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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당일치기로 지리산 종주하기(2)

◆ 삼도봉(三道峰, 1499m)

 

    노루목 이정표를 지나 비탈길을 10여분 가면 동-서 종주 하는 사람들이나 뱀사골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고, 내림 길을 조금 내려가면 이내 오름 길로 바뀌면서

바위 덩어리들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그래도 지리산에서는 날카롭다고 표현할 만하고 정상 부근에는 암석뿐 전망을 막는 나무가 없어 사방이

확 트이면서 낫날처럼 날까온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바로 삼도봉(三道峰)이다.

    백두대간이 남한 땅에 들어와 세 개의 삼도봉을 만들었는데, 영동의 민주지산 삼도봉과 거창의

대덕산 삼도봉이 그 중 두 개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곳 지리산 삼도봉이다.

    지리산 삼도봉은 북쪽이 전라북도(남원시 산내면), 서남쪽이 전라남도(구례군 산동면과 토지면),

동쪽이 경상남도(하동군 화개면)이다.

이 삼도봉은 조선 말기 고종 33년(서기 1896년)에 전국이 8도에서 13도로 개편되면서 얻게된 백년 남짓 된 이름이다.

삼도봉지경표지청동삼각뿔(왼쪽)과 삼도봉에서 피아골 조망(오른쪽)

    삼도봉을 일명 '날라리봉'이라고 부르는데 그 많은 지리산의 산봉 이름치고는 좀 천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것은

정상을 이루는 바위들이 낫 날처럼 날카롭다 하여 '낫날봉'이라 한 것이 발음하기에 어려워서 자연스럽게 변음하여

날라리봉이 되었다 한다.

    이곳 삼도봉에서 지리산 10경 중의 제2경 '피아골 단풍(丹楓)'을 구경할 수 있다.

 

피아골은 '직전(稷田)'이라고도 하는데 피아골 입구의 내동리 토지초교 연곡분교와 연곡사 위쪽의 마을 이름이 직전이고

그 위쪽 골짜기 이름이 바로 피아골이다. '직전(稷田)'은 '피 밭'을 말하는데 피밭이 '피아'로 변음된 것다.

그러니까 직전은 피아골의  한자어다. 그 옛날 이 곳에는 쌀 농사는 물론 다른 곡식도 잘 안 되었지만 유독 피(稷)농사는

그럭저럭 되기 때문에 피 농사를 지어먹으면서 연명하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많아 예전보다 수입이 짭짤하다고 한다.

    피아골은 지리산에서도 자랑하는 제일의 활엽수림지대다. 통상 시월 중순쯤 되면 피아골 활엽수림을 이루는 모든

나무들이 함께 어울려 만산홍엽의 삼홍(三紅)을 연출한다.

 

삼홍(三紅)이라!

참 멋진 표현이다.

 

 단풍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니 산홍(山紅)이요,

그 붉은 산이 물 속에 비쳐서 물 또한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연인의 손잡고 이를 보러 온 사람들 그 얼굴을 상기시켜 붉게 물 드리니 인홍(人紅)으로,

이들이 삼홍(三紅)이다.

    그래서 피아골에는 '삼홍소(三紅沼)'란 이름이 붙은 소가 있는데 피아골의 단풍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제1의 단풍 경치를 자랑하는 명소다.

 

피아골 단풍은 설악산이나 내장산처럼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색상이 오히려 사람을 매료시킨다.

피아골 삼홍소 단풍
피아골 상단부 단풍나무

    피아골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시 이 계곡에서 흘린 피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도, 또 어떤 시인은  피아골을 '눈물의 울음주머니'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50년대 후반에 바로 이 곳 피아골을 무대로 한 지리산 빨지산들의 생활상을 그린 '피아골'이란 영화가 있었고, 그 후로도 이 곳을 무대로 한 소설로 이태의 '남부군' 을 비롯한 '지리산'등의 여러 작품이 나왔다.

◆ 화개재

 

    삼도봉에서 화개재까지 급경사 내림 길인데 지금은 상,하행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넓은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고

좌측통행으로 내려가는 쪽은 고무 판까지 깔아서 미끄럽지 않게 잘 해 놓았다. 워낙 많은 계단이라 좀 지루하기는 하지만

안전하니까 먼 산 구경도 하고, 오손도손 이야기하면서 쉬엄 쉬엄가서 쉽게 화개재까지 내려 갈 수 있지만,

나는 시간이 없는 관계로 뛰어서 내려갔다.

삼도봉-화개재 간의 나무계단

    화개재는 일명 '중산이재'라고 도 하며, 해발 1,300m 남짓한 지리산 주능선에서는 가장 낮은 곳이다. 북쪽은 뱀사골이고,

남쪽은 목통골로 해서 화개장터에 이른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쪽 바다에서 나는 생선, 해산물, 소금 등의 산물들을 남쪽산록에

있는 화개장터를 거친 후 이 곳을 거쳐 북쪽의 운봉, 산내, 마천 등지로 공급되고, 반면에 내륙의 곡식, 산채 등 특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화개, 악양, 하동 등지로 공급되는 지리산 남북산록 산물들의 교역로였다.

화개재 정상(토끼봉방향)


    북쪽 뱀사골은 화개재에서 반선에 이르는 약 9Km나 되는 긴 계곡이고 서쪽에 천왕봉(1,915.4m), 중봉(1,875m),

제석봉(1,806m), 하봉(1,780m)에 이은 지리산 제5봉인 반야봉1,733.5m)이 있고 동쪽에 토끼봉- 명선봉-삼정산으로

이어지는 큰 능선 사이에 끼어 골이 깊기도 하지만 시종 험하거나 급경사 진 곳이 없고 완만하여

등산이라기보다는 장거리 산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코스다.

    또 수량도 많고 물이 맑기를 그지없으나 지세 탓으로 큰 폭포는 없고 물웅덩이 소가 많아 이름 지어진 것만도 요룡소,

탁룡소, 뱀소, 병소, 병풍소, 간장소 등 여섯 개나 된다. 이들 소의 명칭들은 모두 그 유래가 있다. 소마다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간장소는 남쪽의 소금장수가 소금을 잔뜩 지고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 내려서다가 자칫 실족하여

물웅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물이 간장처럼 짜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간장소의 이름은 그 옛날 화개재가

지리산 남북의 교역로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남아 있다.

병소/ 간장소

    뱀사골대피소는 샘물 때문에 화개재에서 뱀사골 쪽으로 200m 내려가서 있는데 수용인원을 80명이다. 전기불이 없어서

밤에는 랜턴이나 후랫쉬가 필수적이라 한다.

뱀사골 대피소

뱀사골에는 세계 7종 수종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각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배롱나무(목백일홍) 줄기처럼 윤기 있고

불그스레 한 빛깔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꽃 또한 함박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답다.

노각나무와 꽃
서동종주(西東縱走) 2 : 화개재 -벽소령
동에서 서로 바라 본 지리산
화개재-벽소령 지도

◆ 토끼봉(1,534m)

 

    화개재에서 약간 경사진 오름 길을 약 20분쯤 오르면 토끼봉에 이른다. 정상은 나무가 우거져 있지만

 조망은 좋지 않다. 기껏해야 반야봉 봉우리 윗 부분 정도만 보일 뿐이다. 정상 20m 전에

헬기장이 있고 이정표도 이 곳에 서 있다.

    토끼봉에는 '지보초'라는 풀이 군생하여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부르지만 토끼가 많이 서식한다거나 산 모양이

토끼를 닮지도  않는데 '토끼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혀 다른데 이유가 있다.

토끼봉(卯峰)

    지리산 서편의 주봉인 반야봉에서 정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양식의 24방위(方位)로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

12지(十二支)에서 토끼띠이기 때문에 이 봉우리를 '토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二十四位(24방위)
1. 子方(자방); 352.5-7.5도, 정북(12시방향) 2. 甲方(갑방); 7.5도-22.5도
3. 丑方(축방); 22.5도-37.5도 4. 艮方(간방); 37.5도-52.5도, 정동북
5. 寅方(인방); 52.5도-67.5도 6. 乙方(을방); 67.5도-82.5도
7. 卯方(묘방);82.5도-97.5도,정동(3시방향) 8. 丙方(병방); 97.5도-112.5도
9. 辰方(진바); 112.5도-127.5도 10. 巽方(손방); 127.5도-142.5도, 정동남
11. 巳方(사방); 142.5도-157.5도 12. 丁方(정방); 157.5도-172.5도
13. 午方(오방); 172,5도-187.5도,정남(6시방향) 14. 庚方(경방); 187.5도-202.5도
15. 未方(미방); 202.5도-217.5도 16. 坤方(곤빙); 217.5도-232.5도, 정남서
17. 申方(신방); 232.5도-247.5도 18. 辛方(신방); 247.5도-262.5도
19. 酉方(유방); 262.5도-277.5도,정서(9시방향) 20. 壬方(임방); 277.5도-292.5도
21. 戌方(술방); 292.5도-307.5도 22. 乾方(건방); 307.5도-322.5도, 정북서
23. 亥方(해방); 322.5도-337.5도 24. 癸方(계방); 337.5도-352.5도

◆ 명선봉(明仙峰, 1,586.3m)

 

    토끼봉에서 다음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 까지는 꾀 먼 거리인데 도중에 해발 1,463m 봉우리를 하나 더 넘는다.

토끼봉과 명선봉 중간쯤에 총각샘 이정표가 있고,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 벼랑 밑에 솟아나는 샘을 '총각샘'이라 부른다.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맨 먼저 장터목의 샘을 찾아내서 '산희샘'이란 처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 산악회가 1970년

7월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이 곳에서 또 샘을 발견하고는 동쪽에 처녀 샘이 있으니 서쪽의 것은 '총각샘'이라

하자는 공론이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총각샘

    명선봉을 서북편으로 돌아서 내려서면 곧 연하천산장(煙霞泉山莊)에 도달한다. 수용인원 50명으로 비교적 작고 산과

숲으로 둘러 쌓여 사방을 둘러보는 전망이 없어 동서남북을 구분하기도 어려운 그저 한적한 곳이다. 산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하거나 이곳에 숙박한 한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딱히 앉을 만한 자리도 없었고, 또 사람들이 싫은지라

앉을 생각도 없었다. 페트병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 연하천으로 가니 인공적으로 설치해 놓은 PVC Pipe를 통하여 물이 꽐꽐

흘러내리고 있기는 한데, 취사객들과 등산객들이 수통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 10여 미터나 줄을 서 있었다. 비록 시간이 없기는

하지만, 빈 수통에 물을 받아 가야 하므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물을 받았다.

시간을 보니 10시 10분이다. 10시 정각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줄 서서 물받는데 10분을 허비한셈이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어물거릴 틈이 없다. 부라 부라 급하게 걸어가면서 페트병을 배낭에 집어 넣었다.

    백두대간종주지도를 자세히 보면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이다. 연하천의 물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남쪽으로 흘러

대성리를 지나 화개장터로 흘러갈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북쪽 뱀사골로 흘러간다.

    지리산 동쪽부분에 연하봉(煙霞峰)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 곳의 샘을 '연하천(煙霞泉)'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진주 지리산산악회의 전신이 연하반(煙霞伴)이었는데 그 때 이 샘을 발견하고 산악회 이름으로 샘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 '대자연(煙霞)의 서기(瑞氣)가 어려 솟아나는 샘물' 이란 좋은 뜻이기는

하나 연하봉과 같은 이름이라 지리산을 처음 종주 하는 사람에게는 좀 헷갈리게 한다.

◆ 삼각고지(三角高地, 1,480m)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종주길에서 북쪽 삼정산과 심정리 마을로 내려가는 샛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

오던 길보다 좀 높을 뿐인데 이곳이 하동의 화개면과 함양의 마천면, 남원의 산내면의 지경이 되는 곳이라 웬만한

지도에는 산봉 이름이 없지만 사람들이 삼각고지 또는 삼각봉이라 부른다.

    이 삼각고지 남쪽 계곡이 빗점골이라는 깊은 계곡이다. 6. 25를 전후하여 지리산 빨찌산의 아지트가 되어

상당기간 국군의 대대적인 공비토별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이 계곡 아래 의신마을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빨찌산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이 빗점골로 도주하였다가 이 곳에서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하다.

◆ 형제봉(兄弟峰, 1,452m)

 

    삼각고지에서 다음에 오를 봉우리가 형제봉이다. '형제봉'이란 이름은 이 산에 있는 '형제바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형제바위를 찾는데 잔뜩 신경을 썼다. 어쩌다 그냥 지나치기라도 하면 사진을 찍기 위하여 힘들게

간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형제봉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그럴 듯한 바위가 자꾸 나타난다. 정작 형제바위는 형제봉 정상을 남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려 할 때 왼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형제바위는 형제봉의

동편 9부 정도에 있는 것이다.

형제봉서편
형제봉동편

    형제바위는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두 형제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높이 20m가 넘는 큰 입석바위인데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있다.

    옛 날 두 형제가 성불수도 하려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기에 온 정성을 드리는데 심술궂은 지리산녀(智異山女)가

끈질기게 유혹하면서 방해하였다. 두 형제는 그녀의 유혹으로부터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의지하며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너무 긴장했던지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 형상의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형제바위 옆 조금 아래 관통 동굴이 있는데 이것 또한 연하굴(煙霞屈)이라 한다니 굴의 이름에 관한 자세한 유래는

모르겠으나 아마 연하천(煙霞泉)처럼 연하반(煙霞伴) 산악회가 처음 발견하여 그들의 산악회 이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벽소령(碧宵嶺)

 

    형제봉을 지나면서 벽소령 휴게소까지 가는 길은 지루하고 힘들다. 지금까지 온 길 중에서 가장 거칠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등산로에 큼직큼직한 돌들이 그냥 뒹굴고 있고, 로프를 잡고 온갖 용을 써야만

오를 큰 바위도 여러 군데 있다. 그 동안
쉬지 않고 몇 시간을 계속 걸어왔기에 이 때부터 힘들기 시작한다.

형제봉 형제바위에서 바라 본 벽소령산장
(왼쪽이 꽃대봉, 오른쪽 먼 산이 덕평봉)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하니 12시 정각이다. 성삼재에서 걷기 시작한 것이 새벽 5시 10분이니까 거의 6시간 50분을 쉬지않고

줄기차게 걸어 온 셈이다. 이 떄까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힘들다. 이곳에도 연하천대피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다. 딱이 앉을만한 자리도, 또 휴식을 취할 그늘도 이미 먼저 차지한 사람들 떔에 없다. 물을 받을려고 물어보니

100m 아래에 있는 샘으로 가란다. 시간이 너무 많이 길릴것 같기에 물받기를 포기하고 잠시 사진만 찍고 바로 스쳐 지나쳤다.

혹시나 다음에 와서 잘 것을 대비해서 붙여 있는 안내판을 보니 벽소령 산장의 숙박료는 1인당 5,000원이며, 모포

대여료는 1장에 1,000원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이정표 상으로는 6.4km로 약 2시간 남짓 거리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힘들고 지루하여

지리산이 왜 지리 지리한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가도 가도 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똑같은 경치와 똑같은 길이 반복되기

떄문이다.

 

수려한 봉유리가 우뚝 우뚝 솟아있는 설악은 힘이 들지만 보는 즐거움이 있다. 눈을 돌리면 사방이 신기하고 구경거리가

지천으로 늘려 있어서 힘들지만 지루한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반면에 지리산의 이 구간은 정말로 지루하다.

똑같은 골짜기,

똑같은 풍경,

똑같은 능선,

똑같은 바위,

똑같은 돌 길

이같은 길을 6.4km걸어가야된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지루한지를!

여기에 힘 빠지고 다리힘 풀렸을 떄는 더욱 더 지루하게 느껴진다.

참으로 지루한 길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아쉽게도 쉴틈이 없다.

그냥 그저 묵묵히 걷고 또 걸을뿐이다.

' 나는 누구인가? ' 라는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잡고서.....

걸으면서 계속 자신에게 묻는다.

"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 뭣하려 이 험한 곳에 왔는가? "

 

지치고 지칠 떄쯤 저 앞에 피안(彼岸)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온 산이 때타지 않고 순수자체로 빛을 발하면서 해맑은 미소를 보내는 붉은 선홍색 진달래 동산이 손짓을 한다.

일순 이 떄까지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면서 몰려왔었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우리가 그토록 꿈꿔왔었던 새로운 세상!

바로 피안의 새 세상이 나를 반긴다.

 

이 곳이 바로 지상낙원이 아닌가!

그래서 그럴까?

세삭대피소에서 촛대봉(1,703.7m)으로 올라가는 능선 중간쯤에

 

'이곳이 바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이요, 천상선경(天上仙境)이다'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예가 바로 지상선경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석평전의 늦게 핀 아름다운 진달래 군락들은 그동안의 힘들고 지루했었던 마음을 일순간에 날려주고도 남는다.

진달래 꽃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너무나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서 너무나 황홀하다.

아무 떄도 타지 않는 그 해맑고 곱디 고운 선홍색으로 빛나는 진달래꽃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순수하게

정화시켜주는 마력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어디 자세히 볼 틈이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지리산 10경 중 제5경이 바로 '벽소령(碧宵嶺) 명월(明月)'이다.


    '지리산 어디에나 달이 뜨지 않은 곳이 없을 터인데 왜 하필 벽소령의 달이 지리산 10경에 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이 곳이라고 유달리 달이 두 개 뜨는 것도 아닐 것이고, 더 크지도 않을 터인데.

    모든 것에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듯이, 이곳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태고의 고요함 속에 덕평봉 옆구리로 떠 오른 달은 어느 곳에서 보는 달보다 높고 푸르다.

    왼쪽 영신봉에서 삼신봉에 이르는 낙남정맥이 동쪽 울타리가 되고, 오른쪽 빗점골 저편으로 전남과 경남의 지경을

이루는 명선봉-토끼봉-삼도봉-불무장등-황장산으로 흘러내린 능선이 또한 서쪽 울타리가 되며,

명선봉-형제봉-덕평봉을 연하는 지리산 주능선이 북쪽을 막아주니 동, 서, 북 삼면에 울타리가 쳐지고

남쪽만 트여 있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푹 꺼져 내려갔기 때문에 대성리 운수리 등 가까운 마을의 불빛은

보이질 않고, 또 먼 화개장터는 황장산이 가로막아 결국 이곳에서는 대피소의 전기불 외에는 불빛을 구경할 수가 없다.

산장도, 전깃불도 없던 때는 그야말로 암흑 속에 하늘에 달 그것 만이 빛을 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벽소령 중천에 떠 있는 보름달은 세상 그 무엇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고고(高高)하게 떠서 교교한 달빛을

발하니 그 빛이 희다 못해 푸를 것이다. 산도 푸르고 달빛도 푸르고 깊은 골짜기도 푸르니 자연히 밤도 푸르러 이곳이

벽소(碧宵: '푸른 밤'이라는 뜻)의 고개(嶺) 된 것이 아니겠는가!. 

     세석산장에서는 저 멀리 하동과 섬진강을 연한 마을의 불빛이 많이 보였고,

장터목산장에서는 남쪽에 하동, 화개장터, 구례까지, 그리고 북쪽은 마천, 산내, 인월등지의 불빛들이

도시를 방불케 하지만, 이곳만은 인공의 방해를 받지않고 오롯이 달빛을 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 벽소령 뜬 달은 깊은 계곡 때문에 더 높아 보이기도 하고, 그 어느 불빛에도 방해받지 않고 중천에 고고히

그리고 유아독존으로 떠 있어 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가 즐거운 일이니 지리산 10경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선택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벽소령 명월이 지리산 10경에 드는 대신 이곳 일출은 볼품이 없을 것이다.

꽃대봉과 덕평봉 사이로 떠오르는데 워낙 산이 가까우니까 먼동도 노을도 없고 해가 산등성이에 오르자마자

눈부신 광체를 발하니 어디 일출이라 감탄할 여지도 없다.

꽃대봉 일출
벽소령대피소에서 서쪽 조망
(앞계곡이 삼정마을, 멀리 보이는 저지대가 섬진강과 화개장터)

작은 벽소령에서 바라 본 서쪽 조망

(앞산 안부가 범왕고개, 뒤 안부가 당재, 당재 왼쪽이 황장산,

하늘금 왼쪽이 광양의 백운산)

    벽소령 산장에서 동쪽 덕평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주능선 남쪽 사면 9부 정도에 약 2Km를 수평으로 나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그 저 지리산 종주 등산로일 뿐이다. 그러나 관찰력을 발휘하면 이 길이 예사 등산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공비토벌 당시 군인들이 닦은 도로인데 세월이 무상하여 등산객이 다닌 길만 남고 양쪽에는 관목들이 우거져 있어

도로였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산 쪽의 바위를 깨어내고,

계곡 쪽에 축대를 쌓은 부문이 군데군데 있다.

    그러니까 벽소령 공비토벌을 위한 작전도로는 북쪽 심정마을에서 구불거리며 벽소령을 향해 오르다가

막바지에 와서 너무 급경사이기 때문에 벽소령으로 바로 넘지 못하고 동쪽으로 2Km를 나아가서 꽃대봉 동쪽

안부로 지리산 주능선을 넘은 다음 주능선 남쪽 사면을 따라 벽소령까지 다시 서쪽으로 2Km를 돌아와서 거기서부터

구불거리며 의신 마을로 내려 간 것이다.

공사장비도 별로 신통치 않았을 당시 이 공사를 맡았던 지휘관과 군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러니까 이 도로 때문에 벽소령은 두 개가 된 것이다, 서쪽의 원래부터 사람이 넘어 다니던 벽소령은

'큰벽소령'또는 '구벽소령'이라 하고, 2Km 동쪽의 작전도로가 넘는 고개는 '작은벽소령'

또는 '신벽소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구벽소령 남쪽 100m 지점에 '벽소천(碧宵泉)'이 있다. 이 곳 사람들이 부르는 원명으로는'뱁실샘'이다.

이 샘 때문에 이곳 구벽소령에다 산장을 지은 것이다. 산장의 수용능력은 250명으로 세석산장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성스럽고 이 아름다운 지리산이 6. 25를 전후하여 상당기간 좌우이념갈등의 현장이 되었었다.

소위 지리산 빨치산이란 무장공비들이 이 산을 그들의 아지트로 삼았기 때문이다.

    6. 25를 앞두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훈련된 핵심요원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여러 곳에서 선동, 폭동 등을 통한

공산혁명을 획책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이 항상 사용해왔던 그들 고유의 수법을 총 동원하여 아직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남한 사회를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1948년 10월 19일의 여순반란사건으로 이들이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 때는

그 위세가 대단하여 전남지역을 담당하는 군대를 총 동원하여도 진압이 불가하여 할수없이 대구에 있던 부대까지 지원을

나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

    여순반란사건의 주동자들은 정세가 불리해 지자 휘하 조직원들을 이끌고 이 성스러운 지리산으로 진입하였고,

여순반란사건 진압에 출동했던 대구 부대도 돌아가는 길에 일부 좌익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동료들을 많이 살상한

다음 지리산으로 잠입하였다.

    6. 25전쟁 발발 이후에는 유엔군의 반격으로 경부가도가 잘리자 퇴로가 차단 된 패잔병들이 민주지산, 덕유산 등과 함께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지리산은 남북의 전선 없는 대 격전장이 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단풍 때문에 지리산 10경의 하나에 까지 들게 된 피아골을 비롯하여 빗점골, 의신 등이 그들

빨치산들 아지트의 중심이였고, 이 산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 마을은 물론 도시까지도 맘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며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비극이 연출되었던 현장이다.

    신벽소령 서쪽 봉우리는 지도상에는 △1426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꽃대봉'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 일대를 점거한 빨찌산 제2병단 병사들이 이 봉우리를 뒤덮은 야생화 꽃밭이 너무 아름다워 이 봉우리를

꽃대봉이라 부른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념에 미쳐 있던 그들에게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벽소령으로 작전도로가 개설된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지리산 주능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내가 지나온

명선봉- 삼각고지-형제봉-꽃대봉에 이르는 능선에서 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져 쌍방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곳을 '피의능선'이라고 부른다.

    벽소령 산장에는 공비토벌작전 유적지를 표시하는 안내도를 그린 입간판을 세워 놓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

벽소령산장의 공비토벌작전 안내도
피의능선(명선봉-꽃대봉)
서동종주(西東縱走) 3 : 벽소령 - 천왕봉
동에서 서로 바라 본 지리산

벽소령-천왕봉 지도

 

지도상의 구벽소령(사실은 신벽소령 공터에 도착하니 13시 20분이였다. 배도 고프고 힘도

들고해서 꽃대봉 공터에 앉아서

사과 1개, 단밭빵 1개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 덕평봉(德坪峰, 1,521.9m)

 

    신벽소령에서 작전도로와 결별하고 오름 길에 들어서면 덕평봉을 올라가는 길이다. 산 중턱을 오르자 등산로는

정상을 피해 남쪽 비탈길로 돌아서 간다. 덕평봉 정남에 이르렀을 때 약 40-50평 정도 되는 공터가 있고,

야트막한 축대 아래 꽂힌 PVC 파이프에서 맑은 샘물이 물줄기를 드리우는데, 많은 사람들이 물도 마시고 받아 가기도 한다.

산 비탈에서 나오는 물이라 미심쩍어 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수질검사표가 붙여 있다. 이곳에서 손도 씻고 물도 2병을 받았다.

이정표에 '선비샘'이라 쓰여 있고, 그 발로 옆에 선비샘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다. 그래서 이곳이 선비샘인 것을

알려 준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대로 위쪽을 보니 무덤이 있을만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파갔는지 현재는 없다. 무덤이 있을만한

자리 동서남북 사방으로는 돌들이 묻혀 있어서 일반인들은 쉽사리 묘를 쓸만하지는 않고, 특수한 사연이 있을 경우에만

이곳에 묘를 쓰겠지만, 이 돌들의 영향을 받겠기에 좋은 자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양명(陽明)한 곳이기는 하다.

 


    옛 날 이산 아래 있는 상덕평 마을에 착하고 점잖은 한 선비가 살았는데 워낙 가난해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몹시 천대를

받다가 '죽어서는 천대를 받지 않고, 사람대접을 받는 것이 소원' 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효자인 그 아들이 어떡하면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줄까 하고 며칠을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이 샘 위쪽에 부친의 묘를 썼다고 한다. 지나던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떠먹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니 결국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준 셈이다.

    지금은 무덤도 없어지고 공터가 생겨 등산객이 쉬어 가는 쉼터가 되었다.

샘도 파이프를 박아서 무릎 꿇고 머리를 숙이며

물을 떨 필요가 없이 서서 흐르는 물줄기에 물병이나 물통을 대고 받아서 마시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이름은 '선비샘'이다.

선비샘과 이정표

◆ 칠선봉(七仙峰, 1,576m)

 

    덕평봉을 지나면 좀 멀지만 덩치가 큰 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을 분기시키는 영신봉이다.

그러나 덕평봉에서 영신봉에 이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암봉을 이리 넘고 저리 넘으면서 때로는 먼 경치로

온 길을 되돌아 보기도 하고, 영신봉에서 청학동 뒷산 삼신봉까지 흘러내린 낙남정맥도 전망하고,

띄엄띄엄 우뚝우뚝 솟은 암봉을 올려다보면서 가게된다.

    이 곳에 솟아 있는 암봉들을 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일곱 개라 한다. 이 바위들이 마치 아름다운

일곱 선녀들이 노니는 듯하다 하여 이 산 봉들을 '칠선봉(七仙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암릉들이 주는 맛은 가날픈 선녀상이 아니라 두루뭉실한 우리네 어머니상들이다.

하기사, 뭐 선녀들이 모두 가날프기만 하겠는가만은.....

 

옛 날 조선시대의 궁녀들도 가날픈이가 있었는가 하면 상궁이나 나인들처럼 두루뭉실한 궁녀들도 있었으니 하늘에 있는

선녀라고 뭐 별다르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칠선봉을 넘었다.

◆ 영신봉(靈神峰, 1,651.9m)

 

    칠선봉의 봉우리들이 끝나고 등산로는 짙은 숲에 들어서 영신봉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남쪽으로 우회하더니 정상에서

약200m남쪽의 낙남정맥 마루금에 올라서게 된다. 이 곳부터 동쪽 사면으로는 키 큰 나무는 없고, 진달래 및

철쭉과 구상나무들이 군락을 이룬다.

여기서부터 세석평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능선 모퉁이로 들어서니 온 산이 해맑은 빛을 띄면서 선홍색으로 붉게 피어나면서 반긴다. 

이어서 모퉁이를 돌아서니  나타나는 산뜻하면서도 규모가 큰 건물의 세석대피소가 보인다. 
    낙남정맥의 시발점 영신봉 정상을 올랐다가 내려서면서 붉게 핀 진다래들이 반기기 시작한다.


    정상에는 고사목들과 진달래 및 철쭉들이 큼직큼직한 바위들 사이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그동안 걸어왔던

온 길 서쪽을 바라보는 전망이 감회롭고, 남쪽의 낙남정맥과 그 끝자락의 내, 외삼신봉을 바라보는 전망 또한 감회가 깊다.

정상에 서니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동안 흘린 땀을 씻어준다.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상쾌해진다.

새로운 이상향 피안을 접하는 순간이 이러하리라.

영신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 모두가 해맑고 아름다운 선홍색 꽃밭이다.

이곳의 날씨는 고도가 높은 탓에 다소 춥다. 해서 꽃들도 늦게 핀다.

내륙에서는 이미 잎이 무서한 진달래가 이곳에서는 이제 한창 만개하였다. 따라서 진달래보다 늦게 피는 철쭉은

아직까지 꽃망울조차 맺지 못하고 있다.

 

바람에 시달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고사목과 형형색색의 만물상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들, 그리고 그 아래 아름답게

피어난 선홍색 진달래와 평원에 곱게 피어난 기화요초들은 한 폭의 그림을 넘어서 인간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지상선경의 모습을 말없이 보여준다.

아마도 어디엔가 지상선경이나 천상화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너무나 이름답다.

 

사람의 눈이나 좁은 앵글을 가지고 있는 카메라에 담기에는 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두고 두고 보고싶은 전경이다.

 


   그 뿐인가 동쪽으로 돌아서서 세석대피소를 포함한 세석평전을 내려다보는 풍경과 건너편 촛농 흘러내린 듯한 촛대봉을

바라보고 그 왼쪽으로 이번 산행의 최종 목표인 천왕봉과 제석봉을 바라보는 경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여기가 바로 지상선경이고,

천상화원이며 천국일 것이다.

 

이것을 보고자,

아니 이 맛을 즐기고자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백두대간은 좀 더 가서 남한 제2봉이자 남한 내륙의 제1봉인 천왕봉에서 끝맺음을 하면서

끝나기 직전 이 곳 영신봉에서 낙남정맥(洛南正脈)을 분기시켜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남쪽 산들로 맥을 이루게 한다.

그 아래 음양수 샘이 있다.

낙남정맥을 분기시키는 영신봉 정상

◆ 세석평전(細石平田)

 

    세석평전을 '잔돌평전', '세석고원'이라고도 부른다. 혹자는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며

'고원(高原)'이라 해야 맞다는 주장을 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맞는 말 같지 않다. 언제 지어졌는지 연대는

미상이지만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불러 온 '새타령' 이라는 가사에 꿩을 묘사한 이런 대목이 있다.


    "오색채의(五色彩衣)를 떨쳐입고 아홉 아들 열두 딸을 좌우(左右)로 거느리고 상평전(上平田)

하평전(下平田)으로 아조 펄펄 날아든다. 장끼 까토리 울음 운다 꺽꺽 꾸루룩 울음 운다."

    남한에서는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 둘레 12Km, 넓이 약 30만평에 바닥에 잔돌이 깔려 있는 위에 수십만 그루의

진달래와 철쭉이 대군락을 이루고 드문드문 구상나무가 있어서 오월 말에서 유월 초가 되어 진달래 꽃과 철쭉꽃이 만발하면

은은한 진달래 꽃 및 철쭉꽃과 주변경관이 조화되어 과히 장관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세석평전 철쭉'이 지리산 10경 중 제6경이다.

    철쭉은 한자로 척촉(足鄭 足蜀)이라 하는데 '척촉'이 '철쭉'의 어원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는

'발길을 머뭇거리게 한다'는 뜻이다. 산길을 가다가 철쭉꽃을 만나 그 모습이 은은하고 아름다워서 갈 길을

못 가고 머뭇거리며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서 있는 광경을 연상할 수 있다.


    세석평전은 철쭉꽃도 꽃이려니와 평전 그 자체가 그림이다. 영신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나 촛대봉쪽에서 바라보는

정경이나 간에 완만한 경사면에 진달래 및 철쭉과 구상나무가 펼치는 조화로운 색채, 그기에 산뜻한 산장까지 더하여

인간이 흉내조차 낼 수없는 한 폭의 그림이라는 것 외에 다른표현이 없다.

진달래와 철쭉꽃이 한창일 때는 정말 꿈같은 거대한 화원이 된다.
바로 천상화원(天上花園)이다.

영신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세석산장은 '96년에 건립된 것으로 2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 최대의 대피소이며 세석천(細石泉)이 있고,

이 곳을 중심으로 동서로 지리산 종주길이 있고, 북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한신계곡을 통해 백무동으로 내려가며,

남쪽으로 200m쯤 내려가면 산청 시천면 내대리 거림마을로 가는 동쪽 길과 서쪽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마루금으로 올라서는 길이 갈린다.

    또 낙남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화개면 대성리로 내려가는 서쪽 사면길이 갈리고, 마투금을 계속 따라가면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 또는 불일폭포와 쌍계사로도 갈 수 있어서 세석산장은 등산로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늘 사람이 붐비는

곳이니까 산장도 크게 지어해야 했을 것이다.

    1972년부터 진주 지리산산악회 주최로 '세석철쭉제'를 열어 오다가 혼잡과 철쭉 훼손의 우려 때문에 지금은 폐지되었다.

    조선조 세종-성종간에 영남학파의 거두로 알려진 점필제(占畢齊)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마흔 살의 나이로 그의 제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3년(1472년) 음력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 동안

지리산을 올라 두루 둘러보고 자세하게 쓴 지리산등산기행문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는

세석평전의 '세석(細石: 잔돌)'에 관한 내용은 보이는데 철쭉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에 큰 산불로 일대의 무성했던 나무들이 전소하고 몇 백년을 거치면서 자생력이 강한 철쭉이

이 평전을 독점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 탁영 김일손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스승인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 사초(史草)에 넣었다가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입게 되며, 이미 죽은 김종직도 부관참시(副棺斬屍) 당하는 화를 입는다.

 

새벽에 나랑같이 종주산행인 A코스로 왔던 사람들이 천왕봉을 가지 않으려면 이곳에서 거림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안내자가 성삼재 주차장 오기전 버스 속에서 "15시까지 세석에 도착하지 못한 분들은  이곳을 탈출로로

삼아서 거림으로 내려 오라" 신신당부를 했다.

 

세석에 도착하니 15시 25분이다.

여기도 인산인해로 앉을 자리가 없다.

해서 뒤로 돌아가서 구석진 돌위에 앉았다.

지치고 힘들고 해서 오이를 하나 깎아 먹으면서 거림으로 탈출할까하고 계산을 해본다. 거림까지는 6.5km로 3시간 거리로

표시되어 있지만, 빠른 걸음으로 가면 2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16시에 내려가면 18시에 도착하니 21시까지 3시간 동안 할 일이 마땅찮다.

그래서 계산을 해본다. 천왕봉을 올랐다가 가면 장터목까지 2시간 30분,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1시간, 천왕봉에서 중산리

까지 3시간 도합 6시간 반이 소요되어 21시 30분이 되니 지정된 시간인 21시 보다 30분이 더 걸려서 문제가 되지만,

3시간을 무료하게 기다리는것 보다는 낫다.

 

처음으로 조금 쉬고 나니 재충전이 이루어졌는지 힘이 다시 솟아난다.

부지런히 촛대봉으로 올라가는데,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데 경치를 감상할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진은 찍어야 하니 부지런히 걸으면서 사진을 찍자니 잠시 숨을 멈추어야만 하는데, 오르막에서

숨을 멈추고 찍자니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파오면서 숨쉬기도 거북해진다.

부지런히 걸어올라가는데, 거대한 바위들이 갖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로 촛대봉 정상이다. 그 순간 앞이 환해지면서 저멀리

지상천국이 아니라 천국이 나타난다.

바로 제석봉과 마치 仙人이 坐禪하는듯한 모습을 한 지리 천왕봉이다.

새하얀 고사목과 해맑으면서도 붉은 진달래 및 초롱불을 밝히는듯한 기화요초들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천왕봉은 꼭 거대한

신선이 좌선 삼매에 든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로 저 모습이구나.

그래서 지리산이 신선들의 세상이되었고, 수 많은 선인들이 이 산속으로 숨어들어와 저 도인의 품속에 안기어 그토록

갈구하던 참된 진리를 얻어서 거칠것 없는 대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서 빛의 세상으로 들어 갔구나.

 

그대, 지리 천왕봉이여!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사천리를 달려와 이곳 산청 땅, 그것도 中山里에서 그 기운을 힘껏 토해내고 참진리(眞道)의 道를 얻어

대자유인들의 세상인 빛의 세상을 열었구려!

내, 이제 그대를 보고자 오늘 하루 쉬지않고 28.6km를 달려왔소이다.

대자유를 얻을 수 있는 빛의 세상을 나에게도 보여주시요!

어디에도 걸림없는 대자유를 얻고 싶다.

◆ 촛대봉(1,703.7m)

 

    우리나라 전국의 산에는 수 없이 많은 촛대봉이 있다. 우선 지리산에만 해도 세 개나 있다.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세석평전의 동쪽산과 천왕봉을 지나 중봉, 하봉에 이르러 북쪽 추성동으로 향하는 능선길로 조금 내려가면 또 하나의

촛대봉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이미 지나온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불무장등, 통곡봉, 황장산을 지나 좀 더 내려가면

또 촛대봉이 있다.

    그런데 '촛대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면 촛불을 꽂는 촛대를 연상케 하는 위로 길쭉하게 치솟은 입석이 있기 마련인데

이 촛대봉은 이와는 전혀 다른 뜻에서 촛대봉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해발 1,7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지만 촛대는커녕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과 사면이 완만하게 흘러내리기 때문에

산 모양만 보면 오히려 '삿갓봉'으로 부를 법하다.

    그런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들이 하나같이 모나지 않고 두리뭉실하여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 하여

촛대봉 이름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촛대봉과 정상의 촛농바위(오른쪽)

    지리산에서 일출(日出)! 하면 당연히 지리산 제1경인 천왕봉 일출이겠지만 이 곳 촛대봉 일출도 꿩 대신 닭으로

꾀 호평을 받는다.

 세석산장에서 불과 15분이면 오를 수 있는 촛대봉 정상에 서면 동편으로 천왕봉이 우뚝 솟아있는 것외에는 일망무제이기에,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천왕봉 음영을 왼 편에 걸어 놓고 그 오른쪽 하늘과 땅을 구별하기 힘든 아득히 먼 지평선으로 구름을

오색으로 물 드리며 떠오르는 크고 붉은 태양은 정말 볼만하고 운치가 있을 것이다.

    너무 단조롭다고 느껴지는 천왕봉 일출에 비하여 운치가 더 있다는 평도 있다. 그기에 촛농처럼 제 멋대로

굳어버린 촛대봉 바위들과 어울려 한층 멋을 더한다.

촛대봉 일출

    또 촛대봉은 일출뿐만 아니라 천왕봉의 위용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 볼 수 있고, 뒤 돌아 온 길, 노고단,

반야봉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산봉우리들도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식별할 수 있으며, 북쪽의 한신계곡, 남쪽의 도장골을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전망을 제공해 준다.

◆ 삼신봉(三神峰, 1,667m)

 

    촛대봉에서 내림길로 내려서는가 싶으면 이내 약간의 완만한 오름 길이 있고, 바위들이 쭈삣쭈삣 솟은 봉우리가

의아스럽게도 '삼신봉'이다. 삼신봉 등산길은 바위 정상을 피해 서쪽으로 우회한다.

    낙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지리산 남쪽 전경을 한눈에 보는 청학동 뒤 삼신산

 특히 외삼신봉(1,284m)에는 환인, 환웅, 단군삼신(三神)으로 모시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도 있고,

그 남쪽 청학동에는  이 삼신을 모시는 삼성궁(三聖宮)도 있어서 산 이름을 '삼신산'이라 한 것은 이치에 맞지만

이곳 삼신봉 이름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마 정상에 삼신을 상징하는 세 개의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삼신봉과 반생반사의 주목
삼신봉의 새끼악어바위

◆ 연하봉(煙霞峰, 1,730m)

 

    삼신봉에서 북쪽으로 약간 오름 길을 오르다 보면 산 봉인지 분간하기 힘든 곳에 암봉이 솟아 있는데 연하봉이다.

'연하봉(煙霞峰)'이란 이름 또한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전신인 연하반(煙霞伴)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 하지만,

자세히 보면 봉우리 끝의 바위들이 꼭  연꽃이 반개(半開)한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연화봉(蓮花峰)으로

이름을 바꾸어야만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봉우리의 형상뿐만이 아니라 그 바로 앞에 연화대좌를 지키는

불교의 호법신장 중 가장 우두머리 호법신장인 제석천왕을 뜻하는 제석봉(帝釋峰)까지 있기 떄문이다.

    바위에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이끼가 덮어있고,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의 평전이 펼쳐 저 그 끝이 일출봉에 이른다.

큰 나무가 적어서인지 기화요초(奇花瑤草) 야생화들이 만발하여 선경(仙境)을 이룬다.

 

그래서 이곳  '연하선경(煙霞仙境)'이 지리산 10경 중 제8경이다.

    바람에 풍화되어 새하얗다 못해서 푸른빛이 날정도로 아름다운 고사목과 어른키만한 진달래가 그 해맑고 고운 손홍색

꽃을 피워내고 땅에는 기이한 야생화들이 저 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풍광은 바로 앞에 좌선하고 있는 빛의 세상인

천왕봉과 더불어 지상선경을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초가을에는 구절초, 쑥부쟁이, 산오이풀, 투구꽃, 그 외에도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활짝 피어

지상선경이자 지상천국을 꾸미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새하얀 빛을 발하면서 매마르고 앙상한 가지들을 허수아비처럼 반듯하게 뻗치고 서 있는 고사목과 해맑고

어린아이들의 핏빛처럼 한 점 티없이 깨끗하고 곱고 아름다운 진달래 꽃과 맑은 하늘색 만큼이나 꺠끗한 사파이어 빛

야생화들 사이로 시야에 들어오는 황금색 제석봉과 제석봉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 뒷쪽에 마치 천상 옥황상제(玉皇上帝)

처럼 장엄(壯嚴)하면서도 웅위(雄威)한 모습으로 좌선하고 있는 천왕봉의 모습은 이곳이 바로 천상 천국임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 일출봉(日出峰)

 

    연하봉 선경이 끝나는 동쪽 끝 자락을 사람들이 지도상에는 없지만 일출봉이라 부르는데 연하봉 쪽에서 보면 산

봉우리라기에는  좀 뭣한 구릉이다. 그러나 장터목쪽에서 보면 연하봉은 보이지 않고 이 부분이 산 봉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에 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일렬로 성벽처럼 서 있어 성릉(城稜)을 이룬다.

    이 곳을 '일출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촛대봉 일출과 같은 사연에서다. 천왕봉 일출을 보겠다는 등산객은 모두

장터목산장에서 숙박하게 마련이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초가을에는 천왕봉 일출은 아침 6시니 4시반에는

출발해야 먼저 가서 좋은 자리 잡고 앉아 기다리게 된다.

    높은 산 깜깜한 밤길을 렌튼에 의지하여 제석봉과 톱날 능선을 지나 천왕봉까지 가자면 족히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천왕봉에 간다고 해서 천왕봉 일출을 본다는 보장도 없다. 오죽하면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삼대 덕을 쌓아야 한다'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래서 새벽에 화장실에 가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날씨가 좀 시원치 않다 싶으면 천왕봉으로 향하지 않고,

느긋하게 일으나 반대쪽인 이 곳 일출봉으로 오른다. 20분이면 충분하다. 이곳에서 운이 좋으면 일출을 보고,

천천히 천왕봉을 오른다.

천왕봉에 오르는 보람이 어디 반드시 일출을 보는 것뿐인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일망무제(一望無際) 사방을

둘러보는 전망은 일출에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출봉에서의 일출은 촛대봉 일출과 비슷하지만 촛대봉에서는 촛농 같은 바위들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대신 이곳 일출봉에서는 자연성릉을 이룬 기암과 고사목 그리고 기화요초 만발한 연하의 선경이 그 조연을 담당한다.

이곳에 올라보면 제석봉에서 중산리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거대한 龍을 볼 수가 있다.

어찌나 힘차던지 그 생동하는 모습과 기운이 몸으로 와닿으면서 힘찬 기운이 전달되어 온다.

정말로 힘차고 살아있는 生龍의 모습으로

이 생룡의 힘찬 모습이 있었기에 그 중간에 들어선 법계사가 이 민족의 부침과 영욕을 같이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장터목(1,750m)

 

    일출봉에서 장터목은 코앞으로 가깝게 보인다. 옛 날 산청의 시천사람들과 함양의 마천사람들이 닷새에 한번씩 만나

물물교환을하는 장터였기 때문에 '장터목'이란 이름을 얻었다 하나,

 해발 1,600m가 넘는 이곳에 장이 섰다니 지금으로선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장터목대피소

    장터목 역시 종주길이 동서로 지나는가 하면 북쪽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하동바위길과 백무동계곡길 두 길이 있고,

남쪽으로 유암폭포-칼바위를 지나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오거리이면서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마지막 캠프 역할을 하기 때문에 늘 사람들이 붐빈다.

    그래서 '71년에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지리산산장'이 이곳에 세워졌고, '86년에 재건축하면서 '장터목산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지금의 산장은 '97년에 다시 건축하여 14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천왕봉 일출처럼 반야봉 낙조도 좀 단조로울 것이라 생각이 드니 장터목 낙조가 오히려 더 운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장터목 남쪽 20m쯤 아래 있는 샘을 '산희(山姬)샘' 이라 하는데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처음 발견하였을 때

동행했던 이기호 열성 회원의 어린 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한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니 17시 30분이다. 대피소 아래에 있는 산희샘에서 물을 보충하고 천왕봉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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