀어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어느 개가 짓느냐'는 식으로 끝내 틀어주지를 않으니 어쩌랴.

나야 뭐 견딜만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45명이 내뿜는 열기에 숨이 막히는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차가 지그재그로 비틀되면서 천천히 가더니만 그만 갓길에 주차를 한다. 무슨일이 있나하고 기다리는데,

10여분을 그렇게 정차하더니만 다시 가는데 비틀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급기야 예정에 없는 덕유산 휴게소로 들어간다.

다시 또 15분을 쉰단다.

이런 젠장 시간은 자꾸만 가는데 웬 휴게소?

 

뒷 좌석의 손님 한 명이 내리면서 젊잖게 묻는다.

" 기사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세요? "

" 왜요? "

" 뒤에서 보니 차가 지그재그로 가서 불안해서 그래요. "

" 아, 그럼 졸리는데 어쨰란 말이요? " 하고 싸우자고 덤빈다.

 

내가 들으니 기도 안찬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란 말인가?

이게 45명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버스기사가 할 말이란 말인가?

배고프다고 야심한 자정에 밥먹을 때부터 진작 알아봤지.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심상찮아 보인다.

아마도 어제 저녁에 어디서 약주라도 한 모양이다.

 

상황을 보니 이제는 기사를 다그칠 것이 아니라 살살 달래야 할 상황이다.

해서,

" 당신 말이 맞으니 졸리면 잠시 쉬었다가 한 숨 눈 붙이고 갑시다"라고 해주었다.

 

내 말을 받아서 뒷좌석에서 누군가 그런다.

" 천안함 사건 떄도 46명인데 우리도 46명이네. "

그 말을 듣고 속으로

" 걱정하지 마시요. 우리는 괜찮을테니"라고 했다.

 

덕유산 휴게소에서 한 참을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차는 계속 지그재그  운행과 급정거, 급발진을 계속하면서 시속 30km정도로 서행하고 있었다.

산청 I.C를 지날 때가 새벽 4시 30분이다.

 

원래 계획대로 한다면 이미 등산을 시작해서 노고단에 가 있어야 할 시간이다.

처음 계획은 3시 30분 성삼재에서 등반 시작,

21시 30분 중산리에서 출발하는 것이였지만,

이제는 모두 물건너 갔고,

좌우지간 일출이나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성삼재 오르는 구절양장의 고갯길.

올라가는 도중에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다. 창밖을 보니 위에서 내려오는 차량이 있어 순간 기사가 당황하여 멈칫했는

모양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이야기지만 어찌하랴.

 

우여곡절 끝에 성삼제 휴게소에 도착하니 05시 10분이다. 이미 사물이 구분될 장도로 여명이 벍아오고 있었다.

 

안내자의 멘트.

"늦었으니 종주하실 A코스 분들은 21시까지 중산리 주차장으로 내려 오시고,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오실 B코스분들 내리시고,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 갔다 내려오실 C코스 분들은 이 차를 그냥 타고 있으세요"

 

5월 21일

 

05시 10분 여명을 타고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른다.

05 : 35 노고단(1,507m)

06 : 10 돼지평전(1,424m)

06 : 45 임걸령(1,432m)

07 : 10 노루목

* 노루목에서 쵸코렛 1개, 닥터 유 1개 먹으면서 사진 찰영.

07 : 25 노루목 출발

07 : 45 삼도봉(1,499m)

08 : 00 화개재(1,300m로 지리산 주능선상에서 제일 낮은 곳)

10 : 00 연하천 휴게소

 * 연하천 휴게소에서 생수 보충

10 : 05 연하천 휴게소 출발

12 : 00 벽소령 휴게소

13 : 20 지도상의 구벽소령(1,425m), 실제로는 신벽소령 공터

 * 사과 1개, 단밭빵 1개로 아침 겸 점심식사

 * 덕평봉(1,522m) 아래의 선비샘에서 생수 보충

15 : 25 세석 휴게소

 * 오이 한 개 먹으면서 휴식

16 : 00 세석 휴게소 출발

17 : 30 장터목 휴게소

 * 산희샘에서 생수 2통을 채움

18 : 30 천왕봉(1,915.4m)

21 : 00 중산리 거북이 식당(055 - 973 - 8934, 016 - 9255 - 6030)

21 : 10 중산리 거북이 식당에서 샤워

21 : 20 중산리 거북이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저녁식사

21 : 35 거림으로 출발

 *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늦게 도착하여 실으려 다시 감.

21 : 50 중산리로 다시 출발

 * 하산시 부상자 발생으로 부상자 한 명을 태우기 위해서.

22 : 28 중산리 출발

 * 버스 2대 중 1대는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올라 갔다 내려온 사람들을 태우고 먼저 출발했고,

    나머지 1대에 종주 코스 완주자(오로지 나 한 사람뿐),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 온 자, 그리고 충산리에서

    천왕봉을 올랐다가 내려온 자들을 태웠는데 인원이 모두 46명으로 좌석이 없었다.

 

5월 22일

 

02 :  25 신시역 도착

02 :  50 택시 이용 집도착

 

 

 

 

 

 

1. 지리산 종주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km의 꿈의 주능선 산행을 말한다.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그 범위가 3도 5군 15면에 걸쳐 있으며 4백 84㎢ (1억3천만평)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이같이 광활한 지리산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활처럼 굽은 25.5㎞의 주능선은

노고단(1507m), 반야봉(1733.5m), 토끼봉(1533.1m), 칠선봉(1576m), 촛대봉(1703.7m), 천왕봉(1915.4m) 등 1천5백m

이상의 봉우리만도 16개나 이어진다.

 

지리산 종주란 이 주능선 산행을 말한다. 등정, 하산거리까지 합치면 총 50km - 60km가 넘으며 통상 2박 3일 혹은

3박4일에 총 20- 25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 걸을시 당일치기로도 종주가 가능하다.

 떄문에 지리산종주는 아마추어 등산인들에게는 "진짜 산꾼"의 경지에 올라서는 관문 같은 코스다.

웬만큼 산에 다닌 산악인이라도 인내를 갖고 산행해야 할 만큼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한 코스다. 왜냐하면 지리산은 산세가 수려한 설악산과는 달리 산세가 후덕하고 두텁기 떄문에 볼거리 산행이 되지 않아사 무척이나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고 지리산 산행은 '지리 지리하다'라고 까지 말한다.

그런 만큼 지리산종주는 평소에는 좀체로 하기 어렵고, 시간이 여유로운 주로 여름 휴가철에 가장 인기를 끄는

여름산행 코스다.

그래서 나는 한계령에서 대청봉을 거쳐 공룡을 타고 마등령과 비선대을 지나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설악산 종주와 성삼재주차장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나 대원사 계곡으로 내려가는 지리산 종주를 '자기를 찾아 떠나는 限界여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리산 종주의 의미

지리산의 전체적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지리산은 그 규모가 광대하여 등산코스도 수십 개에 이르러 한번의 산행으로는 지리산의 극히 일부만을 다녀온다.

여러 번의 산행을 하더라도 주능선을 종주하지 않고는 지리산의 윤곽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지리산 종주는

지리산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산행이다.

 

산행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친다.


전문등산인들은 "산행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려면 지리산 종주를 하라"는 말을 자주 한다.그만큼 지리산 종주산행이
주는 인상이 다른 산에 비해 강렬할 뿐 아니라 등산의 묘미에 흠뻑 젖을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해발 고도

1천5백m가 넘는 봉우리만도 16개에 20여개 이상의 봉우리를  한번의 산행으로 넘는다. 그러다 보면 등산에 대한

자신감도 가질 수 있다.

지리산 종주코스는 우리나라 산의 종주코스 중 가장 긴 코스이다. 한두 번 산에 다니다 보면 산을 좋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종주산행을 하게 된다. 종주산행 중 가장 길고 자신과 인내의 싸움이 필요한 지리산 종주를 하게 되면

가히 산꾼이라 할 만하다.

 

2. 縱走山行記

 

     내가 지금까지 지리산을 오른 것은 열세 번이다. 노고단에 2번, 반야봉에 한 번, 뱀사골에 한 번, 칠선에 두 번,

세석평전에 한 번, 청학동 삼신봉에 세 번, 삼도봉에서 피아골로 내려간 것이 한 번, 그리고 천왕봉에 두 번을 올랐다.

그리고 종주는 이 번이 두번쨰다.

    '지리산 종주쯤은 해야 지리산 등산했다'고 내 놓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저런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쉽게 되는것인가? 

    보통은 야영에 필요한 천막과 침낭 및 총 12끼 분의 식량과 코펠 및 버너,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세면도구, 식수 이런 것들을

모두 챙기고, 화엄사계곡에서 그 긴 급경사 길을 오르면 종주코스 첫 봉우리인 노고단에 도착할 때쯤은 젊은 사람들도 벌써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는데 등짐은 먹는 것이 조금씩 줄어질 뿐이고 대신 이슬 맞고, 비 맞고, 땀나서 가벼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무거워 지니 지겹게 계속되는 등산길이 즐겁기는 커녕 말 그대로 고생길인 '지옥훈련'이니 진배없었지만, 이제는 차로

성삼재까지 가서 오르기 떄문에 이같은 지옥훈련은 덜어졌지만, 그래도 지루하고 힘들기는 매일반이다.

지리산 종주길은 글자 그대로 지리지리하다.

 

 

북남횡단도(北南橫斷圖)
 지리산 북-남 종주
(백무동-천왕봉-세석평전-삼신봉-청학동)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5시 10분 성삼재 주차장을 뒤로 하고 잘 닦여진 등산로를 따라서 노고단으로 오른다.

어떻게 빨리 가서 일출을 봐야할텐데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추월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 중간 중간에 길과 길 사이를 가로 질러가는 가빠른 지름길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닦여진 등산로를

따라서 가지만, 시간에 쫓겨 마음이 급한 종주자들은 계단과 돌로 다듬어져 있는 이 지름길을 이용하곤한다.

 

지름길을 부지런히 오르니 노고단 휴게소가 저 멀리 보인다.

이미 날은 밝았고, 일출을 보는 것과 일출사진은 물건너 간것처럼 보이지만, 어디 사람의 욕심이 그러하랴. 뛰다시피 올라가니

이미 동사면에서 붉은 해가 솟았다. 이리 저리 사진을 찍었는데,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볼만하다. 지난 번에는 반야봉

에서 찍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늦게 오르는 나머지 노고단에서도 간신히 찍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서쪽 노고단에서부터 동쪽 천왕봉까지 연결된 사진을 찍기에 정신이 없다.

쾌청한 날씨에

시계가 좋을 경우 대체적으로 사진은 잘 나온다. 

 

백리의 지리산 주능선은 멋지게 생겼고, 구불거리며 지나가는 지리산이 그리는 하늘금(空除線),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

깊이 패인 골짜기 어느 하나 모두 다 그림같다.



 

    



   
 

             

    

지리산 서부(노고단-삼각봉), 중부(-영신봉), 동부(-천왕봉)
서동종주(西東縱走) 1 : 노고단 - 화개재

동에서 서로 바라 본 지리산
 

     

    지리산 서-동 종주시 서울에서 구례나 남원까지는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나 기차로 가면되고

구례와 남원에서는 성삼재까지 마을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된다.

우리가 도착했을 떄에도 마침 구례에서 올라온 마을버스에서 등산객들이 내리고 있었다.

남원에서 성삼재까지는  택시로 가면되는데,  요금은 3만원이다.

노고단-화개재 지도

◆ 노고단(老姑壇, 1,507m)

 

    노고단 가는 길은 길 양쪽으로 이따금씩 나무에 명찰을 붙이거나 표말을 세워 놓은 나무 이름이며, 지리산에 서식하는 새,

물고기들의 사진들이 붙여져 있는데, 이들 사진들을 보면서 첫 번째 지름길을 오르니 어느새 코재 쉼터에 다다랐다. 

특히 군데 군데에 반달곰 출현 안내 및 대처요령들을 기재해 놓은 안내표식판과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다. 

    해발 1,300m가 넘는 높이와 잘 닦여진 길 때문에 땀도 안 났다. 길에서 조금 올라서면 전망바위가 있어 좋았는데 그 위에

돈 들여 아예 목재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안전에 관계되지 않은 한 자연 그대로가 제일 좋은데 괜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 등산 때는 여기가 필수 쉼터다. 노고단 쪽에서 내려오는 도랑에 콸콸 흐르는 물이 있고, 발아래 깊고 깊은 화엄사계곡,

눈을 좀 들어올리면 구례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서쪽에 종석대가 솟아있다.

코재에서 올려다 본 종석대

    코재의 이름이 왜 생겼는지는 모르는 사람도 이곳에 서서 화엄사계곡을 내려다보면 쉽게 알게 된다. 성삼재 찻길이 나기

 전에  이 화엄사골짜기는 노고단과 반야봉을 오르거나 지리산종주를 시작하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화엄사에서 거리 9Km, 높이 1,200m를 오르는 길고도 가파른 지리산 오르막길의 처음 시작이라 무거운 등짐을 잔뜩 지고

지칠 데로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재로 오르는 구간이 그야말로 깔딱고개,

오를려면 코가 땅에 닿을듯한기에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급경사' 때문에 얻게된 이름이다.

코재에서 내려다 본 화엄사계곡

    두 번째 지름길을 오르면 펀펀한 곳에 75평 콘크리트 건물의 산뜻한 노고단산장이 나타난다. 수용인원 220명이나

숙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지리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기는 하지만 등산객 차림보다는 일일

관광객차림의  사람들이 더 많고, 지리산 종주산행객도 산행의 시작이거나 끝이 되니 이 산장에서 묵어 갈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산장에서 돌을 박아 잘 정리한 길을 15분쯤 오르면 넓은 산등성이에 큼직한 돌탑 위에 '老姑壇'이라고 세로로 새긴

표석이 돌탑 위에 있고, 여지 궁둥이 그대로 판박이 한듯한 모습의 반야봉이 눈앞에 바싹 다가서며, 지리산 동쪽 끝 천왕봉을

보는 유료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는 노고단 고개 마루다.

    보통 사람들은 돌탑이 있는 이곳을 노고단으로 생각하지만, 그 바로 맞은편에 노고단으로 오르는 나무계단길이 있고,

그 앞에 노고단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원래의 노고단을 알려준다. 원래의 노고단을 오르는 길은 막혀져 있는데,

오전 10시가 되어야만 개방한다고 적혀 있다. 지리산 종주 길은 여기 노고단고개에서 돼지평전까지 원래 노고단의

북사면을 가로질러 나 있다. .


 

원래 노고단으로 오르는 앞에 세원져 있는 1일 4회 제한된 예약 인원에 한해서 개방한다는 안내문을 읽어보고 있는

동안에 성질 급한 일부 등산객들이 안내판에는 아랑곳없이 목책을 넘어 들어 갔다 나온다.

 원래 노고단 정상에는 꾀나 넓게 평탄하게 닦은 마당이 있고 한가운데 큼직한 돌탑(케룬)이 있는데 이것은 청학동

도인들이 총동원되어 3일간 쌓은 것이라 한다.

돌탑의 서남쪽에 큼직한 원석에 세로로 老姑壇(노고단)이라 쓴 큼직한 글씨와 돌탑이 잘 어울린다.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높인 말로 '노마님'이란 뜻이며,

제사를 지내는 단이 있었기에 '노고단'이라 한다. 노고단 뒤에 '남악사(南嶽祀)'라 하였는데 이는 성모사상에 따른

민간신앙 차원의 행사에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제사인 중사(中祀)를 이 곳에서 지내므로서 국가차원의 공식행사로

격상한 것이다.

아울러 이 곳은 화랑도들의 수련장이기도 하였다 한다.

참고로 신라 때 중사를 지낸 오악(五嶽)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통일 전은 속리산), 북악 태백산, 남악 지리산,

중악 팔공산이다. 

    이러한 신라시대의 전통은 고려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산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냈는데 장소는 노고단이 아니라 천왕봉과 함양 휴천면 남호리(산청 임천강 임천교가 있는 곳)로

옮겨서 하였다. 조선조 때는 세조2년(1456)부터 노고단의 남악사를 구례 산동면 내산리(현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곳) 평지로

옮겨 제례를 행하였다.

    일제 때에 이러한 관(官) 주도의 남악사 제례를 일체 중지하였고, 1969년부터는 남악사를 화엄사 앞으로 옮겨 구례군

축제로 약수(고로쇠, 거제수나무 물)를 지리산산신에게 바치는 제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노고단은 비록 다른 봉우리에 비해서 높지는 않지만,

이러한 역사적 민속적인 의미 때문에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세 주봉의 하나로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노고단 또한 외세의 침략과 해방 후 이념갈등의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일제 때 노고단에는 미국, 호주 등 외국인 피서용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는데 호텔, 공회당, 교회당, 발전소, 영화관,

간이풀장까지 갖춘 그 당시로는 그야말로 초호화 별장이었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는 대대로 숭고하게 여겨져 온 노고단

마저 홍콩식 외국조차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해방 후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진압 후 근 두 달간 김지회를 두목으로 하는 반란군 잔존세력이 노고단 외국인

별장촌을 점거하여 빨찌산거점화 하자 12월에 국방경비대가 투입되어 토벌작전을 벌리면서 다시 그들이 거점화 하지

못하도록 별장 건물을 모두 불태웠는데 이 때 노고단 일대의 수목들도 함께 타 버렸기에 지금까지 노고단에는

큰 나무가 없고, 새로 돋아난 싸리나무 등 관목과 초본식물만 자라고 있다. 

   지리산 10경 중 제3경인  '노고단 운해(雲海)' .

 

 지금은 이른 새벽이라 노고단 주변에 구름이 없지만,

왜 하필이면 노고단 주변에 구름이 많을까 하는 생각과 구름 낀 노고단 주변의 경치를 상상해 본다.

    노고단은 해발 1,507m로 동서로 높고 길게 지리산 주능선의 맨 서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남해에서 일은

구름이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구례 땅에 이르러 지리산 만복대에서 서쪽으로 뻗어-다름재-밤재-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기맥에 막혀 몰려온 구름들이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만복대 서쪽 저지대와

천은사-화엄사계곡, 피아골까지 구름이 꽉 채워지면서 구름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 구름 위로 가까이는 서쪽으로 만복대, 고리봉, 종석대, 차일봉, 동쪽으로는 반야봉, 불무장등, 통곡봉, 황장산,

남쪽으로는 문바우등, 왕사리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마치 섬처럼 솟고, 멀리는 광양의 백운산, 승주의 조계산이

구름위로 가물가물 보이는 그야말로 구름바다(雲海) 위의 그 풍경은 속세를 떠나 천상에 온 듯한 느낌을

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이 일대 군락을 이룬 원추리 꽃, 진달래, 철쭉 그리고 지금까지 입산 통제 덕분에 무성해진 야생화가

만발하고 보면 구름과 꽃이 이루는 조화 또한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고단은 또 하나의 지리산 10경 중 제10경'섬진(蟾津) 청류(淸流)'를 바라보는 자리다.

 

지금은 구름이 끼어서 흐릿하게 밖에 보이지 않지만 날 맑은 날에는 저 아래 섬진강을 흐르는 물이 깨끗하게 보일 것이다.

평탄하게 잘 닦은 노고단 봉우리 남쪽 가에 목재로  섬진청류전망대를 설치 해 놓았다. 가물가물하게 먼 남쪽이 하동과

섬진강하구이고, 좀더 가까이 시선을 옮겨오면 물가에 악양루와 고소성이 있는 악양이다.

이 곳 고소성이 어떻게 해서 중국 소주에 있는 고소성(古蘇는 蘇州의 옛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섬진강에 기인된 것으로 생각된다.

    좀더 가까이 올라오면 조영남의 노래 때문에 유명해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닷 세 만에 한번 씩 한데 어우러지는

화개장터이고, 한 모퉁이 더 돌아오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이 있는 토지면이다. 강을 따라 더 상류로

올라가 구례읍을 지나면 조계산 자락의 주암호에 갇혔던 물이 흘러 내려오는 보성강이 합해지는 합수지점도 바라 볼 수 있다.

    강 양쪽의 하얀 모래,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

사람의 시력 한계 때문에 여기서 보지는 못하지만 그 위로 날고 있을 물새,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 될 것이다.

돼지평전에서 되돌아 본 진노고단(왼쪽 제일 높은 봉우리)과 모조노고단(오른쪽 말잔등처럼 푹 들어간

들어간 안부)

◆ 반야봉(般若峰, 1733.5m)

 

노고단 정상에서 동쪽으로 돼지평전까지는 그 동안 등산로를 폐쇄했기 때문에 나무 가지들이 길을 막기도 하지만 그런데로

걸을 만 하다. 돼지평전은 세석평전이나 덕유평전처럼 넓게 펼쳐진 평전이 아니고 노고단에서 임걸령에 이르는 산등성이

위에 좁고 길게 벋어 있어 얼핏 봐서는 평전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좀 뭣하다.

    이 곳이 '돼지평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주변에 군락을 이루는 원추리 뿌리를 캐 먹으려고 멧돼지들이 땅을 들쑤셔

놓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간단한 내력을 적은 간판이 걸려 있다. 돼지평전은 일명' 비목령(碑木嶺),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지리산종주길과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 온 길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돼지평전이 시작되는데 이 곳에 '

70년대 초에 고교생 세 사람이 혹한(酷寒) 속에 세석에서 노고단까지 무리하게 눈 산행을 하다가 그만 한 사람이 이 곳에서

동사하여 이를 추모하는 비목(碑木)을 세웠던 곳이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 비목에는 조난자 이름은 없어지고 '조난산악인'이란 다섯 글자만 남아 있다.


지금 비목령에 남아있는 비목


    지리산종주길이 시작되는 노고단고개에서 돼지평전 사이에 '장승터'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나는 지금 노고단

정상으로 올라서 돌아왔기 때문에 여기를 거치지 않았다. 이 곳은 '88년 11월 6일에 정체 모를 단체가 민족통일대장군(民族統一

大將軍)과 민중해방여장군(民衆解放女將軍)이란 장승 2기를 세웠는데 이듬해 5월에 누군가 전기톱으로 잘라 없애 버린

곳이라 한다. 아마 이념갈등의 소산으로 보인다.

    돼지평전이 끝나고 좀 경사가 있는 비탈길로 10여 분 가면 반야봉을 오르는 급경사길을 '쉬어서 단단히 준비해 올라가라'는

듯으로 생긴듯한 안부(鞍部)가 있고 그 아래  PVC관에서 물줄기를 시원스레 내 쏟는 샘이 있다.

이 곳을 '임걸령(林傑嶺)'이라 한다.

    북쪽 심원골에서 남쪽 피아골로 넘나드는 고개인데 문정왕후의 실권과 나이어린 유약한 왕으로 인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기에 임꺽정을 비롯한 거도(巨盜)들의 발호로 유난히 도적이 많았던 떄로 유명한 조선 명종 때 관군도 토벌하지

못한 유명한 도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이 이곳에 근거지를 차리고 활동했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산 깊고 물 좋고 동서남북으로 길이 통하니 도적 소굴로는 이 보다 더 적지는 없을듯 하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 '황호랑이막터'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바로는 약초 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 곳에서 잠자다가 호랑이를 만나 기발한 지용(智勇)으로 화를 입지 않고 도리어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대다수 등산객들이 임걸령에서 목도 추기고 식수도 채운 다음 길을 나서지만, 나는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곧바로 길을

잡고 나아가니 금새 급경사 길이 나타난다. 종주코스 치고는 꽤 급경사 길이다.

지금까지 걸오 온 종주길 중 가장 힘든 구간을 만난셈이다.

여기서 약 30분 가량을 헉헉대며 오르다 보면 '노루목'이라는 이정표가 있고 반야봉 길과 종주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40여분 올라가면 지리산 제5봉인 반야봉 정상이고, 곧바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천왕봉으로 가는

종주길이다. 1,732m의 반야봉 정상을 올랐다가 내려오면 약 1시간 30분이 더 소요되기 떄문에 대다수의 종주꾼들은

주능선상에서 비켜앉은 반야봉을 오르지 않고 곧바로 직진한다. 나도 지난 해에 반야봉에 올라 일출을 보면서 와인을

한 잔했기에 이번에는 시간도 없고 해서 곧바로 직진코스를 따라갔다.

    원래 노루목은 이정표가 서 있는 이 곳이 아니라 반야봉 쪽으로 좀 더 올라가서 삼도봉 쪽에서 반야봉으로 올라오는

길과도 만나는 삼거리가 진짜 노루목이다. 산 봉이라고 할 수는 없고 경사면이라 할 수도 없는 조금 튀어나온 부분인데

종주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이정표를 아랫쪽에 세운 것이다.

    '50-'60년대에 사냥을 업으로 하는 프로급의 사냥꾼은 멧돼지, 곰, 호랑이가 사냥의 대상이었지만 돈많은 졸부(猝富)의

서툰 사냥꾼들은 물오리 같은 철새나, 노루와 고라니 사냥이 제격이었다. 위험하지도 않으면서 짜릿한 쾌감을 만끽할 수

있기때문이다.

    노루사냥 때 포수는 노루가 도망갈 만한 능선상의 목이 되는 부분에서 사격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고, 일당을 받고

동원된 몰이꾼이 워이-! 워이-! 하며 골짜기에 숨어있는 노루를 쫓으면 그 놈이 곧 포수가 기다리는 쪽으로 도망을 치다가

비명횡사하게 된다.

포수가 숨어서 노루가 도망 오기를 기다릴 만한 곳을 노루목이라 한다. 이 목을 잘 못 잡으면 그날 사냥은 허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곳 노루목은 사냥꾼이 노루를 잡을 만한 목이 아니다. 능선을 넘는 고개도 아니고, 누가 보아도 피아골, 심원골,

뱀사골에 숨었던 노루가 이 곳으로 도망 올 것 같지는 않다.

    이곳 '노루목'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얻은 이름이다. 반야봉을 직접 올라보거나 혹은 노루목 바로 앞에 있는 천길 낭떠러지

바위 위애서 보던지, 아니면 노고단 쪽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노라면 반야봉 정상의 남쪽 지세는 피아골을 향해 몹시 가파르게

내리다가 바로 이곳에서 잠시 멈추고 지나온 노고단 쪽을 뒤돌아보는 모습이 마치 노루가 고개를 치켜들고 먼 산을 멍청히

바라보는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세를 관찰하는 안목과 그 표현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처럼 노루가 뒤돌아보는 모습이 일품으로 보이는 좌측 낭떠러지 위 바위 위에 올라서 쵸코릿 한개와 닥터유 한 개를 먹으면서

잠시 쉬었다.

노고단에서 바라 본 돼지평전 너머로 솟은 반야봉 웅자


    반야봉은 이번 산행에서는 제외하였지만 작년에 이창영사장과 함께 당일치기로 오른 적이 있다.

노루목을 지나 정상 직전이 몹시 가파르고 암석지대로 되어 있고, 또 많은 철 계단을 올라야 한다.

    지리산 10경 중 제4경 '반야봉 낙조(落照)'.

 

지리산 서편에서는 제일봉인 반야봉 꼭대기에서 심원골 건너 노고단- 종석대-만복대로 이어지는 서북 병풍에 짙은

암영(暗影)이 드리워지고 이글거리던 태양이 그 오만을 접고 겸손하게 주홍색 큼직한 동그라미가 되어 온 하늘을 물 드린

저녁노을의 배웅을 받으며 광주 무등산 산 그리매를 왼쪽으로 한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선(線) 너머로

사라져 가는 장엄한 모습은 이를 바라보는 이에게 경건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장엄한 끝맺음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래도 괜찮았던 한 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반야봉낙조는 생각만큼 그렇게 보기가 쉽지 않다. 사진작가나, 기자처럼 업으로 하는 사람이야 이 꼭대기에서 야영을

할 각오로 오르지만 보통 등산객은 이를 본 후 그 장엄한 정경을 머리 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쪽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보면 사방을 분간하기도 어렵게 어두워진다.

    높은 산의 어둠은 해가 떨어지자 마자 빠르게 그리고 짙게 깔린다. 그 험한 산길을 내려 와서 노고단산장이나

뱀사골산장까지 가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 사진은 찍지를 못했다. 그 대신 반야봉을 배경으로 찍은 여명과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책자에

나와 있는 낙조사진이다.

반야봉 여명(왼쪽)과 낙조(오른쪽)

    조선조 성종-명종 간에 살았던 대 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선생이 반야봉에 올라 지은 한시가 있는데 옮겨본다.

지리산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니/
올라와 보매 마음과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험한 바위 치솟아 산 봉들 뺴어 났으니/
아득하게 높은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리오/
땅에 스민 현묘한 정기 비내리고 이슬 맺고/
하늘에 서린 서기 인걸을 낳네/
산 찾아 온 나를 위함인지 구름, 안개 걷어주니/
천리 길 찾아 온 내 정성 이에 통함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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