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봉에서 이쪽으로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삼각고지, 형제봉,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 제석봉, 톱날능선이 한눈에 다 보이고, 대피소 건물들은 직접 보이지 않지만 벽소령, 세석, 장터목이 어디쯤인지
쉽게 판별할 수도 있다.
저 가물가물한 길을 내가 걸어서 온 것이다. 정말 장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 전망에서 또 하나 흥분시키는 것이 있다. 동북쪽에 가야산이 마치 하늘에 신기루처럼 떠 있듯이 서쪽 노고단 위로
하늘 가운데 희미한 산 그리매가 보인다. 방향으로 보나 위도 상으로 보나 광주 무등산이 틀림없다. 거기가 어딘데 여기서
무등산이 보인단 말인가! 이곳 천왕봉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 바로 그것이다.
지리산을 종주하면서 또 다른 반갑고 낯익은 두 주인들을 만났다. 다름 아닌 백두산에서 만났던
귀한 나무들이다.
그 하나는 백두산 수목한계선에서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최전선을 지키는 보병처럼 군집해 있던 사스레나무가
여기 지리산 종주로 주변 곳곳에서도 간혹 보였고, 톱날능선의 가장 잘 생긴 암봉 앞에도 암봉과 어울리게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또 하나는 키 큰 나무 속에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빨간 열매 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마가목이 여기서도 주렁주렁
새빨간 열매를 달고 있었다.
천왕봉(1,915.4m)은 지난 2010년 5월 9일에도 올라 갔다 왔었던 곳이라 시간상 사진은 생략하고 대충 보고 내려 갔다.
현재 시간 18시 30분으로 시간 계산을 해보니 빨리 걸어도 제시간 맞추어서 종착지인 중산리에 도착하기가 수월치 않아 보인다.
게다가 해가 저물어 깜깜해지면 더욱 더 낭패다. 뛰다시피 내려 가는데, 급경사 길이라 여의치가 않다.
중산리 주차장을 3.5k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해가 졌다. 사방에 칠흙같은 어듬이 내려 앉으니 가득이나 눈이 나쁜데 비록
헤드렌튼을 했다고는 하지만 길 찾기도 그리고 발 디딤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어쩌라.
뒷 일은 나중에 해결항 요량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마음이 급하니 더러 헛 딛기도 하여 위험한 순간을 몇 번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시간인 정각 21시에 중산리 거북이 식당에 도착하니 있어야 할 안내자도, 우리가 타고갈 버스도,
그리고 같이 온 일행들도 보이지를 않는다.
밧데리가 나간 핸드폰을 요령껏 조작하여 안내자와 통화를 하니 주차장에 있는데 곧 올라 오겠다고 한다.
이런, 젠장. 뭐 이런놈들이 다 있나.
올 때도 그 고생을 하여 늦게 도착시키는 바람에 위험한 밤 산행을 하게 하더니만,
도착해서도 그 모양이구만.
속으로욕이 나왔지만 어쩌랴.
땀으로 범벅이 된을 씻고자 식당주인에게 부탁을 했더니 샤워실에서 샤워를하란다.
샤워를 끝내고 산채비빔밥을 한 그릇 저녁으로 했는데,
오늘 먹은 처음의 식사이자 밥이다.
시간에 종주를 하자니 어디 휴식할 시간도,
딱히 요기를 할 시간도 없었기에 거의 굶다시피 했는데,
그 덕에 몸 속에 있는 불필요한 지방은 좀 태워 없앤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샤월할 때 보니까 얼굴이 내 얼굴같지 않게 작아졌음이 느껴졌기 떄문이다.
만 하루만에
총 15시간 50분 산행에
도상 거리로 35.7km를 걸었다.
몸은 별로 지치지 않았지만,
다리도 뻐근하고 발도 아파온다.
내려올 떄 마음이 조급해서 아픈줄 몰랐는데 긴장이 풀리니 전신이 아파온다.
게다가 내려올 떄 어두워서 바위에 부딪친 좌측 무릎이 아파온다.
그래도 해냈다.
남들이 2박 3일 혹은 3박 4일 일정으로 산장에 자면서 종주했었던 지리산 종주를 당일치기로 해냈다는
것에 만족과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하기에는 좀 벅차다.
지난 번 봉정암 등정 떄 팔십살 난 할머니가 오로지 신심(信心) 하나를 지팡이 삼아 그 높고도 험한 봉정암을 오르는
심정으로 나도 해냈다.
평지 걷기도 아니고 돌길, 그것도 1,500m가 넘는 20여 개의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산 길 35.7km을 당일에 넘나든다는
상당한 모험심과 체력, 그리고 인내와 힘 및 요령이 필요하다.
나도 사전에 준비해간 스틱 두 개가 아니였으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위에 잡은 화두를 들면서 스택 두 대를 지팡이 삼아 상체를 기대고 그대로 쉬었기 떄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이 번에 90명이 간 중에서 완주자는 나 밖에 없다.
나머지 분들은 모두 중간에 탈출했거나 아니면 중산리에서 올랐다가 내려왔다.
그 와중에서 중산리에서 올랐다가 내려오던 한 명이 다쳤단다.
21시에 출발하기로 했었던 버스가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오는 사람들 중 6명이 21시 35분에 내려오는 바람에
거림에 갔다가, 이 부상자를 태우기 위해서 닷 중산리로 왔는데, 22시 25분이 되어도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러지 나머지 승객들이 아우성을 친다.
원래 18시 정각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올 떄 사정으로 21시 출발로 늦추었으면 21시에 출발을 해야지 언제 갈거냐고.
지금 가도 전철, 버스등 대중교통편은 다 끊어지고 택시를 타던지 갈 길이 망막한데 어찌할 것인가고.
할 수없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22시 28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5월 22일 새벽 2시 25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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