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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케하는 차마고도와 손오공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케하는 차마고도와 손오공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옥룡설산(5,596m

 

1. 티벳인들의 생명줄 차마고도의 난관(難關) 금사강호도협(金沙江虎跳峽)



(1) 차마고도의 난관으로 세계 3대 트레킹 중의 하나인 호도협 트레킹



연 평균 12.6도로 사계절 온난한 운남성은 보이차의 산지다. 때문에 옛부터 이곳의 차와 티벳의 말과 소금을 물물교환하였던 교역이 발달하였다. 그 시발점이 바로 여강이였다. 창탕고원에서 발원하여 동남방으로 유유히 흘러오던 금사강은 여강에서 운령산맥을 만나 145도로 방향을 틀면서 북동하기 시작하여 상해를 거쳐 황해로 흘러들어 간다. 이 유장하게 흐르는 금사강의 강폭이 가장 좁았던 여강의 수허고진(束河古鎭)에서 부터 보이차를 말에 가득싣은 마방(馬幇)들의 생명을 건 물물교역대장정(物物交易大長征)이 시작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모택동의 초기 공산당의 빨치산대장정도 이곳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1935년 5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휘한 홍군의 2만 5000리 장정(長征) 도중에 진사강 건널목에서 장제스(蔣介石)의 부대와 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전투가 바로 유명한 장투진사강(强渡金沙江)이다. 문화재에 중국홍군장정도강(中國紅軍長征渡江)기념관이 있을 정도이니 이 장정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 지를 알 수가 있고도 남는다.



여강을 출발한 마방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난관이 바로 포수에게 쫓기던 호랑이가 강 중앙에 있는 돌을 디딤돌로 삼아 협곡을 건너 뛰어 건너갔다는 전설이 있는 호도협이다. 여강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2시간 30분 외곽에 위치한 호도협은 5,596m의 옥룡설산과 5,396m의 합파설산 사이에 형성된 35km의 대협곡으로 발디딜틈새 하나없는 깎아지른 듯한 보기만해도 현기증이 일어나는 아찔한 협곡아래에는 티벳의 창탕고원에서 발원한 금사강과 흘러내려오는 금사강을 역으로 치고 나오는 충수하(沖水河)가 합수되어 마치 성난 용이 울부짓듯이 거칠게 용솟음치면서 흘러간다. 차를 가득실었던 말과 마방들이 생명을 걸고 걸어 갔었던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이 협곡을 이루고 있는 합파설산과 옥룡설산의 중턱으로 나 있다. 필요에 의해서 조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누가, 어떻게 이 길을 만들었지 참으로 신비롭고도 경탄스러우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지만, 마방들은 소금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걸었던 길이고 지금의 트레커들에게는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고자 스스로 자초한 고생과 고난의 길이다. 이 길이 얼마나 험난했으면 쥐와 새만이 날아 갈수 있다고 해서 서로조도(鼠路鳥道)라고 했을까? 그래서 서로조도는 차마고도의 또다른 별칭이기도 하다. 상,중,하 호도협으로 이루어진 호도협트레킹은 뉴질랜드의 밀포드 사운드 트랙 및 페루의 마추피추 잉카트랙과 더불어 세계 3대 트레킹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코스는 운남성의 차와 티벳의 말을 교역했었던 차마고도의 옛 길을 따라 세계에서 가장 신기하고 아름다운 협곡과 만년빙하가 서러 있는 만년설산의 위용 및 만년설을 조망하면서 마치 네팔의 랑탕같은 느낌으로 대자연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트레킹코스로 천상에서의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장강의 최상류인 금사강은 호도협을 만들어 내고 이곳이 바로 차마고도다.>


<호도협을 만들어 내는 만년설산인 옥룡설산(5,596m>










트레킹의 시작은 여강에서 차량으로 2시간 30분 달려서 다리가 놓여 있는 교두(橋頭)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부터 트레킹을 시작 한다. 이곳 교두에서 10여 분쯤 산을 올라가면 흘러들어오는 적토색(赤土色) 붉은 금사강과 그 금사강을 역으로 받아치면서 흘러들어오는 충수하(沖水河)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접한다. 왼쪽으로는 해발 5,396m의 만년설산인 하바설산(哈巴雪山)이 웅장하게 다가오고 오른쪽으로는 해발 5,596m의 만년설산인 위룽설산(玉龍雪山)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 사이에 만들어진 아찔한 협곡인 호도협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미친 호랑이가 포호하듯이 그렇게 으르렁거리면서 거친 포말과 숨을 토해낸다. 조금 올라가니 나그네들의 지친 몸을 받아주는 쉼터가 나온다. 독일인 등 유럽인과 한국인 및 중국인들이 너나할것없이 모두들 잠시 지친 몸을 쉰다. 주위에는 온통 호도나무와 오죽(烏竹,대나무)이 지천으로 심어져 있다. 그것도 수 십년된 호도나무들과 대나무들이 무리를 지어서 있기에 보는 눈이 즐겁다. 출발지인 교두에서 부터 수십명의 마부들이 말을 끌고서 우리 뒤를 따라오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다. 아니 말을 타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오니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이 계속 따라오는 이유가 곧 밝혀졌다. 나시객잔(納西雅閣)에서 물 한 잔을 마신 후 차마고도를 따라가는데 숨이 가빠온다. 고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설산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올라가는데 28밴드(Bents. 道拐) 앞에 있는 휴게소에서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쉬고 있는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서야 일행 중에서 힘에 부치는 분들이 말을 타기 시작한다. 28밴드를 다 올라 가는데 100위엔이다. 총 28굽이를 돌면서 올라가는 이 코스는 다소 힘들지만, 그만큼 경치가 좋다.구름에 휩싸여있는 만년설산 옥룡설산의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 중 장관이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힘은 들지만 힘든만큼 절경을 선사한다. 승마비용은 갈수록 값이 내려가서 급기야 50위엔까지 내려갔다. 28밴드의 정상은 해발 2,569m인데, 호도협과 옥룡설산의 천하절경을 볼 수 있는 낭떠러지 출입구를 한 그루의 고사목으로 막아놓고 할머니가 지키면서 돈을 받는다. 사진을 찍으려면 5위엔을 내야하는데 봉이 김선달이 따로없다. 가히 중국의 봉이 김선달이다. 하지만 보는 것은 자유라서 들어가서 보았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절벽 위이긴하지만 참으로 천하절경이다. 위로는 흰 눈을 이고 우뚝 솟아 있는 만년설산이요, 아래로는 만길 낭떠러지 절벽이니 고소증이 있는 사람은 아예 엄두도 낼 수없는 곳이다. 여기서 부터 우리가 묵을 차마객잔(茶馬客棧)까지는 내리막 경사길이다. 고산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없다. 맑은 날씨가 계속되다가도 어느새 소나기가 온다. 두 서너번의 소나기를 맞으면서 객잔으로 가는데, 음양의 이치상 궂은게 있으면 그 반대로 좋은게 있는법, 소나기가 그치자 신비한 무지개가 옥룡설산에 걸리는게 아닌가. 너무나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기보단 너무나 신비로운 광경이다. 공기가 깨끗하다 보니 일곱색깔 무지개는 그 각각의 색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지 낀 한국에서는 생각도 못할 광경이다. 더욱이 두번째 소나기 끝에 나타난 쌍무지개는 가히 환상을 넘어서 천상의 색을 보여준다. 일평생 한 번 볼까 말까한 그림같고 신비로운 풍광이다.



KBS 차마고도찰영팀들이 묵고 갔다는 옥룡설산을 마주한 해발 2,200m 고지에 자리잡은 차마객잔은 통나무로 지은 객잔으로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보였고 무척이나 깨끗하였다.특히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기름사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오골계백숙과 닭죽요리는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맛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까지 눈 속에 휩싸여 있던 옥룡설산이 바로 눈 앞에 보인다. 참으로 멋진 풍경이 아닐 수없다.



차마객잔에서 중도객잔(中道客棧, Half Way Guest House)으로 가는 길은 '식물왕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야생화의 천국이자 차마고도의 고행길이다.각종 야생화와 기화요초(奇花妖草)가 만발한 가운데 하바설산 산허리로 나있는 좁은 차마고도는 이름 모를 꽃들과 하바와 옥룡의 양 설산이 지어내는 풍광에 홀려서 아차 한 눈을 팔다가는 영영 이세상과 작별을 고해야만 한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얼마전에도 한국에서 온 관광객 중 한 명이 사진을 찍는다고 절벽쪽으로 아차 한 발짝을 옮겼다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가파르고 수려한 풍광이 욕심나는 곳이기도 하다. 하바설산옆으로 나타나는 산이 바로 손오공과 관련이 있는 오지산(五指山)이다. 꼭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듯한 이산의 산세는 모두 회색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기에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이 뿜어내는 공기와 설경, 눈앞으로 현란하게 다가오는 각종 기화요초들, 모두가 다 볼거리요 구경거리지만, 쓰촨과 운남의 차가 없이는 살아 갈 수없었던 티벳인들과 산간오지인들에게는 이 길은 길이아니라 실핏줄과 같은 것으로 바로 생명줄 그 자체였던 길이다. 이들은 이것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갔던 것이다. 때문에 생명을 걸고 말에 차를 싣고 이 길을 걸어 갔었던 마방들은 교역이 아니라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러 갔었다. 오늘 이 길을 걸어가면서 생명을 담보로 이 길을 걸어서생명을 전해주러 갔엇던 마방들의 삶과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본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서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해발 2,569m의 차마고도와 해발 4,500m에서 만난 야생화>











(2) 중국인들의 생명줄 금사강(金沙江)

차마고도의 최난관인 호도협이 있는 금사강은 서북에서 흘러들어와서 북동쪽으로 흘러 상해를 거처 황해로 빠지는 중국인들의 생명줄이다. 금사강(金沙江, Jīnshā Jiāng)은 티벳 고원 북동쪽의 창탕고원에서 발원하여 티벳고원의 중앙부를 서쪽에서 횡단해 동남 방향으로 흘러 여강부근에서 운령산맥을 만나 145도로 굽이돌아 창장(長江) 강에 합류하는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양쯔강(註1)의 주요상류 중 서쪽 끝에 있는 강을 말하며 전체 길이 2,308km, 유역면적은 494만 500㎢, 낙차는 3,300m에 이른다. 따라서 진사 강은 전체길이 6,300km로 유역면적 180만 8,500㎢에 수원(水源)에서 하구까지의 낙차 5,100m, 연유슈량 1조톤(t), 중국 전국토 포장수력(包藏水力)의 약 40%를 차지하는 창장 강 상류를 가리키며, 디추 강과도 겹치고 있다. 옛날에는 진사 강을 리수(麗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서 사금이 채집되어 이러한 이름이 유래되게 되었다. 성수이강[繩水], 뤼수이강(麗水江) 또는 진룽(金龍)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註1, 양자강(揚子江): 양쯔강이라는 명칭은 하류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부근에서 부르는 지방명에 지나지 않으나 한국에서는 장강 전역을 양자강이라 불러왔다. 이 강은 전체길이 6,300km로 유역면적 180만 8,500㎢에 수원(水源)에서 하구까지의 낙차 5,100m, 연유슈량 1조톤(t), 중국 전국토 포장수력(包藏水力)의 약 40%를 차지하는 긴 강이다.



이 강은 칭하이 성 서부에서 출발한 후 남쪽의 쿤룬 산맥으로 향하고, 칭하이 성과 티베트 자치구의 경계를 이루는 탕구라 산맥으로 흘러, 티베트 동부의 캄 지방을 동서로 가르고 있으며 동경 97도, 북위27-37도 부근으로, 중국의 행정구역에서 티베트와 쓰촨의 경계가 되고 있다. 칭하이성(靑海省)의 남부 위수현(玉樹縣) 바탕허강(巴塘河)으로부터 쓰촨성(四川省)과 티베트의 경계를 남쪽으로 흘러 윈난성(雲南省)으로 흐르고, 쓰촨성의 이빈(宜賓)에서 민장(岷江)을 합류한다.

무량강[無量河], 푸투강[普渡河], 뉴란강[牛欄江], 헝강[橫江] 등의 지류와 합쳐 쓰촨성과 티베트의 경계인 사루리산[沙魯里山]과 닝징산[寧靜山] 사이를 흘러 윈난성[雲南省] 리장나시족[麗江納西族]자치현 스구[石鼓]에서 급히 북류한다.

상류에서 사금(沙金)이 채취되기 때문에 금사강(金沙江)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제갈 량(諸葛亮)이 남만(南蠻)을 정벌하려 갈 때 이 강을 건넜다는 고사가 전한다. 해발고도 5,000m의 고산지대에 계곡이 깊고 험하여 핑산[屛山]으로부터 상류 쪽으로는 주항(舟航)이 불가능하다.

고산지대에 계곡이 깊고 험하여 유명한 후타오샤[虎跳峽]가 있고 수리자원이 풍부하다. 1935년 5월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휘한 홍군의 2만 5000리 장정(長征) 도중에 진사강 건널목에서 장제스[蔣介石]의 부대와 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전투가 바로 유명한 장투진사강[强渡金沙江]이다.문화재에 중국홍군장정도강(中國紅軍長征渡江)기념관이 있다.









2.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나시족(納西族)들의 성산(聖山) 위룽쉐산 [玉龍雪山(옥룡설산), Jade Dragon Snow Mountain]
운령산맥의 남쪽에 있는 성이라고해서 윈난성(雲南省)으로 불리우는 중국 윈난성(雲南省) 나시(納西)·티베트족자치현의 리장(麗江) 서쪽에는 만년설산이 솟아 있다. 바로 옥룡설산(玉龍雪山)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이다.
중국 서부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고산으로 해발 5,596m, 길이 35㎞, 너비 12㎞인 이산은 해발 5,596M인 주봉 산쯔더우[扇子陡(선자두)]를 비롯하여 5,501m, 5,391m, 5,387m, 5,321m, 5208m, 5,220m, 5,062m, 5,009m, 4,680m, 4,506m 등 13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강쪽에서 볼 때 흰 구름 위로 솟아올라온 13봉우리가 모두 만년설로 덮여 있기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산에 쌓인 눈이 마치 한 마리의 은빛 용이 구름 위에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옥룡설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서북쪽의 하바설산쪽에서 보면 마치 흰옷을 곱게 차려입은 옥녀(玉女)가 부채를 활짝펴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이고 활짝 편 부채살의 중앙이 바로 이 산의 최고봉인 선자두이다. 참 잘생긴 산이지만, 최근의 지구온난화의 영향은 피하지 못하는가 보다. 만년설이 차츰 녹하 흘러내려서 이제는 이 산 정상부위에만 조금 남아 있을 정도다. 이 마저도 조만간 녹아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산 전체가 회색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멀리서 보면 꼭 흰눈이 쌓여있는 듯하게 보인다.



<옥룡설산의 위용>






<그 위용스러운 설산에 걸린 일곱색깔의 무지개>





양쯔강의 상류인 진사장강(金沙江)을 사이에 두고 위룽쉐산과 하바쉐산[哈巴雪山(합파설산):5,396m]이 솟아 있고, 두 산 사이로 강을 따라 ‘호랑이가 건너뛸 만큼 좁다’라는 뜻의 후탸오샤(虎跳峽) 협곡지역이 길이 35㎞까지 이어진다. 위룽쉐산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이 갇혀 벌을 받았다는 산으로 전해지며, 여강의 옥호촌(玉湖村) 좌측으로 흘러내러온 옥룡설산의 한 지맥에는 오승은의 서유기에 나오는 화과산(花果山)과 옥주경천(玉柱擎天)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해발 3,350m 지점까지 등산로가 나 있고 이곳에서 부터 해발 4,506m까지는 곤도라가 운행하며, 여기서 해발 4,680m 지점에 있는 전망대까지는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다. 또 곤도라에서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는 원시림 사이로 등산로가 있다. 해발 4,450m 지점에 삼나무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원인 윈사핑[雲杉坪(운삼평)]이 있다. 위룽쉐산은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萬年雪)로 덮여 있고 희귀한 식물이 많아 중국의 빙하박물관 또는 식물왕국이라 불린다. 부근에 위룽쉐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호수를 이룬 관광명소 헤이룽탄(黑龍潭)공원이 있다. 여강시내에서 32km 떨어진 여강의 서북부에 웅장하게 서 있기에 여강 시내에서 이곳 주봉을 잘 볼 수가 있다.

옥룡설산의 등산은 해발 2,700m 지점에 있는 옥호촌(玉湖村)이나 혹은 그 바로 옆 골짜기에 있는 옥주경천(玉柱擎天)에서 말을 타고 옛날 말거머리들이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넓은 초원인 마황패를 거쳐 해발 3,980m에 있는 화살제작용으로 안성마춤인 대나무들이 빼곡하니 있는 대숲인 전죽림(箭竹林)까지 오른다.마황패에서 보는 구름에 싸여 있는 옥룡설산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옥호천 마을에서 워더락(我多樂)까지 이어지는 구릉지 넓은 초원을 지나노라면 가히 세상을 다 얻은듯 기분이 좋아진다. 이어서 나타나는 옛날 메밀을 심었다는 메밀밭[芥麥地(3,100m)]과 마황패(3,500m)는 마치 구름 속의 넓은 초원인듯 하고, 이후 화산폭발시 발생하였던 유황독이 스며 있다는 毒谷(3,900m)을 거치면 전죽림(箭竹林(3,980m)이다. 전죽림에서 부터는 보도 듣도 못햇던 야생화와 이끼식물들이 푸른 초원을 이룬 가운데 죽어 나자빠진 고사목들이 고목의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황량해 보이지만, 그래도 그 사이로 야크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어 오히려 더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부터 회색의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유사파(流沙坡) 산중턱의 모랫길을 따라서 대암동[大岩洞(4,010m)]을 거쳐 말안장처럼 생간 안부인 루뻬이파[(라背坡는 말안장이라는 뜻으로 해발4,300m)]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구름 속에 가려있는 웅장하게 생긴 4,680봉이 나타나고 왼쪽으로는푸른 이끼가 마치 융단을 깔아놓은듯한 충초평[ 蟲草坪(4,500m)]과 푸른 이끼식물들이 눈바다를 이룬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녹설해[綠雪海(4,900m)]가 나타나는데, 꼭 외계의 행성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해발 표고가 높으니 날씨가 종잡을 수없을 만큼 변화무쌍해서 맑게 개였다가도 갑자기 팥만한 크기의 흰 우박이 쏟아지는데, 머리에 맞으니 따끔따끔할 정도로 아프다. 이곳에서 앞을 바라보면 전방 1km정도의 저 앞에 우리가 갈 수 있는 최고봉인 해발 5,100m높이의 망운봉(望雲峰)과 대협곡(大峽谷)이 우람하게 구름 속에 솟아 있다. 시커면 검은 비구름이 우리가 올라 온 대암동 부근에 걸쳐 있고 희박한 산소 때문에 이미 숨은 가빠오기 시작한다.

정상이 바로 앞에 보이니 안 갈 수가 없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빠오는 오는 숨을 헐떡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한다. 꼭 영화에서나 보았던 외계행성같은 회색의 검은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돌길을 지나면 대설계(大雪界)로 인간이 갈 수 있는 최정상인 망운봉[望雲峰. 大峽谷(5,100m)]이다. 정상에는 '망운봉(望雲峰). 대협곡(大峽谷), 5,100米(m)'라고 쓰여진 붉은 글씨가 선망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바로 앞에 만년설을 품에 안고 있는 부채를 활짝 편것같은 주봉인 5,596m높이의 선자두(扇子陡, 處女峰)가 바로 지척으로 보이고, 그 아래로는 깊이가 얼마인지 모를 거대한 회색 대협곡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뽀족한 석회암봉인 상의봉(尙義峰)이 구름 위로 우뚝 솟아 있고, 왼쪽으로는 천년설해(千年雪海)와 흑백설산9黑白雪山)이 손에 잡힐듯이 다가오는데, 양손으로 바위를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기증아 나면서 희박한 산소로 인하여 머리가 아파오고 어지럽다. 정상에 서니 비구름이 언제 그랬나는듯 그치고 바람도 조용하지만, 이 변덕스러운 날씨가 또 언제 바뀔지 몰라서 급하게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이곳은 분명코 인간 세계가 아니다.
어쩌면 회백색으로 빛나는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진 외계의 어느행성이리라. 사람과 식물이 살 수없는 땅, 그래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올라보지 못한 처녀봉으로 남아 있으리라.

1980년대부터 인간들은 무수히도 이 산을 정복하고자 올랐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귀한 목숨만 잃고 말았다. 특히 1983년 중.일 합작 등반대 17명이 이 처녀봉을 탐험하고자 올랐지만 불행히도 17명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기에 현재도 나시족들이 신성시하는 성산으로 남아 있다. 이들이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쉽게 부스러지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부스러지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칼끝처럼 뽀족한 봉우리는 인간이 오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른다. 쉽게 부스러지는 바위산 봉우리 어디를 어떻게 잡고 오를 것인가? 이같은 연유로 옥녀(玉女)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처녀로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일평생 한 번 볼까 말까한 쌍무지개를 그것도 만년설산에 걸린 쌍무지개를 운좋게도 봤다.>






<옥룡설산 등반중 이끼가 마치 눈의 바다처럼 깔려 있는 해발 4,900m 고지에 있는 녹설해(綠雪海)는 꼭 외계의 행성

같았다. 등뒤로보이는 산이 흑백설산이고 그 뒤가 바로 옥령설산 최고봉인 해발 5,596m의 선자두다.>












3.여강고성(麗江古城)

1929년 조셉 록(Joseph Rock)이라는 한 미국인이 이상향을 찾아서 중국으로 숨어든다. 미국의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그는 1956년까지 27년간을 옥룡설산 밑에서 나시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수 많은 사진과 글을 남긴 후 1969년 하와이서 죽었는데, 그의 머리카락을 옥룡설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는 이 은둔의 땅을 외부에 소개하여 우리들에게 알렸다는 공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시족 고서들과 식물자원들을 외부로 많이 반출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현재도 옥룡설산을 등반하는 입구인 옥호촌에는 그가 살았던 고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 우리를 태우고 간 마부 중에는 서양인 혼혈아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의 후손인지는 알 수 가 없다.

이 땅이 서양인들에게 샹그릴라(香格里拉, Sangri - la)로 알려지면서 지명도 샹그릴라로 불리워지게 된 계기는 1933년에 제임스 휠튼(James Hilton, 1900.9.9 ~ 1954.12.20)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기인한다고 한다. 제임스 휠튼은 조셉 록의 사진과 글을 참고하면서 자기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 소설을 썼는데, 이것이 꿈의 이상향인 샹그릴라의 전설이 된 것이다.

특히 《잃어버린 지평선》은 1930년대 최초로 만들어진 〈포켓 북스(Pocket Books) 시리즈〉의 한 권으로 페이퍼백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잡지 〈내셔널 지오그라픽〉(National Geographic Magazine)에 실린 조셉 록(Joseph Rock,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인 생물학자, 중국 남서부 지방과 티벳 구경을 탐사하였다)의 기사에서 착상을 얻었다.

티벳어로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란 뜻을 가진 샹그릴라는 도연명의 무릉도원이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상상 속의 땅으로 평생 늙지않고 영원한 청춘을 누리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이상향인바, 장족언어로 '푸른 달빛의 골쩌기'라는 상상 속의 낙원을 뜻하는데, 현재는 일반적인 이상향을 나타내는 보통명사화되었으며, 실제로는 운남성 쭝띠엔(中甸)현의 대협곡 명칭이기도 하다. 1997년 중국 정부는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중전이 샹그릴라라고 공식 발표하였으며 2001년 중전을 샹그릴라로 개명했다.










리장 고대마을 [麗江古城(려강고성), The Old Town of Lijiang]은

중국 윈난성 동북부에 있는 곳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다. 평탄하지 않은 지역이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에 완벽하게 적응하였다. 상업과 전략적 요충지로 몇 세기에 걸쳐 여러 지역으로부터 받아드린 건축학적 요소들을 잘 융합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소재지 Lijiang's old town (including the Dayan old town, Basha housing cluster and Shuhe housing cluster)





운남성(雲南省) 동북부의 해발 2,400m의 높은 고지에 있는 여강은 지리적으로 금사강이 휘돌아 나가는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해서 원나라 때부터 여강(麗江)이라고 불리워졌는 바, 이곳은 고성(古城), 노성(老城), 신성(新城)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운데 고성은 수허고진(束河古鎭), 백하고진, 대연고진(大硏古鎭) 등 세곳의 고성이 있는 바, 수허고진은 차마고도를 왕래하였던 상인들의 시발지였기에 따옌쩐(大硏鎭)을 통상 여강고성이라고 한다. 이 고성들은 송나라 때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현재 1,000여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고성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옛 거리를 재현해 놓은 금리거리로 리장(麗江)을 끼고 위룽쉐산(玉龍雪山) 밑 해발 2,400m에 있다. 전체면적은 7.43㎢로 인구는 약 30만명이며, 이 가운데 소수민족인 나시족이 전체인구의 약 58%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노성은 여강 주민들의 생활구역과 상업지역을 말하며, 신성은 고성 밖 외곽지역을 가리킨다. 신성은 새롭게 개발이 이루어자고 있는 지역으로 고성과는 달리 현대화된 건축물과 도로시설을 갖추고 있어 고성과는 뚜렸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고성이라고 해서 흔히들 우리나라의 남한산성과 같은 외곽을 두른 성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여강고성에는 별다른 외부의 성곽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시족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지은 여강고성은 천년고성(千年古城)으로 1997년 12월 4일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유럽의 고성들과는 달리 여강고성은 나시족 전통의 기와지붕, 각력암(五花石)이라는 돌로 만든 바닥,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164개의 좁은 골목길과 354개의 크고 작은 수로와 다리, 노천카페와 Bar, 나시족 전통 수공예품점과 은세공품점 등이 수로를 따라서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다. 동서남북 어디로나 통해 있는 작은 길을 통해 고성을 둘러 볼 수 잇는데, 통상적으로는 2개의 풍차와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알리는 붉은 기념건축물과 그 당시 당주석이였던 강택민이 '세계문화유산여강고성'이라고 쓴 기념벽이 있는 곳에서 부터 여강고성, 정확히는 대연고진 관광을 시작하게 된다. 이곳의 면적은 3.8㎢로 현재 3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1997년 12월 4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붉은색 기념건축물의 왼쪽 상단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런 소개글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한쪽벽을 장식하고 있는 알록 달록한 그림들이다. 그림이라고는 했지만 실상 이는 현지 나시족들이 사용해왔던 전통문자인 동파문자로서 이곳 사람들에 의해서 식자벽이라고 불리운다.가만히 살펴보고 있노라면 절로 그 뜻을 짐작해 낼 수 있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는 현존하는 유일한 상형문자로서 이 또한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여강지역은 고원 계절풍 날씨로 여름에는 너무 덥지 않고 겨울에는 많이 춥지 않다. 일년 평균기온은 12.6도에 년간 강우량은 950mm이다.

리장고대마을의 지리적 위치는 독특하다. 산과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서북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고 동남쪽의 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마을 북쪽의 샹산(象山; 상산) 아래에 있는 흑룡담에서 수정같이 맑은 강물이 3개로 나누어져 마을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 강물은 마을 전체로 흘러 들어 모든 집 앞에 강물이 흐른다. 이곳에 사는 나시(納西)족은 이 세줄기의 강물을 삼안정(三眼井)이라는 독특한 수로형태의 샘으로 흘러들게 하여서 가장 윗줄기는 마시는 물로, 중간에 있는 줄기는 밥하는 물로, 가장 아래에 있는 줄기는 빨랫물로 사용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옛적부터 자원절약의 묘미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총 300여 개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다리, 강물, 초록색의 나무, 오래 된 거리와 오래 된 집들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구성하고 있어 '동방의 베니스(Venice)'라고 불린다.



마을의 중심지역에는 사방으로 통하는 사각형의 큰 광장인 사방가(四方街)가 있는데, 나시족들이 모여서 춤추고 노래하는 소통의 광장인 이 시팡지에(四方街)는 명청(明淸)시대부터 서북의 차 상업무역의 요점이었다. 시팡지에의 길 바닥은 붉은색의 우화슬[五花石]로 되어 있어 비가 와도 발에 흙을 묻지 않고 돌의 무늬로 인해 거리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인다. 어찌나 정교하게 깔아 놓았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이 돌로 만든 판석은 마치 중세시대의 플로렌스나 베니스의 거리를 보는듯 하다. 이 사방가를 중심으로 하여 저녁이 되면 야경이 황홀하게 빛나고, 미로같은 거리에는 젊은 남녀와 관광객들로 불야성을 이루는데, 가가호호(家家戶戶) 상점 앞에 걸어놓은 홍등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 대연고진에서 유명한 카페는 이곳 카페의 효시라고 하는 부산출신의 한국인 김명애씨가 운영하는 '벚꽃마을 카페(사쿠라 카페)'라고 하는데, 이 카페는 '김명애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해지면서 년간 매출이 약 1억위엔(한화 190억원)이 이르고 있다고 한다. 목제로 만든 카페는 상당히 넓었는데, 맥주냄새와 곰팡이 냄새로 목이 싸한 이곳은 초기에는 일본인 단체들이, 이제는 한국인 단체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마을의 건물은 한족(漢族), 장족(藏族), 바이족[白族] 등 여러 민족의 민속을 융합한 나시족의 독특한 양식으로 형성되었다.



여강이 유명해진 것은 1996년에 발생했었던 강도 7도의 대지진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여강은 이 지진으로 인해서 전세계인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고, 이후 이웃한 샹그릴라와 더불어 각광을 받으면서 10년 만에 여강시내는 10배로 확장되면서 원주민들도 8만에서 13만명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의 특산물은 옥수수와 감자 및 백은(白銀)이기에 은세공기술이 뛰어나며, 주식은 옥수수와 감자다.














3. 흑룡담(黑龍潭)



여강의 북쪽에 있는 해발 5,596m의 옥룡설산의 만년 빙하가 녹아 흘러 내려와서 호수를 이룬 여강 북쪽의 작은 호수로 호수 바닥이 훤히 보일정도로 수정같이 맑은 물로 유명하다. 너무나 맑아서 물색이 짙은 비취색으로 보이고, 이 물이 흐르고 흘러서 여강 시내를 흐르는 섬섬옥수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여강 시내를 흐르는 물은 결국 옥룡설산의 만년빙하가 녹하흐른 물이니, 여강 시내를 흐르는 섬섬옥수 맑은 물의 발원지는 옥룔설산이라 할 수 있다.흑룡담 공원안에는 득월루(得月樓), 광벽루,용신사(龍神祠), 복국사오봉루(福國寺五鳳樓)같은 나시족의 오랜 건축물이 있고 호수 가운데는 3층짜리 멋진 누각이 있으며, 뒤로는 옥룡설산이 보이는데, 맑은 날이면 호수에 옥룡설산이 비쳐 환상적인 풍광을 만들어 낸다. 또 이곳은 나시족의 심장부이면서 동파문화의 발원지이고, 이 지역에 비가오지 않을 경우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그래서 호수가의 코끼리산 중앙에 있는 용신사에는 흑룡담에 살았다는 검은 용왕인 흑룡왕상(黑龍王像)을 모시고 있을뿐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유일한 상형문자인 동파문자(東巴文字)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동파문화연구소가 흑룡담 우측 코끼리산 기숡에 있다.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인 동파문화는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유일의 상형문자인 동파를 사용했는데, 지금도 그 습성이 남아 있어 여강고성 곳곳에 쓰여 있고 또 수허고진(束河古鎭), 백사고진, 대연고진 등 세 곳의 여강 고성 중 가장 번화하고 큰 대연진(大硏鎭)고성 시자벽(猜字壁)에는 알록 달록한 천연색으로 벽면을 장식하면서 잘 쓰여져 있기도 하다.



가만히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 뜻을 짐작해 낼 수 있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는 현존하는 유일한 상형문자로서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동파문자는 원래 대개의 소수민족문자가 그렇듯 제사같은 의식용으로 주로 쓰였기에 문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등 극히 일부인 경우가 대부분인 바, 동파문자 역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이 나시족(納西族)의 발원지이자 심장부였기에 흑룡담의 중앙에 지어져 있는 복국사오봉루(福國寺五鳳樓)에는 나시족이 어러움에 처해 있을 때마다 하늘에서 나타나서 나시족을 구원해 준다는 흰투구를 쓰고 흰옷을 입고 붉은망토를 걸친체 흰말을 타고 하얀 창을 든 나시족의 신장(神將)인 삼도신상[三도神像: 나시족 말로 삼도는 '수호(守護)'라는 의미라고 한다]이 모셔져 있으며, 누각(樓閣)의 팔각지붕과 추녀가 모두 봉황새를 형상화하여 마치 새가 날아가는듯 하게 지어져 있다. 또 모계(母係)사회를 반영해서 제일 위 추녀끝에는 여성을 상징하는 봉황을, 그 아래 처마끝에는 남성을 상징하는 용을 새겨둠으로써 여성이 남성 위에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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