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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선계의 기운이 서려 있는 보개산과 칠보산

1. 仙界의 氣運이 서려 있는 보개산(750m)과 칠보산(778m)

 

오늘은 원래 하트형 용추로 유명한 용추계곡을 거느린 백두대간의 주릉이 지나는 문경 대야산(930.7m)을 가기로 했지만,

현재 대야산으로 흘러가는 백두대간 주릉이 입산금지구간이라서 부득이 주릉을 비켜앉은 보개산과 칠보산으로 가기로 했다.

중부지방에 호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서 비옷을 준비하고 출발했다.

 

 

총등반시간: 5시간 22분(중간에 쉬지 않았슴)

총 등반거리: 약 16km

 

버스가 중부내륙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하늘이 청명해진다. 비는 커녕 햇빛이 쨍쨍 내려쭨다. 산행들머리를 쌍곡계곡 중간에 있는 서당말 예당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잡았지만, 5년 전부터 이 구역이 폐쇄되어 들어 갈수없단다. 젊은 산행대장도, 운영자도 등산지역이 갑자기 변경되는 바람에 가보지를 못했기에

코스를 모른단다.

할 수없이 2006년도에 이 지역을 답사하고 칠보산 등산을 했었던 내가 향도를 맡았다. '출입금지지역'이라는 금줄이 쳐진 곳을 넘어서 계곡을 따라 길없는 길을

만들어 가면서 20여 분쯤 오르니 약 70도 정도의 급경사의 바위길이 앞을 막아서는데 바로 보개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또 다시 20여 분

오르니 이제는 직벽으로 변한다. 숨이 코에 턱턱 닿는데, 이미 옷은 땀으로 모두 다 젖었다. 가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30여 분을 바위와 씨름하고 오르니 그제서야

다시 70도의 급경사 길로 변한다. 비록 70도의 급경사 바위 길이지만, 직벽보다야 한결 수월하다. 천 길 낭떠러지 직벽을 오르느라고 주위를 보지 못했는데,

그제서야 주위를 보니 참으로 환상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저 멀리 계곡초입 마을과, 눈 앞에 보이는 대야산 및 저 멀리 도명산과 도장산, 그리고 속리산이

마치 큰 파도가 치듯이 그렇게 도열하고 있다.

 

이리 저리 사진을 찍고 다시 70도 경사길을 오른지 10여 분, 그제서야 안부가 나타난다. 우리 일행들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지만,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이

마음까지 청량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곳에는 아무런 표식이없으니 어디로 가야 칠보산으로 가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할수없이 산기가 흘러가는 곳으로 

따라가기로 하고, 일단 표식을 남긴 후 왼쪽 길로 접어 들었다. 능선 자체가 마치 칼등처럼 날카롭고 좁은데 능선 좌우로는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아득한 낭떨어지 길이라 아차 잘못하는 날에는 그날로 세상을 하직한다. 약 1.5km를 걸어가니 정상이 저 멀리 보이고 정상으로 오르는 급경사길이 나타나난다.

정상으로 올라 가는데, 이미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30대로 보이는 3명의 등산객들을 만났다.

그들이 물었다.

" 이 길로 계속 가면 칠보산이 나옵니까? "라고.

그래서 내가 "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라고 물었더니

" 보개산에서 오는 길입니다" 라고 한다.

그제서야 아차, 길을 반대로 알고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 그렇다. 계속가면 칠보산이다."라고 대답했더니만,

" 혹시 단속하는 공원관리인이 없었습니까?"라고 묻길래

" 없었지만, 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가라."고 했다.

 

그들이 잰걸음으로 떠나자, 나도 길을 돌려서 왔던 길로 다시 내려 갔는데, 안부에 도착하니 그 때까지도 일행들은 보이지를

않는다. 표시를 반대로 남기고 막 떠날려고 하니 저 멀리 부부팀이 올라오는게 보인다.

그래서 큰 소리로 "오른쪽으로 오라"고 하고 칠보산으로 향했다.

칠보산은 봉우리가 일곱개다. 각 봉우리 마다 불가에서 귀중히 여기는 보석같다고 해서 칠보산이라고 불리어 졌는데, 그 실제

그림이 각연사에 그대로 탱화로 그려져 남아 있을 정도다. 그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인간 그림자 하나 없는 호젓한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한참을 걸었다.

정말로 환상적인 경치다. 아름들이 적송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솔향이 맑은 하늘과 더불어 청정한 기운을 더해준다. 어찌나 청정한지 마치 강원도의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인간 그림자 하나없는 호젓한 산속을 한 참을 갈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소리로 온 산이 시끌법쩍하길래 고개를 돌러보니

쌍곡구곡 제3곡인 떡바위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내는 소리였다. 안부인 청석재로 내려가는데 '출입금지' 팻말과 탐방로없슴이라고 쓴 표시목이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고, 또 금줄까지 쳐놓으면서 " 이 코스는 위험하여 탐방을 금하며 위반시는 30만원의 과태료에 처한다"라고 아주 크게 표시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는 들어 가서는 안되는 구간을 들어 가서 걸어온 것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알고보니 각연사의 주산인 보개산은 산 아래에 있는 각연사의 요청에

의해서 탐방금지구간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개산에서 만난 그 젊은이들이 그렇게 물었나보다. 청석재에서 칠보산 정상까지는 600m거리인데

거의 대부분이 암벽인지라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한다. 중간에 말안장처럼 생긴 '말안장 바위', 중절모자처럼 생긴 '중절모자 바위' 등 기막히게 좋은 바위들이

있어서 눈을 즐겁게 만들고, 또 산 아래 각연사와 저 멀리 보개산(750m), 막장봉, 장성봉(915.3m), 덕가산(854.5m), 큰군자산(948.2m), 작은군자산(827m), 시루봉,

악휘봉(845m), 도명산, 대야산, 도장산, 속리산 등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인양 그림처럼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흰 화강함 바위를 뚫고 자라고 있는 아름들이

적송들과 이미 죽어 고사목이 된 적송들이 보여주는 기기묘묘한 모습들은 가히 천상의 모습을 보는듯

하다.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칠보산 정상에서도 벌어진다. 너도 나도 인증샷을 찍고자 그 조그마한 표시석을

잡고 아우성을 친다.

지금까지 인간 그림자조차 볼 수없었던 청정한 선계에 살다 졸지에 오염투성이인 하계에 내려온 기분이 든다.

 

칠보산 정상에서 살구나무골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의 내리막길인데 모두 나무계단으로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사가 아주 급하여 다소 위험하다. 조금

내려가면 거북이가 등에 짐을 하나 가득진체 하늘로 날아오르는듯한 모습의 거북바위와 거북 바위 위 거대한 마당 바위에 우뚝 선 멋진 모습의 적송을 볼

수가 있고, 여기에도 사람들이 인증 샷을 찍고자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잔 한장 찍자고 이 인간들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를 보통 10 ~ 20분이다. 물론 그 덕분에 나도 좀 쉬기는 하지만....

 

3시간 반 이상을 걸으면서 그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땀만 흘리고 걸었더니 급기야 입안이 온통 쓰다. 물론 다소의 갈증도 오고.

그래서 더 이상 땀을 흘리면 곤란하겠기에 셔츠를 말아올려서 체온을 다소 낮추었더니 갈증이 조금은 해소된다.

 

살구나무골을 돌아서 내려왔더니 드디어 마치 강같은 수량을 가진 쌍곡계곡을 만났다. 어찌나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던지

그냥 풍덩뛰어들어서 씻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절말까지는 4.3km가 남았는 고로 씻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계속걸었다.

여기서부터는 길도 편하고 아름들이 굵기로 멋지게 생긴 적송숲 속이라서 걷기가 편하다. 계곡 곳곳에 사람들이 들어 가서 쉬기도 하고 씻기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절말까지 2km여를 남겨놓은 곳에서 머리도 감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과 옷을 깨끗하게 씻고 빨아 입었는데, 땀내나는 몸과 옷을 씻어 냄새가 나지 않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마치 날아갈듯하다.

 

조금 내려오니 천하일품이라는 쌍곡제칠곡인 쌍곡폭포가 있는데, 정말로 장관이다. 높이 8m정도의 반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넓게 모여드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여인네가 치마를 벌린듯 하다고 해서 '쌍곡폭포'라고 불린다고

 한다. 참으로 천하절경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절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쌍곡구곡은 다음과 같다.

 

제1곡 호룡소: 쌍곡계곡 초입에 있는 호룡소는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넓은 소(沼)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옛날 이 근처 절벽에 호롱불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호롱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2곡 소금강: 주변 높이 솟아 있는 바위와 절벽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비견될 정도라고 하여 금강산의 축소판인 소금강이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곳에 휴게소가 있는데, 손님이 없는 탓인지 지금은 폐허로 변해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제3곡 떡바위: 바위모습이 마치 떡시루를 자른 모습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통상 칠보산의 들머리로 이용된다.

이곳에서 칠보산 정상까지는 2.7km 밖에 되지 않는다.

 

제4곡 문수암: 맑은 계곡물과 바위,노송들이 멋진 절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예전 바위 밑 동굴에 문수보살을 모신 암자가 있었다고 하여 문수암이라고 불리지고

있다.

 

제5곡 쌍벽 : 10m높이의 바위벽이 평행하게 마주보고 서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고 하여 쌍벽으로 불러지고 있다.

 

제6곡 용소: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깊은 소다.

 

제7곡 쌍곡폭포: 旣(기) 설명

 

제8곡 선녀탕: 제수리재에서 내려오는 계곡하단부에 있으며, 직경 10m, 깊이 2m 정도의 소를 이루고 있는데, 옛 날에 선녀들이

목욕하려 내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9곡 장암: 마당바위라고도 하며 물흐르는 계곡전체가 40m의 반석으로 이루어져 마치 마당처럼 넓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속리산국립공원 내 쌍곡지구에 위치하고 있는 쌍곡계곡은 그 냇물을 쌍천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제수리 고개에서 시작한 맑은 물이 군자산, 비학산,보개산 계곡

사이로 갈라져 내곡천과 외곡천의 두 줄기로 흘렀기에 쌍천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옛부터 산수가 아름다워 퇴계 이황, 송강 정철 등 수 많은 문인,학자들이 이곳의

산수경치를 좋아하여 즐겨찾던 곳으로 호롱소, 소금강, 쌍벽 등이 九谷을 이루며 푸른 숲과 기암절벽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화양동, 선유동과 더불어

명승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2, 도(道)를 얻고자 하는 괴산 寶盖山 覺淵寺

(1), 괴산군 칠성면 台城里에 소재한 각연사는 인적이 없는 천혜의 수도 도량으로서

     보물 제 433호인 비로자나불이 유명한 각연사.

     속리산국립공원의 북쪽 끝 명승인 쌍곡을 지나는 곳에 푸른빛 도는 산의 남기와

     괴강의 물빛이 한 가지가 되어 비할 바 없는 閒村의 풍광을 보여주는 초입에는

     괴강서 부터 따라온 한 여름 갈대가 나그네의 심금을 가만히 흔든다.



   심심산골 산의 깊음도 깊음이러니와 깊음이 주는 그윽함보다는 좀더 청량하고도 감미로운

  기운이 감도는 천혜의 땅으로 仙界의 기운이 크게 서러있어서, 이곳에 오면 마치 선계에

  든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곳은 북두칠성의 기운이 크게 서려 있기에 지명이 七星面 台城里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2), 사적기가 잘 보관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창건 내력과 중창 내력이 명확하지 않음.

     전설에 의하면, 당초 각연사 자리는 연못이였으나 有一화상이 이를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운후, 연못이 바로 절터임을 꺠닫게 해 준 절이라 해서 그 절의 이름을 " 覺淵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년(515)에 유일화상이 현재의 각연사 비로전의 안산인 칠보산  너머에 있는

   절말이라고 부르는 동네에서 한창 절을 짓고 있었는데,자고 일어나 보면 목재에서 나온

  대패밥이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이를 이상하게 여긴 화상이 하루는 잠을 자지 않고

  지켜 보았는데, 밤이 되자 까치들이 그 대패밥을 죄다 물어 가지고 날아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까치가 날아 가는 곳을 뒤쫓아 따라가 보았더니 산 너머에 있는 한 연못에다 대패밥을

  떨어뜨리어 그 연못을 메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못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솟아

 나고 있었다.하도 기이하여 연못의 대패밥을 파헤쳐 보았더니 한 돌부처가 못 가운데 묻혀 있고

 광채는 바로 그 부처에게서 나오고 있었다.이에 유일 화상은 이곳에다 절을 지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을 꺠닫고 절말에다 지으려던 목재를 이곳으로 옮겨와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은 다음 못에서 나온 부처님을 그 안에 모시니 현재의 비로전이고, 그 안에 모셔진 보물 제

 433호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좌상이 바로 그 돌부처라는 것이다.



  신라의 元曉.義相.자장과 고려의 懶翁 그리고 조선의 西山.泗溟과 같은 분들은 으레 어느

 절이든 자기네 절의 역사를 설명할 때마다 그 분들과의 인연을 거론해야 자랑거리가 되는

것으로 인식이 굳어져 버린탓에 인연이 전무한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끌어될려고 하는 것이

 요즈음 절집의 속성이라 이 절도 예외는 아닌듯, 나옹과 사명이 수행하였던  도량이라고 전해

 지지만, 이 절에 감도는 청량한 선계의 기운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닌듯 하다.

 대표적인 정교유착론자인 무학의 스승인 나옹이나 그보다 더한 政敎유착으로 俗氣로 가득찬

 泗溟을 脫俗한 仙氣로 가득 찬 이땅의  기운이 받아 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3),각연사의 風水

   

    이 절의 本殿은 비로전인데,덕가산 主山에 봉우리 세개가 준수하게 앉은 바위산인 七寶山을

 案山으로 또 멀리 떨어진 속리산을 조산으로 하고 있다.

 淸風閣 너머로 가파르게 앉은 보개산은 내백호가 되고 덕가산의 청룡자락은 한참을 굽이쳐

 내려가다가 문경의 희양산에서 우뚝 힘을 주고 있다.그리고 덕가산과 칠보산에서 내려 오는

각각의 물줄기는 사적비의 귀부가 있는 펑퍼짐한 곳에서 합수를 이루어 청풍각 옆을 돌아 아랫

 마을로 내려가는데 이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렇듯 가파른 산들이 가람을 싸고 둘러앉아 있기에 안에서 보면 마치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곳 지형은 天獄形局이 된다. 그래서 도인이 살지 않으면 도적이 차지하게 되는 地勢다.



 전체적으로는 북두칠성의 국자안에 정전인 비로전이 들어서 있으며 그 오른편 뒤켠에 대웅전이

있는바,비로전은 두마리의 코끼리가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서 설법을 듣고 있는 코끼의 눈자리

인 명당에 위치함으로서 안산인 七寶山의  三台星과 七星이 모두 七寶 中 一寶를 들어 비로자나불에게 받치는 七星禮佛形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탱화가 비로전 우측벽에 걸려 있는 바,다섯분의 부처가 모두 하나의 보물

즉 각기 다른 手印을 하고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인데,조선조 말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에는 文昌星과 武曲星이 日星과 月星이 되어 호위하고 있고 主山인 寶蓋山과 德伽山 및 案山인 七寶山이 연꽃이 되어 들러쳐 있으니,반개한 연꽃속에

앉아서 삼태와 칠성의 예불을 받고 있는

비로자나불 즉 芙蓉半開中七星禮佛形으로 천하대명당이지만, 仙界의 氣運이 크게 서려 있기에

속세와는 인연이 멀어 오로지 法을 찾는 이들을 위한 명당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道를 묻고자 하는 이들이 이곳에서 공부한다면 크게 깨칠 수 있을 대명당이다.이같은 연유로 아직까지도 깊고 깊은 산중에 태고의 정적을

간직하면서 남아 있었으리라.



(4),석조 비로자나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비로전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柱座와 信枋石

을 그대로 사용하여 기둥을 올렸는데 조선조 후기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그 안에 석조 비로자나불이 보물 제 433호로 지정되어 모셔져 있다.대좌와 광배까지

모두 갖추어진 비로자나불 한 분만

모셔져 있어 여느 불당보다 독특하고도 예스런 분위기를 풍긴다.



안상을 화려하게 조각한 팔각의 하대석 위에 귀꽃을 올린 복련을 두르고, 다시 밋밋하고 얄팍한 팔각받침을 그 위에 놓은 다음 운룡문으로 깊게 양각한 팔각의

중대석 위에 앙련을 두른 원형 대좌가 부처님을 받치고 있다.



한 장의 돌로 된 광배 또한 걸작이다.밖으로는 불꽃무늬를 두르고 안으로는 당초문을 넣은 타원과 원이 身光과 頭光을 이루는 형태인데 신광부에 넷,두광부에

좌우로 둘,그리고 정상부에 나란히

앉은 세 분의 化佛이 석조의 광배로는 더할 수 없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대좌 위에 부처님을 모시는 양식은 신라 하대에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유사한 예로 대표적인 것은 청양의 장곡사 불상을 들 수 있다.

장곡사에는 철조의 약사여래좌상과

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데,약사여래좌상은 사각의 대좌이고 비로자나불좌상은 팔각의 대좌지만 모두 훌륭하다.대좌양식의 유사함으로 보아 각연사 비로자나불의

대좌와 장곡사 비로자나불의 대좌는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지나 장곡사 부처님이 석불이 아니라 철불인 점이  무언가 한 번 생각을 하게 만든다.



즉 지금 있는 석불은 원래 연못에서 발굴된 석불이 아니라 새로 조성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모셔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왜냐하면 연못에서 발굴 당시

광배와 대좌까지 온전하게 발굴

되었을 리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기까지 유행했던 불상들은 선종의 영향을

받아 거의가 긴장된 얼굴과 벌어진 어깨를 한 힘찬 기상이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이 각연사의 석불은 동그란 얼굴에 납작한 코, 부드러운 미소와 단아한 체구

등이 그 당시의 불상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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