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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활인지산 소백산(1439.5m)

1. 活人之山 小白山

 

 活人之山 !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같이 공부를 끝내고 자기가 마친 공부의 실증을 검증하고자 전국을 周遊하던 16세기 중반 조선조 중엽의

대예언가이자 예언서 격암유록의 저자인 남사고가 지금의 풍기에 도착한 후 소백산을 마주하자 내뱉은 첫 마디다.

 

남사고는 소백산을 마주하자 타고 있넌 말에서 내린 후 넙죽 큰절을 올리면서

"활인지산(活人之山 ) !"이라고 감탄을 했다.

 

그의 말대로 이 산은 그동안 숱한 사람들을 살리고 부양했으며, 그 산자락에서 웃고 울게 만들었다.

 

때문에 쇠락해 가던 조선조 말 극도로 피폐해진 민심을 교모하게 이용함으로써 조선말 발생하였던 모든 민란의 이론적 근거이자 또한 모든 민란이 표방하였던 구호와 사상의 바이블이 되었던 정감과 이심이 지었다는 도참서 '鄭鑑錄'에서도 "후천세계 도래시 삼재팔란을 피할 수 있는 十勝之地 中 兩白之間(태백산과 소백산의 사이)이 가장 좋은 십승지지이고, 그 중에서도 풍기의 金鷄洞이 으뜸이다"라고 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양백지간인 이 지역(단양의 노동리와 풍기의 금계동)에는 나라를 구할 인재를 얻고자 갈망하는 신혼부부들이 찾아들어와서 하루밤 자고 간다고 한다.

 

* 노동리에는 삼인의 명정승이 탄생한다고 했는데, 현재까지 고려의 사인 벼슬을 했었던 우탁과 이조에서 한 명이 태어났기에

   아직까지도 한 명이 더 태어난다는 풍수이론에 따라서 현재도 많은 신혼부부들이 와서 자고 간다고 한다.

 

* 풍기의 금게동은 풍수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金鷄抱卵形으로 소백산이 잉태한 명당 중 가장 천하명당인 곳이다.

 

경상북도 와 충청북도 및 강원도의 三道 및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안정면. 봉현면. 대강면. 부석면과 봉화군 물야면, 영월군 하동면,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단양읍의 1市  2郡 2邑 10面에 걸쳐 있는 거대한 소백산은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터밭이자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충주호와 동강 및 서강을 만들고 나아가서 한강의 오늘이 있게 만들었기도 하다.

 

더욱이 소백산은 백두대간이 남행을 하다가 척추부위에 해당하는 태백산에서 방향을 틀어서 서진하는 길목으로 사천리를 행룡하는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丹田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아마도 후천세계도래시 발생하는 三災八亂時 이들 삼재팔란이 침범하지

못하는 不入之地가 되어 이 나라 민초들을 구할 수 있는 땅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문에 비록 높이는 태백산 보다 적지만 크기는 태백산의 거으,ㅣ 배가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생이 형보다 훨씬 더 크고 넓으며 헌걸차다.

 

소백산의 최고봉인 毘盧峰(1439.5m)은 마치 떡시루를 뒤짚어 놓은듯한 모습이다. 우리니리에서 이같은 모습을 한 봉우리들은 모두 다 비로봉이라 하는데, 소백산의 비로봉은 꼭 鳳凰의 모습이다. 특히 풍기쪽으로 앉은 모습은 꼭 도를 통한 도인이 좌선삼매에 빠진듯한 모습으로 그 형상이 아주 넉넉하고 너그러워서 이 세상 모든 것을 품어 안아줄 것 같다.

이같은 연유로 그 자락에 통일신라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던 불가 화엄십찰의 수사찰인 봉황산 부석사가, 또 순흥안씨의 본향인 순흥 비봉산 자락에는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들어서서 이 땅의 통치철학을 마련한 철학자들과 그들 철학을 바탕으로 이 땅을 이끌어 갔었던 위정자들인 인재들을 길러낸 것이리라.

 

2. 왜 할인지산인가?

 

내가 소백산을 찾은 것은 지금까지 이십여 차례가 넘는다. 이유는 '왜 활인지산인가?"라는 의문을 풀기위해서 였다.

시대의 예언가이자 九遷十葬의 주인공으로 현재까지도 인류에 회자되고 있는 남사고는 '왜 이 산 앞에서 말을 내리고 큰 절을 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했는가?'라는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생쌀 한 줌만을 주머니에 넣은체 2박 3일동안 종주를 비롯하여 그동안 이 십여 차례나 산을 올랐다.

 

결국 그 답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어느날 이 의문을 풀고자 소백산이 바로 코 앞에 보이는 천하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풍기관광호텔에 숙박을 했다.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을 받은 소백산을 보고자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서 소백산을 마주하고 좌선을 했다. 잠시 후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고 깨어나는 소백산을 보고서야 남사고가 큰 절을 했던 이유와 "활인지산이다 !"라고 외친 이유를 알았다.

 

원래 소백산 자락은 마치 기치창검처럼 뽀족하고 날까롭게 생겼다. 풍수 상 이같이 생긴 산자락에서는 반듯이 피를 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임란당시와 6.25 때 소백산 자락에서는 숱한 생명이 피를 보면서 사라져 갔다. 물론 지리산 자락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희생되었다. 그런데도 남사고는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외쳤으니 내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는가?

 

결국 답은 찾았다.

 

그동안 이십여 차례 소백산을 오르면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맨 처음 소백산을 무박으로 오랐을 때다.

소백산 비로봉의 칼바람은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이 나지 않을만큼 매섭고 모지다. 그 때도 그랬다. 그 모진 칼바람을 맞으면서 일출을 기다라고 있는데, 옆에서 일출찰영을 준비하고 있던 사진작가가 한 마디를 한다.

" 여기 몇 번 올랏어요? "

" 오늘이 처음인데요."

" 에이, 그럼 쉽지 않겠는데요. 삼대가 적선해야만 한 번 볼 수 있다고들 하는데요"

" 그래요?"

대답은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오늘은 볼 수 있는데... "라고 말했다.

 

잠시 후,

사해가 오색구름이 휘감고 돌더니만, 순간적으로 천지가 이득해 온다.

그리고 그 祥스러운 五色彩雲을 뚫고서 마치 함지박만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는데 참으로 장관, 또 장관이였다.

마치 암닭이 붉은 알을 낳는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내가 순간 외쳤다. "불알이다!"

그것은 정녕 불알이였다. 둥그런 불의 알인 불알이다.

 

순간 이 불알은 순간적으로 2개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2개의 태양이 떠오른 것이다. 두 개의 불알이다.

이 두개의 불알은 약 5초 간을 그렇게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순간을 놓칠새라 열심히 찍었고,

그 사진은 지금도 두 개의 태양이 떠로는 체 남아 있다.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라 아니할 수없다.

 

두번째는 지금으로 부터 십여년 전, 이 일출을 못잊어서 다시 보고자 쌀 한줌에 얼린 생수 한 병을 달랑 짊어진체 중앙선을 타고 희방사역에 내렸다.

2박 3일 종주를 시작하려 간 것이다.

택시를 타고 희방사입구로 가서 희방폭포를 뒤로하고 연화봉으로 올랐다. 물동이 보다도 더 크고 둥근 보름달을 뒤로하고

휘영청밝게 비쳐주는 달빛을 받으면서 랜턴없이 올랐다. 보름달이 어찌나 밝았던지 내일 일출은 끝내주겠구나 하면서

연화봉(1,383m)으로 올랐다.

 

천문대 앞 공터에 텐트를 치고 잤는데, 갑자기 오한이 들면서 잇빨이 마추쳐질만큼 추웟다. 일어나보니 텐트위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역시 산위는 춥다. 한 여름인 7월 하순경에 올랐는데 추워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이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출은 물건너 갔기에 텐트를 걷고 비로봉으로 향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침에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아서 일출만 못 봣을 뿐이지 산행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제1연화봉(1,304.4m)을 뒤로 하고 비로봉(1.439.5m)을 오르니

일망무제다.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 마루금을 밟아 나갔다. 국망봉(1.420.9m)을 거쳐 천태종 구인사를 창건했다는

구인사 제1대 종사인 상월종사를 탄생시켰다는 상월봉으로 갔는데, 상월봉은 꼭 上月宗師를 닮았다.

상월봉은 꼭 성낸男根처럼 생겼다. 그래서 음양의 이치상 반듯이 그 옆에 女根形 바위가 있을 것으로 보여져서 일대를 찾았더니만, 상월봉 일직선상에 걸맞는 여근형 바위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상월봉을 마주하면서 두서너 시간을 수련을 했다.

백두대간 주능선인 늦은맥이재를 지나 救仁寺를 만든 主峰인 신선족대형의 모습을 한 神仙峰(1,389m)으로 향했다. 신선봉 앞의 바둑판바위가 참으로 절묘했다.

신성봉을 내려가서 구인사쪽으로 내려 가는데,

아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손짓을 한다.

" 이 산중에 왠 할머니? "하고 다가 갔더니만 곱게 생긴 하미꽃 한 송이가 웃고 반긴다.

이어서 새색씨 처럼 화사하게 입은 아가씨와 노랑 저고리를 곱게 입은 시골 아가씨등이 반기는데 가까이 가보면 모두 빨강꽃, 노랑꽃들이 였고, 잘 생긴 청년이 넙죽 절을 하는데 다가가 보면 5 ~ 60년된 잘생긴 赤松이였다. 그 때 비로소 꽃과 나무에도 精靈(요정)이 있고 그대로 化顯된다는 것을 실증했다.

 

구인사 뒷산 넘어에는 상월조사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비밀장소에 비밀스럽게 조성되어 있는 건물들이 있다. 신성봉에서 구인사로 갈려면 부득이 이곳을

거쳐가야만 한다. 물동이만큼이나 둥근 보름달의 배웅을 받으면서 이곳으로 내려서니 사람의 인기척조차 보이지 않지만, 불빛은 창틈으로 새어나온다.

허기지고 기진맥진하여 천근만근이나 되는듯한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1대 조사의 가족들이 사는 집을 뒤로하고 고개를 넘어서니 구인사 최상단이였고, 그곳에는 1대 조사의 조사당을 짓느라고 한 창이였다.

 

종무소를 찾아서 하루밤 유숙을 부탁했더니만, 자리가 없단다.

할수없이 관음전 뒷벽을 의자삼아 등을 벽에 기댄체 결가부좌로 하루밤 신세를 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공양을 부탁했더니만, 이 또한 인원초과로 여의치 않단다.

 

하루밤 신세를 졌으니 공양은 뒤로 하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 시내로 나왔는데, 어디선가 청요리(요리라고 해봤자 짜장면 볶는 것이지만) 냄새가 도저히 허기진 배를

못견디게 만든다. 하지만, 어쩌라. 대충 생쌀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버스에 몸을 실었고 쌀 한 줌, 생수 한 병으로 무사히 2박 3일의 소백산 종주를 마쳤다.

 

* 상월봉 가기 전에 상월대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상월불각지가 있다.

* 以目傳氣術을 꺠달은 상월대사는 결혼하여 가족들이 있은 후에 깨달아서 구인사를 창건했기에 그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천태종을 표방했다고 보여진다.

 

세번째는 천동계곡 초입의 다리안 관광호텔에서 유숙했을 때다. 아침을 먹기전에 일출을 보고 오기 위해서 랜턴도 없이 희미한 여명을 나침판 삼아서 새벽 4시에

비로봉으로 올랐다. 일출을 볼 시간에 맞추고자 산 길을 뛰어 올랐다가 내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늦었다. 결국 제대로 된 일출은 보지 못하고 솟구친 태양만 보고 내려왔는데, 일행들이 기다리지 않도록 달려 내려왔다. 쉬지않고 달려 내려왔는데, 너무 무리했나보다. 호텔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다리안 폭포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 "이제 다왓다"라고 생각이 들었고, 그 때 긴장이 풀렸나 보다. 갑자기 어지럽고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비틀거리면서 나무를 붙잡고 서 있다가

"이러다가 잘 못하면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바위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 천지기운이여,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면 기를 좀 나누어 달라"고 하자 순식간에 기가 모여들면서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매스꺼움과 현기증도 사라졌다.

호텔에 도착하니 그 때까지 같이 갔었던 일행들은 일어나지 않고 자고 있었다.

 

네번째가 내가 대학 산악회를 이끌고 있었을 때인데, 2월 중순 경, 상고대와 눈꽃을 보기 위해서 소백으로 갔다. 오늘과 같이 죽령 휴게소( 그 때는 죽령 터널이

뚫리지 않았슴)입구에서 임도를 따라서 연화봉으로 올랐다. 어른키만큼 눈이 쌓였는데, 겨우 사람 하나 다닐만큼 눈 터널이 만들어져 있었다. 눈 터널은 어른 허리

높이까지였는데 참으로 장관이였다. 헌데, 문제는 비로봉에서 생겼다. 아고지대를 만들만큼 무섭게 부는 칼 바람은 능선에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이 바람이 사람이라고 예외를 둘 것인가?

살을 파고들만큼 매서운 칼바람 때문에 사람들이 서 있지를 못한다. 특히 나이들은 분들은 힘이 드나보다. 이 분들을 건사시키고 늦은 분들을 챙기느라고 그만 너무 늦어버렸다. 할 수없이 뛰어 내려가는데, 운동화에 눈길이라 미끄럽기가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끝마친것을 소백산신에게 감사한다. 지금까지도 그 때의 그 감동을 잊지못한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래도 고생했었던 보람이 있기는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소백산은 보통 무박으로 간다. 왜냐하면 일출이 환상적이기 때문에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희방사 - 천동리 다리안 코스 든지,

희방사 - 삼가리 코스 든지,

희방사 - 죽게구곡 코스든지,

희방사 - 어의곡리 코스 든지 간에

보통은 무박이고 요즈음은 교통의 발달로 당일치기도 가능해졌다. 특히 일출을 보지 않을시에는 모두 다 당일치기다.

 

가을에 일출을 보기 위해서 희방사에서 올라서 비로봉, 국망봉을 거쳐서 초암사 석천게곡으로 내려 갔는데, 이 코스가 너무 길고 험하여 여자들에게는 무리였나

보다. 이 때 무리를 해서 집사람이 무릎을 다쳤는데, 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장거리 산행을 못한다. 그래서 산이란 자기 체력을 잘 알고 고려해서 다녀야

만 한다고 본다.

 

오늘은 소백산 철쭉을 보려 갔다.

코스는 죽령 휴게소에서 통신기지국이 있는 연화 제2봉(1,357.3m)을 거쳐서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 연화제1봉, 비로봉, 어이곡리로 내려 가는 백두대간 주능선

총 16.8km 종주다. 원래 종주는 연화제2봉 - 연화봉 - 연화제1봉 - 비로봉 - 국망봉 - 늦은 맥이재 - 상월봉 - 마당치로 해야만 하지만, 보통은 중간탈출로로

나간다.

 

신사동에서 아침 07시 01분에 출발하여 죽령휴게소 앞에 도착하니 09시 53분인데 소백산 철쭉을 보려오기 우ㅢ한 사람들로 인해서 이미 차산인해다.

죽령탐방안내센터에서 3.4km 거리에 있는 백두대간 주능선길이라고 화강암 비석에 세워져 있는 연화 제2봉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다. 30분만에 주파햇으니

시간이 남을 것같아서 여기저기 한적하게 둘러본다.

이곳에서 부터 연화봉 능선길은 온통 연분홍 철쭉길이다. 연화봉으로 오르는 초입에 연화봉 정상을 비켜서서 비로봉으로 가는 자연탐방로가 있다. 하지만,

연화봉 정상으로 가는게 좋다. 정상일대는 온통 철쭉 꽃 대궐이다. 마치 시골의 촌색시 마냥 연분홍으로 물들은 꽃드 ㄹ이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는 모습은 바로 천상화원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국립 소백산 천문대를 바라보는 풍광이 아주 멋지다. 화사한 연분홍 철쭉꽃에 들러싸여 있는 첨성대 모양의 천문대는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어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연화 제1봉과 비로봉 능선 상에 군락을 이루면서 피어 있는 연분홍 철쭉은 마치 양뗴들이 무리를 지어서 풀을 뜯고 있는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직까지 완전 개화를 하지 못하고 봉우리를 열려고 하는 놈부터 완전개화하여 활짝 인사를 하는 놈들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데, 참으로 아름답고 장관이다.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화사한 연분홍 꽃이 주류를 이루고 잇다는 점이다.

원래 철쭉꽃은 천하게 붉은 빛을 띄고 있지만, 유독 소백산의 철쭉은 산철쭉이라서 아주 화사하고 소박한 연분홍색이 주류다.

그래서 마치 진달래 같다.

따라서 청초하면서도 아름답고 곱다.

 

연화봉, 제1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능선이 모두 철쭉군락지다. 특히 비로봉과 국망봉 능선의 아고산지대에 피어 있는 철쭉은 매서운 칼바람 탓에 옆으로 함께

누워있는 푸른색 주목 및 풀들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환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연분홍과 진초록 및 은빛 푸른물결이 일렁이는 풍경은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선사한다.

비로봉 가는 길은 모두 목제계단으로 다시 조성되어 있고, 그 옛 날 산객들의 휴식처였던 대피소는 철거되어 없을 뿐더러, 비로봉도 그 사이 많이 변해서 옛 멋이

없어진듯 해서 아쉬웠다.

 

소백산은 숲과 계곡, 그리고 백두대간 주능선 등 모두 좋지만, 소백산 산행의 가장 큰 단점은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생수를 충분히 준비해 가야한다는 점인데, 이 또한 무거운 짐일테니 나같이 짐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점이 참으로 아쉽다.

 

주 등산로 모두가 수 많은 산객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라 교통체증이 아주 심했다.

그래서 좀 지체되었기는 하지만, 출발 시간인 16시 30분 전인 15시 30분에 어의곡 주차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게곡이 깊고 수량이 많고 좋아서, 계곡에서 대충 씻고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고

쉬고 있으려니 무료하다.

 

결국 차는 예정시간 보다 30분 늦은 16시 31분에 출발했고

신사동 도착하니 20시 25분이였다.

문막쯤 오니 소나기가 많이 왔는데 서울에는 온 흔적이 없었다. 손 바닥만하게 좁은 나라에서도 날씨가 지역에 따라서 다르니

큰 나라는 오죽할까?

 

죽령 탐방센터에서 비로봉까지는 11.3km로 약 4시간 10분이 소요되고, 비로봉에서 어의곡 주차장까지는 5.5 km로 1시간 20분 소요된다.

오늘 총 거리는 16.8km이고, 총 소요시간은 5시간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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